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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카지모도 2024. 10. 3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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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

 

 

13. 지정무문

 

혼인하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사돈서였다. 이는 일생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로소 각기 그여아와 남아를 성혼시키고 난 후에, 서로 얼굴도 모

르지만 시 세상에서 제일 가갑고도 어려운 사이가 된 안사돈끼리, 극진한 예절

을 갖추어 정회를 담은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면서 양가의 정의를 더욱 두텁게

하고, 자식들의 근황이며 집 안팎 대소사를 마치 같이 겪어 나가는 것처럼 이야

기로 나누는, 정성과 격식이 남다른 편지였다. 허물없는 친구에게 흉금을 털어놓

는 사신이 아니면서도 자식을 서로 바꾼 모친의 곡진한 심정이 어려 있고, 그런

중에도 이쪽의 문벌과 위신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푹격을 지녀야 하는 사돈서

, 조심스러우나 다감하였다. 궁체 달필로 문장을 다하여 구구절절 써내려 가는

이 편지는 신부와 신랑의 어머니인 안혼주들이 나누었는데, 첫 사돈서는 대개

시댁으로 초행가는 신부 편에 신부측의 어머니가 보내는 것이 정례였으며, 그에

대한 답장은 신랑의 어머니가 시집온 뒤 처음으로 친정 어버이를 뵈오러 근친가

는 며느리에게 동봉하여 보냈다. 물론 처음 것은 그리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수시

로 인편이 있을 때마다 편지를 교환했으니, 문장 필재가 뛰어난 부인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으나, 문필이 버젓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럴 만한 자리

에 가서 부탁하여 대필로 써 보내는 예도 많았다. 편지를 쓸 줄 몰라 그런 사람

도 있었고, 또 혹시 무슨 흉이나 잡히면 어찌할까, 저어한 탓도 있었다. 그래서

글씨 좋고 문장 좋은 부인들의 집에는, 멀리 보낼 사돈서를 써 주시라 청하는

안손님들이 그칠 새 없었으며, 낮의 일과를 다 마친 뒤 등촉을 밝히고 홀로 앉

은 그부인은, 밤을 새워 백지 위에 붓으로 말을 달려 심금을 적어 나갔다. 심지

어 어느 때는 한 장 두 장이 아니라 서너 너덧 한꺼번에 밀리기도 하여 온 동네

사돈서를 도맡아 쓰노라고 밤마다 밤을 밝혀 잠을 못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 무엇 하여도 안혼주 자신들이 손수 붓을 들어 먹을 적시고 한 자 한 자 바

늘땸 뜨듯이 적어 나가는 사돈서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런 편지에는 국화 무

, 매화 무늬, 용봉보다 섬세하고 찬연한 수가 놓여 정회를 꽃피웠다. 덕문화벌

(덕행이 높은 가문, 세상에 그 이름이 널리 드러난 높은 문벌)을 매양 흠모하여

혼사 맺기 원하던 중, 하늘이 헤아리사 남중호걸 사가에 태어나니 떠오르는 밝

은 해 아침빛을 두르온데, 길일을 맛택하여 혼사를 언약한 후 굴지계일(손곱아

기다리며 날 수를 헤아림) 하얍든바. 혼사 당일 날이 좋아 청색이 조요하고 일기

화락 화창한데, 일행이 무사 행차하시어 만인 좌석에 성동선녀 신랑 신부가 합

, 교배하온 후, 현서(어진 사위) 자세 뵈오니 맑은 용모 준수하심 늠름하고 현

현하여 우두머리 풍채로서 남 위에 우뚝 솟고,일월 정기 강산 기상 두 눈에 품으

시어 생기돌올 표표발월, 광채영롱 빼어남을 견줄 이가 바이 업더이다. 택서고망

(사위를 맞고자 간절히 고대하던 마음)에 흡족 넘쳐 쾌활 경사 단 이슬을 마시고

하늘에 오르난 듯 기껍사오니, 이 즐거운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하오리잇가.

선동선녀 넘노사 꽃 나비 어울리는 양을 보오니, 우리 사형제(사돈끼리 서

로 다정히 칭하는 말)가 누리는 자식 영광 인세지락이 이제서야 다른 이들에 비

등하올 듯. 혼사 초에 가득한 심회를 금할 길이 업삽내다. 날 사이 양춘 일색 봄

빛이 무르익어 먼 산 춘애 아지래이 연 두 버들 어루는데, 기체후 만복 평안하

시니잇가. 슬전에 도령씨 남자 중에 영걸로 자라오심 치하옵사며, 귀문 당내 합

절이며 겻 사돈 가내 친지 두루 무사하옵시고, 각 댁에 여러 친척 화안득하압신

가 색색향회 일일이 여쭈오니, 눌러 짐작 하소서. 차처사제도 근간 재미에 들떠

여간 질병은 감히 침하지 못하난 듯 아플 틈이 업사옵고, 외당께서는 집 떠난

지 해포인데 안신(안부를 묻는 편지. 편안하다는 소식)은 종종 하시나 귀국

못 염려옿며, 슬하 내외 현탈 업사오나 며느리는 사빈고역(바닷가의 땅에 널리

깔려 있는 모래처럼 많은 힘든 일)으로 몸이 허약해져 거동 중난이온데, 유순 부

덕이 한점 부족업난 요조숙녀라 온연 깃브오며, 기차 오남매 충실하고 무탈하여

면면공부 열심이니 홍왕이 진진하온 일 또 깃브옵내다. 여아는 달포 가량 누워

지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오며, 시속 나이사 어리다 하리까만 무무고촌 볼 것 업

는 외딴 마을에 아모 배운 것이 업사옵고 타고난 약골이라, 밧사장 채과안목 높

으신 눈에 근사하지 안으실 일, 너무나 부족하와 부끄러운 얼굴을 둘 곳 업사오

. 하온데도 우리 현서께서는 노해(언짢은 기색) 업시 만면에 화기 가득하고 덕

성 기품 은은사심이 뵈올사록 그윽하여 유중하나이다. 저희 대택(큰집) 안신은

종종 있고 평안히 계시오나 금번 일에 아모도 못 오시니 엇진 일인지 용려되고,

시외댁과 대소댁 별고 업시 지내시나, 친신(친정 소식)만은 아득하여 구름너머

먼 길 끝에 마음 홀로 헛부오이다. 사형씨요, 보내는 물건(대례 후에 신랑과 상

객 일행이 받은 큰상의 음식을 그대로 고이 싸서 시댁으로 이고 지어 보냄)

명색일 뿐 이렇다 할 것 흉내도 못 내엇스니 오직 이 같기를 부끄러이 여기업

, 고등 물가에 일체 아모 생각업시 지나다가 이렿듯 몰몰하와 사돈내 여러 어

른 낙심 섭섭하시올 일 멀리서도 생각하면 우피 참면, 다만 얼굴이 붉어질 따름

이니이다. 널브신 도량이시로 깊이 양찰하옵시기만 간절히 바라오이다. 밧사장께

옵서 머무지도 아니시고 손님갓치 훌훌이 떠나시니, 대접도 못해 드려 죄황하기

그지 업삽내다. 마음에 둔 정담이야 그칠 길이 업사오나, 분주한 중 몇 말씀을

점점 대강 긋자오니, 능문 고견 사형씨의 높으신 혜안으로 눌러 묵상하시옵소서.

을유 삼월 순이일 사제 상장

구구절절 심경을 아로새긴 명문장에 정취 기품이 깃들여진 신부의 모친이 보낸

사돈서를 받은 신랑의 모친은 이에 화답하니. 귀문존가에 진진지의(혼인한 두 집

의 사이좋은 것을 이름)를 맺어 결약한 후 정한 날이 신속하와, 만복 초례를 떠

나 보내압고 먼 길에 일기 행여 엇더할가 사념되더니, 당일 날씨 온화 난만 그

곳 향운 자옥하여 장래 오복이 창홍할 기 가득하니, 상서롭고 댜행한 일 심중에

여겨지더이다. 회편에 보내신 결속 물건, 오신 듯이 받자옵고 상하로 가득 모여

만실 희열 깃븜이 넘치는데, 굉장하신 범절에도 놀라오며 만장정찰(길고 긴 사연

에 따뜻한 정이 가득 어린 편지) 살피오니, 귀한 말씀 우러난 정이 구구이 구슬

이요, 자자이 영롱하니, 비단 위에 꽃이 핀들 이보다 더 고우릿가. 이곳 사제 옥

망기대 흐뭇 넘쳐 우매한 천견에도 황홀하압나이다. 이곳 만보부아(보배로운 며

느리) 성품이 아름다워 선성이 상하로 자자하며 듣는 이 보는 이가 모다 칭찬

칭송하니, 밧주인께서 희색이 만안하여 단순을 더 지 못하시매, 십칠 년 택부고

(며느리를 맞고자 간절히 고대하던 마음)에 조금도 모자람 업시 흡호 흡만,

상 재미와 흥겨움을 혼자다 누리시오이다. 돈아(미련하고 철없는 아들) 오면 다

시 그곳 정곡 정성스레 들을 터이다, (답례로) 보낸 물건 볼 것 업서 신사초 (

일 머리)에 허무 섭섭 하실 일이 멀리서도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나이다. 차시

춘일이 새로 압고 세상 만물 움이 트는 맹동시에 연하와 기체후 심려 신중 만수

강녕하압시고, 약약 시진처(눈으로 몸을 보아 그 변화로 병을 알아내는 곳) 업사

오신지. 밧사장께압서 해포 이가(집 떠남)하압신 일 위렴시대에 조인 용회(마음)

엇더하시리요. 신사초에 밧사장 집을 떠나 먼 곳에 가시고 여간 허성하실 것이

오나, 새서방님 특출하신 줄 든든히 믿으오며, 슬전의 젊으신 댁 내외분 허다 중

임이신 중 안녕하신지 못재 궁금하온데, 아직 농장(사내아이가 구슬을 가지고 논

다는 뜻. 즉 아들을 낳음)이 천연하심 답답하오나, 신년 길운 늦게야 손자 재롱

만년 농주(아들)를 무릎 위에 안으실 듯. 이곳 천만 가지 보배로도 비하지 못할

부아도 혼례 후에 편안히 지내온데, 옥부(옥같이 고운 살결) 방심(꽃같이 아름다

운 마음)이 수척하지 아니온지, 시어미 무능하여 잘 추스리지 못한 것이 오직 못

내 송구하옵내다. 슬전에 도령씨 삼남매 분 무양(별 탈 없이) 충장(가득 차서 씩

씩함) 심려 업스시며, 면면이 여룡여호 용 같고 호랑이 같으신 난형난제 형 아우

구별이 어렵도록 자라오심 치하 부지(엄지손가락)압고. 지촌(친정 지명) 문후와

용계(외가 지명) 안후는 자로 듣사오시와 심려 업사오시닛가. 신사초에 갓득 향

모 간절하여 부리압지 못하올소이다. 대소 각 댁이며 일가 친지들도 두루 평안

사시온가 여짜오며, 이곳 사제도 누운 통증은 업사오나 일간은 흥이 나고 재미

로와 괴로움을 모랄 듯. 밧주인 승화만득 늦게 얻은 아이를 고이 길러, 이제야

저희들 봉황상을 지어서 슬전에 있게 하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 밖에서 지내

다가도 조석으로 부아의 아담한 용모 상상 귀해 연가(너인가) 보고저 하시니 겻

보기 든든하옵고 흐뭇하오나, 돈아는 본대 무심할 뿐입내다. 늦게야 저를 길러

무무고촌에 아무 교훈 업시 자라나서, 어리석고 우매하여, 사돈네 현당 안목에

닿지 안으실 일 만망하오나, 장래 오복 기상에는 그닷 염려업스리이다. 둘째 것

무사하나 약한 몸이 말라 걱정이옵고, 숙전 종반 각각분 여전하시니 다행이오며,

시숙 내외분 여전하압신데 질부 내외 무고하여 든든. 하마 여러 종반간에 교왕

하던 중 두루 다 무사하시니 천천만행이옵나이다. 시매 평안 소식 틈틈이 듣자

오니 조이압고, 찬정 소식도 간혹 받자오니 조이오리부오이다. (보내주신 물건과

서찰에 대한) 소위 상답 명색은 모양도 갖초지 못한 것이 무무(무식하고 예절에

어두워 언행이 서투름) 초초(다듬을 새 없어서 거칠고 간략하여 볼 품 없는 모

)하오니, 사돈 섭섭하실 뿐 아니오나 부아 어린 마음에 낙심할 일 걸리오이다.

장래 오복에 무관하오니 그리 위안하시소서. 설마 물견 업슬가 하다 이덧 하오

이다. 퇴상(혼인 대례 후에 신랑,상객 큰상 물린 음식) 결속은 너모 과렴, 만당첨

(방안에 가득 찬 사람들이 눈을 휘둘러 봄) 생색이 그지업삽고, 저의 정성 명

색은 이리 초초 무색 참안하여이다. 돈아는 얼마 안여 보내 주시압기 바라오며,

사가 일택이 다 모두 안과태평하시압기 바라나이다.

을유 삼월 염팜일 사제 상장

지정무문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같이 그 혈연이 지극

히 가까운 사이에는 제문을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몸과 저 몸을 구분

할 수없이 한 몸으로 절실한 이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궁천지통을 당하여,

기우고 무너지는 설움으로 애곡도 겨운데, 어느 하가에 붓 들고 먹 갈아서 심신

을 가다듬고 문장을 갖추어 제문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리라. 그만큼 글

이란, 몸과 마음이 침착 안정, 옷깃을 여민 다음에야 씌어지는 것이었으니, 굳이

상중이 아니어도 반은 앉고 반은 서서 건 공중에 뜬 손으로 봉두난발 흩어진 머

릿결을 거꾸로 쏟으면서는 쓸 수 없는 것이 글이었다. 하물며, 앉으면 앉는다,

서면 선다는 말을 듣기 쉬운 사돈댁에 보내는 내간 간찰이랴. 같은 자식, 같은

형제라 할지라도, 출가한 딸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영위에 제문을 바칠 수

있었고, 시집간 누이는 그 오라버니 죽은 영상 앞에 한 잔 술을 올리면서 향을

사르고 제문을 지어 올릴 수 있었으니, 이는 여자란 시집가면 ''이라는 관념이

엄격한 탓이었다. 구슬인가 보배인가 슬하에 여식을 놀게 하며 애지중지 기를

적에, 추우면 덮어 주고 더우면 벗겨 주며, 울면 안아 주고 배고프면 젖을 주어

삼시로 먹는 조석 배곯잖게 밥을 주며, 쥐지 마라 터질세라 불지 마라 꺼질세라

고이고이 길러내서, ,팔월 좋은 명절 곱게곱게 입혀 내고, 침선이며 음식이며,

부덕을 가르쳐서, 삼종지도 아리땁게 그 행실 그 언동에 향기같이 우러날 때,

생이 태어나서 대사가 그 일이라 좌우로 사람 놓아, 덕망 있고 문호 좋은 어느

가문 낭자 누구 용모도 준수하고 인품도 남다르다 말을 듣고, 청혼,허혼 왕래하

여 모년 모일 길한 날에 연지 찍고 곤지 찍어, 오색 원삼 칠보 족두리 활옷 입

고 성례하니. 그 시가 바로 친정과는 ''되는 시였던 것이다. 그처럼 길러 낸 딸

을 이제 남으로 만들고 말 만큼 시속의 법도가 엄중한데, 그 딸이 들어가 살

집안의 시어머니에게 보내는 사돈서가 어찌 간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혼례 후에 처음으로 우귀하는 여식의 품에 넣어 시모주 전에 보내는 첫 사돈서

, 그 이후 주고받는 사돈서들과는 감회와 격식이 사뭇 다르다 할 것이다. 청암

부인이 열아홉에 소복을 입고 친정에서 떠나올 때, 비단 휘장 구슬 주렴 청, ,

, , 백 열두 번을 감고 늘이운다고 누가 나무랄이 없는 신행길이언만, 횐 두

껑에 허연 휘장, 상청, 상막 같이 두른 가마 흰 덩을 타고, 이고 진 퇴상 물림

대신 이바지 고리지고 하님들이 줄을 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소리고 웃음

소리도 없이 다만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을 데불고 왔었다. 그네는 엊그제 대례

를 올린 꽃 같은 신부였으나 또한 바로 상부를 하고 만 청상의 여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홀로 된 신부는 시댁으로 시행 갈 때 골수까지 시리게 흰, 흰 덩을 타고

간다. 녹의 홍상 떨쳐 입고 연지 분내 은은하여 복사빛 감도는 새 각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죽은 듯이 그 색으로 살아야 하는 흰 옷을 입고 간다. 그에

게는 이제 삼라만상 온갖 색색 오만 가지 빛깔이 무색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빛, 오채보다 찬란한 색, 남편을 잃은 그가 하늘 아래 누

릴 수 있는 색은 이제 없는 것이다. 해가 사라진 세상에 그해의 부스러기에 불

과한 산천초목 꾀꼬리에 풀잎 꽃잎 색색깔이 무슨 소용 있으리오. 사람들은 신

부를 일러 꽃 같다 하고, 갓 시집온 새각시 고운 자태 꽃 각시라 부르며, 이팔을

지나 물오른 나이를 두고는 꽃다운 나이라 하지만, 청암부인이 그 친정인 청암

에서 신랑 요절의 흉보를 받고, 어제같이 합환, 교배 나누어 마신 술의 술잔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온 얼굴을 적시며 흐르는 눈물 제대로 닦지도 못하면서 갈아

입은 옷이 소복이었으니. 청천에 날벼락으로 흰 등걸이 되어 버린 열아홉 살 연

기 아직 어린 자식을, 시모주도 아니 계신 집안에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에게 배

우라고, 장자 잃은 편시부와 십여 세 유아 시동생만 덩그랗게 앉아 있는 시댁으

로 보내는 모친의 심정은, 차라리 가슴을 갈갈이 갈라내어 찢는 것이 덜 아플

것만 같았다. 그런 정황에 시모주 계시다 한들 무슨 사돈서를 쓸 수가 있으리오.

더욱이나 매안 사가에는 신랑의 모친 대신 안혼주가 되었던 보쌈마님 김씨부인

이 내당에 있었으니, 비록 한 장의 종이에 인사로 몇 자 적은 서찰에 불과할지

모르나, 붓을 들기 차마 난감한 지경이었다. 허나 큰일에는 반드시 형식이 있는

지라, 아무리 황망중이라 하나 시늉만 하는 한이 있어도 그 형식을 결할 수는

없었다. 청암부인의 모친은, 이 측은하고 참담한 여식이 어머니를 생각하여 오히

려 울지도 않고 우뚝한 기둥처럼 단정히 앉아 하직의 인사를 여쭈려 할 때,

난 밤에 써 두었던 사돈서를 떠나가는 딸에게 건네주었다. 이와 같은 일을 당하

면 남이라도 먼 곳에서 문상,부조를 하러 올진대, 딸 보내는 사가에 안사돈으로

서 위로의 말씀을 간곡히 적어 전하는 것은 사돈서라는 명목이 아니어도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형상이 기구하여 이 서찰을 받을 이가 망자

의 모친도 아니요, 그를 기른 계모도 아니며, 하다못해 만자에게 젖을 먹여 주었

던 유모도 아닌, 아직 그 집안 식구라고 섞삭기에는 낯설러 어색한 보쌈의 부인

이었으니, 편지를 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결국은 의례를 갖추는데 그치고 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 같은 일을 신랑의 생모가 당하였더라면 그 흉중,

그 참척을 누가 감히 위로할 수있었을까만, 그렇기 때문에 딸자식을 그 자리로

보내는 이쪽 어미의 서럽고 암담한 심곡을 울어 울어 적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리하지 못한 채 여식은 홀연 통곡을 삼킨 뒷 등을 보이고 흰 가마

에 올랐으며, 그네가 품에 품고 간 사돈서의 회답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안에 당도한 청암부인은 열여섯 어린 부군의 영연에 조석 상식 애곡으로 올리는

, 마치 자부 오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망자가 된 신랑 준의의 부친

시부가 아들 뒤를 따라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삭은 나무가 푸석 무

너지듯이 어이없게 운명한 그를 보고 문중에서는

"내 그럴 줄 알았다."

고 침중 무거운 음성으로 말들 하였다. 상부 한 가지 일만으로도 참절하여 그

비참한 정경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 위에 다시 시아바님 초종을 비절하게 치

른 겹상주 청암부인이 어느 겨를에 친정으로 나들이하여 근친을 갈 수가 있었겠

는가. 삼년상을 마치고 난 후에라도 가면 못 갔을 리 없을 것이지만, 그때는 오

직 살을 헐어 땅을 메우고 뼈를 깎아 기둥을 세워야 하는 절박함에 한 걸음을

옆으로 뗄 겨를이 없었으니, 시속에

"시집가서 첫아이를 낳도록까지 친정에 근친을 못 오는 딸은, 나중에 대문으로

못 들어오고 개구멍으로 들어와야 한다."

는 말이 있는 것을 그대로 따른다면, 청암부인은 이제 친정으로 근행을 간다 해

도 대문으로는 못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에도 예외는 있었다. 시부모 상

을 당한 경우이다. 그때만은 삼년상을 다 마치도록 소식 없이 지내어도 허물하

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초상이 나고 성복한 뒤 신

주를 마련하여 위패로 모신 그 날부터 상기가 끝나는 탈상 때까지, 아침 저녁으

로 상식을 올리면서 언제라도 제물을 차려 놓고 그 앞에 제문을 읽어 드릴 수있

었지만, 대개는 소상과 대상때, 제사 드는 날인 입제일 초저녁에 치전을 차려 놓

, 촛불 향불 일렁이는 앞에서 구슬픈 가락으로 읽는 것이 제문이었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그 제문 한 장을 짓지 못하엿다.

"지정무문"

그 한 마디로 심정을 대신할 수 있었을 뿐. 내외간이라 할지라도, 조선 명종 8

이월에 스무 살 나던 권문해는, 스물네 살 나는 곽명의 외동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조 15년 유월에 일생 삼십 년을 동고동락,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며 살

던 아내를 잃고, 그해 구월에 구십일장 장사를 지내면서 돌아간 아내 앞에, 죽음

을 슬퍼하며 그 비통하고 참담안 심정을 글로 적어 뼈에 사무치는 제문을 바치

기도 였건만, 제망실 숙인곽씨문 본디 부부간이란 하늘이 정하여 마련한 바이며

오륜의 첫째로서, 생민의 비롯이요, 만복의 근원이라 하는 바이니 인륜에 가장

소중한 것이외다. 내 나이 이십이요, 그대 연세 이십사일 적에 하늘이 우리를 짝

지어 주셨으매, 그때가 계축년 이월이었소. 엄전한 모습과 아름다운 덕을 지녀

집안을 화평하게 하고 부녀의 도리를 다하여, 짜증을 부리거나 시샘하는 것을

우리가 부부로 만난이래 삼십 년 간 나는 한 번도 보고 듣지 못하였소. 오호,

러워라. 나는 맏아들이요, 그대는 외동딸로 나의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 귀밑머

리가 희어지도록 우리는 유자유녀 아들딸 두기를 바랐으되 한 아기도 보지 못하

였소. 조용히 하늘의 이치를 헤아리니, 나무도 열매가 있고, 풀포기도 씨앗이 있

, 물고기도 새끼를 치며, 메뚜기도 알을 까는데, 어찌하여 하늘은 우리에게 은

혜를 베풀지 아니하여 후사를 걱정하게 하시는고, 그대와 나 마주앉아 허전한

무릎이 비어 외로운 것을 탄식하며 원망하기도 했었소. 아아, 그러나, 속담에 자

식 두지 못한 이는 수를 누린다고 하길래 오래도록 해로할 줄 믿었더니, 어찌하

여 조그만 병을 못 이기어 갑자기 세상을 버리신고. 연세 오십을 넘었으니 짧았

다고는 못하려니와 팔십 노모가 계시온데 어찌 미리 떠나는가. 아침 저녁 어머

님 봉양과 맛있는 음식 받들기를 이제 누가 할 것이며,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

는 누가 있어서 어머니의 초종을 치를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하염없는

눈물이 샘솟는구려. 나무와 돌은 풍우에도 오래 남고, 가죽나무 상수리나무 예대

로 아직 살아 저토록 무성한데, 그대는 홀로 어느 곳으로 간단 말가. 서러운 상

복을 입고 그대 영궤 지키고 서 있으니, 둘레가 이다지도 적막하여 마음 둘 곳

바이 없소, 얻지 못한 아들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날 가면서 성장하여 며느리

도 보고 손자도 보아, 그대 앞에 향화 끊이지 않을 것을. 오호, 슬프다. 저 용문

산을 바라보니 아버님의 산소가 거기인데, 그 곁에 터를 잡아 그대를 장사 지내

려 하오. 골짜기는 으슥하고 소나무는 청청히 우거져 바람 소리 맑으리다. 그대

는 본시 꽃과 새를 좋아했으니 적막산중 무인고처에 홀로 핀 진달래가 벗 되어

드릴게요. 거기에서 그대는 시아버님을 모시겠지요. 그리고 친정아버님의 무덤이

멀리 상주에 있다고 걱정하지 마소. 부녀의 삼종지도는 이승과 저승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며, 상주와 이곳 예천은 혼백이 왕래하기에 그다지 멀지 아니하리니,

이 서로 만남은 물이 흘러감에 상류와 하류가 서로 이어지는 것과 같으리이다.

이제 그대가 저승에서 추울까 봐 어머님께서 손수 수의를 지으셨으니, 이 옷에

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 만세를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이다. 오호, 서럽고

슾프다. 삶이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 같고, 사물이 비롯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마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

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 소리 한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

퍼할 말 마저 잊었다오. 상 향. 흘러내리는 애루를 금할 수없게 하는 이 제문을

혼백이 들었다면, 홀로 가는 저승길을 외롭다 하지 않고, 홀로 누운 무덤 속을

무섭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제문으로 혼백의 마음을 덮어, 식은 자리 차디

찬 땅 속의 검은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럴 수있을

것이다. 귀신과 사람이 서로 마음을 부르며 감응할 만한 지극함으로 그 글월이

씌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그리하지 못하였다."

청암부인은 탄식하였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망부 앞에 한 장 소지로 타올라 한

점 불꽃으로 스러져 갈 제문 대신, 부인 한 생애의 필로 감긴 백지 위에 온몸으

로 먹을 갈아 뜸을 뜨고 문신하듯 한 획 한 획 제문을 지어 바친 것인지도 모른

. 그리고는 이제 죽어 무덤 깊이 몸을 묻고 육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탈은 바로 소지였다. 한 번 남편을 잃어 사별한 여자는 그 나이 여하를 막론하

고 다시 남편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엄격한 법도였다. 그래서 만일 그

집안의 딸이고 며느리고 간에 과부가 개가를 하면, 제 아무리 명문 거족일지라

도 하루 아침에 벼슬길이 막히고 그 가문의 명성조차 보존하기 힘들었다. 그러

니 자연 행세하는 가문에서는 수절하는 과부를 구중심처 깊은 곳에 겹겹이 가두

어 두고 바같사람은 일체 만나지 못하게 하여, 그 안에서 홀로 죽은 듯이 살아

가게 하였다. 그것은 산 채로 무덤 안에 들어얹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세월

이었으나,감히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멸문의 화를 입어 한집안이 다

몰락하는 것보다는, 가련하고 불쌍하지만 사람 하나 죽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

문이었다. 거기다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여인이 스스로 자진하여 열녀가 되

, 나라에서 정문을 내리고, 비석을 세워 주며, 그 집안 가문에 영화가 이르도

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어느 집안에서는 심지어 과부가 된 며느리가 그저

수절만 하는 것으로는 아니되어, 음으로 양으로 자결할 것을 은근히 종용하였는

, 결국은 그네가 먼저 죽은 지아비의 무덤 곁에서 은장도 푸른 비수로 목숨을

끊고 만 일도 있었다. 그네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더운 선혈은 차디찬 무덤의 봉

분을 적시며 어두운 지하로 스며들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상께서는 열녀

정문을 하사하고 홍살문을 세웠으니, 겉은 알고 속은 몰랐던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사람 그런 일만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전에 전에 옛적에, 한 백 년인가 백오십 년 전인가, 어느 고을 아무네 집에 젊

은 청상이 하나 살았더란다. 그 시아버지는 항상 매일 밤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

고 집안을 돌면서 살펴보고 있었더래. 그러던 그 어느 날 밤,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하고 초생달은 희미한데, 며느리 방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고 누군가와 소

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오더란다. 의아하게 생각한 시아버지는 며느리 몰래 문

틈으로 안을 엿보았지. 그런데 며느리가 베개에다 죽은 남편 옷을 입혀서 마치

신랑처럼 꾸며 놓고, 마주앉아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흉내를 내고 있더라지 않냐.

그렇게 온 밤을 새우더래. 그것을 본 시아버지는 그만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

후에 곧 그 며느리를 아무도 모르게 개가시켜 멀리멀리 북쪽땅 끄트머리 어디로

보내 놓고 그 종적을 덮어 버렸단다. 그런데도 사람 눈은 무서워서 동리 사람들

이 차츰차츰 이 사실을 하나둘 알게 되고 끝내는 관아에까지 소문이 들어갔구

. 결국 그 집안은 문벌의 이름조차 보존하기 힘들게 됐더란다."

하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매안 이씨 가문의 선대 할머니 가운데는 이

런 분이 있었다. 청상 과부가 된 이 며느리는 밤마다 등잔불 밑에서 동그란 엽

전 한닢을 방비닥에 데구루루 굴리고는 방바닥을 헤매면서 더듬어 찾는 놀이로

하염없는 세월의 긴긴 밤 지겨움과 고독을 달랬다 한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년이 지나가고 이제는 그 청춘이 다 지나갈 무렵, 엽전에 새겨진 글자

는 물론이고 둥근 윤곽마저 모지라지게 다 닳아져 엽전은 얇은 종잇장같이 되어

버렸다. 그 애달픈 엽전닢은 남평 이징의의 집안에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개 댁 과부는 바늘로 발을 찌르면서, 지루하고도 긴 밤의 외로움을 이긴다

더라."

는 이야기는 이 집 저 집에 참으로 흔하여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신랑옷을

입은 베개와 닳아지는 엽전 한 닢, 그리고 바을 한 개. 이 눈물나게 헛되고 하찮

고 작은 것들 하나에, 자신의 공규 독방, 그 질리게 무겁고도 서리서리 끝도 없

는 생애의 시름을 쓸어 안아 부리면서, 혼자 된 여인들은, 살았으나 이미 비어

버린 목숨을 가까스로 지탱해 나갔던 것이다. 아아. 천산에다 쇠기둥를 박고 동

아줄로 비그러매도 인간이란 검불같이 흩어지기 쉬운 존재들이거늘, 어찌 그 한

생애를 베개 하나, 엽전 한 닢, 그리고 바늘 한 개에 의지하여 버틴단 말인가.

젊은 청상 청암부인은 머리맡에 칼을 놓고 잤다. 잘 갈아서 푸르게 날이 선 낫

같은 칼 두 자루를 머리맡에 사람 인자로 놓아두고, 사람 기척 없는 빈 방의 찬

자리에 차가운 이부자리를 펼치는 그네의 온몸에는 상도에 돋는 서릿발이 베이

게 어려 있었다. 십장생 백수백복 꽃 병풍을 두르는 대신, 시퍼런 칼의 쌍날을

머리 위에 관배처럼 두른 채, 반은 자고 반은 깨어 그네는 한 세월의 밤을 보냈

. 아녀자로서 그네는 결코 고운 외양이 아니었다. 장대하다 할 만큼 큰 키에

우뚝 솟은 어깨, 그리고 오악이 분명하여 넓은 이마와 두드러진 양 광대뼈에 두

툼하고 긴 코, 풍요로운 턱을 두루 갖춘 얼굴은, 나이 아직 꽃다웁다 하되 아리

따운 모습이라기보다 제세 호걸의 풍모를 띠고 있었으니, 누가 미색을 탐내어

문지방을 넘지는 않으리라 얼른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경솔한 판단이요,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어서 그네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칼날

은 무엇을 '잃지 않으리라'는 마음이 아니라 '지키리라'는 결연한 각오 위에 '일으

키겠다'는 다짐을 세우게 하는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뼈로 내 몸을 일으키리라."

