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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 세계)

카지모도 2021. 11. 1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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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 세계>

 

 

명문에서 고아로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툴라 시에서 15킬로미터쯤 남쪽으로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쪽은 유서 깊은 백작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더욱 명문가로 알려져 있는 브로콘스키 공작 집안의 출신이었다. 톨스토이에겐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 등 세 형제가 있었고, 또 그가 두 살 때 여동생 마리아가 태어났다.

그런데 소년기의 톨스토이는 잇따른 육친의 죽음으로 슬픈 현실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맨 처음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여동생 마리아의 난산으로 끝내 어머니는 숨지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먼 친척인 타치야나 에르골리스카야 부인이 그를 보살펴 주었으므로,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홉 살 나던 해 아버지가 사업 관계로 여행을 떠났다가 목적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자녀들의 양육을 맡았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 무렵 가족들 모두 모스크바에 가 있었으나, 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망하는 바람에 두형만 숙모네 집에 맡겨지고 어린 동생 셋은 에르골리스카야에게 이끌려 시골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 후 숙모가 사망하자 다섯 아이들은 카잔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1844년 톨스토이는 형들이 다니고 있던 카잔 대학의 동양어과에 입학했다. 16세라고는 하지만 대학생이 된 그는 사교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야회, 아마추어 연극 등에 매료되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학년말 시험에 낙제하여 법과로 옮겼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전히 태만하여 수업 시간에도 제대로 출석하지 않아, 결국은 큰형 니콜라이가 졸업할 때 중퇴하고는 고향 야스나야 폴라냐로 돌아오고 만다.

시골에 돌아온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한 것은 농사 개혁이었다. 농노제 아래 농민들은 극도로 가난하여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로서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19세기 초 지식 청년들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톨스토이의 개혁 의식은 농노제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가 실제로 날마다 부딪치는 농민은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또한 개혁을 받아들일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농사 개혁의 이상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 같은 실패와 이에 다른 자기 혐오는 반동적으로 그를 방탕의 세계로 몰고 갔다. 1848년부터 1851년에 걸친 3년 동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밑바닥부터 허우적거린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술과 도박에 빠지는 날이 매일 계속되었다. 이렇듯 자포 자기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며 관리가 될까, 근위 기병을 지원할까 하고 방황하던 것은 이 무렵이었다.

청춘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 준 사람은 큰형 니콜라이였다. 코카서스의 포병대에 근무하던 형이 휴가차 고향에 왔다가 귀대하면서 톨스토이를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관 후보생으로 코카서스를 향해 떠났다. 강렬한 자극이 난무하는 도시에서의 밤 생활에 빠졌던 그에게 코카서스의 아름다운 자연은 진정제 구실을 해주었다. 코카서스에서의 조용한 생활은 이윽고 '습격(1853)', '산림 도벌(1855), '카자흐(1863)' 등의 여러 작품을 낳게 했다. 당시의 톨스토이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853년 터키와 러시아 간에 야기되어 1856년까지 계속된 크림 전쟁에 톨스토이는 장교로서 참전했다. 군인으로서 애국적이었던 그는 싸움터의 중심인 세바스토폴리에 자진 출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한 활약상을 보였다. 1855년부터 1856년에 걸쳐'현대인'에 실린 '세바스토폴리 이야기'는 이 때 그가 직접 체험한 전쟁의 비참함과 비인도성을 힘찬 필치로 묘사한 작품으로서, 그의 이름이 문단에 널리 알려지게 한 출세작이 되기도 했다. 1855년 군대에서 나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의 그는 이미 눈부신 앞날이 약속된 새로운 젊은 작가로 변신해 있었다.

