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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카지모도 2022. 5. 22.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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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추천의 말>

신수정(문학 평론가)

 

일상을 견디는 방법, 삶의 미학화

'삶에 대한 여유'와 '소년다운 장난기'가 묻어나는 하루키식 인생미학이 작품은 '작가 하루키' 이전의 '인간 하루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매력적인 에세이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미학'을 발견, 새로운 형태의 '행복'을 창조할 줄 아는 하루키만의 고유한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작가' 이전의 '인간' 하루키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이미 이 고유명사는 한 사람의 일본 작가를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보통명사로 굳어 버린 감이 없지 않다. [상실의 시대]를 비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태엽 감는 새]에 이르기까지 하루키가 우리 문단에 미친 영향은 단지 엄청난 판매 부수와 그에 따른 대중적 인지도에만 있지 않다.

90년대 들어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대다수의 신세대 작가들을 비롯 나름대로의 문학적 개성을 발휘하고 있는 중견 작가들까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루키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는 이미 문학적 스캔들이나 한순간의 유행 사조를 넘어 고유한 형태의 정신 세계를 표상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90년대 우리 문학의 가벼움과 경박함의 원인을 하루키 문학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러한 문제 제기는 과연 하루키 문학이 가볍고 경박하기만 한 것이냐 하는 문제를 차지하고서라도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그의 문학이 90년대 우리 문학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 하루키 문학에 나타나는 재치나 위트 혹은 6~70년대 미국 록음악이나 대중 소설에 대한 애호 등 발랄한 문장과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은 이제까지 그의 문학에 대한 풍문을 확대하는 데 기여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국적성'이라든가 '가벼움의 미학'이라는 말로 지칭되는 하루키 문학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들은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외면적인 직접성에만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하루키 문학의 외면적인 가벼움은 어쩌면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존재의 무거움을 견뎌내려는 지난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이미 말하고 있듯이, 하루키 문학의 과제는 환멸로 가득찬 이 세계 속에서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추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키 수필의 즐거움-창작의 뒤안을 훔쳐보는 잔재미 선사 

 

하루키의 수필을 읽는 것은 대단히 즐겁다. 이미 [슬픈 외국어]와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바 있는 하루키의 수필 세계는 그의 소설과는 또 다른 새로운 맛을 준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장치 속에서 아무래도 찾아보기가 힘든 하루키의 인간적인 면모가 우감 없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쓴 대개의 수필이 그러하듯 하루키의 수필 역시 창작의 뒤안을 훔쳐보는 잔재미를 선사한다. 이를테면, 하루키와 친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서부터 그가 응원하는 프로 야구 구단에 이르기까지 작가를 둘러싼 일상적인 삶의 마디들이 수필 속에서 실물 크기로 우리에게 육박해온다.

특히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자신의 문학관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는 이전의 수필집들과 달리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인의로서의 하루키의 면모를 부각시켜줌으로써, 작가 하루키 이전의 인간 하루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기능을 한다.

 

'일상의 미학화'를 천성적으로 깨우친 작가 하루키

 

이 에세이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 하루키는 '일상의 미학화'를 천성적으로 깨우치고 있는 사람 같다. 어제와 동일한 오늘, 내일과 동일할 자본주의 세계의 일상은 기본적으로 반복과 관습에 의해 유지된다.

일정한 규율이나 리듬으로 체질화된 이 삶의 궤도는 사회적인 제도가 부여한 것이든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든 간에 타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의 형태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이런 세계에서의 삶이란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

대도시 아파트의 밤을 밝히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위치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베란다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불빛의 위치가 전부 동일한 것을 보고 경악과 공포, 환멸과 공허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웃집에서 사용하는 냉장고를, 세탁기를, 주방용 세트를, 심지어 콘돔 기구를 사용할 뿐이다. 제 아무리 독창적이고 고유한 삶을 살고있다고 치부하더라도 그것은 환상일 따름이다.

하루키는 누구보다도 우리가 이러한 일상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루키라고 해서 왜 타인과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겠는가.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등으로 이어지는 잦은 여행은 이러한 욕망의 산물일 것이다.

 

동일 반복의 리듬을 즐기며 새로운 형태의 행복 창조

 

그러나 하루키는 그러한 욕망을 다스릴 줄 안다. 즉, 삶의 궤도나 일상의 그물을 완전히 이탈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채워나갈 줄 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는 매일매일 진행되는 자신의 일상 자체를 천천히 즐기면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리듬에 약간의 변화를 가미하여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행복을 창조할 줄 아는 것이다.

'삶의 미학화'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경향은 성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년다운 장난기'와 그로부터 배태되는 '삶에 대한 여유',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면 감행되는 '잦은 이사'를 통해 영위되고 있는 듯하다.

성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받기는커녕 무말랭이를 사와 직접 요리를 하고 있는 자신을 애처로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변형이 사실은 얼마나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인지 아느냐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도 초콜릿을 못받았다]라든가, 10월 초순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에 문예 잡지의 편집자와 둘이 야구 구장에 가서 자신의 소설을 교정하면서 야쿠르트 대 주니치의 일정 때우기 게임을 구경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행위]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세목들을 하루키식의 '미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예들이라고 할 만하다.

또 전철 패스를 잘 잊어버리는 자신의 버릇을 한탄하며 전철 패스를 잊어버리지 않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는 하루키는 얼마나 귀여운가. 장난기와 절제된 익살이 지겹고 짜증스러운 건망증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듯하다.

 

일상을 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하루키식 생활법

 

일상을 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하루키식의 생활법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작가와 유사한 양상을 선보인 바 있다. 이를테면,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의 경우, 얼핏 보면 절제된 금욕주이자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주말이면 빨래를 하고 주중에 학교 식당을 이용할 경우 각 요일마다 이용하는 식당을 정해두고 있으며, 절대 지나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것은 와타나베가 자신의 삶에 부과한 하나의 룰이었다.

이 룰을 지키는 것이 지겨울 수도 있다. 아니 분명 룰을 지킨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그러나 작고 가벼운 이 룰을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데서 이 막막한 일상의 그물 가운데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생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우리에게 이 작은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작품으로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역자의 말>

 

-김진욱(번역문학가)-

 

하루키 문학과 그 인간미의 합창

-하루키의 인간미 넘친 진면목을 가늠케 하는 삶과 행복의 찬가 

 

소설이라는 허구 속에서 다 하지 못한 솔직한 이야기 

 

분명 일본 작가지만 일본적인 것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범인류적인 주제를 다루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늘 인간적인 존재의 의미, 삶의 허무와 결핍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문학적 형상화로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상실의 시대]만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1,000만 부 이상이나 팔렸다고 하며, 국내에서도 이미 40만 부를 돌파해 장기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기발한 상상력과 표현기법은 우리나라 신세대 작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쳐 한동안 하루키 신드롬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하루키도 소설 양식만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말이 있는 듯, 종종 자신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를 에세이라는 그릇에 담아내곤 한다. 소설 작품 속에서는 좀처럼 엿볼 수 없는 사생활과 성격 등을 숨김없이 드러내 작가 이전에 인간 하루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루키의 인간적 진면목을 가늠케 하는 작품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바로 그와 같은 하루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수필집이다. 너무나 솔직해 때로는 엉뚱하기까지 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데, 천진난만한 그의 성품은 읽는이를 무척 유쾌하게 만든다.

표제작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한 부분을 보자.

나는 그 '언더팬츠' 모으기를(물론 남성용이지만) 꽤 좋아한다. 때때로 직접 백화점에 가서, '이것으로 할까, 저것으로 할까?' 하고 망설이면서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사기도 한다. 덕택에 옷장 서랍에는 상당히 많은 팬츠가 쌓여 있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이 얼마나 디테일한 고백인가. 팬츠 모으기를 좋아하고, 잘 정돈된 그것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는 그의 말에서, 독자들은 하루키 특유의 감성과 유머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개성은 [쌍둥이 걸 프렌드에 거는 내 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쌍둥이 여자 아이와 파티에 가고 싶다는 몽상을 하는 하루키. 하지만 곧 그는 고민에 빠진다. 데이트 비용이 두 배로 드는 것은 물론, 자동차에 태울 때도 누구는 옆에 타우고 누구는 뒤에 태울 수 없어 두 사람 모두 뒷자석에 앉히게 돼 흥이 싹 가셔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그래도 하루키는 쌍둥이 걸 프렌드를 갖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남몰래 가지고 있는 분별성을 느끼는 자신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백일몽인 것이다.

너무나 소박하면서도 비범한 연애 감정. 하루키는 스스로 육체적인 영역에까지 상상력을 발동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쌍둥이 걸 프렌드와 파티에 가고 싶을 뿐이다. 그건 왠지 특별한 일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뿐이다.

 

하루키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작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길... 

 

하루키는 그런 사람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순수함,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냉철한 직관력이 오늘의 '하루키'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매 꼭지마다 단순하면서도 전체적인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그림을 곁들여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나 역시 이 책을 번역하면서도 무엇보다 하루키의 문체를 살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단순 직역이나 우리말 식 표현을 무조건 적용하기보다는 미묘한 뉘앙스까지 헤아려 하루키의 체취를 더욱 짙게 느끼도록 했다는 말이다. 가끔씩 드러나는 돌발적인 어투의 변화와 빈번한 외래어 사용등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이다.

또 이 책은 그 동안 발간된 그의 수필집 중 재미있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골라 엮은 책으로, 발간 연도에 따라 하루키의 연령이나 주위 상황이 다르게 표현 될 수 있다는 점을 참조해주기 바란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하루키와 하루키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작지만 확실한 도움'이 돠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을 끝내고 나서 2년여 동안 여러 출판사에 출간을 의뢰했지만 선뜻 나서는 곳이 없어 어쩌면 휴지통의 쓰레기가 돼버렸을지도 모를 이 원고를 출판케 해준 [문학사상사]에 감사드린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1. 결혼식장도 일종의 공장인 까닭

 

<결혼식장이라는 이름의 공장>

 

나는 몇 개의 여러 가지 공장을 취재하고 탐방기 같은 걸 썼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식으로서는 여간해서 '공장'이라고 부를수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마쓰도에 있는 다마히메덴 같은 대형 결혼식장은 공장 아닌 공장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결혼식장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공장'은 아니다. 음식을 빼놓으면, 결혼식장은 무엇인가 형태가 있는 것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고, 벨트 컨베이어나 컴프레서가 굉음을 내면서 가동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지만 만일 당신이 결혼식장-특별히 '마쓰도 다마히메덴'일 필요는 없다. '호텔 오쿠라'에 있는 결혼식장이라도 구조적인 본질은 같다-에서 몇 쌍의 신혼 부부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져 나오는 과정을 자세히 바라볼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을 '공장'이라는 카테고리 속에 집어 넣는 것을 아마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장으로서의 결혼식장, 혹은 '결혼식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장의 원료는 말할 것까지도 없이 신랑과 신부라고 불리는 한쌍의 남녀이며, 그 기계적인 추진력은 전문적 노하우와 손에 익은 서비스이며, 중심적 부가가치는 감동(혹은 좀더 에누리해서 '정서의 고양')이며, 그 수요를 지탱하는 것은 세간 일반의 '관례,상식,습관'이다. 그렇게 해서 결혼식장에서는 오늘도 하나씩 하나씩 '세레모니(의식)'라고 하는 현란한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러한 '결혼식 공장'적 결혼식장의 현상을 결코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하여 아이러니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마쓰도 다마히메덴에 대하여 예스도 아니고, 노우도 아닌, 말하자면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 문장을 쓰고 있다.

'중립적인 입장'이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나 자신은 이 결혼식장에서 식을 올리지 않겠지만, 2.이 결혼식장의 존재 의의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말한다.

내가 마쓰도 다마히메덴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매우 개인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므로-요컨대, 나는 집회라는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한다- 마쓰도 다마히메덴에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 나는 비교적 고집이 센 사람이라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래서 나 자신은 처음에(라고 할까,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때도 식 같은 것은 올리지 않았고, 또다시 결혼을 한다고 해도(아하하!), 마쓰도...든 어디에서든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나도-편협된 성격을 가진 산양자리의 소설가도-결혼식 산업이 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다. 결혼식 산업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레모니를 필요로 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일종의 감동을 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식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참다운 감동이 아니다. 그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어서, 적당히 그 기능을 수행해 주는 파악이 가능한 감동인 것이다. 요컨대, 그것이 바로 세레모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입구가 있고 출구가 없는 감동도 있고, 출구가 있고 입구가 없는 감동도 있다. 사람들을 압도해버리는 감동도 있으며 남에게 오줌을 싸게 만드는 감동도-아마-있을 것이다. 그러나-구태여 말할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하지만-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 그러한 파악이 불가능한 종류의 감동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거기에서 압도적인 감동이 종종 발생해서 그때마다 참석자들이 바닥에 엎드려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신부가 웨딩드레스에 오줌을 흘리거나, 신부의 아버지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나이프로 신랑의 목을 잘라버리거나 한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감동은 결혼식장에는 불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식이라는 의식에서 감동도 하고 눈믈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 눈물은 일정 시간 안에 수습되도록 되어있다. 왜냐하면, 그 감동은 야구에 럭키 세븐이 있고, 햄샌드위치에 피클이 곁들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한 과정에 부수된 것이며, 결코 과정 자체를 능가하지 않도록 미리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적당하고 파악이 가능한' 감동이고,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금전으로 매매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아마 이러한 발언은 시니컬한 눈으로 '다마히메덴'(멋진 이름이다)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대신문의 엘리트 칼럼니스트가 빈틈없는 문장으로 '화려하고 연출이 과다한' 결혼식장을 놀려대는 냉소적인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만일 이러한 표현을 용서해 준다면 '서민')은 자신이 고하는 것을 스스로의 돈을 내고 손에 넣고 있다-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좀더 파고을어가면, 결혼식의 어디까지가 옳고, 어디서부터가 불필요한 것인가? 어디까지가 결혼식의 핵심이고, 어디서부터가 부속물인가? 어디까지가 우아하고, 어디서부터가 쓰레기란 말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그것을 판단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잘 모르기 때문에 판단을 회피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겠다.

 

<사례 연구>

 

신랑:스즈키 지카라(26세)

신부:누마쓰 미도리(23세)

 

스즈키는 지바 현 마쓰도 시 출신이고 부친은 마쓰도 역 앞에서 동물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 스즈키는 차남이고 친척들 대부분은 지바 현에 거주하고 있으며, 작은 아버지는 마쓰도 시의 시의원이다. 호세이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모일류 석유 회사에 취직, 영업부에 재직중이다. 월급은 약 28만엔. 현재는 본가 근처에 1 DK (주방 겸 식당이 딸린 방-역주) 맨션(집세 4만 8,000엔)을 얻어서 살고, 마루노우치까지 지요다선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취미는 음악 감상과 드라이브(자동차는 이스즈 제미니인데, 주말에는 대개 자동차를 타고 교외로 나간다. 음악은 아리스와 배리 매닐로우, 책은 추리소설 여배우는 이시하라 마리코를 좋아한다. 대학 시절에는 같은 서클의 후배 여학생과 사귀었으나, 졸업한 뒤에 헤어지고, 그 이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지바 시내에 있는 핑크 무드의 터키탕에 다녔다. 패션 헬스(야한 차림의 여종업원이 나오는 헬스 크럽-역주)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저금은 180만엔.

 

누마쓰 미도리. 시즈오카 현 야이즈 출신. 부모는 편의점을 경영하고 있다. 오빠 두 명을 가진 3남매로 큰오빠가 가업을 이어받고, 둘째 오빠는 후지 텔레비젼에 근무. 쇼와 여자 전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중견 광고 프로덕션에 취직했으나, 상사와의 인간 관계 떼문에 반년 만에 그만두고, 현재는 긴자에 있는 화랑에 근무하고 있다. 월급은 21만엔. 저축액은 230만엔(그중 150만 엔은 부모에 의한 적립금이다). 요요기 우에하라에 살고 있다. 구독하는 잡지는 [클래식],[앙앙],[다카포]. 처녀성 상실은 19세 때, 스키장에서 알게 된 게이오 대학생과. 그 뒤, 21세가 된 가을에 화랑에서 알게 된 39세의 유부남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반년 만에 헤어졌다.

 

이상과 같은 두 사람이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을 약속하고, 마쓰도의 '다마히메덴'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데까지 도달했으니, 세상은 재미있...지 않은가? 요컨대 흔히 있는 이야기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같은 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개중에는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야기의 본 줄거리와는 관계 없지만, 사태의 개략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스즈키 지카라가 누마쓰 미도리를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9월의 일이다. 지카라의 상사가 미도리가 근무하는 화랑에서 유화 그룹전을 열고 지카라는 그 접수를 돕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카라는 첫눈에 미도리가 마음에 들었다. 미도리는 키가 크고 스타일도 좋고 옷차림도 세련돼 보였다. 굉장한 미인은 아니지만 눈이 아름답고 이가 고르고 예쁘다.

미도리도 지카라가 싫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약간 땅딸막하고 넥타이의 무늬도 형편없었지만, 친절하고 진지해 보이고 그다지 웃기지 않는 농담을 하는 것도 귀여웠다.

이런 연유로 두 사람은 몇 번인가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고, 그러고 나서 요요기 우에하라에 있는 미도리의 맨션에서 첫 섹스를 했다. 12월 4일의 일이다.

결혼을 제의받았을 때 미도리는, '자아, 어떻게 한다?'하고 조금 망설였다. 지카라를 좋아하기도 하고 좋은 결혼 상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좀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게다가 지카라는 결코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석유 회사라는 것도 너무 박력이 없어서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미도리는 지카라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사귄 남자들 가운데서 지카라만큼 미도리를 편하게 해주는 남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상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좋아요"

하고 미도리는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지카라의 벌거벗은 가슴에 살며시 몸을 가져갔다(이런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꽤 곤란하다).

 

그리고 새해가 찾아왔다. 3월 31일, 흐린 일요일 오후, 지카라와 미도리는 마쓰도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마쓰도 다마히메덴'으로 향했다. 예식장 예약을 하러 가는 것이다. 

걸어가면서, "XXX에서 참 좋았어. 어젯밤 그 XXXX였기도 하고..."

"어머, 싫어요! 호호호, 당신도 XXX였는걸요."

식의 야릇한 대화가 오고간다. 길가의 소들도 젊은 두 사람의 모습을 신기한 듯이... 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마쓰도에는 소같은 것은 없다.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마쓰도 다마히메덴을 식장으로 선택한 것은 그곳이 지카라의 본가에서 가까워서 편리하기 때문이다. 도시 여성 취향인 미도리는, '도심의 호텔 쪽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으나 결국은 타협하기로 했다. 많은 현명한 여성들의 예에 따라, 그녀도 역시 위대한 현실주의자에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어서, 지카라가, "도심의 호텔이라는 것은 거의가 이름 값뿐이라고. 그런 허세를 부려보았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우리들은 연예인이 아니니까"라고 말했을 때, "그것도 그렇네요"하고 고분고분 따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앙앙]지에서 스타일리스트 일을 하고 있는 친한 친구로부터, "지금 '다마히메덴'의 변칙 스타일이 신세대들에게 대환영을 받고 있어"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재빠른 타협이 가능했던 원인 중 하나였다.

 

결혼식의 총예산은 약 250만 엔이라는 것이 두 삶의 속셈이었다. 신혼여행(하와이)까지 포함해서 300만 엔으로 끝내고 싶었다. 비용은 두 사람은 저축에서 지출하게 되겠지만, 그 가운데 절반은 축의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초대 손님은 약 80명, 10월의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희망이지만 과연 그날이 비어 있을까요?

결혼식의 예약 및 상담 코너는 마쓰도 다마히메덴의 지하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넓은 플로어에는 의상이니 답례품이니 음식의 견본이 빽빽이 진열되어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결혼 견본 시장'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식장을 예약한 손님은 여기서, '의상은 이것, 음식은 저것'하는 식으로 눈으로 직접 보고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대단히 편리한 시스템이며, 그리고 상담을 하러온 손님의 기분을 고양시키는 효과도 있다.

 

상담 카운터에서 지카라와 미도리의 상대를 해준 것은 아라키 씨라는 젊은 담당자였다. 곤색 블레이저 코트를 단정히 입고, 태도도 상냥하고 친절했다.

"응? 결혼하고 싶다고? 그런데 예산은 어느 정도냐?"하는 식으로는 절대로 안된다.

 

아라키:에-10월 12일 일요일이 희망하시는 날짜라고 하셨지요? 인원 수는 80명이고...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예정표를 체크한다) 네, 괜찮습니다. 가장 넓은 경운실이 비어있습니다."

지카라:아, 잘 됐네요. 10월의 일요일이고 대길일이라서 가망이 없을 줄 알았는데요.

아라키:다만 시간이 오전밖에 비어 있지 않아서요.열 시 반에 예식, 열한시 반부터 피로연이고 두 시간 반 만에 끝내야 하는데요.

지카라:그것도 괜찮지 않들까?

미도리:그래요, 할 수 없지요. 야이즈에서 오는 손님들은 힘이 들겠지만요.

지카라:어쩔 수 없지. 그럼, 그렇게 결정하겠습니다.

아라키:감사합니다.

 

10월 12일, 스즈키 가와 누마쓰 가, 양가의 결혼식을 '경운실'에서 거행하기로 하겠습니다.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조직적으로 진행되어진다. 우선 먼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날짜이다. 날짜와 피로연 초대객의 인원 수.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홀 예약도 할 수가 없고, 이야기는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첫상담은 길흉일 조견표를 한 손에 들고 진행하게 된다. 방이 정해지면 다음에는 예식에 대한 상의를 한다. 마쓰도 다마히메덴에는 신전식(일본의 전통 신앙인 신도식으로 하는 결혼식-역주)의 식장은 안에 있지만, 교회식과 불교식을 희망하는 사람은 밖에서 식을 끝내고 피로연장으로 돌아오게된다.

 

미도리:신전식으로 하면 되죠?

지카라:번거로우니까 신전식으로 해버립시다. 조로아스터교식은 없지요?

아라키:네?

지카라:아니, 농담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식도 결정되었다.

여기서 아라키 씨는 두 사람에게 일정표를 건네준다. 드디어 이야기가 세밀한 사항으로 진전되어가는 것이다. 우선 청첩장.

 

지카라:청첩장이라...청첩장은 대체로 모두 여기에서 해주는 겁니까?

아라키: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 쪽에서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집안에 인쇄 관계자가 계실 경우에는 별도지만,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 저희에게 맡기실지 아닐지에 대한 회답은 해주신다든가, 그런 수순이 있어서요...

지카라:집안에 인쇄관계자요?

미도리:우린 없는데요, 당신 쪽은요?

지카라: 우리도 없는것같은데.

 

그래서 청첩장제작은 다마히메젠에 의뢰했다. 청첩장을 만드는 것은 예식을 올리기 2개월 전이니까, 지세한 협의는 그때 하면 된다.그러고 나서 드디어 견적으로 들어간다.

 

아라키:우선, 음식 말인데요(하고 견본책을 뒤적인다), 이것은 일본식으로 6,000엔짜리입니다.

미도리:좀 초라하지 않을까요?

지카라:도미가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미도리: 조금 더 비싼 걸로...

아라키:그럼, 이쪽이 8,000엔짜리입니다.

지카라:거기도 도미가 없군요.

미고리:아. 여기 있어요, 도미가!

지카라:정말!도미가 있군.

아라키: 이것은 1만엔짜리 코스입니다.

지카라:그럼, 그정도 선으로...

미도리:우와, 이건 굉장하네요.

아라키:그것은 최고급 요리로 3만엔짜립니다.

미도리:게, 새우, 도미, 생선회...

지카라:이런 것까지는 필요 없어. 도미만 있으면 된다고.

아라키:그럼, 1만 엔짜리로 결정하시겠습니까?

지카라:정말로 도미가 나오는 거죠?

아라키:틀림없이 나옵니다.

 

이래서 음식은 결정되고, 내용은 도미의 꼬리머리가 붙은 것. 큰새우, 생선회, 튀김, 생선 구이, 조림 샐러드, 계란찜, 수프,엘론 등이다. 그러나 식사만 내놓으면 손님이 좋아할 리가 없다. 피로연과 꽃놀이에는 술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라끼:샴페인, 맥주, 정종, 주스, 아무것이나 실컷 드시고 1인당 1,600엔이 되겠습니다.

지카라:그러면 1,600엔이 80명이니까...

아라키:(계산기를 두들기고 나서) 12만 8,000엔입니다.

지카라:그럼,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라키:단, 거기에는 위스키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위스키를 희망하실 경우에는 별도로 계신을 하게 됩니다.

미도리:위스키는 필요 없지 않을까요?

지카라:하지만 지쿠라에 사는 아저씨는 거의 알코올 중독자니까.

미도리:그럼, 할 수 없군요.

지카라:위스키를 세 병 정도 첨가시켜 주세요.

아라키:알겠습니다. 식사와 술은 그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80명이시니까 원형 테이블 열 개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지카라:알아서 해 주세요.

아라키:캔들은 하트 모양으로 하시겠씁니까?

지카라:(미도리에게)어떻게 할까?

미도리:아무래도 좋아요...

지카라:(아라키 씨에게)모두들 그렇게 합니까?

아라키:일단 보통은 모두들 하시지요. 가끔 하지 않는 분도 계시지만요.

지카라:그럼, 합시다. 남들 하는 것처럼.

아라키:네, 그럼 축하 촛불 8,000엔 하고... (쓱쓱 하고 견적서에 볼펜으로 금액을 기입한다). 그리고 사회는 어떻게 합니까? 저희들 쪽에서 준비를 할까요, 손님 쪽에서 준비를 하시겠습니까?

지카라:글쎄요, 사회료라는 것은 얼마나 됩니까?

아라키:4만 엔입니다.

지카라:와타나베가 잘 한다고 하던데.

미도리:하지만, 그 사람은 입이 걸어서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고요.

지카라:그럼, 그쪽에서 준비해주세요.

아라키:프로 사회자니까 아주 잘 합니다.

그러면 4만 엔이고..(쓱쓱)전자 오르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카라:전자 오르간은 필요 없어요.

미도리:그래요, 별로 소용 없어요.

아라키:그리고 연출 효과료라는 것을 받고 있습니다만, 그게 5만 5,000엔 입니다.

미도리:연출 효과료라뇨?

아라키:연출 효과료라는 것은, 환타지아라고 해서 드라이 아이스 연기라든가, 음향 믹서라든가, 가라오케, 미러 볼(작은 거울을 많이 단 조명등-역주), 메르헨... 이런 것들을 몽땅 포함해서 세트당 5만 5,000엔을 받습니다. 물론 개별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지만 세트로 하면 훨씬 싸지니까요.

미도리:메르헨이 뭐죠?

아라키:에-또, 두 분 어렸을 때 사진을 슬라이드로 비추면서 나레이션을 곁들이는 겁니다.

지카라:내친 김에 다 해버리지요. 5만 5,000엔짜리로 해주십시오. 세세한건 잘 모르겠으니까.

아라키:그리고 곤돌라의 사용료에 관해서는 방의 좌석 수 대로 받게 됩니다. 한 사람당 보통 100엔 정도 비싸집니다.

지카라:곤돌라라뇨?

아라키:옷을 갈아입은 신랑과 신부가 곤돌라를 타고 천장에서 스르륵 내려오게 되는 겁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지요.

지카라:그야 물론 깜짝 놀라겠지요. (미지와의 조우)겠군요, 정말!

지카라:...(그야 당연하지).

아라키:그리고 꽃입니다. 싼 것에서부터 진주,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의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지카라:왠지 점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는군요. 그것들은 어디가 다릅니까?

아라키:우선 꽃의 양이 다릅니다.

미도리:꽃의 종류는요?

아라키:대개가 카네이션입니다. 카네이션이 아니면 볼륨감을 낼 수가 없습니다. 장미나 그 외의 것도 만들 수는 있습니다만, 카네이션과 같은 수를 사용해도 볼륨감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활짝 핀 장미꽃만 쓸 수는 없어서요. 역시 봉우리 쪽은 좋은데,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지카라:제일 비싼 다이아몬드라는 것은 어떤 식입니까?

아라키:그 경우에는 카네이션이라도 시보리 카네이션을 사용하고, 그밖에 카틀레야를 곁들여서, 그러니까 테이블이 이렇게 있지요, 그러면 메인을 놓고, 양 사이드에도 놓을 수 있습니다. 가장 싼 세트는 이렇게 드문드문 놓여지는 느낌이지만, 그것이 비싸질수록 쭉 연결되듯 이어지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우선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특히 손님께서는 가장 넓은 방이라서, 싼 세트를 놓으면 오히려 초라하게 보이지요.

지카라: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에메랄드 5만 엔짜리로 해야겠네

미도리:그래요, 초라한 건 싫으니까.

아라키:알겠습니다. (쓱쓱) 그리고 청첩장은 몇 장 정도 만드실 생각입니까?

미도리:오지 않을 사람도 계싼해서 여분으로 만들어야 되나요?

아라키:아닙니다.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의례적으로 보내는 것을 빼놓으면, 참석 불참석의 예상은 대충 할 수가 있으니까요. 요컨대, 확인하기 위해서 보내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래서 부부인 경우에는 한 통이면 됩니다. 그러면 80명분의 피로연이 대략 10명 가량은 줄여서 계산되니까 70매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청첩장도 종류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1장당 360엔입니다.

지카라:잘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아라키:알겠습니다. (쓱쓱, 쓱쓱 하고) 다음은 의상입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도리:역시 우치가케가 좋겠죠?

지카라:흠.

아라키:갈아입으실 옷은요?

미도리:지금 유행은 어떤건가요...?

아라키:글쎄요, 유행이라고 할까요. 보통 후리소데에서 드레스로 바꿔 입으시는 분이 많습니다.

미도리:그럼, 그런 식으로 해주세요.

지카라:나는 몬쓰키 후에 턱시도를 입으면 되겠지요?

아라키:그럼,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의상 가격은 나중에 정하기로 하겠습니다.

미도리:어째서요?

아라키:가격 차가 지나치게 심해서 다른 것은 먼저 결정하고나서 하시는 편이...

지카라:그것도 그렇겠군.

아라키:의상 임대료가 정해져 있어서요. 우치가케, 후리소데, 드레스 해서... 가만 있자... 5만 3,000엔, 남자 분 쪽은 두 벌에 8,000엔입니다.

지카라:굉장히 차이가 나네요.

아라키:이번에는 답례품 차례인데요, 케이크는 어떻게 할까요? 웨딩 케이크라고 해서 보통 3각형의 요 정도로 작은... 혹은 바므쿠헨 같은 것을 곁들이는 분도 있습니다만.

지카라:바므쿠헨이라니, 어째 팔다남은 찌꺼기 같은 맛이 나잖아요.

아라키:그럼 3각 케이크로 하고... 이것은 사람 수만큼 준비 하시겠습니까?

미도리:그러죠.

아라키:그리고 다음은 팥밥, 혹은 초밥 도시락은 어떻겠습니까?

지카라:그런 건 필요 없잖아?

미도리:최근에는 별로 안 하잖아요.

아라키:지방에 따라서는 반드시 곁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들도 계셔서요. 그 다음에는 떡이나 이런 만두입니다.

미도리:아, 그 만두가 좋겠네요.

지카라:이건 얼마죠?

아라키:600엔입니다.

지키라:이게 좋겠습니다. 그럼, 이것을 80개 준비해주십시오. 이런, 이것은 '축'자가 들어가 있지 않네요.

아라키: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400엔입니다. 크기도 약간 작습니다.

미도리:헷갈리는군요.

지카라:그래도 일생에 단 한번이잖아.

아라키:그럼, 600엔짜리로 80개. (쓱쓱) 답례품은 어떻게 할까요?

지카라:그것은 나중에 보고 결정하겠습니다만, 일단 먼저 예산만 세워놓지요.

아라키:답례품의 주류는 2,500엔, 3,000엔, 3,500엔짜리가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미도리:그럼 가운데 것... 으로 되겠지요?

지카라:그렇게 하지. 그것이 부부는 한 개니까 전부 합쳐서 70개지요?

아라키:3,000엔이 70개라. 보자기는 보통 것으로 해도 되겠습니까?

지카라:아, 예 그렇게...

아라키:... 보자기는 70매 있으면 될 겁니다. 답례품과 같은 수로요. 그밖에 케이크와 만두만 가지고 가시는 분에게는 종이 봉지를 준비할 테니까요, 그럼, 다음에는 사진입니다.

미도리:어머, 또 있어요?

지카라:이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군 그래. 이야기만으로도 지치는데...

아라키:사진입니다.

미도리:네, 네, 알았어요.

아라키:전체 사진은 예식 뒤에 모두 모여서 찍는 겁니다. 이것은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컬러입니다. 그리고 두 분의 사진. 예식 때의 우치가케와 몬쓰키를 입으신 모습의 사진. 이것도 컬러로 하죠? 그리고 신부 혼자서...

지카라:신랑 혼자 찍는 것은 없나요?

아라키:없는 것은 아닙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화장을 고치고 난 다음에 후리소데와 몬쓰키 차림의 두 분의 사진도 찍으시겠습니까?

지카라:찍지요.

아라키:신부 혼자 찍는 후리소데 차림은요?

미도리:그건 필요 없어요.

아라키:다음에, 옷을 갈아입은 다음의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은요?

지카라:그것도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미도리:나도 필요 없어요.

아라키:알았습니다. 그러면... 단체 사진이 1만 8,000엔이고, 그밖에는 각각 1만 5,000엔이고, 3매가 한 세트니까 전부 합해서 6만 3,000엔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꽃다발 증정하는 것이 있는데요.

지카라:그런 건 안 하면 안 됩니까?

아라키:글쎄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모두들 하더군요. 우리들도 권하고 있습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역시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지카라:흐음, 그럼 합시다. 남들처럼.

아라키:꽃다발이 두 개. 그리고 들러리용 꽃다발은 어떻겠습니까? 들러리가 신랑과 신부에게 꽃다발 증정을 하는 것인데요.

지카라:필요 없지 않을까?

미도리:필요 없어요.

아라키:다음에 신부님의 부케인데요, 이것은 생화와 조화가 있습니다. 생화라면 당일 식이 끝나면 친구분께 드립니다. 조화는 그대로 간직해둘 수가 있고 방의 장식으로 쓰는 분도 계십니다.

미도리:생화로 해주세요.

아라키:생화라면 가격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대체로 1만 엔에서 3만 엔 사이죠. 둥근 라운드 부케와 아래쪽으로 축 늘어지는 부케와...

미도리:중간 것으로 해주세요.

아라키:네, 2만 엔짜리 말이죠? 그리고 비디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식과 피로연의 비디오 말입니다만...

지카라:글쎄요... 일생에 한 번이니까 찍겠습니다.

아라키:피로연은 몇 시간 정도 비디오로 찍으시겠습니까?

미도리:적당히 짧게 줄여주시면 좋겠어요.

아라키:네, 중요한 장면은 생략할 수가 없으니까 90분은 필요할 겁니다. 축사도 모두 집어넣어야 하고 촛불 서비스도...

지카라:그럼 그걸로 하죠. 그러면 얼마입니까?

아라키:6만 엔입니다. 그리고 좌석 명찰입니다. 이것은 인원수만큼 필요하니까 1장에 100엔으로 80명분이 되겠군요. 그리고 방명록. 세트로 해서 싼 것이 2,800엔부터 있습니다. 축전장이나 연회장에서 돌리는 축하 메시지 판이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지카라:그것도 이 3,300엔짜리로 부탁합니다.

아라키:네, 알았습니다. 남은 것은 서비스료가 8,000엔. 대충이 이 정도입니다. 의상은 별도로 하고요.

지카라:지금까지 합계가 얼마나 됩니까?

아라키: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탁탁 탁탁(계산기 두드리는 소리) 탁탁 탁탁...

아라키:지금까지 2백 5만 3,460엔입니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계속되지만 도무지 끝이 없기 때문에, 결국 별표와 같이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드디어 결혼했습니다.

어이휴!

 

<비밀에 싸인 양복 공장>

 

하느님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집사람도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나는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여름에는 티셔츠에 반바지, 봄 가을에는 리바이스 청바지에 트레이너나 스웨터를 입고, 겨울이 되면 그 위에 가죽 점퍼나, J 프레스의 더플 코트를 입는다.

신발은 나이키 조깅화.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같은 것은 가뭄에 콩나듯 밖에 입지 않기 때문에 유행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브룩스 브라더즈라든가 폴 스튜어트 같은 곳에서 산다. 가죽 구두는 일단 갈색과 검정색 리갈의 윙팁을 한 켤레씩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폐기된 원자력선처럼 벽장 구석에서 꼼짝 않고 잠을 자고 있다. 이것이 내가 기본적으로 소유한 의상이다.

 

'혹시 어쩌면'하고 여러분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 기본적인 소유 의상 스타일이 1970년 이래 전혀 변화되지 않은 것 아닐까?'하고. 정답, 그대로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자질구레한 변화는 있다. 콘버스 스니커는 나이키 조깅화로 바뀌었고, VAN자킷은 폴 스튜어트로 바뀌었고... 등등.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다. 지난 15년 동안 영화관에서 보는 액션 영화의 예고편 같은 속도로 여러 가지 패션 스타일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져갔으나, 나는 그 동안 북쪽 나라 숲의 사슴처럼 진화와는 무관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1970년대의 나의 기본적인 소유 의상과 1986년도의 나의 기본적인 소유 의상 사이에는, 대충 라이처스 브라더즈와 홀 앤 오츠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보수적인가?"하고 물어오면 곤란하다. 나로서는 결코 적극적인 무엇인가를 보수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고 일단 PAUSE버튼을 눌러 놓은 것뿐이지, 특별히 유행을 거슬러가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행하는 옷을 제대로 찾아입는 것은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며(물론 돈도 많이 들어간다.), 그것보다는 나는 스포츠를 하거나 식생활을 생각하거나 하는, 어느쪽이냐 하면, 신체적인 면에서의 자기 관리 쪽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이것은 개인적인 성향 문제여서, 어느쪽이 옳고 뛰어나다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철학을 통해서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양복을 통해서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것은 어차피 개인적인 문제다.

 

그리고 내가 최첨단의 옷을 입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자주 외국을 여행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대도시의 상류 사회에라도 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외국의 보통 도시를 보통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일본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뒤떨어진다.

낡은 양복이거나 어딘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이라도, '그런거에다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하는 식으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라는 것을-이상한 일이지만-나는 외국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가는 사람인데, 그래도 현지에 도착해보면 주위 사람들에 비해서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과는 정반대로, 일본에 돌아오면 한 동안은 주위 사람들이 너무나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것을 몇 번씩 되풀이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비진화라는 기분좋은 나무 열매를 태평스럽게 따먹으며 나이를 먹어가게 될 것이다.

