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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카지모도 2025. 1. 18.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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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

지은이: 최명희

출판사: 한길사

 

 

혼불 7권

 

1. 검은 너울

 

"무릇 남자가 여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간사하고 혹은 연약해서 요사스

러운 짓을 많이 하고, 여자가 남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사납고 혹은 잔인

해서 일찍 과부가 되는 사람이 많아, 본디의 음양 풍수가 서로 뒤집히고, 명수가

각각 어그러지기 쉽다고 했느니."

그것이 어느 해 정초였던가, 청암부인은 큰방에 그득히 모여 않은 문중의 부

인들과 담소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며느리 율촌댁이 담옥색 명주 저고리에 물 고운 남빛 끝동을 달아 자주 고름

길게 늘인데다 농남색 치마를 전아하게 부풀리고 단정히 앉아 시어머니 청암부

인을 가까이 모신 좌우에 담황색 저고리, 등록색 치마, 진자주 깃 고름에 삼회장

저고리, 짙고 푸른 치마에 담청색 은은한 저고리며 북청색 치마에 녹두 저고리,

앵두색 저고리에 은회색 치마, 흑자주 긴 옷고름들이 이만큼 다가앉고 저만큼

물러앉고 저만큼 물러앉은 방안은, 묵은 해 벗고 새해를 맞이한 정초의 첫나들이

세배길이어서도 그러했고, 모처럼 일가 친척 문중의 부인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

인 흥겨움에 상기되어서도 그러했고, 너나없이 새옷이면 더욱 좋겠지만 입던 옷

이라도 새로 빨아 혹 물을 다시 들이거나 깨끗하게 손질하여 푸새와 다듬이질

홍두깨질.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손끝으로 바느질 정성껏 한 설빔들을 꾸

미고 떨쳐입었느지라, 그 어느 날보다 화사한 빛깔로 방안이 가득하였다.

그 자리에는 새앙머리 예장을 앙징맞게 한 계집아이가, 깐치동(색동)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를 받쳐입고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아 고개를 이쪽 저쪽 갸옷거

리며 눈을 반짝여, 하는 말들 담아듣기 바쁘기도 하고, 꾀꼬리색 저고리에 가지

색 치마 다소곳이 여미어 한쪽에 조아린 새댁도 있었다.

오류골댁은 단청의 녹옥색 은근히 돋아나는 저고리에 치자로 여러번 물을 놓

아 황정색 오련하게 깊은 치마폭이었고, 그 옆에 강실이는 홍두깨 곱게 올린 연

두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남다르게 솜씨 음전하고, 하나뿐인 여식에 대한 지성도 자별한 오류골댁이 벌

써 섣달 들어서면 설 쇨 준비에 여념 없는 가운데, 가장 마음을 쓰는 것이 강실

이 설빔이었다.

해마다 철마다 새옷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도 형편이었지만, 꼭 그래서라기

보다는, 손으로 짠 모시나 삼베 명주 흰 옷감에 풀과 꽃과 열매로 물을 들여 이

색 저 색 내 보는 것이 그네는 재미가 있었다. 흰 감은 희어서 새 물 들고, 물들

었던 감은 더 짙은 물을 놓아 들여 보거나 다른 빛 물감을 풀어 넣으면 뜻밖의

색을 얻게 되어, 남에게는 없는 저고리 치마를 해입힐 수 있었으니. 봄철이 난만

하면 생쑥 뜯어 으깨어서 쑥물을 내 보고, 봉선화꽃 장독대와 토방 아래 자지러

지게 피어날때는 그 꽃잎 따서 무명 저고리감 붉은 꽃물도 들여 보고, 오미자

치자는 상비로 두었으며, 쪽물 또한 놓치지 않고 들여 보았다. 심지어는 시금치

삶은 물도 써 보았다.

물들일 때 옷감은 그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가.

무엇보다 얼룩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물감이 풀린 그릇에 옷감을 넣을 때, 처음 담근 자리와 나중 넣은 자리가 자

칫하면 농담이 달라져 얼룩이 생기기 쉽고, 내고자 하는 색이 한 번에 물들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어서, 몇 번이고 뒤집고 뒤집으며 엷은 색으로부터 차츰

진하게 들여가는 물.

그러다가 드디어 올올마다 빛깔이 한 결로 고루고루 깨어나게 원하는 물 들여

진 다음에는, 풀을 먹여야 한다.

풀을 먹일 때는, 눅진하게 끓인 풀을 풀주머니에 담아 가지고 꾹꾹 주무르며

응어리 없이 탑탑하게 풀어낸 물에다가 옷감을 넣고 치대어, 그 옷감에 풀이 고

루 스며들도록 먹인 다음, 너무 바짝도 말고 너무 축축하게도 말고 꾸들꾸들 말

리어서, 거기 다시 물을 뿜어 축이고는 빨랫보에 싸 가지고 방바닥이나 마룻바

닥 평평한 곳에 놓고, 한참 동안 잊어 버릴 만큼 밟아야 하는데.

이윽고 밟는 사람 발에서 번진 온기가 빨래에 골고루 퍼질 만하면 이제 다듬

이질을 시작하였다. 빨랫보를 벗겨 내고 깨끗한 다듬이 보자기에 옷감을 바꿔 싸서,

차고 매끄럽고 단단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은 뒤 박달나무 방망이 두 개로.

딱 딱 딱 딱, 또드락 똑 딱, 또드락 또드락, 또드락 딱 딱

두드리는 음향은, 설을 앞둔 매안 마을 섣달의 등잔불 아래 이 집 저 집 처마

마다 밤 깊은 줄 모르고 울리었다.

이렇게 두드린 옷감을 다시 홍두깨에 편편하게 말아서 홍두깨틀에 얹고, 틀

아래 다듬잇돌을 받쳐 놓아 방망이질을 하노라면, 다듬잇돌 위에서 홍두깨는 방

망이를 맞으며 저절로 조금씩 돌아가게 마련인데.

두들겨 맞은 방망이 자리마다 옷감에는 구름 무늬, 물결 무늬, 햇살 무늬, 이

내 무늬, 아른아른 아련한 얼이 어리는 것이다.

맞으면서 제 살결에 피어나는 무늬.

그 무늬를 사람들은 얼이라 하였다.

그것은 색실로 수놓은 매화나 모란, 화조같이 한눈에 도드라져 뜨이는 것 아

니면서, 빛깔도 없이, 속으로 번지는 것 같으나 그윽하고 휘황한 아른거림으로

피어나 추상의 문양을 이룬다.

움직일 때마다 결이 달라져 보는 이를 사로잡는 그 정취.

무심한 피륙이 홍두깨에 감기어 다듬잇돌 위에 얹힌 채, 단단하기 바위도 쪼

갤 만한 방망이를 온몸에 맞으면서, 맞은 자리마다 피멍이 비명을 토하는 대신

저토록 고운 얼을 무늬로 이루는 것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강실이는 그 얼이 비치는 명주 저고리 애달픈 연두와 연분홍 치마를 입고 있

었던 것이다.

그리고 효원은 궁청 바다밑보다 푸른 진남색 비단 치마를 드리운 위에 새각시

눈부신 진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그 빛깔이나 모습은 구긴 데 감춘 데 없

이 정대하고 당당하였다.

연치와 항렬 따라 아랫목부터 윗목까지 자리한 부인들이 눕히거나 세운 무릎

의 치마폭 흘러내린 자락 끝에 주름이 물결을 이루는데, 그 밑으로 숨겨진 듯

드러나는 버선발이 희고도 날렵하였다. 현란하고 우아하고 그윽한 온갖 빛깔들

잔치 속에 그 흰 빛은 은장도처럼 단호해 보였다. 그리고 마치 그 은장도로 금

을 그은 것처럼 버선발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는 수눅 바느질 자국은 머리카

락 한 올 빗나가지 않은 가리마 같았다.

"동정 귀 어긋난 년, 버선 수눅 틀어지거나 뒤바뀌게 신은 년, 가리마 비뚤어

진 년, 낭자머리 뒤꼭지에 머리카락 삐친 년."

은 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매안 부인들의 불문율이었다. 부녀자 용모의

미추나, 입은 옷의 비단 무명을 가리어 그 격이 높고 낮은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저고리를 입었으면 마땅히 동정 귀가 그린 듯이 맞물려 맞아

야 하고, 버선을 신었으면 두말할 것 없이 버선 수눅 꿰맨 솔기가 발등 한복판

에 반듯해야 하고, 왼발에 신은 버선 수눅 시접은 왼쪽 바깥으로 누워야 하며

오른발에 신은 버선 수눅 시접은 오른쪽 바깥으로 누워야 하는, 너무나도 기본

적인 이 차림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사람이란, 오직 게으르거나 어려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그런 것을 언제 돌아볼 틈도 없이 마구 범벅으로 살아

야 하는 상것들일 뿐인즉, 축에 끼워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반상을 막론하고 그 동아리에서 벗어난 별난 사람

이 있는지라. 노비 중에도 그 성깔이나 번절이 반가의 효열보다 더 매운 종이

있는가 하면, 양반의 집안에 귀녀로 난 따님도 선머슴 못지않게 건성인 사람 또

한 있어서. 매안으로 시집온 새댁 하나가, 지금은 중년으로 접어들어 그도 벌써

시어머니가 되었지만, 그네가 아직 새각시였을 적에, 시어머님 앞에 무심코 드러

낸 발등 때문에 벼락을 맞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너, 그 치맛자락 좀 들어올려 봐라."

기겁을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 발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자, 새각시는

아무 생각 없이 두 손으로 다홍치마 양자락을 잡고 버선발이 드러나게 들어올렸다.

"너 그게 버선이냐 쌀자루냐."

외씨같이 좁고 곱게, 흰 이처럼 드러나야 할 새각시 수줍은 버선발은 아닌게

아니라 펑퍼짐하고 야문 데 없이 헤벌어져 있었다. 그나마 수눅을 서로 왼쪽 오

른쪽 뒤바꾸어 신고 있었으니.

"아이고, 나, 이런 일이 어떻게 있다냐. 너 그러고 어디 가서, 이 집 며느리요오,

입도 뻥끗 하지 마라. 대관절 너 어느 것 어느 댁에서 살다가 시집온 애기씨

냐아. 응? 내가 아무래도 큰 실수 했는가 보다. 성씨 보고, 가문 보고, 집안간에

오가는 말 나무랄 데가 없어서 흔연 성례했더니만, 네가 분명 동촌서 온 아무개

가 맞어어? 맞는 게여? 너 도대체 이 나이 먹도록 네 안부모한테 무얼 배우고

무얼 익히다가 덜썩허니 키만 커 가지고 시집이라고 온 거냐, 지금. 그 버선이

시방 새각시 버선이냐 마당쇠 버선이냐, 응? 그게 네 솜씨야아, 네 어머니 솜씨

야? 누가 그렇게 퍼진 발로 수눅이랑 짝짝이 떠억 바꿔 신고, 내 발 여기 있소

오, 보란 듯이 펄렁거리고 앞뒷마당을 돌아댕기랬어, 댕기기를. 이런 숭이 있는

가 그래. 너 그 버선 내력 좀 상세히 일러 봐라. 내 좀 알어야 겄다. 꼭. 이만한

것도 모르는 댁일 리가 천만 없을 터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내 알어야겄다고오.

네가 정녕 그 댁에 서녀가 아니면 어디서 줏어 온 딸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

을꼬. 남이 알까 망신스러워 큰소리도 못 낼 것이니 얼른 말해라. 길게 끌어 애

통 터치지 말고."

시어머니는 어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버선 바느질은 누가 했느냐?"

"침모가 했습니다."

"침모? 너희 집 침모는 바느질을 송곳으로 뚫어 허며, 네 발의 버선본 하나 없

어서 마당의 멍석을 끌어다가 버선본을 삼었다더냐?"

"아니요."

"아니요?"

"제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발 조이는 걸 어려서부터 못 참어 항상 제 버선은

넉넉하게 지었는데, 시집가는 버선이라고 어떻게나 꼭 끼여서 신으면 그냥 칼날

을 밟는 것같이 아프게. 발바닥이 또르를 오므라지게, 조그막한 애기 버선 모양

으로만 짓길래요. 사정 사정을 해서 억지로 몇 켤레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 달래

숨겨 가지고 왔어요."

"허, 허이구우. 참, 한량으로 날 것을 여자로 잘못 났구나. 여자라면 의당 조이

는 버선 신고 발걸음도 사뿐사뿐. 소리 날까 겁내고 걷는 것이 몸에 배고, 발가

락 사이가 써렛발같이 벌어질까 애기 때부터 조여신고 크는 것이 당연헌데, 시

집을 오도록 자루를 신고 댕기셨구만잉? 그리고, 버선 수눅은 또 그게 뭐냐?"

숟가락으로는 밥 먹고 국 떠먹고, 젓가락으로는 반찬 먹는다는 말이나 마찬가

지로, 애초 설명조차 필요없는 일을 거꾸로 하고 앉은 새며느리 꼬락서니 기가

막힌 시어머니는, 묻기는 묻는 시늉이되 아예 대답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들으나 마나 이미 대답이 될 만한 성질의 말일 수가 없는

탓이었다.

"몰라서."

"들어도 자꾸만 잊어 버려서."

"그냥 신다 보면."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어서."

같은 것 중에 무슨 말이 그 입에서 나오든지,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이고. 다시

친정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배워 오라고 쫓아내지 않을 바에야, 여기서 시어머

니가 가르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때 시어머니가 기가 막힌 것은 단순히 버선짝이 쌀자루만 하다든가, 신행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각시가 벌써부터 정신머리가 그렇게 없어 칠칠치 못

하게 수눅을 바꿔 신었다든가 하는 것보다, 이로 미루어 다른 성질과 품행을 짐

작할 수 있는 점이었다.

"이 사소한 일에 네가 이럴진대 다른 것은 오죽하랴."

안 보아도 눈에 선하지 않은가.

한 집안의 가장이 의젓하지 못하면 딸린 식구들이 초라하고 궁핍한 생활을 면

치 못하는 법이요, 한 집안의 가모인 주부가 야물고 깔끔하지 못하면 가솔들 꼬

라지 꾀죄죄하기 동네 걸인 진배없고, 그 손에 얻어입은 의관으로는 드모지 남

편의 위용이 안팎에 서지 않으니, 남에게 존경받게 하기는커녕 멸시만 한 바가

지 가득이 아니랴.

억장이 무너졌지만 시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하여, 그날로 버선 신는법부터 시

범을 보이며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니. 몸소 그 앞에서 버선을 신어 보이고 벗어

보이고, 이렇게 신으라 신기어 주기도 하였으나, 들을 때뿐이고 돌아서면 다시금

천연스럽게 며느리는 수눅을 바꿔 신는 것이었다.

"온달장군은 바보라도 평강공주를 만나서 천하에 으뜸가는 장군이 되었다는데,

너 같은 마누라를 만나고서야 기생 오래비라도 멧방석을 입고 앉었지 않겄느냐.

너를 정말로 어쩔끄나. 내, 너 같은 며느리, 이씨 문중에 또 하나 더 있단 말 아

직까지 못 들어 봤다. 너 꼭 그렇게 내말 명념 안허고 너 허고 자운 대로만 헐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였지만, 별무효과였다. 그

것은 무어 며느리가 시어머니 의사를 거역하겠다거나 딱이 무슨 구집이 있어서

도 아니고, 그저 그네의 성품이 본시 그러하여, 마음은 착한 데 맺힌 것 없고,

조이는 것 싫어하며 게으른 때문이엇다. 거기다가 간추리고 챙기는 것 또한 남

의 일이었다.

"너 아무래도 안되겄다. "

드디어 어느 하루 시어머니는, 여전히, 그 다시는 신지 말라던 자루 버선을 헐

렁하게 그나마도 수눅을 뒤바꾸어 신고 앉은 며느리를 더 못 참고

"그것 당장 벗어라."

고 호령하였다. 그리고는 엉거주춤 제 버선을 뽑아 벗어 양손에 받쳐든 며느리

한테

"머리에다 뒤집어쓰라."

고 한 마디로 잘라서 명령을 했던 것이다.

아무러면 정말로 그러라 하시는 일인가, 그럴 수가 없어서 의아한 눈으로 시

어머니를 바라보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이대로 너를 두었다가는, 너는 필시 온 동네 문중의 웃음거리가 되고, 네 남

편 역시 의젓잖은 매무새로 한평생 남의 놀림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비

록 우리 집이 가난은 하다마는 행색은 빠지지 않아, 풀 먹인 미영옷이 비단보다

서걱서걱 날선 소리 났었는데, 네가 무슨 감추어 둔 복이 따로 없고서야 네 손

끝에서 그 풀 다 빠져 버려 후줄후줄, 어디 그나마 명색 버틸 재간이 있겄느냐.

안되겄다."

하고 준엄하게 나무랐다. 그러면서 어서 지금 당장 그 버선 벗은 것을 머리에

쓰라고 호통하였다.

"네가 시어머니 말보다 네 발 편헌 것을 더 따르니, 네 발이 시에미보다도 귀

허고 높은 것 아니냐. 그러니 발을 머리에 이고 앉을 수는 없을 것이고, 발에 신

은 버선을 발 대신 모셔서 머리에 이고 있으란 말이다. "

그러나 며느리는 차마 그리하지 못하고 버선 받쳐든 손을 오그린 채 고개만

깊이 떨구고 있었다.

"수눅 왼쪽 오른쪽도 분별 못허는 그 머리, 그 머리 속이 하도 장해서 정자관

을 씌워 줄라고 그러는데 무얼 망설여? 어서 못 쓰겄냐?"

시어머니는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내 기어이 이노무 버르쟁이를 고쳐 놓아야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까지 들이밀며 버선을 머리에 쓰라고 바싹 다그치는 바

람에, 며느리는 큼지막한 무명 버선을 거꾸로 뒤집어 머리 위에 쓰고는 하염없

이 울었다. 이 일만큼은 중정 없는 무골의 이 며느리한테도 견디기 어려운 수모

였던 것이다.

"네가 다시는 똑같은 일로 두 번 말을 안 들을 자신이 있을 때까지 남이 알까

두려우니, 이 골방에서, 문도 열지 말고 옴짝도 말고 틀어앉어 곰곰 생각에 생각

을 거듭해 봐라. 과연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사람이 사소한 일을 우습게 알면

결국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법이다. 네가 이 버릇 하나 바로잡지 못하면서 자식

을 낳아 기른다면 영웅 호걸 효자 열녀는 그만두고 삼동네 천덕꾸러기 만들기

딱 알맞지. 또 네 손에 밥 얻어먹고 옷 얻어입는 네 남편은 무엇이 되리요."

며느리는 선비가 머리에 정자관을 높이 세워 받쳐 쓰듯이, 뚝뚝 눈물을 떨어

뜨리며 버선 두 짝을 겹쳐 꿰어 거꾸로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버릇만은 고쳐졌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의 우직하고 민첩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그 뒤로도 시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까지 속을 여러모로 많이 상하게 하고는, 청암부인으로부

터도 꾸중을 빈번히 듣곤 하였으니.

그네가 바로

"참으로 한심한 사람이로고. 저 저고리 동정 좀 보소. 사람이 신 언 서 판이라

고, 우선 의관을 단정히 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거늘, 제 서방 옷을 저 지

경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낯으로 고개를 들고, 나요, 허는고?"

하는 호된 꾸중을 청암부인에게 들은 일 있는 동촌댁이었다. 그때 그네는 남

편의 저고리 동정을 오래되도록 갈아 달지 않아, 가무름하게 때가 오른 것을 천

연스럽게 횃대에 걸어 놓았다가, 무슨 일로 부인의 질항되는 이 집에 들른 청암

부인의 눈에 그만 띄었던 것이다.

당황한 동촌댁이 자라 모가지 기어들어간 채로 황급히 그 저고리를 끌어내려

우물쭈물 거둠거려 구석지에 치웠다가 내쳐 또 꾸중을 들었다.

"옷이란 그 사람의 몸이나 한가지인데, 남편 옷을 그렇게 아무런 정성도 없이

함부로 구겨서 박아 넣으면, 그게 네 남편을 구겨 네 남편을 구겨 박는 것하고

무엇이 다른가. 세상에는 공것이 없느니. 내가 정성을 들이면 들인만큼 내 앞으

로 쌓이는 법인데, 정성 한 톨 쌓지 않고 무슨 염치로 해뜰 날을 바라는고."

그때 부인은 진심으로 혀를 찼었다. 그리고

"제 대접은 제가 받는다."

는 말을 남겼다.

바로 그러한 날이 두렵고 염려스러워서 시어머니는 며느리 새각시한테 그토록

이르고 또 이른 말들이었건만, 버선을 거꾸로 쓰고 앉아 울던 것도 별 소용없이

천성을 크게 어쩌지 못한 그네는 이제 희끗희끗 흰머리 돋아나는 동촌댁이 된

것이다.

동촌댁은 이런 날 이런 자리에는 어우러져 함께 끼지 못하지만, 자루버선 고

깔같이 뒤집어쓰고 눈물 떨구던 새각시 동촌댁의 이야기는, 해마다 꼭 빠지지

않고 웃음엣소리로 터져 나오곤 하였다.

"퇴계선생 부인께서도 성품이 무심하고 바느질 솜씨는 없으셨던가, 언제나 선

생님 신고 계시던 버선은 커다란 쌀자루만 하셨더라는데. 그래도 항상 선생님은

아무 불만 내색 않고, 그 헐렁한 버선을 정성ㄷ이 챙겨 신으시고는 흔연히 제자

들을 대하셨다 하던데요? 그 버선이, 훌륭하신 선생님 모습을 조금도 손상시키

지 않았더라고."

말하는 부인도 있었다.

"내가 안 보았으니 그에 무슨 말을 할 수는 없고, 또 우리가 퇴계선생 부인도

아니니. 남자의 옷이, 빨았는데도 때가 남아 있고, 꿰맨 것이 성기고 터진 데가,

구겨지고 얼룩지고, 넓고 좁음이 대중이 없는 것들은 다 부인의 책임이야, 그것

을 드러내 말하는 것은 사치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녀로 하여금 공을 들이게 하

고자 함이지. 산다는 건 곧 공들인다는 것이다."

청암부인은 말했었다.

"할머님, 그거 배워만 갖꼬는 안되는 일인가 싶으대요."

붙임성 있는 사리반댁이 박속같이 옷으며 청암부인 쪽으로 낯을 돌렸다.

"왜?"

"아, 저, 동촌 아짐 보며는 문견이 없다고는 못헐 것인데, 꼭 고쟁이 빨어서 마

당 가운데 널어 놓고요잉."

"어 거 망헐 것이 똑 그렇지."

청암부인이 말 막듯이 대꾸한다.

민망한 탓이다.

쿡, 쿡, 웃음이 터진다. 부인들은 동촌댁 고쟁이 빨래만 본 것이 아니었다. 서

로 그것을 짐작하고 눈짓을 던졌다.

"참말로 누가 볼까 겁난다. 예기에도 이르기를, 속옷과 이불은 남에게 그 속을

보이지 말라고 했건만. 그걸 누가 시켜서 아는 것인가. 수치스러운 줄 모르고. 쯧,

쯧."

속옷을 빨아서는 조용한 곳에 널어서 말려야 하매. 간짓데 치켜올려 깃발처럼

펄럭이게 하면, 가랑이를 공종에 걸어 내보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천하 몹쓸 짓이지."

동촌댁에 화제가 이르면 끝이 없었다.

옷고름이고 치마끈이고 야물게 매지 못하는 사람이 동촌댁이었다. 맵시는 그

만두고, 금방 풀어질 것만 같은 옷고름이며 느슨한 치마끈은 한심하기까지 하였

다.

"그런 걸 두고 창피하다 하는 게야. 남의 흉들 보지 말고, 거울 삼어서 나를

돌아봐. 타산지석으로, 다른 산의 돌아라도 내 옥을 가는 데 도움이 되니까. 그

러고 보면 세상에는 못쓸 것이 없어."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릴 때 매미 날개와

같이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은 사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이 부녀

자의 정성이니. 정성이 없고서야 어찌 능히 인생을 이루리.

공들일 줄 모르는 아낙은 부덕한 족속이다.

"실을 잣고, 솜을 타며, 옷을 다리고 모시를 다듬질하는 일은, 비록 부리는 종

이 많고, 자기를 모시는 사람이 있더라도 손수 익혀야 할 것이다. "

그것이 부녀자의 할 일이라고, 예절 수신서에는 씌어 있다.

"아이고, 나는 열불이 나서 한겨울에도 치마말기를 꽁꽁 동이고는 못살겄데.

옷고름도 그래. 당최 짬매고 묶고 허는 건 못 전디겄드구만, 어찌 그리들 잘 참

고, 때깔들 잘 내이?"

이제는 그네도 시어머니가 된 동촌댁이 무어 누가 흉을 보든지 말든지 무람없

이, 생긴 대로 앉아서 한 소리 했다.

"나 죽으면 수의도 헐 것 없다. 그저 홑이불 둘둘 감어서 파묻어 주어. 까깝헝

게. 아 오직이 좋냐. 걸린 데 없고 매인 데 없고, 쾌활허지. 죽어서까지 그놈의

치마 저고리, 끈으로 묶고 고름 매는 거 나는 싫다. "

동촌댁은 며느리한테 보리방아를 찧으며 말했다.

"벗고 가면 더 좋고."

그렇게 후렴을 붙었다고도 한다.

"허어이, 웬수."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 탁, 탁, 옷에 묻은 검불을 털어내던 동촌댁은 어디에랄

것 없이, 두 팔을 훨훨 내저으며 무언가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고도 하고, 타앙,

발까지 굴러 보였다고도 했다.

"세상에 날 때는 그냥 왔는데, 옷 입고들 사니라고오. 또 죽으면 다 빈 몸으로

그냥 갈람서도. 그것 다 시늉인데 그 지랄들이여."

동촌댁 말이 딴에는 옳다고 맞장구치며 웃는 부인도 있었다.

"그 양반 세수나 제대로 허는지 몰라."

"안 봤는지 모르지."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예절에 이르기를

"웬만한 병에는 머리를 빗고 낯을 씻기를 그만두어서는 안되고, 비록 가난하더

라도 옷은 반드시 깨끗이 빨아서 입어야 한다. 부인은 단정하고 정결한 것을

귀히 여긴다 함은, 얼굴을 화장하여 남편을 기쁘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

다. 화장하고 예쁘게 옷을 입는 사람은 요사스러운 여자요, 머리를 어수선하게

하고 얼굴에 때가 있는 사람은 게으른 여자다. 경강(제나라 여자)이 말하기를,

부인은 몸매를 단정히 하지 않고는 감히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를 뵙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는 말들을 적어 놓았는데, 부녀자의 머리를 단정히 매만져 흐트러지

지 않아야 하는 것을 엄중히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매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머리카락 흐트러지는 것을 속옷자락 펄럭이

는 것이나 한가지로 민망하고 상스럽게 여기어, 평소에도 언제나 이른 아침 맨

먼저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 농밑에 챙겨 둔 참빗과 물로 머리를 단정히 빗어내

려 전반처럼 땋아서, 큰애기는 치렁치렁 숱많은 머리채 끝에 붉은 댕기 수줍게

물리고, 부인들은 밀기름 곱게 바른 그 머리를 날아갈 듯 감아올려 다홍 댕기

선연히 물린 낭자로 하고, 거기에다 옥비녀 비취비녀, 은비녀 금비녀, 칠보비녀,

혹은 나무비녀를 형편대로 지르는데. 영락없이 옥이나 비취를 닮은 사기비녀가

새로 나와 사 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머리 땋은 모양새나 댕기 물린 맵시, 그리고 낭자머니 비녀 지른

뒷태는 사람마다 달랐으며, 다른 만큼 흉도 되고 허물도 되고, 태깔이 하도 기품

있고 고와서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망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하

였다.

"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라."

고 어른들은 말했다.

"앞에서 보면 그럴듯해도 돌아선 뒷태가 이상하게 무너진 듯 허전한 사람은,

그 인생이 미덥고 실하지 못하다. "

고도 하였다.

앞모습은 꾸밀 수도 있으마 뒷모습만큼은 타고난다는 뜻도 있으리라.

"사람 귀천은 뒤꼭지에 달려 있느니."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 "

또 그렇게도 말했다.

이는 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상이 불여후상이라."

고 하여, 사람의 앞모습 좋은 것이 뒷모습 좋은 것만 못하며

"포상이 불여 심상이라."

고 하여, 뒤모습이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 사람 마음의 모습이 마르고 훌륭한

것만 못하다 했다.

비록 다 떨어진 누더기를 골백번 기워 입은 남루를 걸쳤다 하더라도 깨끗이

빨아서 푸새하여 더럽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 아니었으나, 머리 매무새 헝클어진

것은 '동촌댁 버선'보다 더 몹쓸 일로 알았다.

머리는 몸의 맨 위에 있어 사람의 정신을 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머리를 감

싼 머리카락을 결코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머리카락 땋거나 낭자한 뒷

모습 못지않게 앞머리 가리마를 중요하게 알았다.

그래서 옛날부터도

"무릇 아들 딸을 머리 빗길 때, 정수리 위의 가리마를 평평하고 곧게 타서 조

금도 기울어짐이 없게 하여야 한다. 아이의 코를 중심으로 대중하여 보아, 만일

조금이라도 비뚤어졌으면 낯과 눈까지 다 틀어져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

고 하였다.

가리마가 비뚤어지면 얼굴이 비뚤어지고, 얼굴이 비뚤어진 사람은 못나 보여

온전한 대접 받기 어려우며, 온전한 제 대접을 못 받는 사람이 제정신을 올바로

갊을 수 있으랴.

자신을 바르게 가지고자 함이 머리카락 한 올에까지 이대도록 뻗친다면, 그

앉고 서는 것을 스스로 길들이고 몸에 익히는 것이며, 언행에 마음가짐인들 오

죽하겠는가.

그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누가 홀로 깨친 것이 아니라, 누대 누백년 누천 년

을 두고 면면히 내려온 법도가 어느덧 살로 되어 버린 것이리라.

"아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 집을 망치고, 딸을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 그러므로 잘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모의 죄다."

하여, 무릇 부모 된 이들은 그 자녀 훈육하기를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로 알았

으니, 명나라 사람 하의려선생 같은 분은, 여러 딸들을 열두 가지 조목으로 엄격

하게 일러 가르쳤다.

1. 침착하고 자상하며 공손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2. 제사를 받들 때는 엄숙히 하여야 한다.

3.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효도로써 받들어야 한다.

4. 남편을 예의로써 섬겨야 한다.

5. 동서들을 온화 화목으로써 대접하여야 한다.

6. 아들 딸을 바른 도리로써 가르쳐야 한다.

7. 남녀하인들을 어진 은혜로써 어루만져야 한다.

8. 친척을 공경으로써 대접하여야 한다.

9. 옳은 말을 기쁜 마음으로써 들어야 한다.

10. 간사하고 망령된 것을 진정으로 경계하여야 한다.

11. 길쌈을 소중히 여기어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12. 부디 재물을 아껴 쓰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이런 말을 일일이 조목 지어 문자로 적어 놓고, 짚어 가며 배우지 않는다고

모를 리 있으랴만, 각별히 명심하여 네 앞날에 아로새기라고 너한테 이렇게 적

어 주는 것이니라."

종조모 청암부인은 섣달 그믐날 밤 묵은 세배 하러 올라온 강실이한테, 궁체

로 손수 쓴 두루마리를 새해 선물로 내려주었다.

"이제 네가 당혼하여 미구에 남의 집 사람이 될 것인즉."

혼의에 이르기를

"부녀자의 덕행과 말씨와 몸맵시와 일솜씨를 잘 가르쳐야 한다."

라고 하고, 이를 풀이하여 말하되

"덕행은 정숙하고 온순함을, 말씨는 알맞고 사려 깊은 언사를, 몸맵시는 단정

하고 부드러움을, 일솜씨는 길쌈하는 재주를 말한다."

고 하였는데, 이는

"편벽스럽고 똑똑한 것을 잘났다고 추어서 덕행이라 할 수 없으며, 구변이 좋

아 매끄럽게 말을 잘하는 것을 좋은 말씨라 하는 것이 아니다.또 몸맵시란, 자지

러지게 곱고 아름다워 홀리도록 염미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솜씨는 교

묘하고 야단스러운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니니라."

고 부인은 말하였다.

오류골댁도 강실이와 마주앉아 바느질을 하여 말한 일이 있었다.

"양반이란, 배워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양반은 겉보기에는 위용 있고 고결하

고 신선같이 때깔 있지마는, 그 속은 민어가시보다 억세고, 섬세하고, 미묘하고,

까다로워 그 노릇을 제대로 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니라.

일일이 무엇이나 말 안해도 저절로 터득해서 어느 자리에 서든지 앉든지, 오

직, 그 몸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둘레에 향내로 번져, 돌아서면서도 마음이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양반의 인품이고 기품이다.

너도 이제 남의 집으로 시집가서 위로 층층 시어른들 모시고, 시동기간, 일가

친척 공경하며 살아야 할 것인데, 집안마다 풍속이 같지 않으니, 성심으로 눈치

껏 제가 알아 익혀 나가야 한다. 처음 가서 모르는 건 흉이 아니지만, 말 안해도

스스로 깨달아 내 할 일 빈틈없이 해낸다면 상이지. 말해서 알아듣고 행하는 것

도 끝내 못 따르는 것 보담이야 낫겠지만, 벌써 남한테 말하게 한다는 것부터가

상은 아니니라."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아아, 너도 어서 사람을 만나야 할 것인데."

탄식을 하고, 아차,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흔연히 낯빛을 바꾸어 옛날이

야기 한 자락을 웃으며 들려 주었다.

"전에, 전에 말이다. 한 장수가 있엇드란다. 연개소문이라던가, 울지문덕이라던

가, 이름은 잘 생각 안 나는데, 하여튼 굉장히 용맹스럽고 훌륭한 장군이었대.

그런데 이상하게 혼인이 늦어, 나라 안에 그 이름 떨치지 않은 곳이 없건마는,

그만한 장수를 나랏님도 장가들이시기 어려웠던가, 아니 겨우도록 연분을 못 만

났단다.

이 장군이 하도 답답하여, 싸움터에서는 파죽지세 무적 장군이지만 홀로 앉아

서는 남모르게 한숨이 깊었더란다. 그럴 것 아니냐, 인륜지대사로서 마땅히 사람

이라면 치러야 할 혼사를 못하고, 까막까막 기다려도, 남 다 만나는 사람이 자기

앞에만은 나타나지 않으니.

그런데 하루는 길을 가다가 아주 유명한 스님을 만났다는구나. 길에서 만나

장군이 공손하게 읍을 하고 물었드래. 스님, 저는 언제쯤이나 제 사람을 만나겠

습니까아. 그러자 대사가 두 말도 더 안하고 지팽이를 치켜들어 한 곳을 가리키

는데, 보았더니, 저만큼에 웬 아낙이 등에 어린 애기 하나를 업고 서 있드라네.

아니, 누구 말씀이십니까, 또 그렇게 물었겄지? 아이 업은 부인이 장군의 배필

로는 당치않고, 그 주변에는 다른 사람도 없었거든. 그러자 이 대사가 좀더 바싹

가찹게 지팽이 끝을 들이밀어 가리키는데, 아 이게 웬일이냐, 지팽이는 그 갓난

애기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지 않어?"

실색을 한 장군이 벼락같이 분노하여

"네가 지금 누구를 놀리고 있는 것이냐?"

서릿발 같은 칼을 뽑아 대사의 목을 치려고 내리쳤는데, 대사가 비호처럼 몸

을 피하는 바람에, 그 칼날끝이 뜻밖에도 옆에 업혀 있던 애기 이마를 스치고

말았다.

칼 맞은 아이는 숨이 넘어가게 울고, 대사는 껄껄껄 웃었다.

"그러고는 그 장군이 스님한테 당한 봉욕이 수모스러워, 다시는 혼인한단 말조

차 어디에도 꺼내지 않은 채, 포기를 하고, 오로지 나라를 위해서만 구국 일념으

로 몸을 바쳤더란다.

생각해 봐라. 그 말 묻던 때도 벌써 늦어 남들 같으면 아들이 자라나 장가들

인다 하게 생겼는데, 애가 타는 나이와 처지를 능멸이나 하는 것처럼, 강보에 업

은 애기를 가리켜 네 배필이라 하니, 누구라도 화가 나지 않겄냐.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때 그 연개소문인가 을지문덕인가 하는 장군이,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분이 뻗쳐, 애기를 바라보며, 에잇, 내가 그만 저것을 죽여

버리자. 정말로 갓난 것이 내 연분이라면, 저것이 자라서 내 아내가 되기를 기다

리다 꼬부라져 죽느니, 차라리 죽여 버리면 포기하고 애나 안 타지, 했다고도 하

더라만, 그래서 그만 칼날을 치켜들어 단칼에 아이를 내리친 것이 빗나가 이마

에 칼자국만 깊이 남기고 말았다고도 하더라마는, 그게 그만치 속이 상했다는

이야기지, 그만한 장군이 설마 아무러면 아이를 죽일라고야 했을라고?"

그 연유야 어찌 되었든세월은 흘러 장군은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

그런데 참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머리에 흰 터럭 성성하게 돋아

난 이 장군이 우연한 말 몇 마디 오간 끝에, 열여덟 살 큰애기를 신부로 맞이하

게 되었으니.

그토록 평생을 두고 기다리던 연분을 늦게 늦게 만나, 아리따운 신부와 마주

앉은 장군은 만 가지 감회가 새로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대는 왜 이제야 내게로 왔는가."

신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순간 장군이 깜짝 놀랐지. 아무리 불빛 아래지만, 나비보다 고운 눈썹

위의 희고 맑은 이마에 칼자국이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러나 섬찟했거든. 아니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했단 말이요. 아깝고 참혹해라. 연유를 말해 보시오."

장군이 칼자국 까닭을 물었다.

"저는 잘 모르는 일이오나, 저의 유모 말씀이, 어느 하루, 해 저무는 봄날, 버

들이 푸르고 꾀꼬리 울어 꽃이 피는가 구경을 하려고, 등에다 저를 업고 대문

밖에 나섰다가, 웬 스님 한 분을 만나셨더랍니다. 그 스님이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포대기에 싸인 애기 저를 일부러 들여다보며, 이 아이가 장차 자라서,

나라를 구한 장상의 아내가 될 것이니 곱게 잘 기르라, 하시더랍니다. 황송하고

기꺼워서 유모가 합장하고 서 있자니, 웬 무장 하나가 스님에게 다가와 몇 마

디 말씀을 주고받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번갯불이 번쩍 허공을 가르면

서 휙 칼날이 스치는데, 제 이마를 상하게 했다 합니다.

귀하게 될 애기라고 잘 기르라 당부 들은 바로 그 순간에 이처럼 되어, 유모

의 낙망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집 안팎 대소 충절이 저로 인한 근심을 지울

날 없었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서 연기에 이르렀지만, 아무도 이마에 칼자국 난

처자를 데려가겠다는 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출가하여 중이 될까, 몇 번이고 마

음 먹었지만 그도 뜻 같지 않던 중에, 놀랍게도 혼인말 있더니 장군의 아내가 되

었나이다."

아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장군은 두말 하지 않고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어린 신부의 머리와 이마의

칼자국을 다만 오래오래 쓰다듬고만 있었다.

"인연이 그런 것이란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 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 해도 달아날 수 없고잉. 지금 너한테

로도 누가 먼 길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오류골댁은 웃었다.

"전에 어떤 사람은 말이다. 무슨 까닭으로 그랬던지 아주 늦게 혼인을 하게 됐

더란다. 백방으로 알어보고 천지 사방으로 사람을 놓아서 찾어도 어찌어찌 될

듯 될 듯하다가 비끌어지고 비끌어지고 했었대. 그래서 그냥 다 지쳐 가지고 힘

이 빠져 이제는 틀렸는가 부다, 헐 때 뜻밖에도 사람이 나서서 혼인 했다지 않

냐. 그런데 말이다. 첫날밤에 그만 신랑이 족도리도 안 벗은 꽃각시 신부 뺨을

불이 나게 철썩, 후려쳤다는구나. 다짜고짜 댓바람에."

얻어맞고 깜짝 놀란 신부가 영문을 몰라, 뺨을 감싸쥔 채 신랑을 올려다보자

"어디 갔다 인제야 왔는냐."

고 하면서 신랑은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느냐."

고 신부 손을 잡고는 목을 놓아 엉엉 울었더래.

"재미있냐?"

오류골댁이 딸의 얼굴을 이윽히 들여다보며 웃음을 머금고 묻던 것이 언제였

던가.

대실에서 효원이 신행을 오던 날, 효원의 모친 정씨부인은 멀리 시집으로 떠

나는 여식에게, 몸소 쓴 두루마리 한 통을 내주었다.

"예전의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니라.

부녀로써, 무릇 혼인이나 연회 같은 모임에 갔을 때는.

고개를 외로 꼬고 남의 뒤에 숨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렇다고 교만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방자하지 말고,

아첨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라.

이를 보이며 고개를 젖혀 웃지 말고,

손을 흔들며 말하지 말고,

탐욕스럽게 떡과 고기를 먹지 말라.

머리를 떨어뜨려 근심하는 것같이 하지 말고,

근엄하여 노여워하는 것같이 하지 말며,

자리를 건너질러 어지럽게 걸어다니지 말라.

치맛자락이 펄럭이도록 상관하여 나대지 말고,

남의 연지 찍고 분 바른 것이 너무 짙다느니 엷다느니 평하지 말고,

옆사람 귀에 대고 소곤거리거나 눈길을 흘려 사특하게 보지 말라.

엄숙하면서도 조용하고, 장중하면서도 조용하고,

장중하면서도 온화하고,

삼가며 잠잠하고, 작은 일에도 찬찬하고 자세한 연후에야

마땅히 그 위의와 법도를 잃지 않을 것이니라."

명심하라. 어머니가 이르며 건네 준 그 글을 심중에 간직하여 품고 앉은 효원

의 모습은, 청암부인의 큰방 가득히 둘러앉은 부인들 누구의 눈에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의젓하게 보였다.

훤출한 이마에 검은 머리 한가운데 희고 곧은 가리마 반듯이 갈라진 효원의

남치마 노랑 저고리 어깨가 견고하고 우뚝한데, 강실이는 목 언저리 머리털 수

줍게 흘러내린, 연두 저고리 연분홍 치마 안개처럼 자욱하게 에워 입고, 둥근 어

깨 달같이 두르고 있었다.

아아, 강실아.

무지개같이 둥글고 이쁜 사람아.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나의 심정이 연두로 물들은들 어디에 쓰겠느냐.

캄캄한 밤하늘의 차갑게 씻긴 별들을 바라보며 홀로 탄식하여 가슴 저미던 강

모가, 차마 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어깨.

그 어깨 위로 청암부인 말씀이 내려 앉았다.

"새해에는 부디 네 사람 만나거라. 네가 그 동안 갈고 닦은 부덕이 제자리 제

그릇에 담길 날이 곧 올 것이니라."

그 말씀에 방안의 부인들도 모두 강실이를 돌아보며, 어여쁘다, 한 마디씩 덕

담하였다.

"무릇 여인은 여인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조화롭고 순탄한 것인데, 그

성품이 뒤바뀌면 인생이 음양에 역행하여 고달프지. 그래 옛날 성인들도 가르침

을 베풀어서 기질을 바로잡고 그 성품을 회복하려고 하셨던 게야. 그래서 그 말

씀에 생남여랑이라. 아들을 낳으면 호랑이같이 여기고, 유공기왕이라, 오직 그가

잔약할까 걱정할 일이요, 생녀여서, 딸을 낳으면 쥐와 같이 여기고, 유공기호, 오

직 그가 호랑이 같을까 걱정하는 일이다,라고 했느니."

헌데 우리 강실이는 곱기가 천상 여자 중의 여자요, 나와 같은 우리 이가 쪽

며느리들하고는 달라서, 안순 그윽하며 성품의 빛깔이 저토록 유현, 아름다우니,

내, 저 아이의 앞날을 보고 싶노라.

그날이 어서 왔으면.

이 넓고 깊은 호수를 장쾌히 지으시고, 넘치는 청호의 짙푸른 물을 세상에 남

기시고, 그 물 먹고 세세토록 매안 마을 들판의 곡식들이 자라나도록, 또 그 곡식

먹고 당신의 후손들이 살지게 살아가도록, 죽어서도 그 몸을 푸르게 풀어 들판

과 곡식과 살람들을 먹이시는 종조모, 남기신 그림자 청청하신 할머니 청암부인

이 그렇게 말씀하시었던 강실이.

그 강실이는 지금 이 물에 몸을 던지려고, 온갖 색색깔 다 벗어 놓고, 할머니

상복으로 입은 횐옷 소복을 자신의 저승길 마지막 옷으로 입은채, 살아서는 한

올도 흐트러지게 하지 않아야 하는 머리카락, 두 번씩이나 땅에 뉘여 흙 묻힌

설움이 이미 견디기 버거워서, 그 머리 땋은 자리마다 벗을 길 없는 올무에 처

렁처렁 묶은 듯하여, 마치 덧을 풀어내듯, 오래오래 그네를 얽어매온 사슬을 풀

듯, 목숨 조인 고리를 벗기듯, 한 고 한 고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풀었다.

다 벗어 놓고 가리라.

다 풀고 가리라.

이제 그 앞에서는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린 장엄하고도 세밀한 온갖

부덕 여덕의 훈계와 항목들이 강실이의 머릿단에서 풀리며 검은 물살처럼 어깨

를 덮는다.

홍두깨 올린 비단과 명주에서는 방망이 맞는 자리마다 바라보기 에일 만큼 연

연한 구름 무늬, 물결 무늬, 숨어서 오히려 휘황하게 번지었건만. 보이지 않는

운명이 홍두깨와 다듬잇돌 사이에 감기어 낀 강실이는, 호되게 내리치는 방망

이를 맞으며 비명도 피명도 토하지 못하고 이 물가에 서서, 생전에 그러하였듯

정초의 세배 자리에서처럼 호수를 향햐여 절을 하고는, 신을 벗고 머리를 풀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오, 작은 아씨이."

검은 너울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인가.

소복의 뒷머리에 드리운 흑단 같은 머리채는 벌써 저승을 머금은 채, 새벽 안

개 자욱히 오르는 저수지 제방 위에 섬뜩하고도 처연히 비쳐, 안서방네는 아악,

소리를 지로고자 하였으나 음성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그저 웅, 웅, 하

는 짐승의 신음 수리라고나 할 것이 제 귀에 울릴 뿐.

그럴수록 걸음이 헛디뎌지는 안서방네는 강실이의 모습이 가뭇 헛그림자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가위 눌린 제자리 걸음을 조청밭에서 떼는 힘으로

"아이고, 아이고오."

옮기었다.

"작은아씨요."

죽지 마시요오, 죽지 말어.

 

 

2. 죄 많으신 그대

 

"작은아씨."

드디어 제방에 오른 안서방네가 그만 두말 더 할 것도 없이 덮쳐들어 강실이

허리를 휘어감고 쓰러지자, 강실이는 검불 하나 꺾이듯 안서방네 팔에 허리가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등뒤에서 또아리 감아안고, 그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눈

물을 쏟았다. 찐득하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오죽허시겄소.

오죽이나 허시겄소.

그렇지만 생목숨인디.

아아, 죄 많으신 생목숨인디.

너무나 가엾고, 애처롭고, 그러나 도무지 비천한 자신의 처지로는 무엇 하나

어떻게도 해 줄 힘도 없어 한없이 안타까운 강실이를 부여안은 안서방네는, 오

직, 그네의 목숨만은 어떻게든 건져야 한다고 믿어.

절대로 이 팔을 풀지 않으리라.

족쇄로 조이는 것이었다.

혼비하여 달려온 끝이라 제 정신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안서방네는, 강실이

등뒤를 덮쳐 또아리같이 끌어안았던 팔을 가까스로 풀며, 눈물 범벅진 얼굴로

목이 메인다.

"참으시오. 참으시여어."

외마디 한숨을 토해 내는 듯한 그네의 늙은 음성에, 쉰 울음이 절박하게 맺혀

있다. 엄동은 지났다고들 하지만 아직 음 이월 초순을 겨우 벗은 일기의 새벽

기운은 뼛속이 시리게 찬데, 간밤 내내 흘린 식은땀이 진액으로 엉기어 흥건히

젖은 홑저고리 무명옷 한 닢 바람인 강실이는, 이미 넋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만 있을 뿐 떨지도 않았다. 베올마다 빙결이 서려 서걱서걱, 저고

리는 진작에 성엣장이 되었을 터인데도.

그네의 두 손을 맞잡으며 주저앉히는 안서방네를 따라, 펄럭, 나부끼는가 싶게

마른 풀밭 제방으로 접히어져 앉는 강실이는, 창호지로 오린 혼백인 양 부피가

없었다.

"이리 오시오. 이리, 이리."

평소에야 언감생심 그리할 수 있었을까만, 지금 그네는 강실이를 마치 가엾고

안쓰러운 딸자식 어루만지듯, 얼음보다 썬득한 뺨이며 여원 등판을 하염없이 쓰

다듬고 쓰다듬었다.

에이구우, 죄 많으신 인생이여...

하늘 아래 세상 천지, 사램이 지 아무리 많다 허나, 우리 오류골 작은아씨만헌

사람 어디 다시 있을 거잉고.

문벌이 모지랭가 용모가 모지랭가. 앙 그러먼 성품 행실이 모지랭가. 비단실

풀쳐 내서 오색 수를 놓드래도 이만큼은 못 갖추고, 이만큼은 못 곱건만.

삼생에 누구랑 웬수진 일 있으기요오, 왜 이런 설움에 꾸정물 잡숫고, 나 이러

요, 말 한 마디 엇다 대고 헐 디도 없이, 이대도록 복장이 다 썩어서 쓴물에 녹

아 부러 껍데기만 남은 헛덕개비가 되시드락, 넘 안 사는 세상을 골라감서 사신

단 말이요오, 대관절.

이게 대체나 무신 곡절이란 말씀이요예?

비록 한 울안에 모시고 사는 상전은 아니었으나, 매안 마을 이씨 문중 종가에

서 스물 안짝 귀밑머리 풀어내리고,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청암부인 신임받으며

늙어온 하인 안서방의 아낙으로 안서방네는, 부인의 생전에 자애 귀염이 남달

랐던 강실이를, 언제 한 번 티끌만치라도 남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던 것이다.

큰댁 작은댁이 한 핏즐인 연고로 자기한테는 강실이가, 한 울타리 상전인 건

너무나 당연할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 마음에는, 눈먼 딸내미 하나 언챙

이 머슴애 한 놈 낳아 보지 못한 처지로, 어여쁘신 애기씨 작은아씨가

"별나게도 애지중지."

한다는 말 듣고도 남게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서 늘 싸안고 돌았었다.

결코 아무한테나 어린 애기 맡기지 않던 청암부인이 강무를 업어 기르게 한

것이 안서방네 실겁고 도타운 등이었으며

"작은집에 강실이 좀 데려오라."

하면 단걸음을 놓아 업고 온 것이 또 안서방네 투실한 등이었다.

"재롱이 보고 싶어 그러신 것을, 에미가 따라가면 조심하신다."

맨 처음 부인의 전갈을 받은 오류골댁은 안서방네한테 애기를 업히어 주며,

혼자 올라가라, 하였다.

"같이 오라시든디요."

"다 놀으셨을 만할 때 감세."

젊은 새아씨 오류골댁은 마실 가는 떡애기 강실이의 앵도물빛 동그란 볼을 다

독다독하더니 웃었다. 손가락 다독이는 대로 갓난 눈을 감작감작하는 속눈썹이

품에 안기게 귀여운 때문이었다.

"너 이러는 것 보고자 할머님이 부러 부르시는 게야."

만면에 발그롬히 미소를 머금은 오류골댁 아니라도, 안서방네는 강실이 업은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느꺼웠다. 마치 자신이 애기씨 어미나 되는 것

처럼.

"감히... "

입 밖에 내서 말해 본 일은 참 한 번도 없었지마는.

아이 업힌 느낌이 강모 때와는 사뭇 달랐었다.

어느 가문 누구씨의 그 어떠하신 혈손이라고, 언감생심 경겨망동, 몸놀림을 소

홀히 할 리 꿈엔들 없는 안서방네였지만, 그러해서 강모를 업은 등은 소중하고

무거웠다. 곰지락거리는 강보 유아 애기도령이 무겁다면 얼마나 무거우리오. 쌀

한 말, 물 한 지게 진 것에 비교할 것인가. 그러나 안서방네는 언제나 이 도련님

을 천 근같이 여기어서, 발걸음 떼고 멈추는 것이며 구부리고 일어서는 것들에,

매사 바위나 짊어진 듯 조심스럽게 행신하였다.

"마님이 나를 어찌 여기시든지, 나는 애기되렌님 등에다 업을 직에먼 똑 고대

광실 매안 이씨 종갓댁을 업고 댕기는 것 맹입디다예."

안서방네는 곰방담배를 재우는 안서방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허, 당연허지."

"긍게 말이요. 누가 시긴다고 그런 맘이 들겄소잉?"

안서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는 훗날 강모의 혼행 때 청사등롱을 잡았던 하인으로 , 청암부인이 매안으

로 신행 올 때 친정 청암에서부터 데리고 온 사람이라, 이 집과는 오래 묵은 인

연이 남과 다르게 깊었으니.

"불효여식 운명이 기구하여, 필부필부 장삼이사, 평범하고 남루한 사람들도 흔

히 누리는 부부 백년 해로를 못하옵고, 금지옥엽 이 몸을 길러 주신 부모님께는

고금에 다시 없을 죄인이 되어, 면목을 바로 하기 어렵삽네다. 이제 설레고 호사

스러워야 할 신행 우귀의 길이 청상 치상 길이 되었사온즉, 대저 부모 된 이로

서 자식 보내는 배웅이 이토록 참혹 측은한 경우, 세상에 어디 또 있으리이까.

일당하온 저는 차라리 날벼락 중동에 허리가 잘리어 기어가더라도 제 인생이오

니 어쩔 수 없고, 또한 어떻게든 스습하여 헤쳐나가겠지만, 우리 친정 부모님 설

우신 앞섶인 비루로 촌촌이 멍들어 밤낮없이 피눈물 간폐를 녹이올 정경, 차마

어찌 무엇으로 위로하여 드리리요."

새각시 청암부인은 열여섯 어린 신랑 준의의 날벼락 같은 부음을 놓고, 그네

의 안어른 어머니 앞에서 통곡을 삼키며 의연히 말하였다.

"하오나, 인명은 재천이라, 서천은 가고 이 몸은 남았으니, 남은 사람 목숨이

진할 때까지, 한 집안의 종부로서 피치 못할 임무가 있을 것이온즉, 비록 황망중

일지라도 앞일을 가리어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삽네다. 비천한 목숨에 탐욕 있

어서가 아니오라, 가부 잃어 텅빈 집안에 가주가 되게 생긴 저의 전후를 살피올

적에, 저까지 정신을 잃고 수심에만 잠길 수는 없는 탓이올습니다."

녹의 홍상 빛깔도 고와 생채가 나게 떨쳐입은 여식의 넉넉 훤칠하고, 의젓하

고, 장중하기까지 하던 모습이 그만 하룻방 사리에 서리 ㅂ은 소복으로 뒤바뀌

"청천 벽력이라더니, 이런 일이 네 앞에 닥치느냐."

오직 그 한 마디 신음 소리로 밀어내고는 두말도 더 잇지 못하는 모친의 눈

에, 소복의 흰 빛은, 철갑보다 견고하게 둘러씌워져 일생 동안 벗겨 낼 길 없는

큰칼로 보였으리라.

"이에 깊이 궁리한 일이 있사온데."

"무엇이냐."

"저한테 주실 교전비 대신, 충직하고 과묵한 하인 한 사람 딸려보내주시면,

노역 일손에 도움이 크겠습네다."

인편에 매안 사가의 근황 내력을 소상히 들어서 알고 있던 모친은, 과연 그러

할 만하다고 짐작 어린 내색을 하면서

"내, 사랑에 여쭈올 터이니 너는 다만 마음을 굳건히 먹고 있거라. 그만한 일

이 무에 그리 어려우랴."

어렵기는커녕, 창졸간에 이와 같은 붕천의 슬픔을 당하여서 애통으로 무너지

는 제 한 몸 가누기도 결코 쉽지 않은 터에, 오히려 심경을 정돈하고, 살아갈 앞

일을 헤아리는 국량이 갸륵하고 눈물겨워 오직 고마울 뿐이었다.

노비란 자고로 마소 전답이나 한가지여서, 주인에게 한 번 속해지면 그 상전

의 뜻대로 소유할 수 있고, 세습하여 자식들한테 물려주며, 또 분가하거나 출가

하는 자녀들한테 재산 분배로 나누어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나 반가의

따님이라면 누구라도 으레 혼인할 때, 시중드는 계집종 교전비 따라가는 것이

상례이거늘, 부모 재산에 누를 끼칠까 보아 조심하며 이치에 맞도록 소견을 말

하는 합리라니.

부인의 모친은 이 뜻밖의 참황 가운데서도 여식의 모습을 대견한 마음으로 바

라보았다.

"기특헌 생각이로다."

사랑에서 허락이 내려, 청암부인을 모시어 배행하고 온 것이 바로 부인의 청

암 친정댁에 누대로 세습되어 내려오는 씨종의 씨, 사노 순구, 안서방이었다.

그의 어미는 평생에 아들 셋과 딸 일곱을 낳아 상전에게 바쳤는데, 안서방은

그네의 아홉번째 소생으로, 무엇보다 그 성품이 정직하여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

의 눈을 기이는 일이 없었다.그리고 부지런하였다.

"내, 가장 믿을 만한 종을 너한테 주노니, 부모의 정 한 점을 떼어 다숩게 지

니고 가거라. 너도 잘 알겠지만, 종이란 종모법에 의해서 그 신분이 어미를 따라

가는 것 아니냐? 허니, 네가 순구를 잘 눈여겨 보고 있다가 너한테 공이 많거든,

노비 아닌 양민의 처자를 애써 구해서 짝을 지어 주면, 그 자식 대에는 면천을

할 수 있으리라."

"명심하겠습니다."

청암부인은 부친의 말씀에 답하였다.

"순열이는 네 교전비로 데리고 가거라."

그 어미가 순구 아래 낳은 열번째 계집종이 순열이었다.

매안으로 온 청암부인은 친정을 떠나오며 부친에게 했던 약조대로, 민촌의 상

민이었으나 살기가 궁박하여 문중에 호제로 들어와 드난살이하던, 행랑아범의

딸자식을 순구와 맺어 주었다.

"말이 종이지, 저렇게 변함없고 온순하고 경우 바른 사람은, 양반 못된 것하고

열 섬을 얹어 준대도 안 바꾸게 본데 있는 종이라."

는 말을 안팎에 듣던 순구에 맞도록 안서방네 또한 행동거지 조신하고 일손은

재바르면서도 성품은 과묵한 아낙이었다.