고 그네는 각골하였었다. 깊은 밤 사위가 잠들어 세상이 어듬 속으로 침몰하여

가라앉을 때, 그네의 방 머리 위에서는 인광이 돋아 야광처럼 새파랗게 비치는

칼날이 서슬 시리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광배 같기도 하였다.

"그 어리고 젊은 날부터 이날까지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자는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었소?"

후년에 둘다 나이 웬만큼 들어 수굿해졋을 때, 한 번은 김씨부인이 청암부인에

게 물었다. 청암부인은 그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첫재는 바로 내가 제일 무서웠고, 둘째는 사람도둑이 경계되었고, 셋째는 양상

군자였지요."

김씨부인은 그 세 말을 다 알아듣고 같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연하고

쓸쓸한 미소였다.

"나는 그 중 셋째는 염려할 일 없었으나, 둘째 것은 당해 버렸으니, 자연 첫째

것은 말에 담아도 소용없게 되었소그려."

보쌈으로 업혀 온 김씨부인은 매안의 안방에 겨우 얼마 기거하지 않아서 어이없

게도 다시 새로 만난 이의 초상을 치르고 말았기에,

"내 생전에 상부 삼년상만으로는 모자라서, 거푸 삼 년을 또 이어 복을 입고 보

, 죄 많아 여자로 난다는 말도 호강으로 들립디다. 그냥 남 사는 대로 살 수만

있다면 뼛골이 빠진들 고생이 무슨 못할 일이며, 층층시하 그 무엇이 어려운 일

인가 싶어지고. 갈퀴발에 짚세기 신고 흙바닥에 잠을 자도 그 사람이 외나 나보

다 더 달게 사는 것만 같아서. 오죽허면 내외 지어 자식 달고 빌어먹으로 다니

는 동낭치를 다 내가 부러워했다우. 너는 복이 많은 삶이다. 허고."

그리고 김씨부인은 도 말했었다.

"차라리 칼을 물고 죽을 것을, 나는 훼절까지 했는데도 또 다시 연이어 초상을

치르니, 내가 모진 사람인 것 나도 알었소, 허나, 그렇게 보쌈에 업힐 때는,

첫 번째 무서움에 내가 졌을 것이요. 아마."

그런데 청암부인도 하마터면 흉흉하고 수상쩍은 일에 말릴 뻔한 일이 있었다.

그네를 보쌈하려 은밀히 공론한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하루는 안서방이 황급히

와서 귀뜸으로 일러 주었던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상하가 엄중하니 평상시라

면 감히 어느 앞이라고 안서방이 운을 뗄 수 있는 말일까마는, 당시의 처지로는

좌우정황이 그건 것을 가릴 계제가 못되었다.

"용모가 염려 단아 아리따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나이 열아홉 스물의 방년에

초례만 치르고 홀로 되니 새사람이나 다름없었으며, 길러야 할 일 점 혈육도 없

는데다가, 무엇보다도 그 친정 가문의 학문과 도덕이며 매안 시댁 문벌의 빛나

고 장함이 이 청상을 바르고 깊게 가르쳤을 것이니, 가모를 얻는 데 이보다 더

한 보배가 어디 있으랴. 더욱이나 본인의 천품이 타고난 기상 있고 크게 빼어난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마당에 그만한 사람을 어디 가서 다시 구하리. 일단

그 집 안방에서 대문 밖까지만 둘러씌워 업고 나오면, 그때는 도리 없이 이 집

사람이다."

저쪽에서 모의했다는 그 공론은 맞는 말이었다. 밤이 깊어 이슥할 때 실한 장정

몇 사람이 홑이불을 감아들고 감쪽 같이 담을 넘어 과수의 집으로 들어가, 요령

있게 방문의 문고리를 소리없이 따고, 단걸음에 떼로 덤벼 홑이불을 덮어씌우면

"아악"

비명을 지르지 않을 사람 어디에 있겠는가. 그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집안 식구

들이 몽둥이야 작대기야 휘두르며 이 불한당들을 후려쳐 좇아내려 달려들고,

쌈하러 간 사람들은 어떻게든 안 뺏기려고 격투를 벌이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

도 그 집 대문만 넘어서면, 집안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불한당들을 쫓아 나오지

않았다. 도둑을 맞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체념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 집 울타

리 안에서 훔쳐 업은 과수를 뺏기게 되면 그 과수댁 훔치러 갔던 사람들은 혼비

백산 흩어져 달아났다. 그냥 있다가 잡히면 관아로 끌려가 치도곤을 맞는 때문

이다. 이렇게 습격을 당하여 업혀 온 청상 과수는, 그 남자와 사는 것을 운명으

로 돌리어 아무 반항하지 않고, 그를 남편으로 맞아 섬기고 살았다. 그런 보쌈을

하려고 어느 집 사람들이 남모르게 궁리한다는 말을 들은 청암부인은, 그날로

문중의 부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일찍이 하늘에 얻은 죄가 있어 그 정해 주신 배필과 해로하지 못하고 청

춘 소년 아름다운 나이에 무참히 중동이 꺾이어 소천(남편)을 잃었으니, 그것은

나의 박복한 운명일 뿐 남의 탓이 아닙니다. 허나, 단 사흘을 만났어도 그 인연

이 지중하고, 설령 사흘까지 못 누리고 초례청 교배상 앞에서 그가 비명에 운명

했다 하더라도 부부 인연 지중하니 소홀히 못할진대, 나는 매안의 이씨 문중 대

종가 종부로서 그 나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책임을 맡은 사람이 되어 있으매,

불행히도 위로 구고(시부모) 아니 계시고 아래로는 슬하에 한 점 혈육 없으나,

책임만은 중중하여 양 어깨가 무겁습니다. 대저 종가란 문중의 큰집인즉 가문의

어버이요, 장형이어 마땅한데, 지금 우리 문중 이씨 가문, 어느 집을 의지해서

지붕을 삼고 누구를 의지해서 기둥을 삼을 수있으리오. 적막하게 비어 버린 고

가는 폐옥이 다 되었으니, 이 사람 종부라고 명색 붙여 앉아 있기 참으로 민망

하오이다. 문짝도 바로 없고 댓돌에도 망초 나서 안이나 밖이나 구분하기 어려

운데, 엎친 데 덮친 격이고 눈 위에 또 서리 내리는 일이 생길까 저어되어 모이

기를 말한 것입니다. 내 입으로 담기 해괴하고 우스우나, 건넛마을 아무 동네 모

씨들 집안에서 날을 잡아 나를 보쌈하러 온다 밀의가 있다 하니. 그 같은 일이

라면 반가의 부녀로소 비록 낭설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들은 귀를 씻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이렇게 거꾸로 외장치고 불러 모아 널리 알리는 까닭은, 만일 만에 하

나 그런 일이 자행되어 불미한 발자국이 이 집 마당을 더럽히고 소란스럽게 한

다면, 설령 그들을 쫓아낸다 해도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토록 허술

한 종가가 어느 문중에 있으리오. 남루를 뒤집어 만인 앞에 보이는 일이 분명합

니다. 뿐만 아니라 참담하게도 나를 비끄러 묶어 메고 여럿이 둘러 업어 이 집

대문을 나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는 사대가에 있을 수 없는 수모이니 의당 나

는 죽으려니와, 이 집안 이 가문은 종부를 도둑맞은 얼빠진 족속이라 손가락질

면치 못할 것이 억울하여, 나는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칼이 비록 날섰다 하

나 솜방망이도 여러 대 뭉쳐지면 그 날이 빠질 수 있듯이, 내 비록 서슬을 세우

고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여러 장정 덤비는 완력을 부녀의 힘으로 못해 볼 일

도 없지는 않을 것이라. 여러분께 소청할 일 있습니다. 이 집이 명색 종가라 하

지만, 남노여비 허울뿐이고, 호제 행랑것들 한 방에서 기거할 수 없으니 여러 부

인들 가운데 사정이 닿으시는 대로 번을 갈라 아무라도 오늘밤부터 이 집으로

올라오셔 나와 함께 한방에서 잠을 같이 주무시면 좋겠습니다. 한 분이라도 좋

고 두 분이라도 좋고 더 있대도 좋은 일이지요. 저녁 잡숫고 올라오시면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해도 즐거울 것이요, 둘러앉아 고치를 감어도 재미있을 것입니

. 사람 소리 어근버근 불빛이 휘황한데 어느 도적이 홑이불을 추켜들고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던 그날 밤에 연세 지긋한 노부인과 마침 집에 일이 없는 숙항,

질항 부인들이, 그네와 함께 자려고 종가의 안방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금방 스

치기만 하여도 베일 것 같은 푸른 날의 칼을 보았던 것이다. 아하, 그러하구나.

그 칼날에 문득 보는 이의 가슴이 선뜩해지는데 어느결에 그 베이어 쓰라린 자

리에 핏방울 맺히더니, 핏방울은 그만 소름이 되었다. 아하, 그러하구나. 그렇게

문중의 부인들이 같이 자기 시작한 지 얼마 후에, 야심한 한밤중이면 몇 번인가

고샅이 어둠 속에 수런거리고, 담 아래 우세두세 목소리 낮춘 음성들이 들리곤

했었다. 그러다가 스물다섯에 이기채를 양자로 들이었는데, 그 종적 모를 소리들

은 그래도 아주 멎지는 않았다. 그리고 청암부인도 잠의 머리맡 칼을 치우지 않

았으며, 모여서 자고 가는 노부인과 숙질,동항의 부인들도 번갈아 동무하기를 그

치지 않았다. 예로부터

"불효지죄가 삼천이로되 막대어무후"

라고 하여, 삼천 가지 불효 중에 대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하면 자손으로서 조

상에게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들을 두지 못했을 때에는 생전

이나 사후를 막론하고 동성동본의 유복친 중에서 항렬에 맞추어 사내아이를 데

려다가 그 가문의 계통을 잇게 하는 것이 양자였다. 양자를 가면 그 생가에서는

출자가 되고, 양가에서는 계자가 되어, 양부모에게 호부호모하고 양가의 계통을

이어받는다. 그런데 일단 양자를 했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파양하지 못하며, 이것

을 어기면 신분에 따라 응분의 제재를 받았다. 또 형망제급이라고 하여 형이 아

들 없이 죽으면 아우가 맏아들로 양자를 삼기도 했다. 그럴 때 아우에게도 외동

아들인데 형에게 계후하였으면, 그 아우도 양자를 해와서 입후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상의 향화를 끊지 않고 제사를 받들며 가업을 계승하는 것이

일반적 규범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맏아들은 양자로 갈 수 없느데, 혹 아들이 여

럿이라도 남에게 양자 주기는 꺼려지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 양자를 할 때에는

보내는 집안과 받아들이는 집안 사이에 문서가 있어야만 되었다. 그리고 증인도

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관의 허락도 반드시 받아야 했다. 주고받은 양가의 부

모 중에 어느 한쪽이 죽고 없을 경우에는 종중이 입증하여 관에 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절차를 밟아서 확실하게 일을 성립시켜야만, 부모의 마음이 변하거나 혹

나중에 귀신 와도 꼼짝못한다."

고 하였다. 비록 산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간 사이라 해도 아들을 주고받는 일

만큼은 신중하고 까다롭고 철저하게 했던 것이다. 청암부인도 이기채를 양자로

들이면서 기채의 생부요, 준의의 아우인 병의에게 계후 입안을 하고

"이준의가 그의 몸에 적첩간에 모두 아들이 없어서, 아우 이병의의 장자 이기채

를 양자로 삼고자, 두 집안 곧 준의와 병의 형제 집안이 뜻을 같이 하여 소지를

바친다."

는 내용의 정장 문서를 썼다. 이준의소지내 의신적첩구무자 돗생제병의 제일자

기채 욕위계후 양가동의정장 그리고는 위소지가 틀림없이 확실한 합의로 올려지

는 것이라는 문중 증인의 말과 이름을 앞앞이 적어 몇 장의 기록으로 남겼다.

하여 원본을 소중히 간직하고, 필사본을 병의에게 주었으며, 만일을 몰라 다시

한 벌을 더 베끼어 문장어른에게 맡기었다. 분실할 경우나 불이 났을 때를 생각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청암부인 신행길에 흰옷 입고 빈 집으로 들어서서, 어서

오란 말 대신에 명부의 오적한 연기로 맞이하는 신랑의 영전에 쓰러지며 엎드

, 그 한 생애에, 낳지 않은 자식을 하나 어엿하게 낳아 핏줄을 이어 놓고,

제 그네도 한 줄기 향연되어 혼백이나마 한데 섞이고자 오직 육탈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육필이 임리하여 잊지 못할 신랑의 몸으로 알고, 평생 동안 고이 받

어 간직해 온 혼서지를 곱게 접어, 저승가는 종이 신발 만들어 신은 그네의 발

이 시리다. 한기가 기친 탓이다. 무덤의 옆구리가 열린 것이다.

 

 

14. 매화 핀 언덕이면 더욱 좋으리

 

"다 되야가는 거잉가?"

만동이는 시퍼렇게 얼어붙은 달빛이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무덤에 붙어 구

부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백단이한테 묻는다. 그 목소리도 얼어 있다. 몸뚱이

는 결결이 속까지 얼어들어 한기를 이기지 못하겠는데, 이마에만은 진땀이 소름같

이 돋아난다. 진땀은 배짓이 돋으면서 그대로 얼어, 이마가 썬득썬득 시리다.

의 손은 이미 아까부터 푸르딩딩 남의 손이 다 되어 버렸는데 손가락은 마디마

디 툭, , 부러져 떨어지게 곱아서 더 흙을 만지기에 아슬아슬하다. 그것은 추

운 탓도 있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속이 떨리는 탓이 더 켰다. 바깥에

서 끼치는 엄동의 추위는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두려움에 비하면 오히려 별

것 아니었다. 백단이는 그런 만동이에게 대답 대신, 헐어 낸 무덤 옆구리 흙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생흙이 아니고 한 번 뒤집혔다가 봉분을 만드느라고 밟

아 다진 흙인지라 아무래도 찰기가 없는데, 그나마 헐어 냈던 흙을 맨살로 혹한

에 내놓았다가 도로 집어 넣는 것이라, 도무지 마음같이 얼른 일이 끝나지지 않

았다. 그렇다고 대강 해 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배고픈 밤여우는 단단하기

바위 같은 봉분도 주둥이로 후벼 파서 못된 짓을 하는데, 이처럼 한 번 자리가

난 무덤이야 덤벼들지 못하랴. 뼈다귀를 도둑맞기는 일도 아닌 일이었다. 뿐 아

니라 누가 봐도 감쪽 같게 일을 해치우려면, 다른 것은 몰라도 무덤 주변에 흙

무더기가 흩어져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한 번 헐어 낸 것은 무엇이든지 원

래대로 해 놓기 쉽지 않아서, 백단이는 구멍 속에 발을 집어 넣어 꾹, , 밟다

가 또 손으로 다지다가, 만동이 보고도 밟으라고 하였다. 만동이는 백지에 싼 아

비 홍술의 뼈를 투장하여 집어 넣은 무덤 옆구리 구멍에 오른발을 들이밀 때,

그만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힘껏 다리를 홱 잡아채는 것만 같아 등골

이 오싹하였다. 그리고 온몸이 휘청하여 일른 그 발을 뽑아 내고 말았다.

"아이고, 나는 못허겄네."

"원 저런, 아 머이 무섭다고 그러시오? 압씨(아버지) 유골인디."

"긍게 말이여."

"따땃허게 꽉꽉 밟어서 바람 못 들으가게 해야지 무단히 허성허성 버그러지게

해 노먼, 여시가 달라들어서."

"어이 참, 그만허소."

"꽃각시맹이로 이뿌게만 생게 갖꼬는. 이리 나오시오. 어디 바아, 내가 허게.

씨도 아들이 밟어디링 거이 낫제 요렇게 메느리가 밟능 거이 낫겄소? 앙 그리

?"

백단이라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본디 제 남정의 성정을 아는데다,

자신도 무서움이 전신에 끼쳐 자꾸만 속이 후드르르 떨리는데, 같이 질리면 그

공포를 이겨내기 힘들 것만 같아서, 그네는 일부러 대담하게 덤비며 농담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독아지의 얼음이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다가 점점 그 동그

라미를 좁히며 한가운데로 얼어들 듯이, 정월 대보름 밤의 시린 달빛은 마치 목

에 씌우는 큰칼처럼, 만동이와 백단이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아이고, 저 달은 없는 거이 낫겄네. 하도 훤헝게 기양 대낮맹이어 갖꼬 누가 보

까도 싶으고오."

어째 무엇이 더 무서워 보였다. 달빛이 비친 곳은 시리게 시퍼렇고, 응달진 곳은

차라리 칠흑같이 어두운 것보다 더 음산한 귀기로 그림자를 시커멓게 드리우고

있어. 둥글 둥글, 여기저기 둥근 몸을 누인 무덤의 봉분들이며, 우뚝 우뚝 몸을

세운 비석들, 그리고 그 비석 옆의 호석들이 소나무 쓸어내리는 달빛과 바람 소

리 속에 귀신처럼 서 있는 것들은, 이렇게 굳이 그 발치 아래 남의 부인 묘를

파헤치고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보기 오금이 붙을 일인데, 이처럼 밀장을 하

고 있는 두 사람으로서야.

"뵈기는 누가 본다고 그리여? 아 누가 멋 헐라고 이 오밤중에 꺼덕꺼덕 산소를

오겄소? 밝은 날 다 두고."

"그래도 사람 일을 누가 앙가? 왜 자꼬 뒤꼭지가 캥게서."

"잡아땡기는 것 같소?"

"하이고. 효도가 쉬운 지 아능게비?"

"에러운 지 아는 사램이 야물게 잘히여."

만동이는 백단이 옆에 쭈그리고 앉고, 백단이는 만동이 대신 봉분을 메워 나갔

. 무당 서방은 헐 지 아능 거이 없네이. 피리 불고 장고 치고 잽이 노릇허는

것배끼는. 아이고 참, 또 있기는 있그만. 주막에 나가면 아조 새악씨들이 사죽을

못쓰게 만드는 재주 있네. 그재주가 있어. 당골들이 본대 투장을 잘 안헝가잉?

그렇게 다들 멩당 옆구리 따고는 쑤시고 들으가는 거이제. 들으가능가아 딜이보

내능 거잉가아. 하이간에 그렇게 밀어너서 양반허고 한 묏동에 동좌석허고 너냐

나냐 누웠잉게, 멩당 기운도 어쩠든지 받을 거 아니라고? 그래서 당골네 자식들

은 너나없이 모다 곱상허니 생김새 매꼼매꼼 허잖이여? 고곳들이 팔천, 사천 백

정보다 못헌 신분이지만, 또 아조 묘허게 양반들하고 무릎 맞치고 귓속말 나누

는 일 많허고, 궁중에도 드나들고. 그게 다 멩당 같이 쓴 덕 아니겄어?그것들이

양반을 상대험서 보고 들은 거이 있어 놔서 입으로는 면무식헌디다가, 복채도

수얼찮게 받고 그렁게로, 에미 당골들은 지 자식들을 쪽 빼입헤 내놓제 또. 인물

훤허고 기생오래비매이로 태깔 고운디다가, 타고난 거이 그거인디 또 지가 일생

허는 짓이 그거이라, 가락 한나는 아조 누가 따러갈 사램이 없잖응게비? 당골

자식이라는 거이. 이쁘장허니 사람 홀리게 생긴 얼굴에 노래 잘 불르고, 춤 잘

추고, 헌헌 일 않는 손에 간드러지게 장고 치고, 피리 불고, 애간장이 녹지, 녹아.

그렁게 술집 새악씨고 기생이고, 당골 자식한테는 안 녹을 재주가 없제. 아 그렇

게 녹이는 재주 자르르 헌 사람 앞에 어뜬 귀신이라고 안 녹겄어? 벨 수 없제.

그러다가 나이 차먼 장개가서 무당 서방이 되는 거인디, 장개갔다고 그 태깔이

없어지겄능가? 더허먼 더했제. 아조 물이 올라서. 그렁게 그런 손으로는 못 들고

망치 들고 그런 일은 못허제. 더군다나 머 소 몰고 쟁기질 허능 거이나 꽹이 들

고 어쩐 일 허능 것은 넘으 일이제. 넘으 일이여. 백단이가 비오리네 주막에 들

렀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터부룩한 텁석

부리와 가녈가녈하게 생긴 상대가 둘이 앉아 그런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는 것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었다. 그 무당 서방인 만동이는 아낙인 백단

이보다 더 마음이 여려, 지금도 이런 정화에 먼저 어쩌지를 못하고 자꾸 백단이

뒤로 숨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단이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는 그것

을 크게 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아닌게 아니

라 저 검은 소나무 둥치 저쪽에서 누가 몰래 숨어 번뜩이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

보는 것도 같고, 저 즐비한 무덤무덤의 봉분들과 비석, 호석들 뒤쪽에서 불쑥 누

군가 몸을 솟구쳐 휙 덮칠 것도 같은 으스스함이 등골을 지나갔다. 날아가게 지

붕을 씌우거나 틀어올린 장식을 한 비석들은, 얼핏얼핏, 그렇지 않은 줄 번연히

알고 있는데도 꼭 구척 장신 우뚝우쭉한 사람들처럼 보여, 무심코 눈을 들었다

가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게 하였다.

"휘유우."

당골네는 그때마다 한숨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들켜서는 안된다. 그러먼 끝쟁

이여, 절대로 안되야. 이 산둥의 신명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은 살아 있는

이기채였다. 그 이기채의 서슬 푸른 문중이었다. 아까부터 만동이의 뒤꼭지를 할

퀴려고 손톱을 세우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지하의 유호들이 아니라, 꼭 뒤에

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기채의 눈빛이었다. 휙휙 도깨비불 나는 무덤들

위로 그 눈빛이 인으로 번뜩이는 환영에 만동이는 후드르르 어깨가 떨렸다.

"꼭 누가 보고 있는 것맹이여, 왜 이런디야."

그러나,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은 이기채의 눈빛이 아니라 바로 춘복이의 눈빛이

었으니. 누군가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쭈삣주삣 켕기는 만동이의 뒤꼭지를 아까

부터 춘복이는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들이 멋을 헐라고 저리까. 무덤에

찰삭 달라붙은 만동이와 백단이의 구부린 몸둥이를 발견한 순간, 춘복이는 제가

먼저 놀라 숨소리를 죽이고 얼른 시커먼 소나무 둥치 뒤족으로 몸을 숨겼다.

"무신 발소리 안 났어?"

만동이가 백단이한테 다급하게 물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매급시 그래 쌓지 마시오. 무단히 일만 더디제"

"아니, 꼭 무신 소리가 저벅저벅 난 것맹이라."

"꼭 애들맹이로 왜 그리여?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 딛킨디."

옆사람한테도 겨우 들릴락말락한 그 음성이 춘복이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춘복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소나무는 청암부인 무덤에서 몇 걸음 안되는 뒤편이

었으므로, 그 둘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는 얼마든지 복 수가 있었다. 거기다 마침

달빛은 또 얼마나 푸르고 밝은가. 그러나 어둠은 그만큼 더욱 어둡고 검어서 묵

지를 덮은 것 같아, 나무 둥치 그림자에 숨은 춘복이를 들키지 않게 감춰 주고

있었다. 춘복이는 아까 거멍굴 뒷동산 무산의 봉우리에 올라, 떠오르는 보름달의

가느다란 금실 같은 눈썹을 맨 먼저 보고

"달 봤다아."

창자가 터져 나가게 소리를 지르며 두손을 하늘로 번쩍 쳐들고는, 있는 힘을 다

하여 다시 한 번 목청껏 외쳤다.

"달 봤다아아아."

그 소리는 하도 우렁차고 벽력 같아, 함께 다 맞으러 무산에 올랐던 거멍굴의

오물조물한 푸네기와 붙이들이 그만 깜짝 놀라 춘복이를 돌아볼 지경이었다.

배 내외, 평순네와 평순이, 그리고 택주네 들이며 대장장이 금생이, 만동이, 백단

, 말고도 달 맞으러는 올라왔지만 생각같이 쉽게 뜨지 않는 달을 잠시 젖혀두

고 다른 이야기에 헛눈을 팔고 있던 사람들이, 이 오장을 토해 내는 것 같은,

사 미친 사람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가 왜 저런다냐. 교옹장허네 기양. 달 잡어먹을랑게비이."

공배네가 반은 놀라고 반은 어이가 없어, 공배 한 번 보고 춘복이 한 번 쳐다보

며 실소를 했다. 춘복이의 고함 소리는 온 무산을 울리고, 무산 너머 주름주름

물결 같이 검푸르고 연푸른 산등성이들을 넘어서, 골골이 메아리로 번져 나갔다.

이윽고 동산 위에 멧방석보다, 방죽보다, 청호 저수지보다 더 크고 싯누런 달이

붉으스레 붉덕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떠오를 때. 춘복이는 그 달덩어리의 거대

한 몸체와, 그 몸체를 가득 채운 달빛의 뒤챔과, 무서운 힘으로 자신을 빨아들이

는 흡인의 기운에 맞서, 오히려 제 온몸의 손끝과 발끝, 머리꼭지 정수리의 실핏

줄 끄터머리까지 터져 버리도록 가득 차게 달빛을 빨아들여 흡월하면서, 이달이

작은아씨려니. 이 싸움이 바로 작은아씨와 나의 기운 싸움이려니. 져서는 안된

. 절대로. 안된다. 부르짖었다. 그것은 단순한 작은아씨, 그냥 강실이가 아니라,

지금껏 대대손손 내려오고 내려오던 그네 선조의 혼들이 승천하고, 녹아들고,

혼의 투명한 불꽃들이 하나 모이고 둘 모여 드디어는 거대한 광명 덩어리로 눈

부시게 어리어서 어두운 밤 상공에 둥두렷이 떠올랐는데, 이제 어인 일로 황토

흙탕 뒤집힌 것처럼, 저렇게 알 수 없는 분노와 혼돈과 아우성, 그리고 격랑으로

어둡게 술렁이며, 뒤채며, 빛의 싯누렇고 싯붉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달이

었다. 그러니까 강실이는 그 혼자 도려낸 듯 떨어져 나와 따로 선 누구가 아니

, 그 달 속에 서 있는 한 처녀, 그러나 달과 그 처녀가 도무지 서로 구분되지

않게 뒤엉키어 녹아든 형상으로, 두려우면서도 기어이 그것을 삼켜 버려야 할

어떤 절박함을 춘복이한테 덮어씌우고 있었다. 덮어씌우다니.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니었다. 강실이는 그에게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실이가

거기 있다는 것, 매안의 원뜸 솟을대문 아래 그 집의 지친으로 어여쁘게 돋아나

꿈결같이 그림같이 살고 있다는 것, 아니 그런 말이 아니어도 어쨌든지 강실이

'있다'는 사실이 춘복이한테는 지금 엄청난 강박으로 덮어씌워지고 있었다.

오로지 그 존재 자체가 강박이 된 것이다.

"달 봤다아"

그것은 싸우는 소리였다. 그는 남모르게 혼자서 사력을 다한 승부를 달에 걸고,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하며, 또 그달을 들이마시며, 진땀이 나도록 달과 싸웠다.

그러는 중 어느결에 만동이와 백단이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은 솟아

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거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춘복이한테만 귀띔

을 하고는 일찌거니 고리배미 비오리한테로 간 옹구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도 별반 마음이 쓰이지 않을 만큼, 달맞이는 흥겨워졌다.

"인자 고리배미로 풍물 귀경 가야제. 시절도 이런디 무슨 풍물인가만. 이럴수록

이 진탕 한 번 노는 것도 좋온 일이제. 체찡맹이로 깍 차갖꼬 있는 속도 좀 내

레갈 거이고. 안 그러먼 참말로 죽어 불제, 숨이 맥혀 어찌 살어. 가자. 자아,

들 보자, 가들 바."

공배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우세두세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춘복이

는 어렵지 않게 슬쩍 뒤로 처져 몇 걸음 느리게 걷다가, 고리배미로 가는 대신,

이씨 문중 도선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온몸에 들이마신 달을 터져

나가게 머금은 채, 그는 도선산의 입구에서부터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흡월하던

그마음으로, 산의 기운과, 거기 밀밀히 서 있는 적송의 검푸른 머리며 붉은 몸통

이 뿜어 내는 기운을 들이마셨다. 서리 같은 달밤에 승천하는 붉은 용의 비늘이

달빛을 받아 교교하게 빛나는 적송은, 솔바람 시린 소리를 겨울 한공에 씻어내

며 이씨 문중 조상 선조들의 산소 유택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적송 수풀 이쪽

에 산지기 집이 달빛의 너울에 덮이어 잠들어 있고, 그보다 더 위쪽으로는 제각

기 우람한 용마루를 차가운 밤 하늘에 솟구쳐 치올리고 있었다. 시제 묘사때면

매안의 문종 사람들은 물론이요, 인근에 나가 있던 이들, 그리고 멀리 출타하여

일을 보거나 자리를 옮겨 살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모여 와, 검은 갓 쓰고 흰 도

포 입고 구름같이 무리로 서서 삼백 명 사백 명씩 헌헌장부들이 조상의 선영에

제사하는 광경은, 그럴 조상 모시지 못한 상민이나 무세한 사람들을 압도하기

마련이어서,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은근히 새암도 났는데. 제각은 그 큰

제사를 준비하는 제청이니, 규모 또한 여염집과는 비교도 안되게 장엄하여 솟을

대문에 골기와 지붕, 그리고 두리기둥들이 가본 일 없는 대궐을 상상하게 하였

. 다만 대궐과 다르다면 단청이나 주칠이 없이 소복한 듯 본색만을 그대로 드

러낸 나무들이 소슬하니 엄숙하다는 점일 것이다. 춘복이는 이 제각의 솟을대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달을 들이삼킬 때와 같은 공력과 기세로

그 장중하고도 삼엄하고 한없이 높아 보여서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제각, 신명들

의 귀기가 마당과 댓돌과 마루와 방, , 그리고 대청이며 기둥, 지붕의 기왓장

하나에까지 결결이 골골이 서슬을 세우고 스며들어 있는 제각을, 한 숨에 빨아

들이려 하였다. 제각은 곧 무산 위에 뜨던 그 달이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보다 더 실감나는 구체의 기운이라고나 할까. 여그 서리신 이씨 문중 대대 조상

신명님들, 이 춘복이란 놈 우습다 허지 마시고 오늘 밤에 사우로 맞어 주십시오.

저는 본래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타고난 것도 없는 천하 불상놈이올

습니다. 허나 이런 놈도 한 번 살어 보고 싶은 시상은 있어서 뜻을 갖꼬 맘을

갖꼬 주먹을 쥐어 보는디요. , 이씨 조상 신명님들 따님 하나 훔칠랍니다.

시오. 저 하나 주시오. 이씨 조상님들은 이 따님말고라도 대대 후손 열두 집안

수수백천 자손들이 꽃 같고 달 같어서 꽃밭맹이로 흐드러져 피어날 거잉게,

꽃한 송이 저한테 주시오. 내가 오늘 그 꽃 훔치로, 꺾으로 갈랑게, 나한테 감응

허사 이씨 조상님들 기운 좀 주십시오. 여러 신명님들한테는 수수만만 꽃송이

중에 하나겄지만, 지는 이꽃 한 송이가 지 전부요. 내 한세상으 전부요. 저한테

주시기라우. 상놈 손자 한 놈 보시기요. 백옥 같은 이씨 조상님들 깨끗허고 높은

덕에 검불 같고 티끌 같은 흠절이 찍히는 거이겄지만, 저 높은 디서 뜨는 달도

자세 보면 얼룩얼룩 얼룩이 많습디다. 그거이 머이겄능교. 그거이 다 흠절 아닝

. 시컴시컴 얼룩배기 달 속도 무단히 그렁 거는 아닐 거이요. 그렇게 얼룩 있

고 멍들었어도 달이 어디 꼬물만치라도 그것 때미 어둡등교. 그께잇 거 데불고

도 천지에 휘황 찬란, 캄캄헌 밤에 그만치 큰 광명이 어디 다시 있겄습니까.