 

꽤 길게 '비진화' 의 측면을 이야기했으니까, 이쯤에서 '진화'의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양복에 있어서 진화란 무엇인가?

 

(예증)

 

"파리에 우리(꼼므 데 갸르송) 회사가 있는뎨, 그곳의 사장은 프랑스인 여성입니다. 그 나라는 프랑스인이 사장이 아니면 회사를 세울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그때까지 전혀 다른 타입의 오뜨 꾸뛰르(최신 유행의 고급 맞춤복-역주)계의 회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단정하게 구김살 하나 없는 옷을 입고, 매일 미용실에 다니는 생활을 했죠. 그런데 그것이 우리 회사의 옷만을 입게 되고, 역시 여러 가지 감화를 받았다고나 할까, 지금까지 입던 양복을 전부 내버릴 정도가 되었답니다. 생활도 여러 면에서 확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옷은 내추럴 해지면 자연히 짙은 화장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될것이고, 이상하게 허세를 부리는 복장이나 집과도 거리가 멀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꼼므 데 갸르송 홍보담당 다케다씨) 과연 그렇겠구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히 "꼼므 데 갸르송'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케다 씨가 하는 말은 나도 납득이 간다. 1960년대 말기에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야,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녹색 혁명'과 같은 것아냐?"하고 말할지도 모른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옛날, "내추럴(자연)한 것이 최고예요" 하고 말하며 마하트마 간디가 끼던 것 같은 안경을 끼고, 누덕누덕 떨어진 탱크 톱과 가위로 난도질한 청바지 차림으로 철사줄이 들어 있는 브레지어를 불태워버리던 아가씨들 (그렇다고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이 사라져버리고 난지 어언 15년, 그녀들의 정신은 우아하게 승화되어서 미나미 아오야마의 화려한 양장점에 장식되게 된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그러한 현상을 꼬집거나 야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런 것이다' 하는 것이 나의 기본 방침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크리에이터, 먀뉴팩처리)이 존재하고, '그것'을 구하는 소비자 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며, 나는 원칙적으로 모든 현상은 선이라고 믿고 있다. 선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면, 거기에 '내추럴'이라는 색채를 추가하면 좋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현상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을 긍정 혹은 부정을 초월해서, 스스로의 연장물로 파악하는 것이다.

좋다. '꼼므 데 갸르송'을 나자신의 연장물로 파악해보자.

 

그래서 나는 실제로 시부야 세이부 백화점에 있는 꼼므 데 갸르송 옴므(남성복) 부티크에서 여름용 재킷과 티셔츠를 사왔다. 티셔츠는 둘째치고, 재킷 쪽은 종래의 내 스타일과 완전히 딴판이다. 어깨에 커다란 패드가 들어가서 옆으로 삐져나오고, 옷깃에 파이핑이 들어갔다.

'완전히 서커스단의 원숭이 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함께 있던 집사람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아요" 하고 말해서, 모든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샀다. 두가지 합쳐서 6만엔쯤 했는데, 하여간 싸지는 않다. 이런 최대를 하는 데도 꽤 경비가 들어간다.

 

부티크의 점원(남자)은 상당히 인상이 좋은 사람이어서, 나같이 와전히 수준이 다른 사람이 매장 안에 들어가도 싫어하지 않고-속으로는 싫어했는지도 모르지만-친절하게 상담에 응해주었다.무리하게 강요하지않고 모나지않게 솔직한 의견을 말해주고...요컨대 내추럴하다. 아마도 종업원 교육이 잘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감탄했다.

다케다 씨는 최초의 취재(라기보다는 면접, 초보적 강의)를 하던 중에, "매장의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점원들을 보고 옷을 입는 법이나 스타일을 판단하는 손님도 있으니까요" 하는 의미의 말을 했는데, 내가 보는 한에서는,그런면의 배려는 아주 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재킷 말인데, 몇번씩이나 착용해보면 세밀한 부분을 테스트해 보았더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재킷은 겉보기에 디자인이 참신한 것 치고는-그다지 참신하지 않은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참신했다-실제로 입어 보니까, 쉽게 몸에 익숙해지고, 피로해지지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좀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오래 입으면 입을수록 그 디자인의 신기함이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다케다 씨의 강의 때문에 세뇌 당한 것은 아니지만, 부영히 '내추럴'한 경향을 인정할 수 있다. 소매에 팔을 집어넣을 때까지는 '꼼므 데 갸르송' 양복은 상당히 멋을 내서 무리하게 입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착용해보니까 의외로 무리가 없는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ㅡ 이런 점에서 상당히 감탄을 했다. 단 한벌의 재킷에서 모든 것을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것에 관한한 어떤 종류의 일관된 사상같은 것이 느껴지는 옷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금 전 녹색 혁명 의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나는 1980년대 후반을 움직이는 새로운 이념의 대다수는 1960년대 후반에 볼수 있었던 급진주의, 반항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식지향, 육체적인 건강, 환경 음악, 좌익 체제파의 해체, '순문학주의' 통치의 유명무실화, 사회 구조의 수직성과 수평성의 분화... 그러한 것들의 모든 원형은 1960년대 후반에 심각한 형태로 제출되었던 것이며, 70년대에는 동결되거나 물 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80년대에 들어서자 얼마 뒤 부드러운 현실의 진행이 되어서 표면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때를 같이해서, '우리들 60년대 세대가 그것은 상품화 할 권리를 지닌 지위로 상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러한 '부드러운 급진주의'적 상품이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꼼므데 갸르송의 옷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부드러운 급진주의' 분야의 일원으로 추가해도 틀림이 없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문제의 꼼므 데 갸르송을 둘러싼 됴시모토=하니야 논쟁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을 찾이볼 수 있다. 즉, 반핵과 꼼므 데갸르송을 동일선상에 두고 논하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런 작업이 아닌 것이다. 나의 논리대로 나간다면, 꼼므 데 갸르송이 우리들 자신의 연장이라면, 핵무기 또한 우리들 자신의 연장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야기를 좀더 현실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려 보자.

꼼므데 갸르송이라는 회사는 비말주의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취재를 상당히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래서 내가 그 공장을 견학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매스컴 관계에 있는 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야"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고,사실 꼼므 데 갸르송 측도 "그건 좀 곤란합니다"고 대답했다. 

교섭은, '어째서 곤란한가?'하는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어째서 공장을 보여주면 안 되는가?' 하고 창구인 홍보실의 다케다씨가 상대였다. 

다케다 씨 쪽에도 의문은 있었다. '어째서 꼼므 데 갸르송인가?'그것도 어째서 의미가 없으면 안되는가? 상품이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가?'

'어째서 의미가 없으면 안 되는가?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첨단의 상품을 만드는 공장을 구경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품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필요한가?'

우리들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이 다케다씨라는 분이 대단히 인내심이 많고, 또한 논리적인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절충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사물에 대한 관점의 기본적인 스타일을 설명하고, 절대로 이면을 파헤치거나 흥미 위주로 놀려대거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긍정하거나 무엇인가를 부정하거나 하기 위해서 공장 견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다른 입장의 사람들-혹은 독자들-의 작업이라고.

그녀는 인내심 깊게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마침내는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꼼므 데 갸르송의 봉제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최종적으로 허가받았던 것이다(하지만, 이것은 꼼므 데 갸르송과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덧붙여 두고 싶은데, 기사에 대한 제약은 두세 가지 세부사항은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사의 체크도 없었다.

나는 완전히 자유스러운 입장에서 이 문장을 쓰고 있다.)

꼼므 데 갸르송이 취재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케다 씨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에 대해서 쓰여진 대부분의 기사에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나는 패션관계 잡지는 저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읽지 않으니까, 그 분야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꼼므 데 갸르송은 일부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사고 있는' 모양이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왠지 모르게 시건방지고, 사람을 피하는 것 같고 자신의 일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나의 인간적 특성과 비슷하다), 주위에는 상당히 반감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상처를 입었다는 표현은 매우 재미있다. 개인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들의 집합체인 회사라고 하는 시스템이 과연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을 수가 있을까?

 

나는 여기서 가와쿠보 레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뛰어난 디자이너를 정점으로 똘똘 뭉친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집합체의 '부드럽고 내추럴한 자폐성'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지만, 이러한 표련도 어쩌면 그들=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용서해주세요.우선 간단한 수업.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기업의 구조를 설명하겠다.

 

(1)디자인

디자인은 가와쿠보 레이 여사가 혼자 전부 해낸다. 벌집으로 말하자면 여왕벌인 셈인데, 독자적인 섹션이다.

(2)치프(주임)

이사람이 가와쿠보 여사 직속의 생산부를 통괄하고 있다. 이사람의 역할은 간단히 말하면 가와쿠보사가 그린 디자인을 현실적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치프 밑에 패터너와 생산 관리 부문이 있다.

(3)패터너

가와쿠보 여사의 그림을 보고 실제로 그것을 만들어보는 사람이다. 인원수는 전부 25명 가량 된다. 이미지화에서 실물을 만드는 셈이니까 상당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가와쿠보 여사가 그것을 체크한다. 그것에 의해서 패턴(부품)의 수가 결정되고 본뜬 종이가 만들어진다.도표로 그려보면, 이상과 같은 시스템이다.

(4)생산관리

패터너가 쓴 봉제 지시에 따라서 옷감의 미터 수, 본뜨기(옷감에서 패턴 피스를 잘라내는 방법)등을 결정하고, 단추의 수, 심의 양같은 것을 체크하고, 이정도만 있으면 확실히 그 옷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계까지 세팅하고, 그 세트를 공장까지 가지고 간다. 그리고 봉제된 제품을 체크한다.

(5)공장

드디어 본론인 공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우선 먼저 양해를 구해두고 싶은 것은, 특별히 꼼므 데 갸르송 공장이라는 특정 공장이 '마쓰시타 잔기 공장' 이나 "하우스 식품 공장'과 같은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신예의 하이 테크놀러지컬한 공장에서 350명의 여공들이 가와쿠보 레이 여사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고...하는 식이면 꽤 재미있을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꼼므 데 갸르송은 디자인 제작과 영업부만 있는 회사여서, 실제의 봉제는 외부 봉제 공장에 '발주'하는 것이다.

 

공장의 규모는 가지각색이어서, 큰 곳은 전부 기계화되어 있고,작은 곳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시간제 근무를 하는 아주머니로 구성된 가내 공업적인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공장에 따라서는 꼼므 데 갸르송 이외의 메이커의 제품도 동시에 만들고 있는 곳도 있으며(대형 공장에 많다), 꼼므 데 갸르송의 옷밖에 만들지 않는 곳도 있다(소형 공장에 많다). 

공장 수는 약 20개 정도지만, 그 숫자는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 가령 꼼므 데 갸르송은 올 추동 시즌에 재킷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재킷 관계 옷을 잘 만드는 공장에 발주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한국이나 대만과 같은 외국 공장에 봉제가 발주되는 일은 없다. 그 이유는 첫째, 디자인당 상품의 생산 수가 상당히 적기 때문에 외국에 발주할 메리트가 없다. 둘째, 봉제 지시와 체크가 세밀하기 때문에 공장이 가까이에 없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 업계 쪽으로 가까운 언론 관계의 친지가, "꼼므 데 갸르송의 옷들은 대부분 한국제 아닙니까?"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꼼므 데 갸르송 정보'에는 이러한 것도 있다.

(1)꼼므 데 갸르송의 옷은 잘난 체라고 떠들어대도 고토구 근처에 있는 가내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고.

(2)그런 아무것도 아닌 옷에 '꼼므 데 갸르송'이라는 상표를 붙이기만 해도 비싼 가격이 붙는다니까. 아마 꼼므 데 갸르송의 다케다 씨가 우리들에 대해서 처음에는 상당히 경계했던 것도 어쩌면 그러한 비난을 우려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는 일 없는 일을 싸잡아서 비난을 당하는 것이 유명 인사, 아니 '유명 집합체'의 숙명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면, (1)의 소문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안내되어 간 곳은 고토구 모처에 있는 가내 공장이었다. (2)의 소문에 대해서는, 나는 실제로 현장에서 원가 계산을 한 것이 아니니까, 그 소문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여기서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대충 느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이 글을 읽고서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주세요.

미야시타(가명)씨의 공장은 고토 구 모처에 있다. 가명이나 모처라고 하는 것은 꼼므 데 갸르송 측이 정확하게 쓰지 말아달라고 희망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업계도 상당히 경쟁이 심해서'이며, 요컨대 직공을 빼가는 일이 있거나, 정보 누설 같은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공장이라고 해도, 솔직히 말한다면, 변두리에 있는 보통 집이다. 문은 좁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 바로 옆이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되어 있다.

문에는 다만 '미야시타'라고 씌어 있는 문패가 붙어 있을 뿐이니까,이 곳이 꼼므 데 갸르송의 옷을 만들고 있는 공장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치(나폴레옹 솔로)에 나왔던 UNCLE의 비밀 본부의 입구 같은 느낌이다.

본서에서 취재한 공장 가운데서는 가장 작은 공장이다.

1층 부분은 미야시타 씨가 사는 집으로 되어 있고, 2층이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4평과 3평짜리 방이 L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정도의 넓이로. 그 밖이 빨래를 말리는 대이다. 빨래 말리는 대에는 토마토 같은 것이 재배되고 있다. 그너머로 이웃집의 창문이 보인다.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내가 옛날에 한동안 더부살이를 하던 분쿄쿠에 있는 처갓집 분위기와 약간 비슷하다.

방 한쪽 구석에는 미야시타 씨가 옷감을 본뜬 종이대로 잘라내는 재단용 작업대가 있고, 그 옆에 그의 부인과 시간제로 일하는 아주머니 A씨가 천에 스팀 다리미질을 하는 작업대가 있고, 빨랫대에 면한 재봉틀 두 대 앞에는 미야시타 씨의 며느리와 시간제로 일하는 아주머니 B씨가 앉아서 부지런히 재단된 천을 재봉질하고 있다. 덜컹덜컹하는 재봉틀 소리와 쉭쉭하는 스팀 다리미 소리가 뒤섞여 꽤 기분좋은 분위기이다. 왠지 1950년대로 '백 투 더 퓨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공장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본다. 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공장은 요즘 참으로 찾아보기 힘드니까.

 

하루키:일하고 있는 사람은 이분들이 전부입니까?

미야시타: 아닙니다. 시아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사람이지요.여기서는 일하지 않지만요. 그리고 단춧구멍, 이것은 기계로 파니까 전문 단추 공장에서 해옵니다...그러니까 여기서 만든 옷에는 단추가 아직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프레스 다리미질을 하지요. 이렇게 큰 기계로 쾅쾅하고 끼워넣고 합니다. 프레스도 꼼므 데 갸르송의 경우는 납작하게 누르는 프레스도 있고, '아라이'라고 해서 일부러 주름을 내는 프레스도 있고, 여러 가지입니다.

하루키:지금 여자용 재킷을 만들고 계시는데, 미야시타 씨는 계속 이런 옷을 만들어 오셨습니까?

미야시타:아닙니다. 나는 이전에는 신사복을 만들었지만, 신사복을 만들수 없게 되어서 여성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전후에는 한때 신사복이 엄청나게 경기가 좋았습니다. 다만 신사복은 회전이 빠르지 않잖습니까. 게다가 경쟁이 심하고요-요컨대 누구나 만들 수가 있지요, 직공이라면요. 그래서 직공이 모두 신사복에 몰려들어서 이익이 적어지는 겁니다. 대만이나 한국에 발주한다고 해서, 우리들로서는 할 수 없이 부인복으로 방향을 바꾼 겁니다.

하루키:어떻습니까,꼼므 데 갸르송의 일은 재미있습니까?

미야시타:나는 말이죠 재미가...있다고 할까요, 매일이 일종의 발견입니다. 그야 물론 우리들은 디자이너가 발견한 것을 뒤에서 따라가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그곳까지 도달하는 것이 하나의 발견이니까요. 그곳에 기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루키:본뜬 종이가 내려왔을 때 얼핏 보고, '이런 기묘한 것을 만들어서 과연 팔릴까?'하고 생각할 때는 없습니까?

미야시카:글쎄요, 우리들도 만들면서 어떻게 입을까, 별 기발한 옷도 다있군, 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모델들이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기발한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그래서 한번쯤 쇼를 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으음 그럴 듯하군, 하고 납득이 갑니다. 디자이너는 역시 그 나름대로 머리가 좋다고 말입니다(웃음).

하루키:기발한 것이라면 상당히 기발한 것이 있었겠지요?

미야시타:네,최근에는 그다지 심하지 않지만, 한때는 그야 말로 난처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등에 절구 같은 것을 짊어지는 옷이 다 있었다니까요.

다케다:(옆에 있다가 설명을 했다) 그때 우연히 가와쿠보씨가 입체감이 있는 양복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옷을 입었을 때 울퉁불퉁한,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을 만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것이라든가 옷의 속면 일부가 잇대어 붙여겨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가요. 그러한 디자인이 많았으니까 그 무렵에는 정말로 애를 먹었습니다.

미야시타:그런데,처음 얼마 동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만드니까 잘되는데요. 순서를 대강 외우고, 빨리 만들려고 서둘러서 한 건 절반이나 퇴짜를 맞았지요.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 반대로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해서요. 괴수가 산을 짊어지고 있는 그림 있지요? 그런 식으로 되어버려서...

하루키:일한 보람이 없었겠네요

다케다:그런 말은 쓰지 마세요(웃음).

 

미야시타 씨는 전후부터 줄기차게 계속해서 양복 직공으로 일해온 싹싹한 아저씨로, 이야기도 꽤 재미있게 한다. 꼼므 데 갸르송 본사의 점잔을 빼는 분위기에 비하면 전혀 이미지가 맞지 않는 분이지만, 일을 하는 것이 더없이 즐겁다는 타입의, 그것도 새로운 옷이나 복잡한 옷을 만드는 것이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타입의 사람이어서, 옆에서 보고 있으면, '과연 이러한 사람들이 꼼므 데 갸르송을 뒤에서 지탱해나가고 있구나!' 하고 어느 정도 납득이 가곤 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러한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디자이너스 브랜드에서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장은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일단 쉬지만, 미야시타 씨는 쉬는 날에 혼자 다음 1주일 분의 작업 준비를 해놓고,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세트해놓는다고 한다. 구석구석까지 깨끗이 해놓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의 사람은 모양으로, 과연 공장에서 작업의 진행 상황이 매우 매끄럽고, 소수의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전해져 왔다.

하루키:지금 만들고 있는 재킷은 본뜬 종이로 몇 피스 정도로 나뉘어져 있습니까?

미야시타:이건 23매입니다.

하루키:많군요.

미야시타:보통의 두배는 됩니다. 보통의 경우는 대개...10매 이하지요. 대충 필요한 곳을 들어보면, 전신이 있어야겠죠. 그 다음은 등, 소매가 상하, 안단, 그리고 깃. 그 다음은 주머니 모양 정도니까요. 7,8매면 됩니다. 그러니까 재단할 때도 이렇게 겹쳐서 한 번으로 좌우를 떠낼 수가 있거든요. 보통의 경우에는요. 하지만 꼼므 데 갸르숑은 전부 늘어놓고 한 개씩 잘라 나가지 않으면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죠. 하지만 세밀한 일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대충.

하루키:나는 잘 모르지만 재단이라는 것은 가위로 합니까, 싹뚝싹뚝하고요?

미야시타:아닙니다. 재단기라는 기계를 사용합니다. 이겁니다(꺼내 가지고 온다. 대형 주스기만한 크기의 기계이다). 이걸로 천을 사이에 끼워 자릅니다. 안감 같은 것은 이런 칼로 자릅니다. 이것 말인데요(하면서 녹색 천으로 싸놓은 칼 세트를 꺼낸다). 옛날에는 모두 이걸로 잘랐습니다. 그러니까 1950년대까지는 이것으로 했지요. 1965년 정도부터 기계가 들어왔으니까요.

하루키:그렇다면 기계화된 부분도 있다는 얘기군요. 65년이라면 도쿄 올림픽 이듬해...

미야시타:그리고 '에리사시'라고, 이렇게 옷깃이 접히도록 심과 이 옷길을 고정시키는 걸 지금은 접착제를 사용해서 이런 식으로 합니다만 옛날에는 '하자시'라고 해서. 전부 손으로 했었지요. '에리사시'라는 기계가 들어온 것도 역시 65년경부터지요.

하루키:다림질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까?

미야시타:다림질은 이런 식으로 꼬맨 것을, 그 감을 가라앉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꼬매고 나서 다림질을 해서 천을 가라앉히는 겁니다. 금세 다림질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림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니까요. 필요한 부분까지 꼬매고 필요한 자리가 되면 다림질을 하고, 그것을 교대로 되풀이하면서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그것이 커다란 공장 같으면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머니를 만드는 사람이라면,주머니의 다림질을 준비할 뿐이고, 그것이 끝나면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다음에 가면 다마부치(천의 가장자리에 재봉으로 다른 천의 테두리를 대는일-역주)를 하고 있고, 그리고 다시 다음으로 가면 뚜껑을 끼는 사람은 끼기만 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같은 일만 하게 되는...

하루키:그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주머니의 뚜껑을 끼는 것 뿐이라면요. 여기서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공정을 맡아서 하고 있는 셈이군요.

미야시타:그렇습니다. 일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가는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큰 공장에 가면, 그건 솔직히 말해서 바보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일만 할 줄 알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공장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다가는 주머니만 생겨나게 되니까, 쓸모가 없게 되지요(웃음). 그러니까 이런 얘기입니다. 본이 20피스 정도 있다고 하는 것은 20번 정도를 갔가가는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산량 말입니까?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간단한 옷이라면 상당히 많이 만듭니다. 하지만 혼자 해야 하니까 두 벌 만들면 잘 하는 편 아니겠습니까? 이런 옷은 품이 많이 가니까요. 혼자서 두 벌이니까 다섯 명이서 열 벌... 정도 만들면 좋겠는데 그렇게까지는 아직 못 만듭니다. 하여간 어떻게든 두 벌 정도는 만들어야겠다고 노력하는데...

하루키:이렇게 '이런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본뜬 종이와 봉제 지시서가 내려오지요. 그때, 이것은 팔릴 것이라든가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까?

미야시타:그것은... 나도 상상을 해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회사의 비밀이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만들면서 이거 괜찮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영업부에서 다시 매수가 들어오면, 아아 역시 많이 팔리는구나 하고...

하루키:매수가 들어온다뇨?

다케다:(옆에서 설명을 했다) 한 공장에 그 공장에 갈 것이라고 생각되는 스타일의 옷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전시회나 패션 쇼를 열기 전에요. 그래서 전시회 같은 곳에서 손님으로부터 주문이 들어와, 그 주문에 따라 생산매수가 정해지게 되는데, 그것이 다시 미야시타 씨의 공장에 되돌아오니까 그때, '아, 이 스타일은 20매 들어왔다, 이것은 30매 들어왔다.'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미야시타:하여간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요. 회사나 사장님 자신도 어느 정도나 팔릴지는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팔리지 않더라도 만들고 싶은 것이 있을 거고요. 우리들도, '어딘가 기발한 구석이 있구나,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꼼므 데 갸르숑은 그런 점이 좋지 않습니까? 나도요, 아니 우리 공장 종업원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떤 식으로 옷이 만들어져 갈까 하는, 하나의 관심, 그러한 것이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요?

하루키:가족들은 꼼므 데 갸르숑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미야시타:우리 집에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만, 꼼므 데 갸르숑을 입을 만큼 스타일이 좋지 않아서요(웃음). 우리 집 바로 옆에요, 꼼므 데 갸르숑의 열렬한 팬이라는 아가씨가 하나 있기는 있어요. 그리고 여행을 가서요, 무슨무슨 관광단 같은 것을 따라가서, 자기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고, 나는 꼼므 데 갸르숑의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 역시 젊은 여자들이... 우와 하고 소리치며 좋아들 하죠. 그러면 나도 기분이 좋아서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이 대목은, 꼼므 데 갸르숑의 내추럴 사상에서 좀 일탈해 있는 것 같지만 미야시타 씨는 매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니까 여행 때 정도는 눈감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루키:마음에 드는 것이 완성되면, 옷 속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이름을 새겨두는 일 같은 건 없습니까?

미야시타:사장님한테 호되게 꾸중을 들으려고요(웃음)? 그러니까 신사복 같은 경우에는 심에다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심에다 쓰면 완성되고 나면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옛날에는 그런 은밀한 자만심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이전에는 그런 장인 근성 같은 것이 있었지요.

하루키:이 펀치는 무엇에 쓰는 겁니까? 무엇을 말릴 때라도?

미야시타:아, 그것은 상관없는 거예요. 우리 집 빨래인데 비가 내려서 세탁물을 집 안에 널어둔 것뿐입니다. (*미야시타 씨의 부인과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주머니 모두 킥킥거리고 웃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까지의 경우는 도매상이 요컨대 디자이너를 고용했습니다. 1주일에한 번 무슨 요일은 우리 회사에서라든가, 하고 고문으로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디자이너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디자이너라고 하도 다만 본뜬 종이만 만들 뿐, 다른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령 꼼므 데 갸르숑 말입니다. 가와쿠보 레이 씨라는 디자이너가, 디자이너 자신이 직접 운영해나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디자이너가 지금까지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고 디자이너 자신이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들면, 그것에 흥미를 느낀 사람이 그 사람 주변으로 모여드는 겁니다. 이런 연유로 '꼼므 데 갸르숑'의 재킷에 미야시타 씨의 서명은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미야시타 씨는 즐거운 듯이 꼼므 데 갸르숑의 재킷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나도 '소중하게 재킷을 입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꼼므 데 갸르숑이라는 브랜드의 부가 가치가 가격에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 다케다 씨에게 물어보니까, "우리 회사정도의 생산 매수로 그렇게 품이 많이 드는 공정을 거치자면 아무래도 단가가 높아집니다. 원단도 오리지널이어서 코스트가 높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 정도의 가격이 되는 겁니다."라는 것이다. 적어도 재킷에 관해서 말한다면, 아마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다른 품목에 대해서는 내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꼼므 데 갸르숑의 경영 자세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견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의복 브랜드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비어 있는데다가 첫째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맛이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그런 공허한 다각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쨌든 간에 하나의 '품위'라고 나는-개인적으로-생각한다.

"업계의 이중 구조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고 다케다 씨는 말했다. 요컨대, 독자적으로 디자인한 것을 한 벌 한 벌 만들어나가는, 이른바 '디자이너 브랜드'와는 별도로 보통 공장에서 왕창 만들어놓고 그것에 브랜드 네임을 붙여 팔면서 그쪽에서 돈을 버는 수법이다. 결국은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용납하느냐, 혹은 용납 못하고 소량 생산하느냐, 하는 것이 경영자의 자세와 프라이드에 의해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그것을상품 속에서 구별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2 나는 맥주와 두부, 이사와 야구를 좋아한다.

 

 

<도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유로움>

 

1981년 여름에 도심에서 교외로 이사를 와서 가장 난처했던 것은 대낮부터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인구의 태반이 샐러리맨이어서, 그런 사람들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때 집에 돌아온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대낮의 거리에는 주부들밖에 없다.

나는 원칙적으로 아침과 저녁때밖에 글을 쓰지 않으니까, 오후에는 집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된다. 왠지 아주 묘한 기분이 든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몹시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힐끔거려대니까, 나 스스로도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나를 아무래도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이봐요, 하숙집 구해요?" 하고 말을 걸어왔고, 택시 운전사는, "공부하기 힘들지요?" 하고 물어왔으며, 레코드 대여점에서는 "학생증 좀 보여주세요" 하는 말을 들었다.

1년 내내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벌써 서른셋인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 학생으로야 보이겠느냐는 생각이 들지만, 동네사람들에게는 대낮부터 빈둥빈둥거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학생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도심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었다. 아오야마 거리를 한낮에 산책하고 있으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자주 만나곤 했다. 특히 삽화가인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는 자주 만났다.

"안자이 씨, 뭐하십니까?"

"아, 아니, 그냥 잠깐..." 하는 식이다.

안자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한가한 것인지, 그걸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아무튼 도시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이 대낮부터 빈둥거리고 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잘은 알 수 없지만, 편안하기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다.

점심 시간에 분식 센터에서 맥주를 시켜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분식집에서 마시는 맥주는 정말 맛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쇠고기와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

 

나는 고베 출신이기 때문에 쇠고기와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도쿄에는 바다가 없고(그 바다는 바다 축에 끼지 못한다), 쇠고기도 비싸다. 유감천만이다.

이따금 바다가 보고 싶으면 쇼난이나 요코하마에 찾아가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부러 바다를 보러 왔다'는 느낌이 앞서버리기 때문이다. 바다 쪽에서도,'아이구, 잘오셨습니다' 하는 느낌이 든다.

바다라는 것은 역시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그 냄새를 맡으며 생활하지 않으면 진짜 좋은 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쇼난이나 요코하마의 바다는 약간 지나치게 세련되어서, 그러한 '생활 감각으로서의 바다'가 타향에서 온 방문객에게는 완전히 전해지지않는 구석이 있다.

내가 최근에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해안은 미나미 보소이다.특히 지쿠라가 좋다.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지만, 여름 방학을 제외하면 평일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무엇보다도 바다 자체에 리얼리티가 있다.

철썩 하고 파도가 밀려왔다가 쏴아 하고 밀려나간다. 조개나 다시마 등이 물가에 흩어져 있다. 이런 곳에서 딩굴고 있으면, '정말 바다로 구나!'하는 느낌이 마음속으로부터 불끈 솟아오른다.

지쿠라는 사실은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고향이다.

"지쿠라에 가서, 안자이하고 좀 아는 사이인데요, 라고 말하면, 누구든 돈을 빌려줄 겁니다"라고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말했다.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어쩌면...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할 정도로 작고 조용한 고장이다.

지쿠라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은 K라는 출판사가 소유하고 있는 해변가 집이다. 나는 꼭 한 번 "원고를 쓰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집에서 숙박한 일이 있다.

어쨌든 굉장히 좋은 고장이다.

 

<오오모리 가즈키 감독과 나>

 

오오모리 가즈키는 효고 현에 있는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의 나의 3년 후배이며, 내가 쓴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영화화되었을 때 감독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친구는 겉보기에는 짐승 같고, 부랑자처럼 술을 퍼마시며, 지저분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고, 자주 큰소리를 지르지만, 꽤 좋은 사람이다. 최소한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그러나 아무래도 이건 칭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군).

오오모리는 현재 아시야 시 히라다초의 맨션에 살고 있으며, 일거리도 없어서 대낮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근처에 있는 해안을 산책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안됐다. 소설가라면 의뢰가 오지 않더라도 혼자 꾸준히 소설을 쓸 수 있지만, 영화 감독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자금이 필요하고, 스태프가 필요하며, 기재도 필요하다.

지난번에 테크닉스의 레코드 플레이어에 대한 잡지 CM에 그가 나왔길래 "돈 잘 버는데 그래"하고 말했더니,"그까짓 거 갓난애 우유값 정도밖에 안 됩니다. 게다가 플레이어를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투덜투덜"이란다.

마쓰시타전기도 오오모리에게 플레이어 한 대 정도는 줘도 괜찮을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광고업계의 일은 잘 모르니까,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플레이어가 없어서 동요레코드를 틀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오오모리는 오늘도 자장가를 흥얼거리면서 갓난애를 업고 아시야 해안선을 터벅터벅 왔다갔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자기 회사 제품의 CM에 나온다고 한다면, 마쓰시타 전기 회사도 뒷맛이 개운치 않을 것 같다. 프레이어 한 대 정도는 증정하고 싶다.

그건 그렇고, 오오모리는 금년에 하기로 되어 있던 기획이 전부 취소가 되어서 굉장히 우울한 것 같다. 하세가와 가즈히코와 둘이 어떤 잡지에서 매우 어두운 대담을 했다는 정보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오오모리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시면 그에게 전하겠습니다.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도 초콜릿을 못 받았다>

 

조금 오래 전 이야기인데, 2월 14일 저녁때 무말랭이 반찬을 만들었다.

세이유(대형 슈퍼마켓 체인-역주)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농가의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비닐 봉지에 담긴 무말랭이를 팔고 있길래,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산 것이다. 한 봉지에 50엔이다. 그리고 나서 근처의 두부 가게에서 두껍게 지진 두부와 맨두부를 샀다. 그두부집 딸은 조금 털이 많기는 하지만 꽤 친절하고 귀엽게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서 무말랭이를 한 시간쯤 물에 불렸다가, 참기름으로 볶고, 거기에 여덟조각으로 자른 지짐 두부를 넣고, 육수와 간장, 설탕과 조미용 술로 맛을 내어 중간불에서 졸였다. 그동안 카세트 테이프로 B.B.킹의 노래를 들으면서 당근과 무채초무침, 무와 유부를 넣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부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도루묵을 구웠다. 이것이 그 날의 저녁 반찬이었다.

그걸 먹으면서 문득 생각이 났는데, 2월 14일은 성 발렌타인데이이다. 발렌타인 데이라고 하는 날은 여학생들이 남학생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다. 그런 날 저녁 식사에 어째서 나는 내 손으로 만든 된장국을 홀짝홀짝 마시고, 내가 만든 무말랭이를 먹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내 인생이 정말로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초콜릿 같은 건 아무도 주지 않는다. 아내까지도,"발렌타인 데이요? 흥!"하고 대답하면서 내가 만든 무말랭이 반찬을 묵묵히 먹고 있다.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다.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세 명의 여학생이 앞을 다투어 초콜릿을 선물했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 재학중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돌연 내인생은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버리고, 나는 성 벌렌타인 데이 저녁 때 무말랭이와 두껍게 지진 두부 반찬을 만드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짓을 하고 있다가는 얼마 뒤에, (황혼)에 나오는 헨리 폰다 같은 노인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스스로도 무섭다. 정말이다.

 

<지하철과 차표 분실 공포증>

 

지하철의 차표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

지하철표를 잃어버리지 않는 요령을 나는 옛날에 배운 적이 있다. 요령이라고 해보았자 그다니 복잡한 것도 아니다. 요컨대 언제나 정해진 주머니에 지하철표를 넣어두는 것이다.

바지의 앞쪽 주머니나, 지갑의 작은 칸 같은 데에 지하철표 전용 장소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표도 없어지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재빨리 꺼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어디에 간수해 두었다 하더라도 지하철표를 잃어버리도록 숙명지워진 사람은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은 언제나 같은 바지를 입고 다니지 않는다. 플란넬 바지를 입을 때도 있고, 청바지를 입을 때도 있고, 조깅용 바지를 입을 때도 있다. 그리고 옷에 따라 주머니의 형태에서부터 숫자, 목적까지 전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앞주머니'라고 해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것이다. 도대체 조깅 바지의 어디에 앞주머니다 달려 있단 말인가?

지갑의 작은 주머니는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것 역시 계획대로 잘 되지않는다. 왜냐하면, (1)지갑을 꺼내고 (2)지하철표를 집어넣고 (3)주머니에 지갑을 집어넣는 세가지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쁠 때에는 이것도 번거롭다. 게다가 사람들 앞에서 지갑을 꺼내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또 지하철표를 일일이 지갑에 집어넣는 행위는, 다 큰 어른이 할 짓이 아니라는 창피함도 있다. 그래서 결국,'이번에는 여기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집어 넣으면 돼. 그것만 잘 기억하고 있으면 염려없어'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표는 정확히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몇 번씩 되풀이하지만, 이것은 이미 숙명인 거다. 지하철 표라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잃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는 사람은 영원히 계속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하철표 간수의 묘책>

 

나는 옛날에 어떻게 하면 지하철표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있을까, 하고 상당히 진지하게 궁리한 적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다. 즉,(1)어떤 복장을 하고 있어도 보편적으로 존재하고,(2)꺼내고 집어 넣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3)그곳에 차표를 집어넣었다는 걸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장소를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잠시 궁리해보기 바란다.

이세 가지 조건을 구비한 장소를 여러분은 생각해낼 수 있는가?

양말이나 구두 같은 것은 안된다. 샌들을 신을 때도 있으니까. 팬티 속도 안 된다.(2)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나는 오렛동안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가까스로 그것에 적합한 장소를 하나 찾아냈다. 귀다.귀밖에 없다. 유레카(나는 알아냈다)!

그 이래 나는 지하철표를 접어가지고 귓구멍 속에 집어넣게 되었다. 처음에는 귓속에 빳빳한 게 있어서 불편하지만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다.

거꾸로, '응, 내 귓속에 전철표가 있구나'하는 확실한 존재감이 전해져서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느낌을 잘 모르는 사람은 한번 시험삼아 해보기 바란다.

국철의 차표라면(물론 두꺼운 종이는 안 된다.그런 걸 넣었다가는 귀가 상하게 되니까), 가로로 두 번, 세로로 한 번 접으면 귀에 들어간다. 그때 잉크가 묻지 않도록 뒤집어서 접는 것을 잊지 말 것. 귀의 솜털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서 약간 창피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귓속이 간지러운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지하철표 귓속에 집어넣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서, 수만 명의 여고생들이 매일 아침 귓속에서 세 겹으로 접은 지하철 표를 꺼내는 광경을 상상하면 나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이런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일까? 잘 모르겠다.

(이글을 쓴 후에 독자로부터 '여고생들은 정기권을 가지고 다닙니다.'라는 투서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정기권은 유감스럽게도 귀에는 안들어간다.)

 

<차표를 잃어버렸을 때 손해를 줄이는 방법>

 

앞에서 지하철표를 접어 귀에 집어넣어 두면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썼으나, 때때로 귀에 지하철표를 넣어두고 있으면 아주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기분 나빠하면서 멀찌감치 비켜나는 사람도 있다.

그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지하철표를 주머니에 넣든 귓속에 넣든, 그거야 어디까지나 내 자유가 아닌가? 그런일 가지고 일일이 남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기바란다. 이쪽도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곤란한 것은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검표를 하러 오는 경우인데,"손님, 표 좀 보여주십시오" 하고 갑자기 요구하여 귀에서 슬며시 전철표를 꺼내면, 차장도 주위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라곤 한다.

깜짝 놀라는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차장에 따라서는 더럽다고 하면서 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귀찮아져서 결국 귀에 지하철표를 넣는 것도 그만 두고 말았다. 지금은 이미 '그렇게 없어지고 싶으면 언제든지 없어져버려라' 하는 무아의 경지, 무심의 경지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지하철표는 반드시 없어져버리니까, 노력을 하는 만큼 손해라는 이야기다.