"이제 너는 자식을 원없이 마않이 낳아라. 아무리 낳고 낳아도 네 자식 중에

종은 나오지 않을 터이니."

순구가 안서방이 되는 날 청암부인은 덕담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 듣기만 하여도 속이 트이고 응어리 플리어 풍요로운 덕담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고단한 사람이라 자네라도 생산 많이 해서 식구 불어나는 것을 꼭 보고

싶었는데. 닳을 것이 없어 상전 무자식 팔자를 닳노 그래, 그런 것이 충복이 아

니라 무어라고 해야 되는고."

노경에 흰머리 가득 돋아난 안서방을 이윽히 건너다보던 청암부인은, 어느 날

문득 그런 말을 쓸쓸히 건넨 일이 있었다.

"사는 게 다 한낱 시늉이고, 허망한 노릇이지마는."

그런 말을 덧붙이면서.

그 힘없는 노안에 어리는 감회를 돌아서서 묵묵히 짚으며, 안서방은 안서방네

한테 서글픈 빛 스치게 이야기했었다.

"말을 안해서 그렇제, 참, 인정으로는 못 따러올 질이드라고오. 우줄우줄 흰 덩

꼭대기가 출렁거림서 저만치 새각시 가매는 생이맹이로 앞서 가신디, 음식이랑

머이랑 이고 진 하님들이 줄줄이 따러가는 행렬이 어찌 그리 설웁고 처량튼지.

참 요상허제. 그렇게 행렬이 지일고 호사시러웅 거이 외나 더 설워 뵈드랑게."

"대체나 그랬겄소잉."

안서방네는 낮은 소리로 혀를 찼다.

그때로부터 안서방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결같이 청암부인의 충실한 손발이

되어 논 갈고, 밭 갈고, 곳간을 지키며 농사 일 안팎을 나락껍데기 한 낱 흩어지

지 않도록 단속하였다.

그리고 중늙은이 벗어나면서부터는, 일어난 살림살이에 반하여 구부러진 뒷

등에, 나락섬에 지고 나르는 일 대신 꽃잎같이 가벼운 도련님 어린 강모를 업고

는 거의 매일 시오리 길을 달려 보통학교에 가고 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는 그는 험한 일은 하지 않았고, 청암부인도 그에게는 각별히 후

대하였다. 또한 안서방네도 종의 아낙이어서 그렇지 신분은 평민인지라 사람들

이 함부로 종 다루듯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안서방네와 안서방의 등에서 자란 강모.

그런데 안서방네는 그 강모를 업을 때와 강실이 업을 때의 정감이 사뭇 달랐

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장아장 걸으면서 분홍 매화 수놓인 꽃당혜 앙징스럽던 그 발이, 이제는 이

승에 신던 신발 나란히 벗어 놓고, 저 시푸른 저승의 시린 물 속으로 들으려 한

다.

"작은아씨. 이런 소견이 머얼 알까마는, 사램이 세상에 나서 짓는 죄중에 지

손으로 생목심 끓는 거이 기 중 큰 죄라고 허등만요. 왜 그렁가는 모르겄어요.

즈그맹이로 앙껏도 아닌 인생도, 살다가 살다가, 이노무 인생은 대관절 언제나

끝이 난다냐, 막마악헌 때가 한두 번이 아닌디요잉, 그런 생각 허는 것도 못쓴당

만요."

전생에 죄를 져서 이생에 괴로운 일 많이 겪으면, 우선은 못 전딜 테지마는

그래도 살어서 갚는 거이 낫답니다. 그래야 탕감을 해서 개버진다대요.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 그 빚 끄터리가 똑 올가미맹이로 따러댕깅게, 끊어내 불든 못허능

게비여요, 그저 갚어야제. 괴로움도 갚는 거이라대요. 독하게 괴로우먼 빚도 그

만큼 많이 탕감되는 거이라든디.작은아씨. 무신 좋을 날 없다손 치드래도 목심

붙여 논 것으로 내 업장 소멸시키는 빚 갚는다 생각허시고, 두고두고 찔끔찔끔

갚으실 거 한끕에 비싸게 갚는다 허시고, 죽든 말으시겨어, 살으시겨.

아아, 앙 그러먼 이 죽을 괴롬으로 누구 구제헐 일 있으싱교오.

안서방네는 강실이 등뒤로 무릎 걸음을 옳겨, 풀어헤친 저승을 머금어서 무섭

게 검은 머릿단 너울에 손가락을 써레처럼 벌리어 집어넣고, 수욱수욱 빗어 내

렸다.

"날 새기 전에 어서 댁으로 가십시다잉? 그래야 일이 작지요."

헝클어진 머리를 거둠거둠 땋는 둥 마는 둥 걷어매고는

"업히시오."

그네는 강실이 턱밑으로 등을 내밀었다.

비록 나이 들어 흰 머리털 잿빛으로 수북하지만, 강실이는 종잇장 허깨비보다

더 가벼웁고, 안서방네는 평생토록 일로만 굳은 살 박힌 사람인지라, 후딱 업고

내달려가는 것이 빠를 것만 같았던 것이다. 자칫 머뭇거리다가 이른 새벽 무신

일로 고샅에라도 나오는 사람 눈에 뜨이면, 그런 낭패가 없는 탓이었다.

그러고 저러고 간에 우선 강실이는 검부라기 한 올만큼도 힘이 없어, 걸어가

자는 말이 도무지 나올 정황이 아니었다.

시커멓고 거대한 먹물이 져 웅크리고 있던 노적봉과 벼슬봉 연봉들이 점차 그

먹빛을 풀면서, 넌출넌출 출렁이는 새벽의 물마루가 화선지에 담묵과 진묵이 엷

게 짙게 번지듯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이 선 방죽머리에는 차가운 이내

가 자욱이 수면을 에우며 물안개로 오르는데, 안서방네는 어린 날에 그러했던

것처럼 강실이를 등에 업고, 비탈진 제방을 휘청휘청 내려왔다.

천 산을 짊어진들 이보다 무거우랴.

이 설움, 이 한세상을 어찌 살러가실랑고.

휘유우.

바튼 숨을 몰아쉬며 남의 눈에 뜨일세라 힐끗힐끗 살피면서 어푸러지듯 궁그

러지듯 막 오류골댁에 당도하였을 때, 아니, 이게 웬 일인가, 천만 뜻밖에도 그

문간에는 솟대같이 우뚝 솟은 기표가 뒷짐을 진 채로 날카롭게 서 있었다.

"어디 갔다 오는가."

안서방네는 순간 기급을 하였다.

아이고매.

이마와 등판에 진땀이 돋은 안서방네가, 저도 모르게 자지러지는 비명이 하마

터면 튀어나올 뻔한 것을 누르고는, 후르르르 떨리는 다리를 엉버틴 채, 구부린

등에 업힌 강실이를 무망간에 감추는 시늉으로 뒷걸음을 쳤다.

"어디로 가?"

"기침 허셨능기요?"

"기치임?"

안서방네 수작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되받고 난 기표가, 안서방네와 강실이

를 번갈아 훑어보는 폼이, 아까부터 그렇게 사립문간에 서서, 저쪽 제방머리에서

무엇이 희끗희끗 나부끼는 모양부터 그 물체가 딱 코앞에 온 지금까지, 여지껏

눈도 깜짝 안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들이 골짜기 낮은 계곡으로 가뭇 내려가 가리워졌다가 고샅 모퉁이 돌 때

는 안 보였겠지만, 이윽고 텃논 모퉁이를 돌아나올 때는 수상한 것 형상이 바싹

가까워져, 기표는 눈에 비늘을 일으키며 모를 세우고 기다렸던 참이 분명하였다.

기표의 눈썹에 날이 서 꼿꼿하다.

오금이 오그라붙어 옴짝달싹 못한 채 마른침만 꺼르르윽, 목줄기를 깎아 내리

게 삼키는 안서방네를 송곳눈으로 찌르면서

"커흐으음."

기표가 큰기침을 했다.

못마땅한 빌미를 정통으로 움켜잡은 기침이었다.

이른 새벽 등잔 불빛이 시름없이 배어 나오던 오류골댁 장지문과, 사랑으로

쓰는 건넌방 문짝이 안쪽에서 덜커덕 소리가 나게 열렸다.

그 소리에는 놀란 기색이 역연하였다.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거칠게 땅을 차며 들어서는 기표를 내다보

는 오류골댁과 기응의 낯빛이 샛노랗게 질려 버린다.

두 사람은 기표가 난데없이 너무 이른 시각에 나타난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

다 강실이를 업고 선 안서방네 후줄근한 꼴을 보고는 기함을 하게 놀라서,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거기다가 그네들이 기표와 맞닥뜨리다니.

오류골댁 얼굴이 일순에 아득히 캄캄해진다.

기표는 다시 한 번 찍어 내리는 소리로 기침을 뱉으면서, 노기 등등한 발로

댓돌을 굴렀다. 그 서슬에 집안이 쿠웅 울린다.

기표가 기응의 방으로 문짝을 메다붙이게 닫으며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서

야, 오류골댁은 버선발로 우루루 달려 내려와, 강실이를 덤썩 붙들어 안았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들어오소.

안서방네한테는 눈짓으로만 시늉하며 강실이를 부여안아 안방으로 들어가는

오류골댁은 이미 어제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밤사이에 훌쭉하니 들어가 버린

볼이며, 붉은 기운 피 비친 듯 번들번들 불안하게 퀭한 두 눈과, 납빛으로 죽은

입술들이 도무지 산사람 모색 같지가 않았다.

이제는 틀렸다.

틀려 버렸다.

강실이를 눕히며 오류골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이야 물론 그 끔찍 참변의

"태맥."

이란 소리 들었을 때 이미 다 글러 버린 것이었지만, 새끼 낳은 어미의짐승 같

은 본능으로, 어떻게든, 이 다 떨어진 치맛자락으로 가리고 감추어서 아무도 눈

치 못 채게 무마해 볼 수는 없을까, 가련한 방책을 찾아보려 한 것이 사실이었

다.

반가의 부녀로 이러한 일 당하여서 더러운 목숨 부지해 보겠다고 눈알 굴리는

것이, 능욕보다 더 욕된 일인 것을 그네가 모를 리 있으리야. 비록 반가의 여인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의 강토가 난 아녀자, 노류장화 창기라면 모르겠거니와 그

어느 누구라서 몸을 더럽히고 살기를 꿈꾸리오.

더욱이나 이처럼 서릿발 돋는 가문에서 아직 시집도 안 간 규방의 처녀로, 종

조모 상중에 아이를 배었다니.

아이를 배었다니.

쇠꼬챙이 갈고리로 뒤꼭지를 찍어 찢는 이 한 마디는, 너무나도 참악하고 참

절하여 차마 되뇌이기조차 사참하고 두려운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 심상치 않은 일의 덜미를 다른 사람도 아닌 기표한테 호되게

잡히고 말았다. 들키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일은 이제 난장에 나앉은 꽹과리가 되

고 만 것 아닌가.

왜 하필이면 그 순간에 수천서방님은 무엇을 하시려고 우리 사립문간에 서 계

셨으며, 왜 또 하필이면 꼭 그 순간에 안서방네는 공고롭게도, 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들켜서는 안되는 몰골을 정면으로 추켜들고 나타났을꼬.

업어 온 것이 참말로 고맙기는 그지없다마는.

모르기는 몰라도 저것이 죽으러 갔었겄지. 내, 그럴까 싶어서 뜬눈으로 지키고

있었는데, 그 잠깐 새, 방 비운 틈을 안 놓치고 그예 니가 나가드니. 필경에는

이렇게 일을 저질러 버렸구나.

이제는 틀렸다.

틀려 버렸다.

죽을라면 접시물에도 빠져 죽는다는 말도 있기는 하더라만, 니가 꼭 죽기는

죽을라고 그러냐... 왜 일마다 죽을 구녁으로만 파고들어가냐.

멧돌짝이 위아래 맞갈려도 가루가 된 밀가루 사이에 안 갈린 통밀이 한두 개

남는 경우가 있는 것인데, 장차 이 일이 어디로 갈라는고.

"그런데 어떻게 안서방네가 이 사람을, 어디서 보고 업어 왔는가? 어쩌고 있는

것을?"

속 깊은 사람은 줄은 알지만 도무지 머리 속이 우둔거리고, 아랫것한테 보여

서는 안될 것을 창자까지 훑어내서 모조리 보여 버린 민망함에다. 이 지경의 경

위를 알 수 없는지라, 짐짓 모르는 척 안색을 꾸미어 묻는 말에 안서방네도 눈

치껏 변죽만 지어내서 대답한다.

"방죽골에 심바람 갈 일 있어 갖꼬 새복같이 갔다 오는디, 작은아씨가 웬일로

거그 기시대요."

"무슨 심부름?"

"예. 저어, 아씨께서 조께 갔다 오라신 일 있그만요."

"이 사람이 거기서 어쩌고 있었던가?"

"기양 서 계시든디요, 바람이 창게 그랬등가 현기증이 나겼등게비여요. 지가

방죽 모팅이 막 돌아옴서 얼핏 봉게로 작은았가 기셔서, 추운디 멋허니라고 나

와 지싱고오, 허고는 막 아는 체헐라는디 기양 눈 깜작 새 휘르르 씨러지시길

래... 왜 엊저녁 때도 안 그러어요잉? 기운이 없으싱게로."

주섬주섬 말을 이어붙이는 안서방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오류골댁은 고개를

외로 돌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말을 누가 믿겄는가."

안서방네는 작은댁 상전의 탄식에, 아니라는 말을 얼른 둘러대지 못한 채 고

개를 떨구었다. 본디 성품이 순직하여 요사비사에 능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일이 워낙 중악한 것이어서 혼자 감당하기 속이 떨리는 탓이 컸다. 그네는 오류

골댁 앞에서 일부러 범상 무관한 척하려 했으나, 마른 음성이 헛짚이며 뜨고 갈

라져 놀란 심중을 저도 모르게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왕에 자네는 무슨 짐작이 있는 모양인데... 들은 말 혹 없는가? 누구한테?"

오류골댁이 체면을 몰수하고 건너짚어 물었다.

안서방네는, 원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황급히 손을 저으며 한 걸음 뒤로 옴찔

물러앉기까지 하였다.

"말을 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이게 그래 함봉하고 앉었다고 해결될 일

인가? 아니 매안 마을 이씨들은 청맹과니 당달봉사만 떼지어 살고 있는 줄 알

어? 어엉?"

별안간에 바윗돌로 부시를 치는 벼락 같은 고함 소리에 그만 기급을 한 것은

안서방네와 오류골댁이었다. 그것은 건넌방에서 터진 소리였다. 두런두런 들리는

가 싶던 기응과 기표 형제의 음성 끝에,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기표가 고

함을 지른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으로 가리는 것이 더 쉽지, 내 눈에 뜨인 것을 무슨 수로 숨

긴다고 뻑뻑 우기면서 모른다고, 모른다고만 허고 앉었는 것이야, 시방? 지나가

던 삼척동자가 보았대도 이상할 일이 이 꼭두새벽 이 자리에서 내 눈앞에 벌어

졌는데, 말 안할 것이 따로 있지 이게 어디 예삿일인가? 왜, 무엇 때문에, 어젯

밤에는 남원서부텀 진의원이 숨넘어 가도록 급헌 왕진왔다 가게 아펐던 사람이,

강실이가, 몇 시간도 안 지난 지금 어째서 방죽가에 날람허니 섰다가 남의 등에

업히어서 조리를 돌리듯이 동네 사람들한테 구경을 한 바퀴 자알 시키고는, 기

진맥진 귀신처럼 허옇게 펄럭거리며 들어오느냐고오. 응? 내가 다 보고 서 있었

다지 않어어? 다 보고 , 누구 남의 말을 건네 듣고 애민소리 허는 게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본 이애기를 나는 허고 있는 게야. 지금."

기표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그럴수록 오류골댁 간장이 졸아들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였다.그네는 너

무나 심정을 조이고 있어 자기 옆에 안서방네가 있다는 것조차 잊어 버리고 만

사람처럼 보였다.

안서방네는 두 손을 가슴에 붙인 채 오그리고 앉아 오류골댁 안색을 훔쳐 살

피며, 몸둘 바를 모르고 어서 일어설 핑계만 노리었다.

"당장에 저 강실아란년 업고 온 안서방네만 해도 벅꾸 천치가 아닌 바에야 속

으로 요상허지 않겄다고? 이왕지사 깍 숨기기로 작정을 했으면 감쪽같이 머리터

럭 한 올 안 뵈이게 숨길 일이지 터억하니, 나 보란 듯이 온 동네 방네 온몸으

로 펄럭펄럭 외장을 치고 나서, 아랫것 눈에 뜨인 것은 괜치않고, 아랫것 등짝에

업혀서 한 동아리 짝짝꿍 난 것은 괜채않고, 집안간 형제지간에는 말허면 아니

디어서 철벽같이 입다물어 비밀을 지키는, 그 일이 과연 무엇이야? 왜 말을 못

해?"

이때다 싶어서 자기 말이 튀어나온 김에 안서방네는 송구스러운 몸짓으로 주

춤주춤 일어서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저는 그만 올라가 볼라네요."

"그러소, 욕봤네."

안서방네가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마당을 밟고 나가 총총히 사라지는 발짝 소

리를 짓뭉개며, 기표는 기응에게 격성으로 들이댔다.

"어젯밤에도 내가 똑똑히 봤지. 남 다 자는 오밥중 야심한 시각에, 저 살구나

무 고목 기둥뿌리가 패어 나가도록 이마빡 부딪쳐 찧으면서 응, 응, 울던 소리도

내가 다 들었고. 그런데도 모른대? 이게 필경 저하나 죽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온 집안 망신 파문이 걸린 일일 게야. 종당에는 이씨 문중, 매안 이씨를 싸잡어

모조리 다 망하게 하는 일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소동이 날 리가 있는가."

살점이 으깨어져 검은 피먹 멍등 이마를 곤지처럼 드러내고 있는 기응으로서

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뒷자리가 없었다.

"야밤중에 길 가다가 돌부리에 채여 고꾸라지는 바람에 그만 재수없어 이마가

깨졌다."

고 어색한 변명이나마 해 볼 여지조챠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아비로서는 비록 죄 지은 딸자식을, 차라리 네가 죽으라고

후려패어 짓찧고 난도를 쳤을지라도, 문중과 세상 사람들 앞에야 이 일을 어찌

차마 발설할 수 있으리오.

자식 가진 죄인이어서 그는 그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형님, 제 손으로 쥑이리다."

"뭐?"

"저년 하나 죽으면 없던 일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기에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묻지 않어? 일에도 순서가 있고 말에도 순서가

있지. 왜 신짝을 머리에다 쓰고 나설려고 허는고? 그만한 분별도 못해?"

"제발 형님, 강실이란년, 저년을 내 손에다 맡기시고, 형님은 못 본일 못 들으

신 일로 해 주십시오. 죽어서 없는 사람한테 살어서 있었던 일이 무슨 쓸 데 있

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저것 죽은 것이다아, 그저 그렇게 여기고만 계십시오. 제

가 알아서 다 할 것이니."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누구를 데리고 어린애 장난을 허고 있나? 낫살이나 먹

은 골육지친 형제지간에 물팍 맞대고 앉어서, 나란히 구렁이 담을 넘어가자는

것이야아, 눈가리고 아웅을 하자는 것이야 뭐야?"

"세상을 살어가자면 모르고도 안 물어 보는 일 있고, 알면서도 묻지 않는 일

또한 있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그저 우선 잠시 참고 쪼끔만 기다려 주십시오."

"듣고 보니 흉측허네. 기다리면 살인 나는 일이구만, 질녀 목숨이 걸린 참경을

명색이 중부가 알고도 가만 있으란 말인가? 응? 인륜이 걸려서도 그리는 못허

지."

"다그치면 줄초상 나까 싶습니다."

"협박이야?"

"도적도 쫓을 ㄸ는 도망갈 길 터주면서 쫓는다 안합니까."

"내가 아는 것이 곧 숨통 터지는 길이야. 내가 모르면 일이 더 막혀.더 커지고,

더 꼬이고."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닌데 애비 몸에 살기가 돌아? 딸년을 쥑이려고?"

"아무리 형님과 저 사이 형제지간 한 탯줄에 동기간이라 해도, 또 저년허고 저

사이는 부녀지간이라, 애비와 딸자식이 서로 말 못헐 일 겪을 수도 있는 것 아

니요오? 그저 그런 일인가 부다만 허고 계십시오. 제발, 좀 답답우시더라도."

"이 사람이 이제 보니 의뭉헌 사람이네그려. 아조 몹쓸 성정이 있어. 지금 누

구 데리고 노는가?"

어히구우.

기응은 양 주먹으로 방바닥을 받치고 앉은 채 고개를 떨구어 꺾으며 울부짖음

같은 한숨을 토한다. 답답한 것은 기표가 아니라 기응이었다. 기표는 이미 그 민

첩하고 놀라운 찰지로 이번 사단의 내막을 꿰뚫어본 것이 분명한데, 다만 그의

심증을 당사자 기응의 실토로 확인하려 조이는 것일 케고, 기응은 필사적으로

버팅기며 거기 걸리지 않으려고 마지막 뒷걸음을 쳐 보는 형국이었다.

"누구는 속이 없고 짐작이 없어? 진작부터 강실이 행태가 여늬 사람같지 않아

괴이쩍게 여겼지만, 내, 말을 안했지, 어젯밤에 마당에서 벌린 괴이쩍은 무슨 말

들었을 것이야. 오늘 아침 동트기 전 아무 사람 이목 없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소문 없이 수습해 보려고 이리로 오던 길에 내가 또 그 꼴을 봤으니, 여기 무슨

변명이 먹혀? 도대체 . 저것이 어젯밤에 의원 부르고 나서 오늘 신새벽, 죽을 작

정으로 저수지 방죽가에 들이달아 초죽음 다 되어 서 있었을 적에는, 반다시 그

럴 만할 필유곡절이 따를 것 아니라고?"

"그렇게 다 아시면 차라리 형님이 전후를 말씀허십시오. 저는 실지가 모르는

일이 더 많고, 저년도 말을 안해서, 제가 아조 어젯밤에는 패 쥑일라고 작정을

했었습니다."

말을 해라.

말을 해.

눈 뜨고 말을 해.

네가 이년 나를 쥑일 셈이로구나. 오냐.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너는 살 수

있으며 나는 살 수가 있겄냐. 오늘 밤에 너 죽고 나 죽자. 어차피 내가 안 죽이

면, 문중이 들고 나서서 온 동네 조리 돌리고 덕석에 말겄지. 안 봐도 뻔한 일.

아이고호, 아이고오호.

어젯밤의 충격과 울분이 다시 머리꼭지까지 치받친 기응이 평소의 그라고 생

각 못할 짓으로, 머리빡을 벅벅 긁으며 쥐어뜯어 뒤엉크니,기표가 오히려 어이없

는 낯색으로 말을 못 이었다. 그러다가 쫓기는 사람마냥 몹시도 불안하게 애원

반 고집 반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좀체 숙으려들지 않는 기응의 양이, 불

칼 같은 기표의 성깔에 부아를 돋우어 더욱더 언성을 높이게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죽는 것으로 끝인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사람인 줄 알았어?

사람 독이 어떤 것이데, 그 살고 난 자기가 죽었다고 그렇게 쉽게 씻어져?어림

도 없는 소리. 향기 중에 향기도 사람 향기여서 천 년이 가고 만 년이 가도 오

래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독 중에도 사람 독같이 무서운 것 없는 법이

야. 그래, 살어서는 죽여 마땅한 일 저질러 살었는데,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 저

지름이 모조리 지워지고 없어진다고, 누가 그러던가?"

"이 일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모른다고는 또 누가 그래? 세상 천지 모든 사람 앞앞이 물어 보았어? 버선목

뒤집듯이 다 일일이 뒤집어 들여다보았느냐고. 그 속을."

"나는 모릅니다."

"집안 망칠 일이 벌어졌지? 그렇지? 집구석 쑥대밭 될 일이 지금 저년 뱃속에

서 크고 있지? 엉? 이게 어떻게 나 하나 너 하나로 끝나는 일이야? 저것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날 일이야? 엉?"

더는 못 참고 날끝이 시퍼렇게 깎인 대창을 채켜들어 기응의 앙가슴 복판에

콱 메다꽂은 기표는, 억색이 되어 버리는 기응의 흙빛 낯바닥을, 자신의 검붉게

충혈된 머리로 한 대 쳐 박살을 낼 것처럼 바싹 들이밀며 어금니를 윽물었다.

그런데도 아까와는 달리 기응은 차라리 허탈한 표정으로 오뚝 앉아, 기표의

서슬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 말을 해. 자초지종을."

"나도 모르요."

"나도 몰라?"

"저 대신 가서 좀 물어 주시오."

'나'로 왔다 '저'로 갔다 얼이 빠진 기응의 말에, 화가 북받친 기표가 다시 쥐어

지르는 고함을 질렀다.

"아니, 아직도 발뺌을 해? 이 지경에?"

그렇지만 그 고함이라는 것이, 워낙 조마조마 간을 졸이고 있었던 오류골댁과

안서방네였던 탓에 그처럼 정수리에 바위 때리는 벽력 소리로 들리었지, 막상

기표도 무서운 참극 별어질 것을 직감한 이 마당에 행여 음성이 울 넘어갈까 보

아, 말에다가는 칼침을 박으면서도 오히려 말소리는 자신이 먼저 극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서방네가 사립문을 빠져 나가면서 일부러 잠시 귀를 곤두세우고 안

의 동정을 가만히 살피었으나, 그저 무엇인가 노색 띤 웅얼웅얼이 집안을 울리

는 것 정도만 얼핏 엿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 마음 놓은 안서방네가 사립문을 나서자마자 단걸음에 내달아

효원에게로 갔을 때 지난 밤 잠을 설친 흔적이 역력한 효원은 벌써 이부자리를

개켜 놓고 있었다.

"되렌님은요?"

"사랑에."

"예에."

철재는 요사이 들어 사랑채로 나가 이기채한테서 자거나, 율촌댁 큰방에 할머

니 곁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아, 효원은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요

즘같이 집 안팎이 어수선한 판국에 아무리 말귀 모르는 어린 아들이라 하나, 수

군수군 낮은 말 주고받는 것이 행여라도 철재한테 옮겨질까, 적이 마음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별일은 없고?"

안서방네 들이닥치는 기색에서 이미 읽히는 바 있었지만, 효원은 짐짓 한숨을

늦춘다.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 두려는 것이리라. 또한 대청마루 건너서 큰방에

기척이 들릴까 내심 저어하는 조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반듯한 이마에는 벌써 푸른 긴장이 팽팽하게 어린다.눈빛도 새

파랗게 일어선다. 그리고 입시울을 단단히 마무려 안서방네를 지그시 건너다보

았다. 쏘아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에 서릿발이 돋는다.

젊은 새아씨 눈기운이 어이 저리 청암마님맹이신고.

이 총중에도 문득 한 가닥 스치는 느낌이 미덥고 유정하여 안서방네는 무릎

더 가까이 효원에게로 다가앉는다.

내 등에 업어 기른 애기 되렌님 금옥 같은 배필이신 새아씨가, 내 등에 업어

기른 우리 애기씨 작은 아씨 때미 이 무어 못 당헐 고초를 겪으시는고. 금과 옥

이 열 말이라도 다 못 채울 비단 치마 열두 폭에, 근심과 재난들만 태산 중첩

무거워라. 이 노릇을 어쩌먼 좋을꼬잉.

안서방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속삭이다시피 효원에게 오늘 새벽 겪은 일을 쳐음부터 낱

낱이 아뢰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 막 오류골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급박한

정경은 아주 소상히 일렀다.

효원은 미리 짚어 알고 있는 이야기 듣는 사람처럼, 서둘지도 재촉하지도 않

는 범상한 낯빛으로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안서방네 말을 다 듣더니, 덩어리진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 듣는 동안 내내 한 번도 쉬지않은 숨이 어둡게 막혔다

가 저절로 터지듯 토해지는 한숨인 것이, 겉으로는 태연한 척 꾸미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가 겨워서 구절구절 숨조차 쉴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알았네."

효원은 안서방네에게, 되었다, 손짓하였다. 그리고는

"기왕에 드러난 일은 드러난 일이려니와, 만일에 작은댁 어른들이나 수천샌님,

큰방마님이시라 할지라도 이리 된 연유 하문하시는 경우, 절대로 모르는 일이라

고 말씀드려야 하네. 공연히 새서방님 함자나 거멍굴 것 이름 들먹이지 말고. 아

주 참사가 날 것이니."

"예."

"지금 당한 일만 가지고도 회오리가 무서운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생사람들 오

장 찢어 피 토하는 일은 막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은 곧 내 가문이 찢기는 것이요, 가문이 찢기면 내 아들, 우리 철재가 찢

기는 것이다. 내 가슴이 찢기는 대신, 일평생 함봉하고 나 홀로 견디는 대신, 철

재를 이 몸으로 막아 주어야 한다.

나를 찢고 , 철재를 지켜야 한다.

심정만 같았으면, 콩심이한테 그 이야기 듣는 그 순간, 강실이도 강모도 공중

으로 쳐들어서 맞잡아 촤악, 다 찢어 버리고 싶었다. 가루가 되어 허공에 잔해를

흩뿌릴 때까지, 종이 찢듯 그림자까지.

그러다가 춘복이 말 들었을 때는,

"네가 그런 사람이었느냐."

능멸하기 전에, 왈칵, 두려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 강실이가 아이를 뱄다 하니.

그 두려움은 실체가 되어 효원을 덮쳐 누른다.

대관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꼬.

강실이는 효원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가엾다.

"도부꾼 황아장수 오는 날이 언제드라?"

효원은 혼자말처럼 물었다.

안서방네가 손가락을 깜작거리며 짚더니

"모렝게빈디요."

효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가 보라고 손짓으로 시늉하였다.

큰방에서 율촌댁 일어나는 기척이 부스럭부스럭 들리면서, 놋요강 뚜껑 챙그

르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까닭이었다.

어느결에 창호지 장지문이 파랗게 바래어 인광 돌아 날이 샌 것을 알리는데,

마당을 지르며 물지게 진 붙들이가 철걱거리고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싸악 싸악 싸악, 마당 쓰는 빗자루 소리가 귀를 쓸어 내린다.

간밤의 일 인간사 아무것도 모르는 정짓문 바라지는 삐그드득 빗장이 열이고,

무쇠 검은 솥뚜껑 밀어젖히는 둔중하고 실팍한 정그렁 소리에 이어, 쇠아아 물

붓는 소리, 그리고 솔가지 나무 부러뜨리는 투둑투둑 똑 소리 ,식었던 아궁이에

지피는 불땀이 주황으로 세차게 타오르는 후욱후욱 투명한 불길 소리. 달그락거

리는 그릇 소리들.

이것들이 서로 소런거리면서 소리끼리 부딪어 평화롭고 순결하게 깨어나는 새

벽은, 죄가 없어 얼마나 가벼우냐.

이기채의 사랑에서 카랑카랑 울린 기침 소리가 푸른 공기를 흔드는데, 철재가

선잠에서 깬 소리로 무어라 칭얼거리며 돌아눕는 모양이었다.

이만한 새벽과 아침을 맞이하기 이제는 어려워지려니. 미구에 곧.

효원은 밤새 엉긴 근심을 씻어 내듯 이마를 쓸어올려 머리까지 쓰다듬고는,

큰방으로 시어머니 아침 문안을 들어갔다.

효원을 힐끗 바라본 율촌댁의 표정이 삭이지 못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어 불

편하게 구겨진다.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예를 하고는 늘 그러했듯이 손바닥으로 아랫목 웃목 만져 보며 온기를 살피는

효원을 찬찬히 바라보는 율촌댁 눈살에 금이 패인다. 그런데도 문안이랍시고

들어온 며느리는 시어미 안색 살필 생각은 아니하고, 애꿎은 방바닥만 딴청부리

여 더듬고 있는 것이다.

저것이 일부러 내 얼굴을 피하는 것이냐, 어쩌냐.

싶어서 율촌댁은, 효원이 들으라고 잔기침을 해본다.

그러면서 그네는 또 그런 자신이 몹시 못마땅해진다.

이제는 그 어려운 시어머님도 작고하셨으니 자신 위에 더 어른이 안계시건만,

며느리한테 어젯밤 같은 일로 봉욕이라고나 해야 할 일을 느닷없이 당하고도,

당연히 나무랄 일 꿇어앉혀 준열하게 꾸중하는 대신, 며느리가 먼저 자신의 심

서를 헤아리고 살피어 사죄하기만 바라는 소심이, 울컥, 홧증으로 돋친다..

네가 대관절 뭐 잘헌 것 있다고, 뻗대하니 모가지 세우고 이 방에 들어와서

손바닥으로 방바닥만 쓸고 있는 것이냐. 시방.

크흐음.

기침에 가시가 걸린다.

"그래, 엊저녁 일은 네가 꼭 잘했느냐?"

드디어 율촌댁이 목에 걸린 가시를 뱉어 낸다.

효원은 얼른 손길을 거두고는, 어머니 말씀 그 어떤 책망이라고 다 옳으시니

달게 받겠다는 거동으로, 율촌댁 앞에 앉아 잠잠히 이마를 수그렸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아. 어디 저 천하에 불상것들이나 허는 짓을 네가 감

히 누구 앞에서. 그게 사람이 헐 짓이드냐? 패악질이지. 너 너희 종시매한테 무

슨 오랍의댁 유세헐 일 있었느냐? 설령 나는 모르는 찰원수 너희끼리 서로 진

일이 있다손 친들, 그런 일이 있을래도 있을 건덕지도 없었지마는, 원수는 원수

고 법도는 법도지, 아니 그래, 네 시에미 버티고 앉어 있고, 너희 시숙모님 창황

중에 놀란 가슴 안절부절 질정치 못하시는 머리맡에, 화적떼 난입도 아니고, 함

부로 뛰어들어서 네가 무슨 권한이 그리 세어, ㄴ은 어미가 혼절한 환자를 오밤

중에 둘러업고 쫓겨나게 몰아붙여? 몰아붙이기를. 너 어디 모질어서 사람 쓰겄

느냐?"

"죄송합니다."

"웬일로 네가 죄송헐 때가 다 있구나?"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미욱하고 생각이 짧았어요."

효원은 음성을 공순히 하며 수그린 이마를 더욱 수그린다.

"사람이 그러면 큰일난다, 큰일나. 일에 아무리 연유가 있고 절박할 때라도 순

서를 먼저 챙겨야지. 순서 뒤바뀌면 사람 노릇 거꾸로 허고 마는 법이야. 순서.

알었느냐? 네 평생에 다시 안 볼 사람이라도 그렇게는 못허고, 지나가는 걸인

대우도 그렇게는 헐 수 없는 것인데, 소의 시짜 붙은 네 부모 동기 숙질간에 그

게 어디 당키나 한 행위야? 민촌것도 그리는 안헌다. 내가 도대체 너희 시숙모

를 무슨 낯으로 대하며 네 종시매를 내가 어떻게 얼굴 들고 보겄냐,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어째 순순히 모두 다 잘못했다니, 너도 어제는 무슨 벼슬봉 겁기가 발동

을 해서, 본정신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허고, 나도 더 이상 추궁은 안허리라. 허

지마는 너희 시숙모님 마음 상한 것을 더 늦기 전에 풀어 드려야 할 것 아니냐.

이따만큼 네가 작은댁에 내려가서 종시매 문병도 허고, 가 뵈어라. 원 내참."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효원의 행동이었지만, 본인도 그 어느 때

보다 순순히 자책을 하고, 잘못했다, 비는 기색이 역력하여 율촌댁은 그쯤 하고

는 말을 접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댁에 내려갈 핑계를 얼른 찾지 못하던 효원이, 큰방에서

나오며 꾸중 들은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고는, 조급한 마음에 아침을 뜨

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오류골댁으로 내려갔다.

기표는 수천댁으로 다시 돌아간 모양인지, 집안이 괴괴할 정도로 인기척 없는

데, 댓돌 위에는 두 내외의 낡은 신발만 기운 없이 씰그러져 있었다.

"어서 오소."

바깥의 소리에 내다본 오류골댁이 불에 데인 것같이 놀라 뜬 목소리로 효원을

맞으며, 겁에 질린 낯색을 하였다.

"작은어머님. 어제는 노여우셨지요."

"아이고, 별소리를 다."

차라리 고맙네.

질부가 아니었더라면 그 순간을 어떻게 모면했을꼬. 마치 귀신이 미리 시켜

짚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에는 그러지 않던 사람이 앞뒤 경우 티끌만치도

차라리 않고 덮치어, 나가라고 쫓아낼 때는 참 그런 억장 무너지는 꼴이 없더니

마는... 이런 죽을 일을 당하기는 당하면서도, 어쨌든 어제 그 자리에서 온 식구

둘러앉아 대소가 환시리에 참경을 당한 것보다는, 그래도 제 식구끼리 앉어서

당한 것이 좀 낫었는가, 어쩠는가.

오류골댁은 입이 안 떨어져, 인사 치레 몇 마디조차 잇지 못하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네는 효원을 보는 순간 주르르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여,

어금니를 물었던 것이다.

그네는 지난 하룻밤이 이승과 저승을 거꾸로 엎어 되집은 것보다 더겨운 혼돈

이었고, 그 바람에 가슴이 깎이어 나간 이승의 절벽 낭떠러지 아찔하고 까마득

한 꼭대기에서, 순식간에 떠밀리어 끝도 없어 떨어져 내리는 공포를 가누기 어

려웠다. 손바닥에 칼날 쥔 사람이 칼자루 쥔 사람을 바라보듯이 애원과 두려움

에 범벅된 눈으로, 그네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닥쳐오고 있는 어둠 속의 그림자

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누군가, 누군가... 손을 벋어 부디 이 참혹한 정황

에서 자신들을 끄집어내 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빌고 있엇던 것이다.

"작은어머님, 장 담그셨는가요?"

"장이랄 거 무에 있어야지"

"어디 저 좀 보여 주시겄어요?"

"그건 무어허게?"

"보아 두면 다배워지지요."

아랫목에 죽은 사람 다 되어 누워 있는 강실이를 피하여, 효원은 오류골댁을

앞세우고 장독대로 나왔다.

"이렇게 생겼지 뭐."

장독아지 뚜껑을 열어 보이는 오류골댁한테 효원은 낮은 소리로 한마디, 한

마디씩, 그러나 멀리 돌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작은아씨 일은 서두를수록 좋겠습니다. 아직은 그래도 수습할 여지가 있으니

까요. 어머님도 모르시고."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오류골댁은 장독아지 뚜껑을 양손에 든 채로 덮을 염조차 하지 못한채, 그렇

다고 무슨 말을 하지도 못한 채 다만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저도 밤새도록 온갖 궁리를 다해 보았지만 묘안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

래서 걸리고 ,저런 일은 저래서 걸리고, 헌데 한 가지. 저희 친정 대실이 여기서

는 도경을 넘어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하는 것이어서 멀리 있지만, 멀리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희 안어른께서 평소에 다니시는 절에 외따른 암자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더러 몸이 아픈 사람이나 백일 불공 천일 불공 드리러 오는 보살 부

녀들이 묵곤 하는 모양이어요.

이 근처 남원 일대라면 아무래도 어느 절 어느 암자에 깊이 가서 계신다 해도

이목이 번다하니 눈에 뜨일까 걱정이고, 다른 군 다른 동네에 알아보려 해도 연

고 너무나 없으면, 오는 새벽 자진하려 했던 일이 또 생기지 말란 법 없지 않습

니까. 다행히 저희 친정의 연고 있는 것이면서 안어른이 잘 아는 절이오니, 사람

하나 딸려서 극진히 보살피라 이르면 우선 고비는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자네 안어른께는 도대체 무슨 면묵으로 이런 정황 그런 말씀을 사뢸 수가 있

단 말인가."

"성품이 관대 후덕하시니 흉허물 안허실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기로."

"여기서 만천하에 드러나 만인에게 욕을 당하시는 것보다는, 한 번 부끄러울

각오하시고 한 삶한테 흉잡힌다 하시면 될 것이어요."

"안될 일이지. 그쪽은 사가인데, 내가 이씨 문중 며느리로서, 자네 시숙모로서,

사람으로서 그리해서 안되는 일이야."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고,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그런 정황

이 될는지도 모르는데. 사람 살리려다 죽이는 길이 될는지도 모르는데.

오류골댁은 흉중이 착잡하여 얼른 말이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웬일인지 불길

한 생각조차 스쳐서 대답을 못한다.

"제 말씀대로 하시어요. 서두르셔야 합니다. 저는 도부꾼 황아장수 오는 대로,

비단 지고 댕기는 그 아낙, 작은어머님도 아시지요, 왜.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

습니다. 저의 안어른께 봉서 한 장 쓰고, 용채 조금 준비해 볼 테니, 작은아씨

기운차리도록 그간 미음이라도 자주 먹이시고는, 갈 길이 가깝지 않으니 당부

단단히 해 두서요."

효원이 오류골댁을 똑바로 정시한다.

눈빛으로 못을 박는 것이다.

아무리 손아래 질부요, 자기는 손위 시숙모라 해도 벌어진 일이 '죄'라서, 죄

지은 사람의 어미로 이미 몸을 세울 수 없게 된 오류골댁은, 효원의 말을 맞받

지 못하고 음성을 떨군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그래... "

"황아장수 아낙이 모레 온답니다. 온다는 날 으레 오는 사람이라 이번에도 어

김없을 거예요. 따로따로 나가서, 동구밖 어디로 미리 말을 맞취 놓고, 만나야지

요. 그런 것은 다시 제가 내려와 말씀 디리께요."

"사람들한테는 무어라고."

"작은아씨 본디 몸이 약한 것을 다 아는 일 아닌가요? 외갓댁에 잠시 정양 갔

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효원은 장독대의 독아지와 단지, 올망졸망한 뚜껑들을 열었다 닫았다 시늉하

면서 빈틈없이 소근소근 낮은 소리로 말을 해나갔다.

"모레, 모레예요. 작은어머님."

 

 

3. 발각

 

궤털 허옇게 곤두선 박달이 두 귀가 바싹 질린 두려움을 가까스로 견디느라고

쭝긋쭝긋 움죽거린다. 꿇고 앉은 무릎 위에 얹힌 그의 힘줄 불거진 손이 후들후

들 떨린다. 그 떨리는 것을 가누려고 저도 모르게 무릎을 움켜쥐니, 무릎까지 사

시나무마냥 떨리었다.

놀란 머리터럭이 불불불 갈기처럼 일어선 박달이의 낯빛은 노랗게 질리다 못

해 흙빛으로 잦아들었다.

고개를 푹 꺾어 떨어뜨린 그의 목덜미에 이기채의 대침 같은 시선이 날카롭게

꽂힌다.

"무슨 일이냐?"

큰사랑 목외 장지 위칸에 고꾸라지며 엎드린 박달이를, 이기채와 함께 쏘아보

던 기표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는 본디 성품도 그러했지만, 특히 아랫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 음성을 얼음을 씻어내리듯 냉엄하였다.

"저어... 저, 저."

바로 보고 앉지도 못하는 신분이라 모로 꺾어 앉은 매안 이씨 선산의 산지기

박달이는 간이 오그라붙는지, 입술까지 거멓게 말려들어가면서 말을 얼른 못 잇

는다.

마침 점심상을 보아 소반에 받쳐들고 사랑으로 나오던 계집종 키녜는, 사랑채

누마루 아래 서성거리는 안서방을 보고는

"애기되렌님 어디 지싱교? 진지 잡사얀디. 아까 콩심이가 업어 디리동만 안

뵈이네요."

하면서 이 상 받아 달라는 시늉을 한다.

안서방은 무엇인지 심상치 않은 낯색으로 손사래를 쳐 보이며, 조용히 하라,

눈짓으로 키녜 입을 막는다.

"손님 외겼소?"

소리 안 나게 마루에다 소반을 내려놓은 키녜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키가 건

드렁하니 커서 걸을 때마다 건들건들 흔들리는 것이, 앙바라지게 통통하고 작달

막한 돔발이와 곧잘 비교되어 웃음엣소리에 오르내리는 키녜는 찬비동자아치다.

이날 이때까지 언제 한 번 맛나게 된밥 자시는 일 없는 상전, 이기채였지만

청암부인 초종 치른 이후로 더더욱이나 식음을 멀리하니, 끼니 되어도, 간결한

몇 가지 소찬에 미음 아니면 기껏해야 묽은죽 한 대접 올리는 것이 전부라, 얼

핏 일이 쉬울 것 같지마는 그래서 오히려 더 까다로웠다.

오늘 점심도 형제분 겸상으로 차려내 왔으나, 기표는 밥이요, 이기채는 죽이었

는데, 그 미음이나 죽 쑤는 일은 키녜같이 늘 기명물에 손 담그고 그릇 씻으며,

아궁이에 불 때고, 큰방 건넌방 사랑채에 상 들고 나가는 것이 임무인 계집종으

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할 줄을 모르는데다가 솜씨가 없어서도

못하고, 정성이 모자라서도 안 되었다.

"고봉밥 뒤꽁치로 꽁꽁 눌러서 수북허니 꼬깔맹이로 먹어도 돌아스먼 배고픈

거인디, 우리 샌님께서는 허구헌 날 저렇게 죽 미음만 잡수시니, 무신 기운으로

이 큰 살림을 관장허실 거잉고오."

저러다가 여차 한 번 씨러지시먼 참말로 어쩔 거잉고오잉.

뒤엣말은 차마 발설하지 못한 채 속으로 쟁이면서, 안서방네는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이기채의 죽과 미음만은 언제나 손수 준비하는 효원의 곁에서, 침이 튈

까 조심되어 소리 없이 손을 도왔다.

"밥은 아무나 해도, 죽은 아무나 못 쑨다."

율촌댁은 일렀다.

건강한 사람은 별미반식으로, 밥에 질리면 때로 한 끼는 죽을 먹는 것이 입맛

에 도움이 되고, 노인 계신 집안에서는 자릿조반이라 하여 조반 대신 맛깔스러

운 흰죽을 올리기도 하며, 초례 갓 치른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새우고 나면 이

른 새벽에 잣죽이나 깨죽을 들여넣어 주는 것은 관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

에서도 초조반으로 죽을 아침 수라보다 먼저 드렸다.

밤새도록 잠을 잔 위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는데, 빈 속에 곡기를 주어 부드

럽고 매끄럽게 식욕을 일으키며, 몸을 달래 주니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참으로 요긴한 구황음식이어서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할 때 한줌

식량을 풀어서 한 솥 죽을 얻어내 주린 창자에 기아를 달래면서 실낱 같은 목숨

을 이어나가는, 서럽고 절실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또한 어린아이 이유식이며, 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병후 회복을 하고 있는 허

약한 사람에게 다시 없는 음식이 바로 죽이었다.

그리고, 죽은 상을 당하여 밥을 먹을 수 없도록 슬픔에 지친 이웃이나 친척에

게 쑤어 보냈다.

그런데 위가 실하지 못한 이기채는 환자가 아니면서도 질기고 된 음식을 극도

로 삼가니, 오직 보양의 방책이라면 비록 그 이름이 '죽'일지언정 갖가지 꾀를

내어, 곡류 육류 소채 어패 해물을 고루고루 섭취하도록 끓여 대는 수밖에 없었

다.

그가 아직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청암부인이 손바닥에 옹이가 박이도록 쌀을

씻어 죽을 쑤며, 여러 해 시병 봉양하였으니, 이제 죽이라면 웬만한 것은 어지간

히 가늠할 만큼, 맛에서나 솜씨에서나 남다르게 되었는데, 죽은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 갈무리하는 데서부터도 손이 많이 가고, 쑤는 과정 또한 아주 정성스러워

야만 했다.

거가대족 집안의 가주 종손이 상용 음식으로, 다른 것은 밀어내어 마다하고

다만 죽을 찾을 뿐이지라, 그것은 이미 '죽'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고, 그 마련

을 결코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무슨 죽 무슨 죽, 하여도 흰죽 쑤기가 제일 어려웠다.

"쌀만 싯쳐서 물 많이 붓고 폭폭 오래 끓이먼 되제, 흰죽이 머이 그리 에럽다

요?"

킨녜는 그렇게 말했다가 안서방네한테 한 소리를 들었다.

"아이, 왜 꼭 새아씨가 죽을 끓이신당가요잉? 정짓것들 다 두고?"

하던 말끝이었다.

"니년이 끓에 디레 봐라. 어디 샌님이 잡숫능가. 간저(어른 수저 높임말)도 안

대실 거이다. 죽이 그게 잘 끓일라면 공이 많이 들으가고도, 흰죽은 그 중에 쑤

기가 지일 에러운 거이다. 쌀 싯츨 때보톰 니께잇 것은 월렁쯩이 나서 건드렁건

드렁 궁뎅이가 공중에 떠 갖고 못히여."

"빡빡 문질러서 뜸물 쏟고 쫘악 싯쳐내먼 안되야요? 깨깟허게."

"저 바, 저 바. 저렁게 안된다고. 너 같으먼 인자 기껏 흰죽 쑨다고 싸래기를

바솨 놀 거이다아."

"어차피 죽인디요?"

"그게 그렁 게 아니여?"

"어매, 밥을 허고 말겄네."

"니가 머 밥은 얼매나 잘허냐?"

"나랏님 수랏상을 올릴란디?"

"아니 수랏상."

안서방네는 키녜 턱밑에다 상 받쳐 밀어올리는 시늉으로 두 손을 후욱 치켜

들이댔다. 키녜는 크큭 웃으며 얼굴을 비켜 꼬았다.

"그렁게 나는 못허제에."

"아냐? 그걸 니가 알어?"

"봉사도 날짜 가는 속은 알도라고. 내가 머 그것도 모르께미?"

흰죽 쑤는 쌀을 씻으려면 이남박보다 질그릇 옹배기가 좋았다.

옹배기에 대고 쌀을 문질러 씻을 때, 손에 너무 힘을 주면 부서지기 쉽고, 힘

을 안 주면 잘 씻기지 않으며, 대강 씻으면 나중에 죽이 거칠었다. 그 조그맣고

흰 쌀날 한 톨 한 톨이 입고 있는 겉껍질 엷은 옷만을 홀랑 벗겨낸 속쌀이, 그

몸을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깎인 데도 없이 연한 살을 부드럽게 드러내며 오돌

오돌 살아 있게 씻어내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죽에서 진미

가 고소하게 우러나고, 맛에 힘이 있으며, 먹고 난 다음에도 쌀의 진기와 속기운

이 든든하게 남았다.

죽이라고 해서 싸래기로 쑤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곱게닦아낸 쌀을 대여섯 시간 넉넉히 물에 불려서, 눈에 안보여 그러

해 볼 수만 있다면, 그 쌀 한 톨 한 톨의 단단한 켜가 뭉쳐 있던 힘을 풀고 저

절로 벌어져, 수백 수천의 흰 꽃잎 일어나듯 벙글어 난만해지도록, 그 켜켜가 벌

어져 갈피마다 숨을 쉬며 너울어지도록 두었다가 , 밥을 지을 때보다 대여섯 배

정도의 물을 더 부어, 반투명으로 기름이 자르르 돌며 잘 퍼질 때까지 쑤는 흰죽.

"제대로 쑨 흰죽은 고기보다 살로 간다."

고 하였다.

행자판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대접 흰 달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점 숟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고 한술 뜨면, 그 담

백하고도 은근하며 다숩고 순결한 기름기라니.

입안에 들면서 벌써 음식이라는 이질감 없이 살 속으로 편안히 스미는 것이

바로 흰죽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유순하고 여리면서도 자애 모성을 품고

있는 음식이어서, 뱃속에 들어가 오장과 쉽게 동화되고, 상한 속과 할킨 속, 무

력하고 깎인 속을 쓰다듬어 다스려 준다.

"ㅈ은 것 뜬 기운으로는 흰죽 못 쑨다."

청암부인은 효원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도 네 손이 제법이구나. 죽이랍시고 풀대죽을 쑤어오면 내 어쩔꼬 했더니

마는 .자알 먹었다."

이기채의 죽 요리를 하다가도 효원은 문득문득

"잘 먹었다."

하던 청암부인 시할머니 어조가 들리는 듯 느껴지곤 하였다.

조손으로 만나서 내가 이생에 할머님한테 드린 것이라고는 오직 죽 몇 그릇뿐

이언만, 할머님은 나한테 너무 큰 세상을 넘겨 주고 가시었다.

그렇게 망연히 생각기도 하였다.

율촌댁과 효원은 일년 내내 사시사철 가지가지 맛깔스럽고 보 되는 죽거리를

장만하는 데 각별히 마음을 기울였다.

검은 깨 흑임자, 흰깨, 호두, 은행, 대추, 밤과, 잣, 그리고 기침 변비에 약으로

쓰는 살구씨 속알맹이 행인 같은 것을 곱게 갈아서 쌀가루를 섞어 쑤는 열매죽

이며, 청대콩, 누런콩, 팥, 녹두를 삶아서 체에 내리어 쌀을 넣고 쑤는 콩죽 종류,

그리고 보리나 폿보리를 갈아서 쌀과 함께 쑤는 죽.

또 생굴이나 전복, 홍합, 조개, 피문어 같은 어패류를 폭 고아 쌀가루나 쌀을

놓고 끓이는 죽과, 붕어, 잉어 죽.

거멍굴 근심바우 화덕같이 달구어진 무릎에다 바짝 널어 말렸다가, 여러 조각

으로 두드려 깬 다음 다시 몽글게 바수어 가루 낸 쇠고기 가루를, 보얀 쌀가루

에 섞어 고기죽에 쓰도록, 백정 택주의 아낙 달금이네가 매안으로 이고 오는 것

은 때 맞추어 걸러 본 일이 없었고, ㄲ이나 닭죽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뿐이랴. 율무 가루, 연뿌리 가루, 가시연밥의 녹말, 마름 녹말에 칡녹말, 그리

고 마의 가루, 이런 각종 열매들을 갈아 만든 가루들은 맛도 맛이었지만 기혈을

돕는 약효까지 있어, 만드는 번거로움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특별히 인삼을 넣고 쑨 인삼죽에, 도토리죽, 아욱죽, 호박죽, 콩나물

죽들도 시절따라 별미로 준비하였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중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가공하여 죽으

로 쑬 수 있었고, 그것들은 이기채의 부실한 위를 그나마 아슬아슬 달래며 이날

까지 무사히 신체 보존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산해진미 처쟁이면 멋 헐 거이냐? 먹도 못헌디. 살어 생전에는 삼시 세 끼

밥 한 그륵을 못 먹을람서, 곳간에다가는 오뉴월 염천에 갈비짝이 썩어나게 쌓

아 놓고, 나락섬은 노적봉 꼭대기보돔 더 높으댄히 절벽맹이로 꼬깔을 지어 놓

고, 죄로 가제, 죄로 가아. 이런 사람은 없어서나 못 먹제, 그런 사람은 체다보고

도 못 먹능게. 그게 바로 죄닦음이여. 달리 그러잖에."

옹구네는 꽁보리밥 새까만 봉우리에 귀닳아진 달챙이 숟가락을 푹꽂아 수북히

떠올린 위에다, 잘 익은 열무김치 한 가닥을 돌돌 감아 얹어 가지고 아가리를

짝 벌리어 한 입에 넣으며 말했었다.

"아이구우 맛있어. 맛있어어. 야야, 옹구야. 너 물 말어서 먹을래? 아나, 물. 앗

따, 참말로 시여언허다잉. 그저 오뉴월 복더우에 개쌔바닥 늘어져도 요렇게 찬

시얌물에다가 보리밥 뚝뚝 깨서 말어 먹으먼 그거이 살로 가제, 그거이 살로 가.

죽이 다머이여. 죽이. 하이고오, 기운 없어라, 천하 없는 인삼 녹용 죽이라도 죽

먹고는 오래 못 사능 거이다. 뱃심이 있어야제?"

그것은 지난 여름 미영밭에 김매는 잘, 놉일하던 중간에 아낙들이 모두 둘러

앉아 새참 먹는 자리였다. 평순네는 아예 아무 대꾸도 안하고, 공배네는 못마땅

해서 결국 한 마디 거들었다. 거기에는 핀잔 겸 말문을 막으려는 심산이 섞여

있었다.

"아이고, 이노무 인생아. 넘의 말 아니먼 헐말이 없냐? 어찌 그리 소가지라고

꼭 심통불통 꾸보랑통인고. 앞남산 밤대추는 아그대 다그대 열렸다드니, 옹구네

머리통 속에는 원에서 머이 어쩡고오허는 생각만 아그대 다그대 열렸제? 잉? 무

거서 어쩐디야? 쏟아지겄네. 그것 무거서 앞으로 꼬꾸라져 코 깨져잉."

"마당 터지께미 솔뿌랭이 걱정허요?"

"건 또 무신 소리여?"

"아 늙으먼 잠도 없다는디 신새복에 인나 앉어서 촛대맹이로 우두거니 멋 헐

라요? 그 말이나 생각허제. 되작되작."

"내가 되로 주고 말로 받제. 무신 이문을 봐? 저 주딩어서 먼 말 나올지 암서

도 꼭 이런당게."

공배네는 어이가 없어 평순네를 바라보며 웃고 말았다.

물정 모르는 옹구는 어른들 틈새에서 보리밥 한 볼테기 얻어먹고는 씩 입시울

을 닦고 괴춤을 추기며 일어섰다.

"어른 손님보둠 빨개벗은 손님이 더 무섭다고 안히여? 애들 눈이 그만치 더

무섭고, 애들 말이 또 그만치 더 무섭다는 거인디, 아 옹구라도 속없이 무신 소

리 어디 가서 욍기먼 옹구네 베락 맞고, 무단히 우리도 애민놈 저테 베락 맞능

게에. 조심히여, 지발 덕분에 좀."

공배네는 그래도 그 말만은 옹구네한테 우겨박았다.

"글 안해도 매안에 이씨 집안 잠정네들 대감이고 샌님이고 수 못허는 것 세상

이 다 아는디, 저렇게 멕기 존 죽이라고 주야장천 죽만 먹음서 얼매나 오래 살

수 있겄소잉? 사람 뱃속이랑 거이 요손이나 말허고 똑같애서, 일을 해야 굉이

백이고 굳은살 볼가져서 심도 생기는 거인디잉, 저렇게 보드란 것마안 보드란

것만 챗어 먹으니, 나 암만해도 율촌샌님 얼매 못 가제 싶우대?"

하는 통에 흠칫 놀라 대꾸한 말이었다.

"자식 떄미 속상헐 일 그냥반 참 마않겄드라고요, 속상허먼 명 ㄲ여."

"옹통져라. 속상헌 거 알았으먼 뒷공론은 말어야여."

"상놈이 오래 살제. 두고 뵈겨. 나는 인자 쉽게 안 죽을 거잉게. 꽁보리 밥도

감지덕지, 칡넝쿨을 통째로 생케도 돌아스먼 배고픈 사램잉게로."

"찔기네."

"찔게야 오래 살제. 안 그러요? 잘 전디고."

"처먹은 기운 주둥팽이로 다 올라오능게비다. 아깝도 안헝가?"