물이 크먼 요강 싯친 물 한 박적 다 씰어 안고 흘러가도 흠 하나 티 하나 표 안

내고 바다로 가디끼, 이놈 하나 상놈 사우 후손으로 끼여들어도 이씨 조상님들

광영에는 아무 누가 없일 거인디요. 허나 이놈 춘복이는, 비록 그 요강 싯친 물

일랑가는 모리겄지마는, 그 강물에 뛰어들어 바로 강물 되는 거이라요. 요강물이

강물 되는 일인디 지가 어찌 그일을 안허겄능기요. 살페 줍소사. 부디 살페 주옵

소사. 저 해원 조께 시케 주옵소다. 춘복이는 두 발을 땅에 꽉 붙여 엉버티고 서

, 교교한 겨울 달빛을 받고 있는 제각을 쏘아보며 주문처럼 이 말을 되었다.

그리고 그 집채를, 집채에 서린 신명의 기운을 물 마시듯 한 모금 한 모금씩 들

이마시며 흡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일을 도모하기 전에 웬일인지 이 도

선산에를 먼저 와야 할 것만 같았었다. 비록 문서 없이 순서도 없이 끼여드는

일이었지만, 그의 내심에는 이 도선산 신명들의 기를 받아 자신에게 자신감을

북돋워 주고 싶었으며, 그 기와 맞서 한바탕 겨루지 않고는 설령 어떤 절호의

순간이 기회로 부닥쳐온다 해도, 이쪽이 지레 놀라고 눌리어 솔아 버릴 수도 있

는 일이라. 그는 가장 두려우면서도 결국은 선망이 되는 도손산 산소들을 찾아

온 것이었다. 그는 제각 앞에서 발을 옮겨 둥시르르한 봉분들이 보름달보다 더

크고 더 겁나 보이는 곳으로 성큼 들어섰다. 절대로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나도

인자 이 집안의 사우가 될 거잉게. 멩색 없고 문서 없어도 나는 이 집안으 사우

가 될 거잉게. 베폭 찢는 소리로 휘이잉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던 바람은 비석의

잔등이를 회초리롤 후려치고, 푸르게 멍든 달빛은 그 매 맞은 자리를 차가운 손

으로 쓸어 내렸다. 당대의 명재상이었던 영의정의 손자로서 남원의 매안으로 내

려와 입향 우거허여 자리를 잡은 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없이 많은 명인달사

를 내고 대창 창성하였던 이씨 문중 도선산, 몇 백 년의 세월이 우뚝우뚝 비석

으로 남겨진 무덤에는, 종일품 의정부 좌찬성, 정이품 의정부 우참찬, 자헌대부

홍문과 대제학, 중이품 가선대부 하헌부 대사헌, 정삼품 당상과 승정원 도승지,

동부승지, 당하관 통례원 좌통례, 혼문관 직제학의 이름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다 더듬을 수 없는 그 비석들의 후면에 적한 글귀들은 하나같이 그 인품의 온

,강직, 절제와 충의, 효심, 그리고 고매한 학덕과 경세의 업적을 적고 있었다.

청빈한 성품과 근면 검소한 생활이 보는 사람에게 저절로 감화를 주어 따르는

이 많았다는 구절이며, 어질고 자애로운 풍모와 깊은 학덕이 아름다워, 그 한평

생 살아온 자취가 훗날의 자손에게 가히 본이 되리라는 조상들.

"공은 점점 자랄수록 학문을 닦는 일에 지성을 다하여 박학 다식한데다가, 예의

범절이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부모를 섬기되 진정을 바치니, 누구라도 공의 이름

을 들으면 멀리서라도 한 번 찾아와 뵈옵고자 하였도다."

"공은 지극히 검박하여 그 밥상에 세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않았으며, 백성을

아끼기 친자식같이 하는지라, 가는 고을마다 송덕비를 세우고자 백성들이 원하

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여 같은 무리 속에 홀로 뛰어남이 가히 햇빛

을 받는 흰 학과 같았다."

"공은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 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였으나 상께서 그 인재를 아깝게 생각하여 한사코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공의

소청이 하도 간곡한지라 남원의 이웃 고을 장흥부사를 임명하여, 나라일과 부모

섬기는 일을 같이 하도록 배려하시었다. 그러던 중 부친의 병환이 더욱 깊어져,

공의 효성 어린 간호에도 차도를 보이지 않은 채 홀연 영영 돌아가시니 이때 공

의 나이 삼십오 세였다. 이에 조종에서는 공의 부친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공의 부르짖어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사람이 볼수 없었으나 인생이 덧없는 것을

공인들 어찌할 수 있었으랴. 이에 공은 곧 부친의 산소 옆에 조그마한 여막을

짓고 이곳에 거처하면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받들고 섬

기어 삼 년간을 지내니, 풀로 엮은 초막에 그의 초췌한 형상이 이루 말할 수 없

었으나, 그런 중에도 집에 계신 어머니를 또한 지극한 정성으로 살펴 드리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은 대사성, 직제학, 관찰사, 대사헌의 벼슬을 하였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후에

공의 모친이 또 세상을 하직하여 운명하신 후에도, 밤낮으로 여막에서 기거하며

눈물로 상을 하직하여 운명하신 후에도, 밤낮으로 여막에서 기거하며 눈물로 시

묘하기를 꼭 부친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 비석 위에도 달빛은 내려 얼어붙는

. 그토록 지극하신 효성으로 부모 혼백 섬기기를 다한 조상은, 바로 몇 걸음

아래 종산 발치, 이제 막 지하에 묻힌 후손 종부 청암부인의 무덤 옆구리 헐리

어 소리 없이 능욕당하는 것을, 다만 지켜만 보고 있을 뿐, 그 무엇을 해 줄 수

있으리. 천만 가지 송덕이 글자로 새겨져 있다 해도 단 한 자 읽을 수 없는 춘

복이는, 비문 읽을 생각이야 애초에 없었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읽는 대신 통으

로 들이삼키어 그 기를 온몸 속에 흡입하여 삼투시키려 하였다. 도선산을 다 돌

고 무덤마다 절을 하며 종산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놀랍게도 청암부인의 묘서

에서 만동이와 백단이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도 보아 버린 것이다. 춘복이는 야릇한 호기심과 흥분으로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숨죽이어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그들을 얕보는 비웃음

이라기보다, 자신이 용틀임으로 머금고 있는 소원과 꼭 같은 소원을 안고, 이 가

문에 뼈다귀를 섞으려 하는 그들에게서 어이없고 묘한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비

어져 나온 웃음이었다. 그 모양은 가련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절실하면 절실할수

록 그만큼 더 우습게 보이는 것은 웬일이었을까. 그 자신의 모습을 또 누군가

있어, 어디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 또한 춘복이와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인가.

"그런다고 되야?"

하는 미소를 목젖으로 넘기고는 아까보다, 만동이 내외를 발견하기 전보다는 훨

씬 가라앉은 심정으로 춘복이는 종산을 빠져 나와, 드디어 매안으로 가기 시작

했던 것이다.

"자가 누구여?"

마침 소피를 하러 마당 귀퉁이 소매동 옆으로 나왔던 산지기 박달이는,괴춤을

추켜올리다 말고 흠칫 놀라, 지금 막 저희집 수숫대 울바자를 스쳐 지나가는 시

커먼 장정을 돌아보았다. 얼결에 보았어도 이씨 문중 사람은 아닌데, 누가 무엇

하러 이 밤중에 칼바람을 맞받으며 남의 종산에 올라갔다 오는 것일까. 박달이

는 얼른 삽작문 바깥으로 나섰다.

"누구여?"

몇 걸음 지나쳐 저만큼 가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누구냥게?"

박달이는 서른 중반을 넘어선 사람으로, 먼저 죽은 아비의 뒤를 이어 이씨 문중

선산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성깔이 칼칼하고 고집이 단단하여 어려서부터 '박달

방맹이'같다고 별명을 들었는데, 생김새도 야물고 몸이 날렵한 사내였다. 안 그

래도 누가 감히 그 서슬이 무서워 이씨 문중 선산에는 함부로 못 들어갔지만,

박달이가 산을 지키면서는 더욱 조심이 되어, 아무리 땔나무가 없어도 그 산중

으로는 걸음을 놓지 못했다. 해마다 쌓이는 낙엽이 썩지도 않고 그 위에 또 쌓

여도, 삭정이 마른 가지가 나무마다 생겨나서 그것만 꺾어다 불을 때도 엄동의

추위를 웬만큼은 녹일수 있을지라도, 저절로 떨어지는 도토리 상수리를 한 바가

지만 주워와도 몇 끼 식량은 넉넉히 할 것만 같아도, 사람들은 그 선산을 넘보

지 못했다. 만일에 누군가 정히 참지 못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아궁이에 땔나무

라도 한 짐 긁어 넣으려고 그 산에 몰래 들어갔다가, 요행히 들키지 않는다면야

귀신이 도왔다고 할 것이요, 만일 여의치 않아서 히뜩 그 옷자락만 들켰다 하면,

어디서 보고 있다 나타났는지, 방망이로 맨다듬잇돌 내려치는 소리를 새되게 지

르는 고함 소리에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일 순순히 긁은 나무

나 꺾은 나무를 내놓고 백 배 빌면 혹 모르겠거니와, 에라 모르겠다, 등에다 나

뭇짐 진 채 달아나려 했다가는, 여지없이 뒤통수 까지게 후려패는 몽둥이 찜질

에 나가떨어지면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박달이는 참으로 박달방망이보다 더

매서웠다. 그런 박달이한테 춘복이가 걸린 것이다. 그러자 춘복이는 깊이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조금도 무슨 기미를 눈치채이지 않게.

그냥 어디 이웃에 마실 나왔다 가는 것처럼. 아니면 대보름 밤이니 달마중하러

온 것처럼.

"저요."

"춘복이?"

"이예에. 진지 잡샀능교?"

"시방이 언젠디 진지를 잡사? 근디 자네 어디를 갔다 옹가?"

"달구경 좀 허니라고요."

"? 무신 달구경을 이렇게 먼 디 끄장 와서 히여? 그것도 혼자. 어디가서 허고

오는디?"

"아 여그 종산으로 도선산으로 휘이 한 바꾸 돌았그만이요."

"으잉?"

"내가 언지부텀, 여그 한 번 꼭 와서 참배 한 번 해야겄다, 속으로만 벨르고 벨

르고 했는디요. 머 나는 어매도 아배도 모르는 천하 불상놈이라 어디 부모 묏동

이라고 찾어가서 엎어져 얼해 볼 만헌 디도 없고. 머 그 욱에 할애비가 있어서

성묘 한번이라도 해 본 일도 없고. 그거이 그렇게 늘 서럽드만요. 나 같은 놈이

야 나 내지른 어매 아배 덕이라고는 머리크락만치도 본 일 없는디, 그래도 요만

치라도 한 몫은 혀게 큰 것은 다 매안 문중 덕분 아닝교. 내가 암만 소가지 사

납고 물불 잘 못 개린다고 그렁 것도 모르겄소? 속으로는 다 감지덕지, 결초보

은 은혜를 갚을라고 맘을 먹제."

"그런디?"

"청암마님 산소에 갔다 왔소. 시방"

"거그 멋 헐라고?"

박달이의 귀가 어둠 속에서도 쭝긋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박달이는 평소에도

바짝 긴장하거나 또 그렇게 해 보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두 귀를 쭝긋 에쉈다.

움직이는 귀였다. "작년 시안 동짓달에 그 마님 돌아가시고는, 나 참, 부모 잃은

설움은 안 저꺼 봤잉게 모리겄고, 내 그렇게 설운 일, 살다가 첨이요. 그렇게도

허퉁허고 허망헙디다."

박달이는 아까보다 기세가 누구러져 춘복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는

"그야 그렇제."

한숨 섞은 맞장구도 쳐 주었다. 춘복이의 머리 속에는, 지금도 거기 봉분 옆구리

에 달라붙어 진땀이 번지는 이마를 소맷자락으로 씻으며 무덤 헐어 낸 자리를

메구고 있을 만동이 내외 모습이 떠올랐다.

"나 같은 상놈이 어니 감히 그 문중에 큰마님 초상 영우에 가 향이나 한 오래기

사를 수가 있겄소오, 절이나 한 자리 헐 수가 있겄소. 그저 샅에서 요령 소리가

나게 허드렛일 허는 거이 고작이라, 그렇게 죄송시럽고 서운허드라고요. 말 못허

는 짐생도 다 저 거둬주는 쥔은 알아보고, 허다못해 돼야지도 밥 주는 쥔 발짝

소리만 나면 꽤액 꽥 꿀꿀꿀 난린디. 이것은 멩색이 사람의 자식으로 인두껍을

쓰고는, 인자 영영 영결허는 마님한테 절 한 자리를 못허는 거이, 어디 그게 안

서운헐 일이요?"

"고마운 마음이제."

언감생심 머."

"마님도 그 맘은 다 알고 가셌을 거이여. 너무 서운해 말어."

"아 그래도 그거이 어디 그렇소? 해가 배끼니 배꼈다고 세배를 디릴 수가 있능

, 초하루 삭맹이니 상식을 올릴 수가 있능가. 그래 내가 작심을 허고, 정월 대

보름날 달 뜨면 나 혼자 암도 모리게 마님 산소 한 번 챚아가서 꼭 절 한자리

해야겄다. 올리야겄다, 그랬지라우, 언감생심 대낮에야 나 같은 놈이 어디 여그

발이나 딜에 놀 수 있간디요? 도독질을 허는 것도 아니지만 대낮에는 못허는 일

잉게, 이렇게라도 해야제잉."

"그래 절은 허고?"

"하면요. 참 맴이 다 풀리는 것맹이드라요."

춘복이 그렇게 안 밨는디 갠찮헌 사람잉게비?"

"갠찮으먼 멋 허요? 씰 디가 있어야제."

"아 왜 없어? 이만헌 사램이."

"그래 간 김에 기양 한 바꾸 돌아부렀소. 내 펭상에 또 언지 여그 올수 있겄냐

싶어서, 앞앞이 다는 못했지만 건중건중 건네서 그 조상 어르신들 산소에 절은

한 자리씩 올렸소. 내가."

왜 그랬는지 춘복이는 만동이 내외 대신 제가 방패를 두르고 나서서, 박달이가

그쪽으로 마음을 못 쓰게 해야 한다는 데 조바심이 들었다. 아닌 밤중에 남의 선

산에 들어갔다가 꺼덕꺼덕 나오는 춘복이를 수상하게 여기자면 얼마든지 그렇게

여길 수 있는 일이어서 그에 대한 방비도 해야 했지만, 그보다 더 큰일을 저지

르고 있는 만동이 내외는 어쨌든지 우선 무사해야 할 것 같았다. 잽히먼 죽응게.

춘복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춥겄네. 얼었그만. 조께 들왔다 가든지."

"아니라우. 가야제."

춘복이가 발을 돌릴 기세를 보이자 박달이는 한 마디 덧붙였다.

"산에 벨일 없제?"

"달이 참 좋습디다."

춘복이 말에 박달이가 웃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새삼스럽게 추위가 끼쳐드는

지 어그그흐으, 하면서 소름을 한 번 털어 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에

뜬 달이 눈부시게 희었다.

"대체나 달 좋그만."

"갈라요."

"그리여. 가 바."

박달이가 삽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춘복이는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

. 중천에 뜬 달을 본 때문이었다. 아직도 풍물 소리 꿈결같이 아득히 들리고,

달집 태우는 냇내가 여기까지 낮은 냄새로 깔려오고 있지만, 시간이 더 기울기

전에 어서 매안의 원뜸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로 가야만 한다는 조바심이 그의

발걸음을 헛뜨게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럭 그는 걸음을 눌러 디뎠다. 서두르먼

쏟아져. 그는 지신에게 타일렀다. 무산의 동산 봉우리 날망에서 들이삼킨 보름달

정기며, 매안 선산의 제각과 비석과 호석, 그리고 보름달 같던 무덤의 봉분들을

그토록 전심 전력으로 흡인한 정액이, 온뭄에 혈력으로 차 올라 목까지, 정수리

머리꼭지까지 그득한데, 자칫 한 걸음 잘못 디디면 그만 헛되이 쏟아지고 말 것

이 그는 두려웠다. 그는 앞발이 조바심으로 내닫는 걸음을 뒷발로 지그시 누르

, 빠르되 신중한 걸음으로 물을 건너고, 아랫몰을 지나고, 중뜸을 지나고,원뜸

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그는 강실이의 이름을

간절히 밟았으니. 무슨 급류의 물살에 놓인 아슬아슬한 징검다리처럼 그 이름은

밟을 때마다 흔들렸다. 그 징검다리를 잘못 딛어 그것이 뒤집히거나, 아니면 그

돌을 딛는다는 것이 헛짚어 물살을 짚으면, 그대로 어디론가 휩쓸려 떠내려가

버릴 것만 같은 심정에 춘복이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 급류는 제 천한 핏줄의

물살이었던 것이다. 나 좀 건네게 해 주시오. 이 물살에 떠내리가먼 나는 어디로

가겄소? 나는 그러기 싫소. 나는 그 물살에 빠지기 싫소. 나 좀 건네게 해 주시

. 여그 이 복판으서 저어짝 엉덕 욱으로. 매와 핀 언덕이면 더욱 좋으리. 매안

이 바로 눈앞이고, 그 매화나무 고목의 세월 실린 검은 둥치와 벋은 가지가 바

로 눈앞에 보인다. 구불구불 늙은 줄기가 굽이치는 듯 꺾이는 듯, 새 가지는 버

들 같고 묵은 가지는 채찍 같은데, 겨울비가 씻어 낸 가지에 암향이 그윽하게

어리면서 꽃망울 벙그는 매화 한 점. 그것이 강실이였다. 강실이가 살고 있는 오

류골댁 사립문간의 살구나무가 춘복이에게는 바로 매화 나무였다. 그 매화 핀

원뜸의 언덕으로 오르는 춘복이의 발걸음이, 그 살구나무 바짝 가깝게 이르렀을

, 그는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게 놀랐으니. 거짓말처럼 강실이가 그 살

구나무 아래 사립문간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비긋이 열린 문은 고샅

으로 열린 그네의 하염없는 귀인가. 그네는 언제부터 거기 나와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막 나와 선 사람의 한기에 대한 움츠림이 없고, 마치 그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스민 끝에, 핏줄이며 오장이며 안 보이는 마음까지도

이제 바깥 한기 그만큼이 되어, 굳이 안인가 바깥인가 나누어지지 않은 투명체

처럼 강실이는 보였다. 그 얼음 속 같은 강실이 머리 위에도 달을 떠 있었다.

 

 

15. 그날

 

겨울 밤의 기나긴 어둠이 간밤 내내 서리를 틀었던 또아리를 풀면, 새벽은 깃

을 털며 검푸르게 깨어난다. 먹지 같던 장지문 창호지에 이 새벽빛이 싸르락 스

친다. 그러나 아직도 눈을 뜨기에는 이른 시각이다. 자다가 마시려고 떠다 둔 머

리맡의 자리끼 물이 쩡 소리를 내게 얼어버린 방안은 여전히 캄캄하다. 군불 기

운도 웬만큼 가시는 이때쯤이면, 검정 무명 이불 아래 오물오물 잠든 식구들의

발이 아랫복 온기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가는 주인

의 눈치를 보며, 부엌 아궁이 옆의 부뚜막 아래 따뜻한 자리를 찾아 제 대가리

를 붙이고 잠드는 겨울 강아지같이. 돌아눕기만 해도 이불자락이 떠들어져 등이

썬득하게 끼치는 외풍 때문에, 어머니는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무망간에 손을

뻗어 아이들이 차낸 이불을 끌어다 덮어 주었다. 천장에서 내려오고 벽 사이로

스며드는 이 찬 바람은 코를 떼어 내게 시린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곤한

새벽잠 기운에 겁없이 이불을 차낸다.

"아이고, 가만히 좀 있그라아. 웬 잠뜻을 이렇게 허는고오."

잠이 묻은 음성으로 아이를 가볍게 나무라며 이불을 바로 덮어 주던 어머니는,

장지문에 밀려와 어린 새벽빛을 보고 놀라 일어나 앉는다. 어느결에 검푸르던

창호지는 부윰한 빛깔을 머금고 있었다. 커흐으음. 때 맞추어 사랑채에서 기침

소리가 울리며 새벽 공기를 흔든다. 그리고는 이어서 들리는 담뱃대로 놋재떨이

두드리는 소리. , 따악, . 이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매안에서 맨 먼저

기침 소리가 나는 곳은 언제나 이기채의 사랑이었다. 그 메마르고 카랑카랑한

소리는 어둠이 채 물러가지 않은 꼭두새벽 미명을 팽팽하게 일으켜 세웠다.

러면 이윽고 부스럭부스럭, 덜그락 달그락, 여기저기서 소리들이 들렸다. 새벽은

소리로 왔다. 지난 밤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효원의 방문 앞으로 콩심이 발

자국 소리가 지나간다. 종종거리고 뛰는 것이 바깥 날씨가 어지간히 추운 모양

이었다. 그 발자국 소리에, 가까스로 참고 있는 효원의 가슴이 밟히며 욱근욱근

뛴다. (저것을 불러 다시 한 번 물어볼까.) 하다가, (체신 없다.) 마음을 사려먹고

그만둔다.

"옹구네가 봉출이한테 그러드래요, 야야, 내가 참 벨 놈의 소리를 다 듣겄다이.

하도 기가 멕헤서 기양 나만 듣고 말어 불라고 했는디, 가만 생각해 봉게 또 그

럴 일만은 아닝 것맹이라, 곰곰 궁리허다 너한테만 살째기 허는 말잉게로, 어디

딴 디 욍기든 말고 꼭 대실아씨만 알게 그 귀에다가만 말씸 디리그라, 그러드랑

마요. 똑 눈으로 본 대끼 허는 말이라 봉출이 저도 놀랬다고 그럼서."

콩심이는 숨이 턱에 찼으면서도 얼른 말을 잇지 못하고 맴을 돌았다.

"수선스럽기는. 그래 무슨 말인데 그리 서두가 장황허고 기냐?"

"아이고 참 내. 입이 안 떨어져서."

"때까치가 못허는 말이 다 있더냐?"

어린 나이 아랫것들이 항용 그러듯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을 제 딴에는 굉장

한 것이라고 상전한테 고하는, 그런 정도로 짐작하고 효원은 콩심이의 조그만

얼굴을 바라보았었다.

"새아씨"

"말해 보아"

콩심이는 마른 침이 들어붙는 입시울을 차마 떼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수리에 땀이 돋는 듯했다.

"오루꿀 작은아씨가요......아니요, ......"

"너 꿀 먹었냐?"

"?"

"입가에 묻었그먼. 그러니 입이 붙지. 자꾸."

"예에.... 아니요, 그런디요, 이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효원은, 머리똥지를 내려뜨린 대가리를 찌우뚱 짜우뚱 하며 말

문을 못 여는 콩심이가 한편 우습기도 하고 한편 귀엽기도 해서 미소를 머금었

. 그리고 친정에서 조막만한 코흘리개 철딱서니 없는 것을 교전비로 데리고

, 효원의 시중을 들기는커녕 오히려 제 머리 하나도 못 빗어, 거꾸로 상전이

종의 머리를 빗겨 주게 했던 것이, 이제는 컸다고 그 머리를 조아리며 무엇을

얼른 말 못하고 망설이기도 하는 모양이 제법 사람 시늉을 하는 구나, 싶은 마

음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한들 그런 청천벽력 같은 말이, 그 하찮은 작은 것 주

둥이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었다. 강실이는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효원은

며칠 전에, 놀라운 말을 들었던 것이다. 놀랍다기보다는 그네를 어지럽히는 말이

라고 할까. 아니 어지러운 것만이 아니라 끔찍하여 가슴이 얼어드는 말이었다.

"새아씨. 지가 이런 말씸 디리도 헐랑가 모르겄는디요."

콩심이가 두 살 난 철재를 재워 내려놓으면서 효원에게 말했었다. 코를 흘리던

그것은 이제 벌써 열네 살 눈치 빠른 나이를 먹었던 것이다. 원래 입이 싸고 촐

랑거리기 잘하는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또 그만큼 일손도 재고, 친정에서부터

교전비로 데리고 온 애틋함도 있는 콩심이였다.

"무슨 말인데 그러냐?"

하는 시선으로 효원이 건너다 보자

".....어쩌까요잉. 지가 듣기는 들은 거이라도요, 하도 요상시러서, 이런 말씸 디

리기가 겁나서요."

평소의 콩심이답지 않게 좀처럼 말문을 열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있던 효원은

청암부인의 죽 쑬 쌀을 고르고 있다가

"원 실없기는. 그리 어려운 말이면 그만두어라. 내 들은 걸로 해 두마."

해 버렸다. 나이 어린 아랫것이 하는 말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싶었고, 청암부

인의 병세가 급작히 위중해져 마음속이 뒤숭숭한 탓에, 그런 말에까지 마음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효원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리자. 콩심이는

때를 놓칠까 싶은 다급한 사람처럼 말을 쏟았다.

"봉출이가 그러는디요, .... 옹구네한테 들었다고."

그 다음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표창처럼 가슴 복판에 박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던 것이다. 콩심이는 소상하고도 자세하게, 더듬더듬, 강실이와 강모의 이야

기를 효원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전해 주었다.

"몰르고 지싱 것은 새아씨배끼 없을 것이라고 그러드래요. 그럼서 저보고 살째기

말씸 다리라고. 알고나 지시야제 넘들은 뒷방애 찣는디 혼차 몰르고 지시먼 안

우숩냐고 그래요. 오루꿀 작은아씨가 시방끄장 왜 시집을 못 가시겄냐고, 그 인

물에 그 성품에 머이 모지래서 혼댐이 없겄냐고요. 그거이 다 소문이 나서 그렁

거이라고....그러고 서방님 만주로 가싱 것도 다 도망이라잖에요? 봉출이란놈이

저 불러 놓고는,인자사 그런 속을 알었다고 그렁마요. 그래서 지가 오금쟁이를

박어 놨는디요,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허먼 큰일난다고, 절대로 암말도 허지 말라

고요. 그랬드니, 나는 버부리(벙어리)맹이로 입 붙이고 있을랑게 너는 얼릉 가서

새아씨한테 일러디리라, 그러잖에요? 새아씨 뒤꼭지다 대고 입 달린 사람은 모

도 다 손꾸락질 허는지도 몰르고 앉어서 농판 되는 거이."

하다가 콩심이는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끝엣말은 저희들끼리나 남 안듣는 데

서 쓰는 말이지, 이렇게 상전을 앞에 모시고 당사자 말을 하는 면전에다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때문이었다.

"우리 새서방님허고 상피를 붙었다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허허어, . 효원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

았다. 한동안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네의 얼굴빛이 노랗게 질렸다. 그 질린

기운이 곤두서며 소름을 일으켰다. 그리고 송곳처럼 가슴 복판을 깊이 쑤셨다.

그런 중에 그네는 다만 한 마디를 누르듯 토했다.

"촐랑거리지 말어라. 방정맞게."

그것은 콩심이한테만이 아니라 효원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였다. 과연 '몸가

'이란 무엇일 것이냐.

"형직영정."

이라는 말이 '열자'의 일절에도 있거니와, 무릇 그 모습이 곧으면 그림자는 저절

로 반듯한 법 아닌가. 그러니 그림자만 보아도 그 본모습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가 있다.

"모습이 곧아야 그림자가 바르니라. 너는 모쪼록 구용 구사를 명심하고, 늘 몸가

짐을 단정히 하도록 해라."

효원이 아직 출가하기 전 대실의 친정에서 자라고 있을 때, 그네의 부친 허담은

여식과 마중앉아 율곡 선생이 격몽요결에서 말한 '구용''구사'를 일러주었다.

그것은 사람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하여 마땅히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바른 용모와

아홉 가지 바른 생각을 이르는 것이었으니. 구용 1.족용중(발을 무겁게 가져 경

박하게 들어올리거나 흔들지 않는다.) 2.수용공(손은 공손히 두어 만지작거리거

나 함부로 내두르지 않는다. 3. 목용단(눈동자를 단정히 하여 정면을 바로 보고 곁

눈질하지 않는다.) 4.구용지(말할 때와 먹을 때를 빼고는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는다.) 5.성용정(맑은 음성으로 말하며 재채기나 기침 등 잡소리를 내지 않는

.) 6.두용직(고개를 똑바로 하여 한편으로 기울게 하지않는다. 7.기용숙(호흡을

조절하여 늘 엄숙한 태도를 지니도록 한다. 8.입용덕(항상 반듯하게 서며 어디

기대지 말고 점잖은 태도를 가진다.) 9.색용장(낯빛을 늘 바로잡아 가지런히 하

여 태만한 기색을 내지 않는다.) 구사 1.시사명(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사물이나

사람을 바르게 볼 것.) 2.청사총(항상 남의 말과 소리를 똑똑하고 분별있게 들을

.) 3.색사온(항상 온화하여 얼굴에 성난 빛이 없도록 할 것.) 4.모사공(항상 외

모를 공손하고 단정하게 가질 것.) 5.언사충(항상 진실하고 믿음이 있는 말만 할

.) 6.사사경(모든 일에 공경하고 행동을 조신히 삼갈 것.) 7.의사문(항상 의심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선각에게 물어 알 것.) 8.분사난(분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사리로 따져서 참을 것.) 9.견득사의(항상 재물을 얻게 될 때는 의와 이를 구분

하여, 얻어도 되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명확하게 가릴 것.)

"이 가르침을 명심하여 마음에 새기면, 남들한테 본이 될지언정 결코 흉이 되지

는 않으리라."

허담은 그렇게 말하였다. 콩심이를 내보낸 효원은 곧추세운 무릎 위에 손을 얹

고 곰곰이 그 말씀들을 하나하나 속으로 짚으며 골똘한 생각을 하고 있다. 마치

그 구절들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그것을 놓치면 그만 까마득한 벼랑의 낭떠러지

로 걷잡을 수 없는 급류에 휘말리고 말 것만 같은 그네는, 밧줄에 마음을 묶어

'구요', '구사'에 걸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잡힌 치맛자락이 후르르 떨

린다. , 이런 일은 짐작도 못하였다. 효원의 눈에 분노와 절망과, 어이없어 오

히려 그 분노와 절망이 허망한 골짜기로 깊이 패인다. 그네는 어디랄 것도 없는

벽 모서리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아까부터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러할 때 어찌

하란 말씀은 왜 없습니까.

"항상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먼저 깨달은 이에게 물어서 알라."

고 하였지만, 이와 같은 일을 당하여 누구에게 지혜를 물을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이런 일이 지혜를 묻는다고 풀릴 실타래인가. 지혜를 구하기에 앞서 감정

이 북받치고, 먼지의 회오리 같이 취몰아 일어난 그 감정은 가슴패기 복판을 가

시같이 할퀴면서 머리 속으로 치밀어, 그네를 질정하기 어렵게 하였다. 효원은

그만 눈을 감고 만다. 어지러운 탓이었다. 먼지를 삼키고 있는 가슴이 또 한 번

거꾸로 뒤집히면서 부옇게 그네를 흔든다. 회오리 도는 흙먼지 저만큼에 강실이

가 빗기어 서 있다. 황사 바람꽃 너머 그림자로 비치는 모습이다. 나오라. 이리

나와서 나를 보라. 효원은 그림자를 향하여 두 다리를 버티고 섰다. 아아, 너는

누구이냐. 너를 보이라. 버티고 선 효원은 장승 같다. 아홉 가지 용모의 다스림

과 아홉 가지 생각의 다스림을 강실이라고 모를 리가 있으랴. 평소의 그네를 보

면 따로이 그런 항목들을 새기고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찌하

여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콩심아."

효원은 강실이를 부르는 대신 쌍창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본다. 콩심이가 건넌방

누마루를 올려다 보더니 얼른 토방으로 올라선다.

"세숫물 시방 디우는디요."