다만 잃어버렸을 때의 손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이 있다. 어떤거냐하면, 어디를 가든 간에 한 구간 요금의 표만 사면 된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 개찰구에서 초과 요금을 지불한다. 그렇게 하면, 만일 지하철표를 잃어버렸어도 손해가 훨씬 적다.

친절한 역무원이 있어서, "잃어버렸다구요? 하는 수 없죠. 됐습니다"하고 말해주면, 완전히 공짜로 지하철을 탄 기분이다.

 

<반가운 사전 속의 삽화>

 

사전에는 대개 삽화가 들어가 있다. 나는 그 삽화를 무척 좋아한다. 삽화라고는 해도, 그것은 별로 독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구의 의미를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겐큐샤의(신간 영일)사전으로 말하자면, pergola라는 단어가있는데, 이것은 '시렁 지붕이 있는 정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미지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옆에 실제로 pergola의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담쟁이 덩굴이 감겨올라간 기둥과 지붕이 있고 덩굴 밑에는 벤치에는 젊은 남녀가 걸터앉아서 양손을 맞잡고 있다. 남자 쪽이 좀더 적극적이지만, 여자 쪽도 별로 싫지는 않은지, 은근한 눈으로 대답하고 있다.'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함께 드러눕지 않겠어?' 하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가 pergola 고유의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땠든 사전의 그림이라는 것은 재미있다.

그렇다면, 아예 사전을 전부 그림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 옥스퍼드 도덴의 (도해 영일사전)인데, 나도 며칠 전에 새로 사왔다. 이 사전은 아무 페이지나 들쳐보아도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다.

부분적으로는 꽤 현대적인 구석도 있어서, 디스코 도해, 누디스트 클럽도해 같은 것까지 빠짐없이 실려 있다. 굉장하다!

좀더 굉장한 것은 318페이지의 '나이트 클럽' 편으로, 이 삽화는 아무리 보아도 유무라 데루히코 풍이다. 그리고 지금 브래지어를 막 벗은 스트리퍼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는 호색스러운 얼굴의 손님은 아무리 보아도 이토이 시게사토(불륜사건으로 유명한 소설가-역주)이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점에 가서 들쳐보고 확인해보기 바란다. 덧붙여 말하면, 삽화가는 Jochen Schmidt라는 어엿한 외국인인 모양이다.

집사람이 UFO를 '유포'라고 읽을 때 얼마 전에 집사람과 비행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보아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그게 도대체 뭘까하고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놀랍게도 영국의 국영항공사 'BOAC'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초의 'BOAC'라는 회사는 이미 없어졌고, 지금은 '브리티시 에어웨이'로 바뀐지 오래다.

그러자 어쨌든 간에, 'BOAC(비 오 에이 씨)'를 '보아크'라고 읽는 게 엉터리냐 하면, 그건 얼른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BOAC'는 어디까지나 '비 오 에이 씨'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집사람은 "당신처럼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잔소리만 해대면, 나이를 먹어서 모두한테 따돌림을 당한다구요" 하고 말했다. 분명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UFO'를 '유포'라고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UFO'는 역시 '유 에프 오'다. 죽어도 '유포'가 좋다고 하는 사람은 'U.S.A.'를 '유사'라고 읽으십시오. 안 그렇습니까?

비행기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가령 JAL이라든가 KAL같은 것은 '잘'이나 '칼'로 읽지만, TWA 같은 것은 '트와'라고는 읽지 않는다. 극동 방송'FEN'을 이따금 '펜'이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국인 중에서 'FEN'을 '펜'이라고 읽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에프 이 엔' 이라고 정확히 말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블루 선더)라는 영화 속에서 신참 헬리콥터 근무 경관이 'JAFO'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모자를 쓰게 하니까, 모두에게" 자포가 무슨 약자입니까?" 하고 물어보고 다니는 대목이 있다. 무슨 약자인지는 그 영화를 보고 확인해주기 바란다.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니까 말이다.

 

<야쿠르트 팀이여, 30년에 한 번쯤은 이겨다오>

 

나는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팬이라서 자주 진구구장에 간다. 진구라는 곳은 꽤 좋은 야구장이다. 고라쿠엔 구장과는 달리, 그 주위를 숲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바쁘기만 한 일상과 단절된 느낌이 들어서 느긋하게 야구 구경을 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탓이겠지만, 고라쿠엔 구장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야쿠르트가 우승한 해에는 대학 야구 탓으로 진구 구장에서 일본 시리즈를 치루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고라쿠엔 구장에서 경기를 가졌다.

진구 구장에서 싸우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유감스러웠지만, 거꾸로 말하면 '교진팀, 약오르지'라는 느낌이라서 기분은 좋았다.(교진 팀의 본거지가 고라쿠엔 구장이다.-역주). 고라쿠엔 구장의 1루석에 들어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야쿠르트의 팬으로써 한 마디 한다면, 1978년의 시즌만큼 기분 좋은 시즌은 없었다.

나는 그해, 진구 구장에서 걸어서 5분쯤 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매일처럼 야구 구경을 하러 다녔다. 날이 저물어 주명등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북소리가 둥둥 하고 들려오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일 같은 것은 내팽개치고 야구장으로 달려간다.

또 그해에 야쿠르트는 정말로 기분 좋은 시합을 했다. 후나다가 대 교진 전에서 때린 굿바이 홈런이라든가, 힐튼의 1루 헤드 슬라이딩, 결승전에서 마쓰오카가 보여준 신들린 듯한 피칭이라든가, 고라쿠엔 구장의 외야석 제일 윗계단에 때려넣은 마뉴엘의 홈런 등, 지금까지도 그 시즌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낼 때마다 물밑듯이 감동이 되살아난다.

30년에 한 번밖에 우승하지 못하는 팀을 응원하고 있으면, 단 한차례의 우승이라도 오징어를 씹듯이 10년 정도는 즐길 수가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금년의 야쿠르트는 컨디션이 나빠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소망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가능하면 서기2000년까지-다시 한 번 야쿠르트가 우승해 주는 것, 그것뿐입니다.

 

<내가 준 보수와 내가 받는 원고료>

 

나는 20대 초반부터 8년 가량 재즈 카페를 경영하며 꽤 많은 아르바이트생을 써왔다. 대부분이 학생이니까, 처음 얼마 동안은 거의 나하고 나이 차이가 없었고, 카페에서 손을 뗄 무렵에는 세 살 정도의 차이가 났다. 우리카페는 아르바이트생의 정착률이 높은 편이였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하여간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내 경험으로 보아, 절대로 고용하면 안 되는 타입이 몇 가지 있다.

"무보수라도 좋으니까 일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타입이 그 중 하나이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있다.

예를 들면, "장래에 카페를 경영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그냥 일 좀 배우게 해주십시오" 라든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어서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매년 한 사람씩은 들어온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보수로 일을 하게 할 수는 없어서 남 주는 만큼의 급료를 지불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일을 제대로 잘 해주느냐 하면, 대부분은 그 반대이다. 일은 대충대충 해치우고, 불평은 많고, "급료가 형편없다"고 떠들어댄다. 

처음과는 얘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나는 순진하게도 괘씸하게 생각하지만, "급료는 필요없다"는 식으로 비현실적인 말을 당당히 입에 담는 사람을 고용한 것은 이쪽의 잘못이다.

비슷한 이야기인데, 나는 원고료를 주지 않는 원고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 굉장히 건방진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프로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설사 아무리 싸더라도 원고료만큼은 현금으로 받는다. 나도 원고 마감일을 엄수하니까, 그 쪽도 지불 약속을 정확히 지켜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나가면, "저 녀석은 돈에 까다롭다"고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동인지나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하려는 체질이 일본 문단을 얼마나 망쳐왔는가를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문학도재즈 카페도 근본은 마찬가지인거다.

 

 

<여자 대학 간판을 훔치러 갔을 때>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68년인데, 일단 메지로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이 기숙사는 유명한 요정 ㅅ 옆에 지금도 있으니까, 메지로 거리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한번 봐주셔요.

나는 그 기숙사에서 반년쯤 살았으나, 그 해 가을에 품행 불량으로 쫓겨났다. 경영자가 악명 높은 우익인데다, 사감은 육군 나가노 학교 출신의 기분 나쁜 아저씨였으니까, 나 같은 건 쫓겨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때는 1968년, 그야말로 학생 운동이 절정에 이른 시절이었고, 나도 혈기왕성한 세대였기에 흥분할 일이 잔뜩 있었다. 우익 학생이 습격해 온다고 해서 베개 밑에 칼을 넣어놓고 잠을 잔 적도 있다.

하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혼자 살아본 것은 처음이라, 매일의 생활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대개 저녁이 되면, 메지로의 언덕을 걸어내려가 와세다 대학 근처에서 슬을 마신다. 그리고 마셨다 하면 반드시 곤드레만드레가 된다. 그 무렵에는 고주망태가 되지 않도록 술을 마시는 요령은 아직 없었다.

술에 취하면 누군가가 들 것을 만들어서 기숙사까지 옮겨다주었다. 들것을 만드는 데는 참으로 편리한 시대였다. 왜나하면, 사방에 플래카드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분쇄!' 라든가, '원자력 잠수함 기항 절대 저지' 같은 플래카드를 적당히 골라서 뜯어다가 거기에 술에 취한 녀석을 얹어 운반하는 것이다.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꼭 한 번 메지로의 언덕에서 플래카드가 찢어져 돌계단에 쾅 하고 머리를 박은 일이 있다. 그 덕분에 2,3일 동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리고 한밤중에 일본 여자 대학의 간판을 훔치러 간 일도 있다. 그런걸 훔쳐 보았자 돈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갖고 싶어서 떼러 갔다가 순경에게 들켜서 줄행랑을 쳤다.

생각해보니까, 그 무렵에는 1주일에 한 번은 순경한테 불심검문을 당했다. 시대도 혼란스러웠고, 나의 인상도 좋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최근에는 한 번도 불심검문을 당하지 않았다. 순경에게 불심검문을 당하지 않게 되다니 내 인생도 이미 끝장이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하곤 한다.

 

<한 평 반 좁은 방에서 사는게 싫어서 이사했다>

 

도리쓰가세이의 어두운 한 평 반짜리 방에서 반년 간 살다가, 살아 있는게 정말로 싫어져서 다시 이사를 가기로 했다. 그게 1969년 봄의 일이다.

가구나 짐 같은 것이 없으니까 이사하기는 정말로 편하다. 이불과 양복과 식기를 차의 트렁크에 던져 넣으면, 그것으로 이미 준비 완료다. 인생이라는 것이 모두 이랬으면 좋으려만.

이번에 이사하는 곳은 미타카에 있는 아파트이다. 닥지닥지 복잡한 곳은 이제 신물이 나서 교외로 옮겨가기로 한 것이다.

부엌이 딸려 있는 세 평짜리 방이 7,500엔(와, 싸다!), 2층의 모서리방이고 주위가 전부 들판이니까 참으로 해가 잘 든다. 역까지 거리가 먼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어쨌든 공기가 맑고 조금만 발을 내딛으면 무사시노의 잡목림이 아직도 자연 그대로 남아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기분이 좋아 전당포에서 중고 플루트를 사다가 연습을 하고 있었더니,옆방에서 기타를 치던 소년이 "하비 맨 같이 연주해요" 라고 하길래, 매일 플루트로 [멤피스 언더그라운드]만 불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는 미타카=[멤피스 언더그라운드]라는 수식이 형성되어 버렸다.

그밖에 그 무렵의 기억이라고 하면, 브래지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는것 정도 밖에는 생각나는게 없다. 브래지어가 정말로 하늘을 날았냐고? 물론 그렇지 않다. 바람에 불려서 하늘을 떠다녔을 뿐이다.

바람이 굉장히 세게 불던 밤이었는데, 내가 터벅터벅 아파트 근처의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무엇인가 흰 것이 하늘 높이 둥실둥실 날아가고 있어서 '어, 백로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자세히 보니까, 그것이 브래지어였던 것이다.

브래지어가 밤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또 꽤나 희안한 광경이다. '설마 그런 것이!' 하는 의외성과 공기역학적인 움직임의 재미가 일체화되어, 그 장면이 정말 멋졌다.

 

<데모 열풍 끝나고 행복했던 시절>

 

나는 절대로 일기를 쓰지 않는 인간이지만, 미타카 시절만큼은 어찌된 셈인지, 짧은 일기를 썼다. 대단한 일기는 아니고, 무엇을 먹었다던가, 어떤 영화를 봤다던가, 누구를 만났다던가, 몇 번을 했다던가, 그런 정도의 일밖에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상당히 재미가 있다.

1971년 일기를 보면, 석간신문은 한 장에 15엔이다. [헤이본 펀치] 잡지는 80엔이고, 쇠고기 200그램이 180엔, 하이라이트 담배는 80엔, 콜라가 40엔으로 대충 현재 물가의 절반이었다.

그 해 1월 3일과 5일에는 눈이 내렸다. 1월 3일에는 눈이 10센티미터나 쌓였다. 이 날은 미타카 영화관에서 야마시타 고사쿠 감독의 [승룡]과 아쓰미 마리 주연의 [좋은 것 드리죠](좋은 타이틀이다)의 동시 상영을 구경했다. 5일에는 신주쿠의 영화관에서 [석양을 향해 달려라]와 [이지 라이더]를 보았다. [이지 라이더]를 구경한 것은 그것으로 세 번째였다.

1971년이라는 해는 대학의 데모가 일단 피크를 넘기고, 내부 투쟁으로 향하기 시작해서 상당히 복잡하고 암울한 시절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돌이켜보면 실제로는 매일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거나 영화 구경을 하면서 꽤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요즘 젊은이들은 돼먹지 않았다"느니 어쩌니 하고, 잘난 체할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이라는 것은, 특별히 대의명분이나 불변의 진리나 정신적 향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요컨대 예쁜 대학생과 데이트하면서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 지난날을 다시 생각해보면, 굉장히 긴장된 청춘 시절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는 법인데,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았고 모두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타성적으로 살아온 것이다.

옛날 일기를 읽고 있으면 그런 분위기가 절실하게 전해져온다.

 

<정든 고양이와 이별한 사연>

 

미타카의 아파트에서 2년쯤 살고 나서 분쿄쿠의 센고쿠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고이시카와 식물원 근처이다.

어째서 교외에서 다시 단숨에 도심으로 되돌아왔느냐 하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아내의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내의 친정집은 침구 상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트럭을 빌려 이사를 했다. 이사라고 해도 짐이라고는 책과 옷, 고양이 정도밖에 없었다.

고양이는 '피터'라는 이름이었는데, 페르시아종과 얼룩 고양이의 혼혈로 개만큼 커다란 수코양이였다.

사실은 침구 상점에서 고양이를 키울 수 없으니까 데려오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고 갈 수가 없어서 결국 데려가고 말았다.

아내의 아버지는 한동안 투덜거렸지만, 얼마쯤 지나자-나에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념해 주셨다. 어쨌든 모든 것을 금세 단념하는 분이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굉장히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 피터는 끝내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가장 곤란했던 것은 근처의 상점에서 쉴새없이 물건을 훔쳐오는 것이었다. 물론 본인에게는 죄의식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미타카의 숲속에서 두더쥐를 잡거나 새를 쫓아다니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라도, 나로서는 입장이 굉장히 곤란했다. 그러는 사이에 고양이도 점점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된 모양으로, 만성 신경성 설사를 하게 되었다.

결국 피터는 시골의 친지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그 후 그 녀석하고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전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근처의 숲속으로 들어간채, 집에는 거의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살아 있으면 열세 살이나 엘네살쯤 된다.

 

<더부살이 하던 처갓집>

 

분쿄쿠 센고쿠에서 있었던 일 또 한가지.

내가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아내의 친정집은 옛날 도쿠가와가 저택의 한쪽 구석에 있었다. 한쪽 구석이라고 해도 정원의 외따로 떨어진 구석 쪽이어서 특별히 유적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난처한 것은-난처하다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사실 이 집은 옛날의 지하 감방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처갓집 밑에는 그 옛날의 감방자리가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물론 유령이 나온다.

처음에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왠지 이상하게 축축하고 어둡구나 하는 것 밖에 느끼지 못했다. 또 밤중에 변소에 가거나 하면 묘하게 기분 나쁜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아내는 이따금 유령을 본단다. 유령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모습을 닮은건 아니고 흰 덩어리 같은 것으로, 그게 한참동안 집안을 둥실둥실 떠돌아다니고 나서 벽으로 빨려들어 간다는 것이다. 나는 본 적이 없으니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충 그런 느낌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시종일관 유령이라든가 UFO 같은 걸 본 적이 없다. 나에게는 아무래도 영감을 감지하는 능력이 거의 결여되어 있는 모양이다.

특별히 유령 같은 것을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런 능력이 없어도 별상관이 없지만, 그러한 것은 왠지 예술가 답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화가 중에는 1년 내내 유령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사람은 풍채나 화풍 등 여기저기에 요기가 감돌고 있어서, 누가 보아도 정말 예술가 같은 느낌이 든다. 나 같은 사람은 유령이 나오는 집에 1년씩이나 살았으면서도, 한 번도 유령을 보지 못한 인간이라 그런 사람 앞에 나서면 굉장히 주눅이 든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도 화풍으로 추측해볼 때, 유령 같은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무척 기쁘겠는데, 사실은 어떨까?

 

<내 첫 직장 첫 사업장 재즈 카페>

 

언제까지나 더부살이를 할 수도 없고 해서 처갓집에서 나와 고쿠분지로 이사를 했다. 어째서 고쿠분지로 이사를 갔느냐하면, 그곳에서 재즈 카페를 개업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취직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연줄이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 같은 데를 몇 군데 돌아다녀보았으나, 일의 내용이 하도 바보스러운 거라 그만두었다. 그런 일을 할 바엔 차라리 조그만 가게라도 좋으니까나 혼자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싶었다. 내 손으로 재료를 고르고, 내 손으로 물건을 만들어, 내 손으로 그것을 손님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일 말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재즈 카페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튼 재즈를 좋아했고, 재즈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자금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와 아내가 둘이서 아르바이트를 해 가지고 모은 250만 엔, 나머지 250만 엔은 부모님한테 빌렸다. 1974년의 일이다.

그 돈으로 꽤 산뜻한 카페를 차릴 수가 있었다. 그 당시 500만 엔이라는 돈은 거의 자본이 없는 사람이라도 무리를 하면 모을 수 있는 금액의 돈이었다. 그러니까 돈은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이디어 여하에 따라서는 어떻게든 스스로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쿠분지의 우리 카페 주위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는 즐거운 가게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고쿠분지나 구니다치 부근은 땅값이 너무 올랐고 건축비도 비싸져서, 역 근처의 15평에서 20평 정도의 조금 쓸만한 가게를 운영하려면 최저 2,000만 엔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 2,000만엔이라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보통 젊은 사람이 모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지금 '돈도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품고있는 젊은이들은 도대체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한때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폐쇄된 사회 상황이 무척 걱정이 된다. 

옆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한때 이혼한다는 점괘에 흔들렸던 얘기>

 

언젠가 내 담당 여성 편집자가 나와 혈액형이 같고 생일도 똑같다고 쓴적이 있다. 그럴 경우 우선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와 그녀 사이에 성격적인, 그리고 운명적인 공통점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나의 담당 편집자이기 때문에 충분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결과론부터 말한다면, 공통점은 물론 있다. 그러나 "역시 그렇군!" 하고 감탄할 정도의 현저한 공통점은 없다. 상이점보다는 공통점 쪽이 약간 많은 편이다.

하지만 [무밍]을 읽으면, 무밍 파파와 5분 차이로 태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악당이 되고, 한편 무밍 파파 쪽은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하니까, 생일이 같다 하더라도 그다지 공통점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별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조금만 달라져도 여러 가지가 확 달라지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대충 정오경에 태어났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운명을 점치는 것은 곤란하다.

3년쯤 전에 점성술에 정통한 어떤 유명한 여자와 동석할 기회가 있어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비교적 가까운 장래의 일을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정오 전과 후는 상당히 다릅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틀림없이 금년 내에 이혼합니다" 하고 단정하듯이 말했다. 나는 그렇게 되는 운명이라면 어쩔수 없겠군, 하고 생각하고서 예금 통장의 배분 방법을 궁리하고, 이혼 뒤의 처신법 등을 생각하면서 그 해를 보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혼하지 않았다. 별로 큰 부부 싸움도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매우 평온한 1년을 보냈다. 그 여자 점쟁이의 예언은 굉장히 잘 맞는다고하는데, 아마 나의 경우는 정오 전인지 이후인지가 분명치 않아서 운명이 미묘하게 달라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태어난 시간이 5분만 달랐어도, 나는 지금쯤 독신으로 살며 걸 프렌드가 열 명쯤 있고... 하는 신세로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 와서 아무러면 어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생두부 네 모를 단숨에 먹어치운 맛>

 

이 수필은 계속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삽화를 그려주고 있는데, 나로서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안자이 씨에게 엄청나게 어려운 테마로 그림을 그리게 해보려고, 내 나름대로 상당히 오랫동안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완성된 삽화를 보면 전혀 고생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고생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 것이 프로라 하더라도, 조금은 '난처하거나 어려운' 곤경에 빠뜨려 즐겨보려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식당차에서 비프 커틀릿을 먹는 롬멜 장군' 이라는 테마로 문장을 써 보았지만, 비프 커틀릿을 먹고 있는 롬멜 장군의 삽화가 제대로 붙어왔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결국은 어려운 테마를 내놓으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영원히 안자이 씨를 골탕먹일 수가 없었던 거다. 예를 들면 '낙지와 거대한 지네의 결투' 라든가, '수염을 깎고 있는 칼 마르크스를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는 엥겔스'와 같은 테마를 내놓아보았자, 안자이 화백은 틀림없이 가볍게 그려낼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안자이 씨를 골탕 먹일 수 있을까?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단순성이다. 예를 들자면 두부 같은 것 말이다.

신주쿠의 술집에 굉장히 맛있는 두부를 내놓는 집이 있는데, 나는 그곳에 처음 갔을 때 너무나 맛이 좋아서 두부를 한꺼번에 네 모나 먹고 말았다. 간장이나 양념 같은 것은 일체 치지 않고 그냥 새하얀, 매끈매끈한 걸 꿀꺽 하고 먹어치우는 것이다. 정말로 맛이 있는 두부는 쓸데없는 양념 같은 것을 칠 필요가 전혀 없다. 영어로 말하면 'simple as it must be' 라고나 할까? 그것은 나가노의 두부 공장에서 요릿집에 납품하기 위해서 만든 두부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맛있는 두부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동차 수출도 좋지만, 맛있는 두부를 없애는 국가 구조는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두부 먹는 방식>

 

안자이 화백을 그림의 단순함으로 골탕먹이기 위해서 두부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두부를 좋아한다. 맥주와 두부, 토마토와 풋콩과 가다랭이 말린 것만 있으면, 여름의 저녁은 극락이다. 겨울에는 삶은 두부, 기름에 튀긴 두부, 구운 두부 오뎅국 등 어쨌든 춘하추동을 불문하고 하루에 두부를 두 모는 먹는다. 우리 집은 요즘 밥을 먹지 않으니까, 실질적으로 두부가 주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친구가 집에 찾아와 저녁식사를 내놓으면 모두들 "이게 식사야?"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맥주와 샐러드, 두부, 흰 살 생선과 된장국으로 끝나버리니까 말이다. 그러나 식생활이라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어서, 이런 것들을 계속 먹고 있으면 그게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일반적인 식사를 하면 위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우리 집 근처에는 손으로 만드는 맛있는 두부 가게가 있어서, 무척이나 애호하고 있었다. 점심 전에 집을 나와 책방이나 레코드 대여점이나 게임센터에 갔다가, 분식집이나 스파게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반찬거리를 산 후, 마지막으로 두부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맛있는 두부를 먹기 위한 요령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두부를 살 것(슈퍼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집에 돌아오면 즉시 물을 담은 그릇에 옮겨 냉장고에 집어넣을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온 그날 안에 먹어야 한다. 그러니까 두부 가게는 반드시 집 근처에 있어야 한다. 멀리 있으면 일일이 부지런을 떨어가며 사러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언제나처럼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두부 가게에 들러보니까 셔터가 내려져 있고, '점포 임대함'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항상 싱글벙글 사람 좋던 두부 가게 일가가 돌연 가게 문을 닫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이다. 앞으로 나는 도대체 어디서 두부를 사란 말인가?

그까짓 두부가- 하지만 두부는 맛으로 버틴다

파리의 주부들은 빵을 사다놓지 않는다. 식사 할 때마다 그녀들은 빵가게에 가서 빵을 사고, 남으면 버리고 만다. 식사라는 것은 누가 뭐래도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부도 그것과 마찬가지여서 갓 사온 것을 먹어야 한다. 하룻밤 지난 두부를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사고 방식이다. 귀찮으니까 하룻밤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주의가, 방부제라든가 웅고제 같은 것의 주입을 초래하는 것이다.

두부 장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에 도니장국에 넣으라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열심히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건데, 모두들 아침에는 빵을 먹는다든가(우리 집도 그렇다), 슈퍼에서 파는 방부제가 들어 있는 좋지 않은 두부를 사먹거나 하니까, 두부 장수 쪽에서도 의욕이 떨어져 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두부를 만드는 우수한 두부 가게가 거리에서 한 집 한 집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요즘 세상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일을 하려고 하는 기특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두부라고 하면, 어렸을 때, 교토의 난센지 근처에서 먹은 말할 수 없이 맛있었던 삶은 두부 생각이 난다. 지금은 난센지의 삶은 두부도 완전히 관광화 되어버렸지만, 옛날에는 전체적으로 좀 더 소박하고 담백하며, 깊은 맛이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 집이 난센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따라서 자주 긴가쿠지 부근을 산책하고, 그리고 나서 그 근처의 두부 가게 뜰에 앉아 후후 불어가면서 뜨거운 두부를 먹었다. 이것은 뭐라고 할까, 파리의 길모퉁이에 있는 크레이프 행상과 비슷한, 서민을 위한 소박한 요리이다.

그러니까 최근의 코스로 해서 5,000엔을 받는 건 어딘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기껏해야 두부 아닌가!

기껏해야 두부, 그러나 두부는 두발로 딱 버티고 서서 맛으로 맞선다. 나는 그런 두부의 본연의 자세를 무척 좋아한다.

 

<가장 맛있는 두부>

두부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뭘까, 하고 한가할 때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정사를 한 뒤에 먹는 것이다.

에-, 이것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모두 상상이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경험담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난처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다.

우선, 오후 2시쯤에 거리를 산책하고 있는데, 나이가 30대 중반쯤 되는 요염한 부인이 "어머나!" 하고 깜짝 놀라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슨 일일까?' 하고 머뭇거리고 있자니까, 그 부인이 데리고 있던 다섯 살쯤 된 여자아이가 내 쪽으로 달려와서 "아빠!" 하고 부른다. 자세히 사연을 들어보니까, 작년에 사망한 그 여자의 남편과 내가 꼭 닮았다는 것이다. 그 부인은 "얘야, 이 분은 아빠가 아니야" 하고 아이에게 말하지만 여자아이는 "우리 아빠야-" 하고 내 손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나도 이런 걸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잠시 동안 아빠가 되어 주겠소" 하고 말하면서 함께 공원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사이에 아이는 지쳐서 잠이 들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은 정해진 코스여서 당연히 나는 두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 주는 김에, 그 미망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갖게 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일이 끝날 무렵이면 저녁때가 되고 집밖으론 찌르릉찌르릉 두부 장수의 자전거가 지나가자, 여자는 머리칼이 흐트러진 것을 걷어올리면서 "두부 장수 아저씨!" 하고 부른다. 그 미모의 미망인은 두부를 두 모 사가지고, 한 모에 파와 생강을 곁들여 맥주와 함께 내놓는다. 그리고 "우선 잠시 두부하고 들고 계세요. 금방 저녁식사를 준비할게요" 와 같은 애교섞인 말을 한다.

이러한 '우선' 막간을 때우는 것 같은 두부의 섹시한 뉘앙스가 더할 수없이 좋다.

그렇지만 나하고 꼭 닮은 남자와 결혼했던 그런 요염한 미망인을 찾는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되겠군, 하고 쉽지 않은 일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바람 같은 건 피울 수가 없겠지.

 

<'재수 좋은' 고양이를 만날 확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어제 우리 집 고양이가 등뼈가 어긋나서 입원을 했다. 이 고양이는 여덟 살 된 암놈의 샴 고양이로, '재수 좋은' 고양이다.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양이 중에는 '재수 좋은' 고양이와 '재수 없는' 고양이의 두 종류가 있다. 시계 같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만은 길러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외견상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다. 혈통도 믿을 수가 없다. 어쨌든 몇 주일 동안 키워보고 나서야 '응, 이건 재수가 좋은 놈이군' 이라든가, '아뿔사! 재수 없는 놈이군' 하는 것을 겨우 알 수 있는 것이다.

시계 같은 거라면 바꿔올 수도 있다. 그러나 고양이의 경우에는 그것이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해서 어딘가에 내다버리고, 그 대신에 다른 놈으로 사올 수도 없다. 이것이 고양이를 기를 때의 문제점이다. 재수 없는 놈은 없는 대로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재수 좋은 고양이를 만날 확률은 어느 정도냐 하면, 나의 오랜 경험으로 봐서, 대충 3.5마리에서 4마리당 한 마리 꼴의 확률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재수 좋은 고양이는 꽤 귀한 셈이다. 하지만 어떤 고양이가 재수 좋은 놈이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미묘하게 기준이 다르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 미인의 기준과 마찬가지다.

가장 재수 좋은 고양이는, 사실은 고쿠분지의 분식집에서 기르던 놈이었는데 기를 수가 없다는 이유로 수의사에게 맡겨졌고, 그게 우연히 우리 집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왠지 수상하다는 느낌으로 한동안 길러보았는데, 이게 실은 최고로 재수 좋은 고양이였던 것이다. 이런 일도 이따금 있는 법이다.

그 고양이가 우리 집에 온 게 한 살 반 때였는데, 그때 나는 스물 여섯살이었다. 지금 그 놈은 인간의 나이로 치면 쉰 살쯤 되고, 나는 인간의 나이로 서른 넷이 되었다. 성장하는 고양이의 몸 안에서는 인간의 약 4배의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쌍해진다. 인간에게도 재수 없는 인간과 재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하는 것은 나의 힘에 버거운 문제이다.

 

<나는 그 인기 있다는 가수가 싫다>

 

어째서 홀리오 이글레시아스가 그렇게까지 인기를 끌고 있느냐, 하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물론 잘 생긴 탓도 있다. 전형적인 라틴계 제비족의 얼굴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바보스러울 정도의 대규모적인 선전 탓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홀리오의 성공 비결은 그가 사상적으로 100퍼센트 텅 비어 있다는 데 있는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홀리오 외에도 사상적으로 텅 비어 있을 걸로 추측되는 대형 가수는 얼마든지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나 미조라 히바리도 그다지 고매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래에는 극히 자연스럽게 의도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홀리오의 경우는 머리도 텅 비고, 노래도 텅 비어 있는, 그 나이의 가수로서는 놀라운 경지에 도달해 있어서, 그러한 명쾌함이 중년 여성에게 '너무 좋아!'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경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암만 그래봤자 음악일 뿐이니까 좋고 나쁜 것도 없을 것이다. "콜트레인을 모르다니 한심하군" 하고 떠들어대는 인간이 우글거리고 있던 시대와 비교하면, 구질구질한 설명이 없는 것만큼,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감상을 말한다면,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라는 인간은 참으로 불쾌하다. 내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런 류의 미끈한 얼굴 생김새의 사내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지갑을 주워도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을 타입이다. 그런 인간은 5년쯤 도쓰카 요트 스쿨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령이 좋으니까 틀림없이 도중에 코치 같은 것으로 승진해서 타인을 두들겨패는 쪽으로 변신하게 될 게 틀립없다. 그런 인간인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홀리오 증후군의 여성들은 "그럼요, 무라카미씨야 그렇게 생각하겠죠" 하고 악의에 찬 말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내가 유달리 미남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는 기차안에서 식사하는 즐거움>

 

비록 메뉴에 비프 커틀릿이 없어도 식당차라는 것은 꽤 좋은 것이다. 뭐라고 할까, 옛날 풍의 식당 분위기가 나서 좋다. 먹기 전과 먹고 난 다음에 다른 장소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덜커덩덜커덩 하는 진동음도 좋다.

식당차에는 '스쳐가는 제도' 속에서, 내가 특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아침부터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레스토랑이나 아침부터 맥주 정도는 마실 수 있지만, 약간 시키기가 창피하고, 또 그다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식당차에서는 아침 10시경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까, 나 또한 마시고 싶어져서 주문을 하게 된다. 그래도 전혀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사실은 지금(물론 이 원고가 활자화될 때는 꽤 오래 전이 되겠지만),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향하는 특급 식당차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며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헴 에그와 샐러드, 토스트, 그리고 맥주이다. 이 헴에그의 햄이 또 굉장히 두껍다. 나도 이런저런 여러 가지의 아침식사를 해보았지만, 이렇게 두꺼운 햄은 처음이다.

옆좌석의 아저씨는 카레라이스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차창 밖은 온통 하얀색이어서 눈이 따끔따끔 아프다. 카레라이스라는 것은 남이 먹고 있으면 굉장히 맛있어 보인다.

 

<생소한 고장에선 이상하게도 영화관에 가고 싶다>

 

나는 3일 동안 삿포로에 있었다. 특별히 볼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내친 김에 혼자 한번 들러본 것뿐이다.

그러면 삿포로에서는 무얼 했는가 하면, 우선 맥주집에 들어가서 생맥주를 세 잔 마시고 점심식사를 했다(훗카이도에서 마시는 맥주는 왜 그렇게 맛있을까?). 그리고 나서 [람보]와 [소림사]의 동시 상영 영화를 보았다.

그 다음에 저녁을 먹고, 당연히 또 맥주를 마셨다. 그리곤 재즈 카페에 들어가서 위스키를 마셨다. 이튿날은 또다시 영화관에 가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탐정 이야기]와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 스트리트], 그러고는 [불꽃의 러너]를 보았다. 밤에는 또 술. 어째서 일부러 삿포로까지 가서 영화를 구경해야 했는지, 나로서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고장에 가면 이상하게도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국 각지의 참으로 많은 영화관에 들어가서 수많은 영화를 관람했다. 낯선 고장의 낯선 영화관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가 묘하게 몸에 스며들어 온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의 즐거움이 본질적으로 안타까움과 동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열여덟 살 때 시험 공부가 하기 싫어져서, 고베에서 배를 타고 훌쩍 규슈로 갔었다. 그리고 구마모토에 가서 영화관에 들어가 제임스 칸이 출연하는 [영광의 사나이들](좋은 영화였다)과 록 허드슨의 [눈가리개]를 동시상영으로 보았다.

영화관을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려니까, 어떤 여자가 다가와서, "500엔이면 되는데, 한번 하지 않을래요?" 하고 말을 걸었다. 500엔이라는 돈은 그 당시로서도 굉장히 쌌기 때문에 수상해서 거절하고, 다시 다른 영화관에 들어갔다. 도에이 계통의 영화관으로 요금은 500엔 정도였다. 그래서 '세상이란 참 이상한 곳이군' 하고 생각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때 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구경하는 것과 같은 요금으로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삿포로에는 열 개의 영화관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빌딩이 있었다. 정말로 굉장한 일이다.

대학의 영화과 입학-영화만 봤다 나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의 연극영화과라는 데에서, 영화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영화에 정통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사람에 비해서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학 교육이라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와세다의 영화과에 들어가서 좋았던 점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거다. 영화과에도 일단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원서로 읽는다든가 하는 강의가 있어서 예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학생 쪽에서는 '체! 이론만 해가지고 어떻게 영화를 알 수 있겠어?'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 무엇을 했느냐, 수업을 빼먹고 아침부터 [명화좌](옛날 명작만 상영하는 곳-역주)에서 영화를 보았다.

수업을 빼먹는다고 해도 영화과의 학생이 영화를 보는 거니까, 이것은 어엿한 공부다. 혼날 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학생 시절에는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1년에 200편 이상 보았다. 당시에는 아직 [피아] 같은 잡지가 없었으니까,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아다니거나 영화관을 찾거나 하는 것만도 무척 고생스러웠다.

영화 볼 돈이 없으면 와세다 대학 본부에 있는 연극박물관이라는 곳에 가서 낡은 영화 잡지에 실려 있는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시나리오를 읽는 것에 한번 익숙해지면 무척 재미가 있다.

본 적이 없는 영화 같으면, 그 시나리오를 따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쓴 빌리 와일더의 [선셋 스트리트]도 내게는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이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영화인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내 책을 사는 걸 서점에서 볼 때>

 

지난번에 간다의 산세이도 서점에서 책을 사는데, 같은 계산대에서 내가 쓴 책을 사고 있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 여성은 책을 2권 샀는데 그 중 한권이 내가 쓴 책이었다. 다른 한 권이 무었이었는지 그 당시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책의 저자는 자신이 쓴 책이 다른 어떤 종류의 책과 함께 구매되는가에 대해서 무척 흥미를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그 '이웃'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노력하는데,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이상하다고 하면, 서점에서 자신이 쓴 책이 팔려나가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도 상당히 이상한 일이다. 내가 처음 소설을 썼을 때 출판사로부터 "자신의 책을 사고 있는 사람을 서점에서 발견하게 되면, 그것은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해도 틀림없습니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과연 그렇겠다,하고 감탄한 기억이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자주 서점에 출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내 책을 사는 광경을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쓴 책이 팔려나가고 있는 걸 보는 것은 물론 기쁜 일이다. 책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읽어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어서, 책이 팔려나간다고 화를 내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기쁜가 하면 그런 건 아니고-잘난 체하는 것은 아니지만-거기에는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이건 뭐라고 할까, 비유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누드 사진이 실려 있는 잡지가 팔려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아가씨의 심경과 비슷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아가씨 몇 명이 남성 잡지의 핀업 걸로 실렸다.