"노적에 불지르고 튀밥을 줏어 먹어도 내 재미여."

"오냐, 그래. 많이 줏어라, 많이 줏어. 대그빡이야 꼬실라지든지 말든지.

농사 헛짓고 동낭치가 되든지 말든지."

"가진 놈이 겁도 나제, 머, 서 발 장대 휘둘러야 걸리는 게 없는대, 세상 천지

에 머이 무서서 걱젱이여? 걱젱이. 내가아."

"아 왜 없어? 옹구네 목숨이 있고, 몸뎅이가 있고, 마음이 있고, 인생이 있는

디. 거그다가 자식끄장 매달고 있음서. 그보돔 큰 거 머, 멋갖꼬 잡어서 그리여?"

"호성암에 댕게왔소? 부체님 말씀이네."

"온 세상이 다 있어도 나 없으먼 쇠용없고, 내가 있으먼, 내 인생이 바로 온

세상이여 . 가진 것 없다고 넘의 것 욕심 내지 말고, 욕심 내다 헛발 딛지 말어.

인생살이 외줄타기 목숨은 한 가닥인디, 외나무다리 건너가다 뒤퉁그러져 그 잘

난 뼉다구 박살나까 싶응게."

못 다 맬 밭 다 맬라다가

금봉채를 잃고 간다아

황아장사 다 죽었냐

금봉채는 내 사 줌세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오

월출동녘에 달 돋아오네

서 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크음 남았구나

내사 좋네 내사 좋오아아

총각 낭군이 내사나 좋네에

말을 타고 꽃 속에 노니

말끝마동 향내가 나네

청강녹수 원아앙새애야아

어디를 갈라고

그리 슬피 울고 가느냐

너는 뉘기며 나는 뉘긴가아

성산땅에 조자룡이

청사초롱에 불 밝혀 들고

임의 방으로 놀러나 가세에

저 산 너머 임을 두고

밤길 걸키 난가암허다

땟깨칼을 품에다 품고오

속옷 가래 풀고서 가안다아

산천 초목 불질러 놓고

진주 남강 물길러 가안다아

얼사 좋다 내 사랑아

임의 방으로 놀러나 가아세에

날 오란다 날 오란다네

어야 어허야아

무엇 하자고 날 오라든가

막 재진 차조밥 새우젓 놓고

오호헤야 들들래기오

혼자 먹기가 심심타고서

둘이 먹자고오 날 오란다네에

어헐사 저리시고나아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어

공배네 핀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을 매면서 늘어지게 한판 가락을 뽑는 옹

구네 뒤꼭지에 대고, 공배네는 까뀌눈을 박았다.

저노무 예펜네, 저것.

우멍헌 지 ㅅ이 있잉게 꼭 허는 소리마동.

빌어처먹을 년.

그 옹구네가 참 그네의 노랫가락 문자마따나 총각낭군 임의 방으로 놀러나 가

서, 차조밥을 먹었는지 새우젓을 먹었는지 그까짓 것 이제는 궁금할 것도 없어

서 따지고 싶지도 않았지만, 요사이 바짝 하고 다니는 뽄새가 수상쩍어, 공배네

는 안 보는 척하면서도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지난 대보름 달맞이 이후로 옹구네가 춘복이와 수군거리거나 스치는 품이 기

금까지와는 무엇인가가 달랐던 것이다.

"춘복이란 놈이 뭐이 어쩌고 어째?"

이기채의 놋쇠 쪼개는 고함 소리가 벽력같이 터져 나왔다. ' 사랑채 누마루에

점심상 소반을 내려놓은채, 들이지도 못하고 물리지도 못하면서 이만큼 토방아

래 쪼그리고 앉아 있던 키녜가 소스라쳐, 뎅그만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훌떡

일어나 섰다.

아까 박달이가 황망히 튀어들어갈 때부터 사랑 큰방 방안의 동정을 살피면서

토방에서 서성거리던 안서방도 앞발굽으로 꼰지를 딛으며 소리없이 놀란 기색을

누르고는,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박달이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상전이 묻는 말씀에 누구 앞이라

고 대답을 머뭇거릴 수는 없을 터인데, 바깥에까지는 안 들리는 것이 아마 속으

로 기어들어가게 작은 소리로 우물거리는 것 같았다.

박달이는 아까부터 혼겁을 하여 이미 얼이 반이나 빠져 나간 듯, 앞 뒤 서로

토막토막 잘린 말을 뒤섞어 더듬거리고 있었다.

"네 이놈, 이 주리를 틀 놈. 네가 정녕 죽고 싶으냐? 어서 소상히 이르지를 못

허겠느냐."

"지가 그날, 보름날 오밤중에 춘복이란 놈 맞닥디리기 전끄장은 맹세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샌님, 그런디 지 중정에도 참 요상은 요상허다 했어라우. 달밤

에 성묘라니 싶어서요."

"네가 그날 이전에는, 언제 산소를 돌아보았는데?"

"열낟날, 보름 쇠기 전에 저어 욱에 도선산부텀 한 위 한 위 다뵈었지요. 그때

는 참말로 암시랑토 안했는디요잉. 마님 산소는 더더욱이나 이놈이 꼽꼽허게 잘

살펴뵈었는디... "

그것은 그랬다.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땅을 파고 쓴 묘는, 속으로 삭풍이 스

며 봉분이 버슬버슬 부스러지기 쉽고 뗏장도 착근하기가 어려워서 뚝똑 떨어져

나가기 십상인지라, 박달이는 각별히 청암부인 새무덤을 바늘눈으로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아무런 잘못도 뜨이지 않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오늘 아침 느지막이 시래기죽 한 대접을 후루룩 둘러마시고는, 작대기 하나

챙겨들고 휘이 묘역을 한 바퀴 둘러보러 나갔다가, 청암부인의 묘 한쪽 귀퉁이

에서 그만 청천 하늘에 날벼락 맞을 일을 발견하고만 것이었다.

만동이와 백단이의 솜씨가 아무리 귀신을 빰치고 속여 먹을 수 있다하더라도,

산지기로 대를 물린 박달이 눈은 속일 수가 없었던가. 봉본에 덮어씌운 뗏장의

아랫부분 한쪽이 수상하게 다른 빛깔로 누리끼리 시들어져, 한 번 뜯어냈다 붙

인 자국이 역력했으니, 그것은 마치 밥보자기만한 떼를 따로 갖다 나중에 꿰매

얹은 것처럼 보였다.

모골이 송연해진 박달이는 등줄기에 찬 소름 훑어내리는 손을 후루르 털어내

며, 우선 무덤에 짐승 지나간 자국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늑대나 여우나 두더지가 어지럽힌 흔적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그래서 얼릉 산소에 뗏장을 살째기 건드러봉게 뿌랭이가 떠서 그거이 기양

시루떡맹이로 일어나 부러요. 그 엎엣것은 그새 벌세 착근을 웬만치나 해 놔서

뽑히는 힘이 달부고요."

이기채는 하도 놀랍고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망연자실, 박달이 주둥이만 놀리

는 대로 바라볼 뿐, 호령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거이 대관절 무신 일잉가. 사람 손 탄 거이 분명헌디, 머어 와서 이런 기가

맥힌 짓을 했이꼬."

손이 덜덜 떨린 박달이가 뗏장 들어낸 ㅎ자리를 조심조심 더듬어보니, 헐었다

다시 메운 감촉이 확실하였다.

도둑놈이 왔다 갔구나.

이런 쳐쥑일 놈.

순간 박달이는 뇌리에 펀득 떠오르는 춘복이 낯바닥을 짓이기며, 그러먼 그렇

제. 니께잇 놈이 머 어쩌고 어쩌?

내가 언지부텀 여그 한 번 꼭 와서 참배 한 번 해야겄다, 속으로만 벨르고 벨

렀다고? 머? 나느 어매도 아배도 모르는 천하 불상놈이라 어디 부모 묏동이라고

찾어가서 엎어져 절해 볼 만헌 디도 없고? 그거이 그렇게 늘 서럽드만요오?

에라이, 배은망덕허고 추접시런 놈아.

나같은 놈이야 나 내지른 어매 아배 덕이라고는 머리크락만치도 본 일 없는

디. 그래도 요만치라도 한말은 허게 큰 것은 다 매안 문중 덕분아닝교오? 허이

구우, 너 구변 좋다이? 어디서 그렇게 천연시럽게 착착 갱기게 배워 갖꼬, 눈구

녁 깜박도 안허고, 이 박달이를 쉭여먹어? 어림없다, 어림없어. 내가 참 그래도

아조 죽든 안헐라고 그날 너를 정통으로 봐부렀제. 안 그랬으먼 이 도적놈아, 너

때미 내가 죄도 없이 생죽음헐 뻔했다. 응? 이런 찢어 쥑일 놈.

박달이는 춘복이가 감쪽같이 둘러붙이던 것을 되짚으며 씨근씨근 분을 못 이

겼다.

"작년 시안 동짓달에 그 마님 돌아가시고는, 나 참, 부모 잃은 설움은 안 저꺼

봤잉게 모리겄고, 내 그렇게 설운 일, 살다가 첨이요. 그렇게도 허퉁허고 허망헙

디다."

하면서, 살아 생전에는 언감생심 한 번도 표시해 볼 수 없었던 충정을, 대보름밤

달빛 아래 절 한 자리 올리는 것으로 보은 분향을 대신하려 했다는 춘복이 말이

의심쩍게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차라리, 거칠게만 보았던 춘복이한테 저런 진정

도 있었던가, 고개를 끄덕이게까지 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되레, 고양이보고 생

선 잘 있냐고 물은 꼴이지,

"산에 벨일 없제?"

물었던 것이다.

"달이 참 좋습니다."

춘복이는 그렇게 말하였다.

"대체나 달 좋그만."

박달이가 춘복이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에라이 썩을 놈, 죽어라, 죽어. 이름값도 못허고 박달방맹이가 도적놈허고 짜

란히 서서, 막 도적질허고 낼오는 놈 때레잡든 못허고 달타령을 했었다니. 아니

근디 이 일을 어쩐당 거이냐. 대관절.

황급히 정신을 추리고 뗏장을 대강 덮은 박달이는 얼른 발걸음을 떼지 못하면

서 골똘히 궁리를 하고 또 하였다.

그는 춘복이가 청암부인 무덤을 도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직접 춘복이란 놈을 쫓어가서 볼문곡직 내놓으라고 덜미 잡으멈 지놈이

잘못했다고 허겄제? 그러면 도적놈은 잡고 나는 꾸중을 면헐 것 아닝가. 만일에

이 사단이 원뜸에 샌님한테 알려지먼, 산지기 너멋 허고 있었냐고. 대박에 나도

덕석몰이 당헐 거인디. 내 책임잉게. 아이고, 이게 어지간헌 일이어야제.

그랬다가, 그럴 수는 없다고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춘복이가 도독질헌 걸 내놨다 치자. 그러먼 그 물건을 내가 어쩔 거이여? 어

뜨케 간수를 허며 처리를 해야능 거이여?

안될 일이었다.

만일에 춘복이가 순순히 자백을 하여도 그 뒷감당을 박달이는 해낼 수 없었

다. 또한 호된 꾸중을 면할 길도 없었다.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는 거이 불을 보디끼 훤훤 일인디 멀 망설여? 맞을 매

는 얼은 가서 맞는 거이 낫제. 암만 그렇다고 나를 쥑이기야 허실라고? 죽을 것

아니먼 매맞고 마는 거이 제일 낫다. 나는 매만 맞으멈 됭게. 매맞어 불먼, 그

담 일은 대가리 터져도 나는 몰라도 됭게.

그러고는 단걸음에 매안으로 내달려온 박달이였다.

"이런, 모가지를 삼등으로 쳐죽일 놈 같으니라고, 춘복이란 놈을 당장에 잡어

오너라.지금 당장, 당자앙."

이기채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샛노랗게 질려서 설렁줄을 흔들며 발을 굴

렀다. 그리고 대들보가 쩌릉쩌릉 울리게 호령을 하였다.

기표는 안서방한테 덕석을 내오라고 잘라 말했다.

"내사 고금에 없는 불효자식이라 어머니를 산소에 뫼신 지 몇 날 되지도 않아

서 유택을 소란스럽게 해 드리고, 더러운 때 타게 해 드렸으니, 상당했다고 슬퍼

애곡하는 이 꼴이 가증스럽기 그지 없네그려. 허허어,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대

관절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그렇지 않아도 부모 잃은 죄인이라 하늘

보기 부끄러운데, 이런 괴악한 일이 겹치다니. 내가 무슨 낯을 들고 어머니를 뵈

올꼬."

순식간에 사랑마당에는 소동이 나서, 안팎 노보과 머슴 호제들이 대소가로 줄

달음을 치고, 이기채는 사랑 큰방으로 들어와 기표를 마주하고 허공을 쳐다보며

혼자말로 탄식을 터뜨렸다.

"도적이 든 것뿐이올시다. 도적은 잡으면 되고."

"그게 어디 예사 도적인가."

"도적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훔칠 것만 있으면 가고 못 가는 데가 없는

것이 그것들 아닙니까?"

"아무리 그렇다기로소니, 다른 놈도 아니고, 핏덩이 때부터 내 집 밥 얻어먹고

연명허는 놈이 은혜도 모르고,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고.

"주인 뒤꿈치 무는 개가 어디 한두 마리여야지요. 그놈도 그런 놈 중에 하나일

뿐, 그까짓 것한테 사람 대하듯 심정 두고 대거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소 육축

같은 종자들인즉, 치죄만 엄혹하게 하면 되는 게지요."

"엄혹?"

"제가 전에 그러지 않았어요? 춘복이란 놈, 그놈 눈썹이 칼눈썹이라, 검미 첨

도미여서 성질이 사납고 포악한데다가, 성급허고, 또 고집까지 있을 거라고. 뿐

아니라 눈썹 꽁지에 회오리 가마까지 터억 있어 놔서 그놈이 반골 기질이 강할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왜."

이기채도 그 말은 생각이 났다.

그때 기표는

"뺨맞고 잘못했단 말 들으면 무엇합니까. 당헌 다음에 덕석말이 한다해도, 한

번 당해 버린 일은 물린 수 없는 것. 저런 놈한테 무단히 방심했다 허 찔리지

말고 미리 단속하셔야 헐 겁니다."

하고 했었는데, 이렇게 당할 줄이야.

이기채는 분노로 와들와들 온몸이 떨리면서 자꾸만 속에서 식은 땀이 났다.

화기가 치솟아 불길이 뻗치는 것이 아니라 웬일인지 겉으로는 뇌성을 치게 호

령 소리를 지르지만, 추운 사람처럼 오한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일이 있는게야?"

동계어른 문장 이헌의가 흰 수염이 성성하게 일어선 채로 들어온다. 노복의

전갈을 받고 급히 나선 걸음이라 숨이 차는데도, 고를 겨를이 없는 물음이다.

이헌의의 뒤를 좇아 기응이 핼쓱한 얼굴로 나타났다. 누렇게 뜨다 못해 질린

자리는 푸릿푸릿 죽은 살같이 반점이 돋아난 기응의 얼굴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하였다. 낯색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백지장같이 바래고 마른 입술이며 쑥 들

어가 핏발진 눈들이 어제 보던 기응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마를 찧을 상처 또

한 싯붉었으니.

"자네 어디 안 좋은가?"

이헌의는 종가의 일을 잠시 잊은 사람처럼, 유심히 기응의 안색과 형상을 살

피면서 의아한 얼굴로 근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니라니. 사람이 저렇게 변색이 되고 축이 날 때는 원인이 있지. 어찌 아니

야? 무슨 일이 있어?"

"그저 요새 조끔 보대낀다 싶드니마는... 괜찮습니다."

기응은 이헌의의 시선을 피하여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기표는 기응을 마주

보지 않으려고 턱을 들어 서로 빗기며 차 오른다.

"샌님, 춘복이 잡어 왔는디요."

사랑마당에서 우세두세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머슴이 고한다. 이 말

이 신호가 되어 겹문 영창을 탕 열어제친 이기채가 누마루로 나갔다. 그리고 방

안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의 좌우로 따라 나섰다.

사랑마당에서 올려다보는 그들은 머리꼭대기보다 더 아득히 놓은 곳에서 춘복

이를 내려다보았고, 마루에 선 상전 이기채의 발은 흡사 공중을 밟고 또 있는

듯 보였다. 그만큼 사랑채는 높았다. 장정의 키보다 더 높이 축대를 쌓아 올려

그 축대 위에 사랑채를 우뚝, 그러면서도 날아가게 세운 때문이었다. 사랑채는

서슬과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사랑마당에서 그 사랑채 축대로 오르는 화강암 돌계단에 쇠끝 같은 겨울 햇빛

이 날카롭게 찍힌다.

축대 아래 마당 가운데 깔린 덕석의 복판에 춘복이가 잡혀 와, 흩어진 더벅머

리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네 이노오옴."

이기채의 움성이 저 배 밑바닥 오장의 창자를 쥐어 움킨다.

분노로 뒤엉킨 단말마가 중치에 콱 뭉치면서 숨을 막아 버린 듯, 그의 음성은

치솟다가 끊긴다. 대신 얼굴이 질린다. 그 모습은 사람을 위압하여, 몰매를 치는

것보다 더 두렵게 한다.

"네놈이 한 일을 네 주둥이로 낱낱이 말해 보아라."

이기채는 춘복이 정수리를 뽀개 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덕석가에 저만치 웅게중게 둘러선 사람들이 끽소리도 없이 숨죽이고 춘복이

뒤꼭지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침조차 삼키지 않았다.

"네 이 천벌을 받을 놈. 말 못하겠느냐."

이기채가 채자 삼차 다그치는데도 춘복이는 입이 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

이기채와 춘복이 사이게 긴장이 차 오르며 숨을 막는다.

춘복이가 붙들려 왔다는 말에, 사색이 되어 기함을 한 것은 효원과 안서방네

였다.

"아이고매, 새아씨. 이 일을 어쩌먼 좋당가요. 시방 사랑마당에 춘복이란놈 끄

집어다 노혹 덕석몰이를 헐랑게빈디요, 어매에, 저놈이 어뜨케 잽혜 왔이까요잉?

무신 일로?"

이 사단의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강실이의 비밀을 드

디어 사랑에서도 알게 되셨는가, 앞이 그만 캄캄하였다.

"으아아악."

퍽, 퍽, 퍽, 소리가 나면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터진다. 이미 춘복이

를 덕석에 말아 몽둥이로 몰매를 내리치는 모양이었다. 안서방네는 그매가 자기

어깨로, 등판으로, 정수리로 떨어지는 것만 같아 아찔아찔, 몸을 동그랗게 굼벵

이 감듯 오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사랑마당은 안마당 건넌방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더욱 공포가 컸다.

"저놈이 못 전디고 입을 여는 날에는 인자 무신 일이 벌어지까요... 그런디 여

까지 잽헤 왔이먼 입 안 열고는 또 못 배길 거인디요."

죽제. 입 안 열먼 니가 죽어얄 거이다.

원에 사랑 샌님이 누구신디 니 입 하나를 못 열으시겄냐, 허나, 춘복아, 니가

입을 열먼 우리 작은아씨 돌아가신다. 불쌍허신 우리 애기씨 돌아가신다. 그러니

어쩌끄나, 어쩌먼 좋으끄나.

그런디, 너는 입을 열어도 살기는 에러울 거이다.

니가 저질른 일이 상놈으로서 양반의 작은아씨를 겁도 없이 겁탈했잉게. 목숨

이 열 개라도 죽을 일 아니겄냐. 만일에 발설허먼 너는 죽어.

말을 나해도 죽고, 해도 죽고, 니 신세도 가련헌 신세다만, 우리 작은아씨 니

가 좀 살려 도라. 옹구네 말대로, 니가 그렇게도 오류골 작은아씨를 사모 흠앙했

이먼, 덕 한 번 베풀어라. 니가 니 생전에 작은아씨한케 멀 해 디리고 잡어도 해

디릴 수 있는 것 어디 있겄냐? 가진 것 없어서 설운 니가 제발 준 일 적선에 큰

덕 한 번 베풀어라. 베풀어디려어.

암말도 말어잉? 맞어 죽드라도 너는 모른다 허고, 죽으먼 죽었지 절대로 그

일은 말허지 말어라잉? 머리크락을 비여서 짚신을 삼어 은혜를 갚을 거잉게. 내

꼭 갚을 거잉게.

부디, 부디 암말도 말그라이. 잉?

안서방네는 내리치는 몽둥이 몰매질 소리에 흠칫흠칫 몸을 죄면서도, 그때마

다 호성암 종소리 울리는 것에 맞추어 부처님한테 절하듯이, 매질 소리에 마음

을 문지르며 빌고 있었다.

참 천벌을 받을 일이었지만, 그 몽둥이 소리가 들리면 그래도 그 순간만은 안

심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고, 아직은 말 안했구나.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이기채의 고함 소리는 폐장을 쥐어짜 흩뿌리는

것 같던 비통 대신, 끓어오르는 격노를 억누를 수 없는 분기가 탱천해져서 안채

마룻대에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님께서 점심 진지도 안 자셨는데, 저리 노여우시니 혹 현기증으로 어지러

우실까 걱정이 되는데요."

효원은 안채 대청마루에 나와 선 율촌댁한테 근심스럽게 말한다.

"대체 무슨 일로 저러신다더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끔찍한 일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희 어르신께서, 상중

에 계신 큰상점(상제)으로서, 저렇게 핏소리 낭자하게 몰래를 치실 리 있겠느냐.

아마 사람으로는 차마 못할 흉악한 일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으리라."

율촌댁의 말에 효원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때 그네의 뇌리를 친 것은, 이 일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강실이의 얼굴과 강모, 춘복이 얼굴이 겹치며 뒤섞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그네를 사로잡은 것은 철재의 얼굴이었다. 이 가문, 이 집안의 증손인 철

재가 장성하여, 이 더러운 사건의 굴레와 족쇄 때문에 낯을 못 들고, 어디 가서

든지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정경이 가슴을 때린 것이다.

자식에게 누를 끼치는 부모의 조상.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경우가 어디 있으랴.

제발 조용히... 조용히.

효원이 저도 모르게 주문을 왼다.

일을 키우지 마소서, 아버님.

"네 이노옴."

사랑에서 고함 호령이 다시 울려 온다.

율촌댁과 효원은 말을 멈추고 소리에 눈을 쏟으며 귀를 기울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 산지기 박달이가 선산에서 내려오는 너를 두 눈으로 봤다

는데. 보기만 해? 네 놈 주동이로도 산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면서? 그런데 산

소에는 손을 안 댔다면, 누가 그 말을 곧이듣겠느냐, 이실직고하면 죽는 것만은

면하려니와, 끝끝내 버틴다면 맞다가 명줄 끊어지는 것을 원망 말어라. 산소에

손댄 놈이 너지?"

율촌댁이 놀란 눈으로 효원을 본다.

"산소라니?"

"이제 보니, 아까 참에 산지기가 사랑에 뵈오러 왔더랍니다.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효원은 안서방네를 불러, 안서방 잠깐 안채로 왔다가라, 이르도록 하고는 동정

을 알아보려고 사랑채로 가는 내외담 모퉁이에 모둠발로 다가가 선다. 이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런 일 없습니다 "

"저놈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 아직도 말 못하겠느냐?"

"그런 일 없습니다. "

맷집 좋고 오기 많은 춘복이도 이제는 다 맞아 지쳤는지 그 말만을 겨우 밀어

낼 뿐, 바스락 하는 기척도 없었다.

"아니, 이게 무엇이냐."

대문간에 우루룩 발자국 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몰매 소리가 잠시 그치고는 아

무 수리도 들리지 않다가, 이기채가 경악하는 음성이 터졌다.

아까 춘복이가 끌려올 때, 박달이는 일꾼 두 사람을 데리고 황망히 뜬걸음을

놓아 청암부인 산소를 자세히 살펴보러 갔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 천만 뜻밖에도 웬 뼈다귀 주머니를 발견했으니, 박달이는

그만 숨이 질려 혼비백산 뒤로 나가떨어질 뻔하였다.

아이고, 나 산지기 종내 헐랑가 모르겄다. 누가 나를 데꼬 갈라고 자꼬 씌이능

게빈디. 오늘 이게 웬일이여.

청암부인 무덤 옆구리 헐리었던 자리를 모촘모촘 헐어 본 일꾼들도 모두 백지

에 싼 그 뼈다귀에 입을 따악 벌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춘복이 거 수악헌 놈이네이."

"명당 도둑질은 부녀지간에도 헌당만 그려."

"부녀지간이라니? 어뜨케?"

"부자지간은 조상이 같어도 부녀지간은 서로 봉제사 조상이 달르제. 딸은 시집

가먼 넘의 성씨 후손이 됭게로. 자기 자손 위헐라고 명당 찾다 보먼 부녀지간에

도 자리 놓고 안 다투것능가잉?"

"허, 거, 씨잘데기 없는 소리들. 시방 그런 이얘기 허게 생겠능가?"

박달이는 옆에 따라오는 일꾼들 입을 무질러 저희 집으로 쫓아 버리고는, 한

걸음에 내달려 이기채한테로 뼈다귀를 치켜들고 온 것이다.

"더럽다. 치워라."

이기채는 관자놀이에 불끈 힘줄이 솟구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루를 구르더

니, 버선발로 우르르 축대 계단을 내려와 휙, 몽둥이를 채어 집었다.

그리고 덕석에서 끌어낸 피투성이, 걸레가 되게 찢어져 버린 옷이 싯벌겋게

너덜거리는 춘복이의 대가리 정수리를 향하여 박살을 내리라, 그대로 내리치려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4. 흉

 

"몰라?"

공배네가 흰 눈을 깎아 뜨며 옹구네를 꼬아보았다.

"아 부모 같은 성님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안다요?"

옹구네 목소리에도 비꼬인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녀르 예펜네, 적거이 꼭 무신 일이 있제. 내가 너를 어디 하루

이틀 저꺼 봤냐? 니 낯빤대기 속눈썹 꼬랑지 한나 까딱만 해도, 벰연헌지 일 있

는지 다 알제 짐작을 못허께미 시침을 띠여? 띠기를. 시방 허는 짓 탯거리가 벌

세 이 일 사단을 아조 모르든 않는 뽄샌디. 저 지랄을 허고 주데이 철벽을 딱

허고 자빠졌네이.

바로 조금 전, 바람 소리가 나게 우우 거멍굴로 들이 닥친 원뜸의 머슴, 종,

장정들이 춘복이 농막을 뒤집어 한바탕 소란스럽게 엎어치는 소리가 나더니, 무

슨 죄 지어도 단단히 지은 놈 끌어가듯이 에워싸며 춘복이를 끌어가자, 공배네

는 물론이고 평순네, 옹구네, 택주네, 당골네 만동이와 백단이들이 모조리 고샅

으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꺼북한 더벅머리가 쑤석쑤석 흐트러진 춘복이는 창황중에도 불퉁한 대가리를

꼿꼿이 치세우고, 붙잡힌 양팔에 뚝심을 주어 엉버틴 자세로 소 발굽 차는 시늉

을 하며 사람들한테 끌려갔다.

미처 어쩔 수도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난데없는 소동에 깜짝 놀라 데인 듯 간이 바싹 오그라진 공배네가 후들후

들 떨리는 속을 가누지 못하고 우두망찰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끄집혀가는 춘

복이 뒤꼭지를 눈으로 뒤쫓다가, 아이고 , 이게 먼 일이까잉. 저고리 앞섶만 부

둥키고 있었다.

근심바우 어귀에까지 몰려나온 거멍굴 사람들은, 포승줄만 없다뿐이지 꽁꽁

묶인 형국으로 잡히어가며 멀어지는 춘복이한테서 얼른 눈을 거두지 못한 채,

저저끔 웅성거렸다.

속이 탄 공배네가 무망간에 옆을 돌아보니, 옹구네는 지금 막 이대로 발걸음

을 놓아 춘복이 끌려가는 원뜸으로 내달으려는 기색과 냉큼 그러지는 못하여 멈

칫멈칫 망설이는 기색이 드러나게 뒤섞여, 옹다문 입귀가 옴직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저년은 멀 알랑가도 모르는디.

문득 생각이 스쳤지마는, 제까짓것한테 다른 사람도 아닌 춘복이 사정을 물어

야, 싶은 아니꼬운 심사가 겹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지만 궁금한 것을 참는 것이 더 어려웠다.

"아이, 옹구네. 이게 먼 일이여? 왜 저러고 원에서 부각시에 자를 호출허신당가?"

"내가 아요?'

"자네가 모르먼 누가 알어?"

"하이고, 참 성님도. 이 잡소? 눌러 쥑이겄네."

"넘의 말 아니먼 헐말이 없는 옹구네가 어찌 이런 큰일은 모르능고잉? 무신

짐작도 안 가? 참말로?"

"아아따아. 보통 때는 내가 저 사람 저테 비씩만 해도, 떡바구리에 솜 들으가

능 것맹이로 어마 놀래서 집어내 쩌어리 떤져 불라고 허드니만, 요런 때는 똑

비오는 날 나무깨신 찾디끼 나를 찾으시오?"

"옹구네 말 잘허능 것은 내가 앙게, 게걸음 치지 말고."

"나도 째보 깜보 속이요, 입안에 든 거이 깜밥인지는 알겄는디 씹혀야 속속을

알 수가 있제. 또 내가 안대도, 성님은 알먼 병이고 모르먼 약일 거이요."

"아 그렁게 병이든 약이든 말을 해 보랑게 그러네이? 옘병을 앓다 민대머리가

될망정 옹구네 머리크락 비여 도라고 안헐 거잉게."

"벨일이네에. 언제부텀 저 사람 일을 나한테 물었능고? 내가 머이간디."

옹구네는 입을 비쭉하였다.

이 말에 빈정이 팩 상한 공배네는 오살헐 년, 지럴허고 자빠졌네. 허든 지랄도

멍석 깔어 주먼 안헐다드니, 그래도 은연중 지년을 머이나 된 디끼 대접해서 물

어 봉게, 닭 잡아먹고 오리발을 내미는 꼴이그만잉.

오장이 거꾸로 뒤집혔다.

"주야장천 엿가래맹이로 처붙어 있을 때는 언제고, 지내가는 넘의 일맹이로 딴

동자 굴림서 나 몰른당 것은 또 웬놈의 억하심정이대?"

"아 내가 머 마느래요오, 부모요? 아니먼 성지간이요? 밥 따로 국 따로제."

"그럴람서 한 방에는 멋 헐라고 들앉었었어?"

"한 상에 뇌였다고 속도 같으까? 그륵은 다 각각이제."

"벨라도 가찹게 부닐 떠는 넘이 보까 숭잽히겄게 뒤엥기드니."

"사돈 넘 말 허시네. 아 넘 보기 가찹기로야 성님이 더 허제 내가 더허요? 삼

척동자도 다 아는 일인디?"

"머?"

"지 속으로 난 부모도 자식한테 그러든 못허게 왼갖 상관 다허고, 떡 벌어진

시커먼 장정을 기양 옴짝 못허게 찌고 돌드만 그려."

저녁 굶긴 시에미보다 더 암상스러운 낯색으로 온몸에 사기를 세우고, 행여

어쩔세라 까뀌눈을 뜨던 공배네를 이 참에 여지없이 무질러 주리라 작심한 것일

까, 옹구네는 소동 속에서도 말려들거나 서둘지 않으면서, 짐짓 한 자락은 알고

도 있다는 티를 냈다.

애간장 바튼 공배네가, 꼭 이럴 것 같아 아예 말을 꺼내지 않으려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저 여편네는 혹 까닭을 알 수도 있겠지 싶어 물었던 것인데, 옹구

네는 팽돌아진 음성으로 말끝마다 콱콱 대갈을 박았다.

심정대로라면 이 총중에도 제 방석 넓히려고 대갈마치 휘두르는 저 따위 화냥

년하고 더 이상 대거리할 것 없이, 그냥 원뜸으로 줄달음 놓아 올아가 보고 싶

었지만, 필경 어마어마한 치죄가 벌어질 것이 분명한 이 정황에 무엇 무르고 끼

여들었다가 날벼락맞을까 겁이 나서, 공배네는 입을 그만 다물어 버린 채 돌아

섰다.

왜? 더 물어 보제.

무겁게 돌아서는 공배네 됫등허리 묵은 잿빛 남루한 잔등이를 훌기어 꼬나 보

던 옹구네는,

니가 머이나 된지 알었드니 앙 껏도 아니제? 아닝 거 알었제? 긍게 인자보톰

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무단히 넘으 제상에 밤 놔라 배 놔라 허지 말고.

우리는 우리가 알어서 살랑게로.

입속말 뇌이더니 휙소리를 낼 만큼 재게 발을 떼었다.

도저히 여기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저, 옹구네 멋 헐라고 매안으로 가능게비네. 겁도 없이."

백단이가, 이글거리는 화로에 숯 집으로 가는 손 붙잡는 말투로

"아서. 말어."

하듯이 화급하게 손사래까지 치며 옹구네 뒷 등에 대고 손을 까불었으나, 옹구

네는 돌아보지도 않고 잰 달음질을 하였다.

"내비두어. 모다 다 보라고 위세로 저러능 거잉게."

평순네는 평순이를 돌려세우며 백단이한테 넌즛 말을 던졌다.

"보라니? 머얼 보라고 저런당 거이여?"

" 그 속 몰르먼 백단이도 신장님허고 헛노는 거이고."

"벨소리 다 듣겄네."

백단이는 실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고, 같이 섰던 만동이는 아들내미 귀남

이한테 무슨 말인가를 건네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은 금방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두터운 회색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뒤엉킨 구름 한 덩어리가 거멓다.

"눈이 올랑가아, 비가 올랑가아."

매안의 아랫몰 임서방이 어서방하고 고샅 모퉁이 평평한 땅바닥에 뾰족한 막

대기 꼬챙이로 동그라미와 금을 그어 놓고, 잘 보이라고 골을 파냈다. 고누를

두려는 것이다.

"자, 한판 놀자."

말밭을 다 그린 임서방이 바둑돌같이 잘고 매끄러운 돌 몇 개를 추린다.

고누는 이 말을 가지고, 상대편의 말을 다 잡거나 집을 차지하는 사람이 이긴

다.

임서방과 어서방은 흰 돌 네 개, 검은 돌 네 개를 둘어서 나누어 쥐고 호박고

누를 두며 노는데, 번갈아 말을 한 칸씩 두어 가는 솜씨가 어서방보다 임서방이

월등 뛰어났다. 번번이 길이 막혀 더 이상 말을 둘 수가 없게 된 어서방이 몇

판 만에 모처럼 겨우 어찌 비기어서

"어, 거참, 쉽잖허네."

하며 몹시 아까운 입맛을 짭, 짭 다시는 모양은 옆에서 구경하던 아랫몰 타성들

과 임서방 딸내미 앵두를 웃게 만들었다.

고누는 아무나 놀 수가 있었다. 놀이 방법이 단순하고 소박하여 도구도 필요

없고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아무 때 어느 곳에서나 손쉽게 판을 벌일 수 있어,

일꾼들이 잠시 고된 일손을 멈추고 쉬는 동안에 바로 금 몇 개 긋고 돌멩이 주

워서 놀면 되었다. 논두렁도 좋고 그늘진 정자 나무 아래도 좋았다. 또 동네 아

이들 같으면 마당 한쪽 구석지나 넓적한 바위 위에서 신나게 두고 놀 수 있었다.

"고누야 상놈들 놀이지 머. 양반들은 터억허니 점잖허게 앉아서 바둑두고 종경

도 놀고, 그래 그런 말도 있잖응게비?"

이야기 잘하는 임서방이 놀이게 따른 상대방의 신분과 대우를 빗대어

"바둑 둘 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가, 뭇한다 하면 한 단계 말을 낮추어

"자네, 장기는 둘 줄 아는가?"

하는데, 이번에도 못 둔다 하면 아예 말을 꺾어

"너, 꼬누 놀 줄은 아냐?"

한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누는 재미가 있었다.

말밭의 한가운데 말이 빠지면 안되는 우물을 정하고는, 각기 말 두 개씩을 가

지고 노는 우물고누는 강고누 혹은 샘고누라고도 하며, 가로 세로 네 줄씩을 그

어 아홉 칸 네모를 만들어 노는지라 발고누 선고누라고도 하는 줄고누. 거기다

가 곤지고누 꽂을고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참고누들이, 옛 벼슬의 이름을 종

이판에 차례로 그려 놓고 놀이감으로 쓰는 '종경도 놀이'에 비겨 조금도 손색없

는 즐거움을 주었으니.

사라진 왕조 조선의 벼슬 이름을 깨알같이 모두 한자로 박아 써서 수십 수백

열거하여, 우선 종경도를 순서 맞추어 정밀하게 그리고, 쌍륙이나 윷, 윷말을 준

비해서 편을 짜거나 혹은 혼자씩 노는 종경도.

그 벼슬 그림 놀이를 맨 처음 시작하는 곳이 '입문'인데, 여기서 윷을 높이 던

져 도가 나면 '유학'에 말을 갖다 놓고, 개가 나오면 '진사'에 , 걸이면 '무과', 윷

이면 '은일', 모가 나면 '문과' 벼슬에 각각 오른다.

그리고 나서 벼슬이 순조롭게 잘 올라가 던지는 윷마다 승승장구 높은 패가

터지면 쾌재를 부르며 일취월장하여서, 마지막 승리의 문, 나가는 곳 '퇴', '영의

정'에 이르게 된다.

관운이 좋으면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롭게 벼슬길이 열리어 놓이 오르지만,

운이 사나우면 벼슬도 잘 오르지 않고, 또한 내직에서 바람 부는 외직으로 쫓겨

나기도 하면, 변방 멀리 밀려났다가 불행하게도 파직의 쓴 잔을 마시기도 한다.

놀면서도 벼슬을 못 잊어 가지고 노는 일은 글자를 몰라서도 못 놀고 벼슬 이

름을 몰라서도 못 노는 일꾼 상민들은, 땅밭에 말밭 그려 돌멩이 몇 개 주워들면

그만인 고누가 그저 쉽고 신명나고 흥겨웠다.

임서방의 재빠른 흰 말이 어서방의 어둔한 말을 한쪽으로 몰아붙여 누르고는,

복판의 집을 구멍마다 점령하며

"으야아앗, 추추추추."

얼싸춤을 추려고 어깨를 들썩이려는 순간. 임서방은 공중으로 치켜 올리던 손

을 멈춘 그대로 의아한 낯꽃으로 마을 어귀를 바라보았다.

거기 뜻밖에도 춘복이가 잡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가 또 먼 일을 저질렀다냐.

놀라서 비켜서는 임서방의 고누판을 어지럽게 밟아 짖뭉개며 원뜸의 종가 머

슴과 종들은 춘복이를 잡아 끌고 올라갔다.

그 살기등등한 정황이 도무지 예사롭지 않아서, 아랫몰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

뜸 지나 원뜸에 이르는 동안, 매안의 이씨들도 이 소란의 까닭이 궁금해 내다보

았다. 춘복이가 성질은 사나워도 아직까지 매맞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앞 뒤 곡절 찬찬히 가릴 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춘복이를 덕석에 말아서 피

투성이 낭자하게 몰매 치는 소리가 마을을 울리었다.

"으으윽."

으아아으윽

춘복이의 피먹은 비명 소리와 함께

"네 이 천하에 죽일 놈."

모가지를 삼동으로 썰어 죽일 놈 같으니라고.

내 단박에 박살을 내리라.

더덕더덕 선지 엉긴 춘복이의 대가리 정수리를 향하여 그대고 내리 치려고 공

중으로 몽둥이를 치켜든 이기채의 창백한 팔목에 독오른 힘즐이 퍼런 지렁이처

럼 돋아 솟는다. 힘줄은 멍든 먹빛같이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이기채의 오장 깊은 곳에서 일으킨 내출혈이 원통한 토악질로

팔목에 맺힌 것인지도 모른다.

"이 죽일 놈."

그냥 도굴만 하였대도 살아 남기는 어려운 판국에 투장이라니.

"감히 어디다가 네 놈이 그 더러운 뼈다귀를."

이기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이를 갈며 몽둥이를 내리쳤다.

빡, 두개골이 두 쪽으로 빠개지는가 싶은 찰나, 춘복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고꾸라져 나뒹굴었다. 몽둥이를 피한 것이다. 그 바람에 이기채의 몽둥이

는 춘복이 등판을 패며 튕겨져 나갔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기표가 누마루에서 사랑마당으로 두두둑, 뒤어내려와 이기채의 팔목을 비끄러

붙들면서, 매질을 그만하라, 만류하였다.

"진정하라니. 저놈을 두고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해."

이기채의 눈빛은 갈기갈기 찢긴 춘복이의 피투성이 살점보다 더 참혹하고 참

담하게 찢긴 상처와 분노로 응혈이 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상한 불길을 일

으키고 있었다.

네 놈이 내 어머니의 산소를 더럽히다니.

그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시라고.

아아, 이 개 뼈다귀.

"형님, 고정허시고 어서 위로 올라가십시오."

기표는 다시 채근하였다.

"굴건 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거상중에 몽둥이 찜질 같은, 아니할 일 하고

나면,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남의 말도 무서운 것이고, 돌아가신 백모님께 도리

도 아닌즉 체통을 잃지 마십시오."

흉억이 무너지는 이기채를 부축하여 사랑 축대로 오르던 기표는, 펀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 한 가닥에 번쩍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마루에 웅크린 뼈다귀 보자기를 쏘아보았다.

"형님, 이 투장은 저놈의 소행이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다른 놈 짓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산지기 박달이가 대보름날 밤에 제 눈으로 저놈을 산소에서, 산소에

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지 않어? 저놈 주동이로도 거기 다녀오는 길이라 이실

직고했다 허고."

"그래도 아닙니다. 무릇 투장이란, 제 발복하고자 제 부모와 조부모 유골을 남

의 명당 산소에다 몰래 쑤셔넣는 것인데, 춘복이란 놈을 둘러보면 형님도 아시다

시피 천애 고아로 에미 애비는 물론이고 일가 친척 하나 없는 황막 지경 아닙니까."

"애비 없는 자식이 어디 있어? 죽은 애비도 애비지."

"저놈 애비 죽은 것은 몇 십년 전 일이올시다. 투장도 뼈다귀 형체 있을 때 말

이지, 세월이 너무 오래어 버실버실 삭어서 흙 다 되디어 버린 뼈다귀를 삽으로

떠다가 투장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기표는 차마 손댈 염이 나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보자기에 싸인 뭉치를 풀어

누런 흙물 스민 백지를 헤치고 꿰뚫어지게 뼈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고갱이가

썩어 떨어지는 나무 토막들 같았다. 아니면 검붉은 녹이 슨 쇠붙이라고나 할까.

흉악하여 더 보기도 역겹다는 듯 이기채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기표는 그것을 꼼꼼히 날카롭게 살피면서

"나뭇가지를 가져오라."

시켜, 이리 저리 뒤적이며 헤집어 보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몇 십 년 묵어 곰삭은 뼈가 아닙니다."

"몇 백 년 지나도록 수의조차 변색 없이 그대로 있는 시신도 있지."

"제 짐작이 틀리지 않을 겝니다. 저놈이 떠돌이로 거멍굴에 들어와 주저앉은

상놈의 자식이라, 그 어린 나이에 애비 무덤 자리를 영념허고 기억해 둘 처지도

아니었고, 상것들 무덤에 비석이 있습니까 표지가 있습니까, 세월 가면 잡초더미

에 맹감 넝쿨이나 우거지지 구분도 어려워서, 찾고자 해도 제 애비 뼈다귀는 찾

을 길 없게 마련이지요."

딴은 그럴 듯도 하여 이기채는 아까보다 심정을 누그리며 물었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자고로 당골네것들이 남의 산소에 투장하는 습관이 있으니, 불문곡직 거멍굴

에 백단이 만동이 푸네기들을 잡아다가 호되게 족치면 무슨 꼬투리가 잡혀도 잡

힐 것이오."

덕석말이했다가 만일에 아니라 할지라도 놓아보내면 그만이고, 짐작대로 거것

들 짓이 분명하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이 다스릴 일이었다.

기표의 말을 따른 이기채의 명으로 아까 춘복이를 잡아 왔던 머슴과 종들이

다시 거멍굴로 비호같아 내닫고, 그 통에 춘복이는 잠시 한쪽에 다 팽개쳐 부둥

크려 놓았다.

오오, 그런 일이 있었그만잉.

솟을대문 문간에 우중거리며 웅기중기 몰려 선 임서방과 어서방, 그리고 매안

의 호제들 틈에 끼어 기웃기웃 안쪽을 넘겨다보며 동정을 살피던 옹구네는, 우

례가 물어다 주는 귓속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부터 귀는 곤두서고 가슴속은 통게통게 두려운 듯, 불안한 듯,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오지게 재미난 사건 무슨 일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옹구네는 조바

심치며 들떠 있었다.

그네는 꼭 강실이 일을 들킨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을 '들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리라. 옹구네가 자진하여 펄렁거리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쥐덫 놓는 것처럼 소문을 놓았으니 누구라도 그 덫에 걸리

기 마련이었으며, 그 중에 가장 큰 덫을 이기채의 솟을대문 안쪽에다 은밀히 놓

았으므로, 결국 율촌샌님 이기채의 칼끝 성품 촉수도 이 소문을 덜컥, 물으려니

하고 있었다.

웅구네 생각은 한 갈래 외곬수가 아니었다. 복잡하였다.

내가 강실이 일 한쪽 귀영텡이 거들어 주고는, 성사되면 큰마느래 노릇 톡톡

히 험서, 이 원통허고 설운 분, 곁다리 아낙의 신세 무안하고 처량했던 것을 모

질게 갚어 주리라.

싶은 생각에 열심히 제 일마냥, 고리배미 비오리한테로 갔다가, 우례한테도 말을

묻히며 딴에는 춘복이 일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들키라고 서두르고 다녔다.

그러니까 동서남북 네 갈래 여덟 갈래 길에다가, 화르르, 부싯돌만 치면 불이 붙

어 삽시간에 타오르게끔 불쏘시개를 만들고 다닌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마음이 다가 아니었다.

야 이 웬수엣놈아.

아무리 문서 없이 오다 가다 만나서 더러운 맹세나마 한 마디 한 일도 없이

산다고는 허지만, 이것도 사능 것은 사능 거인디, 너도 참 낯빤대기 두껍기는 두

껍다. 문서가 없다고 심정도 없겄냐?

그리여. 나는 귀영머리 마주 풀고 찬물 바쳐 육리 갖춘 마느래도 아니고, 양반

의 따님으로 고귀하신 지체도 아니다. 거그다가 나이 에려 꽃 같고 달 같은 청

상에 생과부도 아니제. 너보돔 나이 많은 홀에미, 단물 빠진 늙다리, 자식끄장

딸린 년이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사람 박대를 이렇게 막 대놓고 헌단 말이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랬다는디, 만리장성을 고사허고, 몇몇 밤을 수

천 수백 번 고쳐 자도 돌아누우먼 나무도막 바웃뎅이 한가지로 무심정헌 것은,

나를 깔보는 탓이제. 어차피 아무껏도 아니라 이거이제. 우리는.

그런디 그게 꼭 그렁 거이냐? 내가 아순 년잉게, 정에 아순 년잉게, 내가 너를

붙잡고 늘어징게, 마지못해 몸 내미는 시늉을 험서나도, 싫으먼 아조 말제 왜 마

다고는 안했등고? 강실이 말 내기 전 끄장은.

그러다가 인자 와서, 머, 장개를 가?

아나, 장개. 하이고, 야야. 니가, 핑계야 어찌 되었든 달밤에 양반의 금지옥엽

강실이를 겁탈허고도 살어 남기를 바래? 꿈 같은 소리 허들말어라. 니가 헌 짓

이 밝혀지고도 니가 안 죽으먼 매안 이씨 서슬도 헛거이고, 끝내 이런 일 모르

쐬 넘어간다먼 매안 이씨 양반 자랑도 헛껍데기다. 잉?

옹구네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춘복이가 강실이를 남모르게 꿈꾸고 있을 때나, 그 일을 발설했을 때 치받던

심정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무서운 질투로 옹구네는, 훅, 훅, 불무질하는 속을 화

덕같이 끓이며 열화를 가누지 못하곤 하였다.

"아이, 그렁게 참말로 그 작은아씨를 어쩌기는 어쩠당가? 무단히 시방말로만

그러능 것 아니고? 아무리, 일이 그리 숩겄능게비?"

옹구네가 옆구리를 질러도 보고 눙쳐도 보고 감겨서 물어도 보았지만, 그때마

다 춘복이는 묵묵부답 별 대꾸도 하지 않은채

"여러 말 시기지 마시오."

할 뿐이었다.

"왜, 내 말에 때 타? 오매불망 아까우신 작은 아씨가?"

"씨잘디없는 말을 자꼬 해쌍게 안 그러요?"

"던지러라, 이놈의 신세. 말도 지대로 못허고."

"아 언제 옹구네가 헐말 못허고 살었간디 말끝마동 매달고 꼭 신세타령을 헌

당가요? 딩기 싫게. 나는 내 한 몸 신세도 무건 놈잉게 넘으신세까지는 못 짊어

져요. 알어서 지시오. 이든지 메든지."

오냐, 알었다. 니 속이 그런 지 내 인자 다 알었다.

어금니 사이로 배어 오르는 눈물을 ㅉ쯔레 삼키며, 옹구네는 쫓겨나는 심정으

로 어둠 속에서 긴 눈을 흘겼다.

그리고 겉으로는 강실이와 강모, 춘복이의 일을 싸잡아 멀리 소문내어 부채질

까지 활랑활랑 하면서, 두 사람 일이 꼭 성사되기 바라는 것처럼 일부러 생색내

며 춘복이한테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부디 어서 이 일이 매안에 알려지고, 강실이의 부모 오류골댁 내외

가 알게 되고, 수천샌님 기표가 알게 되고, 드디어는 원의 이기채가 알게 되어,

드르르 문중회의가 열리면서 두 연놈을 잡아다가, 중인환시리 안팎 반상 백일하

에 꿇어 앉히어, 한 년은 갈갈이 찢기는 것이 더 나은 똥칠 망신을 주고, 한 놈

은 머릿박이 쪼개지고 다리몽생이가 분지러지게 뚜드려 맞아 초죽음이 되는 꼴

을 꼭 이 눈으로 보아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아.

옹구네는 혼자 앉아 있다가도 치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아까 춘복이 잡혀 갈 때도 가슴이 덜컥한 중에 은근히 쾌재도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춘복이를 뒤따라 허겁지겁 매안으로 쫓아 올라올 때,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 토담을 지나면서,

흥. 뿌랭이 썩는지 모르고 꽃 좋다제.

하고 비웃었다.

그 토담 안은 인기척 한 낱 없이 괴적하였다.

오류골댁은 위에 큰집 사랑이 소란한 것을 염려할 겨를이 없었다.

반닫이에서 강실이 혼수로 마련해 두었던 비단 명주와 아련한 빛깔 스며나오

는 화장수며 꽃핀, 비취비녀 같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어루만져 보다

가, 고개를 무겁게 흔들며 다시 집어 넣었다가, 또 다시 꺼내어서 보자기에 싸는

오류골댁 손에 눈물이 흥건하였다.

니가 이 길로 집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우리라.

내 새끼야...

전생에 무슨 죄 지은 일 있었던가.

갚을 일 많아서, 이대도록 가슴 미어지는 세상을 어미한테 부리고는, 정처없는

인생에 가는 길도 모르고 헤매일 때, 가시로 저미는 저것 발걸음을 한평생에 어

찌할 것인고.

질부 효원의 말로는 봇짐 메고 다니는 황아장수가 모레 온다고 했었는데, 그

모레가 바로 내일 아닌가.

내일이라니.

기가 막혀 흉중을 가누지 못하는 오류골댁은, 남도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사돈

의 동네 깊은 산속 어드메 이름 모를 절간에다 딸을 버리는 어미의 설움으로 후

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는 누워 있는 강실이 여윈 손을 감싸쥐었다..

"아가, 에미한테 말 못헐 게 무어 있냐. 기왕에 이리 된 일, 속이나 알게 말 좀

해 봐라. 어찌된 연유인지, 알기나 해야 짐작을 허지."

강실이는 그 간곡한 말에도 대답이 없다.

벌써 몇 번이나 물은 말이었지만 그때마다 강실이는 눈감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에미가 남이냐. 니가 살인 죄인이 되었다 허드라도 나는 에미고, 너는 내 새

끼지, 에미한테도 말 못허는 그 속이 오죽이나 상했으면 사람이 이 지경이 된단

말이냐.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그저 니가 약헌가, 약헌가만 했었

지. 언제부텀 무슨 일이 생겨서 누구허고 어쨌는지, 이 세상에 나라도 알고 있으

면 니가 좀 덜 무섭지 않겄냐. 아가."

오류골댁의 눈물 맺힌 말에, 강실이는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혹시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오류골댁은 숨을 죽이고 강실이

입시울을 더듬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실이는 들이쉰 숨을 여리고 길게 내뿜

을 뿐, 입을 끝내 열지는 않았다.

다만 대답 대신 눈귀에 찐득한 눈물 한 점이 배어 나ㅗ아 흐르지도 못한 채

머물러 번지었다.

누가누가 큰소리를 쳐도 자식 가진 사람만은 큰소리 할 수 없다고, 예점부터

말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것은 나므이 말일 따름이었지 오류골댁 앞에 그

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저것이 웬수지 어찌 자식일꼬."

기응은 온 방안에 담배연기가 진이 박이도록 자욱하게 곰방대를 빨아, 한숨을

거멓게 뱉어내며 말했다.

"강실이란년 저것이 죽을라고 방죽가에 허청허청 갔던 것인지라, 눈 깜빡할 사

이에 또 어떤 일 사참하게 저지를지 알 수도 없으러니와, 수천서방님이 목도를

허셨으니 사단이 다 드러나, 여기서는 어느 구석으로 더 숨을 방도도 없지 않소

잉? 인제 마른 하늘에 날벼락맞을 일만 남었는데, 앉은 방석을 못 돌리고 벼락

을 맞느니, 우선 죽을 구멍 모면이나 해 보게, 대실 질부 말을 한 번 따러 봅시다."

오류골댁은 기응에게 사정조로 말머리를 꺼냈다.

다 똑같이 강실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였지만, 아들도 마찬가지나 특히 딸자식

훈육은 어미의 책임이어서, 오류골댁은 기응의 앞에 죄 지은 옹가슴을 펴지 못

하고 더듬거렸다.

"대실 질부는 사람이 대차고 사리 분별이 남달라, 강실이한테 해로운 일 시키

지는 않을 것이요. 그날도 나는, 혼절헌 종시매를 이부자리에서 걷어 일으켜 집

으로 내려가라 헐 때, 참 야속 무정허기 짝이 없더니만, 부모보다 먼저 속을 짚

은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몰아 집으로 내려가게 해 주어, 그나마 식구끼리만 일

을 당헐 수가 있잖었소?"

"장허구만. 식구끼리만 일을 당해서."

"나는 면목이 없소. 내가 죽어서 일이 괜찮어진다면 골백번이라도 머리를 바우

에 깨뜨려 죽어리다만, 나 죽는다고 불쌍헌 저년이 낫어지는 게 없는 마당에, 어

쨌든 죄 많은 부모에 죄 많은 자식이나 살려 놓고 봅시다. 예?"

오류골댁이 간신 간신히 이어가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기응은, 아무리 생

각해도 기가 막힌지, 허어어, 소리만 내뿜었다.

"비단 지고 댕기는 황아장수, 그 왜, 얼굴 나붓허니 찬찬허게 생긴 아낙. 당신

은 못 보셨는가 모르겄지만 나도 알고 있는 그 황아장수 아낙이 사람 믿을 만허

다 하니, 내 보기에도 빈말 허고 여시짓허는 상호는 아닙니다만, 그 편에 편지

한 장 쓰고 딸려 보내면 질부 친정 사가에서 전후 살펴 주리라 허드마는."

"참말로, 자식 키워서 이런 꼴을 보지 말어야는 것이여."

그것은 연전에, 진예를 그리다가 끝내 못 잊는 상사로, 생떼 같은 강수를 잃었

던 동녘골양반이 자식을 내다 묻으며 한 말이었다.

그 말을 이제 판박은 듯 기응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참, 세상에 어뜬 불출 위인이 자식 농사를 망치는가 했더니만, 넘의 흉보

아서 죄 받는 것인가."

천지에 이런 흉이 있어, 그래.

기웅이 오류골댁 간청에 쓰다 달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 반승낙으로 알고,

그네는 강실이 보낼 준비를 허둥허둥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차분히 물목 차려 준비할 수 있는 일이리요.

실신할 정도로 기진하여 쇠약한 딸자식이, 몸에 뜻밖의 수치스러운 태기를 담

고, 외갓집도 아닌 큰집 오랍의댁 친정길, 낯설고 물 선데다 꺼끄럽고 어렵기 민

어 가시 같은 사돈네 마을 어디 어디를 헤매며 비칠비칠 걸어갈 뒷모습이 가슴

에 밟혀, 오류골댁은, 잘잘못 가리고 따져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오직 가

련하고 불쌍한 '새끼' 한 마리를 그만 부둥켜 끌어안고 통곡을 하고 말았다.

꺽, 꺼억, 목이 치받치는 울음 소리에 큰집 사랑마당 덕석 속에서 비명을 토하

는 춘복이 울음이 핏빛으로 섞여들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큰죄 지은 자를 모질게 덕석말이 할 때는, 그냥 두르

르 사람을 말아서 몰매로 내리치는 것만이 아니라, 황소를 풀어 마구 짓밟게 하

는데, 천하 없는 장사라도 황소한테 밟히면 배가 터지거나, 가슴이 짓뭉개지거

나, 목줄이 눌리어 죽고 말기 쉬웠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는 마주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덕석에 사람을 말아 놓고 황소를 풀면, 황소는 마

당에서 커다란 눈방울을 뒤룩거리며 뒷발굽만 찰 뿐 좀체로 그덕석 가까이에 가

려 하지 않았다.

"소는 영물이라 어질어서, 그 속에 사람 든 걸 아는 것이지."

전에, 남평 이징의는 말했었다.

이징의는 춘복이가 잡혀 와 아까부터 덕석말이 몰매 맞는다는 남평댁의 전갈

에 이맛살을 깊이 찡그리며

"죽은 뼈다귀 때문에 생사람이 죽겠구나. 다 쓰고 죽은 몸, 어디에 묻히면 어

떻고, 좋은 자리 함께 나누어 묻히면 또 어떤고. 모두 부질없는 일, 헛짓들이다.

망상이야. 살아 있는 동안에, 받은 정기 잘 갊아서 손상시키지 않도록 환히 밝혀

태우다가, 그 정신만 원전으로 가지고 가면 그만이지. 생명 정기 다 빠진 빈 몸

뚱이 헛된 물질 뼈다귀 하나에 산사람 인생을 의탁하여, 운명을 개조해 보자는

게 애초에 어리석은 일 아닌가."

혼자말을 하였다.