문단 생활과 외유 : '현대인'이라는 잡지의 동인들은 이 신진 작가를 환영했다. 주간 네크라소프를 비롯하여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그리고 로비치 등 선배 작가, 시인, 극자가들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문단 생활에 뛰어들어 이들 문학가들과 교류하게 됨에 따라 톨스토이는 점점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파고드는 톨스토이로서는 그들의 생활 방식은 모순과 타협으로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거침없이 비평을 토로하는 이 신인의 오만성에 대해 선배 작가들도 점점 반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문단에도 환멸을 느낀 톨스토이는 유럽여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1857년 1월 파리를 향해 떠났다. 반년 동안 파리, 취리히, 제네바, 프랑크프르트, 베를린 등지를 여행하고 8월에 귀국했는데, 이 여행 중에 그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유럽 여행의 동기 중에 하나는 서구의 훌륭한 문명 생활을 견학하려는 데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그 여행 초기에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합법적으로 끊는다고 하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를 목격했던 것이다. 그 결과 톨스토이는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실제로 유럽을 둘러본 톨스토이는 문명이란 진보될수록 오히려 인간 생활을 비뚤어지게 하며, 인간의 영혼을 헤친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작품 '류체른', '알리베르트', '청년 시절(1857), '세 죽음', '가정의 행복(1859)' 등에서는 이미 완숙된 경지에 이른 예술가 톨스토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는데, 당시의 일기에서는 자기 희생이나 사명감 등의 낱말이 자주 눈에 띈다.

유럽에서 돌아온 그는 글을 쓰는 한편, 농민 계몽과 교육을 위해 농민 학교를 개설한다. 대학을 중퇴한 뒤 야스나야 폴라냐에 돌아왔을 때에 한번 시도했다가 실패했었지만, 이번 경우도 성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교육의 열의는 있어도 학교 제도와 교육 이론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 시찰을 위해 유럽 여행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이 무렵, 큰형 니콜라이는 결핵 환자로서 독일의 소덴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형을 문병할 겸 1860년 8월 독일로 떠났다. 그러나 형의 병세는 이미 문병을 받을 정도의 단계가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환자를 프라크푸르트로, 그리고 또 지중해 연안으로 옮겨가게 하여 진심으로 회복되기를 빌었으나, 그 보람도 없이 그 해 9월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눈앞에서 시시각각으로 꺼져 가고 있는 것을 직시한다는 것은 무서운 고통있었다.

형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톨스토이는 마음의 안정을 취하면서 예정대로 여행길에 올라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초등 교육의 실상을 시찰한 후, 농노 해방의 해인 1861년 귀국했다. 야스나야 폴라냐에 돌아온 그는 교육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면서 '국민 교육론(1862)' 등과 같은 교육 논문을 쓰기도 하는 한편, 농민의 자질을 위한 본격적인 정식 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교육 방침은 철저한 자유방임주의였다. 갖가지 개성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일정한 학과를 강제로 주입시키는 방침은 전제 정치 아래의 러시아에서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1862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건강을 해친 톨스토이가 사마라에 요양을 떠난 동안 헌병들이 그의 집을 수색했을 정도였다.

결혼과 예술적 완성 : 헌병이 가택을 수색하기 전부터 그는 자신의 교육활동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에 관해 명확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데다가, 무엇을 가르쳐야 좋을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남을 가르치고 있다는 자기 비판이 싹트기 시작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일종의 허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혼미에 빠진 이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신부는 오래 전부터 친지인 궁중 의사 베르스이의 딸 소피야였다. 1862년 톨스토이의 나이 34세, 소피야는 18세였다.