"뭐, 그 아가씨가?" 하는 사람까지 화끈하게 옷을 벗어 버린 거다. 하지만 나는 그녀들의 누드 사진 자체를 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잡지가 나오고 3개월쯤 지나서 겨우 "사실은 제가요..." 하고 본인이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미가 무서운 이유>

 

전에 개미는 훌륭하다는 글을 썼지만, 반면에 개미라고 하는 동물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점 무서워진다. 어째서 무서운가 하면 개미들은 구멍 속에서 살고, 집단 행동을 하며,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개미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옛날에 개미가 핵실험으로 인하여 거대해져서 인간에게 덤벼드는 [거대개미] 어쩌고 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은 상상하기만 해도 끔직하다. 사자의 무리에게 습격을 당한다든가 그런 거라면 단념도 할 수 있겠지만, 거대한 개미에게 습격당해서 전신이 마비되는 액을 주사당하고, 그대로 어두운 굴 속으로 질질 끌려들어가 끈적끈적한 여왕 개미의 먹이가 된다고 생각하면,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전율을 느낀다.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도 영화에서 본 거지만, 아프리카의 원주민에게 사로잡혀서 몸의 부드러운 부분에 꿀이 칠해져 개미집 근처에 묶이는 장면도 있었다.

이 '몸의 부드러운 부분'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잔혹하다. 개미들 수만 마리가 달려들어서 그 부드러운 부분을 '짭짭' 뜯어 먹어가는 모습을 리얼하게 상상할 수 있다. 이것도 꽤 무섭다. 절대로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 몸의 부드러운 부분을 개미에게 뜯어먹히다니, 그건 죽어도 싫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그런 유의 괴물 영화가 상당히 많이 있었다. 그런 종류의 영화는 대개 변두리에 있는 3류 극장에서 구경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깨끗한 개봉관에서 보는 것보다 분위기가 있어서 그런대로 좋았다.

그 밖에도 [독거미 타란틀라]라든가, 그런 핵실험에 의한 거대 생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꽤 많았다. 거대 거미라는 것은 몸에 털이 잔뜩 돋아있어서 감촉상 기분이 나쁘다. 거대 거미의 거미줄에 걸려 죽는 것은 가장 혐오스럽게 죽는 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양이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

 

우리 집은 비교적(아니, 꽤)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 도마뱀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도마뱀이라는 것은 외견부터가 그다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하는 타입의 동물인데, 특별히 인간에게 이렇다 할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벌레는 잡아먹어 주고,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 내성적인 면도 있어서 결코 나쁜 성격의 동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는 아무튼 도마뱀을 못살게 구는 걸 세 끼 밥보다 더 좋아해서, 기회만 있으면 도마뱀을 학대하면서 놀곤 한다. 그러면 도마뱀은 학대 당하는 것이 싫어서 금새 꼬리를 잘라내고 도망친다. 자연계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해서, 고양이는 매번 도마뱀의 몸통은 쫓아가지 않고 잘려진 꼬리 쪽에 집착한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고양이는 잘려져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는 꼬리의 매력에 절대로 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마뱀은 살아남게 된다.

그래서 나는 바로 최근까지 도마뱀은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과학 잡지를 보니까, 도마뱀은 도마뱀대로 굉장히 고통스럽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꼬리를 잃은 도마뱀은 동료들 사이에서 상당히 제재를 받는다는 것이다.

꼬리가 없는 도마뱀은 꼬리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바보 취급을 당하고, 영토도 절반쯤 삭감당하며, 암컷도 상대를 해주지 않아서 꼬리가 제대로 자라날 때까지 상당히 어두운 생활을 보내게 된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읽으니 도마뱀은 정말로 불쌍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꼬리가 없어지면 동료들로부터 구박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꼬리를 잘라내고 고양이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는 슬픈 숙명은 도마뱀이나 인간이라는 구분은 뛰어 넘어 애달프다. 이제부터는 장난삼아서 꼬리를 잡아당기거나 하는 짓은 그만두고, 좀더 따뜻한 눈으로 도마뱀을 지켜보고 싶다.

 

 

<일본 잡지에 대담 기사가 많은 이유>

 

일본의 잡지에는 참으로 대담이 많다. 나는 외국 잡지로는 [롤링 스톤과 뉴요커], [에스콰이어], [라이프] 같은 것을 대충 훑어보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이런 잡지에 대담이 실린 것은 본 적이 없다. 한 번쯤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혀 인상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니까, 없었던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미국에서는 대담이라는 형식이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는데 일본에서는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지만, 미국에서는 대담이라는 장르가 없는 것은 그만큼 미국인이 대화에 대해서 신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의 경우처럼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네,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하는 투로 어물어물 그 자리를 넘기지 않고 좀더 깊이 파고들어가,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주시오." 하는 식으로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길어져서 잡지의 페이지에 모두 실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인은 역시 잔재주가 있어 잡담이 일단락되면, "그럼, 여기서 일단 결론 같은 걸 내봅시다." "그럽시다." 하는 식으로 멋지게 마감을 해버린다. 참으로 호흡이 잘 맞는 국민성이다.

또 한 가지 일본적인 것은 대담 교정쇄의 교정 보기이다. 그러니까 이야기한 것을 나중에 정정하는 것인데, 먼저 어느 쪽인가 한 사람이 자신의 파트를 정정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상대방에게 맞춰서 자신의 대사를 정정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호흡 맞추기가 어려워서,

"네, 먼저 하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먼저..."

하는 식이 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처럼 미묘하고 까다로운 일을 미국인이 할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일본의 특산품은 도요타와 파나소닉뿐만이 아닌 것이다.

또 다른 일본적 '대담 풍경', 현실적인 얘기를 하자면 대담 프로의 개런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원로작가의 경우는 알 수 없지만, 나 정도의 수준이라면 굉장히 싸다. 그 대신에 비교적 좋은 식사를 대접받는다. 좋은 식사라는 것은, 자기가 직접 돈을 내고서까지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 식사를 가리킨다. 술도 나온다. 충분히 마시지 못한 사람에게는 '2차'라는 것도 있다. 그런 것으로 개런티가 낮은 것을 벌충하려는 것이다.

출판사 직원의 말을 빌리면, 본래 작가들은 대개 가난뱅이라서 대담할 때가 아니면 맛있는 것을 얻어먹을 수가 없으니까 이따금 작가에게도 호강을 시켜주어야겠다는 편집자의 따뜻한 마음의 배려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렇구나, 그게 마음의 배려로구나!' 하고 시나 마코토풍으로 감탄하게 되지만,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역시 식사는 맥주와 메밀국수 정도로 좋으니까 개런티를 올려주었으면 한다. 게다가 마음의 배려라고 말하면서 편집자도 꽤 열심히 먹고 있지 않은가,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맞선' 보는 것과 똑같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요릿집의 객실에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두 사람을 편집자(중매쟁이)가 소개시켜주고, 잡담 같은 것을 하면서 그 자리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그게 일단락되면 "그럼, 다음에는 당사자끼리 적당히 얘기를 나누세요" 하는 단계가 된다.

이것은 이미 완벽한 '맞선'이다. 녹음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뿐이다. 그리고 개중에는 대담으로서 서로 알게 된 남녀가 실제로 인연을 맺는 경우도 있는 모양으로, 이 정도까지 되면 정말로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건 그렇다치고, 분명히 이러한 '하여간 적당히 얘기를' 나누는 방식을 미국의 편집자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아내의 유명인사를 식별하는 눈>

 

나는 지금까지 이른바 '유명 인사'를 그다지 만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오로지 내 눈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깊은 의미는 없다. 눈이 나쁘니까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똑똑히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경우라면 나는 비교적 주위의 상황에 대해 부주의한 편이라서, 자칫하면 여러 가지 것을 보지 못하고 넘겨버리는 수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한테 자주 "무라카미는 스쳐지나가도 인사 한 번 안하더라고" 하고 비난을 당한다. 그런 이유로 유명 인사와 마주쳐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리게 된다.

그런데 내 집사람은 그런 일에 관해서는 참으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어서, 아무리 혼잡한 곳에 있어도 어김없이 유명 인사의 존재를 간파하고 만다. 그런건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과 함께 있으면, "아, 나카노 료코가 스쳐지나갔어요"라든가, "저쪽에 구리하라 고마키가 있어요"하고 가르쳐주지만, 내가 "응? 어디 어디?"하고 둘러볼 무렵에는 모두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심할 때에는 "아까 찻집에서 당신 옆에 야마모토 요코가 앉아 있었잖아요" 하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건 그때 그때 은밀히 가르쳐주면 좋잖아, 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이 든다.

잘 생각해보면 야마모토 요코의 맨얼굴을 보는 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역시 보지 못해서 '손해를 본 것 같은'생각이 든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바라기 현 니하리 군에 사시는 아라카와 마사히코 씨,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6월 5일에 신주쿠 '비자르' 앞에서 당신이 본 사람은 나입니다. 옆에 있던 여자는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었을 때, 한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역시 집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일하던 레코드 가게에 왔던 톱가수 후지 데이코 학생 시절, 신주쿠의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아마 1970년의 일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어쨌든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가 일본에 와서 고라쿠엔 구장에서 콘서트를 한 해이다(그때가 그립다). 그 레코드 가게는 무사시노 관의 건너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팬시점으로 변했다. 당시는 아직 무사시노 관이 없었다. 그 옆 빌딩의 지하에는[OLD BLIND CAT]이라는 재즈 바에 있어서, 일하는 틈틈히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언젠가 내가 근무하고 있던 레코드 가게에 후지 게이코가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여자가 후지 게이코라는걸 전혀 몰랐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검은 코트에 화장도 하지 않고, 몸집은 왜소하고,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느낌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당시의 후지 게이코라고 하면, 혜성같이 나타나서 히트 곡을 연속적으로 내놓은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였다. 지금의 야마구치 모모에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혼자서 마음대로 신주쿠의 거리를 걸어다닐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내가 일하고 있는 레코드 가게에 들어와, 무척 미안하다는 얼굴로 "저어, 잘 팔리고 있나요?" 하고 생긋이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매우 느낌이 좋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데리고 나왔다.

"아, 잘 팔리고 있습니다!" 하고 주인이 말하자 그녀는 다시 생긋이 웃으면서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하곤, 신주쿠의 밤거리로 사라졌다. 주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런 일이 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는 거였다. 그것이 후지 게이코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전혀 엔카(애조를 띤 유향가-역주)를 듣지 않지만, 지금까지 후지 게이코라는 여성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사람은 자신이 유명 인사라는 것에 평생 익숙해질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을 그때 받았다. 그 다음에 이혼을 하고 개명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분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렵고 존경스런 작가 요시유키 씨>

 

요시유키 준노스케라는 사람은 우리 젊은 세대, 신진 작가들에게는 외경의 대상이 될 만한 분이다. 그러나 요시유키 씨가 왜 그렇게 두렵고 우러러 볼만한 분인가를 묻는다면 잘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밖에도 유명한 작가나 훌륭한 작가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그렇지도 않을까) 많이 있지만, 특히 요시유키 씨에 한해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는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요시유키 씨는 내가 문학 잡지의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의 심사위원으로 일단 신세를 진 분이기도 해서, 어디서 만나거나 하면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러면 "얼마 전에 자네가 쓴 글 꽤 재미있더군" 이라든가, "최근에는 눈이 나빠져서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열심히 쓰게나" 하고 말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식으로 다정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거나 하면 "이보게, 그건 쓸데없는 괜한 짓일세" 라든가,"아, 촌스런 얘기는 그만두지" 하는 식의 핀잔을 주고 다른 곳으로 훌쩍 가버리곤 한다. 이러한 타이밍의 절묘함이 무섭다고나 할까, 나 혼자 멋대로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래서 요시유키 씨 옆에 있을 때는, 내가 먼저 자진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본래가 사람들 앞에 서면 말수가 적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전혀 전혀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편안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네 번쯤 술집에서 요시유키 씨와 동석한 일이 있지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요시유키 씨가 그런 장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게 또 정말 모를 일이다. 뭐 아무래도 좋은 무익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다. 무익한 이야기가 무익한 곡절을 경유해서, 보다 무익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리고 밤이 깊어간다. 나도 상당히 무익한 편이지만, 아직 젊은 탓으로 좀처럼 그 정도로까지는 무익해질 수가 없다. 언제나 감탄하고 만다. 그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호스티스의 유방을 은근히 주무르는 솜씨 또한 우러러 볼만하다. 역시 누가 뭐래도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다.

 

<내 카페에서 일했던 종업원>

 

야마구치 마사히로 씨는 그다지 유명 인사는 아니지만, 일종의 유명하다는 게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고 있어 여기서 특별히 언급해보기로 하겠다.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상업 디자인과 출신인데, 내가 옛날에 고쿠분지에서 경영했던 재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었다.

야마구치는(점점 호칭이 경박해진다) 나쁜 인간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능에 가까운 종업원이었다. 거의 일을 하지 않고, 종업원 할인 가격에 그것도 외상으로 술만 퍼마시고, 미술적 재능도 없고, 성적도 나쁘고, 아가씨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그 야마구치로부터 얼마 전에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비렁뱅이 노릇이나 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놀랍게도 '학생 원호회'의 광고를 맡고 있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 원호회' 라면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를 발행하고 있는 대단한 회사이다. 그래서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하고 물어보니까 "광고를 제작하고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출세를 한 것이다. "하루키 씨, 소가 나오는 텔레비젼 광고 있잖아요? 그거 말이죠, 이토이 씨하고 내가함께 만들었다고요" 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젼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째서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 CF에 소가 나온단 말인가?

"그럼 후지산이 학생복을 입고 쑥 앞으로 걸어나와서, '인간이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CF도 모르세요?"

텔레비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광고를 볼 턱이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말을 듣고,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더할 나위 없이 낙담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1)흥미가 없는 분야에서 아무리 유명해져도, 그런 거 나는 모른다.

(2)무사시노 미술대학의 성적 평가는 믿을 수가 없다. 야마구치, 또 진구 야구장의 박스석 초대권 좀 보내주게나.

 

<버릴 책과 간수할 책>

 

우리 집 책의 숫자가 불어났기 때문에 지난번에 책장을 샀다. 직업상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책이라는 건 자꾸만 불어나기 마련이다. 화가 나서 3분의 1정도는 팔아버릴까 생각하고 아침부터 선별 작업에 착수했으나, 막상 처분하려고 하니까 '이건 이미 절판되었고'라든가, '다시 또 읽을 필요가 있으니까'라든가, '어차피 팔아보았자 제값 받기는 틀렸고' 하는 식이어서 책의 숫자가 조금도 줄어들지를 않는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원서로 신간 하드 커버를 사왔는데, 읽기도 전에 번역판이 이미 나온 경우이다. 번역서가 있는데 일부러 영어로 책을 읽을 마음은 생기지 않고, 영어책 같은 것은 팔아도 제값을 받지 못하니까, 정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보관해둬도 소용이 닿을지 안 닿을지 잘 알 수 없는 잡지도 난처한 물건이다. 예를 들면 [우레카]라든가 [키네마 순보], [뮤직 매거진]이나 [미스터리 매거진], [스튜디오 보이스], [광고 비평] 같은 내버리고 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지금까지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나 특별히 아무 생각 없이 보존하고 있던 오오하시 아유미 편집장 시대의 월간 [헤이본 펀치] 30권이나, 창간 당시의 [앙앙] 50권, [영화예술] 3년치의 잡지들은 지금도 꽤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보존이 필요한지 어떤지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다.

요리 페이지를 좋아해서 [가정 화보]는 보존하고, [에스콰이어] [뉴요커] [피플]은 일에 필요하기 때문에 따로 보관해두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정말로 짜증스러워진다. 특별히 내가 물욕이나 소유욕이 강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짐이 불어나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는 이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라든가, [피아] 같은 타입의 정보지는 참으로 속이 편하다. 그 기간이 지나가버리면 미련 없이 내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독수리가 토지를 소유한 이야기>

 

내가 자주 가는 외국 서적 전문의 헌책방이 간다에 있다. 이 책방의 좋은 점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한군데에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진품이나 쓰레기 같은 책이나 가격이 일률적이라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렇게 태평스럽게 장사하는 곳이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려서 서운하기 짝이 없다. 특히 중고 레코드 가게에 그러한 경향이 강해서, 약간 진귀한 레코드 같으면 상당히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

옛날에는(그래 보았자 10년 쯤 전이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예를 들면 말월드론(재즈 피아니스트)의 [레프리 얼론] 오리지널이라든가, 몽크의 보그10인치 오리지널 같은 것이 잘 뒤져보면 중고품 가게의 구석에 1,000엔 정도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찾아내는게 취미여서 학생 시절에는 도쿄 시내의 레코드 가게라는 가게는 모조리 뒤지고 다녔지만, 최근에는 그런 '횡재거리'가 걸리는 횟수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세상사는 재미와 꿈이 사라진 듯해 삭막하다.

그런 점에서 간다에 있는 외국 서적 전문의 헌책방은 지금까지도 싼 가격으로 재미있는 것을 살 수가 있어서 귀중한 존재다. 옛날부터 있는 유명한 책방이라서 그 방면의 동호인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다만 이 책방은 책이 장르별로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모든 책이 뒤죽박죽으로 꽂혀 있거나 쌓여 있기 때문에, 원하는 책을 찾아내기가 극히 어렵다. 특히 페이퍼 백의 원서 등표지만을 수천 권씩 살펴나가는 것은, 그다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행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책방에 들어가면 한 시간 정도는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가 있으며, 덕분에 다른 책방에서는 거의 손에 넣을 수 없는 진귀한 책을 상당히 많이 찾아낼수가 있었다.

다만 이 책방의 주인이 손수 만들어 붙인 책 띠에 쓰여 있는 일본어 타이틀만은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The Eagle HasLanded(독수리는 땅에 내렸다)'라는 타이틀이, '독수리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로 둔갑하니, 작자인 잭 히긴즈도 깜짝 놀랄 거다. 하지만, 그런 유의 재미가 있으니까 나도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내 독서 이력서의 서막 부분>

 

어릴 때 외상으로 책을 살 수 있는 것만큼 사치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집은 극히 평범한 보통의 가정이었지만, 아버지가 책을 좋아 하셨기 때문에 내가 근처에 있는 책방에서 외상으로 좋아하는 책을 사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하지만 만화나 주간지 같은 것은 안 되고, 제대로 된 책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외상으로 좋아하는 책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었고, 그 덕분에 남못지 않은 독서 소년이 되어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깜짝 놀라겠지만 내가 살고 있던 고장에서는 어린이가 외상으로 책을 사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내 친구들 가운데서도 몇 명쯤은 그런 아이가 있어서 책방의 계산대에서, "에-미도리가오카의 XX라고 달아주세요"라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특권을 가졌던 어린이가 모두 독서광이 되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바로 그 점이 불가사의하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옛날 이야기를 계속하면 그 당시(1960년대 전반) 우리 집은 매달 가와데보쇼의 [세계 문학 전집]과 주오코론샤의 [세계의 역사]를 한 권씩 서점에 배달해 달라고 해서, 나는 그걸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면서 10대를 보냈다.

그 덕분에 나의 독서 범위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외국 문학 일색이다.

요컨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나 할까, 최초의 우연한 만남이나 환경에 의해서 인간의 취향이 대충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우리 집에서 주문해 보았던 것이 [일본 문학 전집]이나 [일본의 역사]이고, 맨처음 읽은 책이 [파계]였다면, 나는 지금쯤 딱딱한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외상으로 책을 산 적이 없다. 신용 카드로 사려고 생각하면 살 수 있겠지만, 왠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아 현금으로 지불하고 만다. 역시 "XX에 사는 무라카미인데 외상으로 달아놓아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인회를 하지 않는 이유>

 

책이 출판되면 반드시 사인회에 대한 요청이 서점으로부터 들어오는데, 나는 이 사인회 하는 게 특별히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귀찮고 부끄럽다는 생각에 사인회만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작가가 사인회를 하고 있는 걸 들여다보는 것은 싫지가 않아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며 '꽤 좋은 구두를 신고 있군' 이라든가,'글씨 가지고 멋 되게 부리네'. '사진보다는 상당히 늙었는 걸' 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절대로 사인회는 하지 않는 것이다. 사인회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든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인회에서 가장 난처한 일이 있다면 사인해 달라는 손님이 오지 않는것이다. 팬들이 서점 주위를 일곱 바퀴쯤 에워싼 채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지만, 좀처럼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않는다. 무라카미 류 씨조차도 "그게 말이야, 그 행렬이 한참 동안 뚝 끊어질 때가 있다니까" 하고 말할 정도니까, 다른 작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내가 시부야의 세이부 백화점 서적 매장에서 본 사인회를 예로 들면, 20분 동안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은 모 작가가 있었다. 이 작가의 맞은편 쪽에서는 다케미야 게이코(만화가)의 사인회를 하고 있었는데, 그쪽은 밀고당기고 난리법석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모 작가도 따분했는지ㅡ 다케미야게이코 쪽을 구경하느라 기웃거리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정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난처한 꼴만은 절대로 당하고 싶지 않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그건 그렇고 사인할 책 말인데, 예를 들어 헌책방에 내가 사인한 책을 가져가면 비싸게 쳐주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다. 헌책방의 주인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사인이 있어서 비싸지는 책은 기껏해야 엔도 슈사쿠나 가이코 다케시 같은 세대까지이고, 그 뒤의 젊은 작가의 서명 같은 건 책의 얼룩같은 거란다. 얼룩이라니, 해도 너무한다!

 

<경찰과 불심 검문>

 

학생 때(학생 데모가 심할 때의 일이다), 길을 걸어가고 있으면 자주 경찰관에게 불심 검문이라는 걸 당했다. 어디에 살고 있느냐, 어디에 가는 길이냐, 하고 꼬치꼬치 물어볼 때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러냐,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거냐, 하고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어느 틈엔가 경찰관에게 검문을 당하는 일이 싹 없어지게 되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온화한 얼굴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회가 평화로워졌기 때문인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지만, 불심 검문이라는 것은 당하지 않으면 당하지 않는 대로 공연히 서운한 느낌이 든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할 일이 없을 때, 경찰관을 만나거나 하면, '이쪽으로 와서 뭐라도 물어보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지만, 경찰관이라는 것은 이상한 존재여서, 그럴 때는 절대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눈이 딱 마주쳐도,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저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고이시카와 쪽에 살고 있었을 무렵, 병에 걸린 고양이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가축 병원까지 운반하려고 하다가, 근처에 있는 파출소 앞에서 불심 검문을 당한 일이 있다. 마침 쓰치다 경시총감의 집이 폭파당한 이튿날이라서 경찰관도 흥분해 있던 모양으로, 세 명의 경찰관이 우르르 달려와 나를 에워싸더니, '가방 좀 열어보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병든 고양이를 가방에 넣어 끌어안고 걷는 내 모습이 영락없이 폭발물을 운반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그렇구나,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실은 고양이입니다" 했더니, 어쨌든 열어보란다. 마지못해 가방 뚜껑을 여니까, 안에서 "야옹!" 하고 고양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게 해서"앗! 고양이군요!" 하는 소리와 함께 불심 검문은 미소로 끝이 났다.

그러나 사실은 고양이는 위장을 하기 위한 것이고, 그 밑에는 진짜 플라스틱 폭탄이... 하게 되면, 이야기로서는 재미가 있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고양이뿐이었습니다. 피스, 피스(승리의 V자 표시의 일본식 표현).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쓴 이야기>

 

옛날에, 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경찰서로 끌려가 진술서를 쓴 일이 있다. 그때 나를 담당한 형사는 30대 중반이었는데, 어딘지 모습이 폴 뉴먼과 매우 비슷했다. 폴 뉴먼을 닮았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핸섬한 건 아니고, 그냥 세부적인 특징이 닮은 거였지만, 어쨌든 간에 아주 닮았다. 게다가 그형사는 VAN 재킷 풍의 흰 버튼 셔츠를 입고 있었다. 폴 뉴먼을 꼭 닮은 형사가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있으면, 이것은 이미 완벽하게 사우스 브롱크스의 세계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유니크한 체험이었다. 안자이미즈마루 씨의 작품 [보통사람]에 나오는 경찰서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건 그렇고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쓴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경찰관의 작문 능력은 일반인의 그것에 비해서 극단적으로 낮다. 문법도 그렇고 맞춤법도 그렇고 정경 묘사나 심리 묘사도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다.

진술서라는 것은 대게 경찰관이 질문을 하면 그것에 관해 진술자가 대답한 것을, 경찰관이 '나는 ...'이란 1인칭으로 문장화하여, 그것에 진술자가 서명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 폴 뉴먼 씨의 경우도, 정말로 기가찰 정도로 지독한 문장이었다. 소리 내서 읽는 걸 듣고 있으려니까, 모조리 뜯어고치고 싶어졌다. 오자도 엄청 많았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굴욕적인 것은 폴 뉴먼 씨가 연필로 쓴 초서 위에, 그것과 한 글자 한 구절도 틀리지 않게 내가 볼펜으로 덧써가며 정서를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볼펜으로 그 문장을 베끼고 나면 폴 뉴먼씨는 지우개로 자기가 연필로 쓴 글자를 벅벅 지우고, 내가 마치 처음부터 자필로 그 진술서를 쓴 것처럼 꾸미는 것이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경찰에 걸리면 아무튼 득이 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정보>

 

그리스라는 나라는 이상한 곳이어서,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어도 서점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가뭄에 콩나듯 있어도 엄청나게 작고 손님도 없다.

수도 아테네가 그러니까 지방에 가면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책 따위는 모두들 읽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앉아 이러쿵 저러쿵 토론을 하면서 나날을 보낸다. 그 정도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정보의 전달 방법도 일본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본 같으면 정보는 우선 텔레비젼으로 보도되고, 신문으로 퍼져나가고, 잡지로 보충이 되고, 서적에 의해서 확인이 되는 셈인데, 그리스에서는 일단 정보가 들어오면, 마을의 아저씨들이 카페에 모여서 그 정보에 대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끝도 없이 지껄여대고, 그 결과로 막연한 여론 같은 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여론 형성은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만큼 단단히 조리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버스를 타고 시골을 여행하고 있으면, 내가 있는 곳으로 그리스인 할아버지가 다가와서는 골짜기의 마을을 가리키며, 그리스어로 뭐라고 이야기를 걸어온다. 자세히 들어보니 '1944년에 독일군이 여기서 마을사람들을 250명이나 학살했다' 는 내용의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면 버스안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노인에서 어린이까지 '맞아요, 맞아요' 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확인하거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누군가가 "우리들은 나치스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하고 말하면, 또다시 모두들 "그래요, 맞아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40년이나 된 옛날 일인데도, 모두들 그 학살을 마음속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건 지나치게 완고하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뿐이겠지만, 반대로 너무 간단하게 매사를 강물에 흘려버리거나, 사고 방식을 10년마다 경솔하게 바꿔버리는 요즘의 국민성도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쪽이 좋으냐고 물어보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너무 행복하다는 어느 그리스인 이야기>

 

그리스에 미케네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슈리만이 아가멤논의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유명하다고는 해도 미케네는 정말로 조그만 마을이어서, 규모로 보면 다케시다 거리 정도일 것이다. 관광 버스가 오면 사람으로 넘쳐나지만, 버스가 가버리면 잡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을로 되돌아간다. 지리적으로는 아테네로부터 당일 귀환 버스 코스에 들어가니까, 일부러 여기에서 숙박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이 미케네 마을이 참 좋다.

미케네 마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은 '르 쁘티 플라넷(작은 행성)'이라는 이름의 호텔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감각으로 말하면 호텔이라기보다는 팬션(민박식의 작은 호텔)이나 '산장' 같은 느낌에 가깝다. 설비도 그리스의 호텔 95퍼센트가 그런 것처럼 생각한 것보다 엉터리이고, 방도 청결하다고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의 호텔은 아담하고 안정감을 준다.

'르 쁘티 플라넷'은 전 그리스 공군 조종사와 그의 빼어난 미인 붕니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다. 남편은 요리를 잘 만드는 편으로 상당히 본격적인 가정식 그리스 요리를 제공해준다. 그는 폭격기를 타고 있었으나 키프로스 분쟁 때 전쟁이 지긋지긋해져서 공군을 제대하고 호텔 주인이 되었다는 사람이다. 어린 딸이 둘 있는데 둘 다 모두 무척 귀엽다.

밤이 되면, 미케네는 캄캄해진다. 이런 암흑은 달리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로 어둡다. 나는 베란다의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으면서 쌀을 곁들인 생선 요리를 입에 집어넣고, 아가멤논 산 위의 봉화불을 바라보며 주인과 잡담을 한다. 그는 즐거운 듯이 나날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행복한 것 같군요"하고 나는 묻는다.

"물론이죠"라고 그는 대답한다.

"너무 너무 행복하지요"

나는 혼자 생각해 보았는데, 일본인 가운데 도대체 몇 사람이나 "행복합니까?" 라는 질문에, 이런 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영화의 엉터리 자막 이야기>

 

존 스타제스 감독의 [황야의 7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7인의 사무라이]를 스타젝스가 각색하고,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맥퀸이 출연해서 유명해진 영화로, 본 사람도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영화속에서 제임스 코번의 냉정한 모습과 로버트 본의 과장된 촌스러운 연기를 특히 좋아하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의 본 줄거리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내가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이 영화의 첫부분이다. 영화는 우선 멕시코의 한 마을을 멕시코인 산적이 습격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그것대로 전혀 상관이 없지만, 그 멕시코인끼리 영어로 지껄여대는 것이다. 그것도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멕시코 사투리 영어로, "나하고 너, 친구다", "너희들이 수확을 빼앗아가면 우리 마을 굶어 죽는다"라는 식이다. 그런 바보스러운 대화를 할 바에는 제대로 된 스페인어로 얘기를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미국인의 자막 혐오증은 상당히 철저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아디오스'라든가, '바이아콘디오스' 같은 인사말은 모두 스페인어이다. 하긴 나처럼 그 바보스러움이 마음에 들어서 몇 차례씩이나 [황야의 7인]을 되풀이해서 보고 있는 멍청한 인간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헐리우드의 사정도 변해서,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인은 독일어를,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를 정확히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소피의 선택] 같은 영화 속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아우슈비츠의 장면은 전부 독일어로 되어 있다.

얼마 전에 재일 미국인과 [소피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는"나는 독일어를 모르고, 일본어 자막도 읽을 줄 모르니까, 아우슈비츠 장면은 전혀 모르겠더라고" 하고 불평을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보기보다는 피곤하고 불편한 것인 모양이다.

 

<끝으로 젊은이에게 보내는 메시지>

 

나는 비교적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서 1년 이상 연재를 계속하는 일은거의 없지만, 이 에세이는 1년 예정이었는데 1년 9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것은 바로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 덕택이다. 이번에는 옆에 어떤 그림이 붙을까 하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글이 써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주에는 무얼 쓸까? 쓸 게 없는 데 난처하군' 하는 경우는 없고, 매주 '자아, 그러면 이번에는 ...' 하는 기분으로 쓱쓱 써 나갔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이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라는 잡지가 주로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격려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허리 근처까지 찰랑찰랑한 중년의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어서(미즈마루 씨는 가슴 근처까지), 특별히 새삼스럽게 젊은 사람들에게 아첨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을 향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물론 젊으니까 좋다거나 젊으면 좋다고 하는 얘기도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젊은 세대 특유의 오만함이나 무신경함이 있어서 이따금 짜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의 오만함이나 무신경은 그것만으로 독립해서 기능하고 있고 권력에 직접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만큼 젊은이들을 상대하고 있으면 안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 세대쯤 되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권력을 꽉 거머쥐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뒷말을 들을지도 모르니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하여간 그런 연유로 젊은이를 상대로 1년 9개월 동안 이 연재를 잡담식으로 계속 써온 느낌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메시지나 제안이나 불만 같은 것은 특별이 없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나이를 먹어주기 바란다.

나도 그런 식으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남들과 같은 정도의 중년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왜 1년의 첫달은 즐거운 달일까>

 

옛날부터 설날이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필연성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동지의 이튿날부터 신년이 된다고 하는 쪽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왜 1월 1일이 1년의 시작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물론 어떤 필연성은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가 수천 년씩이나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그러한 습과을 꼬박꼬박 지켜왔을리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조사해보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조사를 해보지 못하고 있다. 머잖아 꼭 알아보아야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설날에 대해서는 비교적 회의적인 편이다. 학생 시절에도 설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집에 돌아가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을 했느냐 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연말부터 설날 연휴까지 하는 아르바이트에는 특별 수당이 붙으니까 득이다. 주위 사람들은, '정월까지 일을 하다니 고생이겠군' 하고 말해주지만 이쪽으로서는 설날 같은 것은 애초에 신용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보고 세배를 올리거나 텔레비전의 시시한 프로를 보거나 하는 것보다는 일을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

특히 좋았던 점은 섣달 그믐날 밤에 신주쿠의 올 나이트 영화관을 차례차례 방문하는 일이었다. 밤 10시부터 시작해서 아침까지 전부 6편 정도의 영화를 본다. 가부키초(도쿄의 영화관이 늘어선 환락가)의 도에이 영화관을 나오면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있어서, 무심하게 설날을 맞이하는 분위기도 꽤 쓸 만한 것이었다. [가요 청백전]이라든가 [가는 해 오는 해] 같은 무의미한 프로는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작년 섣달 그믐날에 오래간만에 가부기초를 걸어보았더니, 올 나이트 영화관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까, 요즘의 종업원이나 아르바이트 학생은 설날 아침만큼은 집에서 지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설날 아침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과연 특별한 것이 있을까?

 

<올해엔 설날은 비교적 즐겁다라고 쓰고 싶다>

 

작년 정월 나는 '설날 같은 것은 조금도 즐겁지 않다'는 의미의 내용을 썼는데, 금년에는 설날은 비교적 즐겁다는 식으로 써보고 싶다. 나는 그런것을 꽤 좋아한다.

때때로 혼자 토론회를 벌이며 즐기곤 한다. 가령 '인간에게는 꼬리가 있는 편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식의 테마로 꼬리 지지파 A와 꼬리 배척파 B를 교대로 혼자 해가면서 말이다. 그런 걸 하고 있노라며, 인간의 의견 혹은 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애매모호하고 임시변통적인가 하는 것을 잘알 수 있다. 물론 그 애매모호하고 임시변통적인 점이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하여간 설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다.

설날이 되면 우리 집에선 일단 설 음식 같은 걸 만든다. 연말에 집사람과 함께 쓰키지의 생선 시장에 가서, 방어니 다랑어니 새우니 야채 따위를 한아름 사가지고 와 설 음식을 잔뜩 만든다.

솔직히 말해 나는 설 음식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나는 대체로 고기나 기름기가 많은 것을 거의 먹지 않기 때문에, 생선이나 야채 지진 것을 조물조물하게 잔뜩 늘어놓은 잔치 음식을 끔찍이 좋아한다. 한 달 정도 설 음식을 계속 먹어대도 아마 물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떡국도 좋아한다. 우리 집 떡국은 내가 고기를 싫어하니까 다랑어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서, 방어 살과 새우, 파드득 나물, 버섯, 어묵, 당근, 무와 토란, 구운 떡을 집어넣은 잡탕이다. 이틀째에는 방어 대신에 연어 살과 연어 알, 사흘째에는 삼치를 집어넣는다. 이런 것이 식탁에 오르면 마음속 깊이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잔뜩 음식을 만들어도 우리 집은 단 두 식구인데다 나의 동반자는 본래 소식을 하는 편이고, 나는 절식을 하고 있으니까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다. 그래서 매년 사흘째에는 두 사람이 모두 대식가 친구 부부를 초대해서, 펠리니의 영화처럼 실컷 먹고 마시게 하도록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오면 대형 정종통도, 남아 있던 포도주도 깨끗이 비워지고, 그날이 지나면 내버려야 할 음식도 버리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고맙기 짝이 없다. 식사가 끝나면 스크램블 게임을 하거나 마작을 하면서 즐겁게 논다.

먹는 것 외에 설날의 좋은 점이라고 하면, 우선 하늘이 깨끗해지고 거리가 조용해지는 것일 거다. 트럭이나 그런 대형 자동차의 수도 적어진다. 나는 자동차라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엔 길을 가득 메우던 그 많은 자동차가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는 걸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한 기분이 된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거리를 조깅하면 정말 기분이 상쾌하다.

그러나 즐겁다 즐겁다 해도, 도쿄의 도심에 살면서 설날을 맞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 동안 센디가야에 살았는데,그때는 정말로 재미있게 설날을 보냈다.

우선 섣달 그믐날 저녁때 걸어서 롯폰기에 있는 메밀 국수집 마미아나에가서 메밀 국수를 먹고, 신주쿠로 나와 술을 마시고, 가부기초를 어슬렁거리다가 영화 구경을 하고, 그리고 나서 하라주쿠에 가서 도고 신사를 기웃거리다 길흉을 점치는 제비를 뽑고,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레코드가게의 올 나이트 바겐 세일을 기웃거리고, 노점에서 낙지 구이를 사먹고, 그리고는 걸어서 센다가야로 돌아와, 하토노모리 신사에서 제주를 얻어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명절 음식을 먹고, 뜨거운 우동을 먹으면서 '홀 앤드오츠' 의 레코드를 듣고 나서 잠이 드는 스케줄이다. 이것이 섣달 그믐날밤이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일찍 일어나서 아카사카까지 걸어 간다. 그 부근의 분위기가 참으로 좋다. 거리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하고 넓은 도로도 휑뎅그렁하다. 공기가 산뜻해서 살갗이 따금따금거린다.

미술관 앞에서 낙엽이 떨어진 은행나무 가로수를 빠져나가, 아오야마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도쿄 마라톤에서 세코가 고메쓰를 추월한 문제의 언덕길을 내려가 아카사카에 도착한다. 왼쪽에 도요카와 이나리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잠깐 들러 다시 낙지 구이 같은 것을 먹는다.

그 다음에는 히에 신사에 들린다. 히에 신사에서 복을 불러온다는 고양이 장식물을 사고, 힐틀 호텔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런 식으로 설날에 시내 한가운데를 산책하고 있으면, 도쿄라는 곳은 참으로 좋은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히 느껴진다.

하늘에 매연이 없고, 자동차가 적고, 사람 수가 적어지기만 해도 무척 태평스럽고 느긋한 기분이 될 수 있다. 행복하다. 매일이 설날 같으면 나는 기꺼이 도쿄에서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해서 지금은 지바에 살고 있다.

나는 정월에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가지 않는다.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럽기 때문이다. 너무 불평만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정월의 텔레비전 프로는 어째서 그렇게 모두들 절규만 해대는 것일까? 일본 자체가 1년 내내 히스테릭하게 시끄러우니까, 정월의 3일 간만이라도 전국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중지하면 좋으련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자동차의 운전도 제한하면 좋겠다. 그러면 일본 전국이 조용해져서 좋을 것 같다. 정월에는 모두들 조용히 떡국을 먹읍시다!