"설혹 못난 사람이 미련해서 그런 짓 좀 했다기로서니, 꾸짖어서 나무래고 그

만두지 상중에 몰매, 비명이라니. 어어 참, 피비린내 고약하다."

이징의는 그 피비린내가 방안에 진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찌푸린 이마를 더욱

골 파며, 검푸른 쪽물에 붓을 적셔 휘익, 비백의 남죽을 쳤다. 마치 그 푸르다

못해 검은 빛 바다밑 같은 궁청 쪽빛 대나무 한 폭이, 종가에 낭자히 차 오르는

비명, 흉을 몰아내는 부적이기나 한 듯이.

 

 

5. 어쩌꼬잉

 

거멍굴이 한판 뒤집히어 소란스러운 중에도, 문복하러 온 고리배미 아낙 하나

가 아까부터 백단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주인 없는 방에서 혼자 무릎을 바

짝 가슴에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그네는 뾰족하니 야윈 턱을 제 무릎에 한참이나 얹었다가, 기웃 고개를 틀어

바깥쪽을 내다보기도 하고, 손가락 끝을 튕기며 검정 물들인 무명 치맛자락에

묻은 검불인지 티끌인지를 떨어내기도 하였다

그 행색은 남루하고, 기색은 초조해 보인다.

그렇지만 백단이는 냉큼 들어오지 않았고, 금생이네 성냥간에서 들리는 것인

가, 놀란 개 짖는 소리만 숨이 넘어갔다.

"언제 외겼소이?"

얼만큼이나 지났을까.

마당에서 구시렁구시렁 궁얼거리는 말수리가 나도니, 만동이와 귀남이는 뒤안

으로 돌아가는 기척이고, 벌컥 지게문이 열리면서 백단이가 발보다 고개를 먼저

들이밀었다. 그네의 입술이 멍든 자줏빛이다.

"추운디 어디 갔다 온당가?"

아낙은 옴질 자리를 옮겨 앉는 시늉을 한다.

아낙이 비키는 아랫목 자리에는 낡은 요대기 한 닢이 개혓바닥같이 납작하게

깔려 있다. 부들자리 방바닥의 미지근한 온기를 겨우 가두고 있는 그 요대기 밑

으로 비빈 손을 쑤시어 집어 넣는 백단이 몸이 후르륵 떨린다. 꼭 추워서만 그

러는 것은 아닌지 그네의 낯색이 불길하게 질려 보인다.

"아이, 나 멋 조께 물어 볼라고오."

아낙은 백단이에게 다가앉으며, 목소리를 낮춘다.

"내가 왜 오늘 머이 안 보고 잡소예. 어찌 그렁가."

백단이가 무겁게 이마를 찡그린다.

본디 그네는 굿을 하는 당골네 세습 무당이지 신 내려서 점 치는 점쟁이는 아

니었지만, 그 구분을 굳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당사주를 보아 달라고 찾

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생년월일 대고 뽑은 점괘의 길 흉 화 복을 알록달록 울긋불긋 그림으

로 그려 풀어 놓은 당사주책은, 콩기름 먹인 장지 뚜껑을 젖히면 넘기는 부분에

손때를 깊이 머금은 채, 이 본 저 본 여러권, 백단이네 방 웃목 소반 위에 늘 포

개어 얹혀져 있었다.

"아 그레 배운 곳이제 귀신 씌인 것도 아닌디 머. 벨라 잘 맞히는 것 같든 않

드라, 신통찮해."

하고 백단이를 미심쩍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헌다는디 아무러먼 누누 대대 그 짓으로 업을 삼어

온 당골네가 점 하나 못 치께미? 나 뵈기에는 갠찮등만."

"사주는 점허고는 달체. 사주 팔자는 타고나은 거이제 귀신 노락질은 아닝게

로. 배워서 보는 거여. 당사주도 그게 사주 아니라고?"

"하아. 글자로 푸는 것을 그림으로 본단 것만 달러, 딴 거 없어."

"그래도 그러 아무나 못 보네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머 안 존 일 있능가아? 동네도 수선수선허고잉."

문복하러 온 아낙은 백단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들추듯 묻는다. 기왕에

온 걸음이 허탕이 되지 않도록 당골네 비위를 우선 맞추어 두려는 것이리라.

"동네는 동네고."

"그러먼 머, 무신?"

"벨일 아니요."

백단이는 아낙을 떨구어 내려면 얼른 한 자 보아 주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

었는지, 당사주책 얹힌 소반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골이 패인 미간에 찡기어 쉽게 빠지지 않는 간밤의 꿈이 아무래도 심

상치 않아 마음에 걸린다.

숨 떨어지면서 바로 서둘러, 치상이라 할 것도 없이 허술하게, 오히려 일부러

훗날 일을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내다 묻은 이후로, 한두번 얼핏 스치듯이 꿈에

비치다 말았던 시아비 훙술이, 어젯밤 그네 잠의 한복판에 생시보다 역력히 나

타났던 것이다.

꿈에서도 밤이었던가.

아니면 시아비의 저승이 그렇게 푸르둥둥 등뒤에 서리어진 것이었을까.

검은 구름이 퍼렇게 물들어 번진 하늘이 나지막하면서도 아득하게 광목필처

럼, 거멍굴 근심바우 너머 무산 날맹이 저쪽 어딘가로 음울 스산한 자락을 드리

운 아래, 홍술은 임종할 때 모습 그대로, 일흔 남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흐트러

난발하고 서 있었다.

마른 장작같이 여위어 불거진 광대뼈와 훌쭉하니 꺼진 뺨에 북어껍질로 말라

붙은 거죽이며, 핏기 가신 입술을 반이나 벌린 입 속에서 적막 음산하게 새어

나오는 검은 어둠.

홍술은 시푸레한 무명옷을 입고 맨발을 벗은 채 발가락을 갈퀴처럼 오그리고,

백단이네 사립문간에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나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뒤안에서

수와아아

음습한 바람 소리가 밀리며 홍술이를 씻어 내리는데, 백단이는 마침 손에 흰

종이꽃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굿에 쓸 지화였을 것이다.

"왜 안 들오고 거가 서 자시요예? 발 한질라 벗고."

꿈에서는 시아비가 죽은 것을 몰랐던 백단이가 창호지 종이꽃을 두손에 받쳐

들고 이만큼 사립문간으로 걸어 나와 홍술이를 바라보았다.

신분이 미천하여 상투조차 좆을 수 없었던 홍술이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 흰

터럭을 올올이 떨면서, 잿빛 삭은 음성으로

"아이고, 추워. 내가 추워서 못 전디겄어."

어흐으흐윽.

하더니 뼈만 남은 어깨를 흔들어 소름을 커다랗게 털고는, 백단이 쪽으로 몸을

쏟으며 나뭇가지같이 앙상한 열 손가락을 있는 대로 뻗치어 그네를 움켜잡으려

하였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순간 그네는 가슴이 덜컥, 써늘하게 내려앉으며

무섬증이 와락 끼쳐, 그만 시아비 손아귀를 피하여 홱 옆으로 배켜섰다. 그 바람

에 홍술이는 백단이 손을 호되게 치면서 앞을 헛짚어 대나무 울타리로 곤두박질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이고, 아부니이.

미처 붙잡을 겨를도 없이 놀라 당황한 그네가 손에서 떨어뜨린 종이꽃은, 한

가운데 수술 박은 꽃심이 뭉툭 빠져 나가면서 그만 매맞은 것처럼 꽃부리가 산

산이 흩어져 검은 허공에 소리 없이 분해되면, 낱낱 이파리를 창백하게 한 잎씩

날리어 버리고, 홍술이가 백단이 대신 부동켜안고 쓰러진 대나무 울타리는

우수수스으

검은 댓잎을 어둠 속에 토악하듯 쏟으면서, 그대로 쏠리어 먹빛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어. 어매매. 우리 울 넘어가네에.

백단이가 기겁을 하여 시아비 고꾸라진 것보다 울타리 쓰러지는 것에 놀라 소

리를 지르려는데, 그 울타리 쏟아진 댓잎들이 와스스 검은 물살을 이루며 마당

을 흥건히 적시는 것이 흡사 집채만한 먹물통을 엎은 것 같았다.

그 물살은 숨돌릴 틈도 없는 사이 마당을 뒤덮고는, 눈 깜짝 새, 백단이 발등

까지 차올랐다. 겁이 덜컥 났다. 시커멓게 잠기는 발등에 소스라쳐 깨어났으나.

그 얼음장같이 시리고 차가웠던 검은 물살의 냉기 감촉이, 깨어나서도 너무나 역

력하게 남아 그네는 저도 모르게 두 발을 감싸쥐며 주물러 보았던 것이다.

무신 그런 수악헌 꿈이 있이까잉.

아이고, 그 대울타리 쏟아진 꺼멍 냇물이 저승 가는 황천이여 머이여. 시방.

백단이는 진땀 돋은 이마를 짚고 골똘히 생각에 생각을 되집었다.

아니 근디, 아부니는 왜 추우싱고? 자리가 안 좋응가? 넘들이 암만 멩당 멩당

허드라도 망제하테 지기가 안 맞으먼 그게 바로 흉산될 수도 있을 거인디. 질가

테 한디다가 내불디끼 파묻어 놨어도 여지끄장 안 그러시드니 어찌 투장해 디리

고는 춥다고셔어.

더 좋다는 거이 아니라.

참 요상헌 일이그만잉. 이게 암만해도 예삿일이 아닝게빈디.

대관절 머이 잘못되었이까.

하도 고대광실 지체 높으신 마나님 산소라, 어디 안쪽으로는 언감생심 찌웃거

려 보도 못허고 배깥으서만 눈치 봄서 오돌오돌 떨고 지시능거잉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이 이승 저승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면, 부처님이 성

불을 해도 성질은 남는다는데, 청암부인 서릿날 같은 성품이 무덤 속에서라고

훈풍의 도화꽃 가지 될 리는 천만 없을 터이니, 혹 살아서 당한 것보다 더 처참

가혹한 수모 봉변을 당한 채 봉분 바깥으로 쫓겨난 것은 아닐까.

시아비가 어푸러지며 친 손목도 아직 얼얼한 것 같거니와, 부서진 꽃이며 무

너진 울타리가 도무지 예사롭지 않아 백단이는 새벽 머리부터 극조심을 하던 중

이었는데. 난데없이 들이닥친 원뜸의 머슴 종 호제들이 저승 차사처럼 춘복이를

휘갑쳐 에워싸며 잡아가는 것을 보고는, 지은 죄가 있어 후둑후둑 속가슴이 뛰

는 백단이한테, 고리배미 아낙은 부득부득 당사주를 보아 달란다.

"신수 볼라고요? 어디 대 보시오."

백단이는 기름 먹여 도톰한 유지를 덮어서 맨 진누런색 책뚜껑을 젖히며 아낙

한테 바깥 주인 대주의 생일 생시를 묻는다.

당사주책은 어느 문자속 있는 사람이 진서 달필로 쓴 괘 글귀에다 쪽물로 남

색 칠하고 당홍으로 붉은 물감 칠하면서 채색 그림을 노랑 초록 곁들여 그려 놓

은 것도 있고, 담백한 먹그림에 연분홍 진분홍 꽃핀 장면이나 사람의 입술에만

연지를 찍은데다가 향체 언문 글씨로 풀어 구구절절 줄줄이 적은 것도 있었다.

한참 동안 이마를 찡기고는 손가락을 꼽작거리면서 뽑아낸 사주대로 척 펼쳐

든 책장의 그림을 보고 아낙의 낯색이 흙빛으로 바랜다.

"이거이 머이여?"

"머이 머이여? 오구그만."

"오구라니?"

"벨라 좋든 않구만이요잉."

"오른짝이여, 외약짝이여? 좋든 궂든 간에."

"인자 들어 봇시오."

백단이가 오른쪽 그림을 우선 손가락으로 누르며 가리킨다.

아낙의 눈이 손가락을 따라 내려와서 껌벅껌벅 멈춘다.

그네는 해왈을 듣기도 전에 땅이 꺼지는 한숨을 먼저 후욱 토하고 만다. 들으

나마나 왼쪽도 오른쪽도 참혹 흉악한 형상을 하고 있기 ㄸ문이었다. 그런데 아

낙의 대주금년 해 운이 오른손 편 그림인 모양이니, 한 집안의 가장인 대주의

운수가 그러하다면, 그 대들보 따라 살아야 하는 서까래들이야.

"이게 긍게 구신들이여?"

"그렇제."

연기나 불길 같은 머리카락이 불불이 뻗쳐오른 귀신들 다섯이 한 동아리로 뭉

쳐서, 가마솥보다 더 큼지막한 북청색 향로에 오그르르 들어앉아, 무엇이 그리

옹골지게 우스운지 전을 두드리며 하늘을 보고 앙천 대소 입 벌리어 웃는 듯,

속셈을 감추고 크크큭 낄낄대는 듯, 빰따구니 불룩하게 회심의 미소를 참고 있

는 듯, 심술이 잔뜩 나서 대주가 하는 일마다 헤살을 놓으려는 듯, ㄸ귀신이 각

각의 작해로 드글거리는 당사주 그림은 참 모골이 송연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

다.

"산에 가서 공딜이고 물에 가서 공딜이고, 공 많이 딜이야여어. 이런 운수 들

오먼 천하대장군도 쇠양없어요오. 지둥 뿌랭이 밑동부텀 흔들어 부링께로."

"어쩐디야."

"여그도 있잖에요? 보살 시님이 오구 밑이서 두 손 맞잡고 비빔서 염불허고

기도허고 헝만. 이렁 것 들먼 굿을 해도 큰굿 해야여."

"그런디 이옆으 껏은 또 머이대? 누가 왜 누구 머리 끄뎅이를 잡는당가? 이것

도 나한테 닥칠 일이래?"

"그건 상관없는 거이고."

"쳅이 본마느래한테 끄집힝만이? 대주가 작은각시가 많응게비네. 저 그 뒤에

또 한나 딱 섰그만."

"넘의 살림 속 귀경헐 뜸이 없겄는디요."

"또 머이라고 나왔간디?"

"올 신수가 참 괴악허요잉. 이런 괘 나오먼 나도 참 팍팍헌디, 그래도 헐 수

없제. 나온 대로 일러줄 수배끼. 거짓말은 못허겄고. 새겨서 들어 뵈겨."

갈마상산에 절무스천이라.

목마른 말이 산으로 올라간 형국이니 샘물이 전혀 없도다.

"엄동설한 눈 속으다 밭 갈고 씨가시(씨) 뿌리니, 수고는 뼈를 깎는디 공은 없

겄다네요."

설리경종 도로무공이고잉.

귀소양상 재화불소라.

귀신이 들보에 우니 재앙이 적지 않도다.

심중유고 항사출가라.

심중에 괴로움이 있어 늘 집을 나가려 한다아.

라고 했네요.

"아니 무신 그런."

아낙은 중치가 막혀 말을 못 잇고, 백단이는

"내 속도 시끄러 죽겄그만 왜 오늘따라 해왈이 이렇다요? 참."

한 소리를 뱉고 만다. 이상하게도 그 괘들은 아낙의 것이 아니라 마치 제 운

수를 예시하며 자기 앞으로 떨어지는 점괘 같았던 것이다.

백단이는 한문을 알 턱이 없었으나 그림만 보고, 그에 따른 글귀는 배운 대로

외워서 뜻을 풀어 일러준다. 그것은 시어미 점데기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점데

기는 또그네의 시어미한테 시나위 구음 넣듯이 그렇게 그림에 곁들인 글씨를 노

래처럼 읊는 법을 배웠을 터이고.

"까막눈이 문자속 어설픈 선비 뺨친다."

는 말을 들을 만큼, 청 홍 녹 황 그림만 보면 저절로 그에 따른 글귀들이, 단 한

자도 읽지는 못하지만 청산유수로 흘러넘쳐 읊어지도록 백단이는 당사주책을 익

히고 익히어서,

"백단이가 당골네 하기는 아까운 식견이 있다. "

는 말을 들을 정도로까지 되었다.

귀신살이 문에 비치니

질병을 부디 조심하라

비밀한 일 이루기 어려워

꾀하는 일이 불리하도다.

"내 코가 석 잔디 어느 하가에 남을 돌아볼꼬잉."

백단이가 막 그 구절을 중얼거리며 읊어 짚을 때였다.

사립문간에 웅성웅성 사람 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벼락을 치듯이, 지게 문짝이

떨어져 나가게 덜크덩, 발칵 열어제친 장정들이 방안으로 들이닥쳐 불문곡직 백

단이한테로 달려들어 멱을 틀어쥐었다.

"왜 이러요?"

놋쇠 깨지는 소리로 백단이가 비명을 질렀다.

영문을 모르는 고리배미 아낙이

"아고매애."

놀라서 방구석으로 달아나 제 머리통을 붙움키며 자지러지고, 뒤안에서 아들

놈 귀남이 썰매를 고쳐 주고 있던 만동이는 백단이보다 먼저 잡혀 이미 새파랗

게 질린 입술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한나절에 두 번씩이나 , 없던 일을 당한 거멍굴 사람들은 혼이 반이나 나가

아무 경황이 없는데, 매안의 원에서 명을 받고 들이달은 머슴과 종 호제들은 만

동이와 백단이를 앞세우고 뒤세워 끌고 가니.

거멍굴에서는 물론이고, 매안에서도 사람들이 고샅으로 몰려나와 둘씩 셋씩

서서, 이 사단이 대관절 무엇인다,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좌불안석 초조하게 수

군거리며 구경하였다.

이제 이기채의 엄청난 추단이 있을 것인데 죄상을 심문해서 처단하자면 덕석

말이 몰매는 피할 길이 없을 터이고, 또 그러자면 피몽둥이 몇 개는 좋이 부러

질 것 아닌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노종부 초상 치른 지가 엊그제인데, 해가 바뀌자마자 상청에 더러운 피 튀기

며, 살 찢기는 울음 소리 마당에 낭자한 것이 과연 당키나 한 일이랴. 그것도 굴

건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몸소 몽둥이 들어 난도로 후려치며 짓ㅈ는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라는가 부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지레 숨을 죽였다.

"죄진 놈이 죽는 것은 아니할 말로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지. 저러다 만일 억

울하고 원통한 분기를 못 이긴 증손이 그대로 성질이 북받쳐 기색을 해 버리면

어쩔꼬."

그러다 자칫 절명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남평 이징의는

"남 잡다가 나 잡기 쉬운즉, 남을 놓아 주어야 나도 놓여 날 것이데. 저토록

탱천하게 노여우니 큰일이로다."

혀를 찼다.

그런 염려가 들 만큼 이기채의 분노는 하늘을 쪼개게 치솟아 있었고, 그 분노

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기력은 쇠하여 있었다.

이 와중에, 내일이 오마던 날인 황아장수가 어찌 다른 때보다 하루를 앞당겨

매안으로 올라오다가, 이 뜻밖의 정경에 놀라서, 원뜸의 종가로 얼른 올라갈 염

을 못 내고 우선 아랫몰 임서방네 집으로 들어갔다.

"죽을 일을 헝 거이제 살 일을 헝 건 아니여."

임서방은 어서방과 고샅에서 고누 듣던 것을 걷어치우고 휘잉하니 머슴 사랑

쪽으로 걸음을 놓았고, 집에는 입서방의 아낙 앵두네와 딸내미 앵두가 마주앉아

시래기를 다듬고 있었다.

"아 야, 앵두야. 너는 왜 꼭 눈먼 큰애기 시라구 다듬디끼 그렇게 건성 대충

헛손질로 더듬거리고만 있냐? 손이 공중에 떠 갖꼬."

"어머이. 나 쩌어그 조꼐 가 볼라고."

"쩌어그가 어디여?"

"매맞는디."

"에라이, 썩을 년. 그래 귀경헐 거이 그렇게도 없어서 넘 매맞는 것 체다볼라

고, 크대 큰 거이 치맷자락 펄렁거리고 쫓아갈라고 그랬냐?"

앵두의 대가리를 쥐어박는 임서방네한테 황아장수가

"심바람 조께 시켜 보시오. 쩌어 원에 시방 살째기 가도 허겄능가 어쩌겄능가.

꽃니에미한테 물어 보래."

하고 말을 붙인다.

'원'이란 '원뜸'중에서도 이씨 문중의 종가를 남들이 부를 때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하는 말이었다.

"피난 난리 북새통에 인편 있다고 편지 전해 주라겄네."

임서방의 아낙은 눈꼬리에 웃음을 묻히며 핀잔같이는 말하지만, 앵두보고 얼

른 갔다가 말만 건네고 피잉 오라고 으름장을 놓아 보낸다.

실은 자기도 좀이 쑤시게 궁금했던 것이다.

앵두는 시래기 다발을 동댕이치고 튀어나가는데, 앵두네는 황아장수한테 마루

로 좀 올라앉으라 권하며 걸레로 탁, 탁, 마루를 친다.

앵두네가 황아장수한테 상냥한 것은 잇속이 있어서다.

매안으로 들어오는 초입인데다가 임서방이 사람을 좋아하고 이야기도 잘하는

것이 이무러워, 방물장수나 비단봇짐 황아장수나 해물장수나 간에 쉽게 들어와

다리를 쉬는 것이 임서방네 집이었다. 그러면서 물도 얻어마시고, 밥도 한술 얻

어막고 또 더러는 날이 저물면 좁은 대로 끼어서 한 밤 자고 가기도 하였다. 그

런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 방물장수는 신식 꽃핀이나 빨간 단추 같은 것을 앵

두 주라고 내놓기도 하였고, 황아장수는 만지기에도 아까운 모본단 짜치(옷감을

마르고 남은 헝겊 조각)를 옷고름이나 하라면서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해 다 저물어 가는디 여그디 자제 왜 수선시럽게 집안 뒤집힌 디로 갈라고?

오늘 시방 매안에 난리 나 부렀소."

황아장수는 임서방의 아낙 말에 뜻 모를 고개만 끄덕이었다. 그러면서도 굳이

지금 바로 갈 일이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아무리 난리가 났다 하더라도 저녁

밥은 먹어야 하겠는데, 여기 있는 것보다는 원뜸으로 올라가는 편이, 무엇이 나

아도 나은 까닭이었다.

"오라시네요."

얼마나 있다가 앵두는 꽃니까지 달고 내려와 헐떡헐떡 숨이 차서 한마디 던지

고는, 다시 머뭇거리다가는 행여 어미한테 잡힐세라

"꽃니야아, 꽃니야아."

마치 꽃니 불러 급하게 시킬 일 있는 것처럼 뒤쫓아 달아나 버린다.

"에이구우. 빌어먹을 년. 헤기사 이 세상에 지일 재밌는 거이 불구경 쌈구경이

라는디 오죽허겄냐? 패든지 맞든지 우리 일 아닝게로, 가서 보든지 말든지 맘대

로 허그라."

앵두네는 딸년이 뛰어간 쪽에다 눈을 한 번 흘긴다.

꽃니어미 우례는 침비라, 황아장수가 원뜸에 오르면 으레 먼저 큰방에 비단짐

을 내리지만, 혹시 묵고 가야 할 형편일 때는 우례의 행랑에서 한숨 붙이곤 하

였다.

아까 춘복이를 잡으러 갈 때도, 지금 막 만동이와 백단이를 잡아 올때도, 꽃니

아비 사노 정쇠가 끼었던 탓에, 우례는 안채의 효원과 사랑채 마당 귀퉁이에 선

정쇠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일 정황을 상세히 효원에게 전하였다.

마침 큰방에서 효원이 율촌댁과 근심스럽게 마주앉아 있는데 우례가

"황아장수가 왔는디요."

말씀을 사뢰자, 율촌댁은 역증 섞인 대구를 하였다.

"그 아낙은 눈이 없다드냐?"

머쓱해진 우례는 무렴하여 얼굴을 붉히며 새아씨 효원한테 원정하듯, 어찌할

까 바라본다.

그러나 효원의 낯빛은 냉랭하다.

"안서방네한테 물어 보아라."

뒷걸음을 치며 물러나온 우례는 공연히 후우 가슴을 쓸어 내리고는, 안서방네

를 찾는다. 안서방 내외는 정지문간 토방에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기채가, 죽은 그만두고 미음만한 곡기조차 하지 않은 채

저토록 극노하여, 혹시라도 나서는 아니 될 탈이 나면 어찌할 것인가, 마음을 졸

이며 노심초사 애가 탄 안서방이 안서방한테 껍질은 두드려 은행을 까 주면서

"어뜨케라도 한술 뜨세야 헐 거인디."

애가 바텄다.

안서방네는 저녁에 은행죽을 쑤려는 것이다.

"황아장수가 왔는디요."

우례는 큰방에 사뢴 말을 그대로 안서방네한테 다시 한다.

"집안이 왼통 혼비백산이라 어디 궁뎅이 붙이고 앉것냐잉? 기양 우리 방으로

가서 조께 쉬고 있으라제."

심상한 듯 말하는 안서방네 손끝이 저도 모르게 떨린다.

우리 작은 아씨, 인자 어쩌꼬잉.

인자 참말로 어쩌꼬잉.

황아장수 왔다는 말이 무슨 저승사자 왔다는 말처럼, 옮도 뛰도 못하게 목을

조이는데, 우례는 아무 가닥을 모르는 사람이라

"기양 나한테 있으라지요 머."

하고 돌아서려 하였다.

"자 좀 봐. 무단히 두 번 말을 시키네."

우례는 안서방네 성격을 잘 알아서, 거기 무슨 말을 더 붙이지 않고 얼른 시

키는 대로 해 놓고는, 사랑마당 옆구리로 나갔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기채는 사랑 누마루 꼭대기에 송곳처럼 날카롭게 서서, 뼈다귀 싼백지 보자

기를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만동이는 아예 대가리를 꿇고 앉은 무릎 틈바구니에 박아 넣고는, 어깨마저

오그라지게 움츠린 채 전신을 와들와들 떠느라고, 감히 고개 들어 어디를 바라

볼 생각조차 못하였다.

그러나 백단이는, 어젯밤의 꿈 때문에 깨어나는 순간의 새벽부터 지금까지 가

슴을 졸이며 긴장을 한 끝인지라, 차라리,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낭패감에, 무슨

각오라도 단단히 한 사람인 양 또렷하게 시선을 들어 이기채 손 끝에 매달린 보

자기를 쏘아보았다.

그것은 시아비 홍술의 뼈다귀 싼 백지덩어리가 분명하였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기채가 다시 놋재떨이 깨뜨리는 카랑카랑한 소리로 물었다.

"모르겄는디요."

귀신을 데리고 노는 당골네 무당이 뼉다구 하나를 가지고 못 놀으랴, 오냐, 좋

다. 나는 엊저녁 꿈으로 바서 성헌 다리로 이 대문 빠져 나가기는 틀린 모양인

디, 운 좋으먼 둘다 살고, 재수 없으먼 내가 죽든 저 사람이 죽든 하나는 죽을

것이다. 나 죽는 건 섧잖으나, 죽기 전에 한판 놀아 보도 못허고 죽어서야 어디

죽은 원혼 날망제 씻겨 주는 굿판의 당골네 백단이라고 헐 수가 있겄느냐.

기왕에 이렇게 된 일, 다 들켜서 덕석말이 맞어 죽을 일만 남었겄그만, 말을

해도 맞고 안해도 맞을 것 아니냐. 말허먼 죄 있응게 때리고, 말 안허면 말허라

고 때리고.

내가 어디 우리 시아부니 뼉다구 갖꼬 한 번 놀아 보끄나?

사실은 간이 타서 말라붙게 무서운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보려고, 백단

이는 자꾸만, 신 내리라. 굿판에서 독경하듯이 염력을 다해 자신에게 그처럼 경

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모르겄는디요오?"

이기채는 뼈다귀 보퉁이를 치켜든 채 벌써 누마루 아래로 내리달으려 하는데,

옆에서 기표가 베옷 소매를 움켜잡았다.

내가 샌님 성품 기혈을 알지라우. 나를 박살낼라고 뛰어낼오시다 곤두박질치

먼 나도 죽을랑가 모리겄지마는, 샌님도 성튼 못허실 거이그만요.

약을 올려 주리라.

너만 부모 있고 나는 부모 없냐?

양반만 부모 중허고 팔천 사천 무당 박수 당골네는 부모도 안 중헌 줄 아냐?

앙 그리여. 그렁 거이 아니여. 너는 시방 느그 부모 묏동 파헤쳐서 욕뵈었다고

길길이 뛰는디, 뛰다가 우리를 쥑일라고 허는디. 나도 우리 부모 유골 한 번 잘

뫼셔 볼라고 밤 잠 못 잔 세월 여러 해 산사램이여어. 그런디 시방 니가 천민의

뼉다구라고 그렇게, 명부에 지셔야 헐 망제 유골을 백주 대낮에 꾀 벳겨 파내

들고, 중인환시리에, 너나 없이 뺑 둘러선 이 자리에서 뱅뱅 돌림서 웃음거리를

맨들어? 그렇게 욕되게 맨들어?

양반은 상놈한테 먼 짓 해도 상관없고, 상놈은 양반 옆에 찌끄래기만 줏어 먹

어도 죽을 죄냐?

아 느그 양반들은 종도 많고 머심도 많고 호제도 많드라? 죽어서 묏동에 파묻

힌 망자도 살어 생전에마냥 종 부리고 머심 부리고 호제 부리먼 안 좋겄냐? 그

렁게 우리 압씨가 느그 어머이 묏동 속에 옆구리 좀차지허는 것도, 솟을대문 안

채 옆에 행랑채 하나 지었다 생각허먼 될거 아니여? 그거이 먼 죄여? 심바람 시

길 일 있으먼 불르기도 좋고.

아 그러다가 춘풍에 도화꽃 피먼 음양이 어우러져 한판 놀아도 보고. 안 좋

냐? 이승 저승은 유명도 달르고 멩암도 달른디. 양반 상놈도 뒤바껴서, 없든 시

상 한 번 살어 보먼 그것도 참 갠찮응 것 아니냐?

기표한테 소매를 붙잡힌 이기채는 사랑 누마루 위에서 연이어 마룻대가 울리

도록 쩌렁쩌렁 호령을 하였지만, 백단이는 한 마디도 듣지 않았다. 안 들으면서

오직 제 말로 제게다가 경을 읽었다.

그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 잡어먹은 구신맹이네."

옹구네가 눈도 깜박 안하면서 우례한테 속닥였다.

"이년. 네가, 이래도 몰라?"

드디오 노기가 뻗칠 대로 뻗친 이기채가 뼉다귀 봉지를 두 손으로 움켜잡아

공중 높이 치켜들더니 그대로 내던져 누마루 아래 까마득한 마당으로 동댕이를

쳤다. 마당에 떨어져 부딪친 백지가 터지면서 삭고 썩은 뼈다귀가 박살이 나 산

지 사방으로 산산히 흩어졌다.

마치 백단이의 꿈속에서 손에 들고 있던 종이꽃 꽃심이 빠지며, 꽃부리 꽃잎

들이 하나씩 소리도 없이 낱낱 허옇게 흩어지듯이.

백단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꿈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무망간에 두 손

을 벌리어 그 꽃잎 잡는 시늉으로, 흩어진 뼈를 주우려 하였다.

어아아, 서러워라.

만동이도 반사적으로 개 떨 듯이 떨면서 뼈를 줍는다.

"저것들을 덕석에다 말어라."

이기채는 칼로 자르듯 말했다.

 

 

6. 내 다시 오거든

 

방이 깊어 효원은 윗목 반닫이 속에 깊숙이 넣어둔 상자를 꺼낸다.

대접의 주둥이를 서로 맞물려 포개 놓은 것만한 이 상자는 , 마치 제사에 쓸

밤을 친 것 같은 모양인에, 윗면과 바닥면은 편편히 깎이고 배는 볼록 나왔다가

다시 아래로 홀쭉하니 빨려 들어간 팔각형이었다.

몸통의 사다리꼴 면면마다 가위표로 복판을 갈라 쪽빛 당홍 노랑 녹색 종이를

바르고, 그 한가운데 청 홍 황의 삼색 빛깔 굽이치는 태극모양이며 검은 날개

당초문처럼 펼친 박쥐를 정교하게 오려 붙인 상자는, 곽종이로 만든 것이다.

효원이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연분홍 갑사 바른 안쪽이 볼그롬한 뺨을 수줍게

드러낸다. 아른아른 비치는 무늬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

"상자는 겉모습도 예뻐야 하지만, 열어서 안쪽이 고와야 한다."

효원의 친정 어머니 정씨부인은, 앙징스러운 바구니만한 이 종이상자에 색지

를 붙이고 갑사를 바르는 용원에게 말했었다.

정씨부인은 솜씨가 좋아 아기자기 안방에 쓰이는 아녀자 물품을 못 만드는 것

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색지함과 매듭만큼은

"과연 절품이라."

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만들곤 하였다.

효원은 본디 호방 활달하여 보자기나 귀주머니를 만들기보다는, 먹과 붓으로

궁체 글씨 쓰기를 즐겨하였지만, 아우 용원은 또 그네와 달라서 어머니 곁에 앉

아 명주실과 한지에 물을 곱게 들여, 다회를 치고 끈목을 만든 색색가지 실로는

딸기술 봉술 나비방울술 방망이술 낙지발술을 꼬아 늘이우기도 하고, 톡톡한 종

이로는 수십 개 봉지가 주둥이를 오므리면 함같이 접히었다가 펼치면 합죽선처

럼 옆구리 벌어지는 손것 지갑이며, 올망졸망 쓸모 따라 크고 작게 배치한 서랍

까지 몇층씩 빼닫게 한 상자들을 곧잘 만들곤 하였다.

그 중에서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팔각 종이상자는

"여기다가 패물이랑 노리개랑 담아 두시어요."

하면서 용원이, 시집가는 형 효원에게 주려고 각별히 곱게 마음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 정이 어려 새삼 애틋하였다.

상자 속에는 어머니 정씨부인이 장녀의 혼수로 넣어 준 금가락지 옥가락지며,

금비녀 비취비녀 은비녀, 붉은 산호와 남색 유리, 노란 밀화를 날개에 박은 칠보

나비단추, 호박과 금파단추, 은칠보 국화무늬에 매화무늬 아로새긴 뒤꽂이들이

장그랑장그랑 소리 나게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한 켠에는 붉은 비단 보자기가 자그맣게 돌돌 말리어 있다.

혼례 때 쓰고는 백지로 싸서 보관해 둔 삼작 노리개와,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백옥 세공 투각 향갑 노리개, 오색 실로 수놓은 매미 향낭 노리개가 함께 들어

있는 보자기다.

이 보자기를 펼치어 매듭 술을 단 노리개를 내놓고, 등불 아래 효원은 한동안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방바닥 장판

위에 한 줄로 나란히 늘어놓아 본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손끝이다.

방문 바깥 마당으로는 바람 많은 음 이월의 밤을 스산하게 흔드는 덜걱, 덜거

덕, 소리가 지나간다.

그 소리에 흔들리는 등잔불 주홍의 불빛이 적막하게 어리는 보패들은, 낱낱이,

영롱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울연한 어둠을 머금은 듯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무

겁게 그늘진 효원의 심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좋을까.

그네는 제 앞에 늘어놓은 패물 노리개를 다시 하나 하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

고 어루만져 살피며 들여다본다. 비록 자신의 물건이라 하지만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본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효원은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낯빛으로

뒤적뒤적 이것들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다른 것은 그만두고 삼작 노리개와 백옥 세공 투각 향갑

노리개만 집어들어, 그 중에 한 가지를 고르려는가, 다시금 묵묵히 고개를 숙이

고 있다.

저고리 겉고름이나 안고름 아니면 치마허리에 차는 노리개는 홍 남 황 삼색을

기본으로,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옥색, 얼마든지 고운 열두 가지 빛깔의 다회로

매듭을 맺고는, 거기에 패물을 달아, 낭창하게 흘러내리는 술을 치마같이 길게

드리웠는데, 이 노리개 세 점을 한 벌로 친 것이 삼작 노리개였다.

원래 대례복에 차는 대삼작 노리개에는, 손바닥 크기가 넘는 선홍색 산호가지

와, 백옥으로 깎은 나비 위에 진주 청강석 산호 같은 구슬들을 절묘하게 배열하

여 금속 세공을 한 나비 한 쌍, 그리고 밀화로 부처님 손 모양을 빚은 패물, 주

먹만한 밀화불수를 쭉쭉 벋은 낙지발술에 달아, 진귀하고 무게 있는 기품을 자

랑하였다지만.

그만은 못해도 효원의 삼작에는 노란빛 짙은 녹두색 봉술에 은장도 맺은 것과

진남색 봉술에 칠보 입힌 은박쥐 맺은 것, 다홍 술에 양날게 활짝 편 은나비 맺

은 것이 한 벌로 묶여 있었으니, 은삼작 낙지발술 노리개라고나 할까. 그것은 정

밀하면서도 요려하고 또 은근하였다.

그리고 향을 넣는 백옥 향갑은 곽 속을 다홍 갑사로 곱게 발랐는지라, 머리카

락같이 섬세하게 투각된 백옥의 문양 사이 사이로 붉은 빛이 얼비치어, 보는 이

의 마음을 빨아들이며 사로잡았다. 이 향갑에는 금사를 감은 청옥색 봉술이 하

르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향갑에는 사향을 넣어라. 뒤뜰 후원이나 동산을 거닐 때, 사향내는 배암의

범접을 막아 주느니. 뿐 아니라 이 향을 갈아서 술이나 물에 타 마시면 급한 체

증에 효험이 있니라. 사향은 향내도 좋지만 쓰임새가 꼭 있으니 유념해 두렴."

또 호박이나 금파 같은 패물은, 사람이 뜻밖에 다쳐 피를 흘릴 때 갈아서 응

급용 지혈제로 쓰는 것이라고, 정씨부인은 덧붙여 일렀었다.

"이런 패물들은 다 허영에서 단순히 사치하자고 마련하는 게 아니라, 몸가짐을

아름다이 하면서도 그 용도를 제대로 알아 지혜롭게 쓰는 부덕의 소치로 지니는

것인즉. 잘 가지고 있다가 이 다음에 네 자녀나 며느리한테 물려주어라. 대를 물

리면 가보가 되겠지."

하시던 보패와 노리개들.

효원은 이 중에서 백옥 향갑 노리개를 따로 백지에 싼다.

그리고 금가락지 한 쌍을 다른 백지에 쌌다.

어이가 없다면 없는 일이었으나, 그네는 더 이상 깊이 생각지 않고 이것들을

아까 풀어 놓은 비단 보자기에 감아 싸며, 저도 모르게, 맷돌이라도 얹히는 가슴

같이 무겁고 답답한 속에서 터지는 한숨을 후욱, 뱉는다. 뱉은 숨이 뭉치며 거꾸

로 받친다.

"콩심아, 가서 안서방네 좀 보잔다고 해라."

자리끼를 받쳐들고 새아씨 시중들 일이 혹 없는가, 밤늦어 건넌방으로 들어온

교전비 콩심이한테 효원은 낮은 소리로 일렀다.

"예."

"또 때까치마냥 땍, 땍, 떠외지 말고. 가만히 오래. 알었지?"

"예.

뒤걸음치며 방문을 열고 나간 콩심이가 행랑채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우례의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 들리는 것에

"누군가?"

싶어서 귀를 쫑긋한다.

"어매애. 이 오밤중에 왜 질을 나설라고요잉? 벨일이네, 참말로. 왜 않든 일을

헌당교? 누가 급사했단 전보를 받은 것도 아닌디."

놀란 소리 하는 것은 꽃니어미 우례였고

"급사 못잖은 일이 있어서 헐 수 없이 기양 나서야겄어. 내가 암만해도 걱젱이

되야 불안헌 일이 하나 있그더엉. 어째 벨일이야 있을라디야. 기왕 날도 저물었

는디, 험서나 하룻저녁 더 자고 묵을라고 했는디, 아 왜 그렁가 아까부텀 당최

맴이 시끄러서 머이 지핀 것맹이라 안되겄네. 나 기양 살째기 나갈랑게 어른들

소란허신디 표내지 말소잉?"

하면서 등짐을 짊어지는 것은 황아장수 아낙이었다.

"난리 몰아오능게비네에. 숨넘어가겄소이? 날도 춥고 질도 험한디, 가다가 늑

대 만나먼 어쩔라고오."

하는 것은 옹구네 목소리다.

아니, 저 예펜네가 아직도 안 가고 여그서 놀았등갑네.

콩심이는 공연히 입을 비쭉하며 휘잉 그 방문 앞을 지나쳐 안서방네한테로 새

아씨 말씀을 전하러 간다. 새앙쥐 꼬랭이 같던 머리채에 제법 살이 오른 뒤꼭지

를 깐닥거리며

전갈을 받고 온 안서방네를 가까이 부른 효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닫이 위에 싸놓은 보퉁이를 내렸다.

"이것은 치마 저고리 각각 두 감씩 든 것이고, 이것은."

보퉁이를 안서방네 앞으로 밀며 효원은 아까 가락지와 향갑 노리개를 싸두었

던 붉은 비단 보자기를 보퉁이 위에 얹는다.

"펴보면 아실 것이네. 누구 눈에 안 띄게 얼른 갖다 드리게."

안서방네는 그러나 그 보퉁이와 보자기에 손을 못 댄다.

심중이 시방 오죽허시리요.

아매 아거이 당신 혼수로 갖고 오신 옷감 패물들잉게빈디, 덤뿍 덜어서 띠여

주시능갑다. 범연허신 새아씨, 시앗을 보먼 질가에 돌부체도 돌아앉는다등만, 도

량아 하해와 같드래도 이런 꼴 당허고는 속 안 씨릴 수 없을 거인디, 이것 저것

속상헌 흉허물은 다 덮어 부리시고 우선 사람 살리울 일부터 앞세워 생각하기가

어찌 쉬울꼬. 아이고, 내가 당최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겄구나.

"긴요하게 쓰시라고."

말끝을 흐리는 것이 효원의 마음도 몹시 착잡한 듯하였다.

뚜드러 패도 시원찮으실 거인디.

마지못해 두 손으로 보퉁이와 보자기를 글어안은 안서방네가 총총히 막 중문

을 나서려 할 때, 황아장수 아낙과 옹구네가 토방으로 내려서는 것이 보이고, 그

뒤에 등잔불을 등진 우례가 무어라고 몇 소리 하면서 긁적긁적 뒤따라 나오는

양이 보였다.

안서방네는 무망간에 주춤하며, 보듬은 것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아랫몰끄장은 동무를 해 주겄지마는, 그 담은 몰르요잉? 산을 넘든 물을

넘든."

"밤질 댕기는디 이골난 년이 머 어둡다고 못 갈랍디여?"

"배곯은 호랭이가 드글드글허다든디?"

"사램이 무섭제 호랭이가 머이 무서?"

"앗따아, 팥죽 많이 쒀 놨능게비?"

"얼릉 가아. 앞질 막지 말고. 걸려어. 글 안해도 급헌디."

"누가 뒤에서 쫓아오요? 급헌 걸음 허다가 무단히 개골창이나 논바닥에 거꾸

로 백히지 말고, 싸드락 싸드락 이얘기도 해 감서 갑시다아. 나도 심심헌디. 인자

가먼 또 얼매나 얼매나아 있다가 올람서."

"하이고오, 정든 님이등갑네. 벨라도 살갑게."

"아닝게 아니라, 님만 님이간디요? 정들먼 다 님이제."

수작을 주고 받으며 고샅으로 나가 저만큼 앞서가는 아낙과 옹구네 두 사람의

뒤꽁무니에 그림자 스미듯 숨어서 따라가던 안서방네는 웬일인지 순간 불길한

예감이 싸악,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무엇에 대한 불길함이라고 집어 내어 말한

수는 없었으나, 가슴을 차갑게 훑고 써늘히 내려가는 그 찬기운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고샅의 인기척에 호제집 누렁이가 커르르응, 커겅, 컹, 컹, 아는 사람 발자국에

대고 싱겁게 짖는 소리를 낸다.

안서방네는 두시런거리며 저 아래로 멀어지는 두 아낙의 흐끗흐끗한 뒷모습에

눈을 주고 서 있다가, 잽싸게 오류골댁 사립문 안으로 들어선다.

"오류골아씨."

안방 문앞 바싹 다가서서 숨소리로 불렀는데도 방문이 벌컥 열린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바깥 소리에 오류골댁

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이리라.

"들어오소."

"아니, 여그서 기양 갈랍니다. "

안서방네는 토방에 선 채로 말했다.

아무리 속내를 아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하인의 신분이니 상전들의 속

아픈 사정에 너무 상세히 아는 체하는 기미를 보여, 상전을 무안하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심바람이 있어서."

"무슨?"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마루끝으로 나온 오류골댁이 안서방네 품에 보듬은 보

퉁이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본다.

"새아씨가 이걸 전해 디리랑만요."

"무언데?"

"저는 잘 모르겄는디요."

"들어와."

오류골댁은 순간 직감으로 안서방네가 이번 일을 시종 모두 알고 있으리라 짐

작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네가 노비 안서방의 아낙이지만 본디는 양인의 딸이라

종은 아닌데다가, 그 어느 한다 하는 양반의 부인 못지않게 깊은 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오래 보아서 아는지라, 이와같이 찢어지게 애통한 날, 차라리 털어놓

고 함께 울고라도 싶어진 오류골댁은 보퉁이 대신 안서방네 손을 잡았다.

상전의 체신은 이미 무너져 위의를 잃어버린 이 마당에 ,누구의 목이라도 의

지하여 끌어안고 통곡을 할 수만 있다면, 그네는 상하귀천도 가릴 것 없을 것만

같았다.

"지무세야지요."

"아직 안 잔다네."

"그러먼... "

울음이 치받는 것을 가까스로 누른 오류골댁 북받친 음성에 이끌리어 안서방

네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렇다기보다는 사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는지도 모르는 작은 아씨 강실이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가깝게 더 보고 싶

은 마음을 가누기 어려워서 그네는 그만, 방문턱을 넘은 것이다.

강실이는 흰 댕기를 물린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흰 종이로 만든 그림자처럼

방 가운데 오도마니 앉아 있었다.

"작은 아씨."

안서방네는 오류골댁한테 보퉁이를 건네면서 강실이 앞으로 주저앉았다. 그리

고는 덥석, 마른 가랑잎 같은 손을 잡았다.

강실이는 그 투실투실한 온기에 눈물이 배어 있는 안서방네 손바닥이 제 손을

감싸는 대로 내맡긴 채, 무연한 시선을 떨구고만 있었다.

"어디로 가시든지 그저 몸 성히 기시야요."

꼭 지가 따러갔으먼 쓰겄는디요.

그래야만 맘이 노이겄는디요.

어쩌까요.

속말을 삼키는 그네의 입시울이 일그러지며 비죽비죽 실룩인다.

그러더니 그예 눈물을 쏟고 만다.

파리하게 빛이 바랜 강실이 두 손을 싸안아 제 뺨에 어루며 부비며, 못 참고

흐느끼는 안서방네 등뒤에서 오류골댁도 입술을 짓깨문다.

아예 이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일찌감치 초저녁에 불을 꺼버린 대청

건너 작은방의 기응은, 잠이 들었을 리 천만 없으련만 헛기침 한 토막도 소리내

지 않는다.

불쌍허신 우리 작은 아씨.

눈물로 범벅진 강실이의 손을 제 입에 대고, 터지려는 통곡을 안간힘하며 막

고 있는 안서방네 온몸에 몸부림의 경련이 인다.

차라리 죽는 일리라먼, 이런 몸뎅이 다 늙은 것 머이 아까워서 대신 못 죽어

디리리요. 열 번이라도 죽고 백 번이라도 죽으리다. 허나 대체 이 일을 어쩌먼

좋으까요잉. 올개미 둘러쓰고, 벗도 못헐 멍에지고, 칼 쓴 죄인맹이로 하로 하로

생목심 깎어 바트는 세상을 혼자 살어얀디.

어머니도 안 지시고 ,부모 성지간 암도 없고, 일가 친척 하나 없고, 아는 사람

머리크락도 안 뵈이는 심심산골 절간으 암자로 들어가시먼, 인자 살어서는 못

오실라요오, 아이고오. 살어서는 못 오실라요오...

거그가 어딩가 내 꼭 알어 갖꼬, 어쩌든지 꾀를 내서 한 번 지가 가 볼랑만요.

가서 뫼시고 살든 못헌다 허드래도 꼭 한 번 가서 뵈일랑만요.

시상에 이런 일이 있능가요.

먼 길을 떠날 사람이라 모처럼 헝클어진 머리 물 발라 빗은 강실이의 머릿단

에 검은 불빛이 미끄러진다. 하지만 상중이니 아직 무색옷을 입을 수는 없어 흰

옷을 입고 가야 한다.

오류골댁은 강실이가 복을 벗어도 좋은 날을 날짜 짚어서 일러 준다. 그리고

방 한쪽에 싸 놓은 봇집을 푼다. 효원이 보낸 보퉁이와 비단 보자기를 거기 함

께 싸려는 것이다.

"한 번 보시지요."

모시 한 필과 숙고사 연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맛감, 그리고 진홍 대단 치마에

진노랑 저고리감이 개켜져 들어 있는 효원의 보퉁이를 펼친 오류골댁이 깜짝 놀

란다.

"질부가 어찌 이렇게."

"긴요하게 쓰시랍니다. "

허어.

오류골댁 입에서 중치 눌린 탄식이 터진다.

대실 질부 효원의 마음 씀씀이와 도량이 놀랍고 고마운 탓도 있었지만, 왜 그

런지 그처럼 값비싼 물품을 강실이한테 들려 보낸다는 것이, 참으로 이 가련한

여식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밀어내 버리는 것만 같은 흉중을 가

누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이것은 또 무에인가."

오류골댁이 금가락지에 향갑 노리개를 싼 보자기를 풀어 펼치는 순간, 강실이

는 드디어 미간을 깊이 파며 괴로운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내가 인두겁을 쓴 사람의 형상이라면 차마 어찌 저 참혹한 모시 비단 숙고사

며, 가락지 노리개를 바로 볼 수 있으리요.

나는 사람도 아니다.

강실이는 머리 속이 꿰뚫리는 통증에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것은 놋젓가락을

머리 복판 정곡에 박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나는 결코 저 물품들을 가지고 가지 않으리라.

눈부시게 화려하고 자지러지게 어여쁜 것들이 찌르는 비수는, 덕석말이 몰매

곤장이 오히려 달다 할 만큼 무참히 강실이의 가슴속 깊은 살을 난자하여 찢으

니, 어디로든 정처없이 떠나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효원이 보낸 물품만은 도저

히 이고 메고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강실이는 겨우 입술을 달싹이어 오류골댁을 부른다.

"왜야."

어찌 네가 입을 여느냐.

보퉁이 싸는 손을 잠시 멈춘 오류골댁 시선에 눈물이 맺힌다.

"그것들은 그냥 여기 두서요."

"무엇 말이냐? 이것?"

오류골댁이 효원이 보낸 보퉁이와 보자기를 싸다 말고 들어올리는 시늉을 하

며 묻는다. 강실이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대실 새형이 너한테, 생각이 있어 주는 것 아니냐. 새형 말대로 이제 긴

요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게다. 가지고 가기는 좀 무거워도."

"아니요."

"아니라니?"

"이 다음에, 후제... 내 다시 오거든, 때 쓸께요. 그때까지 어머니가 잘 두시어요."

오류골댁은 억장이 미어져 말을 못 잇는다.

말 그대로라면 강실이 말이 하나도 잘못되거나 이상할 것 없었다. 설령 시

집을 가는 딸이라고 하여도 여기는 친정이니 다시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곳이며,

유배를 간다 할지라도 세월이 가서 죄가 풀리면 마땅히 돌아오는 것이 집 아니랴.

그런데 그 '다시 오거든'이라는 말이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길을

강실이는 가려 하는 것만 같다.

오류골댁은 울음을 삼키며 그것들을 꽁꽁 묶어 조그맣게 부피를 줄인다.

기어이 지워 보내려는 것이다.

"무거워서 나는 못 들고 가요."

"황아장수가 제 등짐에다 얹어 지면 되지야."

아이고, 내... 새끼.

 

 

7. 푸른 발톱

 

밤이 더욱 깊어진 한고비, 안서방네가 보퉁이를 보듬고 주춤주춤 뒤따르는 고

샅길은, 발부리로 더듬어 간신히 한 걸음씩 나갈 만큼 어두웠다. 구름만 두텁지

않았으면 달이 있는 밤이라 이보다는 걷기에 나았을 것이지만 오늘 밤은, 다행

인가, 불행인가, 비 먹은 구름이 스산하게 두꺼웠다.

"작은아씨."

어둠 속에서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부르며 보퉁이를 건네준다. 이제는 강실이

혼자 가야 한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드는 강실이 손이 검불처럼 힘이 없어 휘청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

이 기운으로 어뜨케 단 한 발이나마 낯선 넘의 길을 디디시꼬잉.

"부디 몸조심 허시기요."

업어다 디릴 수만 있다먼 얼매나 좋으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내가 따러갈 수

만 있는 형편이라먼, 산을 넘고 물을 건네도 내가 이 등어리에 다 업어 뫼시고

갈 거인디. 그러먼 작은 아씨도 아조 쪼께는 덜 설우실랑가도 모르는디. 저승길

도 아닌디 어찌 이리 혼자서 가시까요오.

안서방네는, 보퉁이를 받아 안은 채 무엇을 어찌할 아무 염도 내지 못하며, 그

저 바람에 몸을 맡기고는 아랫몰 물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강실이한테, 하

직의 인사로 공손히 무릎을 꿇어 절을 한다.

맨땅에 조아리는 안서방네가 흙 묻은 이마를 들어올릴 때, 그네의 눈앞 어둠

속에서 강실이의 흰 치마폭 자락이 펄럭, 펄럭, 나부끼었다.

안서방네는 끓어지는 창자를 오그리며 일부러 범상한 척 하직을 한다. 그것이

이 불쌍한 상전에 대한 하인의 예였다.

작은아씨. 어디로 가시든지 그저 몸 성히. 딴 맘 잡숫지 말고, 큰 맘 잡숫고...

어머님 생각을 해서라도 부디 이 고비를 이기시야 해요잉.

안서방네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채 젖은 얼굴을 들어 강실이를 우러른

다.

조상님들이 무심치 않으실 거이여요.

이상하게도 명부의 적막한 펄럭임같이 나부끼는 치맛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안서방네는, 물을 건너 동구밖으로 가뭇 모습을 감추는 강실이한

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황아장수는 동구밖의 정자나무 귀퉁이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던 것

이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어둠에다 몸을 묻고 눈빛으로만 강실이 오는 기척을

살피던 황아장수 아낙의 눈에 희끗희끗 옷자락이 비쳐 들었다.

오시는구나.

등짐 진 멜빵을 추스리며 그네는 길섶으로 한 발짝 나선다.

오는구나.

똑같은 시각에 옹구네도 강실이의 흰 옷자락이 휘청휘청 펄럭이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네는 정자나무 이쪽 건너편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

의 눈빛이 번뜩 푸른 발톱같이 부시를 친다. 그리고는 휙, 여우가 공중으로 몸을

날리듯, 강실이 오는 길목 어귀에 미리 나가 길을 막았다. 그리고 버르르, 갈기

를 일으키며 기다렸다.

그네는 이미 심상치 않은 오늘 밤의 일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개보다 날

카로운 그네의 후각과 촉각에 걸려든 일이 지금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구신을 속이제 나는 못 속여. 내가 누군디."

아까 황아장수와 어깨를 나란히 부딪치며 좁은 고샅길을 구불구불 내려올 때,

겉으로는 아무 내색 안하면서 흔연히 다른 이야기만 주원섬겼지만, 속으로는 골

똘히 생각에 생각을 굴리며, 웬일인지 조급하게 쫓기는 마음을 그네는 겨우 붙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랫몰 어귀에서 할 수 없이 아낙과 헤어지며

"그러먼 어디 정그정 쪽으로 갈라요?"

물었다. 아낙은 그 대답 대신 쭈밋거리더니

"나 알어서 갈랑게 몬차 가드라고. 쉬엄쉬엄 가지 머. 어채피 밤질이라 서둘르

먼 돌팍에나 채이지, 축지법을 헐 것도 아니고."

하는 것이었다.

"어매? 아까는 누가 뒤꼭지 할퀴러 쫓아오는 것맹이로 신짝을 뒤집어 신게 서

둘등마는. 왜? 원뜸에 누구 빚쟁이 온답디까? 도망치디끼 오밤중에 쉬익 쉭, 비

얌 소리를 냄서 나와 놓고는?"

"넘이사."

"오상허네요이. 머 누구랑 밤도망 갈 약조 맞촤 놨소?"

"참 쪽지께 무당을 허겄네, 일없이 질같으서 밤을 샐랑가?"

"아니 나는 그래도 질동무 의리로 한 마디 헝 거이제."

"의리는 내가 이고 갈랑게 얼릉 집이나 가 보셔어. 글 안해도 질 더딘디 발목

붙잡지 말고. 말에 갱겨 자빠지겄네. 칡넝쿨잉가."

"누구 눈 맞최 논 홀애비 있능갑소잉? 어째 내 그에 그러네?"

히히히.

옹구네는 일부러 눙치는 웃음을 깨물어 장난치는 것이라는 표를 하고는, 발걸

음 돌리어 거멍굴로 가는 척하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이어서 황아

장수도 옹구네 낯바닥 돌리는 것까지는 못 보았을 터이나, 옹구네는 그 아낙의

걸음 놓는 방향을 날카롭게 꼬아보았다. 옹구네 짐작대로 황아장수는 동구밖 정

자나무 쪽으로 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아낙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강실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새로 뚫린 정

거장 앞길을 피하여 사람 없는 소롯길로 빠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는, 걸어서

밤길을 갈 것이다.

거기까지는 짐작하겠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두무지 떠오르지

않아 가슴을 웅그리며 물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우선 막혔던 오줌을 누던 옹구네는, 순간, 쏟아지는 쐐애, 소리에 번개

같이 한 생각이 꿰뚫고 스쳐 후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여, 그러먼 되겄다."

아이고, 신통허구라.

제 무릎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옹구네는 갑자기 신이 났다. 그리고 어서 강실

이가 나타나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그말 그른 데

없어서, 조바심에 숨만 넘어갔지 강실이의 모습은 좀체로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펄럭, 펄럭, 헝겊 조각 희뜩이는 것처럼 아랫몰 물 모퉁이로 사

람 옷 나부끼는 기척이 비친 것이다.

옹구네는 그 물 건너는 길섶에 무기를 꼬나쥔 복병처럼 고개를 무릎에 박은

채, 오줌 누듯 옹크리고 앉아서 바짝 몸을 숨기고 강실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

다. 정거장 쪽으로 가든 소롯길 쪽으로 가든 이 길목까지는 건너와야 어느 방향

을 정할 수 있는 길섶이었다.

마치 먹이를 채려는 승냥이같이 온몸에 터럭을 세우고 발톱을 가는 옹구네는

벌레벌레 가슴이 벌렁거린다.