신혼 생활은 밀월이라는 말 그대로 달콤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결혼 후의 그는 예술적으로도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었다.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1864~69)는 감미로운 행복 속에 쓰여지기 시작하여 5년 후에 완성되었다. 작가 자신이 스스로 "일리아드와 비견할 만한 작품"이라고 말한 이 대장편은 말할 것도 없이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그린 민족적 대서사시이며, 작자의 당시 생활 환경으로부터 우러난 힘찬 낙천주의가 전편에 걸쳐 넘치고 있다. 톹르토이의 민족의 운명을 건 이역사적인 대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자신의 조상인 톨스토이가와 볼콘스키가를 모델로 삼고 있다. 즉, 로스토프가와 볼콘스키가라는 두 귀족의 가정을 설정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냉정한 회의가인 안드레이와 소박하고 성실한 공상가인 피에르에게 위탁하여,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의 생활과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러시아에 존재하는 두 계급, 즉 귀족과 민중의 특징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나폴레온 전쟁 때라고 생각한 톨스토이는 이 작품 속에서 이 두 계급의 생활을, 어떤 때는 직면하여 발휘된 민중의 무한할 정도의 힘과,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소박한 신앙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의 원인은 우리들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한 톨스토이도, 민족의 위기에서 러시아를 구한 것이 바로 민중의 힘이라는 믿음은 의심하지 않았다. '전쟁과 평화'는 그러한 그의 신념에서 쓰여진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이자, 세계문학의 대표적인 걸작이기도 했다.

이 무렵, 즉 1870년대 초부터 톨스토이는 다시 교육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코카서스의 포로', '신은 진리를 보신다(1872)'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또 표트르 1세와 그 시대를 다룬 장편(미완성)을 구상하기도 했다. 마침내 1873년부터는 두 번째 장편인 회심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1873~77)'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아름다운 유뷰녀인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와의 뜨거운 불륜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작자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지주 레윈과 순진한 소녀 키티와의 평화로운 결혼에 이르는 조용한 사랑을 이에 대치시킴으로써, 지고의 도덕률은 변함이 없고, 이것을 저버리는 그 죄인을 심판하는 자는 신밖에 없다고 하는 종교적인 사상을 제시한 것이다.

사색의 미로에서 번민한 톨스토이는 마침내 신을 느끼고 신을 갈구하고 있는 경우에만 삶의 충실감과 소생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그 순간에는 진실로 보람있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듯하였으나, 그러다가도 신의 존재에 대한 의혹을 느끼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곤 하였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다. 신을 아는 일과 사는 일은 하나인 것이다. 신이 바로 삶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민중 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신앙이라는 점을 실감하기에 이른다. "모든 인간은 신의 의지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사명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다.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신의 의지를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인생의 쾌락을 거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화평하게 살고, 인내하며 자비심이 깊은 인간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주창한 소박한 민중론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결론에 따라 그는 교회를 위선의 전장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신은 하나뿐일진대 교회는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있을 분 아니라, 국가에 종속하여 폭력, 강제, 형벌, 전쟁 등을 긍정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기성 종교와 결별하고 자기 자신의 종교를 창출했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의 산상수훈인 '화내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맹세하지 마라, 악에 항거하지 마라, 싸우지 마라.' 라는 다섯 가지 계율에 입각한,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원시 기독교였다.

이것이 이른바 톨스토이주의다. 무위 도식을 일삼는 특권 계급과 폭력을 그 기초로 삼는 국가, 물질 만능과 타락한 기성 종교 등을 부정하고, 폭력, 강제, 기만 등의 근절을 역설한 톨스토이가 이상으로 내세운 것은 사랑과 근로와 자기 희생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도달하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으며, 그가 이런 믿음에 도달하기가지의 일은 '참회(188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발견한 복음서의 진리를 널리 일반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는 언어와 문체로 예술성이 풍부한 많은 동화와 민화를 썼다. '사람은 무엇을 사는가(1881)',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불을 소홀하게 다루면', '두 늙은이', '바보 이반(1885)'등이 중요한 작품이다.