그런데 인간에게 꼬리가 달려 있다면, 지우개 찌꺼기를 털어 낼 때, 굉장히 편리할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남자에게 '이른 결혼'은 손해인가, 득인가?>

 

열아홉 살에 알게 되어 스물두 살에 결혼

무라카미:최근, 학생 신분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안자이:글쎄요...어떨까요?

무라카미:어떻습니까?역시 그다지 많지 않죠.

안자이:나는 정확히 말하면 학생 결혼이 아닙니다. 졸업하고 나서 결혼했으니까요. 졸업할 때까지는 결혼할 수 없다는 옛날식 가풍을 지닌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학생 신분으로 결혼한다는 감각이 내게는 없었어요. 열아홉 살쯤에 서로를 알게 되고, 결혼식을 올린 것은 취직한 뒤인 스물세 살 때였지요.

무라카미:나하고 거의 비슷하군요. 나도 알게 된 건 열여덟 살인가 열아홉 살 때였고, 결혼한 것은 스물두 살 때였어요.

안자이:그 당시 아직 학생이었나요?

무라카미:아무튼 나는 7년 동안 대학을 다녔으니까요. 우리 집사람은 5년을 다녔지요. 집사람이 2년 먼저 졸업했어요.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나는 곧장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학생 신분으로 카페를 경영했지요.

안자이:고쿠분지의, 재즈를 들을 수 있는 카페였지요?

무라카미:안자이 씨는 어떤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되었습니까?

안자이:이야기를 하면 길어질텐데요.(웃음)

무라카미: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안자이:나는 니치다이대학 예술학부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건축 설계회사를 하고 있어서 건축과에 진학했어야 했지만, 그래픽을 했어요.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있고 해서 밤에는 전문 학교에서 인테리어 디자인 공부를 했지요. 그 곳에서 우연히 옆에 앉게 되어 이야기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내가 '까마귀 입(제도 용구-역주)'을 잊어버리고 안 가져가서, 그걸 빌려썼거든요.

 

<좌익 학생이 판치던 시절, 첫 강의 시간에 옆자리 여학생과 맺게 된 인연>

 

무라카미:그러고 보면,나도 첫강의 시간에 옆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와세다 대학에서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강의를 들었어요. 클라스 토론을 했었지요. 좌익 학생이 앞으로 나가서 "교수님, 오늘은 토론을 할꺼니까 강의를 중단해주십시오" 하면, 교수는 "알았소" 하고 돌아가버리는 거예요. 매일이 그런 식이었지요.

안자이:우리들이 학교 다닐 때에는 여학생 옆자리가 비어 있어도 선뜻 앉지 못했죠. 남자와 여자가 동석하는 것은 우연히,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였어요.

무라카미:내 경우 그 토론의 테마가 '미국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거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여학생이었죠. 여러 가지로 나에게 물어오는거예요. "제국주의가 뭐예요?" 하는 식으로요. 가톨릭 여자 고등학교에서 진학한 학생으로,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나는 일단 가르쳐주었지요. 그러다가 친해졌습니다.

안자이:나하고 무라카미 씨는 여섯 살 차이지요? 내가 마흔하나, 무라카미 씨는 서른 다섯이니까요.

무라카미:벌써 꽤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한 셈이네요.

안자이:따져보니까 그렇군요.(웃음)

무라키미:너무 일찍 결혼했다고 생각될 때는 없었습니까?

안자이:없는데요.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하고 싶은 것은 할 수있으니까요.(웃음)

 

<결혼 생활은 후회 없고 재미있다.>

 

무라카미:나도 지금의 결혼 생활이 충분히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별로 후회하는 마음도 없어요. 이 정도로 재미있게 지낸 적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금세 결혼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는 당시 교제하고 있던 여자가 있었고, 그쪽도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서 결혼까지는 역시 몇 년이 걸리더군요. 그 동안 서로가 좋아하는 일을 따로따로 하고 있다가 나중에 합쳤지요. 2학년 때까지는 그냥 친구라는 생각으로 사귀었어요.

안자이:나에게도 사귀고 있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할까요? 마침 그러한 때에 알게 되었지요. '까마귀 입' 때문에. (웃음) 상대편은 직장엘 다니고 있었어요. 전문 학교에서 돌아올 때 차를 사주기도 하고, 밥을 사주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요, 그런 관계도 참 좋아요. 그녀는 비교적 책도 많이 읽고 있었고 영화도 좋아했어요.

무라카미:최근에 젊은 사람들이 보는 잡지를 보고 생각한 건데요, 요즘 젊은이들은 돈이 없으면 그다지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않아요? 비교적 비싼 옷을 입고 자동차라도 없으면 잘 안 풀려나가는 것같아요.

안자이:그래요. 쇼난 같은 곳에는 자동차가 없으면 갈 수가 없지요. 기차를 타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웃음)

무라카미:우리들이 젊었을 때에는 별로 돈이 없어도 무료하거나 하지 않았거든요. 창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돈이 많은 쪽이 이상하다고나 할까요.

안자이:어쨌든 둘이서 커피를 마실 돈이 있고, 이따금 영화라도 보러 갈수 있으면 최고의 사치였지요. 굉장히 즐거웠어요. 그냥 길을 함께 걷고 있기만 해도 즐거웠으니까요.

 

<돈 생각은 결혼 이후부터, 돈 빌려 카페를 차렸다.>

 

무라카미:돈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고 나서부터였을 거예요. (웃음) 카페를 내는 데 돈을 꾸었지요. 500만 엔 가량 들어갔는데, 아내와 둘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200만 엔 정도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빌렸지요. 얼마였더라... 250만 엔 정도였을 거예요. 계산이 안 맞는데. (웃음) 하여간 나머지는 빚.

안자이:나도 빌렸어요. 나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으니까, 결혼을 하면 집이 꼭 있어야 하는 줄로 믿고 있었지요. 복덕방에서 이것저것 소개하자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우리 집이 도심이니까 잡목림이 있는 곳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노가시라 공원 근처에다 집을 턱 하고 사버렸지요. 350만 엔쯤 했어요. 1965년의 일입니다. 은행에서 170만 엔을 빌렸어요. 둘 다 일을 했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갚아나갔더니 모두 갚아지더라고요.

무라카미:그래요, 빚을 지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안자이:열심히 뛰게 되니까요.

무라카미:연대감 같은 것이 생기니 말입니다.

안자이: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빨리 결혼해서 좋다는 이야기가 되는군요. 왠지 열심히 뛰게 되니까요. 학생 때 결혼하는 것의 좋은 점을 찾아내는 대담처럼 되어버렸네요. (웃음)

무라카미:결국 여러 가지로 준비 기간이 길었으니까 결혼을 해도 모든일이 굉장히 쉬운 것 같아요.

 

<연애는 한쪽이 질주하면 대개는 실패>

 

안자이:연애라는 것은 어느 쪽인가가 먼저 앞장서서 달려나가면 대개 실패하는 법입니다. 처음에 남자 쪽이 정신없이 열을 올리면, 여자 쪽이 이상하게 자신감을 가져버립니다. 거꾸로 여자 쪽에서 열을 올리면, 남자 쪽이 지나치게 여유를 가지게 되요. 같은 정도의 속도로 계속 달려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좋아하는 정도가 비슷하고, 차츰 좋아져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무라카미:나는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아들이었으니까요. 집안에는 항상 부모님밖에 없어서 언제나 종속적이었어요. 그리고 결혼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에 많이 좌우된다고 생각해요.이 사람이면 배우자로서 문제 없다는 확신이 있다면, 서른 살에 결혼을 하건 스물 한 살에 결혼을 하건 관계가 없습니다. 한 번 망설이기 시작하면 더욱더 망설여지지요.

안자이:거꾸로 여자 쪽에서 빨리 결혼하려고 생각하면 여간 어렵지가 않을 거예요. 상대방 남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잖아요? 나 같은 경우에는 여자 형제가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옆에 없으면 맥을 못추는 구석도 약간 있었어요. 그럴듯한 여자가나타나면, 아아, 이 여자가 함께 있어주면 틀림없이 잘 되어나가지 않을까, 자연히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여러 여자 사귈 기회는 결혼 후가 더 많다>

 

무라카미:흔히 남자는 늦게 결혼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독신으로 있는 동안 여러 여자들과 사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일정합니다. 독신이니까 여자 관계가 늘어난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안자이:오히려 결혼을 한 편이 그런 기회가 많지 않을까요?

무라카미:그런 말을 함부러 해도 괜찮겠어요? (웃음)

안자이:최근에는 매운 무가 그다지 많지 않죠. (웃음)

무라카미:그래요, 모두 색깔이 푸른 단맛이 나는 무뿐이죠.

안자이:그럼, 화제를 바꿨으니 다른 이야기로 옮겨가보실까요? (웃음)

무라카미:오랜 결혼 생활을 했지만, 나는 서로가 별로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안자이:여행을 간다든가, 커피를 마신다든가, 그럴 때의 즐거움은 변함이 없지요.

무라카미:남자 쪽이 인생을 포기하고 이즈음에서 그럭저럭 살아가지 뭐,하고 생각한다거나, 가정이라는 게 다 이런 거지, 뭐, 라고 생각한다거나 한다면, 그것으로 끝장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은 피차가 대등하다고 하는 긴장감도 있고, 서로 바보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경쟁심도 있습니다.

안자이:다소 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자 쪽에 있으면 됩니다. 인간이란 언제까지나 상대방의 마음에 완전히 들 수 만은 없는 것이니까요.

무라카미:생활 속에서의 긴장감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릴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독신이나 기혼자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안자이:피곤하더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집 안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하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도 그다지 좋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무라카미:가령 말이지요, 집 안에 있어도 단정치 못한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항상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그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안자이:흔히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면 텔레비전을 보며 누워만 있다고 합니다. 나도 샐러리맨이었던 시절이 있지만, 그런 짓은 한 적이 없어요.

 

<집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설거지도 해주고>

 

무라카미:나는 우선 집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꼭 들어주고 나서 그 감상을 말합니다. 목욕을 하고 난 뒤에 언제까지나 팬티 하나만 걸치고 있다든가 하는 일도 없고요. 아침에는 반드시 면도를 합니다. 자질구레한 일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방귀를 뀌지 않는다든가, 그 정도의 것은 기본적인 일입니다. 만들어준 식사가 맛있으면 "잘 먹었어!" 라고 말한다든가, 집사람이 음식을 만들면 설거지는 내가 합니다. 자신의 주변은 스스로 깨끗이 정돈하고, 자신의 옷은 직접 다림질을 한다든가, 그리고 ... 아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웃음)

안자이: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집하고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로군요.

무라카미:나의 경우 어린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서로가 확실하게 룰을 만들어서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젊었을 때는 아이비 스타일 전성기로, VAN 재킷의 시대였어요. 체면을 좀 차렸지요. 결혼을 해도 역시 어느 정도 체면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깅할 때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땀도 닦고 하는 거지요. (웃음)

안자이:서로가 잘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미지의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긴장감. 그것이 없어져버리면 축 쳐져 버린다고요.

무라카미: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거의 모두 샐러리맨 가정이에요. 낮 동안에는 여자들만의 거리지요. 보고 있으면 실망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칠칠치 못한 모습들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추하기까지 합니다. 샌들을 질질 끌면서 바겐 세일에서 산 생리용 패드를 잔뜩 끌어안고 다녀요. 왠지 넋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안자이:그러면 안 되지요. 단정한 사람은 역시 상큼한 얼굴을 하고 쇼핑을 하지요. 나이를 먹어도 멋있는 여자가 있잖아요?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요.

 

<20대 초반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그 후는 열심히 나이 먹고>

 

무라카미:자기의 생활 스타일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20대 초반은 정신없이 지나가버리고, 그 다음에는 열심히 나이를 먹어갈 뿐... 시간이 걸리고 멀리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확실한 거예요. 오늘은 꽤 진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웃음)

안자이:요즈음 젊은 아가씨와 알게 된 경우-가정해서 하는 말이지만요-제대로 대응해 나갈수 있을 것 같으세요?

무라카미:그럼요, 자신 있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인간의 용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요. 경향은 달라져도 기본은 달라지지 않지요. 지난번에 아오야마 대학에 취재나간 적이 있었는데, 재미있었던 것은 그곳이 엄청나게 현실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가령 자동차가 없으면 안 된다든가, 취직은 일류 회사가 아니면 안 된다든가, 그런 걸 우선으로 치는 학생이 많더군요. 나는 그런 여자와는 깊이 사귀지 못할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데 까지는요. (웃음)

안자이:그런 아가씨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상대방 남자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너무 낙관적일까요?

무라카미:지금은 일종의 폐쇄적 상황이 존재하잖아요. 우리들이 젊었을때는 고도 성장기라서, 일단 돈이 없어도 노력하면 좀 더 부자가 될 수 있다든가, 유명해질 수 있다든가...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희망이 없어요. 요즘 젊은 남성은 앞날이 너무 뻔하니까 주눅이 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아가씨들은 그런 걸 민감하게 감지하니까, 그렇다면 돈이 있다든가, 재능이 있다든가, 머리가 좋다든가, 학력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 버리지요.

안자이:과연 그렇겠네요. 나 같은 사람은 여성을 순수한 눈으로 보는 데 말입니다. 미인이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고, 왠지 모르게 괜찮구나 하고 호감이 가는 얼굴의 여성은 비교적 심지가 굳거나,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있고 성격이 좋지요. 얼핏 보기만 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무라카미:나도 어느 쪽인가 하면, 이른바 미인 타입은 좋아하지 않아요. 비교적 어떤 분위기가 있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이런 유의 얼굴은 나밖에는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고 하는 느낌이 있으면 되는 겁니다.

안자이:그래요, 아마 이런 좋은 점을 지닌 여성이 있으니까요. 무라카미씨는 소설에 나오는 재치있는 대화로...?

 

<이따금 말을 건네오는 여성을 만나도 나는 쑥맥>

 

무라카미: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자동차를 타지 않으니까 지하철만 탑니다. 이따금 말을 걸어오는 여성이 있는데 나는 그런 데엔 쑥맥이라서요. 그래서 지하철도 그다지 타지 않게 됐어요.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고, 시내에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쇼핑을 하고 돌아와서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는 패턴이지요. 안자이 씨는 지금 아오야마에 사시지요?

안자이:길에서 스쳐지나가다 보면, 앗, 예쁜 아가씨로구나, 하는 아가씨가잔뜩 있어요.

무라카미:좋으시겠습니다!

안자이:어떻게 하면 얘기라도 할 수 있을까 하고 매일 생각하고 있답니다.

무라카미:생각만 할 뿐...

안자이:예를 들면 무라카미 씨가 데리고 온 아가씨가 있어서 소개를 받고, 며칠 있다가 전화가 걸려와서 오늘 밤에 놀러가도 되겠느냐고... 그런 느낌이라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걷고 있다가 앗, 예쁘구나 하고 생각만 할 뿐 어쩔 수가 없으니까요. 누군가 남자 친구가 있겠지하고 생각하면 공연히 억울한 생각만 들고요. (웃음)

무라카미:그럼, 카페 같은 곳에 가서 한번 시도해볼까요?

안자이:그거 좋지요.

 

 

3.책과 레코드와 볼펜 더미에 묻혀

 

 

<일편단심 야쿠르트 팬>

 

나는 프로 야구 팀으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고 있다. 응원한다고 해도 응원단에 들어가거나 선수에게 돈을 주거나하는 것 같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고,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야쿠르트가 이겼으면 좋겠는데...'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할 뿐이다.

영화 [디어 헌터]에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이 나온다. 리볼버 권총에 탄환을 한 발만 집어넣고 실린더를 빙글빙글 돌려놓고서,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대고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게임인데,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는 것은 6개의 탄창에 4발의 탄환을 집어넣고 러시아 룰렛을 하고 있는것과 비슷하다. 이길 확률이 대략 3분의 1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한 팀을 응원하는 게 건강에 좋을 리가 없다.

내가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은 18년 전 도쿄에 올라왔을 때로, 그 무렵에는 아직 산케이 아톰스라는 이름이었다. 이름은 달라도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옛날부터 야구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홈팀을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쿄에 올라온 이상 도쿄의 팀을 응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도쿄의 4개 팀(교진, 아톰스, 도에이플라이어즈, 도쿄 오리온즈)을 여러 가지로 비교해보았으나, 결국 소거법으로 야쿠르트가 남았다. 도쿄 스타디움은 계속 다니기에는 너무 멀었고, 교진 탐은 너무나 사람이 많아서 혼잡하고, 또 고라쿠엔 구장이라는 곳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진구 구장은 참으로 기분 좋은 야구장이다. 주위에 나무가많고, 그 무렵에는 외야석이 넓고 평평한 제방으로 되어 있어서, 벌렁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며 시합을 구경하고 있으면 상당히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모래 먼지가 심하게 피어올라서 주먹밥 같은 것을들고 있으면, 모래로 자글자글해져서 이것이 난점이라면 난점이었다.

낮에 시합을 할 때는 상반신을 벗고 일광욕을 자주 하곤 했다. 교진과 벌이는 게임을 제외하면 언제나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즐거웠다. 요컨대 야쿠르트가 마음에 들어서 진구 구장에 다녔다기보다는, 진구구장이 좋아서 그 결과 야쿠르트를 응원하게 된 셈이다.

텅텅 비어 있는 야구장의 외야석은 아가씨와 데이트 하기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맥주를 마시거나 도시락을 먹거나 하면서 야외의 공기를 마실수 있고, 입장료도 영화관보다 싸다. 게다가 기분이 나면 야구 시합을 볼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4, 5년 전의 교진 팀과의 더블 헤더로, 그때 역시 나는 아가씨와 함께 오른쪽 스탠드의 우익수 바로 뒤 근처에서 시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예의 오카다 응원 군단으로 떠들썩한 자리지만, 당시의 응원단은 큰 북 한 개와 피리 한 개라는. 참으로 조용한 것이었다. 그 시합에서 야쿠르트가 이겼는지 졌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교진의 타자가 때린 한 개의 플라이만은 지극히 상징적인 정경으로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플라이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식의 손쉬운 외야 플라이였다. 타자가 배트를 그라운드에 내던지고 고개를 흔들면서 1루 베이스로 뛰어가는 그런 플라이였다. 야쿠르트의 우익수(불쌍하니까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는'올 라잇!' 하는 느낌으로 5미터 가량 천천히 전진하여 공이 떨어져오는 것을 기다렸다. 평범한 광경이다. 그러나 공은-믿기 어려운 일이지만-우익수의 글러브에서 5미터 가량 뒤에 뚝 떨어졌다. 바람도 없고 햇빛도 그다지 눈부시지 않은, 기분 좋은 오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관중들은 모두들 아연실색해서 한참 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얘, 네가 응원하고 있는 팀이 바로 이 팀이니?" 하고 아가씨가 계면쩍은 듯이 머뭇머뭇거리고 있는 우익수를 가리키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 하고 나는 대답했다.

"다른 팀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겠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절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까지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팬이고, 해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정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렇게 된 게 옳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비유는 좋지 않지만 '하룻 밤의 정사라고 생각한 것이 꼬리를 끌어' 라고 하는 느낌이다.

그 동안에 나는 실로 어이없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마쓰오카 투수가 교진 팀을 상대로 분명히 9회 2사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고, 완전히 이긴 시합에서 앞으로 한 사람 남은 상황에서 얻어맞고 패배한 적도 있었다. 나는 물론 지는 걸 좋아해서 야쿠르트를 응원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역시 그 나름대로 낙담하게 된다.

그러나 야쿠르트를 응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는 것에 대한 관용이다. 지는 것이 싫지만, 그런 걸 일일이 깊이 신경쓰고 있다가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체념이다.

반대로 교진 팬은 그것에 비해서 지는 태도가 깨끗하지 못한 것 처럼 보인다. 야쿠르트와 교진 전에서 야쿠르트가 이기면 "돼지에게 차였다!"고 하면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교진 팬 친구가 있는데, 이런 것은 정말로 곤란하다.

-마쓰오카 투수의 은퇴 시합 관전중, 내게 맥주를 권했던 샐러리맨 풍의 두 분,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쓰오카 선수도 상대편인 와카나를 경원하지않고 깨끗한 승부를 겨뤄주어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깨끗하게 스리 런 홈런을 맞긴 했지만.

 

<내 카페 종업원이었던 야마구치 이야기>

 

지난번에 야마구치 마사히로가 찾아와서 "저, 하루키 씨 제 펜 네임 하나 지어주시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갑자기 '야마구치 마사히로'라는 이름을 대봤자, 독자들 재부분은 그게누구인지 잘 모를테니까, 일단 설명을 해둔다면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내가 경영하고 있던 재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인물이다. 당시는 무사시노 미술 대학의 학생이었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서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도중에 슬그머니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하여간 그런 인물인데 그 후 광고 관계의 프로듀스 회사에 들어가,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책을 만들거나 해서 지금도 가끔 만나 술을 마시곤 한다. 부인은 상당히 미인인데 안자이 씨는 나를 만날 때마다 "야마구치에게는 아까워!" 라고 말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날, 야마구치의 집에 놀러가서 야마구치가 자리를 비웠을때, 부인에게 "저런 친구하고 결혼해서 후회하고 있죠?" 하고 물으니까,

"아니예요, 야마구치 씨와 결혼해서 정말 행복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남의 집 일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인간에게는 참으로 갖가지 취향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야마구치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여사원을 몇 명 붙잡고서 "저, 야마구치 멍청하지?" 하고 물어보니까, "아니예요, 야마구치 씨는 회사에서 굉장히 진지하고 말이 없어서 그 사람 앞에 서면 긴장을 할 정도라고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머릿속이 텅 비어서 얼굴이 경직되어 있는 것뿐이라고" 하고 내가 말하니까, "무라카미 씨, 야마구치 씨에 대해서 지나치게 편견을 갖고 계신것 아니에요?" 하는 말까지 들었다.

이 정도로까지 말을 듣고 나자 나로서도 '혹시 어쩌면 내가 야마구치라는 인간을 오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야마구치 본인도 "하루키 씨는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니까요" 하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그러던 차에 야마구치에게 이사하는 걸 도와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0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역시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 그러나 물론 야마구치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나쁜 사람은 미인 아내로부터 깊이 사랑을 받거나, 동료 여사원에게 호감을 사거나 하지 못한다.

설명이 상당히 길어지고 말았는데 그 야마구치가 나를 찾아와서 펜 네임을 지어 달라고 한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삽화가가 되어볼까 하고 미즈마루 씨에게 그림을 가져 갔었거든요. 그랬더니 미즈마루 씨가 그 그림을 보고는 '이봐, 야마구치, 그만두는 편이 좋겠어' 하더라고요."

"알 만하군."

"질투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천만의 말씀."

"글세, 그래서 말이죠, 헤헤헤, 이번엔 글을 좀 써볼까 하고요. 글을 써보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괜찮은 생각이군 그래."

"그래서 말인데요, 야마구치 마사히로라고 하면 어딘지 신좌익 같아서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까, 이번 기회에 하루키 씨께 펜 네임을 부탁할까 하는 겁니다. 좋은 이름을 지어주시면 멋진 술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멋진 술집은 둘째치고 나는 타인의 펜 네임을 생각하는 것을 꽤 좋아한다.

"자네, 시모다 태생이었지?"

"네, 그렇습니다. 시모다입니다."

"야마구치 시모다마루는 어때?"

"참내, 무슨 어선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 것 말고요, 가령 시마다 마사히코라든가, 사와키 고타로 같은 멋진 이름을 지어주세요."

"야마구치 이즈시치는 어떻겠나?"

"머리 나쁜 순경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하루키 씨, 뭔가 저에 대해서 편견 같은 거 갖고 계신 것 아닙니까?"

이런 옥신각신 끝에 야마구치는 실망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멋진 술집도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나 나는 '야마구치 시모다마루'라는 이름이 꽤 마음에 들어서, 그 이래 계속 야마구치 마사히로를 '시모다마루'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 탓인지본인도 점점 그 '시모다마루'라는 이름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이름 탓인지 나도 야마구치 마사히로 시대의 야마구치보다는 야마구치 시모다마루로 이름을 바꾼 뒤의 야마구치 쪽에 훨씬 더 호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펜 네임이나 가게의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우선 듣기좋은 이름을 고르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거꾸로 그런 때에는 언제나 멋대가리 없는 이름을 고르기 때문에, 내가 제안한 이름은 항상 기각당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아는 사람이 바를 연다고 가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길래, '대사막'이라는 걸 제안했더니 그 자리에서 기각당했다.

"'대사막' 같은 이름이 붙어 있는 바에 도대체 누가 술을 마시러 들어오겠습니까?"

"하지만 나 같으면 들어가겠네.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구경하고 싶으니까 말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하루키 씨 뿐일걸요."

그런 연유로 아오야마와 아자부 방면에는 듣기 좋은 이름의 바들이 넘쳐나고 있다. 조금 집요한 것 같지만 만일 '대사막' 이라는 술집이 있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들어갈 텐데.

일기와 일지와 기록과 일기라고 하면, 새해부터 써야 한다는 인식이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게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금년 정월부터 '자아, 금년에야말로 꼭 일기를 써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사람도 많이 있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왠지 재를 뿌리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지만,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정월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라는 것은 우선 오래 계속 되지를 못한다.

그것보다는 6월 13일에 갑자기 생각나서 쓰기 시작한 일기가 의외로 오래 계속 되거나 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정월부터 일기를 쓰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정월' 이라는 이벤트성에 의존하는 안이함이 있어서, 그 때문에 오래 계속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기 쓰기>

 

나는 원래 글쓰기를 싫어하는 편이어서, 대학을 졸업한 후 스물아홉 살이 되어 쓰기 시작할 때까지 문장 같은 것은 거의 쓴 일이 없었지만, 일기만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단속적으로 썼다. 보름쯤 쓰다가 4개월 쉬고,3개월을 쓰다가 2개월 쉬는 식으로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일기'가 아니라 '일지' 이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남, 날씨, 무얼 먹었음, 누구하고 만났음, 어느 정도 일을 했음, 이라는 식으로 사실을 메모하는 것뿐으로, 그 이상의 것은 전혀 쓰지 않는다. 심리 묘사라든가 창작을 위한 노트라든가, 사회적 사건에 대한 성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후에 일기가 발견되어서 출판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어쨌든

아침 6시 기상, 맑음

한 시간 조깅

아침 식사-붕장어 덮밥

오전중에 소설 7매

메밀국수-점심 식사

오후 소설 4매, [주간 아사히]의 H씨로부터 전화(3시)

저녁 식사-새우 고로케, 야채 샐러드, 맥주 2병

오후 10시 취침, 평화로운 하루

이런 식의 기술이 계속 반복되는 평화롭고 따분한 일지를, 누군가가 즐겨 읽어 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 물론 나도,

12월 16일(맑음)

점심-미우라 모모에 여사의 자택에 초대받아, 손수 만든 튀김 덮밥을 대접받았다.

오후-옥중의 미우라 가즈요시 씨로부터 전화옴.

저녁식사, [길조]에서 야쿠시마루 히로코 씨(동경 태생의 여배우)와 회식.

그 뒤 둘이서 니시아자부에서 술을 마심.

집으로 돌아와 원고 250매를 쓰다.

고단샤로부터 인세 2억 6,500만 엔의 송금 통지가 있었다.

이런 식의 일기를 하루라도 좋으니까 한 번 써보고 싶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소설가의 하루란 정말로 평범하고 따분한 것이다. 이런 원고를 야금야금 쓰면서 '존슨'표 면봉으로 귀청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 덧 하루가 끝나버리고 만다.

내가 이런 기록을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건 [라이프]라는 문방구 메이커에서 팔고 있는 '업무 일지' 라는 매우 즉물적인 타이틀의 노트이다.

이것은 단순하고 튼튼하고, 정서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물건이어서, '과연 일기장' 이라는 식의 치덕치덕스러운 구석이 없어서, 나의 사용 목적에는 딱 들어맞는다.

띠지에는 '업무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나타내는 영업 성적의 필연적 향상. 조기 발견할 수 있는 과거의 결점' 이라는 선전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전체적인 문장의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효용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조기 발견할 수 있는 과거의 결점'같은 문구를 발견하면, 내 마음은 저도 모르게 쑤물거리는 것이다.

확실히 옛날에 쓴 일기를 보면, 과거의 결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XX년, 10월 8일(맑음)

M양과 식사, 가볍게 술을 마시고 집까지 바래다주다.

하는 식의 메모를 읽으면 그때의 일을 생각해내고, '그때 하려고만 했다면,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반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의 결점'을 지금 와서 발견해보았자, 도저히 '조기발견'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다지 효용이 있다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집사람은 내가 쓰고 있는 '일기' 보다 5배 가량 농밀한 일기를 매일 녹색잉크로 빼곡하게 쓰고 있다. 상당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쓰고 있다.

"소송을 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식으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매일 기록해두면요"라고, 아내는 그 일기를 쓰고 있는 이유를 나에게 설명한다.

"소송? 소송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송?" 하고 나는 질문을- 극히 당연한 질문을-한다.

"특별히 무슨 소송이 아니고요, 혹시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하고 아내는 대답한다.

이따금 가정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하루 두세 갑의 골초였던 나의 금연 취미>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라서 자세한 줄거리는 맞는지 어떤지 자신이 없지만,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에 [금연회사](였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금연을 청부맡은 회사의 이야기이다.

금연을 하고 싶지만, 자기 의지에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이곳에 신청을 하면, 회사 쪽에서 책임을 지고 금연에 성공하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간단히 신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는 엄중한 비밀 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정보는 소문을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사람들에게로 은밀히 전해질 뿐이고, 그 가입금도 깜짝 놀랄 만큼 비싸다. 그러나 금연의 성공률은 에누리 없이 100퍼센트이다.

어떤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그 회사에 금연 신청을 한다. 그러나 며칠 뒤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 개피의 담배를 집어들고 그것에 불을 붙이고 만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이렇게 되면 소름이 끼치는 이야기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다 해버리면 소설을 읽을 재미가 없어지니까, 섭섭하지만 결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요컨대 이 이야기의 교훈은 '금연은 자기 힘으로 이룩할 수 밖에 없다'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편하게 금연을 해보려고 생각하니까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금연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있다. 옛날에는 하루에 5~60개피씩 담배를 피우는 골초였었지만, 어느 날 딱 끊었다. 그 이래 장편소설에 전념하는 몇 개월 동안만 다시 피우고, 그게 끝나면 피우지 않는다는 사이클로 금연해 오고 있다. 그러니까 그만두려고 생각하면 '금연 회사'에 신청하지 않더라도 담배 피우는 걸 그만둘 수가 있다.

내 생각에는 금연에 성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의지력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야 물론 의지력이 전혀 없인 금연을 할 수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하우이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금연할 수 있는가?' 하는 노하우를 알고 있으면, 금연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조직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집 안에 '금연' 이라고 쓴 종이를 사방에 붙여놓거나 재떨이를 한꺼번에 강물 속에 던져버리거나 하는 사람을 가끔 보는데, 이런 것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효과가 별로 없다.

금연의 노하우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금연을 시작하면 3주일은 일을 하지 않는다.

(2)타인에게 화풀이를 한다. 지저분한 말을 퍼붓는다.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한다.

(3)좋아하는 음식을 실컷 먹는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나는 비교적 간단히 금연을 할 수 있다.

(1)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금연의 필수 조건인데, 현실적으로 담배를 끊고 얼마 동안은 도저히 문장을 쓸 수가 없다. 글자도 삐뚤삐뚤해지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금연하려고 생각할 때는 미리 3주일 동안은 한 글자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은 느긋하게 영화 구경을 하거나 스포츠를 즐기면서 보낸다.

애인이 있는 사람은 함께 온천 여행이라도 가면 좋겠죠.

그러나 이런 식으로 미리 예정을 세워놓고 금연하고 있을 때, 돌연 "미안합니다, 지난번 원고 말입니다만, 지면 형편상 약 2매 정도만 늘려 주십시오" 하는 전화가 걸려오거나 하면, 참으로 난처해진다. 아무튼 제대로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그리고서'라는 글자를 썼는데 '르리고서'가 되어버려서,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이 '르리고서'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문장을 무려 다섯 번 가량이나 되풀이해서 읽어봐야 했다.

하지만 샐러리맨 같은 사람이 2~3주 동안 일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일 것이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큰맘 먹고 2~3주일 동안 휴가라도 얻는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기분 전환으로 좋지 않습니까? 그 결과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책임은 질 수없지만.

그리고 (2)의 남에게 대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이쪽은 쓰라린 마음으로 금연을 하고 있으니까, 구태여 얌전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라도 금연의 짜증스러움을 이용해서 모두 내뱉어버리는 것이 제일이다. 나는 금연을 할 때마다 담당 편집자에게 "무라카미 씨도 한 껍질 벗겨보면 좋은 성격은 아니군요" 하는 말을 듣지만, 인간과 인간의 교제에 있어 그 정도의 스릴이 없으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3)의 먹는다고 하는 문제인데 담배를 끊으면 정말이지 확실히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담배도 끊고 다이어트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살이 찌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연이 일단락되고 나서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금연에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해버리자'고 하는 성급함과 자기 과신에 있다. 자신은 극히 한정된 능력밖에 갖지 못한 비참한 인간 존재라고 하는, 자기 인식 없이는 금연은 성공하지 못한다. 요컨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며,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면 다른 무엇인가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금연이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재미가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몇 번씩 금연해보게 된다.

 

 

<나는 이런 신조로 글을 쓴다.>

 

이것은 구태여 말해둘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어떤 직업에도 그 직업 고유의 룰이 있다. 예를 들면 은행원은 돈 계산을 틀리면 안되고, 변호사는 술집에서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면 안 되며, 매춘 관계의 종업원은 손님의 페니스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면 안된다는 것 등이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생선 초밥집 주방장이 있다면 곤란하고, 소설가보다 훨씬 문장을 잘쓰는 편집자 역시 곤란하다.

그러나 그러한 기본적인 룰과는 별도로 그 직업에 임하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으로 품는 신조라는 것이 있다. 그러한 신조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는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비교적 좋아하기 때문에 여러 각도로 보곤하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신조에 고집스럽게 매달려 있는 사람도 있고, 매우 엉성한 방식으로 적당히 업무를 처리해 버리고-그건 그런대로 좋지만-잘 안되면 타인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신조가 적은 대신에 자기 선전에 능한 타입의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인간 각자의 재량에 맡겨야 할 종류의 일이니까,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는 간단히 말할 수 없다.

나도 물론 문장을 쓰는 데 있어서는 몇 가지 개인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극히 자연스럽게 처음 단계에서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나는 문장을 쓰기 시작한 나이가 비교적 늙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경험한 여러 가지 직업에서 몸에 익은 노하우를 그대로 몽땅 문필업에 응용한 셈이다. 처음에는 임시변통 정도로 생각하고 썼지만, 나 자신에게 너무 잘 맞는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한 나의 개인적 신조를 하나하나 써나가기 시작하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고, 그다지 의미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읽을거리로서도 재미가 없을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다. 그것은 '작가는 비평을 비평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별적인 비평이나 비평가를 비평하면 안된다. 그런 일을 하면 무의미하고, 무익한 트러블에 말려들어갈 뿐이며 자신만 천박해질 뿐이다.

나는 줄곧 그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 때문에 스스로를 마모시킬 기회를 상당히 교묘하게 피해올 수가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세상에 다양한 종류의 내적인 지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데, 작가가 비평이나 비평가를 비평한다고 하는 상황도 그 지옥 가운데 하나일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그것이 일이다-비평가는 그것에 대해서 비평을 쓴다-그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여러 가지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식사를 하고(혹은 혼자 식사를 하고), 그리고 잠을 잔다. 그것이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세계의 과정을 신뢰하고 있다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전제조건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적어도 트집 잡아보았자 별 볼일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트집을 잡기보다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식사를 끝내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자려고 노력한다. 스칼렛 오하라는 아니지만 밤이 밝으면 내일이 시작되고, 내일에는 내일의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선 나 자신에 대하여 비평한 글을 읽지 않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문득 마음이 달라져서 읽거나 하면 '이건 잘못됐잖아?' 하고 생각하는 일이 간혹 있다.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명백히 헛다리를 짚은 것도 있고, 노골적인 개인 공격을 한 것도 있으며,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비평도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모든 사정을 다 감안하더라도, 작가가 비평을 비평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어떤 변명 비슷한 것을 하거나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쁜 비평이라는 것은 말똥이 가득차 있는 거대한 헛간과 비슷하다. 만일 우리들이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런 헛간을 본다면, 서둘러 지나쳐 가버리는 것이 최선의 대응법이다. '어째서 이렇게고약한 냄새가 날까?' 하는 식의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 말똥이라는 것은 본래 구린내가 나는 법이고, 헛간의 창문을 열면 더욱 고약한 냄새가 날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지난번에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나에 대한 비평을 오려 놓은 옛날 스크랩이 한 상자 가득 나왔다. 대개가 5~6년 전 내가 데뷔할 당시의 것으로, 아내가 부지런히 오려내어 보관해 놓은 것이다. 잘도 모아 놓았군,하고 감탄하면서 조금씩 읽기 시작했는데, 꽤 재미가 있어서 결국에는 전부 다 읽고 말았다.

칭찬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에 관계 없이, 개중에는 지금도 '정말 그렇구나!' 하고 납득이 가는 비평도 있었다. 그러나 5~6년 전의 옛날 것으로 생생함이 모두 소멸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마음 훈훈한 기분으로 비평을 읽을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비평과 관계 하는 것도 상당히 즐거운 것이다.

지금 나의 소설에 대해서 어떤 비평이 나와 있는가는 5년쯤 뒤에 다시 천천히 숙독하면서 음미해보려고 한다. 그날이 기다려진다.

 

<옛 종업원이 선물한 단골 삽화가의 그림 있는 티셔츠>

 

얼마 전에 이 수필에서 야마구치 시모다마루, 즉 야마구치 마사히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언급을 했더니, 그 며칠 뒤에 야마구치가 찾아와서 얼음에 채운 은어를 열 마리 가량 놓고 갔다.

"이게 뭐지?" 하고 내가 물으니까 "에헤헤헤, 시모다의 어머니가 무라카미 씨에게 갖다 드리라고 보내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따금 좋은 이야기도 써달라고 부탁 드리라고요. 아무튼 시골 분이라서요"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은어는 감사히 받아, 소금을 쳐서 구워 먹고 찌개를 해먹고 튀김도 해 먹었다. 굉장히 맛있는 은어였다. 도쿄에서는 맛있는 은어를 우선 구할 수가 없으니까 귀중하다. 타인의 험담은 해놓고 볼 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세 번쯤 애마구치 마사히로=시모다마루에 대하여 에세이를 썼지만, 좋은 이야기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머리가 나쁘다'든가 '재치가 없다'든가 '도무지 쓸모가 없다'든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등등 좋지 않은 것만 썼다. 은어를 받았다고 안이하게 반성하는건 아니지만, 야마구치에게도 그의 부모님에게도 미안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야마구치에 관해 쓴 험담 중 4분의 1정도는 농담입니다-라고 해도, 아마 이것 가지고는 변명이 되지 않을 거다.