이른 새벽,큰사랑에서 기침 소리가 울리고 담뱃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

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사람은 물담살이 붙들이다.

"야 이놈아. 느그 어매도 어지간히 맴이 급했등갑다. 욱으로 줄줄이 염라대왕 앞

으로 다 놓치고는 너 하나 어쩌든지 붙들어 둘라고, 아조 기양 이름에다 명을

짬매 놨그만. 붙들어라, 붙들어. 아 이놈아, 그 물지게 꽉 붙들어어, 어크러져,

저 저 저. 저런당게. 너 간들간들 허고 댕기는 것 봉게로 느그 집안 내력을 알겄

. 아 왜 넘 먹는 밥 다 먹고, 가난헌 집도 아니고 대갓집 담살이 머심 삼서 그

렇게 물외꼭지 비틀어진 것맹이로 바싹 말러 갖꼬 댕기냐 너는? 뇌에러니. 낯꽃

이라고 똑. 너 그래 갖꼬 어디 쓰겄냐? 진새도 못허고. 펭상에 물담살이 허다 말

겄다잉? 기운 내, 이놈아."

동네 머슴들한테 곧잘 그런 퉁을 먹기도 하는 붙들이는, 그리도 물담살이가 깔

담살이보다 낫지, 싶은 모양이었다. 집안에 새암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은 정화수를 긷고, 밥물을 붓고, 냉수를 떠 마시는 정도의 수량이어서 아주 조심

스럽게 아껴가며 썼고, 그 외에 하루에도 몇 독아지씩 엄청나게 써야 하는 물은,

집 바깥의 우물에서 길어 왔다. 그 물 긷는 일만을 전담하여 집안에 물 떨어지

는 일 없게 하는 것이 물담살이였다. 우선 붙들이는 이 일이 단순해서 좋았다.

등에서 물지게 벗을 틈이 없기는 하지만 복잡한 다른 과정 없이, 집에서 우물,

우물에서 집, 왔다 갔다 하며 물만 그득그득 길어 나르는 것이니, 고달프기로 하

면야 어느 누구인들 고생 안하고 살리요마는, 일의 성격이 붙들이한테는 맞았다.

그러나 깔담살이는 또 달랐다.

"나는 물담살이 까깝해서 못헌다. 무신 광대 줄 타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질에

이리 오고 저리 가고 물만 퍼 담는 거이 질리도 안허까? 니가 좋당게 헐 말은

없다만. 나는 꼴망태 하나 짊어지고 거그다 낫 한자리 터억 꼽고 대문 배깥으로

나서먼, 머심살이 찌그러져도 속이 티이고, 내 세상이야 싶으드라. 오늘은 여그

서 꼴 비고, 내일은 저그서 꼴비고. 하늘도 보고 새도 보고 구름도 보고, 거그다

꼴 빌 때 보먼 풀무데기 파란 속에 꽃도 보고. 그게 참 이뿌다이? 어뜬 놈은 요

만헌디 노랗고, 어뜬 놈은 요렇게 지댄헌 대궁에 남색이고. 흰꽃도 있제. 나비도

있고. 아이고, 머심살이 인자사 담살잉게 앞으로도 창창허지마는, 그런다고 누가

땡게서 쭐여 주도 안헌디 속만 태우먼 멋히여어? 소 멕이고 꼴 비고 허다 보먼

중머심 상머심도 되겄지 머."

새끼머슴인 담살이, 그 어린 머슴들은 서로 그래도 네 것보다 내것이 더 낫다

하며, 풀잎을 걸어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얼어붙은 겨울에는 물담살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붙들이는 절감하였다. 우물가의 물이 얼어 여간 미끄

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물물은 얼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우물에 가는 것은 대개 붙들이다. 아침에 쓸 식구들 세숫물이 늦으면

꾸중을 듣는다. 그것도 솥에 다 데워 내야 하는에. 콩심이는 그 물을 퍼내 각 방

의 어른들게 세숫물 심부름을 했다.

"세숫물이 아니고. 들어오너라."

효원은 콩심이를 안으로 불렀다. 웃목에 앉은 콩심이는 의아한 낯빛으로 효원의

눈치를 살핀다. 엊저녁으도 못 지무셌능게빈디. 어쩌까아. 내가 매급시 그런 말

씀을 디맀으까? 봉출이가 머라고 허드래도 기양 나만 알고 있을 것을. 음마,

래도 나는 들은 대로 다 욍기든 안했는디? 딴에는 추려서, 벼락맞을 말은 빼고,

안할 수 없는 말만 했다고 생각 하는데도 효원의 충격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

은 것 같았다.

"너 입조심 해야 한다. 알았지?"

효원은 무겁고 엄중하게 말했다.

"."

"나가거라."

"."

한 마디 하고는 그만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상전 앞에서 콩심이는 얼른 일어

서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그러자 콩심이 대신 효원이 몸을 일으킨다. 속에서 불

기운이 치민 탓이었다. 그네는 부엌의 화로에서 불씨를 찾아 마른 솔잎을 대고

후욱, 입김을 불어낸다. 효원의 가슴 명치에 그득 찬 화기가 솔잎에 화르르 붙는

. 금방 붙들이가 물을 퍼다 부은 항아리전을 행주로 훔치고 있던 안서방네는

작은 솥 아궁이에 얼른 불길을 받아 넣는다. 아궁이의 마른 솔가루 가리나무에

옮겨 붙는 불길이 버르르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타오른다. 그 불땀을 따라 효

원의 가슴이 같이 탄다. 맵싸하게 퍼지는 새벽 연기가 푸르게 고샅으로 흩어질

, 오류골댁 낮은 굴뚝에서도 연기가 오르고, 수천댁의 마당에도 냇내가 자옥하

였다. 강태의 아내 새터댁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불을 붙여 놓고는 시 어머니

수천댁한테 밥할 쌀을 받다 온다. 수천댁은 공출이 무서워서 뒷 골방에 이불을

여러 겹 덮어 감추어 둔 뒤주에서 한 끼 식량을 내주고는 절커덕, 열쇠를 채운

. 기표는 벌써 아까부터 일어나 간밤에 별 일이 없었는지 집 안팎을 한 바퀴

휘이 돌아보고, 외양간이며 돼지우리를 살핀 다음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고 다

시 사랑으로 들어갔다. 계집종 오빼미는 둥그런 눈을 껌벅이며 솥에서 김이 오

르는 더운물을 놋대야에다 퍼내 사랑으로 세숫물을 내간다. 차가운 새벽 마당에

누군가 중뜸으로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오빼미는 세숫대야를 든 채,

누군가, 하고는 고개를 갸웃 틀어 고샅 쪽을 내다본다. 봉출이다. 심부름을 가는

모양이다. 아랫몰 임서방은 사립문을 훨쩍 열어제쳐 놓고 삼태기를 들고는 개똥

을 주으러 나섰다. 그것은 뺄 수 없는 일과이다. 한 걸음만 늦어도 남들이 다 주

워가 버리기 때문에 부지런히 서둘러야 한다.

"봉출아. 너 개똥도 약에 쓸라면 없다어란 말 들어 밨제? 근디 무신 약에다 쓸

라고 그런 지 아냐?"

전에 한 번은 임서방이 봉출이한테 물은 일이 있었다.

"에에, 말이 그렇다 그거이제 멋을 참말로 약에다 쓴다요? 개똥을, 그께잇 거이

머언 약이 되야라우? 시상에 흔해빠진 거이 그건디. 밟으먼 미끄러지고 던지럽

기나 허제."

"그렇제? 그런디 그게 아니여. 개똥은 줏어다가 잘 말려 두먼 이질약으로도 쓰

, 인자 봄에는 논에 거름으로 쓰제잉? 말허기 쉬워서 개똥, 개똥, 하찮허게 생

각하지만 개똥이 그거 사람 못된 것보담 훨썩 쓸모가 많은 거이다. ."

기다란 집게와 개똥삼태기가 따로 있는 임서방의 두엄간에는 항상 어느 집보다

많은 개똥이 모아져 있었다. 임서방은 욕심이 많고 손이 빨랐다. 임서방이 바깥

으로 나간 사이 그 아낙은 아궁이에 불을 대강 살펴 놓고 아이들을 깨운다.

솥에서는 비록 소나무 껍질을 삶더라도 명색이 밥이 되고, 한솥에서는 국이 끊

는다.

"앵두야, 어서 나오니라. 세수해. 동생들 옷 입히고오."

어미의 고함 소리에 방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린놈이 칭얼댄

. 더 자겠다고 하는 것이겠지.

"앵두야아."

내쳐 딸내미를 부른다. 앵두를 깨우면 아우들은 저절로 깨워진다.

"해가 궁뎅이에 뜨겄다. 기양. 얼릉 일어나아. 넘들이 숭바."

부지깽이로 방문을 툭 툭 툭 두드리는 사이 아궁이의 불이 기어 나온다. 화들짝

놀라 나무를 긁어 넣는 임서방의 아낙은, 이른 새벽 물동이를 이고 아랫몰 동네

우물로 나가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에 붓고, 솥에 그 물을 데워 내고, 밥을 하고,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다가 씻고, 깎고, 썰고, 국을 끓이고 하느라고 이마에

땀이 났다. 시절도 사납고 생업이 농사랄 것도 없는데다 살림이 적어서 그렇지,

만일 그렇지 않은 때 여염의 집이라면 새벽일이 그 정도에서 그치랴. 며느리가

정지에서 물 긷고, 불 붙이고, 쌀 씻고, 분주하게 아침밥을 준비하는 동안 시조

부는 이제 막 눈 비비고 나오는 손자한테

"거 소 여물 썰게 짚 갖꼬 오니라."

시키고는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때며 소죽 쓸 준비를 할 것이다. 작두 날 사에

에서 숭덩숭덩 잘라진 여물을 솥에다 넣고 끓일 때, 손자는 할아버지 무릎 옆

에 쪼그리고 앉아 그 불땀을 바라보리라. 소가 있는 집이라면, 움머어어. 외양간

에서는 소죽 냄새를 맡은 황소가 주인을 부른다. 그럴 때 시어머니는 곳간에 쌓

아 둔 나락을 말리려고 아들한테 내오라 이르고 마당에 덕석을 펴 놓는다.

위에 쏟은 나락을 고루고루 넓게 펴는 등허리로 붉은 햇살이 비친다. 날이 밝은

것이다. 아침 밥상을 안방으로 들여 넣은 뒤, 식구대로 둘러앉아 숟가락을 들면

며느리는 정지에서 바가지에 담은 밥을 손으로 뭉쳐 대강 먹고, 숭늉솥에 불을

지피며 물대접을 챙긴다. 며느리는 언제 방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밥을 먹을 틈

이 없다. 곧 밥상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어 서러울 일도 아니었다.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시어머니도 그랬었으니. 아침밥을 먹고 숟가락을 놓

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밖으로 뛰어 나갔다. 손에는 연이나 팽이를 들고. 이제 그

놈들은 밥때가 넘어도 놀기에 정신이 빠져 돌아올 줄을 모를 것이다. 머슴애들

은 그렇게 뒤쳐 나가도 계집아이들은 집안에서 할 일이 많다. 갓난애기도 보아

야 하고, 방도 쓸고 마루도 닦고, 빨랫거리도 있다. 또 조금 나이 찬 처자는 수

도 놓아야 한다. 앵두는 자수통에 설거지할 그릇들을 담가둔 채 얼른 손을 대지

못한다. 아무래도 겨울물은 손에 차서 냉큼 묻히기가 무섭다.

"그렇게 체다보고 있으먼 누가 해주냐? 무단히 더 심란시럽기만 허제. 기왕에

헐 거 후딱 해 부러어."

"먹기만 허고 씨서리는 안했으먼 좋겄네."

"아이고, 굿을 허네. 인자 살어 바라. 그래도 씨서리가 그 중 지일 쉬운 일일 거

잉게."

임서방은 모녀가 주고 받는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가마니와 멍석을 짤 짚을 추

린다. 짚신은 많이 짜 놓았으니 안심이었다. 손끝이 날렵한 임서방은 짚신이고

미투리고 멍석이고 덕석이고 무엇이나 매그럽게 결어낸다. 그 모양이 하도 고와

마구 쓰기 아까웠다.

"어이, 임서방. 자네도 나무깨 깎으먼 고리배미 모갭이 못잖을 거이여. 한 번 해

보지 그리여? 누가 더 잘헝가 보게."

언젠가 어서방이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허든 짓이나 혀제 머. 나무깨 장사

까지 나서겄능가, 쌍나발 불게. 내 꺼이나 갂어 신으먼 되얐제."

임서방은 웃었다. 고리배미 모갑이는 밤이나 낮이나 나막신을 깎는가 하면, 나무

장수 부칠이는 날만 새면 산으로 갔다. 그 산에 눈이 오는 것이 부칠이로서는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눈뜨면 제일 먼저 어젯밤에 혹시 눈이 오지 않았는

가 그것부터 내다보았다. 부칠이처럼 나무장수로 머리가 희어진 사람이 아니더

라도, 동네 사람들은 땔감을 모두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하니, 짚신과 멍석,덕석,

가마니 등을 짜다가, 얼기가 온화하고 비교적 춥지 않은 날이면 지게들을 지고

산으로 갔다. 갈 때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동네 어귀 비오리네 주막 옆 솔

밭에 모여 같이 갔다. 그러나 산속에 들어서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오불오불

한군데 모여 있으면 나무를 많이 할 수 없는 탓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

로 어디에 나무가 많은지 여러 날 전부터 혹은 오늘 아침에 봐둔 곳이 있다.

래서 곧장 그 자리로 가, 부지런히 베어서 무더기 무더기 쌓아둔다. 낮에 다 못

가져 가면 저녁에 올라와 다시 나르면 되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한겨울에도 이

마에 땀이 돋아 흐르도록 한바탕 나무를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하고 추운 줄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는 곰방담배를 한 대 피우고, 우우어우. 소리를 크게 지른다.

그만 내려가자는 신호이다. 빈 겨울산의 엷은 얼음 같은 햇살이 그 소리의 갈피

로 스며든다. 그럴 때 저쪽에서도 우우어우. 대답이 들려온다. 나도 나무를 다했

으니 같이 가자는 소리다. 그 소리에 이쪽에서 다시 대답하며 그들은 거리를 좁

, 처음 흩어지던 그 어귀에 모인다. 등에 등에 한 짐씩 욕심껏 묶어 올린 나뭇

짐들을 지고는. 집에 있는 아낙들은 할 일이 더 많다. 물레질을 하고, 베를 짜고,

절구질을 하며 방아도 찧어야 한다. 원뜸의 율촌댁에야 집안에 디딜방아가 있지

, 대개는 곡식들을 들고 동네 디딜방아로 나간다. 쌀을 찧기도 하고 고추를 빻

기도 하는 디딜방아 디딤돌에 올라서서, 한 손으로 서까래에 매달린 끈을 잡고

발로는 방아를 찧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닦아

내는 며느리와, 절구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을 쓸어 담는 시어머니 옆에서,

다른 집 아낙들이 우스갯소리를 하며 곡식을 까불거나 티를 고른다.

"어서 가자. 애비 왔겄다."

디딜방아를 찧고 나면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둘러 일어서고, 바쁜 걸음으로 점

심을 준비한다. 마침 맞게 나무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오랜만에 본 것처

럼 반갑게 맞이하는 등뒤에서 며느리는 점심 밥상을 놓는다. 달가락 달가락.

저 놓는 소리가 평화롭게 울리는 한겨울의 짧은 한낮. 지금이야 세월이 흉악하

여 곡식 들고 방아 찧으로 동네 복판으로 나앉는 사람 없지마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가령 지아비와 지어미로 내외 지어 만난 누구라도 누릴 수 있는 그

평화로운 집안 풍경을 효원은 한 번도 누려본 일이 없다. 강모가 나무꾼이기를

바라서이랴. 아니었다. 그 따뜻한 숭늉 한 모금 같은 온기를 서로 공유해 본 일,

꿈에도 없는 내외였지만 이토록 차갑고 시린 새벽을 거울 깨듯 열어야 하는 것

이 효원은 기가 막혔다. 오유끼인가 하는 당치않은 이름의 기생첩을 보았을 때

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정이, 거울같이 깨진 가슴의 복판을 가른다. 살이 갈라

진 자리에 거울 수은이 묻는다. 형언할 길 없는 아픔이 요기를 띠고 번뜩인다.

강실이.

 

 

16. 시린 그림자

 

강실이는 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빙천의 얼음 같은 달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멀리서 울리는 대보름 풍물 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서 오히

려 강실이 서 있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검은 그림자 언저리 사립문간을 적막하게

도려내어, 무슨 깊은 물 가운데로 잠겨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 물은 소리도 없

고 빛도 없어 이승이 아닌 어느 기슭에서도 저만큼 밀려나가 있는 물이었다.

묵적의 숨죽인 수면 위에 시린 달빛의 성에가 푸르게 어리고, 그 성에 속에 강

실이는 마치 얼어 붙은 흰그림자처럼 서 있는 것이다.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강

실이의 얼굴은 이미, 정월 밤의 검푸른 하늘에 뜬 흰 달보다 더 창백하게 얼어

있었다. 아까 날려 보낸 액막이 연은 어디로 날아가 하늘의 수심 까마득한 곳으

로 가라앉았는지 이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액막이 연이, 이마에 선연한 물들인

꼭두서니 홍꼭지 대신 건은 먹으로 ''이라 써 붙이고, 귀신의 낯빛같이 허옇게

질린 창호지 치마를 나울거리며, 연꽁지에 조그만 제웅을 고적하게 매단 채 훌

렁 떠올라 깟닥깟닥 하늘 한복판으로 날아 들어갈 때. 강실이는 웬일인지 그 연

꼬리에 가느다랗게 매달린 실이 명주실처럼 느껴졌었다. 마을 뒤 저수지 청호의

물은 하도 깊고 푸르러, 명주실 몇 꾸리를 다 풀어도 그 바닥에는 닿지 못한다

하던가. 그래서 어느 해 어느 봄, 각시 복숭아 진분홍 꽃잎이 숨막히게 지고 지

던 밤, 소복을 한 인월 아짐이 한순간에 몸을 던져 물 속으로 빠졌을 때, 사람들

은 끝내 그네를 찾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했다던데. 강실이는 그 이야기를 들으

면서 인월 아짐 흰 등어리에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 가늘면서도, 잡아 끊으려

하면 오히려 손을 베어내고 마는, 질긴 명주실이 길게 길게 매달린 것만 같은

환영을 보았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생년월일 생일 생시를 적어 넣은 백지에

액을 안고, 허수아비 지푸라기 제웅은 연에 매달리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밤

하늘로 몸을 던지었으니. 궂은 액 사나운 운수는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인가.

니면 명주실 같은 연실에 걸리어 그만 다시 이곳으로 잡아당겨지고 말 것인가.

그네는 이제 아주 안 보이게 된 액막이 연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몸만 같아서,

마치 저수지에 몸을 던진 인월 아짐처럼, 밤하늘의 복판 아찔한 수심 속으로 깊

이 빠져 잠겨들고 있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명주실. 이미 그네를 지상으로 잡

아당길 명주실은 연 자새에서 다 풀리어 무엇에도 제 가닥을 걸어 볼 길 없어,

머리카락 한 올처럼 시르르 허공에 떠오르며 이윽고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슨 액을 막으려 엄니와 아버지는 이 달 뜬 밤, 연을 띄우셨을까. 강실이는 한숨

을 삼킨다. 한숨도 서걱서걱 얼어 있다. 시리다.

 

 

17. 저 대나무 꽃

 

어지신 산신 할매 금지옥엽 우리 애기 외 굵듯 달 굵듯 모래밭에 수박 굵듯

먹고 자고 무럭무럭 키워 주소 복을랑 석숭에 타고 명일랑 동박식에 타서 균(

)자동이 금자동이 누가 봐도 곱게 보고 외 굵듯 달 굵듯 모래밭에 수박 굵듯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무럭 무럭 키워 주소 쥐면 터질세라 불면 날세라 금지옥엽

우리 애기 무병장수하게 하옵소서 누구라도 아기를 낳으면 삼신 할머니한테 정

한수 떠놓고 시루떡 올리며 미역국에 흰 밥을 차려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

축문을 외운다. 강실이를 낳은 오류골댁도 그랬었다. 아직 몸을 추스리기 어려운

첫이레 때부터 두 이레. 세 이레. 일곱 이레를 다하도록 그네는 칠 일마다 정성

스럽게 소반 앞에 꿇어얹아 손을 비비며 빌었다. 그리고 삼신 바가지는 안방 시

렁 위에 모시었다. 그 바가지 속에는 쌀을 담아 창호지로 덮어서 무명 타래실로

묶어 두었는데, 바가지에 담긴 곡식은 봄,가을에 햇곡식으로 갈아 넣고, 묵은 쌀

로는 밥을 지어 온 식구가 함께 먹으면서

"삼시랑 할머니한테 감사 디려라."

하였다. 그것은 음복이었다. 삼신은 여러 가신중에 생산,출산을 맡으신 산신이니,

집안에 새로 나는 어린 생명의 산육을 관장하여 돌보아 주시므로, 아들 낳기를

바라거나 산모가 순산하기를 빌 때, 그리고 산모가 건강하게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할 때, 또 태어난 아기가 아무 탈 없이 자라게 해 달라고 빌 때, 반드시 이

할머니를 찾는 것이다. 이기채와 기표, 기응의 생모인 이울댁은, 손자 강태를 낳

을 때도 손녀 강실이를 낳을 때도, 미역 한 단과 쌀을 상 위에 놓고 손을 비비

며 빌었다. 이미 양자 간 기채의 아들 강모를 낳을 때도, 명도 많고 복도 많고

젖도 많고 순산하게 해 줍소서 헛심 주지 말고 된심 주어서 헌 치마에 외 빠지

듯 얼른 낳게 도와 주옵소서 그리고는 뒤안으로 가서 피마주대를 거꾸로 세워

놓고, 새암으로 가서는 물독을 엎어 놓았다. 그것들이 쏟아져 흘러내리듯이 어린

아이를 쉽게 낳으라고 비는 마음이었다. 이울댁은 막내며느리 오류골댁이 강실

이를 순산한 뒤에, 깨끗한 짚 한 줌, 청수 한 그릇, 흰 쌀밥에 미역국을 소반에

받쳐 삼시랑 할머니한테 올렸다. 그저 애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집안에 궂은일

없이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치성이었다. 집안을 지켜 주는 가신은 삼신 할머니

만이 아니었다. 대들보 위에서 그 집안의 길, , , 복을 맡아 보는 성주신,

량신, 안방 웃목에서 후손을 보살펴 주는 조상신, 안방의 아랫목에서 어린애를

낳고 기르는 것을 돌보아 주는 삼신, 그리고 부엌에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옥황상제에게 낱낱이 보고하는 조왕신, 집터를 지켜주는 지신, 대문으로 들오는

재액을 막아 주는 문지기 수문신, 거기에 우마의 번식을 돌보아 주는 외양신과

장독대에서 간장과 된장을 보살펴 주는 철륭신, 또 우물이 마르지 않게 해 주는

정신이며 뒷간에서 액을 막아 주는 자당신. 이중에 어느 가신도 소홀히 섬기면

안되었다. 모두가 집안 식구들에게 수명장수를 하게 해 주고, 평안과 만복을 가

져다 주는 신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귓간신 주당각시만은 예외로 노여움이

많아서, 잘 받들지 않으면 탈이 붙기 쉬웠다. '정낭각시'라고도 하고 '칙간조신'

라고도 하는 이 뒷간 귀신은

"아조 예쁘고 젊은 각시 귀신이란다."

아직 열 살이 채 못된 강실이에게 숙모 수천댁은 그날따라 뒷간신 이야기를 들

려 주었다. 뒷간은 안채나 사랑채 어디서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

었고, 원뜸의 종대같이 규모가 큰 가옥의 안뒷간은 부엌 옆구리 마당에 세운 디

딜방앗간 벽에 붙여 지었으며, 바깥 뒷간은 사랑채 후미진 모퉁이와 대문 밖 같

은 데 두는 것이 예사였다. 천지가 먹장같이 깜깜한 오밤중에 더 못 참고 할 수

없이 일어나 그곳으로 가자면 우삣 쭈삣 방앗간에 매달린 기구들의 음산한 그림

자에 까닭 없이 놀라고, 외따로 떨어진 뒷간에 성큼 들어설 수 없도록 잔뜩 움

츠러든 끝이라, 바스락, 소리에도 가슴이 내려앉아 무서움증에 오들오들 떨리는

것은 비단 겁많은 아낙이나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뒷간에 갔다기 일당헌 사람 많지 않으냐? 그러니 주당각시는 곱게 달래고 조심

스럽게 위해 드려야 하느니. 그래서 뒷간을 새로 짓거나 고치고 나면 꼭 날을

잡어서 부적 쓰고 제물 갖추어 고사를 드려야 하는거다. 너도 알아 두어야지?

도라지, 고사리 나물에다 밥 한 그릇 담고 해서 채반 같은 데다 얹어 뒷간 문앞

에 두면 되고, 부적은 뒷간 벽에 붙이고,"

아이들이 아차해서 신을 떨어뜨리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도, 건지고 나서는 꼭

그 앞에 떡을 해 놓고 빌어야 했다. 아니면 주당의 노여움을 사서 시들시들 아

프거나 병이 든다고 하였다.

"그러니 뒷간에 갈 때나 올 때나 절대로 함부로 허면 못써, 너 왜 이런 이얘기

못 들었어? 어떤 사람이 뒷간에 혼자 못 가겄다고, 으스스찬 바람 불고 밤은 깊

어 캄캄했던가, 꼭 귀신 나올 것 같다고 그럼서 옆에 자는 사람을 깨워서 같이

갔더란다. 따라간 사람은 밖에 서 있고 가자 하던 사람은 안으로 들었는데, 이제

그만 나올 시간이 하마 얼마나 지냈는제도 사람이 안 나오더래. 처음에는 좀 지

체가 되나 보다 했던 이 사람이 순간 오싹 허면서 불길한 생각이 스쳐, 어디 보

, 뒷간문을 열어제쳤는데,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쪼그리고 앉은 사람이 앉은

채로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죽었더란다. 주당을 맞은 게지. 입방정에 주당

신이 노한 거야, 주당각시가 그렇게 무섭단 말이다. 그러니 뒷간에 갈 때는 그

노염을 안 받으려고 미리 그 근처에서 어흠, 어흐음, 서너 번 헛기침을 하면서

지금 사람이 간다는 통고를 해야 한다. 그래야 주당신도 안 놀래지. 무심코 앉어

있던 주당각시가, 캄캄한 뒷간에 갑자기 사람이 들이닥치면, 아이쿠머니, 깜짝

놀래겄지? 이 뒷간신은 이러언 긴 머리칼을 제 발에 걸고 헤아리는 버릇이 있단

. 그렇게 머리카락을 세고 앉었다가 소리고 없이 벌컥 사람이 들어서면 놀래

, 자기를 해치러 들어온 줄 알고 그만 제 머리카락을 그 사람한테 뒤집어씌워

칭칭 감어 버린대. 무섭지? 그러니 보통 때도 늘 조심을 해야한다. 그리고 잘 받

들고. 그래서 섣달 그믐날 밤에는 뒷간에 밤새도록 불을 밝혀 두지 않어? 새벽

닭이 울 때까지. 그게 공들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여움을 사서 주당에 걸리면,

무당 불러서 주당풀이를 해야지. 안 그러면 얼병 들지. 얼병 들고 말어, 끝내."

수천댁이 어린 강실이를 얹혀 놓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 오류골댁은 걱정

스러운 얼굴로

"애들 놀랠라고..."

하였다. 수천댁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이만허면 양반이지. 더 무서운 얘기 해 주까? 달걀 귀신, 간짓대 귀신, 저어 도

깨비허고 씨름헌 이얘기?"

"아이고, 형님도. 인제 강실이 뒷간은 다 갔네. 그게 다 조심허라는 말씀이지,

너 무서우라고 그러시는 것아니다. 알었지? 아가."

오류골댁은 치맛자락으로 강실이의 조그맣고 하얀 낯을 씻어 주었다. 강실이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박이며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럼 뒷간말고 부엌으로 가지 머. 부엌에는 말이다. 조왕신이 계시지. 우리들이

밥도 잘 먹고 몸도 충실허게 잘 건사허도록, 온 가족 건강을 다스리는 가신이

이 조왕신이신데, 어디 계시는고오 허면, 부엌의 큰솥 뒤에 도사리고 앉어 계신

단다. 제일 큰 솥 있지? 그 뒤에. 그래서 그 자리는 아조 정갈허게 행주로 닦고

티 하나 없이 해 놔야 헌단다. 그러고 거기다 정화수를 공손히 떠놓아야지. 이른

새벽 우물에서 첫 번째로 길어 올린 샘물 말이다. 아무도 아직 그 물을 안 들여

다본 물, 남 다 자는 이른 새벽,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찍 일어나서 날마다 그 정

화수를 바치고는, 아궁이에 불을 때기 전에 그 앞에 앉어서 온 가족의 무사 안

, 무병 건강을 빌어야 해. 그저 조왕신은 정갈허게 섬기는 것이 제일이니라."

수천댁의 이야기 중간에 오류골댁도 이번에는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조왕신 노여움을 안 살라고, 솥뚜껑을 열거나 덮을 때도 소리가 안 나게

조용히 조심을 해야 헌단다."

"아 그 가마솥이 소두방 뚜껑이 좀 무거워? 큰솥은 더더구나. 왈그랑 달그랑,

드랑 퉁 탕, 까딱허면 참말로 시끄럽지. 잘못허다가 내부치기도 쉽고. 의젓잖은

예펜네 소두방 소리만 요란허다고, 온 동네 흉잡히는 사람도 있니라. 그런데 동

네 흉이사 좀 잡히고 말면 그뿐이지만 조왕님이 노허시면 가족이 큰일이지.

맛 없고 시들시들, 또 병도 나고, 안된다. 그래서 부뚜막은 절대로 함부로 고쳐

도 안되고, 더군다나 거기가 어디라고 부뚜막에 걸터앉어서도 안돼. 불경스러워

. 그런 일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너는 어린 것이라

도 음전해서 그럴 일 꿈에도 없겄지마는."

그저 조왕신은 위하고 공경해서, 봄이면 일찍 핀 진달래를 꺾어 와 그 연분홍

꽃가지를 바치고, 가을이면 일찍 영근 벼이삭을 베어 와서 황금빛 수확을 고하

며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고 했다. 강실이도 어머니가 조왕에 진달래를 드리는

것을 본일이 있었다. 바라보기에도 애달픈 연분홍 스러질 듯 무리무리 피어난

진달래 꽃가지를, 정화수 올린 흰 사발 앞에 곱게 놓고, 이만큼 물러앉은 오류골

댁이 단정히 앉아 두 손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어 무엇인가 기원하는 그 뒷모습

, 자주 댕기 물린 검은 낭자머리였다. 그 어머니의 등뒤에 선 강실이의 어린

눈에, 젊은 어머니의 고운 머릿결에 흐르는 윤과, 기름이 흐르는 듯한 솥뚜껑의

검은 윤, 그리고 아련하여 곱고도 멀어 보이는 진달꽃 연분홍 숭어리와 그 너머

의 정화수 흰 사발이, 이상하리만큼 선연한 정경으로 들어와 깊이 찍히어, 그것

은 잊혀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조왕님은 옥황상제 신하시라. 음력 섣달 스무닷새날이면 어김없이 천

상으로 올라가서, 상제에게 노왕신이 머물고 있는 집안에 일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을 다 고한 뒤, 섣달 그믐날 밤이 되면 다시 제자리로 내려오신단다.

래서 섣달 그믐날 밤에는 수세하면서, 방에도 광에도 마당에도 뒷간에도 불을

밝혀 놓지 않느냐? 그럴 때 조왕단에도 환허게 불을 켜 놓고 밤을 새우잖어?

게 다 조왕님을 위해서 공을 들이는 것인데, 특별히 어두운 밤에 먼 길 오시는

조왕신의 발길을 인도하는 것이기도 하단다."