강실이는 옹구네 가슴 벌렁거리는 것을 따라, 얼핏 어둠에 먹혀 지워진 듯 스

러졌다가 흰 반점처럼 가뭇 드러나곤 한다.

강실이의 모습이 안 보이면, 아차, 싶다가 설핏 보이면 옹구네는 후끈, 더운

피가 얼굴로 모여 흥분을 참지 못했다.

아이고오, 더이어어.

성질 급한 옹구네 가슴패기에 땀이 맺힌다.

그때였다.

일부러 속곳도 추스리지 않은채 저고리 앞섶을 누르는 옹구네 바짝 코앞으로,

허깨비 같은 강실이가 소리도 없이 다가섰다.

옹구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할퀴듯이, 별안간 홱, 몸을 솟구쳐 일으키며

훌떡, 뛰어올라 강실이를 덮치며 왈칵, 앞으로 쏟아진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강실이 두 팔을 거칠게 붙들며 쏟아진 옹구네 몸에 쏠려 강실이는 그만 픽,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작은아씨."

세찬 기세로 자빠뜨려 함께 넘어지며 옹구네는 일부러, 내가 너 안다는 시늉

으로 똑똑하게, 작은아씨를 부른다. 강실이는 기색을 해버린 것일까, 대답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참말로 작은아씨네? 저는 똑 구신인 중 알았그만이라우. 아이고, 송구시러와

서 어쩐디야? 지가 시방 원뜸에서 낼오다가, 소매(오줌)조께 보미라고 궁뎅이 벗

고 앉었는 판에, 저거스 머이 희뜩희뜩 비치길래, 도깨빈가 구신잉가 겁이 짠뜩

나서요, 어뜨케나 놀랜 짐에 기양 머이 저 잡아먹을라고 허는지만 알고, 작은 아

씬지도 몰르고 뎀베 부렀네요. 무서서라우. 요. 요, 저 아직도 벗고 앉었는 것 좀

보시요예."

나동그라진 강실이를 붙들어 일으키며 옹구네는 발명을 한다.

강실이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겁에 질려 탈기된채, 혼절한 사람같이 기운이

빠져 버려 몸을 추스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느닷없이 놀라지 않았더라도 한 걸음 내딛기 어려운 정황의 강실이가,

이 어떤 길을 나서는 것이랴, 미어져 무너지는 억장을 감당하기에도 겨운데, 이

총중에도 행여 누구 동네사람 눈에 드이어 그나마 마지막 남은 부모 얼굴에 먹

칠하는 일이 생기면 어찌하나, 가물가물 꺼져드는 의식을 있는 껏 추리어 한 점

에 모으며 긴장하고 오던 터이라, 저절로 기진하여 쓰러질 것만 같은 강실이였다.

그런 끝에 이렇게 놀라 놓았으니.

"정신채리시요잉? 예?"

흔들어 깨우는 척하면서도 옹구네는 행여 강실이가 바로 깨어날까봐 얼른 둘

러업고는, 보퉁이까지 챙겨 뒷짐에 들고, 서둘러 정자나무 쪽으로 걸음을 돌린

다.

"그런디 어디 가시요예? 보따리끄장 다 챙게 갖꼬? 도망가시오?"

겁날 것이 이미 없는 옹구네가 등에 업힌 강실이한테 묻는다.

"내 고에 황아장시랑 어디로 가기로 헝 것맹인디, 아매 저 정자나무 아래 어디

보독시리고 있을 거이요, 그런디 작은 아씨가 먼 죄 졌소? 왜 이러시능가 나는

통 모리겄네. 가매도 있고 기차도 있는디, 어디를 가니라고 쥐도 새도 모리게 이

러고 밤질에 보따리를 지고, 이름도 성도 모를 넘을 따러 강남을 가까잉? 종도

있고 호제도 있고 머심도 있는디. 몸도 성찮은 작은아씨가."

못박는 소리만 골라 가면 콕, 콕, 쪼아대는 옹구네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거품

처럼 부클부클 피어난다. 제 생각 첫 번재 고리가 한 올도 비틀어지지 않게 뜻

같이 맞아드는 것이 아무래도 신통했던 것이다.

"누구여?"

정자나무 귀퉁이에 몸을 숨긴 채 붙어 서 있는 황아장수를 본 옹구네는 이번

에도 일부러 놀랄 만큼 큰소리로 물었다.

"쉬잇."

그것이 옹구네 목소리인 것을 알아들은 아낙은, 혼겁을 하게 놀라 소스라치며

길섶으로 폴짝 뛰쳐 나왔다. 그리고 나무라는 기색으로 눈을 부릎떠 보인다.

"오늘 밤에 놀래는 사람 많네에."

옹구네는 황아장수 아낙한테 강실이 업은 모양을 보여 준다.

"물 넘어오시다가 기양 픽 씨러져 부렀소. 기진 맥진, 맥이 다 떨어져서 도대

체 걸으실 수가 없었등게빈디. 대관절 무신 사정잉가는 모리겄지마는, 혹시 이

작은아씨 뫼시고 어디고 갈라고 그랬었소?"

아낙은 뜻밖의 상황에 말문이 막혀 얼른 무어라고 대꾸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옹구네는 틈을 주지 않고 채근하듯 감겨들며 묻는다.

"아 말을 해야 속을 알제. 둘이 혹시 어디로 가기로 했능가 싶어서 여끄장 업

고 왔제. 앙 그러먼 멋 헐라고 일로 와아? 원뜸에로 가제. 작은아씨댁이 정자나

무 밑이간디? 내가 눈치 하나로 사는 사램이라, 이렁가아, 허고는 어찌 되얏든

믈어나 볼라고 왔그만. 아니먼 후딱 말히여. 작은아씨 기색 혼절을 해서 돌아가

시먼 나만 죽응게로."

으름장을 놓는 것이나 진배없이 을러메던 옹구네가 정말로 몸을 돌려 세우려

하자 황아장수는 황망히, 그러나 결심한 듯이

"가만 있어 봐."

한다. 그네의 이마에 진땀이 돋는다.

"가만 있으먼 머 무신 수가 난당가? 가든지 오든지 우선 작은 아씨를 어디다

가 뉩헤얄 게 아니요오? 질바닥으서 밤 샐라요?"

"내가 어디 조께 뫼시고 갈 디가 있었그더언."

"어디로요?"

"몇 백 리는 못되야도 그만치 버금 가게는 가야는디."

"미쳤능게비."

"이게 무신 일이당가."

"이런 냥반을 뫼시고 가다가 낯선 질에서 초상 치르실라요? 또 그 덤태기는

누가 쓰고? 어매, 저승사자로 나설랑게비요잉? 겁도 없이."

"그러먼 어쩌얀디야?"

"이 몰골을 봇시오. 금지옥엽 귀허디 귀하게 외씨 보손에 볼받어 신고, 방안으

서만 앉은 걸음 선 걸음 놓던 발로 단 십리, 단 오리 길을 걸을 수가 있으며, 성

헌 몸도 아닌디 병든 몸으로 이리 비척 저리 비척 어느 하가에 목적헌 디를 당

도헐 수가 있겄능교? 거그다가 시방 경색이 되야 부렀는디. 사방이 맥헤 갖꼬

숨통조차 안 열링만, 어서 어디로든 들으가 바늘로 좀 손구락 발구락 같은 디를

따야 안허겄소?"

황아장수는 그만 제 숨통까지 막힐 지경이어서, 숫제 그냥 다시 원뜸 종가댁

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비단도 지고 다니지만, 온갖 잡살뱅이 자질구레한 물건을 등에다 지

고 다니면서 등뼈가 굳은 아낙의 산전수전 눈치로, 이번 일이 도무지 예삿일이

아닌 것을 알아챈 황아장수가, 어떻게든 강실이를 효원의 친정 근처 절에까지

배행하여 모셔다 놓는 것만이 상수인 것을 모를 리 있으랴.

그렇지만 그 일이 참으로 난감하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디 좀 물읍시다. 머 허로 어디를 가능 길이요? 죽어도 가얄 길 같으먼

가다가 죽드래도, 등짐은 머리에다 이고, 작은아씨 받어서 등에다 업고 가시오.

안 그래도 될 질 같으먼 죄우간에 어디로 들으가서 얼릉 무신 조치를 해야고,

이러다가 내 등짝이 칠성판 되게 생겠소. 무서 죽겠네 기양. 오금이 제리고. 날

도 춥고오. 한시가 급허그만, 얼릉 말허겨어."

"피병 비접 가는 질 아니요오?"

"비접?"

핑계가 좋아 지름칠을 허겄다. 헤기는 애기 선 것도 병은 병이제. 다아는 병이

라 병 취급을 안해서 그렇제. 애기도 머 기양 애기냐? 병통은 옳게 병통이 생겠

제. 허나, 너는 모를 거이여. 그보단도 더 짚은 병이 골수에 맺혀서 썩고, 삭고,

문드러지고, 골갱이 다 빠져 분 것을.

나는 알제. 나는 알어.

그런디 말이여. 우스뤄 죽겄네. 애기 아배가 코빼기 밑에 엎어져 있는디, 뱃속

으다 애기 담고 어디로 비접을 간당가? 어뜬 사람은 애기 날때 즈그 서방 상투

끄뎅이 안 잡으먼 끝끝내 못 낳는다등만.

옹구네는 속에서부터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약을 내뱉어 상대방한테 올려 줄

수는 없고 혼자서 쇠새김질을 하며 날을 갈았다.

두고 보자. 요년.

"어차피 비접 피병 가는 질이라면, 이 몸을 허고 가다 죽느니 우리집으로 가십

시다. 이 작은 아씨 혼잣몸으로는 걷지도 못헐 거이디, 황아장시가 이고 갈라요

오. 또 그 짐은 어쩌고? 그게 어뜬 짐이라고 . 전 재산인디. 어따가 놓고 갈 수

도 없고. 그렁게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체허먼 더 일만 곤란허게 되겄응게 어서

갑시다. 우리 집이 바로 요 앞인디 머. 가서 일단 이 작은아씨를 뉩헤 놓고, 머

무신 조치를 해서 기운을 채리게 해야 그 다음 일도 있능 거 이니겄소잉? 사램

이 우선 살고 바양게에."

집이라야 참 되야지막 한가지로 누추허지마는 한디보담은 안 낫겄능게비. 거

그서 황아장시도 한 숨 좀 붙이고. 날 새먼 또 새 궁리 해 봅시다. 원 그나저나

참 큰 짐 지게 생겠네이? 이미 져 부렀지마는.

옹구네는 앞장서서, 강실이를 등에 업었는데도 별스럽게 가벼이 걷고, 그 뒤를

따라 강실이 보퉁이까지 같이 진 황아장수는 알 수 없는 무거움으로 어둡게 걸

음을 떼었다.

 

 

8. 납치

 

못마땅하게 세운 무릎에 두 팔을 거칠게 감아 깍지를 낀 채 삐딱하니 틀고 앉은

옹구네가, 깎은눈으로 춘복이를 꼬아본다.

바지직, 바지직, 무명씨 기름 등잔불에 까물어지는 얼룩이 피멍인지 그림자인

지 시꺼멓게 뭉쳐서, 온 낯바닥이 맞어 죽은 귀신 모양으로 터지고 헝클어진 춘

복이는 짐승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데, 옹구네는 농막으로 내달려올 때

의 기세와는 달리, 지게 문짝 문간 윗목에 오똑하니 앉아, 그러는 양을 바라볼

뿐이다.

마음이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탓이었다.

에라이, 더러운 년의 팔짜야.

아무도 안 보는 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옹구네는 지난번에 강실이 업어오던

생각을 한다.

참내, 내가 아무리이 아무리 근본 없는 불상년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껍데기만

둘러썼제 어디 사램이랄 수도 없이 살어는 왔다마는, 내가 무신 개 돼야지도 아

니고, 창시 빠진 무골충이도 아닌디... 살다 살다 벨노무 우스깡시러운 꼬라지를

다 보겄그만잉. 잉? 내 참.

애비 회춘허라고 지극 정성 꽃 같은 동첩을 업어다 디리는 효녀 심쳉이라먼

또 모르겄네.

콧물을 훌쩍이듯이, 등에 업은 강실이가 흘러내리는 것을 몇 번씩이나 들썩

추켜올려 다시 고쳐 업으면서, 옹구네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 잘하는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었다.

슥, 삭, 슥, 삭, 스슥, 삭.

고샅을 밟는 발소리만 황아장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무락 어둠 속으로 빨

려들 뿐 인적도 없는데다, 오늘 낮 당한 일이 하도 참혹 뜻밖이라 온 마을 거멍

굴이 멍든 것처럼 웅크리고 있어서, 무슨 소리 귓가에 스치기만 하여도 소스라

칠 판에, 두 아낙이 담장 밖 길가에서 무어라고 객담 주고받을 형편이 아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황아장수는 어줄어줄 옹구네의 엉뚱한 뒷자락만 잡고 가기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일의 시작부터 지금 이렇게 옆구리로

빗나가게 되기까지 전말을 좀 이야기해 보고 싶은 심사도 치밀었다. 그러나 먼

저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비록 엉겁결에 옹구네와 한 바디에 얽혀들기는 하였

으나, 아직 그 속을 몰라 날 고르고 씨를 치는 가닥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탓이

었다.

그네는 고생에서 배운 신중함이 몸에 밴 구석이 있었다.

이게 머이 심상치 않은 징조는 징조다. 휘영청 달 밝어얄 밤에 난데없이 먹구

름 찔 때, 내 어찌 요상허드라. 구름 저렇게 쪄 노먼 인자 비오고 말제, 필경. 구

름장도 두껍그만, 변괴시럽게 이월 장마가 질랑가아. 어쩐 일이여 시방. 바람할

라 설렁설렁.

처음 계획대로 길을 떠났다손 치더라도, 사람 눈이 무서운 마을 어귀만 벗어

나면 어차피 주막집 곁방 신세를 져야 할 터였으니, 차라리 핑곗김에 옹구네 오

막살이 아랫목으로 온 것이 낫지 싶다고, 자꾸만 속다짐을 하며 우겨 보았으나

웬일인지 가시 걸린 꺼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옹구네는 또 옹구네대로 입도 떼기 싫어 강실이 업은 뒷손만 갈퀴처럼 얽어

걸고 휭휭 걸음을 놓았다.

아이고 참, 이거는 보쌈도 아니고 도적질도 아니고, 보시그만, 보시. 참말로 열

녀도 가지가지네. 내가 아조 옹구아배 죽고도 못해 본 열녀를 이번에 뽄때 있게

한 번 해볼랑게비다.

세상 천지 네거리를 다 막고 물어 바라. 어뜬 호랭이 물어갈 넋 빠진 년이 지

서방한테 시앗을 업어다 주능가. 그것도 저보다 더 젊은 년, 더 때깔 좋고 잘난

년을.

나도 긍게 미친 년은 미친 년이여.

가만히 내비두먼 강실이인지 작은아씬지 지 발로 아장아장 동구밖으로 걸어나

가, 낯설고 물 선 디로 아조 영영 가부릴 거인디. 흔적 없이 사러져서 다시는 펭

상에 치맷자락 그림자도 얼씬 안헐 거인디, 그러먼 백 번 좋제. 안 그러게 생겠

이먼 그렇게 해 도라고 치성을 디레도 모지랠 판국에, 대관절 멋 땀새 남 다 자

는 오밤중 깜깜헌 질가에 쭈그리고 앉어서, 퇴깽이 눈깔을 똥그람허게 뒤집어

뜨고 뚜리뚜리, 오능가 가능가 놓치능가 잡능가 지키고 앉었다가, 무신 진사 급

제 알성시 과거를 볼랑가 이 꾀 저 꾀 삼중 꾀를 짜내서는, 오랏줄로 칭칭 무꺼

깨골창에 패대기를 쳐도 시언찮을 시앗년을, 금이라까 옥이라까 ㅎ 묻으까 업어

다가, 아나 잡수우, 송두리째 바칠 거이냐. 임금님 진상도 이렇게는 못허겄다.

나 같은 년 또 있으먼 나와보라 그러제.

양반, 양반. 양반만 열녀 있는지 알지마는, 그건 다 빚 좋은 개살구고, 진짜 열

녀는 여가 있다, 여가 있어, 야야. 더러운 년의 열녀 여그 있어어. 어리구으, 내

팔짜여어.

앙가슴을 두드리는 대신 강실이를 바짝 죄어 업고 걷는 옹구네 머리꼭지가 어

둠에 짓뭉개져 먹구머니 같았다.

"아이, 야. 옹구야. 이렇게 좀 해 바라이? 요리, 요렇게 좀."

등에 업은 사람 때문에 손이 묶인 옹구네는, 제 어미를 기다리다가 잔뜩 꼬부

린 채로 잠이 든 옹구를 발로 건드려 밀며

"예, 저그 저 이불 조께 내려 보쇼예. 욘가 머잉가 저것도 이리."

방문간에 주춤거리고 서 있는 황아장수를 불러 턱짓을 하였다.

궤짝 같은 소나무 반닫이 위에 얹힌 이부자리 요대기를 끌어내리던 황아장수

는 내심으로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 동안에 오다 가다 마주치면서는 섣부르게 나서기 좋아하고 아는체 잘하는

난단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옹색하고 보잘것없는 초막집 방칸이 뜻밖에도 훈김

돌게 깨끗하고, 이부자리 빨아서 시친 솜씨며 베개 꾸며 놓은 모양새가 허술하

지 않은 때문이었다.

"아앗따아. 어거 질 잘났네. 손때가 기양 자르르."

윤이 나는 반닫이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며 황아장수는 모처럼 참았던 숨

을 트려는 듯 곁다리로 말뚜껑을 열었다.

"그께잇 거이 머 귀헌 거이요? 귀목도 먹감도 아닌디."

"아 머이든지 질 나먼 좋제에. 꼭 귀목에 먹감나무 장롱이어야만 좋옹가아?

암만 하찮은 바가지 한 개라도 내 손에 오래 익으면 살갑고, 이쁘고, 금밥그릇을

준대도 안 바꾸게 정들어서 그 바가지 한 개 갖고 오만 짓을 다 허는 사람도 있

잖응가. 정짓간에 물바가지야 한 해 쓰먼 더 못 쓰지마는, 요마안허니 요강단지

만헌 놈, 노오러니 잘 익어서 살도 마침 마참허게 올른 놈을 곱게 켜서 바가지

맨들어 노먼 참 이쁘잖에? 거그다가 봄이머는 화전 부치는 진달래 따다 담고,

가을에는 밤도 까서 담고, 홍시감도 담어 놓고 머고, 올기쌀도 소복허니 담어 놓

고.머리맡에 애장물로 그만헌 거이 또 없제. 그렁게로 해 바뀌어 새 박 따도 작

년에 쓰든 바가지, 재작년에 쓰든 것, 석삼 년에 몇 십년씩 된 바가지들 다 그

냥 쓰잖능게비 왜. 깨지먼 꼬매 쓰고. 막넝쿨에 주렁주렁 흔헌 거이 박인디, 박

이 없어 그러겄소? 정들어서 애끼는 거이제. 내가 ㅂ는디, 저그 원뜸에 이문 종

택에서는 시어머니 쓰시든 바가지를 메누리가 물려받어 쓰다가, 아깝담서, 율촌

아씨말이여, 인자 기양 신주단지 맹이로 뫼셔 놨다드랑게. 시어머님 손때가 묻었

다고."

이고 졌던 짐을 내려 멜빵을 풀어 놓은 황아장수는 때묻은 버선짝을 뽑아 벗

으며, 이제는 별 도리 없이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사람이라, 비스듬히 바

람벽에 등을 기댄다.

"사람도 그러까?"

강실이를 눕히던 옹구네가 혼자말처럼 물었다.

"사람?"

"긍게 사램이, 바가지만 헝 거이여어 못헝 거이여?"

"자다가 봉창을 뚫네. 아 왜 사람을 느닷없이 바가지다가 댄당가?"

"사람은 아매 그만 못헐 거이요. 더 헌 사람도 있을랑가는 모리겄지만. 못헌

사램이 더 많제."

"뚱딴지맹이로... "

"비탈진 까끄막에 독밭을 매도 한 해 두 해 일 년 이 년 세월이 가먼, 티 고르

고 까시 고르고 정이 드는 거인디, 사람은, 어저께끄장 너냐 나냐, 어저께가 머

이여 한숨 전에 아까막새끄장 세상에 다시없이 이뻐라고, 보듬고 치긋고 어르든

님이, 새사람 생기먼 눈 깜작 새에 싸악 변심을 허는디, 낯색 바끄는 거이 꼭 비

오다 구름 개고 구름 쪘다 날 개는 것맹이여. 말짱 씻어 불제. 그럼서, 쓰든 사

람 내부리는 것을 깨진 쪽박만도 못허게 동댕이치고 죄면해 부러. 붙여 쓸라고

는 꿈에도 안허고. 쪽박은 깨져도 꼬매 쓰는디... 사람은 요상허제, 깨지도 안허

고 새도 안허고 얼매든지 더 쓸만 헌디, 옆으다 둘라고조차 안험서, 성성헌 것

탁 내불고 왜 새 박 따러 가까잉."

옹구네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치 빠른 황아장수는, 저 예펜네가 저만 아는 무신 사연이 있구나, 하면서도 짐

작을 내색하지 않은 채

"바가지 나름이제 머."

하고 말꼬리를 묻었다.

"밭이라먼 그러겄소? 여러 해 공딜여서 초벌 재벌 지심 매든 땀이 아까워서도

못 내놓고, 재산이라서도 못 내놓제. 내불기는 고사허고. 누가 뺏을라고나 해 보

라제, 쌍칼 들고 싸움서 눈에 불을 씨고 지킬걸?"

강실이 머리에 베개를 받쳐 편편히 괴어 주고는, 거품 같은 팔과 다리를 쓸어

내리며 몇 번 주물러 주던 옹구네는, 겨잣빛으로 누르시푸릉 바랜 강실이의 손

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황아장수는 오랜 세월 길고 먼 길을 굽이고비 휘돌아 다니면서, 마을의 솔기

에 박힌 이 집 저 집의 크고 작은 이야기를 누구보다 많이 듣고 본 사람이었으

니. 아는 것도 많았다. 잠시 짐을 풀고 남의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밥 한술 얻어

먹거나, 산다 하는 집 안방에 들어가 비단이며 옷가지를 구경시키다가 무심결에

주고받는 몇 마디가 날 가고 달 가면서 쌓인 것이다. 대명천지 남 다 아는 애경

사로부터 아무도 모르는 골짝진 응달에 파묻어 놓은 속내 비밀의 낟알들까지.

굳이 알려고 해서도 아니요, 무슨 식견이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저절

로 그저 묵은 마루에 먼지 앉듯이 바람을 타고 눈짓 따라 묻어 드는 인간사의

자락들이었다.

그네는 그것들을 알맞게 제 몸에 묻히고, 기억하고, 혹은 담아 두고, 또 혹은

듣는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하였다. 설사 속으로는 결코 잊어 버린 것이 아닐지

라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잊어 버린 사람이 될 수가 있었다. 그래야만 될 일일

때에는.

"여기서 대실까지 갈 길이 멀지마는 천만 다행으로 기차가 있어서, 행보가 그

닥 복잡하지는 않을 게요."

효원이 은밀히 건넌방으로 부른다 하기에, 그저 어른 안 보시게 장만할 무엇

이나 있는가 하고 들어갔다가 뜻밖에도

"오류골댁 작은아씨를 뫼시고 대실 우리 친정에 좀 가 주오."

하는 뜻밖의 말을 듣고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한 황아장수한테 효원은 간찰

한 통을 내밀었다.

"작은아씨는 대실까지 같이 들어가지 말고, 그 못 미쳐서 대실로 가자면 강 이

쪽에 강골마을 뒷산이 있어요. 약도는 여기 있소, 거기 안행사 암자에다 일단 모

셔 놓고 혼자 들어가시오. 사람들 이목이 번다하니 사단 있는 기색 띠지 말고,

우리 친정 안어른 찾어 뵈입게 되거든 이 편지만 전해 드리면, 무슨 말씀이든지

하실 게요. 장사허는 사람이 봇짐 지고 마을에 오가는 것은 항용 있는 일이라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을 테고, 믿을 만해서 내가 긴히 부탁하는 것인즉,

잘 좀 배행해 주시오."

행자는 서운치 않게 주겠다는 말도 곁들이는 효원에게 그네는 영문을 묻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일에 대한 짐작이라도 있어야 발설은 안할망정 만일의 경우에

대처를 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 작은아씨가 본디 신체 강골은 아닌 몸이 왜 그런지 근년에 많이 쇠약해져

서, 당혼은 했는데 회복이 쉽지 않어 시숙부모님 속 깊은 근심이 천 근이신지라,

부처님의 자비 가피를 입어 보려고 영험 있는 절에 피병 비접을 가시는 것 아니

겠소."

"펜찮으신 몸이먼 가차운 디가 더 좋을 거인디, 해필 그렇게 멀고 먼 디로 가

실라고요잉."

황아장수는 순간 짚이는 자락이 있었지만 낯색으로도 드러내지 않는 능숙으로

짐짓 진지하게 미간을 모았다. 이런 경우에 말하는 사람의 치명적인 체면은 절

대로 손상시키면 안되는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비밀의 덜미 한쪽을 제대로

파악하여 쥐고는 있어야 일에 그르침이 없는 법이어서, 단도직입으로는 말을 못

했지만 변죽을 울려 나름대로 갈피를 추려 들었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일은

곧 '잊어 버려야'할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던 것이다.

"호성암도 바로 여근디요 왜."

"혼인 안한 처자가 병이 깊어 집을 두고 절에가 앉았다면, 남의 입살에 흉한

소문 오르내리기 십상이고, 회복되어 내려온 다름에도 추측이 무성할 것 아니

요? 더욱이나 인근 마을 너나없이 아무라도 드나드는 호성암에 아는 얼굴 자꾸

만 비치면, 휴양은커녕 장터거리에 나앉은 것 마냥 인총에 시달릴 것이 불문가

지라. 아예 낯선 곳에 가서 좀 쉬려는 것이요. 그러고 그 안행사가 약사여래 가

피력이 여느 데와다르다고 들었소. 약수가 아주 좋다 합디다. 효험들도 많이 보

고."

"예에... 그러시겄지요하먼."

"사람들한테는 작은 아씨네 외가 쪽에 가셨다고 해 둘 터이니 그리 알고, 밤이

깊어지거든 누구 눈에도 안 뜨이게 뫼시고 가 주시오. 무단히 오해살까 두려우

니. 이 밤 안으로 마을만 벗어나면 어디서 잠시 눈 좀 붙이고는, 인시말(새벽 네

시 반 지나)에 남행 첫차 있을 겝니다. 그걸 타고 남도 도경을 넘어서 득량역이

어딘가 영념하고 있다가 놓치지 말고 잘 내리시오."

참으로 그럴 만한 피병 비접이라면 당사자의 부모가 엄연히 곁에 계신즉, 자

기를 불러도 그분들이 불러야 옳은 순서인데, 어찌 오류골댁에서는 한 마디 전

갈도 기척도 없고, 큰집 오랍의댁이 사촌 시누이 종시매 일에 이토록 은밀 엄숙

하게 주장을 하는지, 소견 조금만 드린 사람이면 짚어지는 바 있을 것이었다.

피신... 이로고나.

황아장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때, 효원의 깎은 듯한 이마에는 진땀이 돋

고 있었다. 대쪽 같은 허리를 곧추세운 그네가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황아장수

한테 박아 넣으며, 호겁스럽게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면서도 상대방이 결코 이

일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위엄으로 당부하는 모습은, 젊은 새아씨였지만 닳

고 닳아진 자신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저쪽인데

도.

그런데 그만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일이 어긋나 이렇게 옹구네 집으로 오고

말았으니, 요행히 매안 문중 사람들한테만은 안 들킬 수 있다 치더라도 엎어지

면 코 닿는 거멍굴의 옹구네 눈에 걸려 버린 점이 황아장수는 내내 편편치가 않

았다.

비록 이렇게 발은 뻗고 있지만.

황아장수는 강실이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옹구네와, 요대기 위에 놉히어진 채

아직 정신이 들지 않아 숨소리조차 바스라지고 있는 강실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난감한 한숨을 삼켰다.

알 수 없는 일이여.

양반의댁 구슬 같은 작은아씨가 이런 사람을 따라서 야반도주 웬 말이며, 구

름솜 꽃이불을 누구 덮으라 내버리고 천하 상것 거멍굴의 아낙 이부자리에다 몸

을 의탁헌단 말이까아.

흡사 무슨 흙탕물 소용돌이 물마루에 한 조간 널빤지가 뜬 것처럼 얇고도 위

태로워 보이는 요대기를 그네는 안스럽게 눈 주어 보았다. 그네가 지금껏 다리

가 아프게 걸어다니며 살아온 세상을 걸고 말하거니와, 앞으로 그 요대기 위에

탄 강실이의 인생이 일엽편주 처량하고 서러우면 서러웠지 결단코 순탄할 리 없

을 것이어서였다.

거기다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물살이 여린 곳으로 보내 보려고, 오죽하면

자기같이 명색 없는 사람한테 사공 노릇을 좀 해 달라는 새아씨 효원의 소청이

무색하게, 지금 한밤중의 흙탕물 깊은 물 속에다 그만 텀벙 노를 빠뜨려 버린

꼴이 되어, 내일 일을 궁리하기 난처하고 착잡한데.

옹구네는 옹구네대로 맺히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넘의 재산이 되는 사람은 좋겄지맹."

바가지 끝에 잇달려 나왔던 사람 탄식이 덜 끝난 것이다.

황아장수는 정수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였다.

"내가 나한테 내 값 허능 거이 곧 사램이제, 머 누구보고 내 값 멕여 보쇼오

헌당가잉? 개 돼야지라먼 몰라도. 근으로 달어 팔 것도 아니고."

"그것도 호강시런 소리요. 나는 이날 펭상에 누구한테 값이 되야 본 일이 없는

것맹이요 왜."

"벨일이네. 멋 헐라고 너므이 저울 눈금에다가 나를 달이어? 그거이 또 옥황

상제 천평칭이라먼 혹 모르겄지만, 그놈도 다 지가 깎은 지 눈금으로 저울 달

거인디, 그 저울에 개버우먼 헛덕깨비고 그 저울에 무거우먼 금방석잉가 머? 아

장에 가 바아, 금방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손에 산 물건도 돌아섰다가 다시 재

보먼 눈금이 틀려지는디? 하찮은 물건도 그러는디 사람값을 어뜨케 넘의 저울에

다 매긴다냐아."

요거이 어따가 정 둔 놈을 뒀능게비구나.

"나는 천지에 혼자요. 나 죽는대도 울어 줄 놈, 씨도 없소이."

"베락맞겄네에. 생떼 같은 자석 두고 먼 소리여 그게 시방. 자가 자다가 듣겄

다."

"서러워서 그러요, 서러워서. 오늘따라 내가 복장이 탁 터져 불라고 그래서어.

내 속을 나나 알제 누가 알어 긍게."

"우리도 잣대 들고 비단 지고 장사 댕게 보지마는, 내 잣대로 내가 눈김 재서

띠여 준 비단도 같들 않당게로? 내 손도 틀리는디, 넘의 손에 왜 나를 재냥게

그러네이, 꼭."

"그건 다 딛기 존 소리고."

아이고오, 거그 조께 어뜨케 비집고 누워서 눈 좀 붙여보시요예.

옹구네는 황아장수한테 납작갱이 베개를 밀어 주더니

"나 요 여그 앞에 얼릉 댕게올랑게."

먼저 자라, 하면서 지게문짝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는, 방안에 강실이를 데려다가 제 눈앞에 눕혀 놓았을 때와는 홀깍 뒤

집히게 달라지는 심사로, 휘잉허니 춘복이의 농막을 향하여 바람을 갈랐다. 바람

갈라진 자리에 새파란 어둠의 날이 섰다.

자정이 이미 넘어 거멍굴의 무산 날망 구름 엉긴 마루가 침울하게 시커먼 기

슭에, 쥐죽은 듯 웅크린 채 엎드리어 숨을 삼킨 오두막들의 버섯 지붕이, 집집마

다 마치 먹물에 잠긴 어깨를 겁먹어 잔뜩 오그린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오직 당골네 백단이네 문짝만이 씰그러지는 주홍빛으로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뜨고 있었다.

내우간에 쭈그대고 앉어서 디지게 뚜드러 맞어 찢어지고 터진 걸 디다보고 있

겄지맹. 대관절 이런 노무 인생들은 멋 헐라고 세상에 나는 거이여어.

춘복이의 외떨어진 농막 문짝도 백단이네처럼 불그레 핏빛을 띠고 있었다. 이

캄캄한 오밤중에 두 집의 불빛 젖은 문짝들이 이만큼과 저만큼에 잠 못 들고 껌

벅이는 것이, 어쩌면 피에 엉켜 걸레가 되어 버린 그들의 남루한 옷자락 같기도

하였다.

하이고오. 이 총중에도 만동이는 백단이나 있제. 마느래도 없는 너, 찢어진 살

피뭉텡이를 누가 그나마 ㄸ어 주고 걷어 주겄냐? 나배끼 없제. 니께잇 거 참말

로, 직사허게 내 대신 덕석몰이로 뚜드러 패중게 회나 그 냥반들이 미운 게 아

니라 곱드라. 내 ㅅ이 다 씨여언 허드라고. 니가 대관절 머이 그렇게 잘났냐? 잘

나기를. 가진 것도 앙껏도 없음서.기껏해야 머 하나 달고 있다고 그렇게에, 그렇

게에, 유세를 헝만잉?

아이고오, 던지러라. 던지럽고 던지럽다. 퉤에이.

젊으나 젊은 년이 지대로 살어보기도 전에 새파란 서방 잡어먹고, 무신 염치

로 좋온 날을 보겄다고 이 수모를 다 당해야여어. 긍게. 내가 미친 년이제. 너

머라고 해서 멋 허겄냐. 내가 미친 년인디.

그런디, 그 미친 년이 너한테는 기가 맥힌 은인인 것을 인자 어쩔래?

너는 뚜드러 맞니라고 아무 정신 없을 적에, 오매불망 고운 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야반도주 헐라는 것을, 내가, 바로 내가 잡어 왔니라. 잡어다가 시방 내

방에다 가둬 놨니라. 긍게 내가 포도대장이제. 그년 강실이란년한테는 그게 바로

감옥이고. 인자 강실이는 어디로도 못 간다. 나한테 잽힜는디 어디로 가? 못 가

제. 강실이 내가 잡고 있는 한 춘복이 너도 어디로 못 가제. 내 손에 잽헤 있을

거이. 내가 이 오장 갈갈이 찢어지는 일을 자청해서 헐 때는 다 심이 있느라.

양반의 멩당 훔칠라다가 저 집구석 누구 하나 옳게 죽어나갈 것이다. 인자. 그

렇게도 모질게 뚜드러 맞고 살이 터져 뼉다구 흐옇게 드러났는디. 만동이 저거

종내 살까? 덕석 벳겨 내는디 봉게로 살점이 개양 덕석에가 덩클덩클 묻었등만.

참말이지 끔찍허고 참혹허드라. 좌청룡 우백호가 대관절 머이간디 죽은 조상 뼉

다구가 산 자손 생목숨 생뼉다구를 잡능고오.

아니여, 그런디, 나도 그 속을 알겄어.

죄청룡 우백호 속.

만동이 백단이는 죽은 사람 멩당 쓰니라고 애썼지만, 나는 산 사람 멩당을 시

방 썼제. 좌춘복이 우강실이로 내가 청룡 백호를 삼고, 인자 두고 봐라, 우리 집

안방 아랫목이 연화도수 멩당자리 꽃 벌디끼 벌어지게 허고 말 거잉게. 내 손아

구 양손에다 동아줄 칭칭 매서. 내 허란 대로 느그는 살 수밖이 없도록이 맨들고

말랑게.

그럴라고 내가, 지 발로 걸어나가는 시앗을 꽃가매 태우디끼 등짝에 다 뫼셔

서 업어온 거이여. 시앗? 그렇제. 시앗이제. 니가 내 서방인디, 저년은 시앗이제

그럼. 비록 느그가 찬물 갖춰 육리 올리고 귀영머리 마주 푼대도 순서는 순서여.

나는 절대로 내 밥 안 뺏길 텡게. 춘복이 너, 열 지집 거나리는 것은 내가 너를

호걸로 쳐서 바 준다고 해도, 내 밥그릇에 밥 덜어낼 생각은 꿈에도 허지 말어.

단 한 숟구락에 밥티 한 개라도. 나는 내 껄 꼭 찾어 먹을랑게. 지금까지 살든

것보돔 더 챙겨 먹을랑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머리 속이 버르르 불 당긴 것처럼 확, 더워지더니, 그만

옹구네는 온몸을 가눌 수 없도록 격렬하게 떨었다.

쥑일 테여, 쥑이고 말 테여어.

걸음을 뚝 멈추고 벌겋게 선채로 주먹을 부르쥔 그네의 턱이 이빨 부딪치는

딱, 딱, 소리를 날카롭게 낼 만큼 떨렸다.

그네는 짐승같이 포효하는 대신 두 발로 땅을 굴렀다.

견딘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이랴.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어 엎어지면서 손톱이 머조리 패어나가도록 긁어 파며

울부짖고 싶고, 꼭 그만하게 춘복이한테로 달려들어 와드득, 할퀴어 놓고 싶고,

강실이를 홀랑 꾀벗기어 거꾸로 매달아서

"이 뱃속에 애 들었냐?"

"이 뱃속에 저 사나 애 들었어?"

선혈이 낭자하도록 덕석말이만큼이나 몽둥이질을 해 주고 싶은 질투와 증오를

옹구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농막이 몇 걸음 안 남은 어귀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그네는 더 참지 못하고

고샅에 자빠져 있는, 확독만한 돌덩어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아 번쩍 치켜 올렸

다. 그러고는 박살을 내듯이 내리쳤다. 돌이 많은 고샅이라 바윗덩이 같은 돌덩

어리가 돌 위에 떠어져 깨지는 소리는 동네를 까무라치게 울리며 밤의 복판 정

수리를 쪼갰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도저히 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무신 소리여?"

농막 문짝이 벌컥 열리면서 공배네가 고개를 내밀었다.

옹구네 눈이 어둠 속에서 벌어지며, 아까 돌덩어리 메칠 듯 펀쩍펀쩍 부딪쳐

튀어 오르던 불꽃처럼 파랗게 인이 돋는다.

"저 예펜네가 꼭 저렇게 아조 음란 상호로 타고나서, 성질은 변덕스러 갖꼬 하

루에도 열두 번 피딱 패딱 허는디다가, 까무잡잡헌 낯바닥에 도화색은 발그로옴

돋아나고, 입솔이는 물었다 논 것맹이로 도톰 촉초옥헌 거이 저게 벌세 사나 잡

을 상호라. 그거뿐이여? 입솔이 복판에 꺼믄 쩜끄장 찍은 디끼 콕 백헤 갖꼬는.

눈웃음 잘잘 흘림서 텍아리 위로 타악 치키들고 허리 꼬아 무신 말헐 적에 그

눈을 보먼 자르르 물끼가 안 흘릅디여? 지집의 눈빛이 그렇게 물에서 막 건진

것맹이로 물끼 너무 번들번들 광채나는 것도 팔짜 도망 못허는 눈인디."

공배네가 언젠가 공배한테 한 말이었다.

"아앗따아. 말 잘허네? 유식허고. 배우도 안헌 관앵찰색을 어찌 그리 찰헝고?

선무당 헐랑가?"

공배는 그때 반은 조롱이요, 반은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무당 당골네 일 해 주로 댕기먼 보고 듣는 말이 관상 사주요, 점괘 들인디,

서당 개 삼년이먼 풍월을 헌다고, 그러먼 한 이우제서 맻 십년씩 삼서나 그것도

몰른다요?"

"그렇게 장허다고 안히여? 그런디 보다가 다는 못 봤네. 그 예펜네 눈에 번들

번들헌 그 광채가 기양 색기 아닌 독기를 품어 보라제. 비얌보돔 더 무서라. 등

골이 놀래잖이여?"

공배는 언제 그렇게 놀랐었는지 말만 하면서도 윗몸을 어드득 떨었다. 바로

그 눈이 지금 막 문짝 열어제치는 공배네를 부싯돌 쳐 쏘아보는 것이었다. 오냐,

너 왔냐, 하는 적의와 불괘가 범벅된 눈빛이었다.

"누구여?"

공배네가 재차 묻는다.

낮의 일에 혼이 나간 밤이라 목소리에 질린 겁기가 있었다.

옹구네는 대답 대신 심호흡을 깊이 한 번 하고는 걸음을 떼었다.

공배네는 검은 아낙이 추벅추벅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는 이제, 옹구네인 줄

알았지만, 아무리 밉다고, 다시 안 볼 것도 아닌데 사람 오는 것 버언히 보면서

문을 닫아 버릴 수는 없는지라, 문고리 잡고 문짝 열어제친 그대로 옹구네가 다

오기까지 불 밝히는 급사 사정이 마냥으로 맞이하듯이 기다리고 있는 꼴이 되어

버린다.

"멋 허로 와? 이 밤중에 잠 안 자고?"

"성님은 멋 허로 외겼소?"

"나는 춘복이가 아픈게로 왔제. 내가 어뜨케 안 와? 조께 디다바야제. 숨이나

붙었능가 어쩠능가, 옷도 갈어입히야 허고."

"아재는?"

공배를 묻는 말이다.

"내동 여가 지키고 있다가 더 못 보겄능가 잘란다고 집으로 내리갔어."

"성님도 내리가기요."

"머?"

공배네가 아까부터 애써 눅이고 있던 심정을 더 누르지 못하고 툭, 터뜨린 말

이라 음성이 칼로 토막치듯 단호하고 높았다.

"아 지무시야지이, 그러고 밤 샐라요? 노인이, 나이를 생각허겨어."

"이렇게 다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빈 집에다 방쳐 두고, 어디 가서 무신 잠을

자? 내가."

"아 왜 혼자 빈 집에다 두어요오? 나는 머 뽄으로 놀러 왔간디? 내가 있을랑

게 어서 내려가시요예."

"아니 왜 자네가 여그서 넘의 총각, 남정네 수발 구완을 헌당 거이여? 넘부끄

럽도 안헝가? 염치도 없이. 아무리 낯 두껍고 뻔뻔허다기로 남녀가 유벨헌디, 조

께 너무 심허지 않응가? 춘복이는 아직 장개도 안갔는디. 숭악헌 소문이라도 나

먼 어쩔라고."

"그러먼 머 성님은 남녀 유벨에 남이시오? 넘 말 허싱마잉. 처지가 똑같은디

왜 나만 몰아세워? 나도 다 성님허고 똑같은 맘으로 여그온 사램이여어. 성님은

백옥맹이고 이년은 구정물맹이요? 막말로 성님이 저 사람을 난 친어매요오, 안

그러먼 오누남매지간이요, 안 그러먼 인척 친척으로 숙모요오 형수씨요? 앙껏도

아니잖이여? 성님도. 그저 있다먼 정리 하나 아닝게비? 그 정리 나한테도 있다

그 말이요."

방안으로 오기가 나게 버티고 들어가 윗목에 오돔하게 앉은 옹구네는 웬일로

거치는 것 없이 차복차복 공배네를 닦아세웠다.

공배네는 낯빛이 흙빛으로 질린다. 지금까지 다른 것으로는 옹구네가 입찬 소

리를 못 참아 대들기도 많이 하였지만, 춘복이와 얼크러진 일만큼은 저도 속이

있는지, 양부모라 할 공배 내외한테는 면구스러운 시늉을 했던 것인데, 아니, 이

런, 이런.

"아 남녀가 유벨헌디 왜 성님은 여가 지셔도 되고 나는 안됭가아? 성님이 저

사람 클 때 밥 좀 맻 끄니 멕에 줬다고 부모 유세 헐랑게빈디요. 성님은 밥 멕

에 줬소? 나도 저 사람 멕에 준 거 있소. 성님보담 더허먼 더했제 못헐 거 없는

것 멕에 줬소."

"아니 이 예펜네가 시방 어따가 대고."

"나도 유세헐라요. 나도 인자 머 더 감추고 말 것도 없고, 성님이고 아재고, 온

동네 다 알고는 있었겄지만, 내놓고 말들은 안허고 쑤군쑤군 귓속 쑤신 거 나도

알제. 근디 인자 그러지 마시오. 내놓고 말히여.나도 말헐랑게. 성님, 나 저 사람

허고 사요. 산 지 오래되얐어요. 찬물 한 그릇도 못 떠 놨지만 엄연히 음양이 만

나 저 사람은 양이고 나는 음노릇허고 사는디, 그 동안은 숨어서 살었지만 인자

는 그럴 거 없겄어. 아니 마느래 없는 사나허고 오래 같이 지냈으먼 나도, 문서

는 없지만 마느래나 한가지 아니요? 재격이. 성님이 부모 문서 없지만 낳도 안

허고 부모 노릇 허싱 거이나 같을랑가, 틀릴 거 한나 없지 머, 아니, 내가 조꼐

더 유세를 헐만 헝가아."

공배네가 억장이 막혀 입시울만 푸들푸들 달싹거릴 뿐 단 한 마디도 말을 못

하는데, 옹구네는 천연스럽게 춘복이한테로 다가가 살갑고도 구슬프게 춘복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멍들어 부은 자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더니 공배네

가 보거나 말거나, 아니 꼭 보라는 것처럼, 그의 머리를 두 팔로 감싸안으며 젖

먹이는 어미처럼 제 가슴으로 그 얼굴을 보듬어 덮는다. 그렇게 하는 양이 어떻

게나 지극하고 부드러운지 평소 보던 옹구네 탯거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옹구네는 이윽고 보듬었던 팔을 풀더니 이번에는 춘복에 어깨를 그렇게 감싸

안으면서, 제 뺨을 춘복이의 멍들고 찢어져 떠진 뺨에 하염없이 부비어 어루다

가 그 귓바퀴에 대고 무엇인지 옆에 사람에게조차 들리지도 않게 소근소근 속삭

이는 것이었다.

"에라이, 더러운 년."

공배네는 드디어 침 뱉듯이 방바닥을 차고 일어서 버린다.

"가실라요?"

옹구네가 고개를 들어, 말갛게 씻은 낯빛으로 묻는다.

"에라이, 더러운 년."

공배네가 방문을 탕, 밀어젖히고 나서려는 발치에, 피뭉텅이가 되어 시뻘건 걸

레며, 벗겨 놓은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공배네는 그것들을 발길로 걷어차 버린다.

 

 

9. 암눈비앗

 

일월성신 천지신명이시여.

이런 세상이 있으리이까.

귀신은 밝으시어 모르는 일 없다 하옵더이다.

내 어찌 살리이까.

내 이제 어찌 살아야 하오리아까.

 

세상에 나서 집 바깥이라고는 동네 새암터에도 나가 본 일 없으리만큼, 살구

나무 토담 안에 숨은 듯 있는 듯 감추어져, 아침 이내 아지랑이 아옥하게 어리

는 숨결로 자라온 작은아씨, 지나가는 눈빛조차 함부로 쏘이지 않은 부들의 속

털같이 여리고 가벼웁고 흰 몸 애기씨, 가장 멀리 간 나들이라면 오로지 대문

밖 한울타리나 다름 없었던 큰집이 다였던 강실이는, 지금 비 먹은 구름이 달빛

을 무겁게 삼킨 음 이월 밤의 명치끝이 결리어 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

가슴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명치. 명문이라고도 하고 심와라고

도 하는 이 급소의 복심에, 거꾸로 박힌 뼈다귀처럼 결리는 숨을 강실이는 토하

지도 삭이지도 못하며 참고 있는 것이다.

대관절 이곳은 어디일까.

어둠 속에 눈을 뜬 강실이한테 무참히 끼쳐든 것은 생전 처음 맞닥뜨린 낯설

음의 스산하고 살천스러운 기운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마셔 본 일 없었던 서투른 공기가, 들다 만 먹물처럼 서걱

서걱 스산하게 떠 있는 방 천장과 바람벽 구석지는 음충들이 뭉친 현상으로 얼

룩이 져 시커먼데.

이불도 낯설고 베개도 낯설다.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도 낯설었다.

그것은 어머니 오류골댁의 것이 아니었다.

봄에는 봄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가을과 겨울에는 또 그 철대로 오류골댁한

테서는, 늘 낯익어 저절로 번지는 어머니만의 어머니 냄새가 묻어나 강실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묵은 겨울의 삭은 잿빛 주저리를 벗기며 한쪽부터 수줍게 트이는 봄빛이, 아

직은 얼른 나서지 못한 채 처마끝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초가지붕 짚시울에

엉겨 있던 눈이 녹아 탐방 탐방 떨어지는 물 소리를 신호로, 오류골댁은 겨우내

덮었던 이불과 요의 호청을 뜯어 칼칼히 빨아 냈다.

먼 데 산 줄기와 굽이를 담채 붓갈피로 지우면서 누가 눈치 못체게 다가온 봄

이 이제는 가차이 노적봉에까지 스미어, 솔빛이며, 나뭇잎 다 깎아 버렸던 삭모

의 겨울가지 날카로운 끄트머리에 아슴한 연두 물빛 돌면, 간짓대 받쳐 세운 빨

랫줄에는 두두두둑, 투둑, 물방울 떨어지는 호청이 희고 눈부신 휘장처럼 펼쳐져

널리었다.

"봄은, 먼 산에 아지랑이 언덕 위에 풀빛으로도 오지마는 부지런한 아낙네의

호청 빨래 정갈하고 한가로운 낙수 소리로 오느니."

한사 남평 이징의는, 이른봄의 얇은 종이 같은 박지 햇볕을 함뿍 빨아들여 온

마당 가득히 하얗게 채우는 호청을 부시게 바라보며, 남평댁한테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이불이란 본시 꿈을 덮고 자는 것이라. 옷보다 곱고 깨끗해야지. 단정한 조선

으 부인들은 반상간에 일생동안 남편과 자식들 꿈자리 보살피는 것을, 무엇하고

도 바꿀 수 없는 소명으로 알고, 정성되이 챙기며 살아오잖어? 깨끗한 잠이 깨

끗한 꿈을 부르거든. 대저 꿈이란 형체도 잡히지 않는 것이 몸 사는 생시를 지

배한단 말이야. 그러니, 꿈자리 사납게 하는 것이 바로 악덕 아니라고?"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더러운 잠, 더러운 꿈.

구겨진 잠, 구져진 꿈.

그런 사특의 못되고 나쁜 꿈과 잠을 몰아내려고, 검정 무명 이불에도 깃은 그

리 선홍으로 붉으며, 베갯모의 모란과 국화 매화 까치 무늬는 그리 벙글어지고,

구름에 노니는 홍학은 흐르듯 날아가게 수놓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공들여 꿰맨 이부자리도 겨울울 나고 나면 풀기 눅어 후줄근해

지고 만다. 그 때묻어 눅눅해진 무명의 올과 올 사이를 바늘같이 차갑게 찌르는

이른 봄의 개울물, 얼음 섞인 춘수로 헹구어 내는 손가락은 물에 불고 시려서

붉었다.

그런 날의 오류골댁한테는 개운하고 맑은 물내가 났었다.

긴 긴 겨울의 찌든 때를 흐르는 봄물에 말끔히 다 씻어내고 온몸에 새 물 머

금은 무명천 냄새도.

그러다가 오월 단오 초닷새가 성큼, 싱그러운 초목이 물살로 풀리어 천지에

넘실거리며 일렁일렁일 무렵, 초여름 방죽가에 모독모독 무더기로 무리져서, 초

록 칼잎 가운데 꽃대를 뽑아 올려 피어나는 연노랑 나울진 꽃, 투명한 창호의

화사하고도 연연 그윽한 자태라니.

설 추석이 연중에 가장 큰 명절이지만 양기가 천지에 가득 찬 날이라 그 못지

않은 가절이 단오날이었다. 수리 천중절 수릿날이라 하는 이날이면, 동네 남자들

은 모래밭에 씨름대회를 하고, 여자들은 하늘 높이 그네뛰기를 하여 온퉁 흥겹

고 즐거운 중에 무엇보다,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흥건히 적시어 감아내던 어머

니의 검은 머릿단에서 풍겨 오던 향기. 무어라고 하기 어려운.

"자, 강실아, 이리 오니라."

오류골댁은 창포 뿌리 깎은 비녀 끝에 새빨간 주사를 꼭 찍어 강실이 귀밑에

다 곱게 꽂아 주고는, 기응의 상투에도 아담하게 꽂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

흰뿌리 창포비녀를 자신의 낭자머리 동그란 쪽에도 꽂았는데.

주사는 벽사라,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는 육방정계광물이니, 이 창포잠 꼭

지에 찍힌 붉은 점 선명한 빛깔이, 일년 횡액과 온갖 못된 작해를 막아 주기 바

라는 습속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검은빛이 많이 바래어 윤기가 가시었지만, 어머니 오류골댁 머릿결

에 감돌던 오월은 신비로웠다. 강실이가 아직 나이 어린 계집아이였을 적, 단오

날의 물머리에서 풍기던 창포 향기와 주사의 신괴한 방향이 문득 강실이의 명치

를 친다. 주사의 냄새가 이상하게도 은밀히 남모르는 어둠을 품고 있었기 때문

일까.

불길한 것을 모두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주사 글씨 벽사문을 지어 문위에 붙

이던 '천중적부' 부적은 일신의 몸에 침노하는 병도 모두 물리쳐 준다고 하였건만.

가내 화평 수호의 부적을 붙이고 난 오류골댁은 마당에 조랑조랑 다닥다닥 꽃

핀 듯이 열린 앵두를 따서 앵두화채를 만들었고, 앵두편과 증편을 쪄 큰댁에 보

낸 다음 손님들한테 대접하며 웃고 놀았다.

"단오날 정오에 캔 약쑥 익모추가 제일 좋지. 약효가 그만이라."

하며 들에 나가 어울려 캐 온 약쑥과 익모초를 헛간 옆구리 그늘에다 널어 말리

던 어머니. 오류골댁 손과 저고리 배래 그리고 치마폭에서는 쌉싸하고 상긋한

풀내가 났다 .

익모초.

암눈비앗.

이름 그대로 부인들, 특히나 산모와 어머니를 이롭게 하는 이 월년생 초본 두

해살이 풀은 네모난 줄기와 부드러운 순, 꽃, 잎, 열매 모두 하나도 버릴 것 없

이 약으로 쓰이었다.

침침하여 어두운 눈을 밝게 해 주고, 여인의 경맥을 조절해 주며, 피를 활발히

돌게 하며 정혈을 돕는데다가 부종에 잘 듣고, 만성맹장염이나 유방의 염증, 그

리고 대하증과 신장 이뇨에 유용하게 쓰이는 이 익모초는, 젖몸살과 산전산후혈

자궁출혈 자궁수축 같은 부인병에 없어서는 안되는 약재였다.

또 이는 여인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며, 이 약을 환으로 지어 장복하면, 생리

불순으로 아기 가지지 못한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된다 하였다.

꽃에 꿀이 많아 벌떼들이 잉잉거리며 하루 종일 맴도는 꿀풀이면서도 그 생즙

은 독하리만큼 썼다. 오죽해야 '익모초 쓴맛'이라 하리. 그러나 그 쓴맛이 밥맛을

끌어당기니 묘한 일이어서, 한여름 폭염에 시달리느라고 입맛이 떨어지면 기응

은 확독에다 시퍼렇게 찧어낸 익모초 생즙을 한 대접씩 벌컥벌컥 마시곤 하였다.

"유월 유두날 익모초를 먹으면 더위를 안 탄단다. "

습기가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들판이나 밭두둑 혹은 울타리밑, 가리지 않고

우불하게 자라는 익모초를 뽑아 찧어 오류골댁은 동글동글 끝도 없이 환을 짓곤

하였다. 녹두알만씩 한 환약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또 익모초즙을 불에 달여 엿

처럼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그래서 여름날의 무명옷 올 사이로는 익모초 진초록 쓴맛이 쌉쏘롬히 배어들

어, 오류골댁이 소매를 들어올리거나 슥 옆으로 지나칠 때, 또 가까이 다가 앉을

때면 냇내처럼 그 쓴내가 흩어졌다.

익모...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에이어 강실이는 우욱 치미는 울음을 삼킨다. 무

성하게 자라난 기둥줄기에 길죽길죽 붙은 잎사귀들의 잎꼭지 겨드랑이마다 층층

으로 몇 개씩 돌려 달린 홍자색 꽃. 그 꽃 이름 익모초 암눈비앗이 아니라, 그러

다만

"익모."

라는 말이 그토록 그네를 에이게 하였던 것이다.

오뉴월의 조선 천지 그 어느 곳에나 흔하디 흔하게 우거지는 풀포기 한자락은

그 타고난 성분으로 세상의 산부와 어머니들을 이롭게 하건마는, 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이날까지 자라며 무엇 하나 어머니한테 이로운 일 해 드리지 못한 태,

이제 이다지도 참혹 극통한 못을 깊이 깊이 박고는, 차마 뒤도 제대로 돌아볼

수 없는 불효 여식이 되어 이제는 영영 어머니 냄새를 여의고 만 강실이 가슴

밑바닥이 쩌억 벌어진다.

아아.

동굴의 아가리같이 벌어지는 가슴뼈가 숨도 못 쉬게 아파와 손으로 누르면서,

옆으로 좀 돌아누우면 그나마 덜할까, 아물려 보려 하였으나, 그네한테는 이미

그만한 힘이 없었다.

어머니.

비명 대신 부르짖어 부르는 이름은 어머니였다.

나 좀 잡어 주어요.

제 가슴 벌어진 아가리, 나락의 아득한 검은 구덩이로 까무러지려는

제몸을 버팅기며 강실이는 어머니를 간절히 부른다. 어머니의 넝쿨이 그네를 휘

감아 붙잡아 주기 탄원한다.

"강실아,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 주랴?"

그것이 언제쯤이었던가.

저무는 어느 날 저녁 등잔불 밝힐 무렵, 모녀 마주앉아 심지를 고르며 들려

주던 오류골댁 음성에 강실이는 안간힘으로 매달린다.

"전에 전에 말이다. "

어떤 사람이 있었더란다.

홀어머니 한 분 모시고 그날 그날 순박하게 살아가는 총각이, 아침이면 산에

가 나무 해 오고,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새끼 꼬면서 그럭저럭 살림살이 따숩

게 일구어갔더래. 동네 마실도 댕김서. 품앗이도 허고. 그러다 보니 이엉 올린

곳간에다 나름대로 먹을 만치 양식 가마니도 들여놓고, 엄동설한에도 땔나무 걱

정은 안허게 허리 펴고 살게 되었겄다. 이제는 장가를 가야겄지? 얌전허고 마음

씨 고운 처자한테로.

그래 하루는 참말로 장가를 들었구나. 동네 사람이 건넛마을까지 가서 중신

애비 노릇 잘하고 데려온 큰애기였대. 얼굴도 투덕투덕 볼 만한데다가 부지런한

큰애기라, 시집와서도 달랑달랑 쉬잖허고 몸을 놀려 논 매고 밭 매고 삼시 세

끼 지극공양 더운 진지 해 드리니, 시어머니 마음에 참 마땅허셨더란다.