'참회' 이후의 예술 활동, 1877년에 '안나 카레니나'의 제8편이 발표된 뒤, 톨스토이는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이미 종교가, 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긴 투르게네프가 1883년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 "예술 세계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런 톨스토이가 9년만에 발표한 것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희곡'어둠의 힘'이었다. 이 때까지도 그는 자주 죽음의 공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 왔으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종교적인 철학을 제시한 수작이며, '어둠의 힘'은 분란한 성도덕을 정면으로 파헤친 작품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활'임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부활'은 그의 만년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견줄 만한 걸작이다. 청년 귀족 네플류도프와 윤락녀 카추샤의 애정의 역정을 주제로 한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사상을 풍부한 예술성과 곁들여 남김없이 전해 주면서, 교회와 재판과 교도소 제도 등에 대한 그의 분노를 정면으로 터뜨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 정교의 교회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는 이유로, 그는 1901년 종무성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분 아니라 정부 당국의 압력도 점점 노골적으로 가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꺾이지 않았다. 1904년 노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생각하라'라는 제목의 격렬한 글을 써서 전쟁 행위를 통렬하게 촉구했다. 이것은 발표가 금지되었으나 비밀 출판에 의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가출과 죽음 : 1910년 10월 28일 톨스토이는 별안간 가출을 했다. 그전에도 두세 번 가출을 작심한 끝에 실행에 옮기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인생의 스승으로 숭앙을 받고 있던 82세의 그가 가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내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의 존재가, 정신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 되었던 데 있었다. 처음엔 '안나 카레니나'의 레윈과 키티처럼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금실좋은 부부였으나, 만년에는 소피야의 신경질적인 언성을 날마다 듣게 되자, 톨스토이로서는 그것을 참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소피야로서는 '참회'를 발표한 이후 남편이 거의 종교적인 저술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10월 29일 이른 새벽 그는 '생애의 마지막 며칠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다.'는 뜻의 글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다. 그러나 이 가출은 그에게 '조용한 며칠'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도중에 그는 급성 폐렴에 걸려 랴잔우랄 철도의 역 아스포타포보의 역장 관사로 옮겨졌다. 기별을 듣고 가족과 제자와 친지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상태가 위중했고, 11월 7일 새벽에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틀 후 시신이 야스아야 폴라냐에 실려 왔을 때에는 위대한 문학가이며, 종교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부활'에 대하여 : 로망 롤랑은 이 소설에 관해 "다른 어떤 작품을 통해서 보다도 톨스토이의 영혼에 곧바로 도달하는 맑은 눈동자를 볼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 확실히 순수한 형태로 결정된 톨스토이의 사상과 만날 수 있다.

'부활'의 줄거리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엮어졌다. 1887년 톨스토이의 친지인 코니가 페테르부르크 지방 재판소의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절의 여죄수 로잘랴에 대해서 들려준 이야기다. 로잘랴는 핀란드인인 별장지기 딸인데, 신병이 있는 아버지와 함께 임대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죽음에 임박했음을 안 아버지는 딸이 고아가 될 것이 걱정스러워 별장 주인인 부유한 부인에게 보살펴 달라고 부탁을 하고서는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로잘랴를 맡아 양녀 겸 하녀로 부렸는데, 16세가 되었을 대 부인의 친척으로 대학을 갓 나온 청년에게 농락당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로잘랴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부인은 그녀를 내쫓는다. 청년에게조차 버림받은 로잘랴는 태어난 아기를 양육원에 보내고 매춘부로 전락한다. 게다가 어느 날 술취한 손님에게서 1백 루블을 훔쳐다가 체포되어 4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마침 이 재판에 그 청년이 배심원으로 참석했다가 그녀가 윤락녀가 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녀를 구제하기 위해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정진절 후로 정해졌다. 그러나 정진절이 끝날 무렵 로잘랴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숨지고 만다...