그 불 밝힌 조왕단 부뚜막에는 정화수와 쌀을 가득 담은 함지를 차려 놓고 절을

하면서 큰 소리로 축원을 하였다.

"떠 들어온다. 떠 들어온다아. 무량 대복이 떠 들어온다. 천 석 만 석이 떠 들어

온다."

그것은 강물처럼 한량없이 많은 곡식과 많은 복이 밀물처럼 흘러들어오라는 기

원이었다.

"강실아. 너도 지금은 느그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지마는, 인제 곧 나이 되면 남

의 집에 시집을 가서 시부모 모시고 남편 받들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남노여

비 호제것들 거느리어 살림을 살 터인데, 한 집안의 주부가 하는 일 한두 가지

아니다만, 부엌을 잘 건사하는 것이 그중 첫째이고 그 중 소중한 일이란다.

집안의 생사화복이 그 부뚜막에 달렸거든. 거기에 늘 양식이 수북수북 넘쳐나고,

그 양식 기름진 것만큼 식구들 밥숟가락 소복소복 복스럽고, 그 밥 먹는 내 식

구들 아픈데 없이 마른 데 없이 끼니마다 충실해야, 오복중에 지복이 아니겠느

. 사람으로 그 일 맡은 것은 주부이고, 가신으로 그 일 맡으신 분이 조왕신이

니라."

수천댁은 자기를 동그맣게 올려다보는 강실이의 볼을 꼭 찌르며

"알았지?"

하는 시늉으로 웃었다.

"너 시방 몇 살이지?"

"아홉 살이요."

"아이고, 장허네. 언제 그렇게 먹었어? 어디로 먹었는고? 어디? 아아, 이 이쁜 입

으로 먹었냐?"

수천댁은 이번에는 질녀의 조그맣고 발그스름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곡 찔러 주

며 웃었다. 본디 자상한 성품은 아닌데다가 대찬 모색이 있는 수천댁이었지만,

강실이한테만큼은 가끔씩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해 주고, 댕기 물린 새앙머리

를 매만져 쓰다듬기도 하며, 그 앙징스러운 모습을 귀여워하였다.

"강실아, 너 어디로 시집갈래? 숟가락 한번 잡어 봐라."

수천댁은 언제인가 밥상머리에 앉은 강실이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조막만한 강

실이는 영문도 모르고 제 숟가락을 들었는데, 어린 마음에 무슨 일인가 싶어 숟

가락 잎사귀 바짝 가까이를 쥐었다.

"하하, 고것 참. 너 어디 담 너머 이우제로 갈래? 어머니 못 잊혀서? 그렇게 뽀

짝 곁으로 시집가면 나도 좋지. 이쁜 질녀 오며 가며 복받고 사는 것 구경도 혀

, 느그 어머니는 더 좋것다. 산넘고 물건너서 가기도 오기도 어려운 데로나 시

집을 가 놓으면, 보고 자와도 갈 수가 있는가, 오고 자와도 올 수가 있는가.

래 어디로 갈랑고? 옆집으로는 못 갈 테니, 둔덕이로 갈 것인가? 머 그 동네서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동제간이니까."

수천댁이 모처럼 한가롭게 강실이를 데리고 노는 양을 홑이불에 푸새를 하며 바

라보던 오류골댁이

"저것 남의 집 보낼 일이 지금부텀 걱정이네요." 하였다.

"그 걱정만 아니라면 딸자식이 왜 서운해? 아들보다 귀엽고 눈안에 들고, 애지중

지 고운 맛이 천지에 다시 없는 것이 딸자식이지. 색색 가지 비단 헝겊, 무지개

보다 더 이쁜 게 딸 아닌가. 그렇게 이쁜 것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남의 식구로

떠나가 버리는 것이 어디 예삿일이야? 자네나 나나 이 강실이란년이나, 어려서

는 딸이었고 자라서는 에미가 되는 여자인데. 부모의 무릎에서 보배로운 구슬같

이 고임받고 크다가 언제 한번 효도할 틈도 없이 이제 겨우 사람 시늉할 만하

, 낯설고 물설은 곳 남의 집으로 시집을 가야하니. 가마 타고 가는 길을 돌아

보면 무엇 해.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살아 생전 다시 언제 뵈올는지 기

약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시집가는 길인데. 그저 근친이나 한 번 갔다 올 뿐 일

생에 부모 슬하 그 다정하신 무릎앞에 다시 앉기 어려운 것이 여자라. 이런 이

별을 겪어야 하는 딸이란 참 아니할 말로, 전생에 죄가 많어서 여자로 난다는

말을 절감하게 허는 것이지. 그러니 강실아아, 너는 아조 가찰막허게 시집가그

. 가까이 살어도 시집은 먼 것이다만 그래도 그게 아니지. 아조아조 가찹게 코

밑으로 가르라. ? 느그 엄니, 너 하나뿐인데 어찌 두고 먼 데로 가? 나도 아들

만 있지 딸이 없으니 네가 먼 데로 가면 그리울 거고."

"형님, 그 애가 아직 아홉 살이어요. 아직은 몇 년 더 남었그만요."

"그 몇 년이 화살이야. 두고 봐."

"하기는."

"이 애 바느질 헐 줄 알지?"

"엊그저께 처음으로 제 저고리 하나를 조물조물 허드니 그런대로 모양은 만들어

놨드만요."

"? 누구, 자네 것?"

"어디가요. 강실이란년 것 말이지요."

"으응. 요것이 바느질도 참 곱게 잘헐 것이네. 자네 솜씨가 좀 음전해? 누비 이

불 열두 채를 지어도 바늘 한 땀 안 틀어지는 솜씨지."

"형님도 참. 누가 들으면 웃겄네요."

"나는 속에서 불이 벌벌 나 그런 일은 오래 하고 못 앉어 있어. 마실은 좀 괜찮

."

"무단히 말씀만 그러시지요 뭐."

"강태란놈이 나 탁는가 그렇게 한자리에 진득허니 앉어 있지를 못하고, 펀적

허면 나가고, 집에 붙어 있을 틈이 없네 그려."

"아이고, 인제 열 살 막 넘어서 한참 개구쟁이 정신 없을 때 아닌가요? 거기다가

사내아이. 호방하고 활달해서 삼동네 대장은 혼자 다 도맡노라고 그러지요. 계집

애허고는 다르잖아요."

"막대기 깎어 논 것, 칼 맨들고 창 맨들어 아조 무슨 노적가리같이 삼각지게 쟁

여 놓고는, 줄남생이 줄줄이 몰고 댕기는 것 모양 아이들이 나 몰고 다니면서

우얏, 우얏. 그래도 그놈이 남의 뒤는 안 가는 것 같은데. 나중에 커서 어영대장

을 헐란지 훈련대장을 헐란지. 도대체 손이 라고, 망치 들고 못 박고, 칼 들고

칼 깎고, 성헐 날이 없구만. 노상 찧거나 베거나 다치거나."

"그래도 학교 공부는 제일 앞서서 사매 보통학교 생긴 이래 그만헌 머리 본일이

없다고들 한다지 않던가요."

"신기하기는 한 일이지."

"형님도 그러시고, 수천서방님 또한 예삿분이 아니시니까."

"그애가 아버지 닮기는 많이 닮었더."

"인제 그 애, 강태가 무얼 해도 한 자락 단단히 헐 것이네."

"큰 집 작은 집 종항간이라도 강모 좀 봐. 나 세상에 강모같이 참한 애기 또 있

는가 싶대. 같은 사내아이라도 어디 부잡스러운 구석이 있는가아, 말헤길(말썽부

) 일이 있는가. 보고 있으면, 각시도 저만은 못허지 싶게 조용허지. 곱고."

"사람이 다 서로 다르지요. 그래서 몫이 다르고 허는 일이 다르고."

"허기는 종손이 강태마냥 그렇게 산으로 들로 헤매고 돌아댕기면 큰 일이지.제사

받들고 조상 모시면서 문중 살림 허저면 그런 성품으로 타고나야 해. 강태는 천

상 집안묶이는 아니고."

"그것도 커 봐야 알아요. 크는 애들은 열두 번 변헌다는데."

"그렇기는 해. 아앗따아, 강실아. 너 어저께 밥상 한 번 이쁘게 채렸드라잉?

거 별 것이 다 있대? 새파란 싱건지 나물에 살구꽃 밥을 해놓고 또 뭐이 있었

? 황토 고추장, 진흙 찰떡에다 모래 깨소금...어디서 그런 오색 반찬을 다 구해

다가 상을 봤더냐? 반찬그릇도 어찌 그리 너 모양으로 양글어서서, 흰 대접 깨

진 것을 아조 진주같이 보드랍고 광채나게 갈어 갖꼬 칠첩 반상기를 맨들어 놨

? 너 나중에 살림을 얼마나 잘헐라고 지금부텀 그렇게 솜씨 자랑을 허냐?

것 참."

"머 그 애는 아직 그것이 일이지요."

수천댁과 오류골댁은 서로 마주보고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 소꿉놀이 밥상을

받은 사람은 강모였다. 어린 도련님 강모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차린 꽃밥에 칠첩 반상 백옥 같은 사금파리 접시 위의 색색 반찬을, 강실

이가 집어 주는 대로 받아 맛나게 먹었다. 그 아홉 살 열 살의 동그만 머리 위

, 봄이 이울은 살구나무의 그름 같은 연분홍 비칠 듯 말 듯한 꽃잎들이 하염

없이 흰 눈처럼 날아 내려, 강실이의 작은 어깨와 저고리 깃, 옷고름 사이로 스

미어 지고, 강모의 앞자락과 무릎에 졌다. 그리고 밥상 위의 밥그릇과 국그릇,

반찬그릇 색색 위에 하얗게 졌다. 나풀나풀 날아 내리는 꽃잎들은 여리고 곱다

못하여 애달프기 그지없는데. 강모는 내리는 꽃잎의 너울 저쪽에서 나뭇가지 젓

가락으로 꽃밥을 먹으며 웃고, 강실이는 내리며 스러지는 봄눈같이 안타까운 꽃

잎들의 이쪽에서 웃으며 새 그릇에 꽃밥을 담았다. 꽃잎은 녹는 것이 아니어서

봄눈보다 고와, 돗자리돠 밥상과 마당 위에 비늘같이 작은 몸을 누이었다. 그 살

구나무 고목은 어제처럼 아직도 사립문간에 그림자 드리우고 서 있는데, 그날보

다 많이 늙어 검은 둥치가 바라진 살구나무 가지 머리 아마득한 공중에서 가슴

아린 살구꽃 구름 무리는 에이도록 영영하게 흩날리건만, 그 나무 아래 돗자리

는 이미 걷힌 지 오래고, 마주앉은 강모는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강

실이는 이렇게 한겨울 얼음 박힌 그림자로 허옇게 서서, 액막이 연 날아간 하늘

의 물 속, 그 어둡고 푸른 수심에 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실이를,

담 밑에 바짝 붙어 선 춘복이가 아까부터 새파랗게 노려보고 있는 줄을 그네는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전심을 추신하며 아득히 날아 거꾸로 빠

져들어가고 있을 뿐. 춘복이는 그런 강실이를 노려본다기보다, 아까 산봉우리 꼭

대기에 올라 맨 먼저 떠오르는 대보름달을 우러르며 무섭게 그 정을 빨아들이었

던 것처럼, 전력으로 강실이를 흡월하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강실이는 자신을

어디엔지 삼투당하듯 질리며 조금씩 파리해지고 있었다. 그네는 창호지보다 얇

아 보였다.

"내 한 몸이 있으려면 조상이 먼저 계셔야 하지 않겄냐? 그래서 안방 웃목에는

조상신 조상단지를 모셔 놓는 게야."

그날 수천댁은 말했었다.

"조상신을 잘 섬기는 것이 부녀자의 할 일이지. 사당에는 위채가 계시지만 안방

에는 조상신이 계시거든. 의식 절차 갖추어 의관을 정제하고 제사 모시는 사당

의 위패 못지않게, 한 집안의 주부 아녀자가 모셔야 하는 것이 이 조상신이란다.

그래서 위패 대신 정결한 단지를 가신으로 모시는데, 이것이 신체지. 신체. 그냥

단지가 아니라. 그 신의 몸 속에다가는 그해에 처음 나는 햇보리나 햇벼를 철

맞추어 가득 담어 놔야 해."

그리고 나서는 곡식 넣은 단지를 문종이로 봉하여 왼새끼로 둘러 묶고, 그 위에

널빤지를 얹어 놓았다. 오류골댁 웃목에도 수천댁 웃목에도, 또 누구네 웃목에도

집집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조상단지는 앉아 있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안방

의 시렁 위에 올려 모시기도 하였다. 무심히 보던 그 단지를 그때부터 눈여기며,

단지 속에 앉으신 조상님의 모습을 혼자 상상해 보는 강실이에게, 오류골댁은

"오늘은 떡을 했으니 조상신한테 드리자."

하며, 조신하게 두손으로 떡 접시를 받들어 단지 위에 덮인 널빤지에 놓았다.

것이 조상신의 밥상인가 보았다. 식혜를 하여도, 찰밥을 쪄도, 아니면 그 무슨

조그만 별미만 하여도 오류골댁은 그렇게 올리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서 무엇 무엇을 조금 하였삽는데, 맛을 먼저 보옵소서."

하고 나직이 고하였다. 그리고 행여라도 그 단지를 다칠까 보아 방을 훔칠 때나

들고날 때 치맛자락을 모두고 발걸음을 조심하였다.

"그저 집안이 무사 태평하게 해 주옵시고, 금년 농사 풍년 들어 함포 고복 화락

만당하게 해 주옵소사."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이면 오류골댁은 으레 정화수 한 사발에 밥과 떡, 삼색나

물을 제물로 차려 그 앞에 올리며 빌었다.

"술이나 고기는 쓰는 것 아니다."

오류골댁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철이 되어 새 곡식을 갈아넣게 되면, 조상단

지에서 비워 낸 묵은 곡식으로는 밥을 지어 자기 식구끼리만 갈라 먹었다.

"이 밥은 남 주면 안되는 것이다. 꼭 제 식구만 먹어야지. 남한테 주면 그 준 만

큼 복이 달아난단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밥만큼은, 한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한테도 안 주는 거야."

이 외에도 장독 위에 청수 담은 물그릇을 올려 놓은 칠성신, 뱀이나 구렁이,

꺼비, 족제비들을 ''으로 모시어 집안의 재운을 비는 일이며, 집안 곳곳 처처마

다 계시는 온갖 가신들을 공손히 모시고 위해 드리는 것이 가모 부녀의 귀중한

소임이라고, 오류골댁은 항상 강실이에게 일렀다.

"한 집안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남자의 국량과 양명 여부에도 달렸지마는, 그러

한 것조차도 다 안에서 살림 맡은 안주인이 이 모든 가신들을 정성으로 섬기고

잘 받들 때, 후손도 복을 받고 가세도 창성하여 집안이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어느 고을 누구네, 하면 다 알 만한 집안에는 반드시 이런 가모, 부녀가 있느니

. 너도 인제 남의 식구 되어 갈 사람이고, 그 집안으로 들어가면 네 할 일이

이것이니 명심해 두어. 큰집에 청암 할머님 일거수 일투족 거동을 하나도 놓치

지 말고 늘 눈여기어 속에다 새겨 두고. 우리 문중 이씨 집안, 그저 공 없이 내

려온 집안 아니다. 누대의 할아버님들 학덕에 힘쓰실 때, 누대의 할머님들은 온

집안 구석구석 한 곳도 빈틈없이 가신을 섬기고 모시면서, 성주님에 빌고, 대문

, 외양신, 뒷간신에 빌었으니, 그래서 우여곡절 다 겪으면서도 이 집안 이 가

문이, 그 정성 공덕으로 이만큼 내려온 것이다. 집안에 훈김 나고 냉기 도는 것

은 다 여자 할 탓이란다. 무엇보다 여자의 마음속에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

고 이 우주 만물 삼라 만상에 대한 공경심이 있어야 하고. 경박하고 교만한 것

이상으로 큰 여자의 흉이 없니라. 솜씨 없는 것은 때로 순박하게도 보이지만 고

쳐 보이지만 고쳐 보지 못할 것은 그 두 가지니. 살림 까불어 먹고 식구 흩어지

게 하며, 남에게 척을 지어 적을 삼고 화를 입는 집안에는, 꼭 이런 여자가 틀어

앉어 있는 법. 경계, 명심해야지."

오류골댁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강실이에게 몇 번이고 그토록 일렀다. 집안에

못된 잡귀 범하지 말라고, 기응이 잘라 온 엄나무 가지를 가시에 질리면서도 낯

빛 하나 찡그리지 않고 방문 위에 걸 때나, 외양간의 암소가 새끼를 낳으려 하

면 그 앞에 불을 밝히고 백설기를 해다 바치며 빌던 때도, 오류골댁은 엄숙 정

중하게 두 손을 비비었다. 그러나 강실이는 아직 그 오류골댁을 닮지 못하였다.

그네는 아직 가모가 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

할머니, 그리고 그 윗대 현조할머니와 그보다 더 윗대의 할머니들이 어느 성씨

어느 가문에서 아리땁게 자라나, 이곳 이씨 매안 문중 지붕 아래 꽃씨들처럼 날

아와서, 곱게 자리 잡고 뿌리 내리어 떡잎 나고, 줄기 나고, 잎사귀도 무성하게

우거져, 혹은 한 떨기 수국도 되고, 혹은 한 포기 모란도 되고, 혹은 풀꽃, 혹은

느티나무,정자나무도 되고, 아니면 청청한 대나무 푸른 서슬 곧은 나무도 되면서

여기까지 오시어 강실이도 생기었건만. 강실이는 그 거대한 숲과 꽃밭의 한쪽

귀퉁이에서 삭은 채로 얼어붙은 제 그림자처럼, 한자리에 그렇게 서 있기만 하

는 것이다. 그네의 허전한 가슴에 문득 베갯모 하나가 홀연 떠올랐다. 그것도 아

마 아홉 살 때였을 것이다. 수천댁과 주당각시 이야기하며, 오류골댁이 강실이를

보고 처음으로 제 저고리를 지어 보았노라고, 바느질 이야기를 하던 무렵이었을

터이니.

"강실이가 베갯모에 수를 놓았는데요."

오류골댁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베갯모?"

"헝겊을 달라길래,어디 그럼 여기다가 베갯모 수나 한 번 놔 봐라, 그러고는 마

침 비단 자투리 요만한 것이 있어서 내줬지요."

그래. 그것은 청,홍의 손바닥만한 비단 조각 두 장이었다. 참 곱기도 했었지.

바닥에 닿는 감촉은 어린 손보다 더 보드랍고도 톡톡하였다. 이비단에 수를 놓

아 베개를 만들어 보자. 강실이는 혼자서 궁리를 하다가, 집안 뒤안이며 마을 언

저리에 바람소리 새파랗게 솟구치는 대나무를 수놓아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리고는 묵지를 대어 무늬를 꼼꼼이 그린 뒤에, 수를 놓기 시작하였다. 날렵하게

뻗은 봉황새 혓바닥 같은 댓이파리와 곧은 줄기, 강건한 마디. 옆에다 동무나무

세워서 이 가지와 저 가지가 다정하게 어우러지도록 이파리를 놓아 나가고,

디를 푸르게 뻗쳐 올리었다가 동그랗게 고부리어, 강실이는 올 하나 트지 않은

수를 놓았다. 콧등에 땀이 송송 맺히도록 공을 들여 놓은 수를 며칠 걸려 다 마

치고 나서, 강실이는 수줍고 자랑스럽게 오류골댁 앞에다 그것을 내 밀었다.

른 비단 붉은 비단의 네모난 조각이 영롱한 광채로 빛나는데, 어린 손으로 수놓

은 대나무는 금방이라도 바람 소리를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든

오류골댁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었다.

"?"

"아이, 장하다."

고 칭찬 받을 줄 알았던 강실이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대나무가 아니라 난초로구나. 난초 같은 대나무야."

강실이는 의아하여 어머니를 한 번 보고, 제가 놓은 수를 들여다보고, 무슨 말인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안하여 얼굴이 발그레 물들고 말았다.

"강실아. 아가, 대나무는 이렇게 쪽 곧아서 쭉 뻗친 것 아니냐. 밑둥부터 나무 꼭

대기 끝까지 구부러지거나 옆가지 안 나는 것이 대나무란다. 일편 단심, 한 줄기

, 외로 서서 하늘을 창대같이 찌르는 것이 대나무지. 네 대나무는 잘 트다가

그만 끄터머리가 요렇게 낭창낭창 모두 난초잎같이 휘어져서 꼬부라졌지 않으

. 참 아깝네. 수는 아주 잘 왔그마는, 이렇게 휘늘어져 꼬부라진 대나무는 없

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머니 오류골댁은

"난초 대."

라고 그것을 이름붙여 주었다. 수천댁한테 그 이애기를 하며 강실이를 가운데

놓고 동서간에 서로 웃었던 일이, 왜 이 순간에 그다지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

일까.

"왜애, 시누대 같은 것들은 바람이 불면 공중에서 쏴아 휘어지기도 허지. 아마

이 애가 그걸 본 모양이로구만 그래."

"'그랬냐?"

수천댁과 엄니의 말에 강실이는 고개를 수그리고만 있었다. 그네의 연한 목덜미

와 귀밑까지도 어느새 발갛게 부끄러운 물이 들었다.

"바람에 쏠려도 대는 대라. 요렇게는 안 휘어질 것이다만. 머 처음 놓는 수 다

그렇지. 에이 잘 왔다. 이쁘게 잘했어. 갔다가 반닫이에 넣어 둬라. 그러고 이 담

에 시집갈 때 갖고 가그라. 나중에라도 두고두고 웃게. 느그 딸내미 너만해지거

든 보여 주면 더 재미있고."

수천댁은 청,홍 비단 헝겊 조각을 강실이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리

고 그것은 정말, 처음 놓은 수이기도 해서 그랬겠지만, 어쩐 일인지 반닫이 속

깊숙이 간직된 채, 이 세월에 이르도록 휘어져 꼬부라진 줄기를 제대로 뻗지 못

하고 있었다. 그것이 생각난 강실이는 문득, 그 대나무가 자신인 것만 같아진다.

대나무는 과연 몇 년을 사는 것일까. 그때 그 쓰지도 못할 베갯모에 수놓은 대

나무가 만일 산 것이었다면, 지금 오늘까지 살아 있을까, 혹은 죽었을까. 창을

깎아 만들게 꼿꼿한 줄기에 견고한 마디로 몸을 세우며, 껍질은 벗기어 대소쿠

리 채반에다 조리를 만들고, 속은 텅 비워 바람을 불어 넣느면 악기로 변하는

이 대가, 창공으로 기개를 뻗치는 대신 땅으로 머리를 쏟는 버들처럼 거꾸로 휘

어져, 아직도 죽지 않고 살고 있을까. 대나무는 꽃이 피면 죽는다고 하였다.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은 변고였다. 이 세상의 모든 씨앗과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자 수액을 빨아 올리고 햇빛을 빨아들여, 온 생명을 다 한 정점에서 꽃으로 휘

황하게 터지건만. 대나무는 영락없이 누렇게 죽고 만다. 그 피어서는 안되는 대

나무꽃은 어쩌면 강모였는지도 모른다. 죽은 강수의 망혼을 위한 사혼이 있던

날 밤의 괭괭거리는 징소리와, 뭉글뭉글 담을 넘어 오던 만수향내 아득하고 자

욱한 물맴이 회오리 소게, 무녀져 거꾸러지며, 민들망초 비노리 여뀌꽃 등밑에서

부러지던, 아아, 강모의 이름이 칼날처럼 몸의 한가운데로 궤뚫고 지나가던 그

순간이 어쩌면 대나무꽃 황사 빛깔로 피어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나무는 누렇게 말라서 형체만 서 있고, 속은 줄어 허깨비만 허울같이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실이는 휘청 어지러웠다. 그대로 삭은 재가 무너지듯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몸을 가까스로 사립문에 기댄 그네는, 이미 다리와 온몸이 마비

되어 걸음을 떼어 놓기도 어려웠다. 다리에 스르르 힘이 빠지며 마치 무슨 연기

나 안개같이 그 다리가 그러져 없어져 버릴 것만도 같았다. 아아.

"작은 아씨."

사립문을 잡고서도 주루르 미끄러지며 맥을 놓고 그 자리에 주어앉듯 쓰러지는

강실이한테로, 담 밑에 숨어 숨죽이고 서 있던 춘복이가 무망간에 튀어나와 와

, 달려들었다. 그것은 난폭한 몸짓이 아니라 놀란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는 쓰러진 강실이를 일으켜 앉혔다. 그네의 여리고 마른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그의 손이 와들와들 떨리었다.

"작은 아씨. 정신차리시오."

강실이는 춘복이보다 더 놀랐을 것이언만, 몸에 힘이 없고 입술이 얼어 있어,

슨 말을 하려 해도, 그의 몸을 밀쳐내려 해도, 마치 쥐가 난것처럼 옴짝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네는 너무나 오랫동안 혹한의 달빛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작은 아씨."

춘복이는 거의 울부짖는 소리로 강실이를 불렀다. 그 소리는 오직 저 한테나 들

릴 뿐 밖으로는 되어 나오지 못한 뜨겁고 서러운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춘복이

의 눈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솟구쳤다.

"정신채리시오, 작은아씨."

강실이는 제 이마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받으며, 이미 혼백이 되어버린 사람인

양 무게도 부피도 감각도 없이, 다만 모든 것이 멀고 멀어 아득할 뿐인 세상으

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액막이 연이 가물가물 연실을 달고 저 머나먼 밤하

늘의 복판으로 허이옇게 날아 올라가듯이. 아아, 나 좀 잡아 주어. 자신의 몸이

지상에서 둥실 떠오르며 저승의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그네는 역력히 느

끼었다. 그것은 아찔한 현기증이면서, 두렵고 무서운 허기였다. 어머니, 나 좀 잡

아 주어요. 실을 놓친 지상의 어느 손 하나가 허우적이듯 연실 끄트머리 흰 자

락을 잡아 보려 하는 것 같다가 그대로 아물아물, 액막이 연 강실이는 날아가고

있었다. 그 실을 놓친 손은 어머니인가, 아니면 제 육신인가. 아아, 누가 나 좀

잡아 주어요. 그러나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다만 푸른 보라로 죽어

가는 입술에 스치다 잦아드는, 형체 없는 의식의 연기 같은 것일 뿐.

"작은아씨. 저 춘복입니다요. 정신채리시오. ?"

춘복이는 오직 그 말만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이 무슨 믿지 못할 정황인가,

무나 한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져, 놀라고도, 어이가 없고도, 또 당황이

되면서, 그 모든 감정을 휩쓸어 덮고도 남는 감격이 치받쳐 춘복이는 아예 강실

이를 부둥켜 안고, 그 얼어서 식은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꺼 울기 시작하

였다. 가련한 작은아씨. 왜 그랬는지 춘복이는 그말을 속으로 삼키며, 다만 느껍

게 울고 울었다. 얼음이 다 되어 버린 강실이의 얼굴이며 팔과 다리는 형체의

껍게기처럼 달빛 속에 허옇게 구겨져 있는데. 비록 이미 기진하여 맥을 놓아 버

린 얼음덩이, 그보다는 얼음 그림자. 박빙같은 몸이었지만, 그 실체를 엉겁결에

보듬어 안은 춘복이는, 지금까지 고누고 있던 모든 힘이 일시에 풀리면서 이상

하게도 설움이 북받쳐 뜨거운 눈물을 쏟고 있으니. 기회를 잡기만 하면 솔개가

병아리를 채듯이 후려챌 기세로, 아니면 어떻게든 틈을 노려 겁간이라도 할 기

세로 여기까지 내달아온 그에게, 이것은 정말 너무나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

. 아아, 어쩌야 쓰꼬. 춘복이는 강실이의 차가운 가슴에 이마를 박고 그렇게

울고만 있었다. 만일에 강실이가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린다면 어찌하여, 만일

이대로 목숨까지 놓아 버린다면 또 어찌하랴. 이미 그네는 여리고 느린 심장만

이 톡, , , , 미세하게 뛰고 있었다. 춘복이가 조금만 더 늦게 와서 미처 손

쓸 겨를도 없이, 그네가 이 찬 땅바닥에 몸을 부린 채 쓰러져 있었더라면, 아차

하는 일이 생길는지도 모를 만큼 그네는 위급해 보였다. 한편 당황이 되고,

한편으로는 이대로 업고 가 버릴가 싶은 욕심이 뒤엉키는 춘복이는, 우선 강실

이를 후미진 곳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펀뜻 들었다. 이대로 있다가 달

맞이 나갔던 이응이나 오류골댁이 돌아오게 되면 모든 것은 낭패다 싶었던 것이

. 어찌 되었든 강실이를 제 품에 보듬고 있는 이 순간을 어이없이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결코. 절대로. 이것이 어떻게 끌어안은 기회이

. 참으로 일월성신이 돕거나 귀신이 돕지 않고서야. 춘복이는 하늘의 저 달이,

매안 선산의 신명들이, 모두 자신을 위하여 이처럼 공교롭고도 절묘하게 일을

맞추어 준 것만 같이 여겨졌다. 작은아씨. 가십시다. 나랑 같이 가십시다. 어디로

. 춘복이는 강실이를 불끈 안아 올렸다. 강실이는 종잇장처럼 가벼웠다. 희푸

른 달빛 아래 흰옷 입은 강실이를 둘러메고, 발소리고 내지 않고 그림자도 안

남긴 채 재빠르게 몸을 옯긴 춘복이는, 쫓기듯 황급히 오류골댁 뒤꼍 토담을 돌

아 대밭 쪽으로 갔다. 이 엄동에도 잎사귀 무성하게 검푸른 대밭은 하늘을 가리

워 달빛마저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늘푸르다 하여도 나무는 나무인지라 낙엽이

있기 마련이어서, 지난 가을 내내 떨어진 댓잎이 마른 잎으로 푹석하여 맨땅의

냉기를 걷어 주고 또 바람까지도 들어찬 대나무 줄기들이 막아주니, 몸을 숨기

기에도, 한기를 덜기에도 이곳은 마침 좋았다. 아까 스스로 기운을 놓을 때는,

무엇인가 아득히 까마득히 몸 속에서 한 가닥 혼백 같은 것이 실 끊어진 연처럼

빠져 나가는 것을 역력히 느끼었는데, 그 끊어진 실 끄터머리를 간절히 붙들고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강실이는 아슴프레 눈을 떴다.

"작은 아씨."

이것이 누구일까. 혼미한 중에도 정신을 가다듬어 모아 보려 하였으나, 그네는

다만, 웬 낯선 이의 품에 제 몸이 안기어 있는 것만 남의 일처럼 감지될 뿐,

가락 마디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이 허깨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요. 그네는 속으로

만 그렇게 가까스로 물었다. 그리고는 나 좀 잡아 주어요. 아아, 나 좀 잡아 주

어요. 저만큼 빠져 나간 혼백의 가느다란 실끝을 잡으려고 간신히 뻗어 보는 그

네의 손을, 투박하고 뜨거운 손이 덤뻑 쥐어 잡는다.

"가련허신 작은아씨."

목쉰 음성이 귀곁에 젖는다. 이 사람이 누구던가.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더 생각하기도 겨운 강실이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 대답을 못 좇는데 제 손을

쥐고 있는 손의 온기가 따뜻하여, 손에 눈물이 돌았다.

"작은아씨. 저요. 춘복이요."

아아, 춘복이. 그 거멍굴 놈. 큰집에 늘 일하러 오던.

"작은아씨. 정신채리시오."

춘복이가 강실이 가슴에 억센 대가리를 묻고 운다. 그 눈물의 더운 기운이 성에

어린 저고리 시린 앞섶을 녹이며 가슴 살까지 그며든다. 그런데 왜 울고 있으까.

이 사람은. 가물가물 한 가닥 실마리를 잡으려고 강실이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

는데, 춘복이는 울음을 쏟고 있다.

"작은아씨. 지 자식 하나 낳아 주시오."