며칠 전에 오모테산도를 걸어가다가, 안자이 미즈마루 씨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미즈마루 씨는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도, 언제나 그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그래서 "요전번 원고에서 내가 야마구치에 대해 조금 지나치게 썼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에요, 그 정도를 가지고 뭘. 실제로 그 말대로인걸요. 뭐,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로서도 마음이 든든했지만, 그러나 가끔 야마구치의 좋은 점도 써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야마구치 시모다마루는 옛날에 나와 아내에게 티셔츠와 레코드를 선물한 적이 있다. 요컨대 친절한 사나이인 것이다. 티셔츠는 흰 타원형 물체가, 틀림없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솜씨에 의해서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내가 물으니까, "아니, 그것도 모르세요? 놀랍네요!"하고 야마구치는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이건 말입니다. 내가 만든 [구인 타임즈]의 '황금알이 되고 싶어'라는 CM을 위해 만든 티셔츠라고요. 알고 계시죠, '황금알이 되고 싶어'라는CM?"

"난 몰라. 텔레비전은 보지 않으니까."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인간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때도 그렇고. 정말 난처하네요.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니까 얘기가 되지 않는군요. 그럼, 테마송도 모르겠네요?"

"모르지."

"레코드가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아."

"그러지 마시고, 내가 가사를 썼으니까요, 에헤헤헤, 조금만 들어보세요"

하고 말하면서 야마구치는 레코드를 놓고 돌아갔다.

재킷에 인쇄된 야마구치가 쓴 노래말이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에 레코드는 한 번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런 말을 했더니, 야마구치는 굉장히 실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네에게 솔직하게 감상을 말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얼마 없을걸?"

"네, 하긴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고 야마구치는 힘없이 대답했다.

이러다 보니까 또 험담이 되어버렸지만, 야마구치 시모다마루=마사히로는 상당히 친절한 인간이다.

그 뒤, 나와 집사람은 그 '황금알' 티셔츠를 입고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황금알' 티셔츠를 입고 있으려니까, 미국인이 "그게 무슨 그림입니까?" 하고 물어왔다. 내가, "으음... 골든 에그입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아아, 그건 에그로 보이지 않는데요!" 하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야마구치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책임이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그림이 강렬하게 희구하는 포스트 모던 리얼리즘은 후진국 미국에서는 아직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불후의 명작 [보통 사람]이 뉴욕 근대 미술관에 걸리는 것도 좀더 뒤로 연기될 것 같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둘러싸고 두 가지 대립되는 의견이 있다. 하나는 '미즈마루 씨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하게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여서 그린 것이다' 라는 설과, '시간같은 것이 걸릴 리가 없다'는 설이다.

나로서도 그 진상이 알고 싶었기 때문에, 연말에 미즈마루 씨와 일 관계로 식사를 했을 때, "미즈마루 씨, 연하장 그림을 그려주시지 않겠습니까?"하고 주머니에서 엽서 두 장과 볼펜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미즈마루 씨는 "아, 좋습니다" 하고는 엽서와 펜을 옆으로 밀어놓곤, 그대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 먹고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가 문득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펜과 엽서를 집어든 것은 약 30분 뒤의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두 장의 그림을 그리는 데 약 15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 15초에 도달하기까지의 30분 동안에 있다.

안자이 씨에게 있어서 그 30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가능성으로는,

(1)안주를 먹으면서 계속 구상을 하고 있었다.

(2)갑자기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30분 동안 계면 쩍어하고 있었다.

(3)너무 빨리 그려버리면 고마움을 모를 것 같아서 그냥 단순히 폼을 잡고 있었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으음, 그중 어느 것일까요?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구나>

 

얼마 전에 돌연 디킨즈의 [데이비드 커퍼필드]가 읽고 싶어져서 모 대학구내에 있는 서점에 가서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는 젊은 여점원에게 "미안하지만, 디킨즈의 [데이비드 커퍼필드]를 찾고 있는데요"하고 말하니까, "어떤 분야의 책입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네?"

하고 말하니까, 상대방 여점원도 역시,

"네?"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디킨즈의 [데이비드 커퍼필드]말인데요."

"그러니까, 그게 어떤 종류의 책이냐고요."

"에, 그러니까 소설책입니다."

라는 응수가 있고 나서 결국 책은 소설 담당 카운터에 가 물어보라는 대답이 나왔다. 순간, '서점의 안내원이 어떻게 디킨즈를 모를 수 있을까?'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디킨즈 같은 건 거의 읽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꽤 대담한 변화를 이룩해 가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그 여점원을 카페에라도 끌고 가서 "그럼, 샬롯 브론테는 알고있나요? 푸시킨은? 스타인백은 알아요?" 하고 자세히 추궁해보고 싶었지만, 그쪽도 바쁜 것 같았고, 나도 결코 한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단념했다.

서점을 나와서 볼일을 끝내고 나니까 배가 고파서, 언뜻 눈에 띄는 깨끗한 양식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는 매일 대개 다섯 시경에 저녁 식사를 하는데, 그 바람에 언제나 텅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가 있어 상당히 기분이 좋다. 시끄럽지 않고 천천히 메뉴를 고를 수가 있다.

메뉴에 '양식 도시락-2,500엔' 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기에는 어떤 반찬이 들어가 있지요?" 하고 웨이트리스에게 질문했다. "여러 가지입니다." 하고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물론 도시락이니까 여러 가지 음식이 들어가 있을 거라는 건 알겠는데, 예를 들어 어떤 것이 들어 있느냐고요?"

"그러니까 양식풍 음식이 여러 가지 들어가 있다니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양식풍 도시락을 단념하고, 다른 일식 요리를 주문했다. 특별히 그녀에 대해서 화가 나는 건 아니지만, 도시락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한두 가지쯤은 가르쳐주어도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쪽에서도 그걸 트집 잡아서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니니까.

식사를 한 뒤에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걷고 있다가 우연히 백화점 앞을 지나가게 되어, 안으로 들어가서 트위드 웃옷을 골라보기로 했다. 그 얼마전에 담당 편집자인 기노시타 요코씨가 "무라카미 씨, 언제나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니니, 도대체 돈은 어디다 써요?" 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웃옷이 있는데 '사이즈가 좀 작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시험삼아 소매에 팔을 끼워보고 있으려니까, 여점원이 어디선가 바람처럼 달려와 "손님, 그건 사이즈가 아주 작은 겁니다. 손님한테는 도저히 무리예요" 하고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음, 그런 것 같군요. 좀더 큰 사이즈가 있으면..." 하고 말하려고 하는데, 이미 그곳에는 그녀의 모습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돌아올때까지 그대로 한참 동안 그곳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돌아올 기미가 전혀 없어서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뭐가 뭔지 영문을 잘 알 수없는 하루였다. 이쪽이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거꾸로 이쪽이 타인을 부당하게 다룬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은 어느쪽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서점의 여점원은 집에 돌아가 저녁 식탁에서 "엄마, 오늘 괴상한 손님이 찾아와서 말예요, 이름도 알 수 없는 책 이름을 말하고 내가 모르겠다고 하니까, 노골적으로 바보 취급을 하더라니까요.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하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는 "흥, 양식 도시락이라고 쓰여 있으면, 잠자코 주문해서 먹을 것이지" 하고 주방장에게 털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백화점의 여점원은 '자기 재킷 사이즈도 제대로 모르고 입어보려는 시골뜨기를 상대하고 있을 수야 없지, 흥!'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상대방의 주장에도 각각 일리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나의 생활 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세상이라는 것은 참으로 까다로운 것이다.

 

<내 잠버릇의 3대 특징>

 

나는 대체로 쉽게 잠이 드는 편이어서, 이불을 뒤집어쓰자마자 정신없이 깊이 잠들어버린다. 금세 잠이 든다, 잘 잔다, 어디서든지 잘 잔다는 것이 내 잠의 3대 특징인데, 잠이 잘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목격하면 적지 않게 불쾌한 모양이다.

나도 나보다 빨리 잠드는 사람을 보면-그러한 경우는 정말로 극히 드문 일이지만-이 친구, 바보 아냐 하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처남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열한 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럼 이만 잘까?"하고 말하고서 각자의 방으로 철수했는데, 문을 닫는 순간에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그냥 나온 것을 생각해내고 객실에 돌아가보니까 처남은 벌써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잠에 빠져 있었다. 약 10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아무리 빨라도 잠이 드는데 20초 정도는 걸린다.

그래서 아내에게 "저 녀석은 머릿속이 텅텅 비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더니, "당신도 거의 마찬가지라고요" 하며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건강한 사람을 옆에서 보고있으면 분명히 바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도 옛날부터 시종 변함없이 빨리 잠들었던 것은 아니고, 젊었을 때에는 날이 밝을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다.

요즘처럼 눕자마자 깊이 숙면할 수 있게 된 것은, 소설을 쓰고 난 다음부터이다. 어쩌면 애당초 체질이 글쓰는 데 적합하도록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깊은 자기 반성이 결여된 소설을 쓰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도 물론 어느 정도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있다. 그렇게 많이 있지는 않지만, 전혀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일도 산적해 있으며, 제대로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길을 걷고 있으면 자동차와 신호가 너무나 많아서 짜증스러워진다.

하지만 나의 경우, 정신적 스트레스와 잠은 완전히 별개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요컨대,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흔히 아가씨들이 1960년 대에 "나도 물론 당신을 좋아하지만 아직은 좋은 친구 사이로 있고 싶어요" 하는 식의 말을 했는데(지금도 그렇게 말할까?, 어쨌든 그런 식으로 나의 수면은 스트레스와 명확히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분좋게 푹 잠을 잘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잠이라는 것은 걸쭉한 과즙이 듬뿍 들어 있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과실과 비슷하다.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잘 먹겠습니다!' 하는 느낌으로 눈을 감고, 그 잠의 과즙을 쪽쪽 빨아먹고, 다 빨아먹고 난 다음에 잠이 깨는 것이다. 약간 이상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잠에 관해서는,난 비교적 진지한 편이다. 꿈 같은 것은 거의 꾸지 않고, 꾸었다고 해도 토막토막의 단편을 가까스로 몇 가지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쿄로 이사를 온 이래 지난 몇 개월 동안, 이전보다는 조금 또렷한 꿈을 꾸게 되었다. 역시 시골에서 오래간만에 도심으로 올라와서 신경이 흥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곧 시골로 이사를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꿈도 그다지 꾸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근에 꾼 꿈을 여기에 세 가지쯤 기록해두기로 하겠다.

(1)'눈이 많이 달린 고양이' 12월 22일

나는 털이 폭신폭신한 크고 예쁜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쓰다듬고 있다. 나도 고양이도 만족해하는 듯 행복한 기분이다. 하지만 쓰다듬고 있는 손가락 끝이 딱딱한 무엇인가에 자꾸만 걸린다. 그래서 무엇일까 하고 털을 들춰보니까, 눈이었다. 아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고양이의 몸을 살펴보니까, 놀랍게도 몸이 온통 눈투성이였다. 전부 30개나 40개는 될까... 하는 장면에서 페이드 아웃. (주:꿈과는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전날 밤의 저녁 식사는 전갱이말린 것과 삶은 두부였다.)

(2)'고쿠분지와 시모다카이도' 1월 8일

고쿠분지에 가려고 전차를 탔는데 창 밖의 풍경이 아무래도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내려보니까, 그곳은 시모도카이도였다. 나는 시모다카이도에 간 적이 없지만 꿈에서 본 그곳은 조용하고 꽤 좋은 동네였다. (주:이것도 꿈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전날 아오야마의'르 공트'에서 오래간만에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3)'자전거 타이어 소동' 1월 4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앞쪽 타이어에도 뒤쪽 타이어에도 거의 공기가 들어 있지 않을 걸 깨달았다. 그래서 큰일났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마침 자전거 수리점이 눈에 띄어서 공기 펌프를 빌려다 열심히 바람을 넣었으나, 앞쪽을 집어넣고 있으면 뒤쪽의 공기가 빠져버리고 뒤쪽을 넣으면 앞쪽이 빠져버려 정말로 난처했다. (주:전날은 긴자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다정한 여자]를 보고 그 뒤, '미미우'에서 메밀국수를 먹었다.)

이런 식으로 1개월 내에 3편이나 선명한 꿈을 꾸었다. 평소에 그다지 꿈을 꾸지 않는 나로서는 선명한 꿈을 꾸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될수 있으면 그런 것과는 관계하지 않고, 잠의 과즙을 무심하게 쪽쪽 빨아먹으면서 살고 싶다.

그러나 어째서 시모다카이도가 돌연 튀어나온 것일까? 정말이지 짐작도가지 않는다.

 

<교통 파업은 즐겁다.>

 

이런 발언을 하면, 전철로 통근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서 '교통 파업' 이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운수 관계의 근로자를 지원하고 있다든가,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좋아한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고(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약간 좋아하지만), 그저 단순히 '여느 때와 다른 일'이 생기면 기쁜 것이다. 역이 폐쇄되어서 조용하거나, 야마노테 선의 육교 위에서 30분동안 철로를 내려다보고 있어도 열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거나 하면 공연히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좀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나는 똑같이 '여느 때와 다른 것'이라도, 여느때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보다는, 여느 때는 무엇인가가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게 되는 마이너스 상황, 즉 결락 상황 쪽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교통 파업 같은 것은 내 취미에 딱 들어맞는다. 만일 반교통 파업 같은 것이 존재해서, 그날은 열차 수가 3배로 증가한다고 해도 그런 종류의 비일상성은 그다지 내 마음을 매료시키지 못할거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장사를 했을 때, 교통 파업이 있는 날이면 손님이 거의 찾아오지 않아서 영업상으로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에도 파업을 끔찍이 좋아했다.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쓰라리지만, 파업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생각으로, 그런 날에는 미련 없이 가게문을 닫아버리고 인기척이 없는 텅 빈 도쿄의 거리를 마음껏 산책하곤 했다.

하라주쿠에서 시부야, 요요기에서 신주쿠까지 걷고 있으면, 거리 전체에 '오늘은 휴업'이라는 태평스러운 분위기가 떠돌고 있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사람도 적어 굉장히 즐겁다. 왠지 모르게 방과후 같은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걷는 속도도 여느 때보다 얼마간 느려지게 마련이고, '아아, 느티나무에 새싹이 많이 돋았구나!' 하고 평소에는 잘 깨닫지 못하던 곳에도 문득 시선이 가 있거나 한다. 오후가 되어 교섭이 타결되어 열차가 움직이시 시작하거나 하면, 무척 낙담을 하곤 했다.

흔히 신문에 '이제 파업은 신물이 납니다. 어떻게 좀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샐러리맨 A씨(38세)라든가, '파업하는 날은 장사를 할 수 없어서 타격이 큽니다' 라는 도시락 장수(45세)의 발언 같은 것이 실려 있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들만으로 이 세상이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그야 물론 파업 때문에 굉장한 피해를 입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업? 뭐 가끔식은 괜찮지 않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처럼 "파업을 끔찍이 좋아한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 그런 유의 의견을 그다지 실리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파업, 좋지요. 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네요" 하는 따위의 의견이 나오면, 뒷일을 수습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긴, 분명히 수습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런 것을 싣기 시작하면 한 술 더 떠서 '태풍을 너무 좋아해요'라든가, '요인 암살은 유쾌하다!'는 식의 의견까지 실어주지 않으면 안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자의 파업권이라는 것은 일단(국철의 문제는 빼놓고) 법률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니까, '파업을 좋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코 윤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태풍 지지나 요인 암살 지지와는 좀 다른 것이다.

이전에 국유 철도의 중앙선의 철로 옆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것도 웬만큼 옆이 아니고, 뒷뜰을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바로 옆이었다. 물론 엄청나게 시끄럽고, 따라서 집세도 쌌다. 집세가 싸다면 시끄러워도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그러니까 나와 아내를 말한다)은 매년 있는 철도파업이 굉장히 기다려졌다. 파업이 시작되어 열차가 철로 위를 달리지 않게 되면, 우리들은 철로 위에 드러누워서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겼다. 철로옆에는 꽤 많은 들풀이 돋아 있고, 선명한 색깔의 꽃이 피어 있다. 머리 위에서는 종다리가 지저귀고, 주위는 노아의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이대로 신석기 시대로 돌아가 버리는 것도 기분 나쁘지않겠구나, 하는 생각조차 들 정도였다.

얼마 전, 파업 예정일 전날에 밤거리를 어슬렁거리고 걸어가다가 알고있는 아저씨와 딱 마주쳤다. "아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하고 물으니까, "내일 파업이라고, 회사에서 호텔을 잡아주었어요"하고 말하길래, "그럼, 지금부터 어디 가서 한잔 마실까?" 하고 의기투합했는데, 그것도 꽤 즐거웠다. 개중에는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오피스 러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파업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물론 신문에는 실리지 않는다.

 

 

<언어란 공기와 같은 것>

 

나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 태생으로, 죽 그곳에서 자라났다. 부친은 교토의 승려의 아들이고, 모친은 센바의 상인의 딸이니까, 우선100퍼센트 간사이 토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서 살아왔다. 그 밖의 언어는 말하자면 이단이어서, 표준어를쓰는 인간치고 변변한 녀석 없다고 하는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피처하면 무라야마, 식사는 싱거운 맛, 대학하면 교토대학, 장어하면 장어 덮밥의 세계이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도쿄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어(실은 와세다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도 거의 몰랐다. 그렇게 지저분한 곳인 줄 알았더라면 아마 가지 않았을 거다)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도쿄로 올라갔지만, 도쿄로 올라가서 가장 놀란 것은 내가 쓰는 말이 1주일도 안 되어 거의 완전하게 표준어-라고 할까, 도쿄 사투리랄까-로 바뀌어버린 일이었다.

나로서는 그런 말을 지금까지 사용한 적도 없고, 특별히 바꾸려고 하는 의식도 없었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에 도쿄에 올라온 간사이의 친구들로부터 "니, 그거 어디 나라말이고? 제대로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 되는 거 아이가? 바보 같은 말 쓰지 말거라" 하고 비난을 받았지만, 이미 바뀌어버린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언어라는 건 공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의 고장에 가면 그곳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거역할 수가 없다.

우선 악센트가 달라지고, 어휘가 달라진다. 이 순서가 거꾸로 되면, 좀처럼 언어는 익힐 수가 없는 것이다. 어휘라는 건 이성적인 것이고, 악센트는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간사이로 돌아가면 역시 간사이 사투리로 말하게 된다. 신칸센의 고베 역에 내리면, 곧장 간사이 사투리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이번엔 거꾸로 표준어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친구들 말을 빌리면, "네 간사이 사투리는 좀 이상하게 된 것 같다"고 하지만, 조금 전에 도착했으니까 어쩔 수 없고, 1주일만 있으면 완전한 간사이 사투리로 말할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집사람은 3대 이상 계속된 야마노테 선 토박이(야마노테 선 전철은 도쿄의 중심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다)인데, 이 사람도 한참 동안 간사이에 내려가 있으면 간사이 사투리에 익숙해져서 "죄송하지만, 여길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죠?" 라고 아무나 붙잡고 간사이 사투리로 묻곤 한다. 남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친다.

함께 이치가와콘 감독의 [사사메유키]를 구경하고 난 뒤, 한참 동안 악센트가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매우 애를 먹었다.

간사이 지방을 무대로 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배우들도 사투리 습득에 능한 사람과 서투른 사람이 있어서 무척 재미가 있다. 능숙한 사람은 공기처럼 깨끗하게 억양을 몸에 익히고 있으며, 서투른 사람은 어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건 천성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의 예로 말한다면, [사사메유키]가 언어적으로는 그런대로 합격이고,[도톤보리가와]는 형편없었다. 옛날 것으로는 [메오토젠자이]라고 하는 훌륭한 간사이 사투리 영화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는 그 고장 토박이밖에는 알 수가 없다. 도치기 사람은 [엔라이]를 보고, 저런 것은 도치기 사투리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왜 그런지 전혀 모르겠다.

외국어를 습득한다는 것도 대체로 그와 비슷하다. 일본에서 아무리 영어회화를 열심히 공부해도, 실제로 외국에 가보면, 외국어란 책으로 배운 말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번역일도 하고 있어서, 영어를 읽는 것은 부자유스럽지 않지만, 회화는 딱 질색이어서, 작년에 처음 미국에 갈 때까지 거의 한 마디도 영어를 말한 일이 없었다. 학교의 ESS나 영어 회화 교실 같은 데서 모두가 영어로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쳐서-이건 물론 편견입니다, 죄송-도저히 영어 회화를 배울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1주일만 있으면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보니까, 그곳에는 역시 그 고장의 분위기 같은 것이 있어서, 그다지 불편함도 느끼지 않고, 한 달 반을 살면서 여러 작가와 인터뷰까지 했다.

이런 것은 역시 순응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오자, 다시 영어를 잘 못하게 되어 버렸다.

간사이 사투리로 이야기를 돌리면, 나는 아무래도 간사이 지방에서는 소설을 쓰기가 어려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간사이에 있으면 아무래도 간사이 사투리로 사물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사이 사투리는 간사이 사투리 독자적인 사고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스템 속에 빠져버리게 되면, 도쿄에서 쓰는 문장과는 문장의 질이나 리듬이나 발상이 달라지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쓰는 소설의 스타일까지 확 달라져버릴 것 같다. 내가 간사이에 계속 살면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면, 다른 느낌의 소설을 쓰고 있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쪽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비교적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내가 교훈적인 성격의 인간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훈이라는 것의 성립 방법을 비교적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나의 처형은 학생 시절에 호리 다쓰오의 [바람이 불지 않는다]를 읽고,'건강이라는 건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는 독서 감상문을 써서 선생님을 크게 웃게 만들었다고 하는데-그 말을 듣고, 나 역시 그만 웃고 말았지만-그건 웃는 쪽이 잘못이다. 만일 그녀가 [바람이 불지 않는다]를 읽고 건강의 중요성을 통감했다고 한다면, 그건 틀림없이 문학의 힘이라고 볼 만하다. 웃으면 안된다. 그러한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지 않는다]를 읽어보면, 반드시 "음, 그렇구나!"하고 감탄 할 만한 대목이 몇 군데 있을 것이다.

교훈이라는 건 어떤 경우에는 유형으로 전락해버리는 일도 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의미에서의 유형을 타파해버리는 힘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이따금 독자로부터 소설에 대한 감상을 적은 편지가 오는데,"무라카미 씨의 소설 감성은-'이라고 하는 것이 많고, '나는 무라카미 씨의 소설을 읽고 이러저러한 교훈을 얻었습니다'와 같은 것은 한 통도 없다. 교훈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처럼 결코 경직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도 반드시 교훈은 있게 마련이며, 그런 건 일률적으로 같은 형태를 띤 것은 아니다. 비가 내리는 데도 교훈은 있으며, 이웃집 주차장에 세워 놓은 스포츠 카에도 교훈은 있다. 구태여 애써 찾아헤맬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있는대로 그 나름대로 교훈을 찾는 일은 꽤 즐거운 것이다.

옛날, 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쓰레즈레쿠사](일본의 고전-역주)를 배웠을때, 선생님이 "현대의 눈으로 보면, 작자의 설교벽, 교훈벽이 얼마간 느껴진다"는 식의 말을 해서, 그때는 '과연 그렇구나'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와서 보면, 그 교훈적인 부분만 깊이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 기묘한 일이다. [쓰레즈레쿠사]에 한하지 않고, 다른 문학 작품을 설펴보아도,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 묘사는 그때는 감탄해도, 시간이 흐르면 까맣게 잊어버리고,자질구레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유효한 것만을 부분적으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옛날에 어떤 잡지 편집자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상당히 교훈적인 이야기인데, 너무나도 교훈적인게 많아서, 나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케이스 스터디로서 여기에서 재현해 보기로 하겠다.

(사례 소개-모 편집자의 이야기)

나는 재즈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느 전위 재즈 연주자의 연주를 테이프에 녹음한 것을 다른 일을 보러간 김에 XX씨(유명한 재즈 평론가)에게 가지고 가서 들려주었습니다. XX씨는 그것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면서, "음,이건 참 좋구먼.최고일세!" 하고 말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까,나는 그 테이프를 두배나 빨리 돌아가는 속도로 틀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이건 참 난처하게 됐군' 하고 말하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틀었습니다. 부정확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랬더니 XX씨는 화를 벌컥 내더군요. "자네는 나를 바보 천치로 만들 셈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사람도 큰소리를 치는 걸 보니 도량이 좁더군요.

이 이야기에는 처음에도 말한 것처럼, 수많은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찾아낸 교훈을 항목별로 적어보겠다. 시험을 앞둔 사람은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O표를 해주세요.

(1)전위 재즈 같은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피드로 들으면 된다.

(2)무엇이든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3)정확한 평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4)'이것 참 난처하게 됐군'하고 생각되어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5)정확하지 않으면 좀 어떤가?

(6)실패는 웃고 넘겨버리는 것이 제일이다.

(7)도량이 큰 사람은 그다지 떠들어대지 않는 법이다.

(8)편집자는 직접 상대방에게 험담을 하지 않는 법이다.

(9)덮어놓고 무엇인가를 칭찬하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써내려가 보니까, 이런 짧은 이야기에서도 배울 것이 많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밖에도 내가 찾지 못하고 있는 교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찾아내신 분은 가르쳐 주세요. [쓰레즈레쿠사]라면, 이 이야기 뒤에는 어떤 교훈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만 해도, 꽤 시간을 보낼 수가 있을것 같다.

 

<가장 걱정되는 건 중년의 비만>

 

중년이 되어서(나는 36세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간에, 일단 중년 초기라는 부류에 속해 있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꾸만 몸이 뚱뚱해져가는 것이다. 20대 무렵에는 아무리 먹거나 마시거나 해도 체중계 바늘이 60킬로그램의 라인을 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는 조금만 방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65킬로그램 정도가 되어버려서 경험이 날이 갈수록 많아져 가는 것 같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오랫동안 장편소설에 매달려 있느라고, 시간이 아까워서 조깅을 중단했던 탓으로, 지난 2월에는 나의 몸무게가 마침내 66킬로그램이라고 하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운동 부족과 더불어 일의 긴장감에서 오는 과식과 폭음까지 겹치고 보면, 살이 찌는 것도 당연하다. 이 정도의 몸무게가 되면, 몸이 자못 무겁고, 사이즈 29의 바지에 몸을 집어넣기도 괴로워진다. 그래서 3개월 간 감량에 감량을 거듭한 결과, 가까스로 59킬로그램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 좀더 노력해서 어떻게 해서든 58킬로그램 정도에 단단히 정착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키가 168센티미터이기 때문에, 이정도가 가장 기분좋게 생활할수가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1개월당 2킬로그램 정도의 체중을 줄이는건 그다지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살찌기는 쉬워도 빼는 것은 힘들다'고 하는 원칙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바꿔 말한다면 '비만에 이르는 길은 편하고, 살이 빠지는 길은 험난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체질 탓도 있고 해서, 중년이 된다고 모두가 살이 찌는 건 아니다. 가령 나의 단짝 화가 안자이 미즈마루 씨같은 사람은 나보다 한랭크(혹은 반 랭크)위의 중년이지만, 언제나 말라보여서 부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내 아내도 절대로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다.

'살이 찐다, 살이 찌지 않는다'고 하는 체질에는 상당히 유전적인 요소가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령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가족과 친척들이 한 방에 모이는 자리에 나가서, 주위를 빙 둘러보면 참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내 경우를 보면, 우리 집 친척들은 뚱뚱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상당히 체격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고 아내의 친척들은 대부분 마른편이다. 그래서 나는 경조사와 같은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이거야 각오를 단단히 하고, 덤비지 않으면 큰일나겠는데'하고 결심을 새롭게 하고 몸무게 빼기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씨의 단편소설에, 새끼손가락이 짧다는 이유로(아마도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불행한 운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는데,나는 최근에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잘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손에 넣고 있다는 건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으면 자꾸만 화가 난다.

그러나 그 대신-이런 말을 하면 우습지만-아내의 집안에는 암으로 죽는 사람이 거의 없다.비만과 암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수 없지만, 그와 같이 가계라고 하는 것은 꽤 흥미 깊은 것이다. 나는 이따금 결혼식에 초대를 받거나 하면, 연회장 좌우에 나뉘어서 늘어앉은 양가친척들의 얼굴 모습이나 체격 등을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 기회가 있으면 꼭 한 번 시험해보기 바란다. 굉장히 재미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세간에는 비만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 서점에 가보면 살을 빼기 위한 노하우 책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 있고, 그 대부분은 베스트셀러인 모양이다.

나도 몇 권인가 뽑아서 읽어보았는데, 나의 느낌으로 말하다면, '이 책이야말로 결정판!' 이라는 것은 한 권도 없는 것 같다. 세 권의 책을 읽으면, 그곳에는 살을 빼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방법이 완전히 반대 학설을 주장하고 있는 예도 많다. 그리고 개중에는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도 있다. 따라서 살을 빼기 위한 영양학이 아직 정확히 확립되어 있지 않은 현재, 지나치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요법에 의존하는 것에는 사람에 따라서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본래 집착심이 강한 성격이라서, 다이어트에 대해서 상당히 연구를 해보았느데, 그결과로써 나온 결론은, '인간에게는 다양한 얼굴 모습이나 성격이 있는 것처럼, 살이 찌는 방법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만인에게 적합한 살빼기 방법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체질이나 식생활, 직업이나 수입에 맞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처럼 권위 있는 영양학과 의사가 있어서, 개개인의 이야기를 '음,음'하고 들어가며 그 상대방에게 맞는'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처방해주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갑자기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한데 묶은 다이어트책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건 고사하고, 프랑스식 레스토랑에서 디너를 먹고, 디저트를 생략하는 것 같은 억울함과 불쾌감은 말이나 글로는 다 하기 어렵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슬픈 여름의 끝>

 

마침내 여름도 끝나가고 있다. 나는 여름을 끔찍이 좋아하는 소년 아저씨(라는 표현을 요즘 들어 비교적 자조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이기 때문에, 여름이 끝날 때가 되면 꽤 슬퍼진다. 여름이란 다시 내년에도 찾아오지 않느냐고 나 자신에게 타일러 봐도, 바닷가에 있던 별장이 폐쇄되거나, 잠자리가 하늘을 높이 날아다니거나, 해안에 잠수용 고무옷 차림의 서퍼들이 늘어나거나 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 좋은 일은 이미 모두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런 감정은 발상으로서는 어린애와 거의 다를바가 없다.

얼마 전에 모 광고 회사에 다니는 근처의 친지 집에 놀러갔더니, 부인이 나와서 "미안합니다. 여름 휴가가 끝나서 오늘부터 출근했어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말을 들으니까, '그렇구나, 여름이 끝나서 이제 모두들 사회복귀를 하는구나. 수영이다,일광욕이다,폭죽이다,비치 보이스다, 서핑이다하고 지금까지 마음 놓고 놀러만 다니는 건 나 하나뿐이로구나'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게 되었다. 나도 9월 초까지 완성해야 하는 소설이 있는데도,아직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여름의 끝이라는 것은 왜 이처럼 애절한 것인가.

그래서, "일하려면 힘들겠군요"하고 내가 말하니까, "네, 출근할 때 긴 바지 입기가 싫다며 한참 동안 신경질을 부리더군요"하고 부인이 말했다.

그런 사람의 심정을 나는 뼈가 저릴 정도로 잘 알수 있다. 여름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바지를 입고, 러닝 셔츠를 입고, 맥주를 마시면서 지내야하는 그런 유의 계절인 것이다.

나도 지난 두 달 반 동안 긴 바지를 입어본 것은 단 한 번밖에 없다. 여름휴가가 끝나서 긴 바지를 입지 않을 수 없게 된 그의 심경을 생각하면, 남의 일이긴 하지만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무더운 나라에서는, 반바지 출근정도는 회사에서도 허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애당초 그런 꼴도 보기 싫은 에너지 절약 복장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정도니까, 샐러리맨이 반바지를 입고 회사에 간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반바지 출근을 회사가 허용할 리가 있겠어?" 하고, 역시 한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여름 내내 긴 소매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다고, 더군다나 햇볕에 그을려도 안 된다니까."

이 친구는 금년 봄부터 손해 보험 회사의 고객 상담을 맡고 있다. 고객상담이니까 긴 소매 와이셔츠를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이해가 갈수도 있지만, 햇볕에 그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은 사고방식을 납득하기는 어렵다. 나는 한 번도 회사 같은 데를 다녀본 적이 없기 때문에 회사의 구조와 관례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손님과 만나서 얘기를 나눌 때," 하고 그 친구는 설명해주었다. "그때 이쪽이 햇볕에 그을려 있으면, '이 녀석들 내가 지불한 보험료로 놀러 다니기만 하는군'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네. 우리들의 장사는 손님에게 반감을 사면 헤나갈 수가 없으니까, 햇볕에 그을리면 안 되는 걸세. 나는 꽤 뚱뚱한 편이잖아. 그러면 말이지, '돈을 너무 잘 벌어서 매일 맛있는 것만 먹고 있어서 살이 찌는군' 하고 빈정대는 사람이 있으니까 곤란하단 말일세. 난 아무거나 먹어도 살이 찌는데 말이야."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각자가 모두들 여간 힘들지 않겠구나, 하고 동정하게 된다. 이 사람은 작년까지는 요트다 스쿠버다 하고 놀러다녀서 새카맣게 탔기 때문에, 한층 더 동정이 간다. 인간이라는 것은 성장함에 따라 여름의 즐거움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집이 고시엔 구장에서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자주 고교 야구를 구경하러 갔었다. 고교 야구의 외야석은 무료였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비닐봉지에 넣은 얼음을 핥거나 녹은 물을 스트로로 빨아먹거나, 머리에 얹어서 땀을 식히거나 하면서, 하루 온종일 물리지도 않고 야구 구경을 했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고교 야구는 장황스럽게 하나마나한 해설을 하거나, 아나운서가 혼자 흥분하거나 해서 흥이 상당히 깨지지만, 실제로 야구장에 가서 관전을 하면 정말로 재미가 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고교 야구는 불쾌하기 때문에 우선 보지 않지만, 고시엔 구장에는 다시 가보고 싶다. 특히 외야석에 있으면, 주위의 객석도 비교적 한가해서 딴짓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딘가 먼 곳에서 고등학생이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밖에 없다. 젊음이라든가, 땀이라든가, 눈물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고교 야구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고교 야구의 결승전이 끝나고, 폐회식도 끝나서 응원단이 깃발을 챙겨가지고 줄줄이 돌아갈 무렵이 되면, 어린 마음에도 여름도 이젠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어찌된 셈인지, 폐회식이 끝나고 야구장 밖으로 나가면, 언제나 고추잠자리 무리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소년 시절의 나에게는 여름의 끝이었다. 이 시기가 되면, 벌써 고시엔의 해변도, 아시야의 해변도 수영을 할 수 없게 되고, 숙제도 본격적으로 달라 붙어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일은 모두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이따금 어째서 이렇게 여름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고교 야구 기사가 거의 실리지 않는 전국지가 하나 정도 있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신문이 있다면 구독해도 좋을 텐데.

 

<쓸모 없는 물건도 버릴 수 없는 집착>

 

나는 특별히 물건에 집착심이 강한 것도 아니고, 수집벽 같은 것도 그다지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내버려두면 여러 가지 물건이 주위에 걷잡을 수 없이 쌓이게 된다.

레코드니 책이니 테이프니 팸플릿이니, 그밖에 서류, 사진, 시계, 우산, 볼펜 같은 종류의 물건들이다.

어떤 것은 그 나름대로의 필연성이 있다고 늘어나고, 어떤 것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늘어난다. 그러나 필연성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러한 사물은 자동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법이고, 우리들의 한정된 힘으로 그 흐름을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까지 나에게는 느껴진다.

그러한 무용지물의 자연적 증가 경향은 젊었을 때는 그다지 현저하지 않지만, 인생이 어떤 시점을 넘어서면, 돌연 명확한 형태를 보이며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쨌든, 좋건 싫건 간에 정신없이 주위의 물건이 늘어나는 것이다. 남한테 기증받은 것도 있고, 돈을 내고 산 것도 있다. 그 어느쪽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조금은 소용이 되는 것도 있고,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떤 하나의 공통된 특질을 갖고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건 '간단히 버릴 수 없다' 고 하는 특질이다.

예를 들면, 우리 집에는 전부 50개 가량의 볼펜이 있다. 그러나 "어째서 볼펜이 50개씩이나 있는가?" 하고 물어도, 갑자기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볼펜이라는 것은 글쓰는데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까, 글쓰는 것 이외의 일상 생활에서 쓴다고 해봤자, 수첩에 메모를 하거나 신용 카드에 사인을 하는 경우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문방구에서 볼펜을 돈 주고 산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펜은 끊임없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볼펜이나 1센티미터나 2센티미터 정도밖에 잉크가 줄어들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나로서도 '볼펜이라는 것은 제멋대로 내게 와서 불어나는 것' 이라고 인식하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물론 정확하게는 볼펜이 제멋대로 불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고(만일 그렇다면, 멘델의 법칙에 따라 빨강 파랑 혼합이라든가 파랑 검정 혼합 볼펜이 존재했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볼펜이 불어나는데는 불어나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몇 가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념품으로 받거나, 누군가가 잊어버리고 갔거나, 여행갔다가 호텔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돌아오거나, 외출 나갔다가 필기구를 깜빡 잊고 온 것을 깨닫고 임시 변통으로 키오스크(지하철이나 철도 역에 있는 공제회 매점)에서 샀거나(아무튼 싸니까) 등등의 이유가 있다.

그러한 경로를 거쳐서 50개의 볼펜이 밤에 내리는 눈처럼 조용히 우리집에 쌓여 간 것이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나는 그 볼펜 다발이 보이면 짜증이 난다. 50개의 볼펜은 아마도 내가 평생을 써도 다 못 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불필요한 분량의 볼펜을 방해가 된다고 해서 깨끗이 내버릴 수 있느냐 하면, 그럴 수도 없다. 아직 잉크가 많이 남아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볼펜을 쓰레기통에 내버린다는 건 광천수로 이빨을 닦는 것과 같은 정도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아무리 이사의 횟수가 늘어낟도, 볼펜의 수는 절대로 줄지 않는다.