이런 이야기를 코니로부터 들은 톨스토이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곰 집에서 하녀를 유혹했다가 버린 적이 있고, 그 때문에 그 하녀는 일생을 망쳤던 어두운 추억이 있엇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코니에게 그 이야기를 작품이 되도록 써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88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그 이야기를 코니가 쓰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는 그 테마를 넘겨받아 자신이 직접 집필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코니 이야기'라는 제복이 붙여졌던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1888년 말경이었는데, 그 뒤 소설이 발표된 것이 1899년이었으나,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였다.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 쓰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글은 쉽사리 쓰여지지 않았다. 그 당시의 노트에 적힌 메모에 의하면, 네플류도프는 마지막에 파리에 가서 카드놀이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냈지만, 백발이 성성해짐에 따라 차츰 인생의 적막을 느낀다는 내용의 구상이었던 듯 싶다. 처음 톨스토이는 연대를 따라 사건을 전개해 나갈 작정이었으나, 설명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법정 장면으로부터 쓰기 시작해 보기도 하고, 배심원 회의를 첫머리에 가져가기도 했다. 그런데 1898년이 되자 아무래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

이보다 앞서 성령을 부정하는 두호보르 교도들 사이에 병역을 거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싸우지 마라'고 역설하는 톨스토이는 이런 사태에 몹시 가슴 아파했고, 그들 두호보르 교도의 국외 이주가 허용된 뒤에는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선두에 나서서 모금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금은 예상했던 만큼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그러자 톨스토이는 저작물에 대한 인세를 받지 않는다는 결의를 뒤엎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원고를 될 수 있는대로 유리한 조건으로 출판사에 팔아 그 인세를 두호보르 교도의 이민 자금에 충당하기로 했다. 그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언고는 '신부 세르게이', '부활' 등 3편이었다. 그런데 거의 완성 단계에 가까웠던 '부활'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고쳐쓰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그리하여 1898년 말에는 현재의 '부활'에 가까운 원고가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교도소 안의 교회 장면이나 정치범과 분리파 교도들의 묘사는 아직 없었고, 베라 보고두호프스카야라거나 셀레닌 등과 같은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1년 동안에 걸친 교정 단계에서 가필된 것이다. 이렇듯 '부활'의 출판에는 톨스토이의 존엄한 인도적인 정신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부활'의 주제 : 부활은 몇 가지 테마를 지닌 소설이다. 네플류도프의 토지 사유권의 포기도 그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톨스토이가 헨리 조지의 토지 국유론을 알게 된 것은 1885년, 그가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논문을 쓴 뒤의 일이다. 그는 이 사상에 깊이 공명하여 1895년에는 딸 타치야나의 토지를, 네플류도프가 바노브 마을에서 한 것과 마찬가지로 헨리 조지의 이론에 따라 농민들에게 빌려 주고, 그 임대료는 공익 사업에 쓰도록 조치해 놓았을 정도였다.

또 재판과 형벌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자유로운 생활과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국가 권력의 폭력과, 무의미한 형식만 고수하여 근본 사상을 망각해 버린 교회에 대한 비판 역시 이 소설의 중요한 테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어 있는 주제는 '심판하지 마라.'는 사상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항상 끝없이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톨스토이가 강조하고 싶은 사상이었다. 이것을 인색했을 대 네플류도프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다섯 가지 계율을 충실하게 지킨 뒤에 찾아오는 사랑과 행복의 이상적인 낙원으로의 전망이었다.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사상과 이상이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로 여겨질는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고 방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상을 현대라고 하는 시대에 비추어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현대처럼 인류가 파멸의 위험성에 끊임없이 직면하는 시대야말로, 우리는 또 한 번 톨스토이적인, 순수하고 소박하면서도 그 이상의 진리를 찾을 수 없는 사상을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톨스토이의 정치적, 철학적 저작 활동을 간추려 살펴보면 1905년 러시아에 제 1차 혁명이 일어나, 동맹 파업과 농민 폭풍, 유혈 사태까지 빚은 격돌, 그리고 이에 따른 탄압, 체포, 투옥, 사형 등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를 목격한 그는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폭력의 율법'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또 다시 "악으로서 악에 보답해서는 안된다"고 외쳤다.