놓쳐 버린 정신이 희미하게 멀리서나마 드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일까, 모르고 하

는 말일까. 춘복이는 주문처럼 그 말을 중얼중얼 수도 없이 뇌었다. 그러면서 강

실이의 언 발과 언 손과 언 뺨을 제 두 손으로 감싸서 녹이다가, 부비다가, 다시

또 감싸다가, 문지르다가,

"작은아씨, 지 자식 하나만 낳아 주시오, 소원입니다."

빌었다. 그것은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절실함, 신불앞에서 소원을 비는 절실함

을 너무나 간곡하고 엄숙하게 담고 있어서, 해괴하게 들리지 않고 오히려 애절

하게 들렸다. 어찌 그리 그 일이 소원이시오. 강실이는 그토록 눈물이 나게 빌고

빌며 자기의 발과 손과 얼굴과 온 몸을 더운 손으로 부비는 춘복이를, 검은 대

그림자 속에서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속으로 물었다.

"아들 낳아지이다."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여인들이 주먹만한 돌을, 부처바우라고

불리던 꼭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에 종잇장이 되도록 갈고 갈며 빌던 그 모습

, 강실이 뇌리에 스치어 지나갔다. 그것은 노적봉의 호성암에서 몇발짝 안 떨

어진 산 비탈에 천연으로 박힌 바위였다. 그 바위를 갈던 여인은 눈을 감고 오

직 경건 절박하게 빌었었다. 춘복이는 마치 강실이 몸이 아닌 부처바우를 보듬

고 부비는 것 같았다.

"작은아씨. 이 불쌍헌 놈 소원 좀 한 번만 들어주시오."

몸에 온기가 돌아오는 강실이를 조심스럽게 부둥켜 안으며 춘복이는 말했다.

음성에도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어찌 나를 그렇게 소원하시오? 나도 그처

럼 소원하던 이가 있었소?. 그 소원이 내 평생에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으리다만.

강실이 눈귀에서 시름없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춘복이는 그 눈물에 제

뺨을 대고, 울컥울컥 눈물을 토해 냈다. 그래. 그리움을 버리자. 평생에 다시 못

올 그리움, 부질없는 이 그리움을 버리고, 오라버니를 놓아 드리자. 내가 이대도

록 애오라지 오라버니 그리워하고 있으면 끝내는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되리라.

허나 어이하면 이 그리움 버릴 수가 있으리. 나는 정녕 아무런 방도를 모르니,

오직 자격을 잃어버리자. 자격을 잃으면 이제 다시는 기다리지 않겠지. 기다릴

수 없겠지. 강실이는 언제인가. 차라리 내가 죽어 나를 놓으리이까. 베갯머리 흥

건히 젖도록 울던 날을 돌이키며, 다시금 시름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였

. 얼어붙은 몸이 녹으니 눈물로 흐르는 것일까. 강실이는 춘복이에게 창백한

몸을 맡긴 채 하염없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18. 얼룩

 

달빛은 바람꽃같이 자욱하였다. 큰 바람이 일어날 때, 먼 산의 봉우리 너머 아

득한 하늘로 구름처럼 뽀얗게 끼는 기운을, 사람들은 바람꽃이라 불렀다. 이윽고

휘몰아칠 큰 바람이 그렇게 미리 꽃으로 피는 것이다. 천지를 뒤집으며 지붕을

두드리고 토담을 무너뜨리는 바람이 밤새도록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집채를 쥐어

뜯으며, 문고리를 비끄러맨 방안조차도 덜컹덜컹 흔들리게 하였다. 위태로움에

긴장한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고, 뜬눈으로 허옇게 앉아 오직 귀를 칼날처럼 세

우게 하는 그런 바람도, 처음에는 황사 구름 같은 하늘의 꽃으로 왔다. 그것은

두려운 조짐이었다. 허리에 찬 밤이 이우는 노적봉 위의 중천에는 얼음거울 같

은 달이 빙경이란 말 그대로 차고 맑게 떠 있는데, 아까보다 더 짙은 빙무가 달

을 에워싸고 있었다. 추운 땅에서, 공중에 뜬 미세한 얼음의 결정으로 생기는 안

개를 일컬어 빙무라 하지만, 이 대보름 밤에 서린 얼음안개는 저 달빛의 가루인

가도 싶었다. 시린 달이 부서지며 얼음 가루 안개로 산천에 내려앉는 빙무는 어

느결에 바람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강실이가 있는 대밭의 검은 너울 위에

도 달빛은 빙무를 자욱이 드리우며 잎사귀 낱낱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달빛은

강실이의 푸른 얼굴 위에 얼룩으로 그림자 진다.

"작은아씨."

춘복이는 오직 그 말만을 저며들게 뇌일 뿐 더는 어쩌지 못하면서, 그네의 백지

장같이 얇고 시신처럼 식은 몸이 더웁게 더웁게 돌아오도록, 제 살을 부비어 일

깨우고 있었다. 강실이는 동상으로 감각을 잃어버린 살의 어디에 남의 살이 닿

은 것같은 무감으로, 춘복이가 제게 하는 일을 버려 두었다. 이리 하지 말라.

기에도 겨울 만큼 그네는 이미 맥을 놓아, 가느다란 정신의 실오라기한 가닥마

저 추스리기 어려웠다. 하물며 그 벼릿줄을 잡아당겨 온 정신을 수습하기에는

너무나 기진하여 버린 것이다. 무거운 이불처럼 덮이어 숨을 누르는 춘복이를,

가위 눌린 꿈속에서 그러하듯 밀어내지 못한 채, 다만 속수무책으로 눌리어 손

가락 하나 들어올릴 수 없는 강실이는, 반혼 반신의 막막한 몸 옷자락을 얼룩진

달빛에 내주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오...아이고오..오오. 그네의 귓전에 대바람

쏠리는 소리가 물 소리로 쏟아지며, 곡을 한다. 그것은 강수의 사혼이 있던 날

, 허수아비 꼭두각시 사모 입은 신랑과 연지 찍고 곤지 찍은 신부의 꽃잎같이

붉은 입술, 그 지푸라기 인형들을 넋이라고 세워 놓고 혼인을 시키던, 동녘골댁

마당에서 터지던 곡성인가. 아니면 그 서럽고 휘황한 마당의 한쪽 귀퉁이, 무너

진 토담 너머 텃밭에 검은 어둠을 쓸어 안으며 저도 함께 무너지던, 그 돌아보

기 무섭고도 일생 오직 그밖에는 돌아볼 일 없는 순간의, 명아주 여뀌 등밑에서

부러지던 그 비명 소리인가. 아니면 청암 할머니 운명하셨을 때 큰집의 궤연,

연앞에 낭자하던 애곡 소리인가. 아아, 아니면 내가 나를 장사하여 묻으며 우는

소리인가. 곡비의 울음 소리가 온 밤 내내 구슬픈 물굽이를 이루며 집안을 젖게

하더니, 날이 어슴프레 새면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지. 그때 아랫몰 초가

에서 며칠 전부터 종가로 올라와 현하여 밤을 새우고 있던 인월댁이 초췌한 낯

빛으로 빈소에 정을 올리었다. 이제 막 돌아가신 망자에게 생시인 듯 음식을 올

리는 것이다. 진설을 다한 뒤, 이기채는 술잔을 받들어 시신의 동족에 놓고는 그

대고 엎드려, 북받치는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슬피 울었다. 아무 염려 하지 마십

시오, 어머니, 아아무 염려...하지 마세요...부디... 다 잊어 버리고 편안히.. 그냥 가

십시오. 이까짓 자식 같은것도... 다 잊어 버리시고... 그는 자신의 옆에서 애곡해

야 할 강모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절통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

아도 작은 몸이 그나마 한 주먹안에 잡힐 만큼 밭아진 이기채는 넋이 나간 사람

같이 보였다. 인월댁은 삼끈과 베근을 들고 시상의 머리맡에 섰다. 그 옆에서 흠

실댁이 율촌댁과 무엇인지를 의논하였다. 인월댁의 소복이 새벽빛을 받아 푸르

게 날이 섰다. 흰 당목 치마 저고리에 인이 묻어나는 모양이었다. 그 푸른 빛은

설움을 서리처럼 뿜어 내고 있었다. 그네가 손에 움켜 쥐고 있는 삼근과 베끈이

흐르르 떨리었다. 이제 곧 청암부인의 죽은 몸 시신을 묶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효원이 우욱, 치미는 울음을 토하며 허리를 꺾었다. 아아, 이제

어디 가서 누구를 의지하랴, 할머님은, 내 너를 믿고 가마...하셨지만, 나는 누구

를 믿을 것인가. 그네는 수천댁이 다가와 그만 울라고 지곡을 시키는데도 울음

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네 나름대로 휘몰아쳐 오는 소용돌이를 직감하여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아이고오...아이고오....오오. 효원은 영연 앞에

서 통곡을 하였다. 어떻게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곡이 봇물처럼 터져 그네

를 휩쓸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엄청난 사실을 차마 믿을 수조차 없어서 진정

을 못하는 그네를, 청암부인의 죽음이 순식간에 덮쳐, 효원은 마음놓고 울었다.

울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실성 발광, 몸부림을 친다 해도 흉보지 않는다.

효원은 할머님의 죽음을 빌려, 제 울음의 목을 놓았다. 할머님, 이런 저를 믿고

가셨습니까. 이런 저를 믿고... 네가 앞으로 한세상의 고비고비에서 나를 얼마나

많은 매듭으로 동여 묶으려고 이 애를 태우느냐, 싶었던 대실에서의 밤이 생각

났다. 그때 돌덩어리처럼 단단히 홀맺혀 묶여 있던 강모 발목의 광목띠를. 그리

고 아직 생존해 있전 청암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겨 주던 말도 생생히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아가, 저 뒷산에다가는 밤나무를 심어 보아라. 내가 전에 몇 처례 돌아봤다만,

탄금봉 기슭에 제법 쓸 만한 비탈이 있느니라. 내가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미루

다가 그만 날이 가고 말았어...네 시모댁 친정 동네가 밤으로는 아주 이름이 났

거든, 그래서 율혼 아니냐. 내가 네 시부한테도 일러는 놓겠다만, 그 사람은 그

렇게 몸이 실허지를 못해서 걱정이다. 자기 근력 부지해 주는 것만도 고마워서

이런 저런 일 마음쓰게 허고 싶지가 않어...그러니 차후에라도 그런 의논이 돌거

든 내 말을 꼭 새겨 두었다가.... 율촌 쪽에 사람을 보내 연락해서...묘목을 구해

다가 심어라. 그것도 큰 공사지.. 한 십 년 지나면 밤 추수를 헐수 있을 게야.

질이 어쩔란지 잘 모르니 처음에는 그저 시험삼어 한 천여 그루, 사방에다 심어

보아... 그러다가 차츰 크는 거 봐 가면서 늘려 가러라, 나는 이제 아마 일어나기

어려울 게다...내가 힘 있을 때 해 놨어야 너희들이 들 고생할텐테, 그만 게을러

서 이리 됐구나."

"할머님.. 어찌 그런 말씀을 허시는가요. 어서어서 쾌차허셔야지요. 철재란 놈도

저렇게 충실허게 잘 크고 있는데 저것이 장가드는 걸 꼭 보셔야지요. 고손도 보

시고..."

그때 청암부인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다. 내가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 천지에 의지할 곳 없이 살던 생각을 하

... 이만한 복록도 과분....헌 일이다."

"이것이 다 누가 이루신 것인데요."

"내가무슨 한 일이 있겠느냐....세월이 그렇게 해 준 것이지."

"무심한 세월이라고 어디 아무한테나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전에 제가 듣고 마

음에 놓아서 접어 둔 말이 있는데요, 봄바람은 차별없이 천지에 가득 불어오지

만 살아 있는 가지라야 눈을 뜬다, 고 안허든가요."

"좋은 말이로구나. 세상에 있는 삼라만상, 목숨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세월은 모

두 다 그 품속에 안고 키워 주느리라. 들짐승, 산짐승, 물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

를 보아라. 아무도 안 멕여 주지마는 저절로 저 혼자서 맹수도 되고 맹금도 되

어 호랑이 독수리 용맹을 떨치지 않더냐. 산 속의 나무들도 마찬가지고 사람 또

한 그러느니라. 아이들 커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조막만하던 핏덩어리가 나

이 먹으면서 장성허는 것이 어찌 어미 아비가 키우는 것이랴....세월이 키워 준

....허나 그것은 다 제가 타고난 목숨을 제 몸에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지. 껍데기만 살었다고 목숨이 있는 것도 아니

. 살어 있으면서도 죽은 것은 제가 저를 속이는것이야. 살어 있다고 믿고 있지

만 실상은 죽어 버린 것이 세상에는 또한 부지기수니라. 어쩌든지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서 목숨을 죽이지 말고 불씨같이 잘 보존허고 있노라면, 그것은 저절

로 창성허느니."

목숨이 혼이다. 혼이 있어야 목숨이야.

"잘 알겠습니다."

어쩌든지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곧 목숨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한 생애 헛사는 것이야."

""

"내가 이대로 죽는다 해도 너를 믿고 갈 것이니라. 내가 비록....죽더라도....나는

죽지 않고 살어서, 네 속에 남을 것이다."

부인이 끝내 숨을 거둔 상청에서 이기채는 이기채대로, 효원은 효원대로 스스로

의 격앙된 설움을 가누지 못한 채, 덩클덩클 엉킨 곡을 토해 내고만 있었다.

욱이 강실이가 저만큼에 비켜 앉아 소리 죽여 흐느끼는 모습에 효원의 눈이 꽂

히자. 순간 효원은 자신과 강실이 차돌처럼 맞부딪치며 푸른 불꽃을 소름으로

일으키는 것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네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아, 너는 누구

이냐. 그때 시방에는, 삼베와 명주 이불,그리고 고인의 마지막 옷이 될 수의로,

적삼,속곳,저고리,바지,치마 들을 차곡차곡 접어 받쳐들고, 홈실댁이 청암부인 누

워 있는 시상맡에 앉았다. 소렴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월댁은 홈실댁이 내

려놓은 수의 위에 검은 공단 악모가 접혀져 얹히어 있는 것을 보았다. 옷을 갈

아입히고 난 다음, 맨 마지막으로 얼굴을 덮을 헝겊이다. 그것을 본 순간 인월댁

은 나뭇가지 꺾이듯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통곡을 터뜨렸다. 애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시신을 모신 방에 모여 앉은 문중의 부인들은 그네의

애처러운 등허리를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네는 울음에 체하여 어깨를

들지 못하고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인월댁의 호곡은 듣는 사람의 핏속으로 저

며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네의 숙명 대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숙명

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인월댁의 한 생애에 맺한 한의 깊은 소에서 솟구쳐 터

지는 곡성이, 그네 자신의 운명을 울고 있는 소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도 삭지 않은 원의 덩어리가 덩클거리며 피멍으로 쏟아지는 소리. 흡사 울고 울

어서 몸의 살과 뼈마저도 다 여위어 애통한 곡성 한 가닥으로 남고 말 것만 같

은 소리였다. 어찌 들으면 그 소리는 낭랑하기까지 하였다. 살과 뼛 속의 원과

한이 소리로 씻겨져 투명하게 걸러지면서, 몸 속이 텅 비어 버리는 공명이라고

나 할까. 인월댁은 곡에 휩쓸리고 있었다. 마치 물살이 떠내려가듯이. 강실이는

그 통곡의 물살에 검불로 떠내려가는 것이 바로 그네 자신이라고 여겨졌었다.

그네의 눈에는 모두가 떳떳해 보였다. 그것이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

는 슬픔이요, 설움일망정 드러내어 울 수 있을 때. 그 눈물은 양명하다. 당당한

슬픔. 그러나 강실이는 달랐다. 들키면 몰매 맞을 설움을 홑이불 한 장을 가리운

, 벌건 대낮에 맨몸으로 나앉은 것 같은 불안이 그네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염치 좋게 올라와 울고 있는가. 겁도 없이

"네 이녀언."

소리가 금방이라도 쩌렁쩌렁 마룻대를 울릴 것만 같아 숨죽인 채 눈치보듯,

실이는 삼키는 울음으로 호곡하였다. 그네의 울음에 새벽이 멈칫했다. 아무리 할

머니 청암부인의 초상이 났지만, 그네는 정말 안 올 수만 있으면 이 자리에 안

오고 싶었다. 큰집 쪽으로는 고개만 돌려도 가슴이 푸르르 떨려 가슴애피를 일

으키지 않았던가. 큰집의 댓돌과 마루, 기둥과 문고리, 그리고 후원으로 나가는

샛문이며 그 너머 텃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그네는 질리었다. 가시 손바

닥으로 가슴을 쓸고 가는 그 바람소리에는 강모의 그림자가 묻어 있었다. 가시

박힌 가슴을 오그리고 엎드린 영연 앞에서 그네와 맞부딪친 효원의 눈빛은 얼음

장 같았다. 나를 보는 눈빛이 어찌 저러하신가. 그 일을 알 리야 없겠지마는....

실형님 본시 그 모습이 대쪽 같고 차가우셔서 그렇지...무엇을 알아서 나를 그렇

게 꿰뚫어 보셨을 리야 없겠지마는.... 이미 반이나 자지러져 버린 강실이는 그래

도 진정이 안되어 휘청하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잠시라도 마당

에 내려갔다가 조금 숨을 돌리고 오고 싶어서였다. 공연히 후둘후둘 떨려 효원

의 곁에 더 앉아 있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그네는 아무의 눈에도 뜨이지 않기를

바라며 신을 챙겨 신었다.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겨울날이라 아직도 천지는 검푸

른 어둠에 잠겨 있는데. 다만 여기저기 밝혀진 종이등불과 웅성이는 사람들 때

문에 집안이 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실이는 뼛속이 시려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여윈 어깨가 추위 때문에 더욱 말라 보였다.

"에이구우. 존 날 다 두고 왜 이런 날 죽는당가아. 춥고 맵고오, 동지 섣달 꽝광

얼어붙는 땅 속으로 들으가 누울라먼 오직이나 등짝이 시릴랑고, 땅 파기도 쎄

빠지고, 참말로 성질대로 죽는갑서, 살어 생전 성질을 볼라먼 죽는 날 알어 본단

. 아이고, 참말로, 요런 부조나 조께허고 가제, 꼭 골라 골라 엄동시안에 깡추

위 쩍쩍 달라붙는 날 죽어 갖꼬오, 성질 그러먼 멋 허냐, 세도고 양반이고 인자

죽어 부렀는디, 아무 짝에도 쓸 디 없제. 부석(부엌) 앞에 불때고 앉었는 내가

낫제. 암만 상년이라도. 살어야 무신 세상을 볼 거 아니여, 긍게."

한데 아궁이 앞에 낯바닥을 들이대고 입을 돼지 주둥이처럼 내밀어 입김을 불어

넣는 옹구네의 안반만한 궁둥이가 위로 쳐들렸다 내려왔다 하는데, 순간 후욱

밀려나온 불길에 매운 연기가 일어, 그네를 덮어 씌우며 눈을 못 뜨게 하는 모

양이었다.

"아이고매. 호랭이 물어가고 자빠졌네."

눈썹을 꼬시를 뻔한 옹구네가 마침 나뭇단을 옆에 내려놓는 춘복이기 한테 착착

감기는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그 옆에는 춘복이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옹구네

는 제 뒤에 강실이가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내뱉은 말이었다. 강실이는 웬일인지

아까와는 다른 속이 떨렸다. 그것은 무슨 노여움이나 분노라기보다는 무서움 때

문이었으리라. 무서움에 대한 예감. 도도하게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범람하는 황

토 흙탕물이 어느새 매안으로 넘쳐들어 청암부인의 관을 덮고, 강실이의 발목을

적시며, 정강이에 오른 것만 같았다. 집안의 굴뚝마다 불 때는 연기가 올랐다.

실이도 눈이 매웠다. 옷고름을 들어 눈귀에 번지는 눈물을 눌럿지만, 그것은 연

기가 매운 탓이 아니었다. 그네는 연기에 밀리듯 후원으로 난 샛문을 나섰다.

대로 뒤안에 서 있으면 연기에 짓눌릴 것만 같았고, 겁없는 옹구네의 말도 무서

웠다. 그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를 만큼 그네는 거침새가 없었다. 강실

이 들으라고 면대하여 한말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수모를 느낀 그네는 옹구네를

피하여 텃밭으로 나간 셈이었다. 그렇다고 여막에는 더구나 가서 앉아 있을 수

가 없었다. 청암부인의 시신을 모신 시방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가까운

동종 부인들로 복을 안 입어도 되는 팔촌 넘는 살람들만 둘러얹아 염을 하고 있

을 것이었다. 강실이는 종질녀로서 유복친이기도 하였지만, 아직 출가 안한 규방

의 처자이니, 아무리 종조모시방이라 해도 습렴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일은 삼가

야 했다. 강실이는 갈 곳도 없이 오로지 두려울 뿐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

네의 자리는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설움의 웅덩이라 할지라도 마음놓고 잠겨

있을 자신의 웅덩이는 없었다. 들키면 덕석말이 몰매로 메워지고 말 웅덩이였다.

차리리 그네의 귀에는 곡성조차도 호사스럽게 들렸다. 애끊는 통곡도, 시린 소복

, 죽음도, 다 당당하게 여겨지다. 그것들은 모두 명패가 있다.... 강실이는 자신

의 발등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낯설었다. 마치 자격없는 사람이 쫓겨난 문전

에와 기웃기웃 안을 들여다보며 머뭇거리는 듯한 처연 처량함을, 그네는 제 버

선발 발등 빛에서 느끼었다. 내가 지은 업을 어찌 벗으랴. 내가 지은 죄를 어찌

벗으랴. 강실이는 후원의 토담에 이마를 기대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잘리는 울

음이었다. 어디서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채 가슴에 얹혀 있던 울음이 흐윽,

, 새어 나왔다. 강실이는 여윈 주먹으로 토담을 두드리며 울었다. 어흐으윽.

...어흐으윽. 겨울의 날을 더디 샜다. 아직도 검푸르기만 한 하늘에 찬 별빛이

영롱한데, 서리 같은 새벽기운이 뼈를 시리게 하건만, 강실이는 손톱을 토담에

박은 채 울음에 체하여 이마만 짓찧고 있었다. 그때, 옹구네가 솔가지를 툭툭 부

러뜨려 한데 아궁이에 넣으며 춘복이한테 내뱉던 말들은, 강실이를 왜 그렇게

무섭게 했던가. 그 발목을 적시고 있던 도도한 흙탕물은 이게 정강이를 넘어 강

실이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후려치고 있는 것이다. 그대로 맥을 놓으면 소용돌

이의 복판으로 말려들어가 까마득한 어디론지 떠내려가 버릴 것만 같았다. 강실

이는 그 흙탕물에 가라앉으며, 뒤집히며, 떠오르며, 다시 곤두박질치면서 하염없

이 밀려가는 가랑잎 하나였다. 그 떠밀림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가랑잎이 지

금 여기까지 떠내려와 이 정월 대보름 달빛 시린 밤에 힘없이 부스러지고 있으

. 그 흙탕물살은 춘복이였다. 강실이는 울지 않았다. 이미 울음이 멎어 버린

그네의 얼굴이 검푸른 어둠 속에서 퍼렇게 드러나 보였다. 얼굴이 얼어 버린 것

도 같았다. 잠시 녹아 눈물로 흐르던 그 온기가 다시 얼어붙은 것인가. 강실이는

댓잎자리 언 땅 위에 죽은 듯이 누운 채 대나무 우거진 잎새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사운대는 댓이파리 쏠리는 틈바구니로 달빛이 번뜩

이다 사라진다. 비수 같은 달빛이다. 그러나 다시 비치고, 그랬다가 부서지며 사

라지는 달빛은 달빛의 꽃잎 같다. 그 꽃잎들은 강실이의 흐트러진 머릿단과 식

은 이마, 부스러진 가랑잎 한 조각 같은 흰옷 위에 날리었다. 가물가물 정신이

멀어지는 강실이의 눈 속으로 그것들은 살구 꽃잎처럼 내려앉는다. 눈이 아슴하

도록 가지 끝이 아득하다. 꿈결같이 만발하던 살구 꽃잎들은 바람도 없는데 시

나브로 날리며 떨어진다. 나무 아래 엎드린 초가지붕에도 연분홍 눈이 내린 듯

곷잎이 소복하였다. 토담에 떨어지는 꽃잎은 그대로 다무락에 얹히고, 어떤 이파

리는 토담을 스치며 고샅에 날아 앉는다. 그래서 길목은 맨발로 걸어가고 싶을

만큼 연연한 꽃잎들이, 비칠 듯 말 듯한 분홍빛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강실이

는 그렇게 날리는 꽃잎을 온몸에 맞았다. 그네의 몸은 언 땅 위에 시리게 누워

달빛의 비늘에 찔리고 있는데, 그네의 넋은 홀연 꽃잎 날리는 나무 밑에 서 있

는 것이다. 시집을 갔는가. 검은 낭자며리와 꽃자주 댕기에도, 옥비녀의 물빛 비

녀곡지에도 꽃잎은 내려 앉았다. 그런데 그네의 옷은 새각시 옷이 아니라 눈부

신 소복이다. 동그스름한 그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가슴으로 미끄러지는 애달

픈 꽃잎 하나가 치마폭 사이로 숨으며 버선발 위로 떨어진다. 작은 버선발에는

어려서 신던 운혜가 신겨져 있다. 운혜의 코와 뒤꿈치에 구름 무늬가 아련히 수

놓여져 있는데, 이 고운 비단신은 제비부리처럼도 보인다. 꽃구름이 일고 있는

하늘 어디쯤을 한 마리의 어린 제비가 날아가고 있다고나 할까. 다시는 돌아오

지 못할 곳으로. 가장 평화롭고 따뜻하여 근심 없던 시절의 구름신을 신고. 강실

이는 발을 떼어 꽃잎을 밟는다. 잘 가라. 내가, 이승을 떠나는가 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샅에 나와 서서 소리 없이 손을 흔든다. 그네의 마음에는 지금 저

뒤에 서서 배웅하는 사람들도 꽃잎인가 싶었다. 하염없이 날아 내리는 꽃잎들이

어찌 저기 나와 서 있는 사람들만이랴. 영좌 앞에서 낭자하게 울고 울던 효원의

곡성이 지등을 흥건하게 적신다. 부연 지등과 삿갓 등의 불빛들이 살구 꽃잎처

럼 날리고 날린다. 하염없는 그 불빛과 꽃잎과 별빛들이 어지럽게 어우러진다.

그것들은 하얗게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어찌 보면 눈보라 같기도 하다. 강실이

는 미어질 듯 취하여 어지럼증에 몸을 내맡기고만 있었다. 단도같이 잘린 달빛

들이, 무수히 부서지는 댓이파리에 날을 갈며 강실이의 온몸에 꽂혀, 푸르게 난

자한다. 꽃잎들은 칼날이었다. 칼날은 참혹하게 난도질한다. 꽃잎을 찢는다. 강실

이는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좌통우치의 법이 침 놓는 의원에게 있다고는 들었

지만, 참으로 왼쪽이 아프면 오른쪽을 다스려 낫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왼쪽에

통증을 느낄 때, 꼭 그 통증 있는 부위의 정반대 오른쪽 자리에다 침을 놓아주

, 그 아픔에 놀라 왼쪽 통증에 대한 감각이 순간 무디어져 못느낀다 하였다.

못 느끼다 낫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오른쪽 아픔이 크면 클수록 왼쪽 아픔은 더

잊을 수가 있는것일까. 일부러 만든 아픔일지라도. 누구인가 그런 말을 하였다.

저 예전, 중원의 한 나라에 이름 높은 고승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스님의 수행

이 남다르게 깊고, 용맹정진 온 정신을 다하여 깨침을 얻고자 수도하던 끝에,

디어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생불이라 하고 따르며 섬기게 되었다. 그이 이름

이 널리 나고 높아지니 온 나라 안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날마다 친견하

고자 몰려 오는 무리가 물결을 이루었다. 이에 왕이, 어리석은 백성을 홀리어 삿

된 길로 빠지게 하는 혹세무민의 중을 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땅히 구실삼을

핑계가 없는지라 골똘히 생각한 끝에, 신하를 보내어 문제를 내도록 시켰다.

제는, 그 절의 벽에 붓으로 기다란 선을 한 줄기 그어 놓고

"이 선에 절대로 손대지 말고, 이선이 가늘어지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만일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세상을 우롱한 죄를 엄중히 물을 것이다. 그 죄는

당사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를 에워싼 무리들도 모두 같은 족속들이니 함께

받도록 한다. 절을 폐하겠다."

이 어명에 온 절의 안팎이 다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와좌왕 여기

저기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였다. 그러나 누가 무슨 재주로, 한 번 그어 놓은

금을 손대지 않고 가늘게 할 수가 있을 것이가. 이렇게 온 절이 소동하여 나름

대로 꾀를 내고 지혜를 짜도 도무지 무슨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데. 고승은 하루

종일 그 모습을 감추고만 있었다.

"큰스님, 아무리 해도 저희는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소서."

애가 탄 절 식구들이 이마를 찧으며 애원하였다. 이에 고승은

"빗자루만한 붓과 먹물 한 동이를 가져다 놓으라."

하고 분부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몸을 나투어 법당에서 나와, 그 커다랗고 굵

은 붓에 먹물을 덤뻑 묻히더니, 눈 깜짝 새, 기와에 그어진 선과 나란히 그 위쪽

으로 금을 한 줄 주욱 그어 나갔다. 그 순간, 원래 있던 선에는 손끝 하나 스치

지 않았지만, 새로 생긴 굵은 줄 때문에, 먼저 있던 선은 그만 가늘어지고 말았

던 것이다.

"과연 고승이시라."

왕은 탄복하고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다. 더 아픈 아픔과, 더 굵고

큰 시커먼 먹줄을 제 몸에 부르고 그은 강실이는, 이미 그 홀로 되어, 옆에 춘복

이가 있는 것을 감지하지도 못하였다. 춘복이는 단 한 마디 말도 없고 미동도

하지 않는 강실이를, 일어나 앉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히려 아까보

다 더 멀어저 감히, 차마 손댈 수 없게 되어 버린 강실이를 두려운 눈빛으로 더

듬었다. 절대로 안되야요. 춘복이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부르짖었다. 무엇이

안된다는 것인지 집어 내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아까 참에 본 보름달의 붉덕

물처럼 명치 끝에 치미는 안타까움이 그를 짓눌렀던 것이다. 그 못 이길 것만

같았던 빛의 소용돌이. 허사가 되야서는 안되야요. 그는 다시 부르짖었다. 작은

아씨는 인자 내 사람이여요. 내 꺼이요. 어디로 가먼 않되야요. 가만 거그 있으

셔야 해라우. 가만히. 가만, 거그. 그러나 그것만도 아니었다. 결코 허사가 되어

서는 안되며, 어디로도 가지 말고 거기 가만, 가만히 있으라는 것만도 아닌 안타

까움. 그것은 강실이가 멀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네를 마음에 품고 그토록

염원하고 있을 때는, 가까이서 본 일도 없는 그네가 제 것인 양 가득 차게 느겨

지던 것이, 웬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는 참으로 그네가 자신이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아득히 무감하게 떠있는 것을 절감하다니.

"작은아씨. 인자 작은아씨는 지 사람 되야 부렀응게요. 인자는 지 자식 하나만

낳아 주시먼 되야요."

그 안타까움을 밀어내 보려고 춘복이는 소리 내어 강실이한테 말한다. 그런데

조금도 그 말은 절실하지 못했다.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뿐.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절실하게 빌었던 말인데, 왜 이제 소원을 이룬 이 순간에 강실이는

도저히 자신이 가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을 무참하게 느껴야 하는가.

실이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을 성싶었다.

"네 이놈, 죽고 싶으냐."

라든가, 아니면

"천하에 불상놈 같으니라고,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혹은 참으로 그리해 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가 싶은

"나를 이제 어찌하려느냐."

는 말, 아니라면 그저 다만 흐느끼어 울기라도 해 주었으면, 그것도 아니라면,

춘복이를 쥐어뜯으며 달겨들어 죽이겠다고 포악이라도 하였으면. 그러나 강실이

는 숨소리도 내지않았다. 찌르는 달빛의 사금파리에 몸을 베이고만 있을 뿐.