이따금 '이미 잉크가 굳어져서 쓸 수 없게 된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면서 한 개 한 개 시험해보지만, 최근의 볼펜은 질이 좋아진 때문인지, 그런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서 실망하고 만다.

그러나 볼펜 정도라면 아무리 쌓여보았자, 그렇게 무겁지도 않고 장소도 크게 차지하지 않으니까,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손해는 없다.

문제는 책과 레코드이다. 직업상 책의 양이 자꾸 불어나고, 레코드도 세어본 적이 없으니까 잘은 모르지만(세어볼 마음도 없다) 전부 3,000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레코드 3,000장 이라는 말은 쉽지만, 한 장당 앞뒤 45분이라 치고, 전부 들으려면 2,200시간 이상이 걸린다.

요컨대, 그렇게 많은 양의 레코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불필요한 것이다. 이사를 갈 때마다 정말로 죽을 지경이다.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절실히 생각한다.

"새 레코드를 열 장 사면, 오래된 걸 열 장 팔면 되잖아요? 어차피 그렇게 많이 들을 수도 없을테니까" 하고 아내도 투덜거리고, 나도 분명히 그것이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손쉽게 되지 않는다. '이건 꽤 희귀한 레코드라서' 라든가, '이것은 고교 시절에 산 추억이 담긴 레코드라서' 라든가, '그다지 많이 듣지는 않지만, 이 한 곡만은 마음에 쏙 드니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국 쌓인 레코드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난처한 일이다.

사실은 지금도 몇 개월 뒤로 다가온 이사에 대비해서 레코드 500장, 책500권을 줄이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언제나처럼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인터뷰를 당할 때와 할 때>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지만, 한때, 미국판 [플레이보이]지에 실려 있는 '플레이보이 인터뷰'가 재미있어서 매화마다 빠뜨리지 않고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인터뷰 시리즈는 물론 매회 얼마간 잘 되고 못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높은 평균점을 줄 만하다고 생각되며, 특히 커트보네거트나 멜 브룩스를 다룬 내용은 지금까지도 기억이난다.

최근에는 그다지 신기하지도 않지만, 이전에는 그처럼 넓은 스페이스를 할애해가며 상대방에게 실컷 떠들게 만드는 인터뷰 기사는 다른 잡지에는 없었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도 열심히 떠들어대서,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 타이틀 그대로 '탁 털어놓고 하는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물론 시간이 길다고 해서 상대방이 솔직하게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 잡지는 미리 대충 얘기의 포인트를 지적해주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고, 편집 방침도 분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롱 인터뷰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말의 지루한 흐름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게 인터뷰의 어려운 점이다.

'플레이보이 인터뷰'의 기본적 편집 방침은 대충 다음과 같다.

(1)그 분야에 정통한 인물을 질문자로 지정하고, 지면에서는 그 개인의 이름을 숨긴다.

(2)질문자는 원칙적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70퍼센트는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혹은 적어도 상대방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 것-이 바람직하다(나머지 30퍼센트로 도발한다.)

(3)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말고, 망설이게 하지 말고, 질문은 간결하게 한다.

물론 그것은 [플레이 보이]의 편집 방침이어서, 다른 모든 인터뷰에 그대로 몽땅 직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세 가지 포인트가 수많은 일반적인 인터뷰를 성공시키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좀더 다른 표현을 쓴다면,

(1)"뭐야, 이런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오?" 하고 질문자는 상대방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도록 한다. 즉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다.

(2)상대방의 긴장을 풀어주고,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그러면서도 이따금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3)프로그램에 사로잡히지 말고, 상대방의 발언에 임기 응변으로 대처하며, 이야기의 큰 줄거리를 계속 앞으로 끌고 나간다.

위와 같은 것이 되는데,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나자신도 인터뷰에 흥미가 있어서 몇차례 질문자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쉽지다 않았다.

반대로 인터뷰를 당하는 쪽에서도, "아아, 좋은 인터뷰였다.유익했어!'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인터뷰를 한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것은 물론 내쪽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질문자에게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래도 되는 것일까?'하는 불만이 남는다.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겪게되는 인터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질문자가 사전에 준비해온 프로그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질문이 있어서, 그에 대해서 회답을 하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진전되어나갈까 하고 기대하고 있으면, 갑자기, "그럼, 다음 질문입니다만..."하는 식이 되어서,실망해버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만 해도 그 자리에 맞춰서 적당히 지껄여대는 경우도 있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적당히 꾸며서 지껄여대는 경우도 있고, 상당히 근거가 희박한 것을 멋대로 늘어놓을 때도 있으며, 그런 것을 깊이 캐묻고 들여오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그런 약점을 찌르는 사람은-조금은 있지만-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게 되면, 이쪽으로서도 스릴이 없어지기 때문에,점점 더 적당한 말로 얼버무리게 된다.

오랫동안 소설가로 일을 해오고, 수십 번씩 인터뷰를 받게 되면, 이쪽도,

'이러한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지'하는 패턴이 생겨버려서, 이런 것은 편하다면 편하고, 재미가 없다고 하면 재미가 없기 마련이다. 소설가는 자신이 쓴 소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특히 나는 자기 방어 능력이 강한 편이기 때문에,무슨 질문을 해고 그렇게 쉽사리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버려두면 60퍼센트는 솔직한 이야기, 40퍼센트는 자기 방어적인 선에서 이야기가 저절로 진행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것이 70퍼센트 대 30퍼센트이면 조금은 재미있는 인터뷰가 된다.

80퍼센트 대 20퍼센트면 스스로 얘기하기는 조금 쑥스럽지만,얼마간 쇼킹한 내용도 폭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면밀한 사전 조사를해오는 질문자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잡지사 직원들은 모두 바쁘니까 그런 요구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쪽이 가슴 철렁해져서 제대로 얼버무려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을 준비해가지고 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람들이 친절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그쪽이 편하니까 고맙기는 하지만.

그러데, 인터뷰 속에서 질문을 받는 사항이라는 것은 대략 정해져 있어서, 가장 횟수가 많은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자는가?

(2)필기 도구는 어떤 걸 쓰고 있는가?

(3)부인과는 어디서 알게 되었는가?

그런 것을 물어보아서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언제나 걱정이 앞서지만, 모두가 물어보는 것을 보면, 역시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 없는 이유>

 

"마감날이 있는 인생은 빨리 흘러간다"는 것은, 미국의 어느 저널리스트가 한 말인데,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유식한 체를 해서 죄송하지만, 영어에서는 마감날을 '데드 라인'이라고 한다. 데드라인이라는 말에는 그밖에도, '사선:죄수가 이 선을 넘으면 사살당한다'고 하는 의미도 있어서, 이것은 일본의 '마감날'보다는 훨씬 어감이 절실하다.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마감이라는 것은 작가 쪽뿐만 아니라, 상대방인 편집자와 대화를 하고 있으므로 자주 이 마감날 문제가 화제에 오른다.

1 마감날에 늦는다, 2 악필, 3 건방지다, 는 것은 작가가 편집자를 울리는 '3대 요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3에 대해서는 상당히 죄책감을 느끼지만, 1이나 2에 대해서는 그런대로 결백하다. 마감날을 제대로 잘 지키고, 글씨는 특출나게 읽기 쉽게 쓴다. 그래서 마감날에 늦어지기 일쑤인 작가나 악필인 작가에 대한 불평은 남의 일이어서 웃어넘길 수가 있으며, "그건 좀 너무하군요" 하고 적당히 편집자에게 동정 어린 말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대체로 둔필이나 악필이라는 것은 재능이나 인격과는 전혀 무관한 성향이니까, 잡담으로 삼기에 비교적 부담이 적고 이야기도 밝다.

편집자들의 말에 의하면, 일류 대가 정도의 작가쯤 되면, 더러 마감일이 되기 4, 5일 전에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서, "아아, 자네인가? 이번 연재는 쉬겠네!" 하고 한마디 하고는 탕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잡지사는 온통 발칵 뒤집힌다.

재미있다고 하면 재미있을 것 같지만, 나 같은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즉각 어느 들판으로 끌려나가 사살당하고 말 것이다. 5분 후에 전화를 걸어서, "조금 전에 한 말은 거짓이고, 원고, 다 돼있어요" 하고 말해도, 두번 다시 원고 청탁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까지 심하지는 않더라도, 편집가가 작가의 집에서 잠을 자면서 기다리거나, 받아든 원고를 초스피드로 차를 달려서 가까스로 데드라인 한시간 전에 인쇄소로 전달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자주 듣는다. "정말이지 XX씨에게 질렸다니까!" 하고 편집자는 불평을 늘어놓지만, 내가 듣기에는 편집자 쪽에서도 그러한 데드라인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만약 이 세상의 작가들이 모두 마감 3일 전에 원고를 전달하는 일이 생긴다면-그런 일은 행성이 직렬로 나란히 늘어선 데다 헬리 혜성이 겹치는 정도의 확률로밖에 일어날 수 없겠지만-편집자들은 아마 어느 곳의 술집에 모여서, "요즘 작가들은 기개가 없어 옛날이. 좋았다니까!"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내 목을 걸어도 좋을 정도로 확실한 이야기다.

작가들 가운데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은 탓인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2,3일 뒤로 닥쳐온 마감날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이봐, 원고라는 것은 마감날이 되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하면 되는 거라고" 하고 충고해주었다. 편집부에선 반드시 며칠 여유를 남겨두고 일찍 마감날을 설정하니까, 그 사람의 주장에도 일리도 있겠지만, 나는 성격적으로 도저히 그런 짓은 하지 못한다. 마감날 3일 전쯤에는 완성을 해서, 원고지의 모서리를 탁탁 가지런히 맞춰 책상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분해지는 효과라는 것도 있다. 글을 쓰고 나서 금세 원고를 건네주어 버리면, 이따금 나중에, '아차! 그런 것은 쓰지 말 걸 그랬어!' 라든가, 거꾸로 '그래, 이렇게 썼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는데, 3일 정도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그런 위험 부담은 회피할 수가 있다.

웬만한 베테랑이 아닌 한 펜이라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과속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딴 3일 간의 여유를 갖기만 해도 무의미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쓸데없이 망신을 당하는 것을 피할 수가 있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한 일이다.

다음으로, 아슬아슬한 선까지 늦어지게 되면, 인쇄소 직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고교 시절에 학교 신문을 만드느라 인쇄소에 늘 드나들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데, 인쇄소 아저씨들은 누군가의 원고가 늦어지거나 하면, 철야를 해가면서 활자를 뽑지 않으면 안 된다. 인쇄소의 식자공 집에서는 아주머니가 식탁에 저녁 식사를 차려놓고서, 아저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빠, 아직도 안 돌아오시네" 하고 초등학생인 아들이 말하면, 엄마는,

"아빠는 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람의 원고가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된단다." 하고 설명을 한다.

"그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녀석은 나쁜 사람이군요."

"그래, 틀림없이 변변치도 못한 3류 소설을 쓰면서 세상 사람들을 속여먹고 있을 게다."

"엄마, 이 다음에 내가 어른이 되면, 그런 나쁜 녀석은 힘껏 두들겨패줄거야."

"그래, 그래, 착하구나!"

하는 식의 대화를 상상하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얼른 원고를 완성해버리게 된다. 어쩌면 나는 상상력(이라고 할까, 망상력이겠지?)이 지나치게 발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나는 분명히 3의 건방진 인간일지는 모르겠지만, 식자공의 처자에게 미움을 살 가능성만은 일단 배제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엌 식탁에서 첫소설 쓰던 도쿄로 5년 만에 다시 이사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후지사와에 있는 집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서 다시 도쿄로 이사했다. 4개월 가량 도심에서 맨션 생활을 하게 됐는데, 어찌된 셈인지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집 근처로 오게 되어서, "좋은 기회니까 둘이서 여러 가지 나쁜 짓 좀 헤봅시다" 하고 미즈마루 씨는 유혹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소설 현대]의 미야다 편집장은, "여러 가지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후후후!" 하고 꼬시는 등, 참 여러 가지로 힘들다. 이런 식으로 4개월이 지나면, 아마 내 인격이 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후지사와에서 갑자기 도심으로 돌아오니까 모든 것이, '악마 궁전의 전설' 같은 느낌이든다.

생각해보면, 도쿄에서 살게 된 것은 그럭저럭 5년 만이다. 이전에 도쿄에 살았을 때는 카페를 경영하면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이라는 두 권의 소설을 썼는데, 그 때문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그러고 나서 지바 현으로 이사를 가서,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세 번째 장편소설을 썼다. 그대로 도쿄에 살고 있다가는, 차분히 엉덩이를 붙이고소설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페는 꽤 번창했고, "특별히 카페는 집어치우지 않더라도, 그대로 누군가에게 맡기고, 자네는 느긋하게 소설이나 쓰고 있는게 어떻겠느냐?" 고 모두들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어차피 할 바에야 구석에서 구석까지 철저하게 자신이 관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불편한 성격이기 때문에, 결국 가게의 권리를 팔아버리고, 지바 현의 시골로 내려가 펜 한 개로 먹고 살아나갈 결심을 했다.

그래서, 도쿄를 떠나기에 앞서 나에게는 내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으며, 그 당시는, '죽어도 도쿄 같은 곳으로 돌아오진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 시끄러움과 높은 긴장감과 현란스러운 겉치레에 상당히 질리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쿄에서 카페를 하면서 시간을 아껴 소설을 썼던 시절도 그 나름대로 꽤 즐거웠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분명히 크레이그 토머스라고 생각되는데 ([파이어폭스]를 쓴 작가), 그가 어떤 소설의 후기에서 쓴 "많은 처녀작은 한밤중에 부엌의 식탁에서 쓰여진다" 고 하는 내용의 글을 읽고 감탄한 적이 있다. 요컨대, 처음부터 전업작가가 되는 사람은 없으니까, 모두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이 모두 잠들고 난 다음에 한밤중에 부엌 식탁 앞에 앉아서 소설을 조금씩 꾸준히 써나가는 것이다.

물론 서재 같은 것이 있으면 그곳에서 쓰면 되지만, 밤중에 고생해서 소설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개 그다지 생활의 여유가 넉넉한 편이 아닐 테니까, 아무래도 부엌의 식탁이 작업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처음 두 권의 소설도 분명히 '부엌 식탁 소설'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카페 문을 닫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 맥주를 한두 병쯤 마시고, 그러고 나서 아파트의 부엌 식탁에 앉아서 소설을 썼다.

그런 소설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소설의 구성이 상당히 토막토막 끊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글을 쓸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 슬슬 물이 오르려나 보다 하고 생각할 때, '오늘은 여기까지'하고 싹뚝 잘려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은 이튿날 쓰려고 해도, '내가 뭘 쓰고 있었지?' 하는 식으로 흐름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의 조각조각을 모은 것 같은 느낌으로 완성되고 말았다.

첫소설을 발표했을 때, 일부 사람들로부터, '참신하다! 냉철하다!" 고 하는 호의적인 평을 받았지만, 그건 오로지 생활 환경이 자아낸 조화였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뛰어 다니는 인간의 시간성의 틈새에서 쥐어짜낸 소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창작 방법이나 그러한 작품을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심하고 도쿄를 떠나게 되었다. 그것이 5년 전이었다.

오래간만에 도쿄에 돌아와보니까, 도쿄의 시간성이 5년 전에 비해서 더욱 빨라지고, 좀더 세분화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자동차도 많아졌고, 빌딩의 수도 늘어났으며, 지하철 노선도 불어났고, 공기는 더욱 더러워졌으며, 가는 곳마다 바와 레스토랑을 볼 수 있고, 서점에는 생판 본 적도 없는 새 잡지가 넘쳐나고 있으며, 다케시다 거리는 제대로 된 신경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끝까지 걸어갈 수 없는 히스테리컬한 도로로 변모해버리고 말았다.

5년 전에 최첨단이었던 것이 지금은 완전히 낡아빠져 보이고, 옛날에 자주 다니던 가게도 지금은 대부분 세대 교체가 되어 있었다. 아마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부정적인 요소 하나하나가 옛날 같으면, 혹시 내 마음을 매료시켰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한다. 부엌의 식탁에서 한밤중에 캔맥주를 기울이면서 소설을 쓰고 있던 시절을 그립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흘러가버린 일이어서, 이미 옛날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얼마 전에 한밤중에 근처를 산책하고 있을 때, 신주쿠 방향을 바라보았더니, 그 거리의 상공만이 마치 큰 불이라도 난 것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저 황금색의 구름 밑에서 지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겨울이 되면 먹고 싶어지는 것>

 

개인적인 소견을 말한다면, 겨울이 되면 맛이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냄비 요리와 럼주가 들어간 커피이다. 물론 냄비 요리와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함께 먹으면 맛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각각 따로따로 맛이 있다는 이야기다.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면서 오뎅을 먹으면 맛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존 어빙의 [곰을 풀어놓다]라고 하는 엄청나게 긴소설을 번역하고 있는데, 그 속에 럼주가 들어간 커피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것은 비엔나를 무대로 한 소설인데, 주인공들이 자주 길모퉁이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주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걸 읽고 있으면, 나도 럼주가 들어간 커피가 매우 먹고 싶어지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에서는 맛있는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 메뉴에 '럼주가 들어간 커피'라고 써 있어도, 그다지 많이 팔릴거라고 생각되지 않고, 따라서 럼주도 상당히 오래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 마시는 럼주가 들어간 커피에는 뭐라고 할까, 음악에서 말하는 소노리티(울림, 반향)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같은 느낌이 자꾸만 든다. 즉, '럼주가 들어간 커피는 이래야 한다'고 하는 컨센서스 풍의 울림이 잘 전해져오지 않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이런 표현은 정말 식은 땀이 나는 것이지만-겨울의 오스트리아나 독일 같은 데서 마시는 럼주가 들어간 커피는 굉장히 맛이 있다.

어쨌든, 그 근처는 도쿄 같은 곳에 비하면 엄청나게 추우니까, 다운 재킷에 장갑에다 머플러까지 완전 중무장을 하고 도전해도 금세 '와, 정말 춥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카페에 뛰어들어가 따뜻한 걸 마시고 싶어진다. 카페의 유리창은 대개 난방 탓으로 뿌옇게 서리가 끼여 있어서, 밖에서 보면 정말로 따뜻하고 편안해보이는 법이다. 그런 곳에 뛰어들어가서 주문하는것은 역시 '럼주가 들어간 커피'가 제격이다. 독일어로는 분명히, '카페 미트 루므'이었다고 생각되는데, 틀렸다면 미안합니다.

뜨거운 커피 위에 푸짐하게 흰 크림이 얹혀 있고, 럼주의 향기가 탁 하고 코를 찌른다. 그리고 크림과 커피와 럼주의 향기가 일체가 되어서 구수하게 누른 듯한 냄새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건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몸이 따뜻해진다.

그런 이유로 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동안 매일매일 계속 럼주가 들어간 커피만 마셔댔다.

노점에서 커리 부르스트(카레 맛이 나는 소시지)를 먹고, 카페에 들어가서는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는 패턴이었다. 억세게 춥긴 했지만, 그 나름대로 행복한 한 달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추운 프랑크푸르트의 동물원에서, 덜덜 떨면서 마시는 럼주가 들어간 커피 맛은 또한 각별해서, 지금도 비교적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일본에는 럼주가 들어간 커피는 없지만, 그 대신 '오뎅'이 있다. 럼주가 들어간 커피도 좋지만, 오뎅도 나쁘지 않다. 낮에는 비엔나에서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도쿄에서 오뎅을 먹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바보스러운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 오늘, 그리고 요즘입니다.

나 자신의 이야기라서 죄송스럽지만-하긴 이 에세이의 내용은 철두철미하게 개인적인 이야기지만-우리 집사람은, 오뎅이라는 존재를 깊이 그리고 강렬하게 혐오하고 있어서, 나를 위해서 오뎅을 만들어주진 않는다. 집사람이 오뎅을 혐오하는 것은 소녀 시절에 무와 치쿠와(막대기 모양의 속이 빈어묵)로 전차 안에서 희롱을 당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고(당연하다), 오로지 단순히 싫어하는 것뿐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대개 언제나 집 밖에서 혼자 오뎅을 먹는다.

중년 남자가 혼자 오뎅을 먹는 모습은 우아해 보인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다지 꼴사나운 건 아니다. 20대쯤에는 혼자 오뎅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으나, 30세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매우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영화 구경을 한 다음에 잠깐 혼자 밥이라도 먹을까 할 때에는, 나는 대게 오뎅집 카운터를 찾곤 한다. 초밥집 같으면, '오늘의 생선과 대결한다'고하는 일종의 긴박감이 있지만, 오뎅집이라는 건 원래 오늘의 생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마음이 편하고, 우선 값이 싸다. 혼자 멍하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술을 마시기에는 오뎅집이 최고다.

다만 나는 항상 생각하는 것인데, 세상에는 오댕의 정통적인 음미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초밥집에서 처음부터 도로(지방이 많은 다랑어 살)를 계속해서 두 접시나 먹는 것이 촌스러운 것처럼, 처음부터 계란 초밥을 두 개 계속해서 먹으면 안 된다든가, 치쿠와와 한펜(다진 생선살을 반달 모양으로 만든 어묵) 사이에는 다시마를 끼우는 것이 상식이라든가, 그러한 이른바 '오뎅도' 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양배추말이 같은 것은 미식가는 본래 먹으면 안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최소한 부모님은 오뎅의 올바른 음미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안자이 씨는 그러한 것에 비교적 까다로운 사람이니까 함께 오뎅을 먹으러 가거나 했을 때, "무라카미 씨는 이러쿵저러쿵 아는 체를 하지만, 오뎅먹는 법은 엉망이더군요. 곤약 다음에 은행을 먹더라니까요" 하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이난다.

 

 

 

4 꿈도 야무진 쌍둥이 자매와의 데이트

 

내가 음식 장사를 한 경험에 의하면 나는 소설을 쓰기 전에는 음식점 비슷한 것을 7, 8년 간 경영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카페나 음식점, 레스토랑 같은데 들어가면 어느새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이 쏠린다. 점포를 그만둔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다른 손님이 일어서면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올 것 같아 몹시 조심을 하곤 했는데 최근에는 겨우 그런 걱정을 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편안히 음식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만약 내가 이 가게의 경영자라면' 하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데는 변함이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금방 손님이 들어오자마자 손님에게 이야기를 거는 초밥집이다. 그건 정말 곤란하다. 요 며칠 전에도 근처의 초밥집에 처음으로 들어갔더니 이런 아저씨가 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보너스를 타셔서 주머니가 두둑하시겠네요" 하고 먼저 말을 걸어오기에, 음식점 잘못 골라 들어왔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초밥집이란데는 한번 들어가면 그냥 나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예, 아니, 별로."

하고 어물어물 대답했다.

"나왔어요? 나왔죠?"

"안 나왔어요" (귀찮군)

"왜 그렇죠? 회사 경기가 나쁜가요?"

"회사 안 다녀요." (이런 얘긴 하기 싫단 말이다.)

"그럼 학생?"

"아닙니다."

"그럼 뭘 하고 있죠?"

"저, 응, 자유업." (얘기가 이상한 데로 흐르는걸. 싫다, 싫어.)

"자유업이라니 어떤? 구체적으로 가르쳐 줘야지요, 어서."

"저, 잡지에 뭔가를 쓴다든가, 그런 거죠."

"아, 그래요? 대단하시네. 어떤 걸 쓰죠?"

"뭐 이것저것 쓰죠."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면 초밥 맛을 전혀 모른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선전이 능한 반면에 나오는 것이라곤 초라하다. 초밥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세계 어느 사회에도 흔히 이런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초밥집 주인이라면 가급적 손님에게 너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손님이 초밥의 재료나 만드는 방법에 관해 물을 때에나 또렷이 대답한다-이것이 가장 좋은 태도이다.

그리고 동료끼리 세상이야기만 서로 지껄여대는 종업원도 곤란하다. 어제 본 텔레비전 프로 이야기, 스포츠 선수 이야기 따위를 자기네끼리 주고받고 하느라고 손님이 부르는 것도 모르고

"사치코 양, 3번에서 부르고 있잖아."

하고 누군가가 귀띔해주면 비로소 그곳에 가서 주문을 받고는 안에 있는 요리사를 향하여 큰소리로 "초밥 하나" 학 외치고는 또 아까 하던 얘기를 저희들끼리 계속한다.

그와는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공손한 응대도 그건 그것대로 역시 곤란하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체인점에 이런 부류가 많다. 들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90도 각도로 머리를 숙이고 "우리 '데니스'에 잘 오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 때마다-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만-식욕이 싹 가시는 듯하다. 지나치게 공손한 인사를 받으면 이쪽도 고개를 숙이게 되어 피곤하기도 하다.

"아, 괜찮아요. 뭐 대단한 걸 먹는 것도 아닌데" 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같다. 나는 설날에 데니스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이왕 그렇게 나올 바에야 설날엔 역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년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올해도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정식으로 인사말을 하면 좋지 않을까? 여름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에-' 라든가 10월에는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하늘엔 뭉게구름이-'라든가,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듯하지만.

그리고 이것은 그전부터 신경이 쓰이던 일인데, 그런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를 쓰는 점포일수록 카운터 직원이 "XX엔 받았습니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물론 2,560엔인데 5,000엔짜리를 지불했을 때에는 그건 그것대로 괜찮겠지만, 거스름돈을 받을 필요 없이 정확히 2,560엔을 지불했는데도 "얼마를 받았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건 곤란하다.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비스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서비스 하는 쪽에서 보면 커피 한 잔 내는 것조차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커피란 너무 뜨거우면 맛이 없고 그렇다고 싸늘하게 식히면 마시기 어렵다. 그러기에 그 중간 정도의 온도로 가져가야 하는데, 거기에 크림을 넣느냐 안 넣느냐에 따라 또 온도가 변한다. 일행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천천히 마시는 손님과 혼자서 훌쩍 단번에 다 마셔버리는 손님과 마실 때의 온도가 틀린다. 물론 좋아하는 데도 개인의 차가 있다. 나는 비교적 신경을 많이 써가며 하고 있는 쪽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코피 맛이 왜이래. 너무 뜨거워서 맛을 모르겠잖아" 한다든지, "이렇게 식은 커피는 처음 마셔보네. 다시 만들어올 수 없어요?" 하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그럴 때는 전혀 말대꾸를 하지 않고 솔직하게 사과한 후, 즉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프로의 기본이다.

나는 지금은 소설가가 되어 소설을 쓰고 있지만 '커피 한 잔이라도 그토록 갖가지 반응이 있는 걸 봐서 소설을 받아들이는 데도 정말 가지가지일거야. 하는 수 없지' 하고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쌍둥이 걸 프렌드에 거는 내 꿈>

 

나의 꿈은 쌍둥이 걸 프렌드를 갖는 일이다. 쌍둥이 여자 아이가 둘 다 꼭같이 나의 걸 프렌드라는 사실-이것이 나의 10년전부터의 꿈이다.

쌍둥이 여자 분이 이런 글을 읽고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혹시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농담 작작 해요, 하면서 화를 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용서하세요. 이건 단지 나의 꿈일 뿐이니까요. 꿈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며 일상적인 규제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건 단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꿈 이야기다'라고 치부하고 읽어주십시오.

몇 년 전에 (고등학교)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것은 캘리포니아의 고등학생의 생활을 그린 청춘 영화로서,나는 이영화를 몹시 좋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거의 화제에 떠오르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참고로 이영화의 음악은 비치보이스의 마이크 러브가 담당하고, 찰스 로이드가 주연으로 크게 활약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졸업 기념 파티의 장면인데, 이 파티 장소에 주인공인 남자 아이가 디너 재킷을 입고, 양 옆에 쌍둥이 여자아이를 이끌고 멋있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뷰티플하고 패셔너블하고 스트라이킹하고 트렌디하고 고저스하고 그루비했다. 나도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렇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파티란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참석하지 않지만, 만일 쌍둥이 여자 아이들을 에스코트하고 갈 수만 있다면 생활 패턴을 바꾸어 얼마든지 참석해도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반드시 미인이 아니라도 좋다. 그다지 미인이 아니라도 좋다. 지극히 흔한 보통 쌍둥이 여자 아이면 된다. 나는 단지 쌍둥이 여자 아이와 파티에 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왠지 굉장히 특별한 일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뿐인 것이다.

쌍둥이가 좋다는 건 한마디로 말해버리면 '논 섹슈얼인 것인 동시에 섹슈얼인 것이라고 하는 쿨한 배반성'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즉 남자라고 하는 것은(혹은 여자 역시 마찬가지 일지 모르지만) 여자와 함께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애와 함께 자면 어떻게 될까?'하는 가설을 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쌍둥이와 데이트를 하다가 만약 '이 쌍둥이와 함께 자면 어떻게될까?'라는 가설을 품었다 하더라도, 그 가설은 가설로서는 확실히 재미가 있지만 그것은 이미 일상적인 리얼리티를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그 가설을 좀더 추구해 들어가면 뭐랄까'포르노 쌍둥이 성폭행'  따위의 영역으로 빠져들 것이고, 나로서는 별로 그런 영역에 까지 사물을 추구해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 거기까지 이야기를 까다롭게 몰고가고 싶진 않다. 내가 쌍둥이에게서 요구하고 있는 것은 남과여 1대1의 리얼한 가설을 배제한, 이를테면 형이상학적인 영역이다.

즉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제도로서의 쌍둥이다. 콘셉트로서의 쌍둥이 말이다. 그리고 그 쌍둥이적인 제도라든가 콘셉트 가운데서 자신을 검증해보는 일이다. 상당히 우회적인 검증 방식이라고는 생각되지만.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밀하게 따지고 들면 쌍둥이와 사귄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까다로운 일일 거란 생각도 든다.

우선 비용이 많이 든다. 식사비만 하더라도 보통 데이트의 두배가 든다.

선물을 사더라도 어느 한쪽에만 사줄 수 없는 노릇이다. 똑같은 것을 반드시 두 개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용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각각 두사람에게 항상 공평하게 대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자동차를 타고 데이트를 할 때, 한 사람은 옆에 태우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 태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두사람 모두 뒷좌석에 태워야 한다는 말이 되며, 그러다간 흥이 싹 가셔버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디즈니랜드에 가서 스페이스 마운틴을 탈 때만 해도 그렇다. 여자 아이 둘이 나란히 타고 "꺅꺅' 소리를 질러댈 동안, 나는 혼자 외톨이로 타야 된다. 이렇게 되면 맥이 빠진다.

그리고 데이트 약속 하나 하는 데도 "구리코는 월요일, 수요일 낮과 금요일 밤엔 안 돼요.그리고 일요일엔 승마 클럽에 가야하고"라든가 "우리코는 수요일 밤과 금요일 오후엔 안 돼요.토요일엔 양로원 위문 가야 되고"

라든가 해서 조정하기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럼 수요일엔 구리코와 만나고 일요일엔 우리코와 만나자"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쌍둥이와 교제하는 원래의 의미가 싹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그녀들은 언제 어디서나 떼어놓을 수없는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는 쌍둥이 둘다와 함께 현실적으로 교제한다는 것은, 나같이 까다로운 일에 서툴고 부주의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일는지 모른다. 문제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처첩과 함께 동거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 같다. 쌍둥이의 경우에는 입장의 차이 같은 것이 없고 완벽한 fifty-fifty(50:50)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혹은 파티에 데리고 다닐 정도의 가벼운 교제로 그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쌍둥이라고 하는 상황을 좋아한다. 쌍둥이와 함께 있다고 하는 가설 속의 나 자신을 좋아한다. 그녀들이 서로 남몰래 가지고 있는 그 분별성을 좋아한다.그녀들이 지니는 현기증 나는 증식성을 나는 좋아한다.

그녀들은 분열하고 동시에 증식한다. 그것은 나로서는 영원한 백일몽이다.

내게 딱 한명의 여자는 어떤 경우에는 너무 많고 어떤 경우에는 너무 적다. 이따위 소리를 해대면서도 15년씩이나 기나긴 결혼 생활을 해오긴 했지만.

 

<나는 신문을 보지 않는다.>

 

나는 요즘 죽 신문이란걸 구독하지 않는다. 절대로 구독하지 않는다는건 아니고 때로 기분이 내키면 구독해보는 수도 있다. 뭐, 없다고 해서 크게 부자유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는 신문은 좋아하고 어느 신문은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 우리 집에서는 죽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구독했기 때문에 그 두 신문지면에는 비교적 익숙해져 있지만, 그것들 이외에 [요미우리]라든가 [산케이]라든가 [도쿄]는 싫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무슨 신문이든 비슷비슷한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좀더 발행 부수가 적어져서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한 퀄리티 페이퍼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는 있지만, 이것 역시 없어서 불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외국에 갈 때는 대부분 [헤럴드 트리뷴]지를 사서 읽는다.그 신문은 얇고 가벼우며 정보가 자세해서 좋다. 하지만 그것을 사볼 수 없는 고장에 가면 허전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요컨대 신문에 대한 욕구라는 것이 희박하다. 있으면 읽고 없으면 안 읽는다.

하지만 신문을 읽고 있으면 때로는 재미있는 기사와 마주친다. 가령1986년 1월의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1월 12일 육상자위대 나라시노 주둔지의 연습장에서 행해진 제1낙하산병의 낙하산 강하 훈련에서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린 대원 네 명이 바람에 날려 강하 예정 장소에서 5-600미터 떨어진 야지요 시내의 주택가 지붕 등에'불시착', 그중 1명이 발목 골절의 중상을 입었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존 밀리어스의 [젊은 용사들]의 첫장면이 곧 떠오른다. 미국 시골 마을의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데 학교 교정에 낙하산이 차례차례 내려온다. 그래서 학생들이 '아아, 훈련중에 바람에 날려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보러갔는데, 내려온 것이 쿠바 병사여서 빵빵빵빵 하고 총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다.

나는 이영화의 이장면을 매우 교훈적으로 보았다. 낙하산이 내려오더라도 금방 바깥에 나가선 안된다. 방안 깊숙이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 쓰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어째서 이런 생각을 했느냐 하면 내 집사람이 영화에서 교훈을 얻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함께 영화를 보고 영화관밖에 나오면 흔히,"여보,제가 이영화를 보고 얻은 교훈은요,,,"하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뭐 이런 여자가 다있어, 하고 생각했으나 부부란 무서운 것이어서 그렇게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거기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하여 어느새 나도 저절로 영화에서 교훈을 얻는 버릇이 몸에 배어버렸다. 지적인 영화 감상법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적어도 실용적이기는 하다. 나는 솔직히 말해 지적으로 영화를 보는 패셔너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근 다소 질렸다.

그래서 어쨌든 [젊은 용사들]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이런 것이었다. 낙하산이 내려오거든 바깥에 나가지 말아라.

신문 기사에 의하면 골절상을 입은 가쿠노 일등상사는 한 주부(65세)가정원의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바로 옆에 쾅하고 떨어졌던 것 같다.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어떤 정경이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길이 없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떨어져 내린 것일까? "아주머니, 위험해요, 피하세요"하고 다급하게 고함치면서 내려왔을까? 아니면 아무 소리도 않고 그냥 뚝 떨어졌을까? 그런 세밀한 점이 알고 싶다. 하지만 신문 기사에는 가장 궁금한 점이 대개 빠져 있다. 아무 소리도 않고 그냥 뚝 떨어졌다면 그건 좀 기분 나쁠 것 같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이 가쿠노 일등상사는 훈련중 지갑을 지니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주둔지 내에 떨어지는 데는 돈이라고는 한 푼도 필요하지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바깥 후방 지역에 떨어져버리면 돈 한 푼도 지닌 게 없으면 곤란할 거라고 생각된다. 택시도 탈 수 없고 전화도 걸 수 없다. 주부에게 "당신, 농담이 아니에요. 망가뜨린 정원수를 배상해줄 때까지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겠어요" 하고 위협 당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문제이긴 해도.

사실은 나도 전에 4년 가까이 이나라신 주둔지 옆에서 살았기 ㄸ문에 낙하산 훈련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 주둔지 옆에서 낙하산병들은 그야말로 엘리트 부대여서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휙 현지로 날아가서 즉시 실전배치 되도록 훈련을 받고 있다. 터프한 부대여서 연중무휴로 훈련을 받는다. 책상에 마주앉아 뭔가 글을 쓰고 있다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창밖에 무수한 낙하산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이곤 했다.

이것은 [젊은 용사들]을 보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그때는 그렇게 무섭다고 생각지 않았고, 따라서 방안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지도 않았다. 이사를 하고 나서 한동안은 정말 겁이 더럭 나기도 했지만 시일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져서, 아아 또 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심상해졌다. 그리고 야전복을 입고 자동소총을 든 부대가 빠르게 집앞을 구보로 달려가고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로 깜짝 놀랐던 것도 처음뿐이고 그 후에는 익숙해졌다. 오랜만에 신문에서 그 기사를 읽고 나라시노에서 살던 때를 회상했다. 그리고 '그렇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로구나'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이러다간 중기관총과 박격포를 가진 부대가 우리 마을의 큰 교차로를 건너가도 아무도 놀라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나는 실수도 자주 저지르지만 착각도 자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극히 최근까지 일본의 모텔이라고 하는 것은 차를 탄채 방안에까지 들어갈 수있는 숙박 시설인 줄로만 굳게 믿고 있었다. 요컨대 말이 마구간에 들어가듯이 부들부들 떨면서 차가 방안에 들어가고, 젊은 남녀가(반드시 꼭 젊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면 바로 그 앞에 침대가있다는 식이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버렸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모텔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려니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2,3년 전에 영화에서 진짜 모텔을 보았을 때엔 깜짝 놀랐다. 모텔이란, 이름뿐이고 실제로는 흔해빠진 러브 호텔과-이것 역시 상세하게는 모르지만-다름 없었던 것이다. 차도 방안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고, 차에 관련된 어떤 특수 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어째서 차가 일부러 방 안에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지?"

하고 거꾸로 질문을 받았다.

"그런 식으로 돼 있다간 방 안에 배기 가스가 가득 차게 될거고, 8톤 트럭으로 모텔에 들어오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방을 달라고 부탁해야 되겠는지 한번 상상해보게."

그 말을 들으니 과연 그럴 것 같다.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이 훨씬 이치에 맞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모텔이라고 하면 남녀가 껴안고 있는 바로 그옆에 자동차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런 목가적인(그렇지도 않은가?)광경을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리곤 해버린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나는 죽 '기자 회견'이라는 것을 '기차 회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일어로는 이 두말의 음이 똑같이'기샤'임-역주). 그래서 가령 라디오나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어제 기자 회견에서..."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그 일행이 덜커덩거리며 흔들리는 기차안에서 이야기하는 광경을 상상하고는 '정치가란 사람들은 여기 저기로 이동이 잦은 직업인이구나'하고 감탄했었다.