이에 따라 종교 단체와 톨스토이의 신봉자는 늘어나기만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1일 1선'과 최후의 저서 '인생의 길'을 통해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 맺어지는 세계를 하루속히 이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톨스토이는, 사랑을 인간이 성취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생각했다. 대문호이면서 위대한 사상가요 종교가인 그의 모든 면모가 배어 있는 작품 '부활'은 톨스토이가 노년을 불사른 불꽃으로서, 숭고한 인간애를 담은 불후의 명작으로 세계 문학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작가 연보

톨스토이

1828년 8월 28일 톨스토이 백작의 4남으로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출생. 부친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퇴역 육군 중령.

1830년 2세 누이동생을 분만하다가 모친 사망.

1837년 9세 아버지가 노상에서 졸도, 사망. 숙모 오스틴 사켄 부인이 고아가 된 5남매의 후견인이 됨.

1840년 12세 현존하는 최초의 시 '어지신 숙모님에게'를 씀.

1841년 13세 후견인이던 오스틴 사켄 부인 사망.

1844년 16세 카잔 대학 동양어과에 입학. 아랍, 터키어 전공.

1845년 17세 4월 12일, 카잔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장을 경영.

1848년 20세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학사의 칭호를 받음.

1851년 23세 '지나간 이야기'집필. 5월, 큰형이 재직하고 있는 코카서스 포병대에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

1852년 24세 처녀작 '유년시절'을 '현대인'에 발표하여 재능을 인정 받음. 단편 '침입'탈고 1853년 25세 1월, 체체네츠인 토벌에 참가. 4월, 단편 '크리스마스의 밤'탈고. 5월, '소년 시절'집필.

1854년 26세 1월, 장교로 승진. '소년 시절'발표.

1855년 27세 3월, 장편 '청년 시저'집필. 11월, 전령 장교로서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네크라소프, 트르게네프 등 잡지 '현대인' 동인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음.

1859년 31세 농민의 자제를 위해 고향에 농민 학교를 세움. '세 죽음', '가정의 행복' 집필.

1862년 34세 교육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 궁정의의 차녀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꿈', '목가' 출판.

1864년 36세 '전쟁과 평화' 집필 시작. '톨스토이의 저작집' 출판.

1865년 37세 '전쟁과 평화' 첫머리를 '러시아 소식'지에 게재.

1869년 41세 '전쟁과 평화' 완결 출판.

1871년 43세 '초등 독본'호 집필 시작.

1872년 44세 '초등 독본' 소설 '코카서스의 포로', '표트르 1세', '신인은 진리를 보신다.' 발표.

1879년 51세 '참회',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지 마라', '교회와 국가'를 발표하였으나 발매 금지됨.

1884년 56세 '나의 신앙' 발표. '광인 일기' 집필.

1886년 58세 '인생론'집필. 희곡 '어둠의 힘' 3일간에 25만 부가 팔림. '이반 일리치의 죽음'

출판.

1887년 59세 '역' 간행. '어둠의 힘' 저작권을 포기. 9월 은혼식.

1889년 61세 '크로이체르 소나타' 탈고. '악마', '손의 노동과 지적 노동', '각성을 기울이다' 등 발표.

1890년 62세 재산을 분배. 20개이 주에 게근이 일어나자 농민 구제를 위해 맹활약. 전 저작권을 포기.

1899년 71세 '부활'을 발표하여 주목을 끔. '사랑의 요구', 어느 하사관에게 주는 글'을 발표.

1901년 73세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당함. 크리미아에 갔다가 티푸스와 폐렴에 걸려 중태에 빠짐.

1903년 75세 1월, '유년 시절의 추억' 집필 시작. '성현의 사상' 편찬에 착수. 단편 '모도회의 밤' 탈고.

1908년 80세 탄생 80년 기념 톨스토이 박람회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림. '세상에 죄인 없다', '사형과 크리스트교', '유일한 규칙', '꿈' 등을 발표.

1910년 10월 28일 아내에게 최후의 쪽지를 남겨 놓고 딸 알렉산드라와 의사를 데리고 가출. 11월 7일 오전 6시에 82세를 일기로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