빛은 깊은 자국을 남기며 푸르게 얼룩졌다.

 

 

19.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내동댁 떡애기 손자가 밟혀 죽은 것이다. ,꿈에도 생

각지 못한 일이 벌어져, 일 당한 사람은 물론이고, 매안의 집집마다 기가 질려

경악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른이 안 계시니 별 희한한 변괴가 다 일어나는고만. 잡귀들이 등천을 허는가아."

이기채는 급작스러운 사건에 놀라기도 했지만, 청암부인 별세하신 후에 생긴 일

이어서 마음속이 더욱 어수선하고, 불길한 예감마저 드는 것을 떨치기 어려웠다.

수더분한 내동댁은, 가족들이 매안 이씨들 중에는 그래도 수하는 축에 들어서

위아래 안팎으로 아직 궂은 일 별로 안 본 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 사람 사는 집이 으레 그런 것같이, 이 집안에도 위로 시부모 계시고 시조부

모 계시며, 나이 어린 시아재 시누이에 젊은 남편 있고, 또 아래로는 이제 막 갓

난애기 하나 강보에 자라나는, 그런 평범하고 무난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는 이 며느리가 애기를 재워 다락문 바로 밑 아랫목에 뉘어 놓고 무심히 바

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철없는 장난꾸러기 시아재가, 어린 마음에 재미가 나

서 다락 위에 올라가 먹을 것을 뒤지며 놀다가, 그만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고

, 그 높은 다락에서 훌쩍 방으로 뛰어내리니, 잠든 애기 배 위로 떨어져 참혹

하게도 갓난 것은 죽고 말았다. 놀란 시아재가 비명을 지르며 우는 소리에 며느

리는 혼비백산, 하던 일을 팽개치고 방안으로 달려들어 갔으나....아이는 창자가

터져 버린 뒤였다.

"만일 그 일을 당한 사람이 너라면, 네가 그 며느리였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이기채는 봉출이를 시켜 큰사랑으로 불러낸 효원에게 물었다. 효원은 속으로,

와 같이 비참한 경우를 예로 드는 말씀이 얼른 마땅하지 않았으나, 이는 필경

자신의 국량을 재어 보려 하는 어른의 뜻이 들어 있는 하문인지라,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아들 철재의 얼굴을 지우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씀을 여쭈었다.

"무릇 부녀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언어 행실이 한두 가지 아니옵지마는, 아이를

기를 때, 바늘을 옷깃에 곶지 않는 것은 혹시 아이가 젖을 먹다 찔릴까 두려워

함이요, 젖 머금은 아이를 그대로 자게 하지 않는 것은 젖을 물고 잠든 아이가

체하기 쉬운 탓이오며, 갓난아이 누일 대 베개를 바르게 해야 하는 까닭은 여린

머리통이 비뚤어질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또한 애기를 창 가까이 밝은 곳에 누이

지 않는 것은 눈동자가 서로 모여 사시안이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이토록

아이는 조심 할 일이 터럭보다 많고 섬세하게 살피기 명주올보다 더하온데,

람이 오르내리는 자리 다락문 밑에 아이를 재운 어미에게 첫재 불찰이 있겠습니

. 다락이란 평지의 방이 아니니, 누구라도 한 번 올라가면 뛰어내리게 되어 있

는데, 그 위태로운 곳에 조심성 없이 아이를 두었다고는 하나, 일이 그와 같아서

며느리의 작은 잘못을 나무랄 정황이 아니지만, 한 번 벌어진 일이 돌이킬 수

있는 것이라면 혹 모르겠거니와, 이미 인간으로는 속수무책 어쩔 수 없는 참경

인지라, 우선 겁에 질려 놀란 시아재의 충격을 달래어, 기왕에 명이 그뿐이어서

짧은 날을 마친 아이 일로 시아재 한평생이 멍들지 않도록 너그러운 자애 심정

을 가지며, 이 천만 뜻밖의 사태로 절통 근심하실 부모님과 조부모님께 효심으

로 위로를 드려야겠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는 이 일로 해서 어린 동생을 원망하

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형제 서로 위로하고 살피는 정이 예전보다

배나 더 하도록, 혼연 성심을 기울여야겟습니다."

그때 이기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과시 너로구나."

하고는 다시 침묵하였다.

"나는 네가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장한 마음이다."

그의 음성은 침중하고 낮았다. 그것은 번민이 깊이 섞인 음성이었다.

"본디 유순하고 정숙함은 부녀자의 덕이요, 근면하고 겸손함은 부녀자의 복이라,

그 성품을 선량 정숙하게 가져서 부녀자로서의 몸가짐을 지키며, 순하고 부드러

운 마음으로 남을 섬기고, 정결 성실한 태도를 지니어 조상의 제사 받드는 것이

뭇부인들의 당연한 도리이겠으나, 할 일 많은 이 집안에 장차 네가 맡을 책임이

남과는 다른즉, 언제든지 지금 제가 한 말같이, 무슨 일을 당하든지 우선 너를

접어두고 네 둘레를 먼저 헤아리는 덕성을 부디 잃지 말도록 해라. 언제나 사리

분별을 먼저 하고 감정을 눌러 뒤에 둘 때, 아무리 참담한 지경이 닥치더라도

어지러이 흔들리지 않고, 네 중심을 의연히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비록 아

녀자이나 울 안의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는 사람이니, 네가 반듯하게 서야 집안

이 바로 서고, 이 집안이 바로 서야 온 문중이 안정될 것이니라. 무릇 사내란 일

을 저지르는 존재요, 여자는 안돈하게 사물을 매만져 바로잡는 존재 아니냐....

오직 네가 안여반석 안여태산, 태산 같고 반석 같은 성품과 행실로 네 중정을

굳게 하여, 든든하게 끄떡없이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리라. 내 이제 너를 믿는 마

음이 아들보다 더 하다...."

청암부인을 여의고는 눈에 뜨이게 예전과 달라진 이기채가 전보다 효원을 대하

는 품이 절실 곡진한 것은, 이상하게도 송구스러웠고 어느 한쪽 시름없이 비애

로워 효원은 가슴이 무거웠다.

"내 어찌 너를 모르랴."

이기채는 그늘 그렇게도 말했었다. 효원은 그때 다만 세운 무릎에 두 손을 공손

히 맞잡아 얹은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네 혼인에 내가 상객으로 갔던 날.""

효원의 부친 허담이 이기채에게

"내가 운수 비색하여 저 아이를 여아로 두었소이다.""

하고 웃던 말을 효원한테 다시금 되뇌이어 들려주며

"나는 그래도 복이 있어 너를 며느리로 맞이한 모양이다."

말끝을 내리었다. 웬일인지 그 말은 탄식처럼 들려, 요원은 아까보다 더 고개를

수그리며, 당차않은 말씀이란 자세를 하였다.

"바깥일에 아직은 내가 있으니 너는 위로 어른 모시고 아래로 사람 부리는 일에

빈틈이 없게 해라. 이제 차츰 내 아는 일을 너한테도 가르쳐 줄 것이다만. 너도

모르는 것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묻도록해라."

핏기 가신 낯빛이 삼베 상복 누런 빛과 별 다를 바 없는 이기채는 메마른 음성

으로 말하였다. 그 음성이 깐깐하면서도 허적하게 들렸던 것은, 정작 마주앉아

가르쳐야 할 '바깥일'을 배울 사람이 제자리에 없는 탓이었으리라. 그 자리에 대

신 앉아 시아버지의 빈 마음을 채워야 하는 며느리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

세우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그 이기채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참담

한 일에 부딪쳐, 효원은 지금 이렇게 휘어질 듯 팽팽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물으라."

하신 시어른의 말씀이, 지금 당한 이런 일에도 해당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

. 두 손을 끼고 앉은 채 움쩍도 하지 않는 그네의 뒷등은 검은 절벽 같다.

가파른 벼랑에 분기가 받쳐 숨소리조차 스치지 못한다. 자칫 잘못 터질 것만 같

은 탓이었다. 마침 방안에 철재가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설을

쇠어 세 살이 된 철재는 무엇인가 칭얼대며 떼를 쓰다가 콩심이 한테 업혀 겨우

진정이 된 모양인데, 만일 이기채의 눈에 띄었다면 꾸중을 들을 일이었다.

"사내 녀석이 두 발로 의젓허게 저 혼자 걸어야지, 남의 등에 업혀서 그게 무어

. 내려라."

막 태어나면서부터 증조모 청암부인의 사랑을 애절하리만큼 독차지한데다가 할

머니 율촌댁 또한 무릎에서 내려놓을 날이 없었던 철재는 한 걸음만 떼려 해도

콩심이 등에 업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거

나 나무라지 않는 일이었다. 철재의 아비 강모는 그보다 더 큰 소년의 나이에도

비가 오거나 날이 궂어 걷기 불편할 대, 혹은 눈 내린 날에는 안서방의 등에 업

히어 시오리 길 보통 학교에 가고 오지 않았던가. 귀한 몸 도령의 발이 찬 비에

젖거나 진흙창에 빠지면 안되는 까닭이었다. 또한 눈 비에 미끄러져 다치면 큰

일이며 날카로운 돌부리에 채이면 뜻밖에 고꾸라질 것이니 위태로워 혼자 걷게

할 수 없었다. 또 꼭 그런 날만이 아니라도 무엇보다 "다리가 아퍼 안된다."

고 하여, 안서방은 강모에게 등을 댔다. 그러니까 안서방은 가마인 셈이었다.

런 강모를 나무라지 않았던 이기채가 철재한테는 전에 없이 엄격하여, 작은 일

에도 낯빛을 고치고 음성을 세우는 것이 사람들한테는 얼른 납득이 안되기도 하

였다. 어린아이 하는 짓이라 드나들 때 방문을 잘 닫지 않으면

"노비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 꼬랑지가 얼마나 길어서 그 문을 아직 못 닫어?

어서 꼭 닫고 와라. 사람은 뒤끝이 야물어야 한다."

하고, 계단이나 뜰을 오르내릴 대 폴짝거리며 뛰면

"경망스럽게 뛰어 다니거나 땅을 구르는 건 염소나 망아지 허는 짓이지 사람이

그러는 것 아니다."

하는 말에서부터

"신발 끌면서 걷지 마라."

"손가락에다 옷자락 감지 말고, 옷끈 물어뜯지 말어라."

"말을 더듬을 만치 저렇게 급하게 빨리 말하다니, 버릇 들면 고질된다."

는 것이며, 배고프다고 얼른 먹을 것 달라 정짓문간에 서서 발을 구르는 철재를

보고 호되게 나무란 일도 있었다.

"그토록 참을성이 없어 어디 장차 장부가 되겠느냐. 한 고비 잠깐 지나면 때 되

, 때 되면 어련히 밥상 들여올 것을."

"조막만한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그리 노성이시오? 그것이 시늉만 사람이지 아

직 눈도 안 뜬 강아지나 같은 걸. 배고프면 울고, 먹으면 뛰고, 저 좋으면 놀고,

다 그러면서 크는 것이지. 그런 철부지 애기한테 서당 도령 잡지듯이 다그치고

혼을 내니, . 저애가 장부가 무엇인지 알 리가 있소? 강보에다 천자문 들이대

는 격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부자지간은 어려워 겸상도 못하지만 조손은 허물이

없어 할아버지 수염도 잡고 논다드마는. 우리 집은 외려 거꾸로요, ."

율촌댁은 그럴 때마다 곁에서 은근히 마음이 쓰리어, 내색은 안하면서도 한 마

디 두 마디 접어 두었다가 결국은 이기채한테 말을 밀어내곤 하였다. 그러나 그

네의 속에 꼬깃꼬깃 접힌 말을 다 할 수는 없었다. 강모도 어려서는 다 그렇게

자란 것을, 금이야 옥이야, 긁힐가 티 묻을가, 애지중지. 나는 철재란 놈, 저놈을

보면 지 애비가 생각나서 안쓰럽기 고애자 버금가게 애처로운데, 애비가 못해

주는 몫까지 두배 세 배로 더 잘해 주든 못헐망정, 애기 주눅 들게 일일마다 껀

껀마다 거미줄로 회초리네 그냥. 찡그린 율촌댁의 이맛살을 못 본 척하며 이기채

는 말했다. 마치 겉으로는 말 안하지만 그 이맛살 사이에 끼인 심정 속을 다 짚

어 모는 사람처럼.

"내가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강모란 놈을 그렇게 유약 한심하게 기른 것이 발등을

찧도록 후회가 되고,조상 앞에 면목이 업서 더 그러는 거요. 조상은 오히려 어른

이시니 덜 민망할지 모르지. 백일하에 꾀 벗고 난장에 나앉은 것같이 온 문중이

며 이웃 마을 남원 군내 동제간에 다 드러난 망신을 이제 와서 무얼로 가릴 거

? 흩어진 콩이라서 주워 담을 수가 있는가, 찢어진 종이라서 풀 발라 붙일 수

가 있는가. 아니면 먹칠한 얼굴이라 물로 씻을 수가 있는가. 무엇으로도 만회가

안되는 망종의 짓을 제 맘대로 저지르는 저런, 위아래도 근본도 분별도 없는 소

행머리를 누가 키워 주었겄소? 부모 잘못이지. 어려서 성정을 바로잡어 줘야 했

던 것을."

"그게 꼭 가르친다고만 된답디가? 자식 잘못되란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다고.

저 타고난 액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타고났다는 게 도대체 뭐요. 성품일 테지. 부처가 성불을 해도 성질은 남는다드

. 그렇게 업이 질긴 것이 성질이라 허드라도, 자신을 길들이기 나름일 것이요.

사람이 한 번 생각을 하는 데도 다 법칙이 있어야 하고, 한 번 행동을 하는 데

도 다 격식이 있어야 해. 앉고 서는 태도며, 그 의복을 정제하고, 그 음식을 절

제하는 것에 아무 표준이 없으면, 자라서는 더욱 잘못되는 법이요. 고칠 수도 없

. 그러니 아주 어려서 젖니 날 때 잘 가르쳐야지."

어린아이들이란 경솔하고, 수선스럽고, 들뜨고, 천박한 버릇이 많은데, 이를 귀엽

다 여기어 버려두면 훗날 온갖 행실이 완전하지 못하고, 온갖 일이 굳건하지 못

하여 공명정대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법이라고, 이기채는 말했다. 강모한테는 당

치않은 말씀들이시오. 태어나서 관옥 같고, 자라면서 귀공자요, 신중하고 조용하

여 차라리 칼싸움 전쟁놀이나 한 번 양껏 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강모였습니

. 그 애가 들뜬 모습 나는 본 일 없고, 손발을 털거나 흔들거나 다리를 내두를

는 것도 나는 본 일 없었소. 큰 소리로 고함치는 격성도 들은 일 없습니다. 가르

침을 배우고 본받는 데야 강모를 당할 사람 아무도 없었을 것이오. 걸어가면 구

슬 소리 나고, 앉으면 부드럽고 온화해서 둘레가 다 은은 해지는 그런 강모가,

거칠고 사납게 마구 자라 패악한 탓으로 이리 떠도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애들이란 그 기상이 영리하고 뛰어나더라도 들떠서 날뛰거나 간사 경박하면 절

대로 안되는 법이고, 바탕이 순박 온후하더라도 잔약하고 무른 데 이르러서는

안되는 거요."

잔약하고 무른 사람. 그 강모가 날을 세워 살을 가르고 깊이 박은 비수는, 지금

효원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차마 고꾸라질 수도 없게 하면서, 가슴을 꿰뚫은

칼날로 곤두서 있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그네는 숨을 들이쉴 때마

다 꼬챙이같이 박힌 칼날에 살속을 베이면서, 쓰라림에 소스라쳐 저도 모르게

손으로 앙가슴을 누르곤 하였다. 손바닥 밑에, 치받친 숨이 벌쩍벌떡 부딪친다.

날에 베어 토막난 숨이다. 숨은 잘리어 질린 몸둥이를 새파랗게 뒤틀다가, 못 이

긴 고통으로 튀어올라 가슴벽을 치며 대가리를 박는다. 대가리 박힌 자리에 검

푸른 멍이 든다. 효원은 그 멍을 토해낸다. 후우우으.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내가 멋 헐라고 무단히 없는 말을 잣어내겄능가이? 죽을라고 환장헌 거 아니

. 아이고, 곷니어매는 상놈 상녀르 신세 서런 거 우리보담 더 잘알 거 아녀?

꼭두새복 동트기 전부텀 개 뒤야지 귀얭이도 다 자는 오밤중그장, 대그빡이 벳

게지고 발부닥에 불이 나게, 언제 궁뎅이 붙일 새도 없이 죽어라 일을 해도,

했다 소리보담 베락맞기 이골이 나게, 천허고 천헝 거이 상놈의 것들 인생인디.

없는 말 지어냈다 닭괴기 백숙 찢기디기 짝짝 찢길라고? 언감생심. 못헐 일이제.

나도 첨에는 하도 기가 맥헤서 입이 안 떨어지드라."

우례와 마주앉은 옹구네는, 마침 허드렛일이 있어 원뜸에 올라왔던 것처럼 주섬

주섬 일거리를 걷어들고, 뒤안에서 안마당으로, 안마당에서 디딜방앗간 옆구리로

왔다갔다 하더니, 설핏 해가 넘어가고 어둑발이 내려앉자, 기웃 우례네 행라 쪽

을 들여다보더니

"하이고, 추와라으. 멋 헝가잉?"

하면서 방문고리를 잡아당겻다.

"들오시오."

실밥 뜯어 흩어진 것을 손바닥으로 슬어 구석지로 밀어 놓으며 우례는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그네의 검은 머리 낭자에는 흰 무명실을 기다랗게 달고 있는 바늘

이 꽂혀 있다. 그 바늘을 빼서 실패에 꽂는 우례 옆에서 봉출이와 꽃니가 서로

두 다리를 뻗어 맞물리게 끼우고 앉아

"니 다리 내 다리 갓 다리."

곡조에 맞춰 손바닥으로 다리를 탁, , 두드리며 노는데

"시그럽네이잉? 어른 오셋그만. 고만히여어. 이렇게 좀 해 바라. 저만침 가아.

리 외겨. 이 알로."

우례가 옹구네를 맞았다. 나이 서로 어찌 되었든, 우례는 노비고 옹구네는 상민

이라, 비록 옹구네 행신이 노비보다 나을 것 없더라도 엄연히 면대에 구분이 있

, 우례는 자신을 낮춘다. 옹구네도 그런 줄은 안다. 하지만 그 둘은 허물이 없

.

"갠찮히여. 나 발 조께만 녹이고 갈라고오. 한 죙일 동당거림서 배깥에만 있었드

니 발꾸락이."

명색이 아랫목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옹구네는 우선 발가락을 주물렀

.

"니 다리 내 다리 갓 다리이. "

"좋오을 때다. 시방 안허먼 그렁 거 언제 또 허고 놀겄냐."

어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아까 하던 놀이를 잇고 있는 두 아이를 보

고 옹구네는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리고는

"넘들은 다 개멩해서 핵교들을 댕긴디."

하며 혀를 쯧쯧 찼다. 우례를 옆눈으로 힐금 보면서.

"종의 자식이 문자 속은 알어서 멋 헌다요. 배 안 곯으먼 그만이제."

"아 왜 자가 종의 자식이여? 이 세상에서 봉출이가 누구 자식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 즈그 아부지뿐일 거이네. 참말로 요상한 일이여잉? 상관없는 나도 아는 그

시를 왜 인자가 몰르까아?"

"어찌 모르겄소."

"아이, 수천샌님은 그렁게 참말로 무신 언질 한 마디도 없능가? 개닭 보디끼 봉

출이한테 완전 넘맹이로 허세? 그러든 안허시겄지, 설마. 신분이 웬수라 그렇제

자식은 자식인디. 누구 넘들 눈에는 안 띠여도 속새로는 머 오고 간 끄터리가

있을 거 아니라고?"

나이 우례보다 한 둘 더 먹은 옹구네는 우례를 한쪽에서부터 살살 돌려가며 변

죽을 긁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 우례한테 파고들기 위해서는, 우례한테 제일

아프고 서러운 끌텡이를 건드리어 들추며 동정하는 것이 제일 손쉬운 때문이었

.

"산지기 박달이 자식도 보통핵교 가고, 수악헌 백정 택주네 자식도 책보 둘러메

고 핵교 가등만. 온 시상이 다아는 양반의 자식으로 이씨가문 피 받어난 봉출이

가 무신 죄 졌다고 넘 다 가는 학교를 못 가, 긍게. 시절도 인자는 옛날 같든 한

헌디, 우례나 됭게 신이 짚어서 썩는지 곯는지 암도 몰르게 혼자 전디제, 나만

같어도 진작에 무신 사단을 내도 냈을 거이여."

우례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문지르고만 있었

. 뻗은 다리를 두드리며 놀던 두 아이도 어느 사이 어미와 옹구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손을 멈추었다. 방안에는 순간 무거운 침묵이 켜를 이루며 지질

리게 내려앉았다.

"아이, . 봉출아. 너 요새는 오수 갈 일 없냐?"

옹구네가 그 침묵을 머리 위로 걷어 내며 일부러 재미가 난 목소리로, 봉출이를

건드리듯 물었다. 그 말에 봉출이는 무색하여 머리통을 긁적였다. 꽃니가 옆에서

오래비 쪽으로 고개를 갸웃 들이밀며 웃자 봉출이는 그 동그란 낯바닥을 쥐어박

는 시늉을 하였다.

"봉출이 오수 갔다 온 일."

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라도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열너댓 살 장

정이 다 되었지만, 허우대에 비해서 속이 여물지 못한데다가 변통은 없고 욱성

이 있어 성질이 급한 그가, 아직 여남은 살이었을 대 여름한날 있었던 일 때문이

었다.

"봉출아아."

큰사랑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조르르 달려간 봉출이한테

"너 내일 아침에 오수 좀 갔다 와야겄다. 심부름 헐 것 있으니 일찌거니 일어나

서 채비허고 있거라."

이기채는 그렇게 일렀다.

"."

대답을 하고 물러난 봉출이는 이튿날 꼭두새벽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온데

간데 없이 어디론가 없어져, 하루 종일 우례가 온 동네를 헤매고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 이 망헐 놈이 어디를 갔다야, 긍게, 참말로. 안 그래도 더워 죽겄는디 내가

복장이 터져서 못 살겄네. 아니, 소례야. 너 봉출이 못 봤내? 야 어디 갔능가 몰

?"

"아까 내동 말헝게로."

"사랑에서 맻번씩이나 찾으싱만, 어쩐다냐. 논에도 없고 밭에도 없고, 뒷동산 밤

나무밭에도 없고."

"그러면 물 속이나 뒤져 바얄랑가."

"빌어먹을 년."

"아 누가 알어어. 덥다고 첨벙 방죽 가운데로 뛰어들으 갔다가."

"지랄허고 자빠졌네."

"또 딴 디 가 찾어바아. 어디가 있어도 있겄지맹, 지가 머 도망 갔으께미? 어매

두고?"

", 허는 말마동 꼭."

정짓간에 부지깽이도 헛눈 팔 틈이 없다는 한여름 농사철이라 집 안팎의 종들이

며 호제, 머슴, 놉 들이 모두 들판으로 나가, 고적하리만큼 하얗게 바랜 마당 귀

통이 행랑 그늘에 잠시 비끼며 마주선 우례와 소례는, 서로 하는 일이 다른지라

한자리에 같이 앉을 틈조차 없었는데, 새벽부터 봉출이 찾으러 다니느라고 땀투

성이가 된 우례가, 막 개울에서 한바탕 빨래를 하고 들어오는 소례와 마주쳐 한

쪽으로 끌고 간 것이다. 소례는 머리에 인 빨래 함지를 행랑 툇마루에 내려놓았

. 소례의 투박한 손이 물에 허옇게 불어 우례 것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소례는 철들기 전부터 이날까지 온 집안 식구들의 치마, 저고리, 바지, 저고리,

속옷, 겉옷, 베개, 홑이불에 버선 수건 온갖 것들을 개울에 가지고 가 빨아 오는

것이 소임이었다. 그리고 그 형인 우례는 침비인지라 그것들을 다듬고 궤매어

바느질하는 것이 평생의 일이었다.

"되지야?"

"시언허지머. 물놀이맹이로. 넘들은 지심매니라고 뙤약볕에 단내가 나는디, 나는

기양 물 속으다가 두 발 당구고, , , 속이 씨연허게 방맹이질 헝게로 한 좋

? 성보단 내가 낫제. 복더우에 바누질이 얼매나 속 터징가잉. 땀은 뚝뚝 떨어

지제, 바늘은 뿌드렁뿌드렁 들으가도 나가도 안허제, 손구락 푹푹 수심서 열불나

게 우그리고 앉어서 그것 기양 덤벙덤벙 담박질로 건너뛰도 못허고 한 올 한

. , 여름에 성 보먼 젤로 안되얐데."

"니 걱젱이나 히여. 나는 신선잉게."

"겨울에는 그래도 갠찮제."

"아 사철 갠찮다. 야 좀 바, 누가 누 걱정을 허능가 모르겄네, 시방. 겨울 되까

무섭다, 참말로. 얼어터진 얼음 구뎅이에 발 당구고 홑이불 빨래허능 것 생각만

해도 내가."

"좋을 때는 좋은 생각만 허제 멋 헐라고 여름에 겨울 생각 헐 꺼이여잉? 얼릉

가 바아. 불호령 나겄네. 후딱 가서 찾어바아. 여그저그."

소례는 마당의 빨랫줄을 손으로 훑으며 간짓대를 받쳤다. 너무나 부시어 날카롭

게 찌르는 햇볕에 눈을 찡그린 소례가 널어놓은 홑이불에서 물이 투두둑, ,,

마당으로 떨어졌다. 그 홑이불이 바짝 마르도록 봉출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허 그놈 참. 내가 어제 그렇게 일부러 불러서 말을 미리 일러놨건만, 상전 말을

어디로 듣고 버릇없이 제 멋대로 나가 버린단 말이냐."

먼 심부름 시키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길이 좀 멀다뿐이지 이리저리 들

어가고 나가면서 복잡하게 뒤엉킨 갈랫길이 아니어서, 품앗이에, 두레에, 놉들까

지 사서 부리는 농번기의 일손을 빼내기 어려워, 봉출이한테 서찰 하나 전하고

오라고 시킬 참이었던 이기채는, 해가 중천에 뜨고 한낮이 겨워 해거름에 이르

, 어이가 없어 이제 더 찾지도 않았다. 드디어 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버린

다음에야 봉출이는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수석수석 흩어진 머리는 땀으로 범벅

이 되어 낙지가닥같이 엉기고, 꾀죄죄한 낯바닥은 먼지와 땀에 환칠이 된 봉출

이는 후줄근히 늘어져 터덜터덜 아랫몰에서 중뜸으로 오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샅에서 그를 본 사람들이, 하루 종일 우례가 봉출이 찾으로 다닌 것을 아는지라

", 봉출이 아니여? , 너 어디 갔다 오야?"

저마다 감짝 놀라 물었다.

"오수 갔다 와요오."

봉출이는 기진맥진 겨우 끌어내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아이, 봉출아, 너 한 죙일 어딨었냐? 느그 어매가 아조 죽을 혼났다. 너 찾이로

댕기니라고. 어디 갔었더?"

"오수 갔다가 와요오."

"오수?"아낙이 의아하여 반문하는데 봉출이는 다리까지 절룩절룩하며 발을 지일

질 끌고 걸었다. 그는 몹시도 지쳐 보였다. 그리고 허기져 보였다. 조그만 몸둥

아리가 동그랗게 고부라진 봉출이를 발견한 우례가 그만 우르르 달려들어 대가

리를 야무지게 쥐어박고는, 하루 종일 애가 탄 끝이라 돌아온 것만 해도 반가워,

한마디만 물었다.

"너 어디 갔었냐."

"오수 갓다 왔는디."

"오수?"

"."

"너 먼 꿈 꾸냐?"

"참말이여어."

봉출이는 저대로 무슨 답답한 일이 있는지 볼멘 소리를 밀어내고는 툇마루에 털

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를 앉어, 얼릉 큰사랑에 가서 말씀 사뢰야제. 너를 심바람 시키실 일이 있

으곘다는디 암만 찾어도 어디가 있어야 말이제. 아 엊저녁으 실컨 알어듣게 일

르솄다등만 어따가 까먹고 않든 짓을 허냐, 긍게. 늑어매 죽으라고오. 애간장이

다 녹아서 말러 부렀다 기양. 근디 너 밥도 못먹었데? 꼬라지 봉게로 그렇그만

? 똑 동낭치맹이다. 이얘기는 이따허고 얼릉 사랑으로 가바. 후딱. 가서 무조건

잘못했십니다아, 부텀 사뢰. 알었지? ? 잘못했십니다아."

우례는 제가 봉출이인 것같이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깊이 수그리며 기어들어가

는 시늉을 해 보였다. 봉출이는 그런 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터덕터덕 사

랑채 쪽으로 나갔다. 사랑에는 벌써 등잔불이 밝혀져 있었다. 큰사랑 목외로 들

어간 봉출이는 힘없이 주저앉듯 굻어앉으며

"잘못했십니다."

하는 대신에

"오수 갔다 왔는디요."

라고 아뢰었다.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서 기표와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있던 이기

채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기표를 한 번 바라보고 봉출이를 바라보았

.

"오수라니?"

"엊저녁에 저보고 낼 아침 일지거니 오수 갔다 와야겄다고 허계서요, 새복에 일

어나서..."

봉출이의 옹송그린 등허리를 쏘아보던 기표는 눈살을 찌푸리고, 이기채는 짐작

히는 바가 있는지 뜻밖에도, 벼락을 치는 대신

"그래서?"

하고 물었다.

"오수를 갓어라우."

"오수 어디를?"

"네거리요."

"네거리?"

". 사람 많이 댕긴 디 가 서 있었는디요?"

"서서 무얼 했느냐."

"기양 사람들을 체다봄서 서 있었어라우."

"사람들은 무얼 하더냐?"

"왔다갓다 허대요."

"너보고 무어라고 안 그래?"

"예 암도 머라고 안해서 그러고 섰다가, 해 넘어갈라고 그러길래 인자 기양 왔어

."

이기채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순간 기표의 눈살은 더욱 날카롭게 찌푸려

졌다. 봉출이는 가장 말을 잘 듣는다고, 제 딴에는 일찍 일어나 동도 트기전에

길을 나서서 혼자 타박타박 걸어 시오리 길 오수 역까지 다다라, 그 중 사람이

많이 다니는 네거리 틈 길목에 하루 종일 서 있었던 것이다. 날은 덥고 길은 낯

설어 누구 아는 이 얼굴도 눈에 뜨이지 않는데, 정수리에 꽂히는 놋낱 같은 오

뉴월 댕볕을 불비 맞듯 뒤집어스며, 이글이글 달구어진 지열에 헉, , 숨이 막

혀 목이 탔지만, 혹시 심부름 온 자기를 만나러 누가 올가 봐 자리도 못 옮겼다.

땀으로 멱을 감는 봉출이의 삼베 잔등이는 아예 찰싹 달라붙어 물 솔에 들어갔

다 나온 형국이 되어 버리고, 아침도 못 먹은 뱃속이 노오랗게 훑이면서 고부라

지더니 점심밥도 거르게 되자 휘잉 머리곡지가 어지럽게 돌았다.

"아이고."

봉출이는 다리에 힘이 빠져 그만 쪼그리고 앉았다.

"왜 암도 아무 말도 안허까잉. 참말로 요상허네. 누가 머라고 해야가지. 집이로."

아이구우, 까깝히여어.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 우두고 앉은 봉출이는 이제, 오는

사람 가는 사람도 쳐다보지 않고 오직 땅바닥만 들여다보았다. 땅바닥으로 땀방

울이 투둑, , 떨어졌다.