부녀자 행실로 그만하면 삼강오륜이 다 쓸데없고 여교 명감이 무색한 것이지

무어.

더더욱이나 이쁜 며느리 이쁜 짓 허느라고 시집온 지 한 해 만에, 애터지게

할 것도 없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터억 순산했다지 뭐냐.

예전에 들은 말인데 어떤 누가 그랬다더라.

허는 짓마다 그렇게 하래도 생각이 안 나서 못하게끔 미운 짓만 골라 골라 가

며 하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하도 미움을 받는지라 제 딴에도 서러웠던지 기껏

궁리를 해서 이쁨을 좀 받아 보려고 꾸민 노릇이, 아이고, 우스워라,으스름 달밤

에 삿갓을 들러 쓰고 헛간 모퉁이에서 불쑥 나서며, 시어머니한테 허는 말이

"이래도 안 이뻐라우?"

히히히.

혀를 내밀고 웃으니, 사람이 얼마나 놀랬겄느냐.

마침 콩타작을 할 때였던가, 마당에 자빠진 도리깨를 집어들고 헛간으로 들어

가려던 시어머니가 그냥 간이 떨어질 뻔해서 겁김에

"에라이, 망종아."

하고는 삿갓에 대고 도리깨를 내리쳐 벼락을 냈다는구나.

사람이 이쁜 짓 허기가 그렇게 어려운 법이니라. 이쁨받기도 어려운 일이고,

그런데 이 각시는 그렇게 옴쏙옴쏙 밥 먹는 것까지 이뻤던가부드라. 수북 수북

히 꼬깔 봉우리로 퍼다 먹는 숟가락질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레 복숟가락으로

뵈이더래.

"사람 사는 복이 이런 것이로구나."

애기아버지가 된 총각이 하도 좋아서 나무 하러 갈라고 지게를 지다말고 그만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다 얼굴을 묻고 혼자 웃었단다. 아무도 못 보게. 행여라도

누가 보면 복 달어날까 봐. 귀신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웃은 것이 죄였던가.

어느 하루 아무 까닭도 없이 앓기 시작하던 애기엄마가 끝내 자리에서 못 일

어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구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니가 인제 나중에 얼마나 울라고 그렇게 웃냐."

귀신이 시기를 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할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

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치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그리서

부부 금슬이 유난히 좋아 떨어질 줄을 모르면 예전 어른들은 오히려 사위스럽다

고 나무라셨더니라. 그런 사람들이 상배하기 쉬운 탓이었다.

그뿐이냐 어디, 귀하고 잘난 자식이 아무리 자랑스러워 사랑이 넘쳐도 남 앞

에서는 물론이고 혼자 앉아 있을 때 또한

"우리 애기 잘생겼다."

"예쁘다."

는 말은 결코 입밖에 내면 안되는 법. 사기가 끼칠까 두려운 ㄸ문이지. 뿐 아니

라 잘 먹고 잘 노는 애기가 실팍하다고, 들어올리면서 무심코

"아이구 무거워라."

한 마디 하잖어? 그럼 참 누가 꼭 지켜본 것처럼 애기한테 탈이 나서, 설사를

하든지 앓든지 그만 살이 쭉 빠지고 볼테기가 홀쪽해져, 업어도 헛덕개비마냥

가볍게 되고 말더라.

옛말 그른 데 없거든.

옛말이 내려올 때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느니다.

사람이 살다가 고생끝이 되었든 노력끝이 되었든 웬만큼 뜻이 이루어져서 마

움에 흡족해도, 아직은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는 게 좋지.

"이만하면 됐다. "

"더 할 나위가 없다."

고 행복이 목까지 그득 차면 꼭 토해 낼 일 생긴단 말이다.

그런 순간 일생에 몇 번 있기도 어렵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웃은 죄'로 어처구니없게 아내를 잃고는 오죽이나 상심하고

시름에 겨웠겠느냐. 새장가 들 생각이야 물론 못하고.

허나. 날 가고 달 가면 밤낮이 바뀌고 염량이 바뀌듯이 사람의 마음도 바뀌는

것이라, 다시는 아내 얻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이 사람이 재취를 얻게 되었더래.

그래도 처복은 있는 사람이었는지 재취부인 역시 초취댁 못지않게 심덕 있고

부지런했더란다. 다만 한 가지, 그 재취가 아들을 하나 데리고 들어온 것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재혼 전에 어머니와 아들이 마주앉아 의논하기를

"차라리 자식 낳고 키워 본 사람이 제 자식을 생각해서 에미 없는 남의 자식

곧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흠이 외나 덕이 될란지 모를 일이니 허물을 말자."

하고는 며느리를 맞이했대.

"생김새 투실투실 모난 데 없는 것으로 보아 장화 홍련이네 같은 모진 계모

노릇은 안허게 생겼다만."

재취 모색을 마주하고는 은근히 마음이 놓였으나 사람 속은 또 모르는 것이

라, 혹 전실자식 구박이나 허면 어쩌꼬, 암만해도 눈치 살피게 안되겄냐? 고슴도

치 제 새깨하는데. 하물며 사람 인정이야. 어디가 달러도 다르겄지 싶은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는구나.

헌데 참 놀랄 만한 일이었단다.

이 계모의 행동거지를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

았지만 도무지 남의 어미 계모라고는 할 수는 없을 만큼 전실자식한테 전심전력

극진히 대하는 것이야.

솥에서 밥을 퍼도 언제나 전실자식 것을 먼저 푸는데 고실고실 흰 쌀로 고봉

밥을 소담스럽게 담어 주고, 제 속으로 낳은 제 자식 것은 보리 눌은 잡곡 깜밥

어씩어씩 주걱 닦어 훑은 놈으로 담어 주어. 옷을 입힐 때도 새옷은 형만 해 주

고 동생은, 그러니까 계모가 데리고 온 자식은 전실소생보다 나이가 어렸던가

동생이었드래, 동생은 형이 입다 내버리는 다 떨어진 걸 주워 입히고, 빨래를 허

드라도 전실자식 것은 진솔옷보다 더 번듯하게 다듬었는데, 갑옷같이 풀먹여서

다림질 미끄러지게 해 주고, 제 자식 것은 너펄너펄 찢어진 걸 아무렇게나 듬성

듬성 꿰메 입히기나 할 뿐 별로 깨끗허게 빨어 주는 것 같지도 않었단다. 그러

니 늘 꾀죄죄허지. 세수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전실자식은 아침 저녁 씻기고 빗

기고 다듬어 주면서.

그러니 안 이상헐 것이냐?

"저것이 무슨 속셈이 있어 저렇게 일부러 꾸며 허는 짓이냐. 뭐냐."

하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대. 그럴 것 아니야잉? 무어 내 자식이나 전실자식이

나 차별 않고 똑같이 대한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보살인가 하고 고맙게 여길 수

도 있지만, 이것은 앞뒤가 아조 바뀌어도 상정에 너무 어긋나게 바뀐 것 같았거든.

그래. 안 그런 척하면서 지금까지보다 더 면밀 유심히 며느리 행동거지 일거

수 일투족을 송곳눈으로 살펴보았더란다.

허지만 시종여일,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이 없어. 누가 보나 안 보나, 말 한

마디라도 전실자식이 물어 보면 온화 다정하게 대꾸하는데, 제 자식이 어머니를

부르면, 바쁘다고, 저리 가라고, 대답도 잘 안하니, 아무 물정 모르는 사람이 혹

지나가다 그 광경만 보면, 전실자식이 제 자식이고 제 자식이 구박덩이 전실자

식이나 되는 양으로 오해할 만했단다.

참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느냐.

전에 들으면 혹 부모 자식간에도 전생의 은원이 있어 이새에 그걸 갚노라고

서로 남 못 살 세상을 사는 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어머니는 재취 며느리 소

행을 이해할 수가 없었대.

"저것이 집안에서는 사람들 눈이 있으니 제 속마음대로 못하고, 밭 매러 나가

서는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전실자식은 꿍꿍 힘든 일 시키고, 제 자식은 그늘에

앉혀 놓고 낮잠 자라 할는지도 몰라."

며느리는 밭일을 하러 갈 때도 밥바구리 머리에 이고 꼭 큰 놈은 앞세우고 작

은 놈 뒤세워서 데리고 나갔거든.

그에 생각이 미친 시어머니가 하루는 콩밭 매러 간다고 소쿠리에 밥을 담어

이고 나가는 며느리 뒤를 살짝살짝 밟었드란다. 참, 사람으로서는 그러면 못쓰는

것이었지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도저히 궁금증을 누를 수가 없었던 게지.

헌데 이번에도 시어머니 추측이 빗나가 버렸다지 뭐냐.

이마만큼 멀리 똘어진 둥구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한나절이 넘도록 지켜보았

지만, 글세, 시어머니 짐작과는 반대로 전실자식은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앉혀

놓고, 제 자식은 땡땡 땡볕에서 낯바닥이 홍시가 되도록 어미를 도와 콩밭을 매

고 있더란다.

며느리는 어린것한테 쉬란 말도 안하더래.

"나, 세상에 나서 이런 일은 처음 봤다. 듣지도 못했다. "

그날 밤에 시어머니는 아들한테 그렇게 말을 했대.

"니 복인가 부다"

"먼저 간 에미가 자식 못 잊어 보낸 사람일까요?"

헌데,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그런대도 또 하나 알 수 없는 일이 생겼단다.

하루 이틀 아니고 날 가고 달 가서, 일년이 넘었는데, 묘한 일이지, 그렇게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편안히 건사한 전실자식은 안색이 누렇게 떠 파리한데다가 살

도 안 오르고 기운도 없고 키도 안 컸더란다. 아 그런데 거꾸로, 솥바닥 닥닥 긁

은 깜밥에 헌옷 입혀 험한 일 마구 시킨 제 자식은 동지섣달 설한풍에 맨발을

벗고 섰어도 얼굴이 포동포동 발그롬히 복사빛이 도는 거라. 살집도 실허고 키

도 훌썩 크고.

너 같으면 어떻겄냐. 네가 시어머니라면, 이상 안허겄냐?

"저것이 분명 필유 곡절이 있을 것이다. 내 기필코 그 까닭을 밝혀 내고 말리라."

시어머니는 다시 한 번 결심을 했지.

자, 지금까지 눈뜬 대낮에 일어나는 일은 안 본 것 없이 다보았는데, 집안에서

고 집 바깥에서고, 남 다 자는 오밤중에 혹 무슨 조화를 부리는 것이 아닐까, 그

렇게 고누었더래.

시집온 이래 며느리는 항상 두 아들을 한 방에 같이 데리고 잤거든. 서방님은

사랑에서 자고. 시어머니는 큰방에서 자고.

"철모르는 어린 것을 꼬집고 때려서 소리도 못 내고 울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렇게 마를 리 없다. 남이 볼까 싶은 대낮에 아무리 간을 내먹이게 잘해도, 저

어린 것 속에 오갈주눅 깊이 들 일을 밤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면,

어디다 말도 못허고 저 혼자 병이 들었을 터인즉, 고기 반찬에 비단옷이 무슨

호강일 것이며 상수리나무 그늘이 가시방석이지 꽃방석일 리 꿈에도 없지 않겠

느냐."

아이구, 무서워라.

시어머니는 순간 며느리 행동거지며 보름달처럼 원만 둥그런 얼굴, 부드러운

말씨들이 모두 너무나 감쪽같이 사특한 무엇을 교묘하게 감추는 짓거리 같기만

해서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더란다.

만일 그 짐작이 정말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겄지?

저것이 여시가 둔갑한 것 아니여?

때가 되먼 우리 식구 모다 다 잡어먹을라고?

시어머니는 간이 다 떨렸대.

그러지 않겄냐? 옛적부터, 백 년 묵은 여시나 구미호, 꼬랑지 아홉 달린 여시

가 재주를 넘어 가지고 이쁜 여자로 변해서 사람을 홀려 놓고는, 그만 달라들어

간을 내먹느다는 이얘기를 흔히 허잖어.

암만해도 의심이 점점 더 생긴 시어머니는, 도무지 불안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더란다.

그래서 하루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방에서 빠져 나와 며느리

잠든 건넌방에 귀를 대고 기울여 보았대, 무슨, 소리 죽인 소리 들리지 않는가

하고, 그런데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부시럭거리는 소리도. 아무리 오래 그러고

지켜서 있어도 말이다. 그냥 천지가 캄캄헌 오밤중만 깊을 뿐.

"하, 이럴 리가 있느냐."

시어머니는 문설주에서 귀를 떼고, 이번에는 창호지에 침을 발라 문구멍을 폭

뚫었구나, 들여다보려고.

바싹 눈을 구멍에 들이대고 유심히 유심히 방안을 더듬어 보자니까, 어두워서

무엇이 보여야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사람 형상 분명헌 것이 나란히 누워는

있지만, 자세히는 안 보여.

방안에 자던 사람이 무심코 눈을 뜨고 보았더라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드레, 먹

장 같은 어둠 속 문짝에서 시어머니 눈알만 번들번들, 용을 쓰고 기어이 이 비

밀 실마리를 캐내고 말겠다는 눈빛이니 그랬겄지, 그 눈에 불을 쓰고 살펴보았

더니만, 이건 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네.

이게 웬일이라냐.

며느리는 자기 품에 전실자식을 안고 자고, 제 자식을 내팽개쳐 문간에서 꼬

부린 잠을 자고 있지 않는가.

그걸 누가 믿어?

"내가 잘못 봤을 테지. 바꿔 봤을 테지."

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몇 번이나 고쳐 보고 또 한 번 더 보아도.

시어머니는 두 눈을 더욱 더 부릅뜨고 마지막 눈정신을 모아서 이 뜻밖의 방

안 광경을 송곳같이 뚫어지게 붙박아 들여다보았더란다.

그런데, 사실이었더래. 하지만 시어머니는 의심을 풀지 않았대. 여시짓에 홀린

면 무슨 착각을 못허랴, 해서.

오늘 밤에는 내가 기어이 네 꼬리를 잡고야 말리라.

그래서 마치 천 년 묵은 지네와 맞서 싸우는 선비처럼, 온몸에 독을 쓰고 며

느리를 노려보았다는구나.

그런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아, 참으로 신기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란다.

어머니한테서, 그러니까 며느리 말이다. 그 어머니 가슴에서 형언할 길 없이

푸르고 맑은 한 줄기 빛이 뿜어나 뻗치더래.

섬광이라고 할 것이지 아니면 안개라고 할 것인지, 구름 사이를 뚫고 비치는

햇살이라고 할 것인지, 아니지, 그런 말로는 도무지 표현 못할 숭고하고, 부드

럽고, 찬연한 광채로 뻗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서릿발을 세우면서 그 빛은

삼엄하게 솟구치더란다. 공중으로.

시어머니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경건하고 엄숙해져서, 숨을 죽이고 그 광채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대.

그런 신묘한 광경은 생전 처음이었거든.

그런데 이 솟구친 광채는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전실자식을 그냥 건너, 저만큼

문간에서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제 자식한테로 뻗어 가더란다. 그러더니, 고사리

처럼 도르르 그 자식을 감아 안더란다. 마치 그 무엇도 절대로 해치지 못하도록

꿈에서도 보듬어 보호를 하듯이. 꼬옥. 잠든 세상에서도 어머니 기운은 살아서

그렇게 뻗쳐 제 자식을 광채로 감고 있었던 게지.

그러니 생시에 깨어서야.

그 '어머니 생기운'이 자식한테는 진정한 젖줄이라, 깨진 그릇에 보리깜밥을

먹으면 어떻고, 헐벗은 몸에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으면 또 어떠하냐.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참으로 배부르고 참으로 등 따신 것은 산해진미 능라금

수만 가지고는 못 얻는 법.

"생기운을 받어야만 사람은 생기를 얻는 것이다."

오류골댁은 말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였구나.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되어진 까닭을 알고 크게 깨달

은 바가 있었대. 그리고 그 빛만은 인력으로는 감히 어찌하지 못할 일이라 더

이상은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더란다.

어머니.

강실이는 목이 메었다.

세상에 나서, 강보에 싸여 지낸 어린 시절의 몇 날을 빼고는 어머니를 기쁘고

이롭게 해드린 일 단 한 가지도 없었으면서, 속 깊은 근심에 상한 얼굴로 시름

시름 앓다가, 이제 이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하여 정처없이 길떠나 온 처지에,

그네는 단말마 신음을 삼키며 어머니의 기운이 부디 제 몸을 고사리같이 감아

올려, 이 참경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기를 염치없게도 바라고 있다니.

"애기씨, 정신이 조께 드싱기요?"

강실이의 기척에 움칠 놀란 황아장수가 얼른 일어나 앉으며 등잔을 당겨 탁,

부싯돌을 친다. 무명씨 기름에 잠긴 심지를 세우고는 강실이 곁으로 근심스럽게

다가앉는 그네의 얼굴이 부석부석 잠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뒤척이며

눈을 붙이지 못한 것 같았다. 황아장수는 강실이 이마에 젖어 흩어진 머리올을

투박한 손으로 정성껏 쓸어 넘겨 준다. 그리고는 이불깃을 여미어 누른다.

"참 죄송시럽습니다. 이리로 뫼시고 올라고 그렁 것은 아닌디요, 대실아씨 신

신당부 말씀도 있고 해서 어쩌든지 꼭 무사히 대실 안행사끄장 배행을 잘 헐라

고 딱 마음먹고는, 저어그 정그장 앞에요, 거그 둥구나무 밑에서 만나기로 허겼

잖에요? 그래 거그서 지달르고 있었등만, 아, 벨안간 옹구네가 애기씨를 업고 나

타나네요, 긍게. 지가 놀래 갖꼬는 이거이 무신 일이다냐고 그렁게로, 애기씨가

개울을 건널라다가 기양 픽 씨러지시드라고, 그러드니 그 자리서 혼절을 허셌다고... "

강실이는 가물가물 잦아드는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리어 그 중에 실오라기 한

가닥을 힘없이 잡는다.

"여그가 시방 긍게 거멍굴 옹구네 집이그만요."

황아장수는 더듬더듬 여기까지 오게 된 정황을 이야기하고는, 겁이 나고 송구

스러워서 차마 말씀 못 드리겠지마는, 장사하는 몸이라 입에 풀칠 하기 위해서

는 헐 수 할 수 없이 내일 아침 날 새기 전에 길을 떠나야겠는데, 강실이도 같

이 나설 수 있을는지 물었다.

"이 예펜네는 어디 갔다올 디 있다고 아까 나갔는디 아직 안 옹만요. 물어 보든

안햇지만 자개가 몬야 앞장서서 뫼시고 업고 옹 걸 보면 메칠 동안은 애기씨 구

완해 디릴 거이여요. 암만해도 그 몸을 허세 갖꼬는 내일 새복차 어디 타시겄능

가요잉? 여그서 남도가 또 얼매라고. 득량이 거 깨나 멀다든디요. 생전에 안 타

본 기차를 타먼 성헌 사람 장정도 막 멀미를 헌다는디, 똥물까지 다 께운다고

겁나는 소리 해 쌓지요왜. 누워서 가는 질이라도 낯설고 먼디, 애기씨는, 암만해

도 내일은 못 가실 것맹이여라우. 무리허시다가는 가다가 질에서 일당허지 싶그

만요잉. 아이고, 참."

내일이 아니고 언제란들, 그곳이 어디라고 이 몸으로 효원의 친정 대실의 언

저리 절간으로 뻔뻔스럽게 얼굴 밀고 갈 수 있으리요.

"차라리 잘되었소. 나는 관계치 말고 길을 뜨시오."

이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또렷하여 황아장수는 가슴이 섬찟했다.

"인자 메칠만 여그서 잘 조리허고 지시먼, 우선 급헌 불 끄고 숨도 돌리실 수

있을 것 아닝기요? 기운 조께 챙기시고요. 그러먼 지가 늘 댕기는 날짜 있응게

로 꼭 맞촤서 오지요. 그때 같이 가시능 거이 좋겄어요."

강실이는 아무 대답이 없다.

엉뚱한 것에다 금지옥엽의 애기씨 작은아씨를 모셔 놓은 것이 노여운 것일까,

싶어서 황아장수는 두 손을 맞잡아 비빈다.

"애기씨, 거멍굴이랑게 놀래겼지라우? 기가 맥히고 설우셔서 말씀도 못허시

고... 백정 것에 당골네에 소상헌 상놈들만 사는 디로, 저도 참 이게 무신 도깨비

한테 홀린 일잉가 머리가 휘둘려 갖꼬요, 무망간에 옹구네 앞장스는 바람에 따

러오기는 왔는디 말이 안 나옹만요. 그런디요잉. 아까는 어쩔 수가 또 없었그만

요오. 그런디 당최 꼭 죽을 짓 헝 것맹이여요. 원뜸에서 지가 이래논 것 알먼 지

다리몽생이를 가만 두시겄능가요? 하이고오. 대체 이게 무신 일이까아."

황아장수는 황아장수대로 답답한 일이라 한숨만 들이쉬고 내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아귀에 잡혀 갇힌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노무 예펜네는 어디 가서 시방 머엇을 허고 자빠졌다냐. 죽이 되든 밥이 되

든 기절을 허든, 이 예펜네만 없었으먼 내가 어뜨케라도 해 ㅂ을 거인디. 무단히

설쳐댐서 둘러업고 나타나서 이리 가라, 저리 가자. 넘의 혼을 빼놓고는, 달구새

씨 몰디끼 즈그 집구석으로 몰고 왔으먼 책임을 져야지, 어디 가서 먼 지랄을

허고 자빠졌냐고, 긍게. 코빼기도 안 뵈이고. 사램이 있어야 무신 말을 허든지

의논을 해 보든지 허제.

황아장수는 진땀이 돋아 옹구네가 마실 나간 것에 역정을 냈다.

번언히 애기씨 몸 성치 못헌 병잔 것 암서나, 객들한테 처억 집구석 맡기고

대관절 어디 가서 안 와아. 홰냥질을 허능가아, 밤을 새고 올랑가?에에이 참.

뜻밖에 일이 복잡 답답하게 꼬이는 것이 내심 불길하여 그네는 혀를 찼다 그

리고는 벌떡 일어나 지게문을 콱 밀어젖히고 마루도 없는 오막살이 토방으로 내

려섰다. 숨이 막혔던 것이다 정짓간이 어딘지, 독아지에서 찬물이라도 한 바가지

좀 퍼 먹으면 살 것 같았다.

댓돌에 신짝을 발로 더듬어 꿰고 막 한 걸음 옮기려는데

"누구대?"

고샅에서 분명 그네를 향하여 누가 놀란 소리를 질렀다.

"누구요?"

황아장수가 그 사람보다 더 놀라서 되받아 물었다.

"내가 누구먼 멋 헐라고 그리여? 내가 누가 되얏든지 간에 왜 쥔도 없는 넘의

집에 , 웬 사램이 왔다갔다 허냥게?"

집안으로 들어서지는 않고 바깥에서 소리를 내는 사람은 공배네였다. 기색을

살피는 것이리라. 지금 막 춘복이 농막에서 옹구네와 한판하고 씨근씨근 분이

받쳐 내려오는 길이라 옹구네가 집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방안에서 불

빛이 비쳐 수상하던 참이었다.

도둑놈잉가?

귀가 비쭉 곤두서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람 나오는 기척이 있어, 흠칫

몸을 숨기며 공배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도둑놈은 도

둑놈이니, 만일 도적이 들었다면 외장을 쳐서 쫓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방에서 나온 것은 여자가 아닌가.

"아는 사램일 거이요."

"아는 사람? 누구간디?"

공배네는 다소 안심을 한 듯 마당이랄 것도 없는 마당으로 그제서야 들어선

다. 그러나 황아장수는, 아까 누구냐고 댓바람에 묻는 소리 들을 때보다 더 화들

짝 놀라, 마중이나 하듯이 이만큼 고샅께까지 밀고 나와 공배네 들어서는 걸음

을 막는다.

"아이고, 나는 또 누구라고?"

가까이 다가온 황아장수 아낙을 알아본 공배네가 팔짱을 꽂아 끼며 이제 아주

마음을 놓은 소리로 말한다.

"근디 웬일이여? 여그서 자고 갈라고 들옹 거잉가?"

"어차피 어디서 자든 나는 매마찬가징게로. 아는 집이라 기양."

"빌어먹을 노무 예펜네."

"잉?"

"아니 자개말고 옹구네 말이여. 나그네끄장 있는 년이 집 비우고 그 지랄을 허

고 헐레벌레 쫓아왔등게비. 누가 머 열녀 났다께미."

"갈수록 태산이네."

"몰라도 되야."

"근디, 밤도 짚었그만 어디 갔다 오시요예? 넘 말 헐 것 아니라. 어째 오늘은

머이 수선수선허요이? 낮엣일 때미 그렁가아."

"송장 치게 생긴 집에 병신 되게 생긴 집에... "

"내가 날짜 잘못 짚어 왔능게비요. 나도 아조 심란시럽소."

"잠도 안 온디, 이 예펜네 오늘 안 들올랑가 몰르요, 들으가서 이얘기나 조께

허드라고. 곧 날도 새겄그마는. 눈붙이ㅗ 어쩌고 허먼 어설피 더 뒷골만 땡기제.

띠잉허니 찌뿌드허고."

황아장수 대답을 듣고 말 것도 없이 공배네는 토방으로 올라선다.

이 예펜네라도 붙들고, 옹구네 욕이나 실컷 해 주고 싶은 생강이 치밀어서였다.

"안되야요."

황아장수 대답이 다급하다.

"안되다니? 머이 안되야?"

"아이고, 내가 사정이 있소. 시방 무신 이얘기 허고 자시고 헐 여가가 없어라

우. 내가 정신 씨일 일이 있어서."

"요상허네."

"나 시방 새복차 첫차 타고 가얀디, 머 그 동안에 챙게 볼 거이 있어놔서, 미

안허그만요잉. 장사 댕기는 사람은 늘 뜬정신이라."

손사래까지 치는 아낙을 굳이 제치고 남의 집 방안에 돌입할 수는 없는 일이

라 짜암 짜암 망설이고 서 있다가 이윽고

"헐 수 없지 머."

막 몸을 돌리려던 공배네는 무심코 댓돌 위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낯선 물체

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짐승 같은 직감이었을까, 그네는 이 집안과 방안

의 기운이 여늬 때와 다른 것을 살갗으로 느꼈던 것이다.

"이게 머이여?"

"머이간디요?"

공배네가 황아장수 반문에 대꾸를 잘라 버리며 댓돌로 순식간에 허리를 구부

려 휙, 나꾸어든 것은 나란히 놓인 갖신이었다.

"이렇게 귀헌 것을 누가 신고 왔당가?"

이런 신 신을 양반이 어찌 이런 더러운 집에 드신단 말이냐.

공배네는 벼락같이 지게문을 열어제쳤다. 등잔불 꼬리가 비명처럼 자지러진다.

남루한 불빛이 성기게 고인 방안에 시럼없이 누워 있는 강실이의 모습이 그네의

눈에 부싯돌을 친다.

아니, 이런, 아니, 이런.

 

 

10. 이 피를 갚으리라.

 

피걸레가 다 되어 널부러진 만동이와 백단이를 질질질 끌어내 솟을 대문 바깥

에다 동댕이치고는, 왕소금을 쫙 뿌려 버린 노복들이 어금니 무겁게 돌아서는

이기채의 사랑마당에, 두 사람 끄집힌 핏자국이 대빗자루로 쓸고 간 자국처럼

음산하고 쓸쓸한 기운으로 차갑게 남았다.

흐린 날이 저무는 잿빛 땅거미를 빨아들이는 탓인가, 그 참혹한 자취는 마치

검은 비명의 갈포가 갈갈이 찢긴 흔적인 양 귀살스러운 흑적색을 띠고 있었다.

넋이 나가 우두망찰, 정신이 공중에 뜬 아랫것들이 아직도 질린 낯색을 거두

지 못한 채 두 손을 맞잡은 그대로 식은땀을 쥐고만 있는데

"멋들 히여? 후딱후딱 치우제. 수악허그만."

구부정한 안서방이 헛간에서 사납게 닳아진 대빗자루를 찾아들고 나와, 얼른

달려들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박박 소리가 나게 핏자국을 파내듯이 쓸기

시작한다. 흙 속에 스민 피라 부드러운 싸리비로는 어림도 없어 그렇게 몽당대

비 거센 꼬챙이로 땅을 긁는 것이다.

"조께 있다 나와 보시먼 샌님 불호령 내리실 거잉만. 얼릉 티 안 나게 씰어.

이거 원 어디 부정타서 쓰겄냐? 청암마님 상청이 지신디 시방이 피가 웬 말이

여. 피가."

안서방은 흙의 살속을 후비며 못내 언짢아하였다.

꽃니아비 정쇠는 거무티티해진 흙부스러기를 삽에다 쓸어모아 담았다. 그 흙

밥에서는 음습한 비린내가 후욱 밀려 올라왔다.

"아이고, 그걸 떠받치고 어디로 가아? 그게 무신 존 복토라고 집안에 두어?

쩌어그 어따가 안뵈이게 내부러. 대문ㅇ으 고샅에도 말고. 갖꼬 나가서잉? 저마

안치."

안서방이, 흙을 버리려고 사랑 옆구리로 막 돌아가려는 정쇠의 등짝에다 대고

말했다.

웅게중게 둘러선 사람들이 입을 함봉한 채 피범벅이 낭자한 덕석을 맞잡아 들

어 옮기고, 몰매 끝에 부러진 몽둥이며 스산한 백지조각들을 줍다가, 서로 눈이

마주쳐 흠칫한다. 뼛조각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그 중에는 덕석에 깔려서 바스

라진 것도 있고, 손가락 발가락뼈인가, 자잘하게 나뒹구는 것, 뎅그만 눈구먹이

퀭하게 뚫린 두개골, 이름 모를 부위가 써금써금 삭은 기색 역연한 갈색 부스러

기들이 어둑어둑 슬어 내리는 어둠발을 감고 있었으니.

아무도 그것에 선뜻 손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

무신 동티가 날라고 저그다가 냉큼 손을 댈 거이냐.

피 묻은 유골이 나한테 콱 접붙어 불먼 앉은뱅이 꼽새가 되야도 될 판인디 어

쩌야 옳당가잉. 참말로. 빗지락으로 쏴악 씰어 불 수도 없고.

노복이고 머슴이고 간에 겉으로 말은 안했지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두려워

하는 것이 당연하여, 으스르르 떨리는 등때기를 움츠리며 누구 눈치 못 채게 뒷

걸음을 치려는데, 안서방이

"뼉다구는 줏어서 한 간디다가 잘 뫼아 놔."

침울하게 한 마디 하였다.

"멋 헐라고라오?"

허리를 구부리고 뼈다귀조각을 살피고 있던 붙들이가 무로아 마른 것 같은 낯

을 치켜들고 물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나이 어린데다가 호기심 또한 많은 머슴

애 담살이라 이 경황중에도 입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 취려서 임자 갖다 주든지 안 그러먼 어따가 묻어 주든지 해야지.넘의 송장

뼉다구를 머에다 쓰겄냐. 아무 디나 내불어서 사방에 궁글어 댕기게 허먼 너 뵈

기에는 좋겄어? .... 그러고... 하늘 무선지 모르고 투장헌 자식놈들이 잘못이제,

이미 죽어서 버실버실 가리가 되는 애비의 뼉다구야 무신 죄가 있겄냐."

안서방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말에 조금 마음이 놓인 사람들은 주삣거리는 대로 삼태기에 한 조각씩 뼈

를 주워담기 시작하였다.

"죄? 죄가 왜 없어? 천하 상것 불상놈으로 태어난 거이 벌써 죄 아니라고? 상

놈이 머이여, 상놈도 못된 처지제. 홍술이가. 천민잉게. 가진 놈은 무신 짓을 해

서 더 갖든지 그것은 죄가 아니고, 못 가진 놈은 가진 놈 것 눈짓으로 넘어다만

봐도 그게 바로 죈디 머."

뒷전에서 옹구네가 귓속말로 쏙싹였다. 그네 곁에는 꽃니어미 우례가 참담한

낯빛을 찡그리고 서 있었다.

"잘 봤제? 상놈은 저런 거이여. 그렁게로 봉출이 잘 건져."

숨소리로 박아 넣은 옹구네 말에 우례는 대꾸가 없다.

"죽은 부모 뼉다구를 갖꼬라도 요랑껏 어떻게든 신세를 바꽈 볼라고 저 박살

이 나게 터짐서 몸부림을 치는디, 어엿허게 연고 가진 양반의 자식으로 피 돌고

물 돌아 씽씽헌 뼉다구 허여멀금 살어서 무럭무럭 크는디, 왜 지 아배를 못 찾

을 거잉가? 지척에 두고, 내 배 빌려 준 에미 도리로도 그건 꼭 해야제. 해야고

말고."

슬그머니 우례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기며 행랑채 쪽으로 끌어 온 옹구네는 번

들번들 검은 눈을 번득이며, 사랑마당과 우례 얼굴을 홰딱홰딱 번갈아 쳐다보면

서 무지른다. 그 눈꼬리에 흙밥 쓸어담은 삽을 받쳐 들고 솟을 대문 바깥으로

꺼부정히 나가는 정쇠의 뒤모습이 찍힌다. 그 모습을 따라가는 옹구네 눈꼬리가

갈고리 같다.

우례도 망연히 제 서방 정쇠의 뒤꼭지를 바라본다.

"저 사람도 못 살 세상 사는 거이여."

"말 마시오."

"사람의 심정 갖꼬는 못 살제 아먼. 개 돼야지도 지 밥그롯 누가 거들라고 허

먼 콧잔딩이 아그르르 주름 잡음서 막 잡어먹을라고 뎀비고, 꾀약거리고 생난린

디. 암만 껍데기는 종이라도 속은 다 사램이 분명허건만, 두 눈구녁 버언히 뜨고

멀뚱멀뚱, 지 지집 타는 상전 앞에, 나는 눈 없소오. 봉사맹이로 부복허고 있을

라먼, 꼭괭이 낫을 갈어서 거꾸로 치키들게 천불이 나도 열두 번만 나겄능가잉?

거그다가 터억허니 새끼는 낳아 놨는디 아조 상전 찍어다 붙여도 고렇게는 못

탁이게 도신허니... 환장을 헐 노릇이제, 환장을 히여. 시앗을 보먼 질가테 돌부

체도 돌아앉는당만 이건 됩대꼬깔로 상전 오쟁이를 지고 사는 인생속이 오죽이

나 썩어 문드러져 곪았겄능가."

아조 나 저 꽃니아배만 보먼 똑 호성암 부체님이 따로 없능 것 같드라고. 꽃

니아배가 곧 생불이여, 생불. 생불이 따로 있잖에.

"터억허니 눈 내리뜨고 버버리맹이로 입 꾸욱 다물고, 논으로 갔다아 밭으로

갔다가 허청(헛간)으로 갔다아 허능 걸 바아. 저 속에 머이 들었이꼬오."

"그만 허시요예."

"그렁게 갚으란 말이여. 보란 디끼 갚어 주어. 아 머 꼭 꽃니아배만 못 살 세

상 상가아? 우례도 똑같제. 원, 수천샌님을 생각해도 오장이 터지고 꽃니아배를

생각해도 오장이 터져서 찍소리도 못허고 짜부러진 것은 또 누구간디? 썩을 놈

의 세상."

"전생에 죄 많어 그렁게비요. 댜 내가 짓고 나온 거이라 당허는 거잉게. 이 몸

뗑이로 싹 갚고 가먼 인자 내생에는 좀 낫겄제."

"하이고오, 오지랖도 넓구라. 삼천 리가 좁겄네. 삼생을 넘나들게. 참내. 나 좀

보시겨. 전생 이생 내생이 머 그렇게 복잡헌 거인지 아능게빈디, 내 눈에 다 뵈

이는 거이여, 그게. 왜 그런지 알어? 부모는 내 전생이고 이 몸뗑이는 나 사는

이생이고요잉? 내생은 바로 자식이여. 자식. 그렇게 생각허먼 간단허잖에에? 긍

게 그, 좀 낫겄는 내생을 봉출이한테서 보라 그 말이여, 내 말은."

옹구네는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아낙이었다.

눈동자 검은 알맹이가 데구르르 구를 때마다 거기 사물이 부딪쳐, 딱, 수리를

내거나, 가느소롬 눈꼬리 좁히며 깎은 손톱 낚싯바늘을 세우면, 남의 눈에 좀체

로 뜨이지 않을 속내 비늘까지도 착, 낚아챌 수 있는 것이 옹구네라고나 할까.

그런 그네의 성정머리를 아는지라 이쪽 사람이 지레 거기 걸려들지 않으려고

뒷걸음치거나 일부러 도외시하다가도, 그만 어찌 까딱 그 바늘에 꿰어 버리고

마는 일이 한두 가지 아니었으니.

우례도 은연중 언제부터인가, 안 듣는 척하면서 옹구네 바늘로 제 속에다 골

똘히 누비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느질만 한 손이라 사부가의 부녀자 섬섬옥수 부럽잖게 곱구나. 손만 보면야

네가 어디 종이라 하겠느냐. 꽃결 같다."

침비인 덕에, 언감생심 꿈에라도 비교조차 못할 칭찬과 찬탄을 수천샌님한테

들었던 것은 열여섯 살 어린 나이, 그나마 아득히 지나간 날의 일이 되어 버렸

고, 이제는 그 손가락 끝에 잡은 바늘로 상전의 댁식구들 앞앞이 옷을 지으며,

올 사이에 꽂는 바늘만큼 제 속가슴 속창에 시퍼런 먹점 문신을 놓고 있지만.

어느 날에 이르러 무슨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오늘 같은 끔찍 처참지경을 두 번만 보았다가는 지레 질려 제 숨이 제 목을

누르고 말 것만 같았다.

상놈이 양반을 넘보는 것은 저만이나 무서운 일이로구나.

설령 죽은 자리 한 귀퉁이 남모르게 욕심내는 것마저도.

우례는 부르르 속이 떨렸다.

두렵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였다.

"즈그들은 양반이라고, 멀쩡하게 서방 있는 너므이 각시도 오라 가라, 앉으라

서라, 누워라 엎어져라, 지 맘대로 주무르고 치긋고 차지험서나, 그러다가 어느

하루 지 마음 식으먼 홱 내떤져 붐서나, 아 그까잇 노무 공산에 묏동 조께 살재

기 쑤시고 들으갔대서 저 지랄을 허고 길길이 등천을 헝마잉. 천하에 다시없는

못헐 짓 헝 것맹이로. 경우가 안 그리여? 경우가. 말로 따지자먼. 도독질은 다

똑같은디."

나는 틀린 말은 안헝게.

꼭 우례 대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옹구네가 콕콕 말을 박더니

"아이고, 가 바야겄다."

순식간에 낯색을 천연덕스럽게 바꾸고 옷자락을 털며 휙 돌아선다. 사랑마당

쪽으로 나가려는 것이다. 우례한테는 이만큼 말을 찔러 놓았으니, 이제 저 언저

리로 가서 좀 기웃기웃해야 또 보고 들을 것이 생겨 직성이 풀릴 것 아닌가.

사랑마당에 웅성웅성 사람들 기척이 낮은 소리로 깔리는 한쪽에서, 누가 낡은

베 보자기를 펴는데, 뒷등만 보이는 상머슴이 삼태기에 주워 모은 뼈를 거기 조

심스럽게 쏟고 있었다.

"이거는 방뎅이 뼉다궁갑서. 잉?"

한쪽이 깨져 달아난 채 넙덕한 뼈를 붙들이가 두 손으로 마잡고 이리 저리 들

여다보며, 또래인 깔담살이한테 보여 주었다.

"궁뎅이지 방뎅이냐?"

깔담살이가 농을 쳤다.

"이놈의 자식들이 그냥. 암만 철딱서니가 없다고. 쩟. 이리 내놔, 이렁 것 함부

로 손대고 그러먼 큰일나능 거이여."

안서방이 어느새 다가와서 붙들이 손에 든 것을 빼앗았다.

"사람이 죽어도 아조 다 죽능 거이 아니그덩."

머쓱해진 뒤통수를 벅벅 긁는 붙들이한테 옆에서 안서방네가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저 아아무 원한 두지 말고 가옵소사.

흠도 말고 탈도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훠월 훨 떠납소사,.

존 일 적선에, 억울허다 절퉁허다, 이 댁의 이 마당에다 가심 찧지 마옵시고,

그저어 선대에 구원 있어 그렁갑아, 내 다 받고 간다, 씰어서 갚고 간다, 좋은

마음 잡수시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옛다 먹어라고, 이씨 가문 대주님네

온 식구들 무사 무탈허게 보살펴 주옵소서.

적선지심으로 측은히 여깁소사.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이 설운 세상 무거운 눈물 다씻어 헹기시고, 개버운 혼 말강물로 개완허

게 극락왕생을 하옵소사.

왕생극락을 하옵실 때, 부디부디 인제 가시거든 제발 덕분에 좋오은 집안의

좋은 자손으로 태어나서, 마른 신 신고 마른 세상을 사옵소사.

아까부터 안서방네는, 마당을 치우는 사람들의 이만큼에 물러서서, 그 유골의

뼛조각들을 향하여 지성스럽게 중얼중얼, 두 손을 비비며 빌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리를 굽히어 절을 하였다.

인연 다 끝난 세상에다가 원한 두면, 그 원한에 발이 묶여서 정작 가벼운 세

상으로 못 간다, 하는 말을 몇 번이고 뇌이면서.

만일에 무부 홍술이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이러한 때 마땅히 당골네 백단이가

맡아다 할 원혼이요, 그네가 맡아서 곳을 하고 풀어 주어야 할 넋이지만, 저토록

생뼈가 다 부러지게 너덜너덜 살점 흩어진 백단이가 대문 밖에 내버려져 나뒹굴

고 있으니, 이 순간 어느 누구도 어찌할 방도가 없이 속수무책으로, 요절이 난

뼈를 쓸고 치우고 주워담고 할 뿐인데.

안서방네는 이 집안에 금방이라도 덮쳐 내릴 것만 같은 재앙을 보잘것없는 제

몸으로 받아 박으려는 사람처럼 결연히 서서, 심정을 다하여 성심껏 원혼을 달

래고 있었던 것이다.

솟을대문 바로 문턱 바깥에 동댕이쳐진 만동이와 백단이의 신음이 산 채로 고

지통 얻어맞아 죽어가는 짐승의 소리같이 그억, 그어억, 으어억, 고샅에 울렸다.

피울음.

그 고샅 모퉁이 호제집 들창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거멍굴 백정 택주는, 묵

묵히 피우던 곰방담배를 발치의 돌팍에 탁탁 두드려 털고는, 후우, 한숨을 뱉어

자르더니 투덕투덕 만동이한테로 다가갔다.

백단이를 들치어 업는 것은 대장장이 금생이였다.

황소도 불끈 들어올린다는 칼잡이 택주와 일평생 싯벌겋게 달군 쇳덩어리만

두드려온 금생이가, 각시같이 곱닷한 무당 서방 만동이에 아낙네 백단이 정도야

무에 그리 무거울 리 있으랴마는, 백정과 대장장이 두 사람은, 이 세상에 나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무겁고 서러운 것은 이고 메어 본 일 없는 것 같은 비통함에

고개를 깊이 떨군 채, 땅에 붙은 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이날 펭상에 나, 백정놈이라 내 이 손으로 소도 많이 잡었고 쇠피도 참 어지

간히 진저리날 만큼 주물렀는디, 생사람 선지피는 또 달르구만잉. 참말로 눈뜨고

는 못 보겄고, 심정 갖꼬는 못 당허겄네.

택주는 제 목덜미를 비린내로 적시며 척척하게 엉기어 미끈거리는 만동이 피

냄새에 눈쌀을 모았다. 둘러업은 만동이 머리가 제 어깨에 걸쳐진 채 힘없이 자

꾸 한쪽으로 떨구어지며 쏠리는 것이 덜컥 수상한 탓이었다.

대그빡이 쪼개졌능가.

웬 피를 이렇게 선지로 덩클덩클.

속마음을 짓이기어 밟는 택조의 걸음이 불안하게 빨라진다.

남의 각시를 업었다는 농지거리 따위는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 금생이가 백단

이 궁둥이에 제 손깍지를 끼어 받치고는, 어서어서 이 동네를 빠져 나가자 하며

택주 앞을 지르는데, 그 뒤를 춘복이가 절뚝절뚝 따른다.

춘복이는 워낙 뚝심 있고 힘도 있어 평소에도 이만한 몽둥이질 정도라면 견디

어낼 만하였거니와, 만동이와 백단이처럼 덕석말이까지 당하지는 않은 까닭에,

터지고 물크러진 살덩이 몇 점 떨어져 나간 자리 가지고는 엄살떨 정황이 아니

었다.

눈구녁 빠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부어오른 눈퉁이를 한 손으로 감싸 누

르며, 다른 손으로는 허리띠가 달아나 흘러내리를 괴춤을 틀어쥐고 바짝 추켜올

린 춘복이가, 너펄너펄 바지자락 털럭이는 맨발을 쓰라리게 디딜 때마다, 고샅에

널린 자갈에는 비틀비틀 붉은 피가 찍힌다.

어쿠우.

어이고 주쿠...

춘복이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킨다.

그가 삼킨 비명 대신 온 마을 개떼들이 모두 다 기를 쓰고 강그러지게 짖어댄

다. 이 처첨하고 기괴한 피투성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매안 마을 고샅을 지

나가는데, 개라고 그것이 심상치 않은 일인 줄을 어찌 모르랴. 비록 미물이라 하

나 개는 본디 영리하여 이들이 낯선 사람 아니고 도적 놈 아닌 즐도 다 알고 있

겠지마는. 겁에 질린 듯이 뒷발굽을 부르딛고 엉버티며 컹 컹 컹, 왈 왈 왈, 왁

왁, 짖는 개소리들이 마을에 내려앉는 저녁 어스름을 날카롭게 할퀴고 찢었다.

춘복이는 이러한 몰골로 오류골댁에 살구나무 아래 토담 밑을 지날 때, 핏방

울 뚝뚝 떨어지는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먼 데 앞산 등성이 너머 저기 어디

쯤 가늠도 할 수 없는 하늘 끄트머리만 노려보며, 괴춤추킨 주먹을 안으로 더욱

글어쥐었다.

그리고 오류골댁 쪽으로는 일별로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웬일인지 몹시 허탈한 것처럼도 보였다 .

아니면 무엇에 씌인 사람 같이도.

제 혼이 뽑혀 허공에 매달린 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넋 껍데기도 같아 기묘한

섬찍함을 느끼게 하는 춘복이를, 사립문 옆구리 토담 곁에 엇비식이 숨어 서서

힐끗 내다본 오류골댁은,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신 중에 흉악한 것이 두억시니 야차라고 하더니만 그 형상이 혹시 저렇게

생겼을 것인가.

예전부터, 죄 지어 몰매 뚜드려 맞은 사람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일은

없었는데, 사실 그네가 이 문중으로 시집온 이후 이런 형용을 가까이 코앞에 맞

닥뜨려 직접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그네는 속이 후들거려 말이 안 나왔다.

시집오기 전에는 물론 규방에만 있었으니 설혹 사랑에서 덕석말이 치죄가 있

었다손 치더라도, 내다보는 것은 그만두고 그런 흉악한 일을 입밖에 내어 주고

받는 것은 행실 있는 부녀자로서는 금기라, 안에서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혹 모질고 표독한 부인이라거나 성품이 무자비하고 난폭하여 그 흉포를 감추

지 않는 사람이라면, 뜻밖에도 여인 자신이 몸소 체형을 가하기도 하기는 한 모

양이었지만.

그래서 조선의 정조 임금 때 한문학의 사대가요, 실학자인 아정 이덕무 선생

같은 이도, 수신서 '사소절'에서 마땅히 부녀자가 가져햐 할 몸가짐과 예절을 적

어 가르치며 경고하였다.

그런 극악 무도한 부녀자가 참으로 있었을까 싶게 흉참한 열거지만, 그러나

없는 예를 들었을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한 부류의 사람은 역시 어디에나 있게 마련인지

"사납고 표독스러운 부인은 별 것 아닌 작은 일에도 분통을 터뜨리어 사람을

원망하는데, 한탄하며 분노하고, 그리해도 부족하면 울고, 울어도 부족하면 통곡

하고, 심지어는 손뼉을 두드리고 가슴을 치며 하늘에 하소연하고 귀신을 저주하

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거니와, 이는 실로 그

집의 어른 되는 사람이 나약하여, 잘 가르치고 인도하지 못해서, 교만하고 간악

함을 길러 놓은 데 연유가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자식은 어린아이 때 잘 가르쳐야 하고, 부녀자는 처음 시집왔을 때 잘 가르쳐

야 한다."

고도 그는 말하였다. 그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말이었다 .

"투기를 잘하는 부인은 집안에 있는 첩을 투기할 뿐만 아니라, 남이 첩을 두었

다는 말만 들어도 그의 부인을 대신하여 투기를 하니, 어찌 그리도 방약무인, 기

고만장한가."

예로부터 포악하고 독살스러운 여인은 얼마든지 있었던 모양인지, 이덕무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성이 나서 그 노여움을 죄 없는

아들딸한테 옮겨, 마구 때리고 쥐어박고, 그릇을 내어던져 부수고, 창호를 찢어

뜯어내는 등, 거칠고 사나운 행동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악독한 부녀자가 아니

고 무엇이랴."

"성품이 악독한 부녀자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혹

은 자기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그 원망이 쌓이고 쌓여서 극도에 이르러, 거

품을 물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귀신이 붙었다고 온갖 패악한 짓을 끝없이 되

풀이하고, 심지어는 칼로 제 목을 찌르고, 또 목을 매어 죽으려는 체하여 사람들

이 겁을 내게 하는데, 이는 실로 남편과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그를 잘 인도하여

거느리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 부인의 죄 또한 큰 것이다. 만약 그것을 깨닫고

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은들 무엇 하겠는가."

라고 탄식하며, 시경에도

사람으로 예의가 없으면서

어찌 빨리 죽지 않는가

라 하였노라고 일렀다.

남의 말만을 듣고 마음에 거슬려,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겨를도 없이 높

고 낮은 신분도 헤아리지 않은채, 발끈 노여운 기운을 일으키어 낯빛이 붉어지

고 목까지 빨개져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사람은 결코 상서롭지 못한 형상이어

서, 반드시 남편에게 홀대를 받으며, 만일 아니라면 자신이 일찍 죽거나 혹은 아

들딸을 낳아 기르지 못한다고도 일침을 놓았다.

꼭 그런 항목들을 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행동거지와 품성을 의복

처럼 여겨서 반드시 갖추어 입고, 단정히 여미고, 바르게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

사부가 부녀의 할 일이었으니.

"아이를 때리고 종을 꾸짖는 소리가 항상 집 밖으로 나가면, 그 집안의 법도가

쇠망하여 무너져 버릴 것을 알 만하다. "

"무릇 말할 때 '죽겠다'고 잘하거나 '죽이겠다'고 서슴없이 하는 사람은 절대로

길하고 상서로운 부인이 아니요, 걸핏하면 흐느끼어 잘 울고 요염하며 공교롭게

웃는 사람은 결코 정숙하거나 안한한 부인이 아니다 ."

"평소에 모습이 까닭없이 턱을 괴고 갈 곳을 몰라 하는 듯한 것은 원망하는

데 가깝고, 귀를 대고 남남남 종알종알하는 것은 참소하는 형용에 가깝고, 즐겁

게 웃는 모양을 그치지 않는 것은 방탕한 데 가깝고, 시끄러운 말을 멈추지 않

는 것은 꾸짖는 데 가깝다. "

라고 할 뿐만 아니라

"많이 꾸짖고 자주 책망하며 잔말을 번거롭게 반복하면, 분부하는 명령이 잘

행하여지지 아니하고, 비복들은 배반하며, 머슴은 떠나가게 된다."

그러한즉 항상

"종을 부르는 소리는 급하고 높아서도 안된다. 그 소리가 사랑채에 닿는 것도

두려운데, 하물며 그 소리를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랴."

고 타일렀다. 그리고

"과부와 처녀가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 참여하여 말을 마구하거나, 함

부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품위 있는 부녀자의 행실이 아니다."

하였으며 오직

"마음을 진실하게 하고 낯빛을 바로 하고, 예절과 의리를 지켜 정결하게 살면

서, 귀로는 떠돌아 다니는 소리를 듣는 일이 없고, 눈으로는 사특한 것을 보는

일이 없으며, 나갈 때는 얼굴을 요사스럽게 다듬는 일이 없고, 들어와서는 몸단

장을 그만두는 일이 없으며, 여러 무리를 떼로 모으는 일이 없이 언제나 남몰래

덕행을 쌓을지니라."

는 가르침이 몸에 밴 규중의 처자였던 오류골댁이, 험한 소리 험한 꼴 안 보고

근검 공순한 아녀로 성장하여 시집온 이래, 비록 가세는 넉넉지 않았으나 그다

지 상리에 어긋나게 살아오지 않은지라.

연전 겨울에 아랫몰 타성바지 쇠여울네가 번쩍이는 쇠스랑을 거꾸로 치켜들

고, 미친 듯이 악을 쓰며 안채로 들이달아, 머리는 산발하여 풀어헤친 채 싯벌

겋게 충혈된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이기채를 노려보며

"이놈아아, 이놈아아."

통곡을 하더니

"내 논 문서 내놔라. 내 논 문서 내놔아."

하고는, 쿠웅, 쿵 대청마루에 쇠스랑을 찍던 날도, 오류골댁은 차마 그 창황지

경을 보러 가지 못하였다.

결국은 쇠여울네가, 달려든 사람들한테 개같이 붙잡혀 죽어 나갈 만큼 몰매를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찢어진 옷자락을 너풀거리며 맨발로 쫓겨났지만,

그때도 오류골댁은 감히 그 아낙의 참상을 내다볼 수가 없어 그냥 방안에 문 닫

고 앉아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 흉참의 독한 기운을 쐬어서는 안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비록 숨어서 몸을 반쯤 감추고라도, 이 혹독한 매, 맞은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하염없이 떨리는 속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은 어쩌

면, 강실이가 처한 처지 또한 남이 알게 밖으로 드러나기만 하면, 저 판국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할 거싱 너무나 자명한 탓이었으리라. 문중에서 알면 파문이

고, 남의 동네에서 알면 온 문중이 상종 못할 수치를 당하는 일 아닌가.

또한 매안의 향약이 서슬 시퍼렇게 살아서, 그 4조에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예의를 모르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

유부녀를 겁간, 간통하는 자.

수절하는 과부를 유혹, 위협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자.

상민으로서 양반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는 자.

젊은 사람으로서 마을의 어른을 욕되게 하는 자.

일가 친척과 화목하지 못한 자.

간음한 자.

행실이 부정하여 마을의 기풍을 더럽히는 자.

들을 '극벌'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 극벌 중에서도

"간음한 자"

"행실이 부정하여 마을의 기풍을 더럽히는 자."

는 '극상벌'을 받을 것인데, 그것은 아아, 이 세상의 어느 어미로서 제 여식을 두

고 이런 상상이나마 하고 싶은 사람 있으리오.

처녀의 몸으로 아비 모를 아이를 배었다니.

남이 하는 말도 이런 말은 들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신부는 입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말하여서는 안된다.이는 그 부끄러움

없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고 아정은 말했으며

"부녀자는 음란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런 말이 들리

면 귀를 가리고 급히 피할 것이다."

라고 경계하였다.

음양을 알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신부조차 그 말을 삼가어 하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 강실이가 당한 이 일은 '말'이 아니라 '사실'이니. 어찌 하늘이 무

섭지 않고, 사람이 두렵지 않으리요.

"모든 자랑을 다 해도 자식 자랑은 장담 못한다."

"자식 키우는 죄인."

이라는 말은 정말 남의 일인 줄만 알았다.

"자식이 원수"

라고 오류골양반은 살구나무에 머리를 찧으며 가슴을 쳤지.

오류골댁 눈에, 절룩이며 헝클어진 머리로 걸어가는 피투성이의 춘복이의 형

영이 꼭 헛것인 양, 순간, 강실이 모습으로 비쳐 그만 또 고개를 털었다.

그 목덜미에 퍼런 소름이 돋는다.

"이게 웬일이야. 변괴네. 석삼년 내리 한발 가뭄에 시절도 흉흉허구만, 사람들

허는 짓도 똑 저렇게 이치 없이 못돼가니, 원."

수천댁 혀 차는 음성이 귓가를 쳐 오류골댁은 엉겁결에 큰소리로

"형님 나오겼네요?"

하며 돌아본다.

들켜서는 결코 안되는 낯빛을 들키고 말아, 제 발 저린 사람이 지레 당황하여

밑막음하느라고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크게 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눈치챘을 리 없는 수천댁은

"망종들이 날뛰면 변란이 난다 허드만, 안 그래도 다 망해 버린 세상에 무엇이

더 망헐라고 저런 빌어먹을 놈들이 설레발을 치는지. 도무지 참람하고 망령되어,

제 분수를 모르고 건방진 것들이 불길해서 당최."

하고는 눈썹을 찡긴다.

"큰집에서 오시는가요?"

"응. 온 집안이 혼비해서 정신이 없구만. 나도 더 있든 못허고 저녁 해야겄길

래 그냥 내려오느라고."

"저는 가 보지도 못했그만요."

"강실이 때문에 그렇지 뭐, 참 그 애는 좀 어떤고?"

"예. 그저 그마안허네요."

수천댁이 아무 상황도 모르고 묻는 말인지, 속은 두고 범상하게 변죽을 울리

는 말인지 짚을 길이 없어, 오류골댁은 우물쭈물 얼버무린다.

지난 밤에 기표가 기응을 찾아와 닦아세우던 기세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천

댁한테 말을 했을 것도 같고, 하도 엄청난 사실이라 사람 생목숨이 살고 죽는

것이 달려 있어서, 내외간일망정 아직 질녀 말을 안했을 것도 같아서였다.

"진의원이 댕겨갔지 않어?"

"예."

"진맥 해 보고는 뭐라던고?"

"뭐 그냥... 기혈이 허하다고 보약 몇 제 먹으라네요."

"원기가 워낙 부치는가 보구나. 몇 제씩이나 먹으라게."

"저것이 클 때는 별 까탈이 없드니만, 다 커서 몰아 갖고 앓는가아."

"평생 안 아프고 사는 사람 있어 어디? 애들은 다 아프면서 크고, 한판씩 앓고

나면 않던 짓 늘지 왜. 이쁜 짓."

"아이고 참. 아직도 덜 커서 클라고 아프까요 뭐."

"걱정 말어. 인제 시집가면 씻은 듯이 나을 것이네. 처저 낭재 당혼해서 아플

때는 혼사가 약이야. 어른들 말씀 들어 봐도 안 그렇던가? 그게 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니, 애민 탕약 달일라 말고 실속 있는 매파를 달여. 자네 발뒤꿈치가 닳든

지 매파 발길에 이 집 문턱이 닳든지 간에. 하루라도 더 미루지 말고 서둘러서.