물론 이런 것도 잘 생각하면 '왜 정치가가 이야기를 하는때 언제나 한결같이 기차안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될까?'하는 의문이 당연히 떠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중학생이 된후 신문의 정치 기사를 읽고 '기자 회견'이라는 활자를 내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나는 기자 회견이 기차 회견이라는 데에 한 가닥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그런 착각이 비주얼한 요소를 내포한 착각이었기 때문이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즉 모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을 분석적으로 라기보다는 정경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요즘도 라디오 뉴스에서 '기자 회견'이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태운 밤 기차가(나의 상상 속에서 기차 회견의 기차는 언제나 밤 기차였다)광활한 미국의 평원을 횡단해서 가는 1950년대의 풍경을 한순간에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이 오해가 풀린 지 약 4반세기란 세월이 지나버려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 든 두가지 예와는 달라도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착각이지만, 나는 오랫동안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큰 실례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오해가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늘 가급적 상대방이 눈을 똑바로 보지 않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런 오해는 결국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어떤 사람에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아"라는 충고를 들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으면, 어딘가 켕기는 데가 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상대방에게 갖게 하는 것이 되고, 또 실례가 되기도 해"라고.

하지만 이런 말을 남에게 듣는다고 해서 가치관이 당장 180도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바로 어제까지 상대방이 눈을 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던 인간이 아무런 저항 없이 오늘 당장 상대방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론상으로는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상대방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마음 속속들이까지 환히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무래도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일부러 과장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제까지 내내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생활해온 사람이 갑자기 눈을 보게 되면, 상대방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보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원래대로 상대방의 눈에서 시선을 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쳤기에 나는 '상대방의 눈을 쳐다본다'는 일에 대해서 매우 고민을 많이 했다. 별로 강하게 의식하지 않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스물다섯을 넘기고 나서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속 어디에선가는 '사실은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 더 예의바른 태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비교적 집요한 성격의 인간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이런 수많은 착각이, 착각으로서가 아니라 정다한 행위, 정당한 상황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지구상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하는 수가 있다. 거기에는 침대 바로 옆까지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있는 모텔이 있고, 정치가는 밤기차를 타고 정치를 논하며, 사람들은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차를 운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텔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건 아무 관계도 없지만 말이다.

 

 

<책 한권 갖고 무인도에 간다면 무슨 책을?>

 

책을 한 권만 갖고 무인도에 간다면 무슨 책을 갖고 갈 것인가, 하는 앙케트가 흔히 나온다. 어째서 일부러 무인도에 가지않으면 안되는지 그 언저리의 사정과 경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쫓겨나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자진해서 가는 것일까? 누가 자진해서 무인도에까지 가겠는가) 별로 앙케트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쨌든 잔소리를 늘어놓아 봤자 소용없다. 무인도에 어떤 책을 갖고 갈 것인가?

나는 내가 쓴 소설책을 갖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것을 읽고 '아, 이 대목은 안 좋아'라든가 '이 대목은 이렇게 고쳐야 겠어'라든가 하며 열심히 볼펜으로 써넣을 것이다. 아마 이런 일을 하다 보면 한달쯤 후에는 완전히 딴 소설로 탈바꿈해버릴 것이다. 갖고 가지 않더라도 내가 자꾸 소설을 써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결론에 다다라버린다.

이런 점에서 소설가란 편리하다. 적당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나가다 진력이 나면 그걸 풀 겸, '아키히코는 메구미의 하얀 복부를 손톱 끝으로 살짝 문질렀다'-뭐 대충 이런 문장을 원숭이에게 읽어 들려주든가 하면서.

하지만 나를 무인도로 추방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이 나에게 볼펜과 종이를 휴대하로록 허락해줄 정도로 친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아, 잠깐 잠깐, 안 돼요, 당신. 그런 걸 가져가면 곤란해요. 산 위에 지은호텔에 휴양하러 가는 게 아니라 무인도에 가는거요. 그 차이를 똑똑히 알고 있어야죠"라고 말하면서 볼펜이고 종이고 모조리 압수 당해버릴 것만 같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외국어 사전을 한 권 택하려고 생각한다. 프랑스어든 영어든 중국어든 그리스어든 아무것이라도 상관없지만 꽤 두껍고 튼튼하게 제본된 사전을 하나 택해서 그걸 가져가겠다. 그리하여 몇 달 몇 년이 걸리든 그 외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리고 진력났을 때 '아카치코는 메구미의 하얀 복부를 손톱 끝으로 살짝 문질렀다'라는 문장을 프랑스어로 원숭이에게 읽어 들려주기도 하면서.

하지만 무인도 운운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는 사전이란걸 비교적 좋아하여, 틈은 나는데 읽을 거리가 없을 때에는 모로 드러누워 딩굴면서 영일 사전을 읽거나 할 때가 흔히 있다.

사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자체가 상당히 재미있고 인정미 있는 것이다.

공부나 작업을 하기 위해 사용할 때에는 '나는 사전이다'하고 턱 버티고 있는 것 같아 가까이하기가 퍽 어렵지만, 일단 책상을 떠나 복도에서 고양이와 함께 딩굴면서 유유히 책장페이지를 넘기거나 하고 있노라면 상데방도 릴랙스해져서, '그럼 우리끼리 이야긴데 말야...'하는 측면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예문 한 두 개만 놓고 보더라도 매우 함축성이 많은 것이 있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수가 있다. 나의 인생관의 꽤 많은 부분은 영일 사전의 예문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싶을 정도다.

[리더스 영일사전]의 little항에 나와 있는 "Little things please little minds'라는 예문 같은 것은 "그래, 과연 그말이 맞아"하고 열 번도 더 혼자서 수긍해버리게 된다. 우리 말로 이뜻을 번역하면 '소인은 작은 일을 좋아한다'가 되지만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하면 '하찮은 인간은 하찮은 일에 신이 난다'는 식이 된다.

하지만 나의 의견을 덧붙인다면,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하찮은 일을 가지고 기뻐함과 동시에 하찮은 일을 사지고 화를 내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나는 원칙적으로 묘한 일로 기뻐하거나 감격해하는 사람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는다.

가령 나를 열심히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그가 나를 헐뜯으면 "아마 약간의 견해 차이일 거야"하고 나를 감싸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이런 타입의 사람이다. 나를 칭찬해주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 안 가서 이런 사람은 반드시 또 영문도 모를 일을 가지고 내게 대해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이쪽으로서는 완전한 소모전이다.

상대방이 little mind인지 어떤지는 제쳐놓고, little things를 가지고 기뻐하는 사람과는 가능한 한 상종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철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자신이 little things를 가지고 좋아한다면 그것 역시 곤란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이것은 어느 소설 가운데서 이미 써먹은 거라고 생각되지만-'어떤 면도질에도 그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다'는 말 역시 내가 매우 좋아하는 격언에 해당하는 예문 중의 하나다.고등학교 시적에 읽고 그때 "과연 그래"하고 수긍하고 나서 그이후로 늘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말이데,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영문을 잊어버렸다. 요컨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날마다 계속하고 있노라면 거기에 저절로 철학이 생겨난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풀이를 해주면 '뭐 별것도 아니구먼'하고 생각해버리지만, "어떤 면도질에도 그 나름의 철학이 있다"고 말하면 묘하게도 "응, 그래"하고 설득 당해 버리는 것이다.

결국'면도질'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행위와 '철학'과를 연계시킨 것이 핵심인 셈이다. 나도 매일 아침 수염을 깎으면서 어느새 거기에 내포된 철학의 질에 관해 고찰해 버리게 된다.

나는 언제나 귀밑털부터 먼저 밀고 그리고 난 다음에 턱을, 마지막으로 코밑 수염이라는 순번으로 면도를 한다. 그런 순번에도 철학은 싹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면 꼼므 데 갸르송의 양복 가운데서 철학을 벌견하는 사상가가 있다하더라도, 그건 아무런 이상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내가 알고 있는 남자 중에 "날마다 수염 깎는 게 귀찮아 죽겠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면도를 하느니 차라리 생리를 하는게 낫겠다니까"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어떤 여자 아이에게 했더니, 그녀는 생리를 매우 힘들게 하는 여자인데,"나는 생리만 안 할 수 있다면 매일 면도를 해도 좋아요"라고 했다. 그런 것에 의견에 일치 돼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각자 자기가 떠맡은 짐을 지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떤 생리에도 철학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철학일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Candle을 찾아보면,'You can not burn the candle at both ends'라는 예문이 있다.

이것은 '양초의 두 끝에 불을 붙일 수는 없다', 곧 상반되는 행위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뜻인데, 두려운 줄을 모르는 격언 파괴자인 하퍼 마르크스는 어떤 영화 가운데서 양초의 양쪽 끝에 실제로 불을 붙여 보이겠다는 대담한 실험을 해보였다. 그루초가 하처의 엉터리 같은 수작을 비판하면서 "넌 바보로구나. 양초의 두 끝에 불을 붙일 수가 없잖아"라고 말하자 하퍼는 그가 늘 입고 다니는 그 수퍼 망토에서 미리 준비해온 양쪽에 심이 달린 양초를 꺼내서 거기에 불을 붙였다. 이런 개그는 자막만 봐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이 격언을 모르고서는 하나도 재미가 없다. 하퍼는 기회만 있으면 반드시 이 같은 틀에 박힌 문구를 때려눕혀버린다.

이런 식으로 갖가지 일들을 생각해가면서 천천히 사전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루에 앉아서 허브 차를 마시면서 이렇게 해보면 기분은 벌써 노후나 다름없다.

plod에서 plummy까지 읽고 문득 눈을 뜨니 하늘에는 빗으로 빗은 듯한 가을의 구름이...란 식이다. 하지만 전철 안에서 꼼짝 않고 사전을 탐독하고 있는 젊은이가 있다고 하면 이건 좀 무서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챈들러식 소설 쓰는 법>

 

오래 전에 어떤 책에서 레이먼드 챈들러가 소설을 쓰는 요령에 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내용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나 이제 세월이 흘러서 거의 잊어버렸다. 꽤 재미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출전이 어디였는지조차 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좋았는지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글 가운데서 딱 하나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세밀한 부분까지 딱 이랬었다고 단언할 자신은 없다. 만약 틀렸으면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고, 이렇게 기억하는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기억 역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어쨌든 간에, 나는 그것을 '챈들러 방식'이라 부르고 있다.

먼저 데스크를 딱 정하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자신이 글을 쓰기에 적합한 데스크를 하나 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원고 용지나, 만년필이나 자료 등을 잘 갖취둔다. 단정하게 정돈해둘 필요는 없지만, 언제라도 일을 시작할수 있는 태세로 갖춰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매일 일정한 시간을-가령 두 시간이면 두 시간 동안-그 데스크앞에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시간 안에 글을 술술 써나갈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써지진 않는 것이 글이기 때문에, 전혀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 날도 있을 수 있다. 쓰고는 싶은데 아무리해도 잘 써지지가 않아 끝내 싫증이 나서 팽개쳐버리는 일도 있을 것이고, 도대체가 글 따위는 전혀 쓰고 싶지 않은 심정이 될 직관이 가르쳐주는 날도 있다. 그런 때에는어떻게 하면 좋은가?

비록 한 줄도 써지지 않더라도 어쨌든 일단 앉으시오, 그 데스크 앞에 앉으시오, 라고 챈들러는 말한다. 아무튼 그 데스크 앞에서 두 시간 동안 버티고 앉아 있으시오, 라고.

그 사이에 펜을 쥐고 뭐든 글을 써보려고 노력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대신 다른 아무일도 해선 안 된다. 책을 읽기나 잡지를 넘기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고양이와 함께 놀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해선 안 된다.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오로지 딱 버티고 앉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 즉 아무것도 쓰지 않더라도, 쓰는 것과 똑같은 집중적인 태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비록 그때에는 한 줄도 못 쓴다 하더라도 반드시 언젠가 다시 글이 써지는 사이클이 돌아온다. 초조해하며 쓸데없는 짓을 해봤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챈들러 방식이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을 대체로 좋아한다. 그자세가 건전하다고 생가한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만 어니스트 헤망웨이처럼 전쟁이 터질 적마다 외국으로 날아 올린다거나 해서 그것을 소설의 제재로 삼는 방식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텔레비전의 "무슨 무슨 스페셜' 프로와 근본적으로 같은 발상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글을 쓰고 있노라면 점점 더 심해져 부자연스럽게 제재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런 방식에 비하면 "그냥 두시간 동안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시오.그러고 있노라면 어떻게든 될 수 있을 테니까'라는 것은 사상으로서 진지하고 건전하다. 돈도 들지 않고, 남에게 폐도 끼치지 않으며, 품도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외적 요인에 의뢰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 깨끗해서 좋다.

나는 원래부터 멍하니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을 쓸때에는 대개 이 챈들러 방식을 택한다. 아무튼 날마다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이 써지든 써지지 않든, 책상 앞에서 두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간단하다면 간단하겠지만, 어렵다면 그야말로 어려운 노릇이다. 확실히 어떤 종류의 비결은 필요하다.

'하품 날 지침서'일지 모르지만, 내가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방식을 일단 적어보기로 한다. 우선 두 손으로 턱을 괸다.양쪽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턱밑을 받치고 새끼손가락으로 눈언저리를 누른다. 그러고 나서 목의 힘을 빼고 두 눈의 초점을 미묘하게 비켜 놓는다. 나의 경우 다행히도 오른쪽 눈의 시력이 0.08,왼쪽의 시력이 0.5이기 때문에 별 힘들이지 않고도 목의 힘을 쭉 빼버리면 눈의 초점은 저절로 비켜져서 시계는 흐려져 버린다.

이따금씩, 문득 생각난 듯이 조금씩 자세를 바꾸면서 대체로 이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의 책상 앞에는 창문이 있고, 창문 너머에는 1천 평 가량 되는 넓직한 빈터가 있다. 병원을 지을 곳으로 확보된 땅인데,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아서 그대로 내팽개쳐진 넓은 땅이다. 거기서는 억새풀과 키가 큰 잡초가 뒤엉켜 치열한 싸움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 멍한 시선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풀과 그 키 큰 잡초를 바라보고 있다.

계속 이렇게 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뇌수가 케이크의 효모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착각에 사로잡힌다. 잘 휘젓지 않았기 때문에 군데군데 '공기 방울'이 생긴 효모다. 머리를 뒤로 젖히면 뚝뚝 하는 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 공기 방울이 생긴 뇌수가 뒤쪽으로 이동하고, 앞쪽으로 기울이면 똑같이 꾸역꾸역 앞쪽으로 이동한다. 재미가 있어서 그런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본다.

창밖에는 억새풀이 바람에 계속 나부끼고 있다. 개가 한 마리 나타났다가 가버린다. 비행기가 난다. 지금은 1983년 봄이고 나는 서른네 살이다. 나는 책상 앞에서 언제까지고 멍하니 앉아 있다. 진짜 이렇게 하고 있는 사이에 뭔가가 써질까,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쓰기 싫다. 왜 그런진 모르지만.

 

<기차에서 혼자 여행하는 여자를 만날 때>

 

연중 행사인 이사를 해서-도대체 이 18년 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는지-

집 안이 혼란스러워 아무튼 소설을 쓸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야쓰가다케의 호텔에 한 열흘 정도 틀어 박혀 작업을 하기로 했다. 간혹 호텔에 틀어박혀 일을 하면 기분 전환도 되고 별로 싫진 않지만, 도심지의 호텔에서는 대개의 경우 에어콘을 너무 세게 틀어놓는 바람에 몸에 오히려 해로운수가 많다. 그래서 야쓰다가케까지 일부러 갔던 것이다.

조용하고 공기도 좋고 일 자체가 잘 진행된다. 다만 리조트 호텔에 묵으면서 작업하는 것의 문제점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만을 생각해버리는데 있다. 이제 슬슬 아침을 먹어야지 라든가, 점심은 몇 시에 식당에 가면 된다든가, 오늘 저녁 메뉴에는 뭐가 나올까 라든가, 하루 종일 그런것만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 처량해진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대개 뚱뚱해져서 돌아오고.

야쓰다가케까지는 쇼카이 선을 타고 간다. 쇼카이 선 전철에는 여자 아이들이 참으로 많다. 거기다 이 주변은 도쿄권과 간사이권이 마주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도쿄에서 온 여자 군단과 간사이에서 온 여자 군단이 고부치자와 근처에서 난류와 한류처럼 콱 부닥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소란스러움은 절정에 이른다. 생지옥이다. "아이, 싫어. 바보같이" 라든가, "그런 소리 해봤자 누가 들어나준대?" 라든가, 아무튼 왁자지껄 떠들썩하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 도심지가 선로 위를 달려 지나가는 것 같다.

나이 지긋한 역무원이 다가와서, "아아, 여러분, 좀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손님들도 계시기 때문에" 하고 말해봤자 어느 누구 하나 들은척도 하지 않는다. 들을 리가 없다.

모두가 스포츠 백과 테니스 라켓을 갖고 있다. 이렇게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 많은데도 세계적인 일본인 테니스 선수가 배출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해보았자 아무 소용없기 때문에 워크맨의 이어폰을 귀에다 꽂고 혼자서 묵묵히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 네 사람이 앉는 좌석에, 나와 일행인 여자 아이들 셋이 앉아 있다. 저쪽도 불편하겠지만,이쪽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주변에 여자 아이들이 잔뜩 있으면 긴장이 되고 가슴이 두근거려 책 같은 건 도저히 못 읽었는데 최근엔 '젊은 여자들은 재잘거리고 귀찮고 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도 이러니 큰 일이다.

일을 마무리짓고 열흘 후에 전철로 도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전동차는 갈 때와는 딴판으로 텅텅 비어 있었다. 연휴가 끝났기 때문이다. 네 사람이 앉는 좌석에 나 혼자 앉아서 [고리키 파크]를 읽고 있노라니 얼마 있지 않아 맞은편 좌석에 테니스 걸보다는 한 단계 나이가 위인 듯 싶은,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가 앉았다. 제법 분위기 있는 여자였다. 이 여자는 아오야마풍의 패션으로 몸치장을 했고 무릎 위에는 여성 잡지 [앙앙]을 얹고 지루한 듯이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혼자서 여행하는 모양이었다.

혼자 여행을 할 때 곤란한 것은, 같은 처지의 여성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동석하거나 하는 것이 가장 곤란하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둘밖에 없다. 물론 곤란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곤란하다. 말을 거는 것이 좋을지, 걸지 않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말을 걺으로써 '모처럼 혼자서 조용히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귀찮게 구네'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싫다. '속으론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불쾌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한데 이야기 좀 걸어주면 어때. 아마 소심한 남자인가 봐' 하고 생각해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다.

참 어렵구나, 하고 느낀다. 어떡한다지, 하고 고민하면서 캔맥주를 따서마시며 [고리기 파크] 책장을 넘기고 있는 사이에 전동차는 종착역에 닿아버렸다. 그것으로 끝이다.

이런 일은 정말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대수롭지 않은 만큼 몸에 좋지 않다. 이럴 바에야 할머니나 아주머니 단체와 동석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혼자 여행을 하는 여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은 이런 경우 말을 걸어주기를 바랄까, 아니면 걸어주지 않기를 바랄까?

젊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번은 그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하루키 선생님은 바보 같으시네요. 그건 상대방에 따라 틀린 것 아니겠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딴은 그렇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 같은 사람은 더욱 고민스러워진다.

말을 건다 치더라도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화제가 없지 않은가.

"그 [앙앙] 잡지 재미있어요?" 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나는 대학 1학년 때 혼자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스물다섯, 여섯 정도의 여자가 이야기를 걸어오는데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저, 학생은 어느 대학 다니나요? 아, 와세다요. 애인은 있나요? 지금 읽고 있는 그 책은 무슨 책이죠?"

아무튼 이런 질문을 장장 세 시간 동안이나 받고 혼이 났던 적이 있다.

그 당시의 신칸센은 차량 하나에 손님이 두세 사람밖에 없었는데도 그녀는 마치 노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내 옆에 앉아서 "저, 학생은 몇 살이죠?

어디 살아요?" 라고 말을 걸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그 대답을 다 해주느라 진짜 애를 먹었다. 그래도 비교적 예쁜 여자였기 때문에 나이 차이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때 당당하게 말을 주고받고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으로서는 일어나지만 그 무렵엔 나도 아직 순정파였기 때문에 불안에 떨며 세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혼자 여행을 하는 여성에게는 말을 걸기가 힘들다. 나는 딱히 소심한 사람은 아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데에 있어서 약간 과민한 구석이 있다. 속마음에 관해서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딜레마를 제외시켜 놓고 본다면, 혼자 여행을 하는 여자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볼 때 비교적 좋은 느낌이 드는 분류의 사람이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여자 아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약간 긴장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무릎 위에 책을 얹어놓고, 때때로 문득문득 창 밖을 내다본다. 몰래 살짝 도시락을 먹거나 뭔가를 마시거나 한다. 그리고 혼자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과묵하다. "그러니까 말예요" 하는 투의 불필요한 말은 일체 걸어오지 않는다. 평소에는 그러는지 모르지만 차 안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여자 아이와 동석을 하거나 하면 "저,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이죠?" 한다거나 "즐거웠어요?" 하는 흔해빠진 질문을 하기보다는 그냥 그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다는 느낌이 들어, 마침내 말을 걸어보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에 [밤의 나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기타를 메고 혼자 여행을 하는 젊은 여자 아이의 이야기다. 그녀는 밤 열차 안에서 색다른 노부부와 동석해서 기묘한 체험을 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참으로 좋아한다. 그래서 열차 안에서 혼자 여행을 하는 여자 아이를 만나면 언제나 이 단편을 떠올리곤 한다.

 

<젊었을 때 번번이 실패했던 연애>

 

여성에 관한 호감이란 것은 내게도 역시 있다. 기혼자인데다 이제 거의 중년에 접어들었고, 별로 좋은 점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호감이라는 것은 있다. 좀 낯두꺼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호감이란 것은 겉모양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그런 것을 말한다. 즉 어떤 여성과 어떤 일로 우연히 마주쳐, '아, 이 여자는 괜찮구나. 호감이 가는걸.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이군' 하고 문득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일은 그렇게 많이, 1년 내내 있는 일은 아니지만, 역시 1년에 한 번 정도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상대와 작렬하는듯한, 불같은 연애에 빠져드느냐 하면 그런건 아니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헤어져 버린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일부일처제의 도덕률에 따라 스스로를 억제하며 의식적으로 연애에 빠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가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리는 것이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외견상 좋아하는 여성은 우선 100퍼센트 가깝게 내면적으로는-내면적 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적으로는-내가 좋아하지 않는 타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번갯불에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을 뒤흔들어 놓지만, 잠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어쩐지 싫은데' 하는 느낌이 들어 그 번갯불이 어느새 서서히 꺼져버리고 결국 나는 연애에 빠지는 일 없이 끝나고 만다. 이런 인생은 불행하다면 불행하고 평안하다면 평안하다.

물론 좀더 젊었을 때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외모에만 끌려서 메아리 없는 연애를 한 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런 작업의 불모성은 몸에 배게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 여자 괜찮겠는걸, 어쩐지 싫은데, 라는 선에서 낙착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보다는 외모와 전혀 관계없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여자 아이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즐겁다. 물론 그런 걸 가지고 연애라고 부를 수 없겠지만.

어째서 내가 호감이 가는 외모의 여성은 거의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인간이 아닐까 하고 나는 때때로 진지하게 생각해보곤 하지만 납득이 가는 대답은 여간해서는 떠오르지 않는다. '인생이란 다 그런거야' 하고 커트 보네거트 식으로 간단하게 납득해 버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것은 호색적인 연애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인생이란 그런거야'나,'그게 어쨌다는 거냐' 하는 말은 인생에 있어(특히 중년 이후의 인생에 있어) 두 개의 중대한 '키 워드'다. 체험적으로 말해서 이 두 개의 말만 머릿속에 잘 아로새겨두면 대개의 인생 국면은 큰 탈없이 무난히 넘길 수가 있다.

가령 기를 쓰고 역의 플랫폼 계단을 뛰어올라갔는데 전동차 문이 싹 닫혀버리거나 하면 몹시 속상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인생이란 으레 그런거야'라고 생각해버리면 된다. 곧 전동차의 문이란 대체로 눈 앞에서 닫혀버리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납득해버리면 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로 속상할 것도 없다. 세상이 그런 원칙에 따라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 전동차에 못 탄 덕분에 약속한 시간에 늦는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그게 어쨌다는 거냐' 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 타이르면 된다. 약속한 시간에서 한 20분 가량 늦어봤자 그런 건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확장 경쟁이나 신의 죽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그게 어쨌다는 거냐'의 정신이다.

다만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마음 편하게 살 수는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우선 향상이 없다.

사회적 책임감이나 리더십 같은 것과는 우선 인연이 끊어져버린다. 머잖아 핵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혹은 신이 죽어도 '세상이란 그런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냐' 하고 생각해버리게끔 되어-나에게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지만-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점이 있다. 사물에는 '적당' 이란 것이 필요하다.

말을 처음으로 돌려서, 내가 호감을 느끼는 외모의 여성에게 내가 좋아하는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보기에 정말 안타깝다. 보기에도 안타까운데, 깊이 관여하게 되면 훨씬 더 안타깝고 안쓰러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여성을 보고 있을 때의 심경은-매우 비근한 예이긴 하지만-양복점에서 지극히 마음에 드는 옷이 눈에 띄기는 했는데 사이즈가전혀 맞지 않을 때의 심경과 흡사하다. 체념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아고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어쩐지 체념하기가 어렵다.

나는 7, 8년 전에 한 번 그런 타입의 여성과 함께 4~5일 동안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곤 하지만 단 둘이서 한 여행은 아니었고, 여러 명과 함께였다. 맨 처음 보았을 때는 매우 호감이 갔고, 참 예쁜 여성이구나 하고 생각했으나 몇 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나와는 전혀 생각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사이가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여행이 끝나자 그냥 그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여행중에는 좋든 싫든 얼굴을 마주치며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 4~5일 동안에는 그 상대방 여자를 비교적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절실히 느낀 것은-그런 것을 절실히 느낄 것까지는 없지만-내가내 눈으로 보는 세계와, 객관적으로 '세계'로서 실재하는 세계와는 그 성립양식이 너무나 달랐다는 사실이다. 즉 내가 아무리 그녀의 외모와 그녀의 인격이 서로 상반되고 있다고 느껴도 그 상반되는 상태가 한 개인의 인간으로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는 이상, 나에게는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에서는 나라는 인간 역시 매우 비뚤어진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이런 인식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연애 같은 것은 도저히 못한다. 영화 [아메리칸 그래피티]에서 리처드 드리피스가 거리에서 문득 보게 된 선더버드에 탄 '꿈속의 여자'를 잊을 수 없어 밤새도록 그녀의 모습을 찾아헤매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연애라고 하는 것은 그런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행위인 것이다.

 

5. 기분좋은 봄, 냇가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느낌이 좋은 레스토랑에서 독서하는 멋>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가 자주 '시티 라이프' 운운 하는 특집을 만들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러한 것은 실제로 도시에 살면서 기분좋게 생활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다가 상대가 오후 세 시 반에 롯폰기의 교차로에서 갑자기, "저어,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요..." 하고 말을 꺼냈을때, 어디로 데리고 가면 좋은가는, 그러한 잡지의 특집에는 절대로 쓰여 있지 않다. 그러한 자질구레한 현실적 정보는 자기 발로 직접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머릿속에 새겨나가는 수밖에 없으며, 꽤 귀찮은 일이지만 이런 유의 말단 작업을 부지런히 하고 있으면 생활이 때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원활하게, 그리고 손쉽게 흘러가게 된다.

예를 들면, 음악이 흐르지 않는, 느낌이 좋고 느긋한 카페를 몇 군데인가 확보해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붐비는 사람들 속을 걸어가다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할 때, 이러한 오아시스 같은 카페에 들어가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머릿속에 얽힌 실이 조용히 풀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과 중요한 볼일이 있을 때도, 이러한 장소를 한두군데 알아두면 편리하다. 커다란 음량으로 틀어놓은 스티비 원더의 [파트타임 러버]에 대항해서, "그러니까 이번 일요일에 혹시 시간이 있으면..."하고 마주 고함을 치지 않아도 된다. 세련된 카페는 얼마든지 있지만 조용한 카페는 갑자기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으니까, 알고 있으면 뜻밖에 큰도움이 된다.

시내에서 책을 읽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누가 뭐래도 레스토랑이 제일이다. 조용하고, 밝고, 비어 있고, 편안한 의자가 있는 레스토랑을 한 개쯤 확보해놓는다. 포도주와 가벼운 전채만 시켜도 싫은 얼굴을 하지 않는 친절한 곳이 좋다. 시내에 나갔다가 시간이 남으면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서,그 레스토랑에 들어가 홀짝홀짝 백포도주를 마시면서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면 굉장히 사치스럽고 한가로운 기분이 든다. 체호프의 작품 같은 것을 읽고 있으면 정경적으로 딱 들어맞을 것 같다.

이런 종류의 조촐한 생활 요령은 특별히 누군가가 일부러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 정보지에 실려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면서 몸에 익혀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도쿄에서 사는 것이나 그린랜드의 설원에서 사는 것이나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닐지도모른다.

 

<음악 감상과 식사 매너>

 

얼마 전 FM 방송에서 클래식 콘서트를 듣고 있으려니까, 무슨 곡인지는 잊었지만, 도중에 악장이 끝났을 때 크게 짝짝짝짝 하고 대여섯 번 가량박수를 친 사람이 있었다. 꽤 창피했을 거다.

그러나 각 악장이 끝날 때 박수를 치면 안 된다고 하는 매너도 도대체 1누가 2 언제 3 어떤 이유로 정한 것일까? '아! 좋다'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박수 치고 싶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까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뭔지는 모르지만 나로선 알 수 없는 깊은 사정과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적인 책에 의하면 아주 오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1885년에 브람스가 교향곡 4번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을 때, 후원자인 마이닝겐 공작의 희망에 의해 제 3악장을 되풀이해서 연주하고, 거기다가 연주가 전부 끝나고 나서는 다시 한 번 전곡을 모두 연주하도록 지시받았다고 한다. 이런 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3악장이 끝났을 때, 그것도 어엿한 연주회장에서, "아, 브람스 선생, 지금 악장 꽤 좋았어, 다시 한 번 연주해보시게" 하다니, 아무리 후원자인 공작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언어 도단이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그것으로 이야기가 깨끗이 통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롯폰기에 있는 재즈 클럽처럼 좋은 솔로가 있으면 모두가 "오예, 오예!"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꽤 즐거울 것 같다.

테이블 매너에도 영문을 잘 알 수 없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양식 요리가 그렇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점잖은 레스토랑에서는 밥은 포크의 등에 얹어서 먹어야 한다는 식사 매너가 있어서, 참으로 곤욕스러웠다. 그리고 고기를 한 조각 잘라내어 입으로 가져가고, 다시 잘라내어 입으로 가져가는 것도 귀찮다.

나는 최근에는 가능한 한 처음에 절단 작업을 끝내버리고, 그 다음에는 나이프 같은 것은 내던져버리고 포크만 오른손에 들고 식사를 한다. 매너에는 어긋나지만, 그쪽이 맛있게 식사를 할 수가 있다. 예쁜 아가씨가 프랑스 요리점에서 포크만 사용해서 식사하고 있는 광경은 꽤 섹시하다고 나는확신하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최근에는 바지를 미국식으로 '팬츠'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따금 그 안에 받쳐 입는 종래의 팬츠를 뭐라고 불러야 할 지를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영어라면 '언더팬츠'가 되겠지만, 그러한 명칭이 뚜렷이 정착되어 있지 않은 일본에서는 그 바깥 팬츠와 안 팬츠의 혼란 상황이 혼미의 도를 더욱더 깊게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언더팬츠' 모으기를(물론 남성용이지만) 꽤 좋아한다. 때때로 직접 백화점에 가서, '이것으로 할까, 저것으로 할까?' 하고 망설이면서 대여섯 개를 한꺼번에 사기도 한다. 덕택에 옷장 서랍에는 상당히 많은 팬츠가 쌓여 있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켜진 깨끗한 팬츠가 쌓여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건 어쩌면 나 혼자만의 특수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혼자 살고 있는 독신자를 빼놓고는, 자신의 팬츠를 자기 손으로 고르는 남자는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그다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속옷인 러닝 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산뜻한 면 냄새가 나는 흰러닝 셔츠를 머리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그 기분도 역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팬츠의 경우와는 달리 언제나 같은 메이커의 같은 제품을 한꺼번에 사들이기 때문에 골라서 사는 즐거움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경우 속옷이라는 장르는 여기서 딱 끝나버린다. 여자의 속옷이 커버하고 있는 광대한 범위와 비교한다면, 마치 집 장사 주택의 앞뜰처럼 좁고 간결하다. 팬츠와 러닝 셔츠뿐이니까 말이다.

이따금 속옷에 대한 생각을 하면, 내가 남자로 태어나기를 잘했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 만일 내가 지금과 같은 성격인 채로 여자로 태어났다면,속옷을 수납하기 위한 한두 개의 서랍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디크의 소설>

 

점보기의 추락에 비하면 비교도 않 될 만큼 작은 사고일지도 모르지만,몇 년 전에 태풍이 불어서 중앙선 열차 속에서 하룻밤 내내 갇혀 있었던 적이 있다. 저녁 때 마쓰모토에서 특급 열차를 타고 오쓰키 조금 못미친 곳까지 갔을 때, 산사태가 일어나서 열차가 완전히 멈추어버린 것이다.

날이 밝자 태풍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나, 철로의 복구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아서, 우리들은 결국 그날 오후까지 열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애당초 한가한 몸이니까, 하루나 이틀쯤 도쿄에 돌아가는 것이 늦어져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열차가 정차한 작은 마을을 산책하고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디크의 문고본을 세 권 사가지고 좌석에 돌아와서 포도를 먹으면서 느긋하게 독서를 했다. 바쁜 여행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나같은 사람에게 그것은 상당히 즐거운 체험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오랫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데다가, 도시락도 공짜가 나오고, 특급 요금을 환불해주어서, 여기서 더 이상 불평을 하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보통 상황이라면 절대로 내릴 일이 없는 작은 역에 내려서, 그곳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도 참 기분좋은 일이다.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15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마을이다. 우체국이 있고, 책방이 있고, 약국이 있고, 소방서의 출장소 같은 게 있고, 운동장만 엄청나게 큰 초등학교가 있고, 개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은 눈부시도록 푸르르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물웅덩이에 흰 구름의 모습은 선명하게 비쳐져 있다. 포도를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는 도매상같은 상점을 지나가니까, 싱싱하고 새콤달콤한 포도 향기가 풍겨온다. 그 상점에서 나는 포도를 한 봉지 사가지고, 필립 K.디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을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먹어버렸다. 그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는 [화성의 타임 슬립]에는 온통 포도즙이 얼룩져 있다.

 

<나 홀로의 조조 상영 영화관>

 

얼마 전 볼일이 있어서 교토에 여행을 갔었는데, 시간이 남아서 언제나처럼 눈에 띄는 영화관으로 뛰어들어가 영화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식으로 여행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도쿄에서는 그렇게 열심히 영화관에 가는 것도 아닌데, 낯선 도시에 여행을 가서는 영화관의 간판이 눈에 띄면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교토에서는 [언더 파이어]라도 하는 전쟁 영화를 보았는데, 아침의 조조상영을 보러 들어갔기 때문에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는, 객석에는 나 한 사람밖에 손님이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쯤 되었을 때, 두 번째의 손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얼마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은 주위가 휑뎅그렁해서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핵 전쟁에서 혼자만 살아남거나 하면 그 뒤에는 이러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문득 해본다.

그러고 보면 베를린의 동물원 역 근처에서, [크리스티네 F]를 구경하려고 영화관에 들어갔을 때에도 손님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영화관은 엄청나게 낡고 넓고 거대한 분위기의 어두컴컴한 영화관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 혼자 외톨박이로 앉아 있으려니까, 그야말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외국의 영화관이라는 것은 일본과는 달라서, 영화가 시작되면 장내가 일시에 새카맣게 되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다음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는지 어떤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혹시 어쩌면이 암흑 속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느끼면서,[크리스티네 F]를 보고 있으려니까, 그 어둠과 적막함이 한충 더 절실하게 몸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져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손님의 수는 전부 네 명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 네 사람은 그 '핵의 겨울'같은 휑뎅그렁한 베를린의 영화관 속에서 무의식중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던 것이다.

 

<봄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진 오후>

 

옛날이야기.

중학교에 들어간 해 봄, 생물 첫시간에 교과서를 잊고 와서, 집까지 생물책을 가지러 돌아간 적이 있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15분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까, 뛰어서 왕복하면 수업 시간에는 거의 지장없이 되돌아 올수가 있었다. 나는 매우 순진한 중학생이었으니까(옛날 중학생들은 모두 순진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열심히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 교과서를 집어들고, 물을 한 컵 꿀꺽꿀꺽 들이키고 나서 다시 학교를 향해 뛰었다.

우리 집과 학교 사이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그다지 깊지 않고 물이 깨끗한 강인데, 그곳에 오래된 돌다리가 걸려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 다리이다. 주위는 공원으로 되어 있어서, 협죽도가 눈가리개처럼 무성하게 늘어서 있다.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난간에 기대고 남쪽을 응시하면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따끈따끈하다'고 하는 형용사가 딱 들어맞는, 마치 마음이 풀어져서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좋은 봄날 오후여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모든 것이 지표에서 2, 3센티미터 가량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숨을 돌리며 땀을 닦고는 강기슭의 잔디밭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속 달렸으니까 5, 6분쯤 쉬어가도 상관없을 것이다.

머리 위의 흰 구름은 꼼짝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눈앞에 손가락을 한 개 세우고 재보니까, 아주 조금씩 동쪽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 밑에 벤 생물 교과서에서도 역시 봄의 냄새가 났다. 개구리의 시신경과 저 신비스런 랑게르한스섬(췌장에 있는 내분비 세포, 췌장 전체에 섬 모양으로 산재)에서 봄의 냄새가 났다. 눈을 감으면 부드러운 모래밭을 어루만지듯이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들렸다.

마치 봄의 소용돌이 속으로 삼켜버린 것 같은 4월의 오후에 다시 뛰어서 생물 교실로 되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61년 봄의 따뜻한 어둠 속에서,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 랑게르한스섬의 강기슭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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