집안간에서도 모다 서로 친정 곳에들 알어보고."

도대체 이게 속을 알고 하는 말인가, 모르고 하는 말인가.

"마음대로 안되는 일인가 보네요."

오류골댁은 우무같이 목에 엉기는 말을 밀어내며 순간 목이 메이어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하였다.

절통하고 원통해라.

어쩌끄나아.

땅을 치고 주저앉아 목을 놓으면 이보다는 나으리야.

울어서 될 일만 같으면 먹피를 토하도록 울고 울겠으나, 실오라기 한낱도 이

제는 건질 수가 없게 소용돌이 용소로 휘말려 들어가 버린 이 일을, 누구라서

어떻게 추릴 수가 있을까.

이제 오늘 밤 삼경이면 영영 살어서는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르는 것으로 황

아장수 뒤 딸리어 보내야 하는 여식을 두고, 시집가면 낫는단말 당키나 한 일인

가.

차라리 강실이가 문중에서 몰매를 맞고 덕석말이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어

도, 온 동네 조리를 돌며 귀때기에 화살을 꽂은 채 회술레를 당하는 한이 있어

도, 어미가 저 불쌍한 새끼를 끼고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바랄 나위가 없

을 것만 같았다.

상처는 싸매면 되고, 수치와 모욕은 견디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구하게 찢어내는 생이별이라니.

아무리 달래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비도의 경위가 뱃 속의 아이처럼 짐작조

차 못하게 감추어져, 길 아닌 길로 일생 동안 강실이를 헤매게 할 그 까닭을 끝

내 어미는 모르는 채, 오직 쫓아내듯 멀리 아주 보내야만 한다...

오류골댁 핏물 도는 쓰라린 눈에 저만큼 멀어져 아랫몰 굽이로 접어드는 춘복

이 뒷모습이 아물아물 비쳐들었다.

가까스로 냇물을 건너서 거멍굴에 이른 춘복이는 농막 지게문짝을 잡아당길

기운까지도 다 빠져 버려, 덜푸덕, 토방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놈의 눈구먹이 빠져어어 어쩠어어?"

툼박한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더듬어 눈자위를 눌러 본 그는

"빠지든 안했능게비네."

중얼거린다.

눈알이 안 빠진 것은 천만 다행이었으나 눈두덩이 여지없이 찢어져 짙은 핏물

이 흘러든데다가 호되게 맞은 자리가 부어올라, 아무리 눈을 끔적여 보려 해도

눈뚜껑 여닫히는 것이 마음대로 안되고, 우선 눈앞에 무엇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토방에 주질러 앉아 두 다리를 쭈욱 뻗고는 그대로 널부러져 드러누워 버리려

는 춘복이를 황급히 일으키어 부축한 것은, 뒤미처 쫓아온 공배와 공배네였다.

아까 춘복이가 불시에 들이닥친 원뜸의 장정들한테 붙들려 갈 때부터 매안으

로 따라갔다가, 대문 바깥 호제집 처마밑에 옹송그리고 서서 오금을 제대로 펴

지 못한 채, 매타작 몽둥이 후려패는 소리에 깜짝깜짝 간이 졸아 낯빛마저 새까

맣게 죽어 버린 공배 내외는, 절뚝이며 뒤꼭지 세우고 걷는 춘복이와 함께 거멍

굴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저 몰골을 씻길 그릇이며 우선 갈아입힐 옷으로 치수는 좀 어긋나지

만 공배와 바지와 저고리를 주섬주섬 챙겨 가지고 오느라고 잠시 자기네 오두막

에 들렀다 온 두 사람은, 드디어 춘복이를 붙들고 울음이 먼저 터진다.

"어디 보자, 어디 바아. 어디 어디를 맞었냐아, 긍게."

공배네는 방안으로 끌어 옮기어 드러눕힌 춘복이의 옷을 우선 벗기고 쑥대강

이 뒤엉킨 머리통과 터져서 피멍 든 얼굴을 애가 타게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피를 닦아냈다.

"야 이놈아. 낯빤대기가 징짝이 되어 부렀다이? 니 주둥팽이는 똑 땡끼벌에

쐰 놈맹이고."

공배가 억지로 웃음엣말을 던졌다.

"누가 잘났다께미 미운 소리마안 미운 소리만 옹퉁지게 골라서 콩콩, 해 쌓드

니 인자 그 주딩이 다 낫드락은 헐 수 없이 입이 무거서 말 못히고 참어야겄다

잉? 근지러서 어쩌까."

춘복이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닌게 아니라 무슨 대꾸를 하려 해도 돌덩이 같이 단단하고 무거운 입술이

제대로 벌어지지를 않았다. 그저 다만 가물거리는 머리 속으로 실꼬리 달린 생

각들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할 뿐.

그런 그의 귀에 아까부터 울리는 것은,

어흐으으으

어흐으응

몹시도 서럽게 울던 쇠여울네의 목 놓은 울음 소리였다.

이미 다 울어 버려서 목청만 남았을 뿐, 눈물도 흐르지 않는데 그네는 하염없

이 울고 울며, 매맞은 매안의 저무는 고샅길을 절룩절룩 내려왔었지.

그 여우가 우는 소리도 같고, 상한 늑대가 우는 것도 같았던 소리.

아마 날이 새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가야 할 그 쇠여울네의 처절한 울음 소리

를, 한겨울 메마른 허공의 회초리 바람 소리가

휘이잉

날카롭게 채가면, 곡성은 칼로 자른 듯 끊겼다가 다시 어두운 밤의 바닥에서

솟구쳤었다. 그때 춘복이는 농막 귀퉁이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그 소리를 새

기며 들었던 것이다.

원뜸의 사랑마당에서 쇠여울네를 무섭게 내리치던 몽둥이와 장작이 새파랗게

불꽃을 일으키고, 개 한 마리 잡는 것보다 더 처참하게 튀어 오르던 피.

"이 피를 갚으리라."

춘복이는 그때 주먹을 돌멩이보다 단단하게 쥐며 어금니를 물었다. 부서지게

악물었던 어금니에 물린 말은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쇠여울네.

나를 야속타 말으시오.

내 이날 이때끄장 천헌 목숨 안 죽고 살어 남은 죄로, 그 집이서 밥 얻어먹

은 죄로 매타작에 놉이 되야 쇠여울네 등짝을 내리치고 말었지마는, 인자 그 몽

둥이, 그 장작으로, 때리라고 헌 놈 쥑여 부릴 거잉게.

오늘 니얄 안되먼 모레가 있고 곱페가 있소.

내 것 뺏기고 몰매 맞고, 벵신 되고 동낭치로 쬐껴나는 심정은, 죽어서도 잊히

지 말고, 살어서도 잊어 부리지 마시오. 시방은 혼자 당헌 것 같고 혼자 쥐어뜯

음서 울지마는, 두고 보시오. 두고 보먼 알 거이요.밤이 짚어지면 새복이 오고

마는 거잉게.

쇠여울네.

더 울으시오.

... 더 울으시오.

울다가 숨이 끊어져서 죽어도 좋응게 울으시오. 나도 따러 울고, 공배 아제도

따러 울고, 그 옆집이도 울고, 이 거멍굴이 떠내리가게 울읍시다. 언제 한 번도

한소리로 소리내 보도 못헌 놈의 벌거지 같은 인생살이, 인제라도 한소리로 뫼

야서 창사가 터지게 울읍시다.

호령 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헌들, 우리들이 죽기로 한을 허고 우는 소리보다

클랍디여.

쇠여울네. 인자 두고 보시오.

죽지 말고 살어서 두 눈 딱 뜨고, 꼭 보시오.

강실이가, 이놈 춘복이란 놈 자식 새끼를 낳고 마는 것을 내가 꼭 뵈야 디릴

거잉게, 그날끄장은 부디 죽지 마시오. 그거이 머 몇 천 년이나 남은 것도 아닝

게, 쇠여울네, 어디로 가서 살든지 소식 끊지 말고 그날을 지달르고 있으시오.

쇠여울네가 울고, 내가 울고, 거멍굴에 엎어진 이 비루허고 보잘것없는 인생들

이 남모르게 울고 울던 설움을 내가 모질게 다갚어 줄 거잉게, 오늘 내가 내리

친 장작에 어깨 찢어진 거, 너무 야속타 말으시오.

쇠여울네, 미한허오.

그 미안하던 마음의 인과응보를 받았는지, 똑같은 마당에서, 그때는 춘복이가

쇠여울네를 내리쳤는데 이제 오늘은 거꾸로, 바로 그 자리에서 춘복이가, 쇠여울

네 당한 만큼 직사하게 맞은 것이다.

무섭고 무섭구나.

이렇게 세상살이는 갚는 것이로구나. 억지로 짜 맞추려 해도, 이와같이 톱날

서로 물리듯이 정확하게, 준 것을 그대로 받을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춘복이

는 부르르 등골이 떨렸다.

그런디 참 요상허네. 알 수 없는 일이여. 어뜨케 알었이까잉?

그날 정월 대보름에 이씨 문중 도선산을 내가 한 바꾸 다 돌았는디, 당골네

가시버시말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그림자도 없등만, 그 가시버시는 누구한테 들

켰길래 잽헤 갔이까아.

나는 절대 그런 내색 비씩도 안했는디.

박달이가 즈그깁 문앞에서 나중에 나 낼오는 걸 봤다고는 허지만, 그건 나를

본 거이제 만동이 백단이를 본 것은 아니었잖이여?

그런디 어뜨케 알어냈능고.

그는 이 일이 탄로난 연유를 불문하고, 어쨌든, 본의 아니게 자기가 보아 버린

남의 비밀이 백일하게 들통나서, 다 죽을 지경으로 혹독한 난장을 맞고, 그 아비

의 뼈다귀마저 산산조각 흩어져 밟히게 된 꼴을 겪고 만 것은, 제 탓도 없지 않

으리라 싶었다.

무엇인지 그 비밀 누설의 빌미를 준 것이 자기인 것만 같았다.

그것은 미안한 일이었다.

머, 발설만 안했다고 다가 아니라, 죄우간에 내가 그 일을 보고, 또 해필이면

그날사 오밤중에 박달이허고 마주쳤이니, 암만해도 요상해서 그놈이 기양 그 질

로 쫓아 올라가 봤을랑가도 모르제. 이씨네 도선산으로.

아까 봉게로 만동이가 피를 굉장히 많이 흘리고 쏟든디. 설마 죽든 않겄지.

그께잇 것 갖꼬. 천골에 상놈들이 머 매 좀 맞는다고 죽간디?맞는 것도 한두 번

이어야 아프제, 이골이 나먼 엥간히 얻어터진 자리는 손으로 쓱쓱 ㄸ어 불먼, 딱

지 앉고 깨깟이 낫어 불틴디 머.

하다가도 문득 불안한 생각이 치밀어 꼬리를 이었다.

"... 아재."

춘복이가 손도 못 대게 부어서 쓰리게 벌어진 입시울을 달싹이며 저 안쪽 목

구멍을 겨우 열어 공배를 부른다.

"오오, 왜?"

반색을 한 공배가 춘복이 입술에 가까이 귀를 댔다.

"먼 말 헐라고? 해 보그라, 어서"

공배네도 귀를 세우고 거들었다.

"... 당골... "

"당골네?"

"... 만동이... "

"만동이가 멀 어쩠냐?"

"... 가 보라고."

"어디를 가 보래? 너한테?"

제 말을 잘못 알아들어 엇짚는 공배의 대답에 춘복이는 난감한 듯, 아니라고

고개 젓는 시늉을 하였다.

"오오, 나보고 만동이한테 가보라고?"

춘복이 기색에서 얼른 속뜻을 눈치챈 공배가 물었다. 그리고는

"인정머리 아조 없는 놈인지 알었드니, 니 코가 석 자나 빠징게 급헌짐에 본성

정 나오냐? 넘의 걱정보톰 허게? 듣기는 갠찮다마는."

하며 대가리를 쥐어박으려 하였다.

"어구구구, 왜 이리여?"

공배네가 그 주먹진 손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양에 깜짝 놀라 기겁하는 소리

를 지르며, 공배 주먹을 두 손으로 잽싸게 감싸 잡는다.

"수박을 쪼갤랑가, 왜 독뎅이맹인 주먹은 치키들고잉?"

"아 맨날 때리든 대가린디 조께 다쳤다고 못 때릴 거잉가?"

오늘따라 공배는 평소에 않던 익살을 더욱 부리며, 마치 춘복이가 여늬때처럼

둘러앉아 놀다가 벌렁 드러눕기라도 한 것같이 가볍게 대하였다. 후줄후줄한 낯

골에 웃음까지 머금고는.

"담뱃가리 붙여 놓고 한 잠 푸욱 자그라. 낼 아칙에 날 새먼 해 뜨디끼, 한 밤

자고 나면 지 아무리 찢어진 자리서도 새 살 뾔족이 돋응게로."

그러이 사는 이치여.

"자, 나 만동이네로 가서 좀 디다보고 집이로 몬야 갈라네. 야가 잠드는 것 바

감서 나중에 오든지, 여그서 새든지 알어서 히여."

공배는 휘적하게 일어나며 공배네한테 말했다.

밤바람이 어둡고 습한 자락을 쓸며 거멍굴 틈바구니마다 들어차, 벌써 바깥은

짓눌리게 검었다. 웬만하면 구름이 있어도 달빛을 아주 막지는 못하여 희미하게

나마 발밑에 비추어질 보름 근처련만, 성난 구름장이 얼마나 두텁고 무겁길래,

이렇게 달 없는 밤보다 더 캄캄할까.

공배는 이 어둠 속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쓸어 내리는 낯바닥에 눈물이 번진다.

애민 놈 저테 베락맞는다드니 니가 그짝 났구나.

아 왜 허도 안헌 투장을 너보고 했을랑가도 모른다고 무작정 끄집어야 했다

냐. 당골네 푸네기 저테 섰다가 무단히 너부텀 잽힌 거인디, 모난 독(돌)이라 정

을 맞은 거이냐 어쩌냐 시방. 모질게도 내리쳐서 병신되야 불지 알고 내가 기양

애간장이 다 녹아 부렀그만, 그래도 뼉다구 실헌 놈이라 어디 뿐지런진 디는 없

능게빈디.

대체나 상놈이라, 니 말대로 설웁기는 설웁다.

"상놈은 더럽고 서럽다."

고 곧잘 토악하던 춘복이 말을 그는 곰곰이 떠올려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

'더럽고 서러운' 상놈 중에서도 부모 형제 일가 친척 단 하나 붙이조차 가짖 못

한 춘복이가, 사천왕들처럼 에워싼 살기등등 원뜸의 종 호제 머슴들한테 뭇매로

뭉동이 찜질을 당할 때

얼매나 무서웠으꼬잉.

"아이고 어매."

단말마 비명처럼 외마디로 부를 제 어미 낯바닥조차 없는 그 천애고아, 혈혈

단신의 심전이 어떠했을까, 를 생각하니 불쌍하고 안쓰러워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나마 지은 죄가 있어서 그랬다면 맞아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겠지만, 투장

은커녕 투장할 만한 부모 조상 뼈다귀 손톱조각 한 토막도 없는 춘복이를 끌어

다가

"문서도 절차도 없이"

불문곡직 무작스럽게 달려들어 개 패듯이 패다니.

그것은 오직 그가 상놈이기 때문이었다.

문서도 절차도 없이.

공배는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문서'도 없고 '절차'도 없어서 억울하게 당한 이번 일이 만일 문서만 있고 절

차만 있었으면 결코 당했을 리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것이 처음으

로 미어지게 억울하였다.

"헤기는, 상놈이 달리 상놈이겄냐. 문서 없고 절차 없는 거이 곧 상놈이여. 조

상이 누군지를 아는 족보가 있냐아, 이 사람은 누구누구 자손으로 양반이 분명

헙니다. 허는 가싱이 있냐."

공배가 전에 언젠가 아랫몰 임서방한테 얻어들은 말 '가싱'은, '가승'이었다. 아

는 것 많고, 돌아다닌 것 많고, 기억력도 좋아 한 번 들어면 그대로 외울 수 있

는 임서방이 말도 붙임성 있게 잘하여, 사람들한테 곧잘 새롭고 재미난 세상 이

야기를 들려 주곤 했는데.

어느 여름날, 멍석 꽁지에 궁둥이 붙이고 앉은 공배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

려다보고 있을 때, 임서방은 옹게옹게 둘러앉은 사람들한테

"똑바른 가싱이 있어야 양반 행세를 허능 거이여."

하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기둥겉이 오똑하니 세워 들었다.

가승

그것은 보첩, 가첩, 가계, 세계라고도 하는 족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니

까 가계의 기록인 것이다. 말하자면, 집안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의 저 아

득한 시조 선대로부터 자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한 줄기로 놓이는 조상과 그

조상의 배를 세대마다 밝히어 적고, 그 이름 곁에 그들의 생졸년월일 과거 및

관직을 중심으로 하는 이력이며, 묘가 있는 곳, 그리고 배우자의 가계, 자녀관계

를 명확하게 서 놓은 것이 가승이었다.

"가싱이 있어야 지 조상이 누군지를 알고, 조상을 알어야 지 근본을 아능 것아

니라고? 이 세상에 뿌랭이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줄거리 없는 잎사구가 어

대 있겄능가. 그런디, 그 뿌랭이랑 거이 참 묘오헌 거이제. 뿌랭이먼 다 같은 뿌

랭이냐? 아니그던. 산천초목 삼라만생이 다 지 종자 따러 나고, 천하 없어도 씨

도독은 못헌다는 말이 있잖등게비.잉?"

임서방은 말했다.

이름은 다 같어서 뿌랭이 그러지마는, 엉거시풀 뿌랭이도 뿌랭이는 뿌랭이고,

매화나무 소나무 뿌랭이도 뿌랭이는 뿌랭이여.

그런디 엉거시풀 뿌랭이허고 매란국죽 뿌랭이는 절대로 같들 안히여. 그렁게

로, 엉거시풀은 잡초오 그러고, 매란국죽은 사군자 아 그러잖이여? 군자. 긍게

군자허고 잡초허고 벌세 외양이 다르고 , 외야이 달릉게 사람들 대접도 다르체.

허는 노릇도 다르고.

엉거시풀은 들판에 ㅆ부렀고, 아무나 막 밟고 댕기는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렇그던, 근디 이 사군자는 벌세 때깔 좋고 향기 좋고 흔허도 않고, 그래

서 보도시 하나 얻기도 에럽단 말이여. 귀허제.

그렁게 가싱이 머이냐.

엉거시풀이야 뿌랭이고 나발이고 개리고 자시고 상관없이 안 죽오 그저 사방

에 짱짱허니 엥기고 감고 뻗으먼 되는 거이지만, 사군자는 나군자다아 허고 똑

바라지게 외는 거이라, 이게. 나는 매화요오, 나는 난초요, 나는 소나무요오. 나

는 국화요오, 나는 대나무요오.

그러먼, 니가 어찌 매화냐 물을 것 아니라고?

소나무든지 국화든지 난초든지 대나무든지 간에.

그럴 때 터억허니 향내나는 조상을 딜이대는 근거가 가싱이여 긍게. 가싱. 우

리 시조 누구씨가 무신 무신 베실을 허심서 어뜬 어뜬 장헌 일을 허겼는디, 나

라에 공이 되야 상감이 아시고 천하가 다 알어 존경받던 아무개요. 그러고 시호

는 뭐이요. 문짜 시호요, 충짜 시호요, 그렁 걸 탁 내미는 거이라.

그러게 현조를 확실허게 내놓고는, 그 동안 그 현조 자손 줄거리들이 이러저

러한 공부 도덕으로 훌륭허게 양명을 허고 또 절개있는 이름을 떨쳤다아, 밝히

먼, 그 가닥이 분명허먼, 오오, 참말로 매화구만요, 국화구만요, 송죽이구만요, 세

상이 인정을 허는 거이제.

그 화보가 바로 족보 , 가싱이여.

그렁게 그 보가 없는 똘씨는 양반이 못되제.

또, 설령 보가 있대도 그렁저렁 혈통이나 추려서 이름들이나 적어 놨이먼 없

능 것보돔은 낫겄지만 그것만으로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고.

가닥이 분명히야 여.

그런데 그렇게 눈부시게 호강스러운 근거는 그만두고, 아예 자신이 끼여들어

잎사괴인지 꼬투리인지 알아볼 만한 일가 친척도 없고, 단 한글자 먹글씨도 없

는 공배나 춘복이는, 문서가 없어서 상놈이었다.

"그런디, 문서 가닥만 있다고 양반이 아니라, 그 가싱에 똑 맞는 행실이 따러

야만 양반잉 거이여. 그렁게 매화나무는 매화나무답게 한겨울 엄동설한에도 꽃

망울 피고, 암향이 부동해서 은근허고 고결헌 향기가 사방에 떠 있어야만, 매화,

그러잖겄능게비?"

소나무는 낙목한천에 온 세상 잎사구가 다 물들어 떨어져 부러도, 독야청청

꿋꿋허고 새파러게 변함이 없어야 소나무고.

국화는 오상고절이라. 난만헌 봄 무성헌 여름을 마다허고, 그 온갖 잡꽃 핏기

좋은 시절에는 묵묵히 감추고만 있던 꽃을 찬 서리 내려서 다른 꽃 다 시들어

버릴 때, 서리발 속에서도 외로이 피어나 홀로 절개를 지키며 높은 향기를 뿜어

야만 국화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잎새 곧은 마디 빈 몸통이 대나문디, 만일에 말이여,

이 대나무가 우수수우 낙엽이 지고, 등나무 칡뿌랭이맹이로 이리 꼬불 저리 꼬

불 휘어감고 뻗는다먼, 거그다가, 퉁소나 하나 맹글어 보까아 허고 턱 짤렀드니

깨끔허니 비어 있어야 헐 대나무 통 속이 그들먹허게 살 차 있다먼, 그건 이미

대나무가 아닝 거이여. 껍데기는 대나물랑가 몰라도 말이여.

봄에 피는 국화, 알록달록 단풍 드는 소나무, 여름에 만발한 매화며 구부러진

대나무는 진실한 군자에 못 든다고 임서방은 말했다. 그는 '매란국죽'이 '사군자'

라면서 제대로 된 난초는 본 일이 없어서 그랬던지 난초 이야기는

"난초가 잡초 되먼 쓰겄능가."

한 마디만 하고는 난초 자리에 소나무를 넣었다.

"그렁게로 양반도 처신 행실 법도에서 향내가 나야 양반 노릇을 제대로 허능

거이고오, 양반 대접을 옳게 받을 수 있능 거이여. 그런 일이 쉽겄능가? 어쩔 적

에는 우리가 보먼 안되ㅇ다 싶을 때도 있드라고. 무신 절차가 그렇게 까시랍고

복잡헌디, 원."

더우먼 기양 잠벵이도 척척 걷어붙이고 누가 보든지 말든디 웃통 훌딱 벗고는

등물 한 번 씨여언허게 허먼 오직이나 좋겄등만, 한여름 오뉴월에도 그 송진 같

은 땀을 대관절 어쩔라고, 보손에 바지에 저구리에 도포에 망건에 아이고매, 씨

꺼먼 갓끄장 꼬깔맹이로 받쳐쓰고 어디질에 가는 냥반 보먼, 나 , 참마로 그럴

때만큼은 꿈에도 양반 안 부럽데이.

다른 때라먼 몰라도.

"다리 밑에 동낭치가 넘의 집 불난 것을 보고는, 우리는 불날 일 없잉게로 얼

매나 좋냐고 허드라네."

멍석에 같이 앉아 있던 어서방이 그 이야기 끝에 꼬리를 단 말이었다.

"그 동낭치가 누구보고 아자씨이 그러겄네."

어서방 말고리를 밟은 것은 어서방의 아낙이었다. 그네는 '아자씨이'할 때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주둥이에 붙이고 예닐곱 살 아이들 목소리를 지어 내서,

둘어앉은 사람들이 와그르르 웃고 말았다.

그 '누구'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아는 어서방은 무색한 듯 머끔한 모가지

를 더 기다랗게 뽑아 올리며 뒤통수만 긁적였다.

"매안 이씨는 그렁게 향내 나는 양반이제."

임서방은 그렇게 말했다.

그 향내 나는 양반에게 이토록 모질고 호된 모둠매를 맞고 덕석말이를 당한

만동이와 백단이는 거의 혼절을 해 버려 사람이 들어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당골네 오막살이 좁은 방안에는 택주와 금생이가 번갈아가며 도랑물을 떠다가

두 사람을 축여 주느라고 궁둥이 붙이고 앉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 거기 평

순네가 와 있었다.

"오시요예?"

평순네가 무겁게 묻는다.

"어쩡가 허고 들와 봤그만."

택주와 금생이도 공배를 보고 눈짓만 침울하게 한다.

"암만해도 만동이는 먼 일 나게 생겠는디."

만동이 곁으로 다가앉는 공배한테 택조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먼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여?"

"이 사램이 이거 원체 버들맹이로 그러잖어요 왜? 난들난들. 장구채 들고

장단이나 허든 몸이라 심이 없는 사램이었그던. 그런디 요번에 아조 고지통을

정통으로 맞어 부렀능게비요. 대그빡이 빡 쪼개져 부렀습니다. 어찌, 내가 매안

으서 업고 내리올 때보톰 예감이 요상허드라고. 이거 살어나먼 천행이고, 열에

아홉은 내 뵈기에는 에럽겄어."

택주가 소털같이 누우런 털이 두껍게 덮인 낯바닥을 한쪽으로 기울인다.

 

 

11. 먼 데서 온 소식

 

"그래서... 네가 그 애를 만나 보았단 말이냐?"

아까부터 단 한 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던 이기채가 천 근이나 되는 입시울을

가까스로 열어, 말을 밀어낸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억색의 심중이

떨리는 음성이다.

어제의 일이 하도 기가 막힌 것이어서 온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한 그의 안색

은, 누렇게 말라 바튼 가죽에 거뭇거뭇 멍든 녹빛이 어혈져, 마주보기 참독하였

다. 분이 뭉친 눈밑의 움푹한 그림자 얼룩은 흡사 시신의 얼굴에 돋는 시반 같

다.

어이가 없고 놀라기는 문중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황당하게 소스라친

낯색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문장 이헌의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무섭게 종

가의 큰사랑으로 들었고, 바로 뒤미처 기표가 바람을 세우며 올라왔는데 그 또

한 잠 못 이룬 면색이 역력하였다.

기표는 방안에, 이미 자리를 걷고 일어나 앉은 이기채와 동계어른 이헌의가

침심이 가득하여 차마 무슨 말을 떼지 못하면서 책상다리 한 발바닥만 쓸고 있

는 옆자리로 앉는다.

이헌의의 곁에는 뜻밖에도 그의 장손 강호가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서더니 기

표한테 절을 한다.

"너 언제 왔냐?"

기표는 강호가 자리를 바로하기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어젯밤에 왔습니다. "

"저물어서?"

"예."

"어찌 바로 안오고?"

동절기 방학이 시작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왜 이제서야 집에 오느냐는 질문

인 것이다.

"학비 좀 벌어 놓고 오느라고요."

강호가 짓눌리게 무거운 방안의 공기에다 격자를 질러 좀 숨통을 터 보려는

것처럼 짐짓 범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평온한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얼굴이면서 희고 맑은 이마

가 둥굴게 높이 솟아, 시원하고 명윤 반듯한 강호의 모색은 보는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한다.

"매안의 인물"

이란 말을 듣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상형이었다.

"강호는 이마가 일품이지. 너무 넓어 헤벌어지게 허라지도 않고, 오종종히 좁

아서 옹색 답답하지도 않고, 편안 넉넉하면서 저렇게 수기가 밝으니, 저 이마 속

에 든 한세상이 다 펼쳐지는 것을 보는 날까지 내가 살어 있을라는가 어쩔라는

가 모르겄구나."

생전에 청암부인은 자라나는 소년 강호를 보고 기꺼워하며,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거기다가 눈썹은 단정하게 빛이 나고, 눈은 가늘고 길어서 봉안인데 흑백이

분명하며, 그 광채가 총민해서 사람을 쏘는 듯 압도허잖어? 그런 눈이 자칫 매

섭고 차갑고 쉬운데, 안광에 문기가 은은히 감돌아, 보는 이를 겁나게 하고 위협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따르고 싶게 하니. 청수한 사려로 감화시켜 깨닫게 하

는 눈이라. 기특하다. 이만한 용모로 태어나 네 어찌 할 일이 없으랴."

했던 말에 과히 어긋나지 않게 어려서부터 영특 총명하다는 칭송 많이 듣던 강

호는, 어느덧 청년이 되어 동경으로 건너가, 조도전(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공

부하는 중이었다.

성짜에 비하여 가세는 그다지 넉넉지 않은 집안인지라, 험악한 세월에, 공부한

다는 유세 하나로 집에다 기대어 콩이고 팥이고 학채고 깨알같이 다 받아 쓰면

서, 유복한 서당도령 시늉을 하고 다닐 수만은 없을 것이나, 학비를 벌어 놓고

오느라고 이제서야 집에 왔다니,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을까, 기표는 궁금하였

다.

"사람들이 내버리는 빈 병도 주워다 팔고, 못쓰게 된 파지나 고물도 다 주워다

팔지요."

강호는 기탄없이 말하며 웃었다.

"주워다 팔다니? 그럼 네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넝마주이를 한단 말이냐?"

기표가 강호 말에 어기찬 턱을 들며 떨구듯이 묻는다.

"그러믄요. 그게 사실은 제일 깨끗한 고학이에요."

"깨끗?"

"폐물이 생산작용을 하는 것은, 그 이치만으로도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의 기밀

을 누설하는 것 같아서 재미도 있고요."

"야, 이놈아. 동경까지 건너가서 기껏 한다는 게."

기표가 그 다음 말을 이으려는데, 강호는 얼른 학생복 단추를 벗기더니 품을

열고 안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낸다. 사진이었다.

네모진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은 앉고 선 두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쪼그리고 앉

아 있고, 하나는 양손에 빈 병을 한 개씩 든 채로 치켜올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웃고 있는 청년이 강호였다. 그들의 발치에는 일렬로 세워 놓은 빈 병들이

투명한 장병들처럼 꼿꼿하였다.

"아니, 이 넝마 빈 병들이 무슨 홍패 병풍이라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펼쳐 놓

고, 떠받들고, 사진까지 박었는고?"

조부 이헌의만 없었더라도 기표는 더 성질대로 할 소리를 했겠지만 족숙이 할

아버지를 젖히고 그의 장손을 더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기표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린다.

"인력거도 끕니다."

"뭐?"

이번에는 기표가 아니라 이기채가 먼저 놀란다.

"네가 이제 가마채 잡는 교군꾼까지 한단 말이냐?"

기표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그대로 가만히 있고, 이기채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천하 상것들이 메는 게 가만데."

"내가 내 힘으로 내 몸 움직여서 근로하고, 그 노동과 근로를 통해서만 내가

먹을 밥과 내가 읽을 책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떳떳한 일인가요. 내가 흘린 땀

을 꼭 그만큼의 밥과 책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교환 방법이고, 또

정직한 소득인 것이지요."

강호의 음성은 평소에도 울림이 있어 낭랑한 편인데, 격성을 내는 일이 거의

없는지라, 무슨 이야기든지 담론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는 걸요. 그날따라 인력거 손님이 연달아서, 타고 내리

고 타고 내리고 쉴 틈이 없이 온종일 동경 시내를 누비고 뛰었는데 날이 저물어

요. 그래 좀 한숨 돌리려고 인력거를 담벼락에 기대서 받쳐 놓으려는 찰나, 또

손님이 다가오드구만요. 옆구리에 가죽가방을 따악 끼고 아주 점잖허게 인력거

를 타러 오는데, 저녁나절이니 피곤도 했지마는 이 손님 때문에 정말 땀 많이

흘렸어요. 어찌나 뚱뚱한 사람이었는지. 인력거 채가 공중으로 솟구쳐서 널을 뛰

건만 제 체중으로는 그 체를 끌어내릴 수가 없었지요. 그래 실랑이를 하면서 대

롱대롱 매달려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겨우 균형이 잡힌 것을 가까스로 끌고는

그 손님 가자는 대로 어디까지 갔더니, 이제 까끄막 비탈 고개 꼭대기를 넘어가

야만 한다는 겁니다. 정말이지 난감허드구만요. 그날따라 점심도 못 먹고, 허기

가 져서 그냥 걷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맡은 손님이라 두 말도 더 안하고

비탈길을 오르려는데요, 그러다가 정말 큰일 날 뻔했지요. 이 인력거가 자꾸만

뒷걸음을 치면서 미끄러지잖겠어요? 식은땀이 비지땀으로 범벅이 되면서 등판이

팥죽땀 반죽을 하는데 한 걸음도 더 못 나가겠어요. 팔목에 힘이 빠지고, 머리

속이 노오랗게 어지럽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그러나 인력거에 탄 손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돈 주고 탓다. 너는 돈 받고 끈다."

는 것이지요.

옳은 말입니다. 그것은 계약이니까요.

그는 인력거에 탄 그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꼼짝도 안해도 됩니다. 반면에 저

는 인력거를 끌다가 언덕 비탈 꼭대기에서 거꾸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곤두박질 나가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그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

려다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계약이니까요.

그 손님에게 잠시 좀 내려서 걷는 인정을 바라거나, 제가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버린다는 것은 불성실한 위반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두 사람 사이에 약속된 일은 끝까지 지켜져야지요. 그리

고 그 일이 끝났을 ㄸ는 마따한 보수가 주어집니다. 약속대로.

비록 그 액수가 적을지라도 약속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래도 나은 편이지요.

처음부터 약속 같은 것으로 서로 계약하는 관계조차 아닌, 오직 그렇게 태어

났기 때문에 한쪽은 나서부터 인력거를 타고 있고, 한쪽은 오직 그렇게 태어났

기 때문에 인력거 채를 죽을 때까지 끌어야 되는 관계. 그런 관계도 있지 않습

니까. 그것은 정말 참혹한 것이지요.

양반과 노비, 양반과 상민.

그 자신의 노력이나 자질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자신에게 숙명적으로 지

워진 신분의 굴레 때문에 제가 태어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생 동안, 금

방 고꾸라져 뒤집히면서 죽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비탈길에 매달린 무산자들.

그러나, 이 인력거 채나마 붙들고 있어야만 제 존재를 비빌 언덕을 이 가파른

세상에 겨우 세울 수 있는 노비 상민 가련한 족속. 저 칼등 같은 비탈의 인력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토록 안간힘 하다니요.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는 결

코 없겠지만, 헤어나는 방법을 몰라 대대손손 똑같은 굴레를 끝없이 뒤집어쓰는

그들이 너무나 가엾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기껏 욕심을 낸다는 것이, 인력거 채를 내동댕이치고서 나도 인력거

속으로 들어가 타고 앉겠다는 것이, 죽은 아비 뼈다귀를 파다가 남의 선산 산소

귀퉁이에 밀어 넣는 꾀밖에 못 내고.

손님 옆에 나도 좀 같이 앉읍시다, 하는 것이지요.

"불경스럽구나."

드디오 이헌의가 낮은 소리로 강호를 막았다.

그렇지요. 불경. 바로 그 불경 때문에 인력거꾼은 쫓겨나고, 매를 맞고, 피투성

이가 되고, 혹은 죽기도 합니다. 이미 가진 자의 몫을 가지지 못한 자가 넘보는

것은 제도 속에서 반란이고, 혁명이고, 용서할 수 없는 불경이기 때문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라고 몰아붙입니다.

누리는 자는 대를 물려 영원히 그 기득권을 누려야 되고, 착취당하는 자는 영

원히 제 가죽과 뼈를 착취당해야만 '순리'라 하고요.

순리. 그러나 그 순리는 누구를 위한 순리일까요.

왜 그 순리는, 누구에세는 권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억압이 될까요.

그것이 참으로 진정한 순리라면 누구도 누구를 해치지 않으면서 공생하고 상

생해야 할 터인데.

"너도 강태란놈하고 같은 속이냐?"

기표가 강호의 말을 듣다 말고 툭, 지르듯 묻는다.

강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 애가 만주로 해서 왔다는구만."

이헌의가 강호 대신에 무거운 입을 뗀다. 방안에 아연 긴장이 돌면서 순간 침

삼키는 소리가 꾸루루룩, 목을 깎는다. 그것이 이기채의 소리인지 기표의 소리인

지 얼른 분간이 가지 않는다.

이기채는 책상다리 발바닥 쓸던 손을 뚝 멈추고 미간을 꺾으며 눈을 침통하게

감아 버리고, 기표는 눈썹을 치킨다.

"만주로 해서?"

이기채는 말이 없고, 기표가 이헌의의 말끝을 붙든다.

"그래서... 네가 그 애를 만나 보았단 말이냐?"

결국, 얼마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진정하기 어려운 회오리를 지그시 눌러

겨우 잠재운 이기채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예."

"예?"

"강모도 강태도 다 만나 봤습니다. "

강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헌의는 오직 난감한 안색으로 고개를 반듯이 세운 채 두 아비의 시선을 피

하여 바람벽에 걸린 횃대에만 눈을 두고, 이기채와 기표, 두 아비는 더 이상 무

어라고 이어 묻지를 못한다.

그러나 이기채의 눈동자는 감은 눈꺼풀 속에 숨어, 두려운 떨림과 흥분, 그리

고 억장을 치는 상심이 도져 아픈 통증을 참느라고 땀에 젖는다. 소식을 모르던

긴장이 무너지며 눈동자는 식은땀을 흘리는 것일까. 이기채의 눈자위가 습기를

머금는다.

내가 늙었구나.

후욱, 흐느낌이 치미는 것을 그는 어금니로 누른다.

기표는, 비스듬히 내리떠 장판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먼저 무엇인가 물어 주기

를 기다리는 기색인 강호의 눈에 똑바로 제 눈빛을 꽂았다.

"사실은 이 애가 부음을 못 받았더라는구만."

강호의 곁에서 조부 이헌의가 변명처럼 나직이, 손자를 대신해서 말했다. 강호

는 이 말을 받으며 이기채한테 몹시 송구스러운 기색으로 몸을 조아렸다. 물론

아까 큰사랑에 들어서자마자 문상의 예는 갖추었지만, 이제서야 문상을 하게 된

경위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

내심, 강호가 만주까지 가서 강모와 강태를 만나고 왔다는데, 날짜로 보아 청

암부인의 부음이 닿고도 남는 시간이 있어, 속으로 이 천하에 불효 막심한 놈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도 외눈 하나 꿈쩍 않고 벌판에 자빠져서, 다시 한 번

집안을 버렸는가.

하고, 기가 막혀 심정이 불편했었는데, 부음을 받지 못했다니, 이유를 묻기보다

먼저 왠지 안도가 된 이기채는 심상한 척 반문한다.

"저희가 방학을 해서 저는 이미 짐을 꾸려 가지고 만주로 떠났는데, 저 없는

집에 뒤늦게 흉보가 당도한 모양입니다. "

이 말에 기표의 낯빛도 좀 풀린다.

"그럼 이 애들은 아직도 소식을 모르겠구나."

이기채의 음성에 축축한 그늘이 어린다 .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조금 늦게 움직였더라면 알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만

서두르노라고."

"그게 왜 네 탓이겠느냐."

애비도 알리지 못한 소식을, 너라고 어찌할 수 있었으리.

이기채는 묵연히 눈길을 낮춘 채 마음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알고 안 왔단 말보다는 낫다.

알고도 안 왔을 리는 없겠지마는.

... 알고도 안 왔을는지도 모르지마는.

"어디서 살고 있더냐?"

"봉천이었습니다."

"목단강가가 아니고?"

"예. 목단강 언저리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살기는 하지요."

"헌데 왜? 풍문에는 목단강가에 산다고 어쩐다고 그러든데."

기표는 일부러 덤덤한 척 말을 건넨다.

아비를 버리고, 어미를 버리고, 처와 자를 버리고, 제 몸이 난 동족의 마을을

버리고, 문중을 버리고, 조상을 버리고, 그 조상의 뼈가 누우신 선영을 버리고,

들개 돌팔이 모산지배처럼 싸돌아 떨어져 나간 자식놈의 소식을 이제 들었다 해

"내 아들아."

목을 놓아 덤비기에는 사람들 앞에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고, 또 그 동안

자식에 대하여 뼈가 패이게 갈고 갈았던 증애가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도 않는

탓이었다.

"봉천이라면?"

"남원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오후 서너 시경에 떠나면 이튿날 오후쯤에는 도착

을 할 만한 거리지요, 봉천이. 만 하루가 걸리는 셈입니다. "

이제 기표는 속으로 거리를 헤아려 보는 것일까, 그놈 말은 내 앞에서 꺼내지

도 말라고 길길이 뛰는 대신, 그저 묵묵히 앉아만 있다.

"둘이 같이 있더냐?"

이기채가 한참 만에 마른 목으로 물었다.

"예."

"사는 곳 형상은 어떻고?"

목이 잠겨 쉰 숨소리가 갈라진다.

"전에, 조선 임금 정조 때 진하사로 청나라에 갔었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압록강 국경을 넘어서 만주땅에 막 들어서면서, 그 광활하고 황량한 대륙의 지

평선에 그만 목이 메어, 아아, 한 번 울만 하도다. 참으로 한 번 울만 하도다, 라

고 했다는 곳 아닙니까, 만주가, 만주는 황원이지요."

아아, 한 번 울만 하도다.

참으로 한 번 울만 하도다.

"그 만주의 봉천 시칸방에 강태가 살고 강모는 서탑거리에 살고, 종항간에 같

이 지내는 거나 다름없이 가까이 살고 있었어요."

"시칸방?"

"예. 이 봉천이란 도시가 묘해요. 둥그런 채반에다 지형을 비유한다면. 봉천역

에서부터 성내라는 곳까지 채반 한가운데를 좌악 그은 것같이 길이 나 있는데,

그것이 신작로요. 그 신작로를 중심으로 볼 때, 반쪽은 신시가라고 해서, 잣대로

잰 것 못잖허게 반듯반듯 건물도 짓고 양회로 이층 삼층 올려서 저희 왜놈들만

사는 도시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일본인 거주 지역은 아주 화려하지요. 사는 데 아무 제한이 없는 신천지를 구

가하고, 전쟁이다, 징병이다. 그런 불안 공포가 전혀 없이, 계획적으로 세운 도시

라서, 만모 백화점 같은 것은 지상 십일 층짜리 호화 건물로 명물 소리를 듣습

니다."

십일 층 소리에 방안이 수런거렸다.

"봉천 인구가 총 얼마나 되는데?"

"욱십만 정도 되지요."

"그럼 조선 사람은 어디 살고?"

"그 채반의 나머지 반절을 구시가라고 하지요. 바로 이 구시가에 중국인, 조선

인들이 살어요. 그 중에서도 남시장 일부, 북시장, 성내에는 중국 사람만 살고,

서탑 시칸방에는 조선 사람들만 살고요."

"뭐? 동네 이름들이 어떻다고?"

이기채가 묻는다.

"봉천역에서 성내로 길이 뚫렸는데요. 봉천역 다음이 서탑, 그 다음이 시칸방,

그 다음이 남시장, 그 다음이 북시장, 그 다음이 성내, 그렇지요."

"어찌 그렇게 구획이 되어? 국경마냥으로. 누가 시키는가? 안 그러면 자발적

으로 편의따라 모여 사는 것인가."

"신시가는 원래 처음부터 왜놈들 살게 할려고 계획을 세운 곳이라서 일본인

아니면 들어가 살 수가 없고요, 중국인 조선인 동네는 그럴 수밖에 없다 합니

다."

"왜?"

"저는 잠시 갔다 온 사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생활 습관이 서로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았어요."

"이국땅에서 생활 습관이라는 것이 다 서로 다르기 마련인데, 내 나라 떠난 사

람들이 거기 살고 있는 저희 나라 사람들하고 척이 지게 등을 돌리면 쓰는가."

"등을 돌린다기보다 도저히 섞여 살 형편이 못되는 모양입니다."

"연유가 있을 것인데?"

"냄새 때문에."

"냄새?"

"도무지 씻는다는 법이 없어서 그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장가갈 때 빼고

는 목간이라는 것을 모른다 합니다. 머리도 쩍쩍 들러붙어 기름이 옻칠같이 묻

어나게 하고 다니고, 옷도 도대체 빤다는 법이 없어서 한 번 꿰면 죽을 때 벗는

다나요? 그런데 그곳이 여기하고는 달라서, 그 인근에 유명한 탄광이 있어요. 무

순 안광 탄광에서 어떻게나 석탄가루가 날아오고, 또 온 하늘에 석탄 가스가 꽉

쩔어 찼는지, 그 독한 기운에 검은 공기를 직접 안 가 보고 말로만 듣고는 실감

하기 어려운 지경이지요. 아침에 세수하려고 세숫물을 떠다 놓으면 그 물이 금

방 시꺼매지니까요."

"허어. 무슨 그런 지경에 사람이 산단 말이냐."

"그런데 이 중국인들이 그 석탄가루 켜켜이 앉은 옷을, 앉은 게 뭔가요 속속들

이 배어든 옷을 빨지도 않고 입고 자고 뒹굴고 또 나다니고 그러니, 그 사람들

이 스쳐가기만 해도 조선 사람 옷이 견디지를 못한답니다. 진솔옷 무명저고리

아니라 명주저고리라도 그 먹검뎅이 한 번 휙 지나가면 시커매져 버리거든요."

"무순 탄광 석탄가루가 중국인데 남시장 북시장 성내에만 날아가는 것이 아닐

진대, 서탑 시칸방도 마찬가지로 그처럼 시커멓단 말인가."

이번에는 기표가 눈을 찡기며 물었다.

"하늘과 공기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쪽 하층민들 사는 양상이 그런것이니까

조선 사람들은 그보단 좀 낫지요. 그쪽 사람들 중에도 잘 사는 사람은 몇 만 석

씩 농사짓고, 제후 군황이 부럽잖게 울리고 부리며 사는데, 어디 가나 존재하기

마련인 빈자의 살풍경이 그만하다는 예 하나 아니겠습니까?"

"대관절 그런 곳에서 이놈들은 무얼 한다는 게야?"

"봉천이 이상한 도시예요. 그런 중국인 동네가 있는가 하면, 참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조선인 쪽 동네에는 '빠'들이 그렇게 휘황찬란하고 화려 다양할

수가 없습니다. 서탑에서부터 시칸방까지 길 양쪽에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모두

다 크고 작은 빠예요."

"빠? 빠가 뭐인고?"

"여자가 있는 술집이지요. 양풍의."

"갈수록 태산이구만. 그래 그런 화류계 족속들 바글바글 들끓는 바구니 속에서

이놈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느냐니까아."

이기채가 억누른 언성을 높인다.

빠의 이야기와 술집 풍물에 대해서 듣는 순간, 그는 번개같이 머리를 후려치

는 '화냥년' 오유끼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 계집도 데리고 갔더냐?"

고 묻는 싶은 충동적 심정이 목을 꿰ㄸ고 올라왔지만, 이기채는 울대를 짓이기

어 누르며 참는다.

그놈의 하는 일 국량이 여기서 하던 짓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가. 빠라니...

빠? 그럼, 하던 짓이 있으니 계집은 빠에 나가고 사내놈은 펀들펀들 놀면서 기

생 장구에 한량춤이나 추고 지낸단 말이냐? 그토록 손바닥 빨간 중국인을 이웃

에 두고서야 보고 배울 것인들 무엇 하나 있을 것이며, 조선인들 사는 동네 길

거리 양 옆으로 주렴같이 늘어선 것이 화류 풍물 빠라면, 거기서는 또 무엇 하

나 건질 것이 있으리요.

이기채는 지레 짐작으로 양분이 받쳐 바튼숨을 끊는다.

이헌의도 이기채의 중정을 짚을 수 있는지라 난감한 낯빛으로 그에게서 시선

을 빗기고만 있다.

기표는 찌르는 눈빛으로 강호의 입시울을 쏘아본다.

"강모 강태는 학교에 입학하려고 합니다."

강호는 마치 어른들의 속심을 읽은 사람처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단호히 잘라

서 말했다. 그 말에 묻은 다른 상황들은 하찮게 떨어내 버리는 음성이었다.

"학교?"

의외의 말에 일변 놀라고 일변 안심하는 목소리가 이기채한테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거기 학교도 있단 말이냐?"

"예."

"무슨 학교?"

"봉천 법률 전문학관이라는 학굔데요, 시칸방 근처에 있는 조선인 학관입니다.

학생수가 일학년 칠십 명, 이학년 칠십 명으로 총 백사십 명이 다니는 이년제

전문학관이지요. 그러니까 여기 조선에 전문대학 같은 학제고, 학교 분위기도 비

슷해요."

"그럼 거기서 그 애들이 법학을 공부하려고 한단 말이냐?"

"예."

"학생은 모두 어느 나라 사람들이고?"

"조선인이에요."

"허어."

이기채한테서 안도가 섞인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선생들은?"

"역시 조선 사람입니다."

"설립자는 그럼."

"자세히 모르겠지만 그도 아마 조선 사람이 세운 것 같던데요? 그러니까 조선

말로 조선 선생이 조선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학교지요, 그게."

"그러면 조선의 법을 배운다는 게냐? 그 만주땅에서?"

"그건 아닌가 봅니다. 만주에서 조선인들이 취업하기 위한 수단 과정으로 배우

는 법학이니, 만주 현지에 해당하는 법일 겝니다. 거기서 배우는 것은, 저도 수

박 겉핥기로 말만 듣고 건너구경만 한 입장이라 그 정도만 짚어 봤구만요."

"공부는 무슨 공부를 하며 몇 시간씩이나 하는지, 그렇게 해서 무엇에 쓰이는

지, 할 만한 공부를 하는지, 해도 쓸데없는 공부를 하는지."

기표가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하루 여섯 시간씩 한답니다. 아마 그렇게 공부하고 나서 졸업한 뒤에는 영농

합작사 만주주식회사 같은 데 취직을 하는 모양입니다."

"학교는 그것뿐인가?"

"왜요. 측량학원이라는 것이 또 있지요. 만주는 개척지라서 측량이 필수적이니

까 일본에서도 역점을 두는 학원이지만, 마적떼 들끓는 벌판에, 가도 가도 키를

넘는 수수밭이 끝없는 만주땅에 뽈대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일이란 게 무섭고 또

한심하다고, 기왕에 할 것이면 법학을 해 보자 했다 합니다."

"공부도 다 환경이 있는 법인데 그런 혼돈 시가에서 무슨 문리가 트일꼬."

"학교 건물은 빨간 벽돌 이층집이었습니다."

"가 봤느냐?"

"예."

"별다른 것은 없고?"

이기채는 이제 좀더 자상하게 강모의 주변을 묻기 시작하였다.

직접 가서 볼 수도 없고, 너무나 이곳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 얼른 실감도

나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설명을 들어야 상상이나마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네가 죽지 않고 살아서, 혼몽중에도 어쨌든 '공부'를 택하여 근공하려

한다니, 불행 중 다행은 다행이다.

"아마 그 학교가 학교로 쓰이기 전에는 무슨 공장 건물이었던가 봐요. 교실은

도합 네 칸인데, 사실 교정에는 나무도, 꽃도, 단 한 그루도 없습니다. 살풍경이

지요. 학교 내에 있는 나무라고는 명색 운동장 귀퉁이에 참나무, 가죽나무 비슷

한 것이 똑 한 그루 서 있기는 있었습니다. 만주는 중국에서도 만족에 속하니까

문물이 성하지는 못했는데 그나마 전쟁을 치르고 난 후라, 꽃밭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지요. 그러니 자연히 그런 환경 속에서 어거지로 공부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는 부자대로 궁성을 이루고 살지만."

"입학은 언제 하고?"

"사월이지요."

"등록금도 있을 것 아니야."

"그게 십원 미만으로 다달이 낸다 합니다."

"그 돈은 대관절 어디서 어떻게 마련을 하며, 또 그 돈만 있어 가지고 살 수는

없을 것인즉, 도적질이나 비럭질을 안하고서야 어떻게 저희들끼리 버티어 갈 수

있을꼬."

이기채가 짐작으로 헤아리며 기표를 바라본다.

기표가 이기채의 시선을 받아서 강호한테로 건넨다 .

"졸업을 하면?"

"지방공무원에 해당하는 취직을 하는데요, 월급은 한 달에 육십 원에서 구십

원 정도 받고, 육 개월마다 승급을 하니까, 생활 염려는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숙을 하자면 비용이 수월찮을 것인데."

"하숙비는 쌀 일곱 말 값인데, 소도 한 말에 삼십 전이니 대강 이십원 정도였

습니다. 말 듣기에 최고급으로 평양 기생이 하는 집이 그 일대에서 제일 좋은데

이십 원이라니, 하루에 칠 전이나 기껏 많아야 십오 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쿠

리에 비기면 제왕 같은 생활이겠지요. 상다리가 쓰러지게 반찬이 나오고, 쇠고기

가 끼니끼니마다 오르는 밥상이 그렇다 합니다. 그 아니고는 보통 상류라고 하

면 한 십이 원에서 십오 원 정도 주는 모양예요. 취업하고 봉급 받으면 생활에

궁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강호는 나직 나직이, 그러나 상세히 이런 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그곳의 물가는 어떠하더냐."

아무래도 이기채는 그것이 마음 쓰이는 모양이었다.

"하숙이 아닌 경우에는 여인숙이나 숙소를 빌려 쓰는데, 밥 먹고 잠자고 이불

주고, 하루 일 원 이십 전이니 한 달에 삼십 원 꼴이 들겠고요. 일본 사람이 경

영하는 여관은 하루에 육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소 한 마리는 팔십 원.

귤 한 상자, 백 개 들이에 일 원.

국수 한 그릇에는 십 전이며, 만두 한 개는 이 전인데, 한 사람이 다섯 개까지

먹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호떡은 오 전, 과자는 대개 이십전 이하로 센베이 한

근에 이십 전이었고요.

그리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술집에 가면 정종, 삐루, 삐루는 나마 삐루, 생맥

주, 병맥주, 빼갈 같은 것들이 있는데, 십 원 내면 대여섯 명이 요리를 포함해서

취하도록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학용품으로는 공책 십 전, 연필 한 자루에 일 전, 빠이롯드 만년필 한 자루에

이 원 오십 전이고 잉크는 한 병에 이십 전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학생 오바 한 벌에 팔 원, 사지 학생모자는 일 원인데, 새것 쓰면 하

급생이라고 흉본대서 일부러 와세린을 잔뜩 발라 가지고 먼지를 묻혀 씁니다.

그리고 구두는 대개 양화점에 가서 맞춰 신어요. 보통은 십 원, 고급은 이십 원,

장가갈 때 신는 것은 이십오 원이었어요. 또 신사복 사지 양복 한 벌, 일본에서

들여온 옷감으로 맞추면 칠십 원이었습니다.

또 전차 요금은 이 전, 학교에서부터 인력거 타고 시오 리 가면 오십전이었어

요. 학교 파라고 나오면 교문 앞에 인력거꾼들이 즐비하게 인력거를 대 놓고 손

님을 기다리고 있지요.

신문은 일 개월 구독료가 일 원, 어린이 잡지는 한 권에 이십 전.

고무신 한 켤레 오십 전.

성냥 한 통 큰 것이 일 전.

석유기름은 십오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방울 한 가마니에 삼십오 전.

직장 가진 사람이 출장 다닐 때, 팔십 원 이상의 봉급자는 이등차를 타고, 그

이하 봉급자는 삼등차를 타는데.

일본 영사관에 근무하는 순사의 봉급은 육십 원 정도였고, 만주국 순사는 십

오 원이었으며, 일본 순사보는 이십 원 정도.

그리고 중학 교사는 봉급이 소 한 마리 값 팔십 원인데, 중학을 졸업하면 대

개 삼십 원 받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소사 봉급은 십오 원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일컫기를

"그 집에 돈이 천 원 있다."

하면 부자라고 하지만, 그런 집은 한 동네에 몇 집 안되고, 특히 조선의 유랑민

들은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봉천은 역시 국제도시여서 문물이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어, 일본 양

복지도 견본만 보고 주문을 하면, 돈 보내지 않아도 물건이 먼저 오고, 참고서도

주문만 하면 책이 다 왔습니다. 또 알고 싶은 책이 있어 편지를 하면 자세한 목

록이 다 오고요."

'어린이', '소년', '개벽'같은 잡지들도, 조선에다가, 우편국에 가서 편지만 내면

다달이 온답니다.

호오.

방안에서 나직한 탄성이 울린다.

샌님 아침 진짓상을 들고 사랑마루 앞에 섰던 콩심이가 아까부터 벌렁벌렁 가

슴이 뛰는 것을 참으면서, 이야기 중도를 끊지 않으려고 오촘조촘하다가 그만

죽이 식어 버렸다. 그런데도 진지 잡수시라는 말씀을 얼른 못 사뢴다. 그만큼 떨

리는 탓이었다.

"새아씨, 새아씨."

겨우 상을 들이고 난 콩심이가 숨이 턱에 차 건넌방으로 들이달으며 효원을

부른다. 효원이 웬 수선이냐고 눈빛으로 나무란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콩심

이는 제 저고리 앞섶을 두 손으로 누르며 벌떡벌떡 숨을 들이키기만 한다.

"말을 하지 않고서. 집안이 안팎으로 수수한데 너까지 이른 아침부터 날뛰느

냐. 방정맞게."

효원은 혀를 찬다.

"그게 아니라요, 아이고 시방 사리반서방님께서, 만주에 댕게오신 이얘기를 허

시는디요, 우리 새서방님을 거그서 뵈입고 오신 이얘기랑, 새터서방님 뵈입고 오

신 이얘기."

"천천히 말해 보아라. 천천히."

"사리반서방님이요, 만주를 가셨는디요. 거그서 우리 새서방님이랑 새터서방님

을 만나고 오겼당만요. 시방."

콩심이는 시키는 대로 숨을 몰아 쉬어 가면서 또박또박 끊어 말하고, 그 말이

끊길 때마다 효원은 덜컥 덜컥, 숨을 들이삼킨다.

 

 

12. 허공의 절벽

 

이야기는 좀체로 쉽게 끝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문밖 출입이 거의 없는 남

평 이징의까지 근심스러운 걸음으로 올라온 종가댁 큰사랑에는, 중참이 기울 무

렵, 어제 일이 하도 놀라워서도 그렇고, 오래간만에 강호가 왔다는데 얼굴도 볼

겸 바깥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자 문중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절이 흉흉허니 나라에나 집안에나 전고에 없던 일이 연이어 꼬리를 물고,

만징패조가 그치지를 않는구만, 도무지 살아 있다는 것이 욕이 돼서... "

이기채는 그 한 마디를 겨우 깨물어 넘기듯 말하고는 아까부터 시종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어머니를 여읜 것만 해도 원통한데, 치장한 지 몇 날 되지도 않은 어머니의

청청하신 몸 옆에, 말 그대로

"웬 놈의 뼈다구인지도 모를 뼈."

가 나란히 누워 킬킬거리고 있었는데, 자식이란 작자는 그것도 모르고 조석 상

식만 극진히 올리면 천하에 다시없는 효성이나 바치는 양 슬픈 얼굴로 영연 앞

에 서 있었으니.

어리석은 자신의 소행이 참담하여 이기채는 자괴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 더럽혀짐에 이를 갈았다.

"참륙을 해서 목을 삼동으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을 끌어다가 덕석말이를 하여 선지가 낭자하도록 몰매를 쳤지만, 그는 분기가

풀리지 않았다.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덕석에 말리어 살이 터지고 뼈가

쪼개지도록 맞은 것보다 더 갈갈이 몸이 상하여, 도무지 심신을 가누기가 어려

웠다.

사랑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이기채의 안색이 질려 푸르누른 것에 놀라면서도,

누워 쉬라고 말만 하고,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어제의 참황과 강호의 귀향이 깍지를 끼고 맞물리어 일어설 수가 없는 탓이었다.

"아이 , 붙들아. 안직도 모다들 그러고 지시지야? 이얘기허고?"

큰사랑 토방과 댓돌 위에 신발들을 가지런히 챙기며 방안 기척에 흘금흘금 귀

를 기울이는 붙들이를 콩심이가 손짓하여 불러내리더니 귓속말로 묻는다.

"얼릉 안 끝나실 것맹인디?"

"긍게 얼릉이고 나중이고 그것이 중헌 게 아니라 꼭 놓치지 말고 사리반서방

님한테 새아씨 전갈을 말씀 디러야여. 알었제?"

"몰랐제."

"요거이 기양."

몇 번씩이나 사랑 쪽으로 나와 붙들이한테 다짐하는 콩심이를 보고, 붙들이는

일부러 눙을 친다. 집 안팎이 어수선하고 어른들은 침중하지만 열댓 살 이쪽 저

쪽인 두 것들은 아직 철딱서니없는 티를 못 벗었는지라. 이 총중에도 엇대답하

며 놀릴 틈이 나는 것이다.

"너 이따가 붙들이한테 가만히 일러서, 사리반서방님 좀 내가 뵈옵잔다고 여쭈

어라."

아까 효원은 콩심이가 전하는 말을 찬찬히 다 듣고 난 다음, 한참 동안 미간

을 좁히고 있더니, 그렇게 말했었다.

"예에... 근디 어디로 오시라까요잉?"

아무리 소견머리 모자라는 콩심이지만, 시숙뻘 되는 사리반서방님 강호를 효

원의 건넌방으로 들라 할 리는 천만 없고, 율촌댁이 거처하는 큰방으로 오라시

는 것도 아닐 터여서 묻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안채 안마당에 덩그러니 서 계시

게 할 수도 없는 일이요, 헛간이나 뒤안으로 모신다는 것 또한 말이 안되는 소

리 아닌가.

"후원으로 모시고 오너라."

효원은 짤막하게 끊어 말하고 일어섰다.

그런데 큰사랑에서는 해가 넘어가도록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새아씨 효원의 심중을 짐작하는 콩심이는 애가 바터서 자꾸만 붙들이를 불러

세운다. 해가 서산 노적봉에 아직은 싸래기만큼 걸려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지만,

저거싱 눈꼽재기만해지다가 그대로 툭, 떨어져 버리면, 매안 마을은 순식간에 벼

락을 치듯이 어두워져서 금방 밤이 오고 말아, 속이 타는 콩심이가 솔가지 분질

러 군불을 때는 사랑 아궁이에 솥뚜껑을 떠그럭, 떠그럭, 열었다 닫았다 한다.

마치 그것이 무슨 신호이기나 한 것처럼 큰사랑 방문이 덜크덕, 열리더니 이

헌의가 먼저 누마루로 나서고, 뒤미처 강호가 따라 나왔다.

"아이고, 야, 야, 붙들아아."

콩심이가 솥뚜껑 잡은 손을 놓고 숨소리로 붙들이를 불렀다.

물담살이 붙들이는 군불 아궁이의 솥단지마다 물을 부어 놓아야 하니, 물지게

를 지고 지금 막 중마당 쪽으로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니가 어쩌든지 요랑껏 잘 말씀 사롸잉? 동계샌님이 꾸지람 안허시게에. 무

단히."

"하앗따아. 너 인자 나중에 뚜부집으로 시집갈랑갑다이?"

"어디로 가든지 니 물지게 타고 갈랑게 질이나 잘 바 뒤. 가매꾼 노릇 야물게

헐라먼."

"나 원, 선녀가 두름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신부가

물지게 타고 시집을 갔드란 말은 너한테 첨 듣는다."

"두룸박을 타고 올라갔냐? 내레왔제."

"아 첨에는 낼오고 나중에는 올라가고 안 그랬냐아. 낼왔응게 올라갔제. 저 왔

든 디로. 도로 갔어."

"잘 알었는디, 새살떨지 말고 살째기 지키고 섰어 어서. 대문에."

"참 너도. 아 사랑 방문 나서는디 그렇게 쉽디야? 인사허고 또 허고, 누마루끄

장 나섰다가 도로 돌아스고, 댓돌에 , 토방에, 층대에, 한 걸음 내딛다 말고 또

인사허고. 인자 대문에끄장 갈라먼 오밤중 될 거이다. 머 한두번 저껐능게비

네. 점심밥 자시고 방문 나선 발이 새참 끝나고 오드락 아직 대문에 못 닿능

것 암시롱."

"너 까불다가 코 깬다잉?"

"코 깨먼 니가 꼬매 주겄지맹. 니 심바람허다가 그랬응게로."

토드락 토드락 주거니 받거니 실없는 소리 하던 붙들이는, 일이 쉬우려고, 아

닌게 아니라 방문을 나서다가 도로 들어가는 이헌의를 남겨 두고, 혼자서 고샅

으로 내려가는 강호를 쫄쫄쫄 뒤따라갔다.

"저어, 서방님. 새아씨께서 잠깐만 조께 뵈입자시는디요."

어느새 어둑발이 푸르게 가라앉는 고샅에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여 집집마다

시울을 내린 처마에 감기는데, 강호는 가던 걸음을 멈춘 채 잠시 머뭇거리는 기

색으로 서 있었다.

똑 연기 속에 그림자맹이로 뵈이시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강호가 몸을 되돌려, 오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못 이긴 듯 내딛는 등뒤로, 어둠은 성큼성큼 내려앉았다.

안채의 후원에는 강호의 등에 앉은 어둠보다 더 두터운 어둠이 벌써 짙어져,

미리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효원이나 왠지 난색을 감추지 못하는 강호를 서

로 가리게 해 주었다.

그래서 다행일까 아니면 화근일까.

예로부터 수숙간이란 혼인으로 만난 관계 중에서 제일 어렵고 까다로운 사이

라고 하였다.

그래도 남편의 손아래 동생인 시아재는 형수씨와 무간하여 정답게 지내는 경

우가 많지만, 손위 시숙은 한자리에 앉는 것도 삼가야하고, 설령 앉았다 할지라

도 말을 나누는 것을 삼가야 하며, 말을 나누다 할지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정

면으로 얼굴을 보아서는 아니되어 시선을 서로 빗기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말까지는 나누더라도 물건을 주고받을 일이 있을 때, 직접 건네어서는

안된다. 그곳이 만일 방안이라면 물건을 줄 사람이 방바닥에 내밀어 놓은 것을

상대편이 집어 가야 하는 사이가 수숙간이었다. 정월에 세배를 할 때도 역시 이

수숙간에는 똑바로 맞절을 하지는 못한다. 제수씨는 바론 자세로 절을 하고 시

숙은 차마 마주하지 못하는 면구스러움의 표시로 비스듬히 몸을 틀어 절을 하는

것이 예였으니.

친수숙간에도 이러할진대 종항 재종 삼종을 넘어선 입장에서, 남편의 족형과

등롱도 걸리지 않은 나무 아래 후미진 담장을 끼고 불빛 없는 어둠을 두른 채

마주서 있다는 것이, 말을 들으려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한편, 물어야 할 말과 대답해야 할 말들을 이미 짚어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어둠이 얼굴빛을 감추어 주는 것이 다행이랄 수도 있으

리라.

"객창에서 근공하시노라 고생이 많으겼지요?"

효원이 먼저 말을 떼었다.

"시절에 대면 외나 염치없는 호강인 셈이지요."

강호는 묵묵히 어둠에 잠기는 발부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제 오셨는가요?"

"어젯밤에 왔습니다."

큰사랑에서 아까 기표에게 했던 것과 꼭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음성은 사뭇 다르다.

이 다음에 나올 말을 미리 짐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주로 해서 오셨단다고 들었습니다마는."

효원은 우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태산이 가슴팍으로 무너진다 하여도 맞바로 받아 안거나 두 손으로 밀어서 버

티는 성품이요, 화살로 바위를 뚫어야 한다 해도 망가질 살촉이 무서워 옆구리

돌아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예. 그랬구만요."

강호 역시 선선히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 선선함 속에는, 정색을 하고 난색을

드러낸 다름에 감당해야 하는 저 사람의 정서와 심중을 오히려 겉핥기로 건너가

버리고 싶은 가벼움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효원이 묻기 전에 먼저 강모의 안부를 터놓았다. 그 역시 말

할 수 있는 만큼만, 무난한 정도로 말하고 끝낼 심산이 숨겨져 있는 선수였다.

"대실동생, 새터동생, 다 만나 보고 오는 길입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사랑에

서 어르신네 뫼시고 자상히 근황 말씀 사뢰었구만요."

내가 말하는 것말고 더 자세한 것은 사랑의 시아버님께 여쭈라는 복선도 미리

깔아둔 강호는, 봉천에서 만나 본 강모와 강태의 생활이며 봉천의 풍물과 거주

환경을 대강 추려서 효원에게 옮겨 들려 주었다.

효원은 높이 솟은 어깨를 어두운 공중에 반듯이 세운 채, 눈을 엇비스듬히 내

리뜬 그대로 빗기어 서서, 강호의 이야기를 한 낱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오유끼도 같이 갔습니까?"

강호는 얼른 대답을 못한다.

바로 이 말을 피라고 싶어서 그렇게 붙들이가

"저어, 서방님. 새아씨께서 잠깐만 조께 뵈입자시는디요."

할 때부터 마음이 뒷걸음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효원은 그 뒷걸음을 한 발에 막으며 다시 물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던가요?"

강호는 다그치며 잘라 묻는 효원의 기세에 순간 질리며 위압이 되었다. 강호

는 당황하였다. 그 질문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도 모르게 위압을 당해

버린, 효원의 그 힘이 뜻밖이어서 당황한 것이다.

"그건 잘... "

"모르실 리가 없겠지요."

효원의 단호한 말에 강호는 그만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겹을 두른 어둠이 점점 무거워진다.

"지금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효원의 머리 속이 거꾸로 뒤집히면서 노랗게 비어, 그네는

그만 현기증이 일어나도록 노란 허공에서 무중력으로 아득히 떨어져 내리는 자

신을 붙잡으려고 두 손을 내밀었다. 그네가 무망간에 움켜쥔 것은 허공보다 더

짙노란 절벽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의 살은 칼 맞은 자리같이 험악하게 패어 나

가 싯붉은 상흔을 드러내며 바람을 삼키고 있는데, 효원은 그 절벽을 손아귀로

붙움킨 것이다. 그리고 붙움킨 채로 주루루 거꾸로 미끄러졌다.

강호는, 어둠 속이었지만 효원이 노랗게 질리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

다. 그리고 휘청하며 고꾸라질 뻔한 것도.

허공의 절벽을 긁으며 쏟아지는 효원의 두 손을 왈칵 잡아 움켜쥔 것은 강호

였다.

"아이쿠, 정신차리십시오."

조금 전의 그 담찬 위력은 간 곳 없고, 찰나에 그토록 허물어지는 효원을 붙

든 강호는

여인이란 이런 것인가.

놀랐다.

효원의 손은 쥐고 있던 땀이 식어 써늘하였다.

(가련하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꼿꼿이 서서 청동처럼 소식을 묻더니만, 안

보이는 손바닥이 이렇게 진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부르쥐고 있었던가 보다.)

엉겁결에 부축을 하느라고 붙잡은 효원의 손이었지만, 그 찰나에 끼치는 느낌

은 손금만큼이나 선명하였다.

(남들은 대실댁 대차다고 오로지 종부묶이로 맞춘 것 같다고들 하더라만, 그래

도 여인이란, 지아비에게 묶인 마음이 이만한 것인가. 한세상이 쓰러지는 이만한

마음을 묶어 매달고, 강모는 그 머나먼 벌판까지 도망을 갔으니.)

아무리 안 보이게 멀리 간들 버릴 수 있을 것이냐.

메고 가는 등만 무겁지.

버린 줄 알고 가는 사람, 벗은 줄 알고 가는 집을 사실은 한세상 무너지게 짊

어지고 가는 것이 어이없기도 하고 애처럽기도 하여, 강호는 강모의 파리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거 누구냐."

소스라쳐 놀라게 노엽고 짱짱한 율촌댁 음성이 강호의 고개 뒷덜미를 찍은 것

은 바로 그때였다.

강호는 효원의 손을 놓았다.

효원은 손을 붙잡고 놓는 것에는 아무 감응이 없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선 대

로, 다가오는 율촌댁을 바라보았다.

"율촌 아짐, 접니다."

강호가 어둠 스민 얼굴을 율촌댁 쪽으로 돌리어 가까이 보여 주며, 안심이라

도 시키는 양으로 말했다.

"으응. 사리반 조칸가?"

몹시 못마따한 기색을 참기 어려워 꼬이는 어조를 율촌댁은 굳이 감추려고 하

지 않았다.

"아니 왜 여기가 있어? 사랑에 올라왔으면 의당 안채로 인사하러 들어올 줄

알고 내내 기다렸는데. 궁금헌 일 많어서. 물을 것도 있었고. 그런데 그냥 그렇

게 핑허니 갔는가 부다, 일본에 가 공부허드니만 신식이 되어 버렸는가, 서운하

게 생각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법인가 그래? 어두운 데서 수숙간에 수군수군."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무슨, 나 들으면 안되는 말을, 둘이서만 꼭 숨겨서 나눌 일 있었는갑지?"

"아닙니다. 제가 그만 앞 뒤 분별을 못했습니다."

"저녁 밥 때가 지나서 오밤중이 되도록까지 사람이 어디로 가서 뵈이들 안허

니 안팎으로 찾을 수 밖에. 너 밥 안 먹냐?"

율촌댁은 효원에게 어서 안으로 썩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핀잔을 하는 대신 돌

려서 말하고 먼저 돌아섰다.

강호가 곤혹스러워하며 내려가는 것을 배웅하고는 큰방으로 들어온 율촌댁은

며느리 효원을 마주앉혀 놓고 드디어 참았던 역정을 터뜨렸다.

"너 하는 일이 요즈막에 도무지 종횡무진 네 멋대로여서 내가 갈피를 잡을 수

가 없다. 어떻게 된 일이냐? 내 집 마당 장꽝에서 쓰러져 혼절한 종시매를, 의원

불러 놓은 야밤중에 일으켜 세워 쫓아내지를 않는가, 시조모님 상중에 있는 손

부가 어느 때보다도 몸가짐 근신허고 있어야 할 참에, 날은 저물어 깜깜해지는

데 밝은 대낮 다놔두고 무슨 밀정 갈 일 났다고, 아무리 집안간이라 하지만 남

녀가 유별헌 사이게 후원 둘아 뒷담 아래 옹크리고 서서 밀담을 나누지를 않는가."

율촌댁은 바트게 치미는 숨을 끊는다.

"그러고, 내 참, 입에 올리기도 해괴헌 말이라 헛본 것이지 싶은데, 내 눈으로

봤으니 봤달 수밖에. 둘이서 왜 양손을 부여잡고 놓지를 못했는냐. 입 있으면 말

해 봐라."

"잘못 보셨습니다."

"뭐? 잘못 보아?"

"예."

"아니 너 시에미 눈에다가 명태 껍질을 붙인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아마 쓰러지려 했던가 봅니다. 얼결에 놀란 사리반

서방님이 붙잡아 부축해 준 것이지요."

이 말에 율촌댁이 쓴웃음을 삼키며 목청을 돋운다.

"거 참 변괴가 날 뻔했구나, 네가 몸체가 작으냐아 기혈이 모자라느냐. 앉고

서는 것에 흔들이는 일 한 번도 없어서 장중 태산 같은 네가 어인 일로 느닷없

이 쓰러지려 해? 그것도 내외하여 마땅한 남 앞에서."

효원은 얼른 말을 잇지 못한다.

"그게 무슨 수작이냔 말이다."

(수작이라니 당치 않소. 어머님. 당신의 아드님이 천 리 만 리 머나먼 삭방 북

국에까지 못 잊어 이끌고 간 계집이 있다고 합니다. 같이 살고 있다고 그럽디다.

그 말을 듣고 내 잠시 어지러워 그리하였으나, 내 입으로는 그런 소식 말씀 드

리고 싶지 않습니다.)

"말 안할래?"

"애비 안부 몇 마디 듣다가 좀 과민해졌던 모양이에요."

"무슨 안부길래 네가 쓰러질 지경이 되어?"

율촌댁이 뜻밖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여 날카롭게 묻는다.

"어디가 아프대?"

급박한 효원은 율촌댁 반문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율촌댁은 애가 탄다.

안 그래도 시각이 좀 이슥해지면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에 이기채한테서 강모

의 소식을 소상히 들어 보려고 바작바작 마음을 졸이고 있는 터인데, 어지간한

흉보가 아니고서야 그 담력과 판별이 남다른 효원이 그처럼 말 들을 일 할 리가

없으리라, 싶어서 일부러 더 파고들며 그네는 짐짓 억지 소리를 박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더니만, 너는 남의 남정네 손을 잡고도 할

말이 있단 말이냐?"

그 말을 듣는 순간, 효원은 제가 뒤집어쓰는 억지 소리가 억울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만큼이나 가 있을는지, 제대로 길을 따라 안행사 암자에 무사 도착하

였는지, 알 수 없는 강실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대도 참 가련한 사람이요, 백옥 같은 인생에 모자랄 것 없을 터이언만, 못

만날 사람 만난 죄로 베갯속이 썩도록 울고 울다가, 몹쓸 병 깊어지고, 종당에는

상놈의 아이까지 배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떳떳치 못하고, 부모를 우러러 얼굴

들 수 없으며, 집안 친척 일가붙이 동네사람 오가는 행인한테조차 하소연할 길

꿈에도 없는 그대. 나를 보기 얼마나 민망하였으리.

허나, 그대의 불우가 곧 나의 아들 우리 철재한테도 큰 어둠 될 것이어서, 나

는 그대를 숨기려 했던 것뿐이요. 그대 흉이 가문에 먹칠을 하면, 이 가문의 종

손인 우리 철재, 무슨 낯으로 종손 노릇을 하겠소.

그렇게 죄 많아서 이제는 영영 쫓겨나다시피 뒷모습 보이며, 물 설고 산 설은

객지 타향 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버렸으나, 그대를 그리하도록 만든 사람은 대

륙으로 떠나서 어여쁜 계집과 더불어 아들도 낳고 딸도 낳으며, 그대도 나도 잊

고 살아갈 것인가 보오.

그대는 죄 많은 아이를 배어 황량한 세상의 덤불에 걸리고 찢기며 속병 드는

데, 오유끼는 님 곁에서 몸 부닐고 수발도 받게 생겼소.

가련한 그대.

효원은 웬일인지 자꾸만 강실이가 눈에 밟혔다.

그리고 강실이 가진 아이가 춘복이의 아이라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당치 않

았다. 그 아이는 어쩐지 꼭 강모의 아이인 것만 같았다.

(애비가 누구이든지 그대는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효원이 골똘한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쏘아보던 율촌댁이

"너 내 말 안 들리느냐?"

재우쳐 묻는다.

"어머님, 자세한 말씀은 사리반서방님께 직접 들어서요. 그게 나으실 것 같그

만요."

"내가 네 그 성질이 마음에 안 들었느니라. 처음부터. 여자란 본디 소견도 깊

어야 하지만 우선 성품이 온화해야 다순 바람 불고 집안에 훈김 도는 법인데.

네가 아무리 옳다기로서니, 성질 꼿꼿한 것만 내세워.지금 네 허는 소행머리를

보면 누구라도 네가 시에미 무시헌다 소리 꼭 헐 것이다. 너ㅎ테는 남편의 일이

지만 나한테도 자식의 일인데 네가 들은 말 있으면 묻지 않아도 곧바로 내게 와

일러 주어야 순서지. 이렇게 사람 애간장 끓게 궁금증만 일으키고는, 허튼 젓 하

고. 뭐? 사리반서방님한테 들으라고?"

율촌댁 눈꼬리에 꼿꼿한 모가 선다.

"그래. 네 말대로 사리반서방님 불러서 물어 보마."

나가거라.

율촌댁은 두 말도 더 보태지 않았다.

그리고는 효원이 대청을 건너가 건넌방 문 닫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율촌댁은

안서방네를 불렀다.

"가서 사리반 새아씨 좀 내가 보잔다고 해."

"지금이요?"

"마땅한 시각에 올라오라고 그래. 할 일 다 해 놓고. 나는 늦어도 관계찮으니."

"예."

안서방네는 앞치마를 벗어서 손에 감아쥐고 단걸음을 놓으며 사리반댁으로 달

아간다. 그네의 발걸음이 빠르면서도 불안하다.

 

 

13. 추궁

 

의아한 낯빛으로 율촌댁 앞에 마주앉은 사리반댁은, 아짐께서 웬일로 날 다

저문 밤중에 갑자기 사람을 부르시는고, 싶으면서도 짐짓 아무 내색을 안한 채

"어떻게 진지는 좀 잡수겼어요?"

범상한 듯 여쭌다.

"반 술이나 뜬 둥 만 둥 했그만. 자네는 어째, 밥 먹었는가?"

"예 그저."

"춥지?"

"좀 썬득썬득허네요. 암만해도 아직은."

입춘 추위에 선늙은이 얼어 죽느다는 말도 있지마는 엊그제 우수, 경칩 다 지

나고 이제 내일 모레면 청명이 성큼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써그럭써그럭 얼음

기운 끼치는 밤바람은 낡은 풍지를 헤집는다.

부르르르.

문풍지 떠는 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율촌댁이 후루루 마른 어깨를 떠는데, 소

름 돋은 귀밑이 푸리푸릿해 보인다.

사리반댁이 그 안색에 고개를 갸웃한다.

외풍 탓이겠지.

다른 때 같으면야 당연히 화로를 당겨 놓고 손을 쪼일 터이지만, 지금은 상중

이라, 그런 당연조차도 자식으로서는 차마 생각 못할 호사여서 아예 금하고 있

으니, 군불마저 삼간 방바닥은 저녁밥 지은 불끝이 겨우 남아 그런대로 밍밍한

온기가 돌았으나, 앉아 있는 사람은 목덜미 동정 닿는 고대가 썬득할 만큼 방안

에는 냉기가 차 있었다.

"여묘에 비길까, 아무러면."

고드름 매달리게 생겼다고, 방이 찬 것을 염려하던 동서 수천댁한테 율촌댁은

쉰 소리로 핀잔했었다. 며칠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방안이 한데처럼 썰렁한 것은 꼭 불기가 없어서 그런 탓

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무엇인가 심상치 않았다.

"어째 아짐 신색이 영 썽클해 뵈이시네요. 추우신가아... "

사리반댁은 우선 변죽을 울리며 율촌댁 안색을 살핀다. 어른 모시고 사는 것

이 몸에 익은 그네는 상대방 얼굴에 눈썹끝만 움직여도 속마음을 짚어 내는 일

에 남다른 면이 있었다.

"춥기는, 동지 섣달도 아닌데."

율촌댁 음성에 가시가 걸려 있다.

"그럼 어디 안 좋으신가요?"

"그래 보여?"

"그러시단 말씀도 같고요잉."

" 세상살이가 웃을 일이 별로 없네그려."

"왜. 무슨 심기 상허실 일이라도 있으서요?"

율촌댁은 그 말에 대답 대신 윗몸을 사리반댁 쪽으로 바짝 기울여 당기며 입

술을 주름지게 모은다.

동그스름하고 모난 데 없는 사리반댁 얼굴은 낯꽃이 환하여 늘 웃는 빛이다.

어려운 어른 모시고 앉은 자리에서도 범절은 깍듯하지만 어쩐지 그 웃어른한테

는 평온하고 무람없는 느낌을 가지게 해 준다.

"내가 생김새 덕을 봐. 속은 안 그런데."

언젠가 효원의 건넌방에 들러 잠시 담소하던 사리반댁이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날 효원은 사리반댁 아명이 '효덕'이며, 그 두 글자 중에 '덕'자는 그네

의 친정댁 가내노비였던 순덕이의 이름에서 따온 글자라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내가 순덕이 덕짜를 쓰는 사람이라네."

하면서

"이 세상에 순덕이 팔짜를 누가 당하리."

"너는 저 순덕이 팔짜만 닮아라."

"순덕이가 이 세상에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뿐인데, 이미 순덕이한

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

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고 말씀하셨다는 어머니 안어른 이야기도 함께 해 주었다.

"형님 안어버이께오서는 참 크게 개명허셨던가 봅니다."

"개명보다는 체득이지 뭐."

"아무리 그렇단들 사라반이 어디라고, 그 서슬 울타리 안에서 당신 따님 이름

에다 종의 팔짜 닮기를 빌어 순덕이 덕짜 놓고 축망을 하실 수가 있겠소? 어지

간한 사람이라면 생각이야 어떻든 실행에서는 고루를 못 벗는 것이 통례지요."

"그러까아?"

"아무럼요."

"하기는 그렇기도 할 것이네. 사리반이 달리 사리반인가? 그게 본디 비내라,

사립안. 왜 그렇게 부르는고. 조선조 말에 우리 입향조께서 이 마을로 들어와 자

리를 잡으신 연후에, 도덕이 드높고 학문이 빛나서 그 후손들이 창성하니, 인근

에 칭송이 자자하고 기백은 푸르러, 권세와 명리, 호사와 화미에 물들지 않는 선

비으 기상을 대쪽같이 세우실 때. 마을 변두리에다 비잉 둘러 울타리 담을 친

뒤 경계를 삼고 출입구로는 오직 사립문을 하나 커다랗게 만들어서, 동성종족이

아닌 타족들은 드나들 수만 있을 뿐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살지는 못하게 했다네."

"자긍이겠지요."

"엄청난 편벽 배타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 사립문 울안에 사는 종족

들끼리는 누구나 한집안마냥 우애하고 서로서로 북돋아서, 도둑도 없고 다툼도

없고 부녀자 행실은 명경 같은데 서당에는 글 읽는 소리 그칠 날 없었대."

"그래서 사립안이구료."

"그래. 그래서 모두들 사립안이라고 불러. 그 마을을. 그런데, 그래서 우리 안

어른께서는 더 답답우셨겠지. 세월은 길고 천지는 광활하여 안팎 조화가 무쌍하

건만, 여인의 몸으로 나서 그 운명에 이미 굴레 많은데다가, 양반, 양반, 차꼬 차

고, 그것도 모자라 울타리까지 두른 마을 대쪽 같은 사립안으로 시집을 오셨으

니. 내 생전에 과연 저 사립문을 몇 번이나 나가 볼 수 있을 꼬. 싶으시더래."

의아한 낯빛으로 율촌댁 앞에 마주앉은 사리반댁은, 아짐께서 웬일로 날 다

저문 밤중에 갑자기 사람을 부르시는고, 싶으면서도 짐짓 아무 내색을 안한 채

"어떻게 진지는 좀 잡수겼어요?"

범상한 듯 여쭌다.

"반 술이나 뜬 둥 만 둥 했그만. 자네는 어째, 밥 먹었는가?"

"예 그저."

"춥지?"

"좀 썬득썬득허네요. 암만해도 아직은."

입춘 추위에 선늙은이 얼어 죽느다는 말도 있지마는 엊그제 우수, 경칩 다 지

나고 이제 내일 모레면 청명이 성큼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써그럭써그럭 얼음

기운 끼치는 밤바람은 낡은 풍지를 헤집는다.

부르르르.

문풍지 떠는 소리에 놀란 사람처럼 율촌댁이 후루루 마른 어깨를 떠는데, 소

름 돋은 귀밑이 푸리푸릿해 보인다.

사리반댁이 그 안색에 고개를 갸웃한다.

외풍 탓이겠지.

다른 때 같으면야 당연히 화로를 당겨 놓고 손을 쪼일 터이지만, 지금은 상중

이라, 그런 당연조차도 자식으로서는 차마 생각 못할 호사여서 아예 금하고 있

으니, 군불마저 삼간 방바닥은 저녁밥 지은 불끝이 겨우 남아 그런대로 밍밍한

온기가 돌았으나, 앉아 있는 사람은 목덜미 동정 닿는 고대가 썬득할 만큼 방안

에는 냉기가 차 있었다.

"여묘에 비길까, 아무러면."

고드름 매달리게 생겼다고, 방이 찬 것을 염려하던 동서 수천댁한테 율촌댁은

쉰 소리로 핀잔했었다. 며칠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방안이 한데처럼 썰렁한 것은 꼭 불기가 없어서 그런 탓

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무엇인가 심상치 않았다.

"어째 아짐 신색이 영 썽클해 뵈이시네요. 추우신가아... "

사리반댁은 우선 변죽을 울리며 율촌댁 안색을 살핀다. 어른 모시고 사는 것

이 몸에 익은 그네는 상대방 얼굴에 눈썹끝만 움직여도 속마음을 짚어 내는 일

에 남다른 면이 있었다.

"춥기는, 동지 섣달도 아닌데."

율촌댁 음성에 가시가 걸려 있다.

"그럼 어디 안 좋으신가요?"

"그래 보여?"

"그러시단 말씀도 같고요잉."

" 세상살이가 웃을 일이 별로 없네그려."

"왜. 무슨 심기 상허실 일이라도 있으서요?"

율촌댁은 그 말에 대답 대신 윗몸을 사리반댁 쪽으로 바짝 기울여 당기며 입

술을 주름지게 모은다.

동그스름하고 모난 데 없는 사리반댁 얼굴은 낯꽃이 환하여 늘 웃는 빛이다.

어려운 어른 모시고 앉은 자리에서도 범절은 깍듯하지만 어쩐지 그 웃어른한테

는 평온하고 무람없는 느낌을 가지게 해 준다.

"내가 생김새 덕을 봐. 속은 안 그런데."

언젠가 효원의 건넌방에 들러 잠시 담소하던 사리반댁이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날 효원은 사리반댁 아명이 '효덕'이며, 그 두 글자 중에 '덕'자는 그네

의 친정댁 가내노비였던 순덕이의 이름에서 따온 글자라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내가 순덕이 덕짜를 쓰는 사람이라네."

하면서

"이 세상에 순덕이 팔짜를 누가 당하리."

"너는 저 순덕이 팔짜만 닮아라."

"순덕이가 이 세상에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뿐인데, 이미 순덕이한

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

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고 말씀하셨다는 어머니 안어른 이야기도 함께 해 주었다.

"형님 안어버이께오서는 참 크게 개명허셨던가 봅니다."

"개명보다는 체득이지 뭐."

"아무리 그렇단들 사라반이 어디라고, 그 서슬 울타리 안에서 당신 따님 이름

에다 종의 팔짜 닮기를 빌어 순덕이 덕짜 놓고 축망을 하실 수가 있겠소? 어지

간한 사람이라면 생각이야 어떻든 실행에서는 고루를 못 벗는 것이 통례지요."

"그러까아?"

"아무럼요."

"하기는 그렇기도 할 것이네. 사리반이 달리 사리반인가? 그게 본디 비내라,

사립안. 왜 그렇게 부르는고. 조선조 말에 우리 입향조께서 이 마을로 들어와 자

리를 잡으신 연후에, 도덕이 드높고 학문이 빛나서 그 후손들이 창성하니, 인근

에 칭송이 자자하고 기백은 푸르러, 권세와 명리, 호사와 화미에 물들지 않는 선

비으 기상을 대쪽같이 세우실 때. 마을 변두리에다 비잉 둘러 울타리 담을 친

뒤 경계를 삼고 출입구로는 오직 사립문을 하나 커다랗게 만들어서, 동성종족이

아닌 타족들은 드나들 수만 있을 뿐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살지는 못하게 했다네."

"자긍이겠지요."

"엄청난 편벽 배타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 사립문 울안에 사는 종족

들끼리는 누구나 한집안마냥 우애하고 서로서로 북돋아서, 도둑도 없고 다툼도

없고 부녀자 행실은 명경 같은데 서당에는 글 읽는 소리 그칠 날 없었대."

"그래서 사립안이구료."

"그래. 그래서 모두들 사립안이라고 불러. 그 마을을. 그런데, 그래서 우리 안

어른께서는 더 답답우셨겠지. 세월은 길고 천지는 광활하여 안팎 조화가 무쌍하

건만, 여인의 몸으로 나서 그 운명에 이미 굴레 많은데다가, 양반, 양반, 차꼬 차

고, 그것도 모자라 울타리까지 두른 마을 대쪽 같은 사립안으로 시집을 오셨으

니. 내 생전에 과연 저 사립문을 몇 번이나 나가 볼 수 있을 꼬. 싶으시더래."

"성짜있는 가문에 우여곡절 손 귀한 집 증손을 자식으로 두었으면, 의당 어미

로서 올바러게 훈계하고 허물없이 길렀어야 옳을 일이나, 내 그러하지 못하였어.

성례까지 한 자식이, 그뿐인가, 저 또한 아들이랑 낳은 몸이 이도 저도 다 버리

고, 부모도 조상도 다 버리고 어느 한 밤 야반도주를 해 버렸으니."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꼬.

제 미어지는 간장을 생각하면, 어미 간장은 녹아도 못 당하겠지.

"이 지경이 되고 나서 일변 남의 앞에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부끄러운 마음에도 세월이 덮이면 이끼가 끼는가, 이제는 염치

조차 없어져서 그저 다만 애가 닳고 보고 자울 뿐."

그런데 이제는 드디어 소식줄을 잡았다...

복받치어 가누기 어려운 심정을 어금니로 누르는 율촌댁 눈시울에 붉은 눈물

이 맺힌다.

"내가 남들같이 순탄하게 자식을 둔 것도 아니었네. 자식 안 귀한 에미가 어디

있을까마는 참말로 내게로나 집안으로나 문중으로나 여늬 아들과는 달라서 내

딴에는 공도 많이 들였는데. 이렇게 소식 한 자 못듣고 살면서도 때 되면 밥 먹

고 때 되면 잠 잤어. 무정한 에미지. 허나 나도 매인 몸이라, 핑계 같지만 어쩔

수 없었네. 만일에 소코리 장수나 팔도거지 동낭치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어디에

고 그 아이 있다는 말 그저 싸래기 반 토막만 얻는대도 내가. 가다가 닳아져서 죽

는 한이 있을망정 걸어 걸어서 찾아갈 것만 같등마는."

마음 맺힌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율촌댁 음성이 아래로 가라앉고, 그 목소리를

따라 사리반댁은 점점 더 고개가 난감하게 수그러진다.

대실서방님 소식을 들을랴고 나를 부르신 게로구나.

어찌할꼬.

"자네는 소견도 남다르고 미덥기도 해서, 내가 체신 없이 오밤중에 오라가라는

했네만, 꼭 좀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쪽으로 턱을 바짝 내미는 율촌댁 기색에 사리반댁이 고개를 든다.

"말씀 하시지요."

"사리반 조카가 만주로 해서 왔다는 말을 들었네."

"그랬다는그만요."

"가아를 만나고 왔다면서?"

"봉천에 일부러 갔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들 우애가 크면서부터도 자별했었지... "

"두 분 어버이 문후 소상히 여쭙고, 가내 식솔이며 문중 어르신들과 일가 친지

의 안부도 하나 하나 지성으로 묻고요, 마을 일들도 몹시 궁금해하더랍니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본시 자상하고 유순한 사람이."

말을 꺾는 율촌댁의 목이 메인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다던가?"

부모는 항상 자식의 몸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염려한다. 혹 무슨 몹쓸 병에라

도 걸리지 않았는지, 율촌댁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무래도 아까 효원의 거동이

흉참한 소식 접한 사람의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다행히 사리반댁은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어쩌고 있다던고... ?"

"뜻이 있어 떠난 길이라 각오가 단단하고, 공부에도 열심이어서 집으로 돌아올

날이 머지 않을 것이라고도 하고요."

"그건 자네가 나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겉자락 말일 게고, 다른 말 들은 것이

또 있을 것이네. 무슨 소리라도 좋으니 들은 대로 일러 주어. 대관절 어쩌고 있

다던가."

다그쳐 묻는 율촌댁 기세에 순간 난색이 지나가는 사리반댁 눈빛을 놓치지 않

은 율촌댁이 어느결에 한 무릎 다가앉는다. 그 무릎이 하도 절실해서 마치 사리

반댁 고삐를 조이는 것 같았다.

"제가 무얼 알아야지요."

"나도 다 짚이는 것이 있고 짐작이 있어. 자네는 필시 무얼 알고 있을 것이네."

"아이고, 어제 온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어디 뭐 이야기할 틈이나 있었기에요?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 걸요."

"자네 내외 정리가 도타운 것을 믿고 내 묻는 말이니 돌이 말고 말해주어. 조

카가 알고 질부가 알고 며느리가 아는 일을. 정작 에미는 모르고 있어야 옳단

말인가. 꼭? 자네들이 싸잡아서 동아리져 나를 이렇게 농판 만들고 따돌려야만

속이 시원허겄어?"

"며느리가 알다니요?"

사리반댁이 놀라서 되묻는다. 그것은 뜻밖의 말이었던 것이다.

"나도 참 아니할 말로, 며느리 문짜 좀 빌려 써야겠네. 그 정황은 사리반 조카

한테 직접 물어 보소."

"예?"

"얼마나 경천을 할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해 다 저문녘에 두 사람이

저 뒤안 후원에서 수군수군, 볼상도 사납고 남의 입살에 오르내리기 똑 좋게, 밀

모 꾸미는 역적들마냥, 나 들을까 겁냈던가 숨조차 죽이고는, 무슨 말 주고받더

니, 그만 혼절을 할 뻔했다네. 쓰러지다 말었어. 아까."

"누가요?"

"누구겄는가."

그럴 일이 아니었으나, 사리반댁이 냉큼 말꼭지를 딸 것 같지 않은데다가, 아

까부터 내내 참고 있던 분이 비꼬여 율촌댁은 효원에 대한 언급을 터뜨리고 말

았다. 그러면서도 이런 식으로 며느리 말을 터뜨리는 것은 시어미 체통이 구겨

지는 행신이라, 손아래 사람 보기가 민망하여 다시 부아가 치민다. 그네는 하마

터면

"둘이서 양손을 부여잡고, 쓰러지네, 부축하네, 참 어디다 옮길 수도 없는 작태

를 벌이더라."

는 말까지 토할 뻔했던 것이다.

천하 못된 것 같으니라고.

제가 나를 옳게 시에미로 대접하여 어른답게 여기는 마음이 눈꼽쟁이 꼬물만

치만 있었더라도 그처럼 대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렇게 안 대했다면 내가 이런

구차스운 자리를 갖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어? 어머님. 자세한 말씀은 사리반서방님께 직접 들으서요? 그게 나으실 것

같그만이요? 그래, 무엇이 낫단 말이냐. 내가 내 얼굴을 스스로 깎는 이 무렴봉

욕이, 네 눈에는, 네가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주는 것보다 나을 성싶었더냐?

이 무슨 망신스러운 꼴이란 말인가. 이 몰골은 부모로서 자식의 소식을 비럭

질하거나 강탈하려는 형상이 아니고 무엇일꼬. 집안에 소식 알고 있는 사람을

놓아 두고. 이게 다 흉이지, 흉.

이러한 사실들이 다시금 역정스럽다.

그토록이나 애간장이 마르고 녹도록 기다리고 기다려온 금지옥엽 내 자식의

소식을 드디어 듣게 된 마당에 어째서 반가움 대신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것

일까.

"그럼 아짐께서 그 연유를 바로 물어 보신단 말이지, 왜?"

나를 불러 간접으로 묻느냐는 사리반댁 시선이 율촌댁을 찌를 때, 그네는 후

끈 끼치는 수모를 구름같이 뒤집어 썼던 것이다.

"말을 안해. 함봉을 하고."

겨우 그 토막을 밀어낸 율촌댁의 눈썹끝이 바늘 빛을 띤다.

"사리반 조카도 그러는 게 아니야. 본데 있는 집안의 반듯한 자손이 위아래도

구분없이, 정작 소식을 들어야 할 어미는 젖히고, 남으 집 며느리와 쑥덕쑥덕 공

론하는 태도가 대관절 무엇이며, 어디서 보고 배운짓인가. 동계어른 그러실 분이

아닌데 동경으로 유학간 것이 탈이었던 모양이구먼. 신식은 그런 것인가 보아,

그러고 자네도 마찬가지야. 부창부수라더니, 나한테 그리 대하자고 둘이서 약조

했는가?저 애는 여기서 더 거론할 것도 없고."

비늘이 떨리며 파랗게 곤두서는 율촌댁 음성이 콱, 단호하게 날을 내리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능멸하려거든 마음대로 해. 허나, 그게 아니라면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해

주게."

느닷없이 단도 맞은 사람처럼, 가슴팍이 패이게 꽃히는 말을 뽑지도 받지도

못한 채 두 손을 모아쥐고 엉거주춤하는 사리반댁을, 율촌댁은 눈 깜박도 안하

고 쏘아본다.

"아이고, 제가 무얼 알아야지요."

사리반댁은 형체 없는 안개를 휘어잡아 끈을 꼬고 가닥을 추리려는 것이나 마

찬가지인 이 추궁 앞에,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인지 올바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피할 수만은 없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그저 대강

겉놀림으로, 무난한 안부나 몇 말씀 전해 드리고 말기에는 앞서의 일이 예사롭

지 않았다는 것도.

더욱이나 지금 율촌댁은

"능멸."

이라는 격어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 그 경위를 알 수는 없으나 효원이 혼절해서 쓰러질 뻔했다면 틀

림없이 남편한테서 '그 소식'을 들은 것이 분명한데, 결국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차이일 뿐이지, 미구에 곧 밝혀지고 알려질 일이 아니랴. 어쩔 수 없다.

달이 차면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다. 허나, 섣불리 앞당겨 발설할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선후 가리지 않고 몰리듯이 뱉은 말이 집안 분란 일으키는 불씨를 만

들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정녕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네."

율촌댁은 이제 음성을 싸늘하게 내리깔았다.

"아, 아니어요. 아짐. 무슨 말씀을... 그저... 저... 오유끼가요."

"오유끼?"

"예."

"그것이 거기를 따라갔더란 말인가?"

질리는 율촌댁 얼굴에 순간 실망과 배반감이 역력히 떠오른다.

"예. 동행해서 갔던가 봅니다."

"처음부터여, 아니면 나중에 전갈을 받고 찾어서? 어떻게 같이 갔다는 게야?"

"대실서방님이야 어디 처음부터 데리고 가실 생각 허셨을라고요? 전주에 두고

가시려는 걸 눈치채고는 기어이 따라갔겠지요."

에미는 헛껍데기였구나.

주저앉는 마음의 한쪽이 허물어진다.

율촌댁은 정말로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벌린 입을 못 다무는 율촌댁 숨줄을 타고 사리반댁 전하는 말들이 우우 밀려

들어가 연기 자욱하게 부풀면서,율촌댁의 배는 만삭보다 더 무겁게 차 올랐다.

그배가 그네의 오장을 짓누른다.

사리반댁도 짓눌린다.

 

 

14. 지금이 바로 그때여

 

거멍굴을 검은 널판처럼 숨막히게 짓누르는 어둠은 오늘 밤도 어젯밤처럼 하

찮은 상민과 하천들 멱을 조이며 깊어지는데.

당골네 백단이의 오두막에는 여전히 백정 택주와 대장장이 금생이가 번갈아가

며 지키고 앉아 까부라지려는 등잔불을 연신 돋우고, 춘복이의 농막에는 옹구네

가 아직 그대로 남아서 씨근거리며 미영베 떨어진 것으로 춘복이의 피 터진 자

리를 닦아 내고 있었다.

"오살 노무 예펜네. 저년을 기양."

공배네는 속에서 부뚜질이 치밀어 금방이라도 머리꼭지까지 터져나가 버리게

생긴 속을 가까스로 눌러서 참고는

"야가 시방 마느래 다된 시늉을 허네 아조. 누구 앞에서?"

한 마디, 발을 굴러 쏘아붙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피잉하니 내려와 버린 농

막인지라, 옹구네가 그곳에 자빠져 있는 한 내 발로는 던지러서 못 올라간다.

싶어 어젯밤부터 이제나 저제나 그네가 제 집으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던 공

배네는 그예 못 참고 고샅으로 나선다.

옹구네는 벌써 이틀밤이 깊도록 아예 집안 불고하고 농막에 늘어붙어 잠시 잠

깐도 춘복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 옹구네가 와 있었그마잉. 여그서 밤 샜소? 나는 또 야가 어쩌고 있냐 싶

어 디다보로 왔제. 조께 어쩡가아? 디지든 않겄소?"

택주가 어젯밤을 만동이와 백단이 오두막에서 꼬박 밝히고는 새벽녘에야 겨우

정신을 돌린 듯 농막으로 왔었다.

그는 옹구네가 춘복이를 거의다 벗겨 놓은 모양새로 번 듯이 눕혀 둔 채, 미

영베 걸레를 옹배기에 빨아 가며 꼼꼼히 상처마다 닦아 내는 것을 보고는 순간

당황하여 계면쩍은 낯색을 하였다.

"어서 들외겨. 밤새 고생했지라우? 이 사람도 꼭 죽을라다 살어났그만. 그래도

아직 젊은디요 머. 어쩔랍디여? 터지게 뚜드려 맞는 디는 이굴이 난 뼉다구 아

닝게비? 이께잇 살덤벵이 조께 찢어징 거는 담배씨 붙여 노먼 제절로 아물 거이

고."

옹구네가 마치 춘복이 아낙이나 된 양 스스럼없이 택주를 손님으로 맞이하며,

도무지 낯가릴 것도 없이 익숙하게 그 몸을 만지는 것에, 택주는 쇠털 덮인 낯

바닥을 두껍게 구겼다.

그리고 짚이는 바 있다는 표정으로 대장장이 금생이한테 돌아와서는, 만동이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하앗따아, 그 예펜네, 비우도 좋고 솜씨도 좋등만. 까무로옴헌 낯빤대기 따악

치키들고잉 내가 들으가도 외눈 하나 깜짝 안험서 보란 디끼 조물조물, 넘의 총

각 떠꺼머리 온 몸뗑이를 기양 내가 머 괴기 만지능것보돔 더 살갑게 손 안 간

디 없이 주물름서 자빠졌드랑게. 아조 사나놈 양가랭이를 처억 벌려 놓고

지집은 그 욱에 엎어져서. 참 볼 것을 보제 못 보겼데 원. 어어이고. 내."

툇.

(침 튀어. 거그서 못 뱉고 왜 여그 와서.)

벙어리 금생이는 손을 휘저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넘어진 짐에 쉬어 간단 말도 있는디, 아매 자빠진 집에 시집갈랑갑지. 멀, 재

수있는 놈은 자빠져도 떡판으로 자빠진단디.)

"거 전에 금생이네 얌례를 그리로, 춘복이한테로 말이여, 짝지어 주고 잡어서

공배성님이 무척이나 애돌애돌 허잖었어 왜? 그때보톰도 우리만 몰랐제 저것들

이 속새로는 저러고 지냈이까?"

(그 속을 누가 알어? 들으가 봤간디?)

"그리 안 예우기 잘했제, 사참허네. 큰일날 뻔했그만그려. 숭악헌 것들한테 끼

여서 무신 꼴을 당했을란지."

(에이. 시끄럽다. 다 지내간 일 갖꼬는. 거그다가 여울라고는 당초에 맘도 안

먹었든 일을, 먹고 헐 짓이 없어서 들쳐내 헛심을 빼능가잉?)

금생이는 말을 못해도 상대의 입 모양을 보고 알아는 듣는다.

택주는 평소에 자불자불 무슨 말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농막

에서 부딪친 두 사람의 모습은 석연치가 않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그것을 본 마

음이 몹시 언짢았다.

아이 딸린 홀어미 과부가 턱없이 주제넘게 떠꺼머리 총각허고 살림 붙었다는

것만 가지고 엇눈을 떠서 그렇게 보인 것일까.

내가 왜. 내가 머이 어쩌서 숨어 살어야냐? 그 동안 숨을 만치 숨어서 너므이

눈에 띄이께미 숨 쥑이고 살었잉게 인자는 낯 내놓고 살 때도 되얏지. 천하 없

는 복송씨 껍데기도 땅속에 묻어 노먼 삭고 썩어서 싹이 나고. 밀봉을 헌 술독

아지 뚜껑도 술을 익힐 만치 익힌 뒤에는 홰딱 뜯어내 부리는 거이 세상 이치여.

재 넘으면 베려. 뜸딜이다 밥 타고. 아조 요때다 싶을 때를 놓치먼 안되제 암

먼. 앙 그래 봐라, 어치케 되능가. 복송씨, 살구씨, 수박씨. 호박씨들 모조리 다

벌거지가 파묵어 불고, 천하 명주 이강주라고 시어 터져서 개도 안 먹게 되야 부러.

나는 그런 멍청헌 짓 안헌다.

지금이 바로 꼭 그때여. 아조 마침 바람 불고, 비 오고, 천둥 치고, 번개 치고,

온갖 구색 다 갖촤서 핑계도 좋아. 바람 분 짐에 거풍허고. 비 맞은 짐에 빨래허

고, 천둥 친 짐에 약쓰고, 번개 친 짐에 콩 구워 먹으먼 오직이나 옹골지꼬잉.

근디, 내가 시방 그러게 생겠다, 내가아.

옹구네는 마치 작두 탄 무당처럼 신이 올라 두 눈이 번들번들, 두 손은 펀듯

펀듯, 온몸이 간지럼타듯 꼬이며 팽팽하게 튀어서 쉿쉿, 움직일 때마다 바람 소

리가 났다.

하이고, 참말로 옹골져 죽겄네.

너 없으먼 내 못 사는 건 못 산다 치고, 얼매나 까직이고 잡었는지 밤마동 내

가 시퍼렇게 손톱을 갈고, 저걸 내가 어뜨케 패쥑여어, 싶드니마는 거 참 알다가

도 모르겄네. 꼭 무신 귀신이 시킨 것맹이로 원뜸에서 딱 끄잡어다가 실컨 패주

능고만잉. 니가 더 직사허게 맞어야지 그것 갖꼬 되겄냐 싶드라고. 니 살 터질

때 내 살 아까워서 눈물이 다 씸뻑 나기는 나드라만, 아조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리가디끼 속이 씨연허고 분이 풀린 것도 사실은 사실이제. 허 참, 손 안 대고

코 푼다드니, 아 이 옹구네 원한을 원뜸에 율촌샌님이 풀어 줄지는 또 몰랐네.

그렁게 율촌샌님이 내 심바람헝거이제. 앙 그럴랐으먼, 엉뚱허게 죄도 없는 사람

을 왜 헛짚어 갖꼬 뚜드러 팼겄냐. 패기를, 조사도 안해 보고.

여자가 그 마음에 한을 품으먼 오뉴월 염천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앙그리여? 그

거 다 헛소리 아니라고오. 내 가심에 원한 맺힌 것 하늘이 아셧지맹. 그렁게 니

가 강실이란년한테 장개를 갈 때 가드라도 나를 살살 달개감서 가랑게. 그년한

테 미쳐서 눈에 뵈능 거이 없드니 자알 했다. 자알 했어.

그뿐인가.

까마구 날자 배 떨어진다등만, 사나놈은 디지게 맞어 뚜드려 터지고, 지집년은

넝쿨째로 굴러 들으와 내 손아구에 콱 잽혔으니 이게 웬일이여, 긍게로. 뒷골 여

시가 나를 돌아봉가아 어쩡가. 왜 그러잖이여? 무슨 일을 허자먼, 뒷골 여시가

돌아바도 돌아바야 그 음덕에 성사가 된다고. 내가 이런 날이 오기를 빌었제. 이

연놈을 숨도 못 쉬게 오그려서 내 물팍 아래다 꽉 눌러 놓고, 나도 내 세상 좀

한 번 살어 봐야겄다. 절대로 기양은 안 죽어, 아 참새도 죽을 때는 짹 허고 죽

는다는디, 내가 되야 가지고, 시르르 맹색 없이 눈물바람이나 험서 물러날 것 같

으냐? 어림없다.

강실이란 년 죽고 사는 것은 인자부텀 내 손에 달렸제. 흥, 내가 너를 살려 주

마, 목숨을 붙여 주제. 느그 둘어서 살게도 해 주고, 니가 머 이뻐서도 아니고

멋도 아니고, 너 있어야 저 멀대 같은 사나가 여그 있을 거이기에 그러능 거여.

아이고, 속 터져.

그러나 어떻게 만세상 사람들한테 춘복이와 자신이 강실이보다 먼더 만난 음

양이요, 하늘이 아는 내외간이며, 자신이 큰마누라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리느냐

가 문제였다. 아차 때를 놓쳐 버리면 그야말로, 벼락맞을 반상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처녀 총각이 어우러지는 마당에 자기 같은 헌계집 처지로 어디다 감히 혀

끝 한 번 내밀 수가 있겠는가. 안될 일이었다.

강실이가 춘복이의 머리 속에만 들어 있을 때하고, 실제로 이렇게 옹구네 집

의 방에다 눕혀 놓은 것하고는 천양지판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기가 도무지 쉽지 않아서, 논바닥 갈라지는 가뭄에 가슴

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던 옹구네는, 그만 뜻밖에도 쏟아지는 빗속에 천둥을 빌리

어 뱃속이 터져 나가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쾌재.

춘복이는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온 몸뚱이 터지지 않은 곳 없도록 두들겨 맞은 피투성이가 되어. 장독이

무섭게 올라 가지고 신음하면서. 그는 농막에 버려진 것이다. 아니, 통째로 옹구

네 앞에 던져진 것이다.

됐다.

차지하자.

이제 너는 내 것이다.

옹구네는 입안에 신물같이 고이는 회심의 미소를 남모르게 삼키며 농막으로

보란 듯이 치고 들어가, 춘복이를 독차지하고, 공배네는 얼씬도 못하게 하면서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살려 주겄다.

지극정성으로 귀신도 감복을 허게끔 돌보고 살펴서, 온전히 다 낫드락끄장. 아

무 손도 못 대게 허고 오직이 내가 너를 살려내야제. 고생이 되먼 될수락 좋겄

지. 그러먼 니 빚이 더 무거질 팅게로, 무거지고 무거져서 천산같이 무거우먼 그

것을 지고는 니가 어디로도 못 갈 거이다.

니가 지대로 일어나고 걸어댕길 때끄장 불 때 주고, 밥 해 주고, 피ㄸ어 주고,

똥오짐도 다 내가 받어내 주고 헐 거이다. 부모도 형제 동기도 마느래도 허기

쉽잖은 일, 내가 다 허고말고.

언제 어느 때 누가 와서 방문을 벌컥 열어 불지라도, 아니면 등잔 불빛 배어

나는 지게문에 비치는 그림자만 바라볼지라도, 옹구네의 지성스러움에 탄복하고

놀라서 감히 무어라 딴 말 붙이지 못하도록, 남에게 비칠 저를 생각하며, 그네는

온밤 내내 잠도 안 자고 앉아서 꼬빡 새웠던 것이다.

"아이, 옹구야. 늑 어매 도망가 부렀냐? 너 밥도 안 주고?"

공배네는 새벽부터 해나절이 다 갈 무렵까지 옹구네를 기다리다가 입술이 다

바터서, 실없이 옹구를 붙들고 한 소리 한다.

"가서 찾어와, 참말로 이러다가 어매 잃어 부릴라."

은근히 그가 농막 쪽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공배네는 옹구를 부추긴다. 그러나

옹구는 시무룩해서 들은 척도 안허고 발부리로 고샅의 돌맹이를 톡톡 건드리며

차기만 할 뿐이다.

"인자 내가 장사 한 바꾸 돌고 요담 날짜에 꼭 와서 작은아씨를 뫼시고 갈 거

잉게. 그때끄장만 여그다 뫼세 두시요잉. 이게 쥐도 새도 몰라야 헐 일인디, 일

이 참말로 굉괴시럽게 되야 부렀네요. 어쩌야여 긍게로."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심으로부터 발을 동동 구르는 기색이 역력

하던 황아장수는 종종걸음으로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훨씬 전에 거멍굴을 빠져

나갔고, 옹구네 집에는 기진을 한 강실이만 백지처럼 혼자 누워 있는데, 놀란 공

배네가 발바닥이 질척해지도록 서성거리며 마당에서 고샅으로, 고샅에서 우물가

로, 우물가에서 농막 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옹구네

는 지금 이렇게 한밤중이 겹도록 도무지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공배네는 더 못 참고 안 떨어지는 걸음을 쩌억 쩌억 떼어 놓으며 농막으

로 무겁게 걸어간다.

"성님 외겨?"

아니나 다를까.

어젯밤보다 훨씬 더 당당해진 옹구네가 미영걸레를 옹배기에 담아 들고 막 방

문을 나서려다가 마침 문짝을 열어젖히는 공배네를 맞이한다.

"자네 나허고 이애기 좀 허세."

"들으가기여. 못 올 디 외겼소? 머 새삼스럽게 내외허니라고오?"

공배네는 이기가 찬다.

이건 납작없이 덜미를 뒤잡힌 꼴이다.

"아이 옹구네. 이리 좀 들와 바. 그거 거그다 놓고."

공배네와 엇비켜 토방으로 내려서는 옹구네 뒤꼭지에 대고 공배네가 기세를

세우려고 목청을 돋우며 잡아채듯 말한다.

"아 진물이 자꼬자꼬 나서 ㄸ아도 소용이 없네요잉. 저러다 덧나먼 어쩌까아.

가만 있어 바. 이거 얼릉 후딱 빨어 갖꼬요. 시방 걸레를 하도 여러 개 베레 놔

서 이거 안 빨먼 하나도 없어어. 그렁게로."

"이리 들와 보랑게 그러네? 사람 말이 말 같잖헝가? 헐 말이 있단 말이여."

"누구 숨넘어가요? 왜 그리여? 성님이나 나는 손구락 한나 안 다쳐서 뽈랑거

리고 돌아댕기지만, 저 사람은 시방 내가 안 받어 주먼 지 똥오짐도 맘대로 못

히여. 조께 지달르시오. 내 이거 시암에 가서 빨어 와양게. 집에 머 바쁜 일 있

으먼 갔다가 니얄 오시등가."

옹구네는 탁, 소리가 나게 발을 구르며 동네 새암으로 나가고, 공배네는 뒤쫓

아가 그네의 머리끄뎅이를 잡아채고 싶은 두 손의 손톱들을 손바닥이 패이게 그

러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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