"에라이, 미련헌 놈 같으니라고. 그냥 오수만 가면 무얼 해? 오수가 어디 손바닥

만헌 마당이냐? 또 그렇게 좁은 데라고 해도 그렇지. 누구한테 무슨 일로 가며

어떻게 하고 와야 허는지를 자세히 듣고, 잘 알어서 댕겨와야지, 이놈아, 무작정

오수만 가면 다냐? 이 편지를 가지고 갔어야 헐 것 아니냐, 이 편지를, 오수 영

창당 약방에, 여기 쓰인 화제대로 약재 보내라는 말을 적어서, 너보고 갖다 주라

허는 것이 갈 때 헐 일이고, 거기서 이 편지를 받어 읽고는 약재를 내주거든 네

가 들고 오는 것이 올 때 헐 일이다. 알었느냐?"

"."

"내일 아침에 다시 가거라."

"."

"가 보아라."

"그러먼 오늘은 헛심바람 했능기요?"

"그건 어찌 아느냐. 아주 농판은 아닌가 보구나."

"예에..."

여전히 실소를 머금은 이기채가 손짓으로 봉출이를 나가라 하였다. 기표가 옆에

서 쩟,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봉출이가 흠칠하며 물러섰다. 저 어른이 느그 아부

님이시니라. 어미 우례는 기표의 모습이 비치면 숨죽인 음성으로 그렇게 이르곤

하였는데, 봉출이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

"왜가 머이여? 부모한테 무신 왜가 있어? 내가 느그 어매가 허는디 거가 무신

왜가 있어,왜가. ? 너를 낫잉게 나는 느그 어매 아니냐. 저 어른이 느그 아부

님이시고."

"왜 그러까아."

"그렇다면 그렁갑다, 그렇구나, 허먼 그렁 거이여."

"그러먼 시방 있는 우리 아배는 또 누구여?"

봉출이는 정쇠를 떠올리며 머뭇머뭇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배도 아배제잉."

우례는 한숨을 쉬며 탄식같이 대답하였다. 왜 이렇게 나는 몰르겄으까아. 어미

우례는 봉출이가 아부님과 너무나 똑같이 닮아서 하늘 아래 누구라도 한 번 보

면 두 말을 더 못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막상 봉출이는 그 아부님을 똑바로 뵈

온 일이 없어서, 그리고 제 얼굴도 본 일이 없어서,

"누가 부자지간 아니라께미 원 저렇게도 판백이로 같으까잉."

하는 옹구네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느님이, 이렁 걸 보먼 꼭 지신단 말이여. 하늘이 무심치 않으싱게로 설웁고

속 아픈 꽃니어매, 불쌍허고 가련헌 우례 신세, 사람 보고는 어따 대고 말도 못

허는 처지를 하늘이 어찌 그리 굽어 살펴, 내가 대신 말해주마, 그러고는 일부러

그럴래도 그러기는 에럽게 탁이잖에? 수천샌님허고."

"참말로 어쩔 때는 혼자 앉었다가도 사참허그만요. 철모를 때 당헌 일이지만,

가 얼굴조차 그 어른을 안 태았드라먼 억울헌 내 속은 얼매나 씨리고 애리이까.

칼로 싹 비어낸 가심에다 소곰 뿌링 거맹이로, 나야 기왕으 씨종의 자식으로 났

이니 종이 되야 마땅허지만, 내 자식, 양반이 분명헌 내 자식 아부지를 내가 왜

못 찾어 주능고. 아니요, 아부지 찾겄다는 욕심도 없어라우, 그저 성씨만. 추가가

아니고 이씨가 분명헌 성씨만 찾아 주먼 나는 에미 노릇 다헌 거이여요. 내가

더 멋을 어뜨케 히여. 불쌍허고 천헌 몸에 누가 나도 날 자식이지만, 그래도 그

자식의 피 반절은 양반이고, 성씨야 본래 아부지 따르능것 아니요. 당연히 그렁

것 아니냐고요. 그러먼 야는 이씨요. 야 좀 뵈겨. 이거이 누구 얼굴잉가."

우례는 봉출이 쪽으로 한 무릎 다가앉으며 그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 그렁게 하느님이 지시다잖여, 내가. 사람은 감출라고 해도 하늘이 안 감추는

일이 이런 일이여. 그런디 하느님은 지시다가도 안 지싱가아."

옹구네는 봉출이한테서 시선을 거두며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무신 말이당가요?"

"요렇게 옮도 뛰도 못허게 드러난 일도 모르는 척 시치미 띠고, 아닝 것맹이로

나는 상관없다아 허능 거이 양반잉게로, 암도 안 보는 캉캄헌디서 너만 알고 나

만 아는 일 해 놓고는, 절대로 표 안 낸는 거이 또 양반일 거이여. 그런디 그게

또 맘대로 안 되능게비여. 대실서방남허고 오루꿀 작은아씨 이애기가 내 귀에끄

장 들온 것을 보먼."

"그렁게 넘들은 시방 벌쎄 다들 안다 그 말잉교?"

"파다허드랑게 그러네이."

옹구네 입술에 미끄러운 기름이 돈다.

"둔덱이에 거멍굴에, 고리배미에, 오수,임실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알걸, 아매?

가 오직허먼 요러고 와서 귓속말을 해 주겄능가. 온 천지에 소문이 나고 뒤꼭지

에다 손구락질을 해도, 등잔밑이 어둡다고 매안에 이씨 문중서만 몰르고 있을

수도 있고. 매안서도 암암리 속새로는 수군수군 험서나 차마 본인 당사자 집안

으다가는 말 못허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렁게, 야야, 봉출아, 너 콩심이한테 오늘

들은 이얘기 살째기 해 주어라, ? 가마안히 눈치바갖꼬 히여. 매급시 외장치지

말고. 오수 가디끼 우둑박구로 뎀비기만 허먼 되는 일이 아니다이? 내가 대실

아씨 뵈옵기 민망해서 안 그러냐. 알고 당허능 것허고 모리고 당허능거이 달르

그더엉. 내가라도 가서 말씸 디리고 자와도 어서리가 없잖냐. 에러와서 어디 면

대허고 이런 말 허겄다고? 방자허다고 싸두고 맞을랑가도 모리고. 내가 나이할

라 더 먹은 상것이 머라고 머리고 허먼, 아씨 맴이 얼매나 더 상허시겄냐이?

렁게 내가 그러드라고는 말고 니가 콩심이한테 찔러 주어. 애들이 말허기가 쉽

. 콩심이는 조전빙게 더더구나. 이런 일은 어른이 나서먼 일만 커지제. 넘의

눈에 뜨이고, 그렁게 우례도 말 못히여."

"아이고오, 큰일나겄네요. 어른 못허는 일을 어뜨케 애들이 헌당가요? 아그들은

그저 재통이나 저질르고 댕기제 무신 씰닥쟁이가 있간디 봉출이한테 그런 말은

허라고. 봉출아, 너 행이라고 그런 소리 입에 담지 마라이, ? 들었다 소리도

말어어. 누가 알고 묻드래도."

시킬 일이 따로 있제. 펄쩍이나 뛰며 사색이 되는 우례를 옹구네는 헤아리듯 바

라보다가

"그렇기도 허겄네."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우례의 소맷자락을 은근히 이끌어 할 말이

있다는 표시를 하였다. 남의 말을 면전에서 새되게 막은 끝이라 우례는 무안한

마음도 있어 엉거주춤 옹구네를 따라 일어섰다. 이미 먹장 같은 어둠에 쓸리는

바깥, 두 기둥을 거인의 다리같이 버티고 선 솟을대문의 문간에서 옹구네는 팔

짱을 긴 채로 사방을 한범 휘이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례도 그런 생각 안해 보든 안했을 거이그만. 봉출이 말이여."

"무신 생각이요?"

"시상이 꼭 그렇게 억울헌 것만은 아닝게 우례도 인자, 이런 날이 있구나, 싶은

때가 올 거이네. 나는 태생이 상것이라 대갓집 큰살림은 못허지만 벨라 미련허

든 안해. 머 몇 가지 짚어 보먼 틀리든 않고. 그런디, 봉출이가 앞으로는 갠찮을

거이네. 시방은 추가 달고 종노릇 허지마는 아 누구 씨여, 자가? 수천샌님도 알

고 있제. 그런디 그 집이 시방 어뜨케 되야 있능가이? 새터서방님이 외아들 독

잔디 대실서방님이랑 같이 만주로 가서 안 오시잖여? 그게 벌세 언제 쩍 이야기

? 그러먼 그 냥반들이 언제찜이나 오실 것 같응가. 춘삼월 새봄이 와서 강남

갔든 제비가 돌아오먼 그 제비 따러 오실 것 같응가? 안 오네. 그리 수월케 오

든 못히여. 그러먼 수천샌님은 심젱이 어쩌시것능가이? 아들이 그 하나배낀디.

지달르다 지달르다 다른 아들 찾게 되제. 없다먼 몰라도 있잉게로. 바로 코밑이

. 등 따시고 베불를 때는 콩밥이냐 퐅밥이냐, 참나무 땠냐 솔나무 땠냐 말이

많지마는, 춥고 배고푸먼, 얼어 죽어도 젓불은 안 쬔다는 양반들도 체신보담 손

이 몬야 나가서 그 불을 쬐는 거이고, 사흘 굶어 넘으 집 담장 안 넘는 장사 없

다고 않등게비. 아숩고 다급허먼 태평헐 때허고는 사램이 틀려징게. 그거이 사램

이여. 양반이라고 사람 아니간디? 수천샌님이 말허자먼 자식을 굶게 되얐다 그

말이여, 내 말은."

옹구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번들 빛났다. 우례는 금방 안으로 들어갈 사람

같은 자세로 서 있는데, 그것은 누구 다른 사람과 마주첬을 때 얼른 이 자리를

뜨려고 하는 은연중의 시늉이었다. 그네는 옹구네한테 홀려들면서도 오싹하게

겁이 났던 것이다.

"아 왜 대문간으가 서 갖꼬. 딴 디도 있을 틴디."

우례는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삼키며 좌우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집안 쪽은

하루 일을 마친 뒷개(설거지)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창호지 장지문마다 등불

빛 배어 나오고, 고샅 족으로는 그보다 더 검은 빛이 엉기어 사람의 그림자 하

나 비치지 않았다.

"모리는 소리 말어. 차라리 이런 디가 귓속말 헤기는 더 존 거이여. 우리 같은

상것들이 헛간 뒤에서 수근수근 허다가는 외나 덜미 잽히게. 누가 혹시 우리를

본대도 저것들이 무신 소리 시시덕거리능고 험서 무심히 지나치제 유심히는 안

볼 거이, 큰일날 비밀 이얘기 대문간에 엉버티고 넘 다 들으라고 허는 사램이

어디 있간디? 안 들킬라고 넘 안보는 디서 숙덱이제. 여그서는 누가 우그리고

서 있도 안허고 대문간이라 들으가고 나가니라고 지나치는 사람들뿐잉게, 넘 허

는 말 살째기 귀담어 엿듣도 안헐 거이고."

"그런디요?"

"결국은 수천샌님이 봉출이를 자식으로 딜이고 말 거이란 이얘기여. 새터서방님

대신으로 미우나 고우나, 내 피 받었잉게."

"관옥 같은 데린님들이 지신디요."

"아 손자 달코 아들 달체. 숟구락허고 젓구락이 한 밥상 한 자리에 나란히 뇌인

다고 씨이능 것도 같응가? 그저 수제는 따로따로 가 아니라 쌍둥이맹이로 꼭 같

이 따러 댕기지마는, 숟구락 들 때 따로 있고 젓구락 들 때가 또 따로 있잖응게

. 숟구락으로는 밥 떠 먹고 국 떠 먹고, 젓구락으로는 반찬 집어 먹고. 사람

정도 매한가지라. 손자가 암만 이뿌고 귀허대도 그게 아들은 아닝 거잉게."

"상하 신분이 하늘과 땅인디."

"차암, 내내 이얘기 헝게로 어디 귀뚝 속에 들얹었다 나왔능가 딴 소리 허고 앉

었네이? 그게 다 등 따시고 배불를 때 이얘기랑게. 수천샌님이 자식을 굶게 되

얐다고 안 그리여? 내가. 시방은 저러고 소 닭 보디끼 멀뚱멀뚱 무감헌 것맹이

라도, 인자 두고 바아. 내 말헐 거잉게. 틀림없어. 또 설령 안 그런다 허드래도

그렇게 되겄게 해야제."

"무신 수로."

"그렁게 궁리를 해야능 거 아니여? 테머리를 매고."

"아이고, 무단히 언감생심 맞어 죽을 궁리허고 있다가, 새터서방님 덜컥 돌아오

세 불먼 어쩔 거이요? 헛심만 팽기제."

"그렁게 못 오게 해얄 거 아니라고? 아조 못 오게."

"못 오게요?"

우례의 두 눈이 옹구네가 보아도 놀랄 만큼 벌어졌다. 이 무슨 황당하고도 어림

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수천샌님 안픾의 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제 상전의 댁

청암마님, 율촌샌님, 율촌마님, 그리고 양쪽 집안 대실아씨, 새터아씨들이 날이

새면 까치 우나 감나무를 올려다보고, 밤이 오면 돌아오나, 행여라도 잘새들의

날개치는 소리에 섞여 오는가,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두 서방님. 그들은 두 집

안에서만이 아니라 온 문중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오

지 못하게 해야 한다니. 또 그것을 할 수 있다니. 그것도 우례 같은 일개 계집종

노비 아낙이.

"우선 새터서방님은 뒤로 조께 미뤄 두고, 더 쉬운 일부텀 착수를 해야제. 대박

으 복판 치다 주먹 깨지까 싶응게 옆구리부텀 쳐서 울리게 허드라고. 그럴라먼

대실서방님을 못 오시게 해야 여. 그건 쉬워."

"어뜨케요?"

"대실서방님이 못 오먼 그집이도 아들이 없잉게, 손자 하나 조막만헌 거 클라먼

한참 아닝가이? 봉출이는 철재 데린님보둠 열 살이나 더 먹었고. 아니, 열한 살

더 먹었능가아, 열두 살 더 먹었능가? 아이, 봉출이 자 설 쇠먼 맻 살잉가?"

"열에섯 되마요."

"장개가야겄네? 그런디 서둘지 말어. 종녀르 자식이 장개를 가 밨자 어디로 가

겄능가. 내가 아는 어뜬 사람은 상놈 자식 낳기 싫어서 장개를 안 가겄다 부득

부득 위기데. 상놈이 상년 만나제 당상관의 따님을 만낼 거잉가고, 얼릉 들으먼

억지 같기도 허지마는 곰곰 생각해 보먼 그 속도 알겄드라고. 상놈으 신세가 얼

매나 징그럽고 몸썰이 났이먼 그러겄능가 싶고. 포한이 징게 그런 독헌 맘을 먹

, 앙 그리여? 그런디 이건 상놈만도 못헌 종의 신세, 내가 아네. 우례 속 내가

알어. 비단옷에 금바누질허먼 멋히여? 빛 좋은 개살구제. 금쪽 같은 자식한테 버

젯이 지시는 아부지 성씨도 못 붙여 주고. 아부지라고 불러도 못 보고. 인간의

심정 갖꼬서야 어뜬 에미가 그 자식 체다볼 안 설웁겄능가. 한 마당으서 왔다갔

다 험서. 그런 신세를 지고 장개를 가 밨자여. 머잘허먼 콩심이고, 안 그러먼 호

제네 딸년들 중에 누구겄제. 그렁게 그렇게 가먼 안되야. 성씨 찾고, 아부지 찾

, 보란 대끼 육리갖촤 샘현육각 사모관대 떵떵거리고 가야제. 아부지 찾고 장

개 딜이야여. 안 그럴라먼 성씨 찾어 멋 헐 것이여. 실속도 없이. 아부지만 찾어

바아. 그 담에는 시상이 달러지제. 대접이 달러져어."

"그거이사 나도 알제마는."

"장개는 그때 거서 보내기로 허고. 율촌샌님 살림살이 수천샌님이 다 맡어서 대

신허시는디, 내가 잘 모링가는 몰라도 넘들이 보매는 안 그렇다고? 잘은 모르지

만 하이간이 그 살림 속을 꿰뚫고 지신 냥반이 수천샌님이신디, 종손도 어디로

가고, 아드님도 어디로 가고, 두댁이 다 손자들은 에리고, 봉출이는 수천샌님 아

들이 되고, 그러먼 그 담은 어치케 되겄능가잉? 곷 떨어지먼 열매 생기디끼 그

꽃들 떨어진 꼬투리에 봉출이 맺히는 거 손바닥에 손금 아니여?"

"아이고, 무서라."

"무섭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시요잉? 나 지명에 못 죽으까 싶소. 나사 머 어쩐대도

상관없지마는 봉출이 매급시 아부지 찾을라다 구신 되까 겁나네요."

"안 그럴 꺼이여. 사람 기운이 구신보돔 더 독헌 거잉게."

"그런디, 대실서방님 어쩌능 거이 머이 더 어쩐다고요?"

"소문 내. 봉출이 시켜서. 딴 디다 여그저그 안해도 대실아씨한테다. 그러고

오빼미란 년한테도 실쩍 찔러서 수천샌님 귀에 들으가게 허고. 이런 말은 나먼

날수락 좋옹게."

"아이고, 무서라."

"무선 일 저꺼야 큰일 해내제. 안 그럴라먼 펭상에 이러고 살든지. 머 내가 어쩌

라고는 못허지만 말이여."

옹구네는 우례한테, 이 말이 온 문중에 퍼지고, 대소가가 소동이 나고, 오류골댁,

율촌댁이 서로 뒤집어지면서, 결국 강실이가 쫓겨나게 되는 정황을,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조근조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는

"베룩이도 낯짝이 있다고는 허지만, 낯짝을 신주단지맹이로 뫼시고 사는 매안 냥

반 서슬 푸른 기오성에, 이런 일 저질러져 어디다 낯 들고나 매안 이가요오,

수가 없게 체면이 쑥밭 된 마당에, 안 그래도 겁이 많어 타국 만리 넘으 땅으로

국경도 넘어서 도망 간 대실서방님이 무신 염치에 무신 담력으로 돌아올 수가

있겄능가. 덕석몰이 몰매 맞어 아조 죽을라고 작심헌 바 아니라먼. 못 와. 못 오

. 난리가 나먼 도망을 가는 거이 사람이제. 난리통 속으로 대가릴 디밀고 불쏘

시개 될라는 사람은 없능 거잉게에. 대실서방님이 못 오시먼 새터서방님도 못

외겨. 종항간에 한 모둠으로 발 맞촤 갔다가 동생은 띠여 불고 꺼덕꺼덕 성만

돌아오겄능가? 사람 뵈기 챙피허고 면상이 거끄러서? 거그다가 초록은 동색이라

고 같은 물에 몰아서 치도곤이를 맞을 거인디? 그렁게 인자는 오고 자퍼도 못

오게 여그가 시끄러야여. 막 벌집을 쒸셔 농 것맹이로 기양 정신을 못 채리게.

그러먼 그럴수락이 봉출이한테 떨어지는 감이 클 거잉게. 그런 지만 알어."

아이고오, 그렁게 옹구네가 오늘 나한테 맘먹고 옹 거이구나아. 이런 말 헐라고.

참 요상허네. 이 사램이 왜 나한테 요리 파고들으까? 이런 말은 피가 같고 살이

같은 성지간에도 털어놓기 쉽잖을 거인디, 나를 언지부텀 어찌 보고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내 일맹이로 허고 있었이까? 자개 일도 아닌다. 보통 때는 살갑게

허도 않든 사램이. 속으가는 속정이 따로 있었등게비구나. 나는 몰랐지마는.

를 안씨럽게 생각고. 오오, 그래서 아까 봉출이랑 꽃니랑 있는디도 개념 않고 이

런 말 저런 말 다들으라고 일부로 그렇게 이얘기를 했등갑다. 아그들보고 욍기

라고.

"꼭지만 건드러 뇌. 그 담은 지절로 터지게 되야 있잉게. 그것도 안허고 무신 소

원을 이룰라고는 말어야제잉? 일이란 거이 공이 들으가야 득이 있능 것 아니라

? 이런 일 모사는 쥐도 새도 몰라양게 시방 여그서 우리 둘이 헌 말은 우례허

고 나만 알어얄 거이고잉. 애들 알먼 큰일나."

옹구네는 다짐받는 목소리로 말끝을 눌러 홀맺고는

"나 갈랑게."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리고 봉출이는 날이 새기 무섭게 콩심이한테로

가 어젯밤에 들은 이야기를 조랑조랑 옮긴 것이다. 아이들 소견이란, 하지 말라

는 일도 기어이 하고야 말려는 경솔함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하라고 부추기

는 말을 안하고 배기리오. 더구나 돈후, 신중 공경 근신이 몸에 밴 사부가의 자

제도 아니요, 한낯 종의 자식 봉출이었으니. 그것도 '봉출이 오수 갔다 온 일'

, 멍사 모르는 일을 저지를 만한 아이였으니. 왕눈을 껌벅거리며 이야기를 해

나가다 빠뜨린 대목이 있으면 다시 되짚어 끼어 넣어 가며, 그는 옹구네한테 들

은 말을 콩심이한테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그 말을 떠안은 콩심이는 차마 떨어

지지 않는 입을 옴질옴질, 몇 번이나 망설이며 침을 바르고 입술을 축이어 겨우

겨우 줄거리만 추려서, 무릅쓰고 토하듯이 효원에게 넘겨 주었다. 느닷없는 이

말에 깊은 칼을 맞아, 소스라쳐 시퍼렇게 질린 명치에 숨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

한 채, 효원은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만 있었던 것이다. 내동댁 떡대기, 갓난

손자의 여린 배가 밟혀 터진 것도 참혹 했지만, 효원은 이 난데없이 치받은 바

윗덩이에 가슴이 터져, 폐장이 흩어질 것만 같았다.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20. 남의 님

 

"자알 했그만. 잘 했어. 하이고오. 이뻐서 등짝을 패 주겄네 기양. 아조 쪼개지

게 패 주겄어어."

휘유우. 옹구네는 시퍼렇게 심지 박힌 음성을 어금니로 짓갈아 응등그려 물면서

그렇게 비꼬고는, 외마디 한숨을 토했다. 춘복이는 주빗주빗 뒤엉켜 부수수 일어

선 부엉머리를 봉분만하게 이고 앉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질 같이 뻗세

게 쑤실쑤실 휘감아 솟구친 눈썹도 웬일인지 숨이 죽어 시커먼 빛이 가시고,

색도 해쓱하여 여윈 듯한 모습이 도무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춘복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두 팔로 무릎을 깍지 끼고 앉은 채 꺼부정한 등허리를 구부리고 있었

. 그는 입술조차 퍼르스름 핏기 없이 질린 빛이었다.그는 푸른 물이 묻어난 백

지장같이 얇아 보였다.

"아니, 얼빠졌능게비. 정신채려어. 도깨비한테 홀렸능가, 왜 이리여? 밤새드락 어

디 논으로 밭으로 끄집헤 댕겠어? 씨름 허니라고? 안 그러먼 왜 그러고 너엇허

고 앉었당가? 사람 들와도 왔냐 소리도 안허고?"

옹구네는 아까, 벌컥 지게문을 열어제치고 농막으로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달

빛에 드러나는 춘복이를 한눈에 훑어보며 대꼬챙이를 박았다. 대보름 휘영청한

달빛은 여한도 없이 밝아서, 벌써 밤이 깊어 삼경이 기우는데도 대낮같이 환하

, 지게문 남루한 부들자리 궤짝 같은 농막 속을 시리도록 푸르게 물들여 주었

. 그래서 춘복이는 물 속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어데 갔다 왔대?"

문짝을 잡아당겨 덜크덕 닫으며 옹구네가 춘복이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춘복이

는 움찔하며 조금 비키는 시늉을 하였다.

"내동 찾었그마는.""

무명 수건목도리를 풀어 탁, 방바닥에 던지는 옹구네 음성이 앵돌아 졌다. 딴에

는 며칠 전부터 궁리를 거듭하여 벼르고 벼르던 일을, 오늘 밤에 드디어 큰마음

먹고 해낸 끝인지라, 비오리네 주막에서 나오는 걸음으로 주막 앞 솔밭 삼거리

달집 사르는 언저리에서 두근두근 어정거리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춘복이가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애를 태우고 발싸심을 했었다. 옹구네는 비오리한테

강실이 이야기를 한 것이며, 비오리와 그 어미의 반응이 어떻더라는 말을 어서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보라, 내가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너와 나는 한 패다, 그러니 너는 절대로 나를 버려서는 안된다,

것을 그네는 춘복이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그네의 예상대로 비오리어미

, 달집이야 무시무시할 만큼 검붉은 불너울로 하늘을 뒤덮으며 타오르든 말든,

몇몇의 아낙들과 떡장수 곤지어미, 방물장수 서운이네와 호물호물한 서운이 할

, 나무장수 부칠이네, 나막신 깎어 파는 모갑이네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조

름조름 주름잡힌 입시울로 은밀하고 더운 입김을 불어, 또하나의 불너울을 일으

키고 있었다. 속이 있는 옹구네 눈에는 그것이 여실히 모였다. 비오리어미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슬쩍슬쩍 스치며 붙인 불길이 화르르 화르르 붙다가, 이윽고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둥그러미를 이루며 그 노파를 에워싸고 모여들어

한순간에 세찬 바람을 얻는 것이. 화염. 그들의 혀는 무서운 소리로 타오르는 불

꽃이었다. 널름이는 혓바닥이 달집 타는 화광에 비쳐, 잘린 듯 어둠 속으로 숨어

들었다가 놀리듯이 날름 꼬리를 세우곤 하였다. 달집을 에워싸고 갱개갱개 갱개

갱개 꽹과리 치며 날라리 드높이 불고 덩그덩그 덩더구꿍 덩그그끙 덩그덩덩 덩

궁덩궁덩궁 더궁더궁더궁더궁, 접가락 장구를 두드리는 옆에서 열두 발 상모를

절묘하게 휘둘러 달빛의 혼을 뽑아 풀었다 감고 감았다 푸는데. 으쓱으쓱 둥덩

실 어깨춤을 추는 이, 누런 이빨 다 빠진 입속을 불길에 드러내어 잇몸으로 웃

는 이, 그리고 번개같이 불에 구워낸 콩을 까먹는 아이들과 막대기를 추켜들고

공연히 우우우우 몰려 다니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비오리는 처창하게 목을 놓

'홍타령'을 불렀다. 꿈이로다 꿈이로오다 세상은 모오두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속이요오 이것이 모두 꿈이로다 꿈 깨인 또 꿈이요 이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

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가는 인새앵 부질없다아아 네가 꾼 꿈을 두고서 무엇을

헐끄나아 아이고오 데고오 허허어나아아 성화가 나았네에 에에에에. 서럽게 허

망하고 흥건한 홍타령이 굽이굽이를 치며 달집의 불속으로 서려들고, 달집은 대

나무 튀는 터뜨리어 찬란한 비명을 달빛 얼은 반공에 수놓을 때.

"아이고, 세상에."

두려움과 호기심과 조롱으로 펄럭이며 불꽃 따라 너울대던 아낙의 날렵한 혓바

닥들은 어느새 시퍼런 비수처럼 곤두서고 있었다. 칼날은 베거나 찌르고 싶어한

. 그들을 불너울 이쪽에서 힐긋힐긋 훔쳐보는 옹구네 검은 눈에도 비수 같은

불길이 파랗게 일었다. 장사 댕기는 예펜네가 이런 일에는 제 격이제. 지일이여.

이 집 저 집 문밖마동 말 뿌리고 댕기는 디는 이만헌 사람들이 없제이. 그네는

벌써부터 날 새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흥겹고도

음모에 가득 찬 밤이 한바탕 거꾸러지도록 징 치고 꽹과리 치며 놀고 싶은 들쑤

심을 감당히기 어려웠다.

"야는 어기 갔다냐."

공배가 춘복이 찾는 말 하는데 공배네는 옹구네를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리배미 사람들이 너나없이 나와서 뒤설킨 솔밭 삼거리 비오리네 주막 앞, 달집

의 불길 주황빛에, 거멍굴 사람들도 흥이 실려 격의 없이 장단을 맞추는데, 으레

있어야 할 춘복이가 빗감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퍼자빠져 자든 안헐 거이고."

공배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것은 옹구네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남모르게 서로

어우러져 지내는 밤중의 농막에서야 그런대로 너냐 나냐 하지마는, 언제 한 번

남 앞에서 보란 듯이 터놓고 내외 시늉 해 본 일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늘

꼬꼬름하고 애석한 옹구네로서는, 이런 날에라도 좀 북 치고 장구 치고 같이 춤

도 추면서 신명나게 놀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춘복이는 머리카락 오라

기도 비치지 않았다. 안 오든 안헐 거인디. 타동네로 갔능가? 않든 짓을 귀끔맞

게 왜 허리라고? 느닷없이 급체 곽란이 났이까? 서성서성 불가를 맴돌던 옹구네

가 그만 역증이 나서, 에이, 빌어먹을 놈. 꼭 사람 애간장 말릴 일만 골라감서

허제. 아 왜 그렁고오. 시여언허게 좀 못해 주고. 사람 속 이렇게 감질나게. 감병

에는 약도 없는디. 먹고 잪고 갖고 잪고 보고 잪은 걸, 못 먹고 못 갖고 못 바서

애트는 병, 먹어야고 가져야고 바야만 풀리는 병을 다른 걸로 어뜨케 고쳐. 천하

망헐 놈. 이렇게 존 날, 동네방네 다 나와서 뛰고 놀고, 배곯은 개새끼도 달 보

고 짖는 밤에, 너는 어디 가서 멋 허고 노니라고 나를 이렇게 적막강산으로 맨

드냐, 맨들기를. 에에이. 토라진 중에도, 주말거리 평상에 옹게종게 모여 앉은 비

오리어미와 아낙들이 그네를 혹시라도 부를까 봐, 옹구네는 조바심이 났다.

"꿈에라도 나한테 들었다 소리는 마시요잉. 그러먼 나는 죽소. 살어서도 설운 세

상 죽을 때나 곱게 죽어야 저 갈 디로 가제, 매맞어 죽은 구신 봉두난발로 피투

셍이 칠갑을 허고 거리 중천 오갈 디 없이 중음신이 되먼, 내가 어디로 가겄소?

내가 인자 그렇게 되먼 이집 문짝에, 쌧바닥 빼물고 엿가래맹이로 짜악 붙을랑

. 알어서 허겨. ? 어쩌겄어? 사단이 여그서 난 것을."

옹구네는 비오리어미한테 그렇게 말했었다.

"원 벨 놈의 지랄 같은 소리를 다 듣겄네. 재수없게."

"그렁게 내가 그러드란 소리는 허지 말란 말이요."

"아 그렁게 그 무선 말을 누가 허라간디. 무단히 지 발로 할랑할랑 찾어와 갖꼬

일을 지어 긍게? , 나 참."

"믿을 만헝게 했지라우."

"믿었으먼 되얐제, 멀 또 못 믿어서 토를 달고, 오금박고, 겁을 주어? 애초에 허

들 말제."

"말 못허고 죽은 구신이 씌였능갑소. 내가."

"걱정을 말어. 나도 술장시 주모 노릇에 단내가 벡인 년잉게."

"그것 믿고 나도 말 헝 거 아니요잉?"

"옹구네란 소리만 빼먼 다른 소리는 해도 갠찮응가?"

"그거사 알어서 헐 일이고."

"백여시."

"어찌 천여시는 못되고?"

"에라이"

그랬으나 이 순간에 눈이 마주치면 비오리어미가 옹구네를 가리키며

"저그 있네, 저그 있어, 저 사람한테 들었잉게로 직접 불러서 물어 보드라고,

, 옹구네 이리 와 봐."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한테 호기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고, 자리 떠야제

못쓰겄다. 고운 님도 없는디, 혼자 보는 꽃귀경이 무신 재미냐. 은근히 불안하기

도 하고, 춘복이가 종내 나타니지 않는 것이 허출하기도 하여 그네는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솔밭 삼거리에서 빠져 나올 때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공연히 미

적 거렸지만, 일단 그 어귀를 벗어난 옹구네는 벌에 쏘인 사람처럼 뒤도 안 돌

아보고 내달았다. 고리배미 온 마을이 풍물 소리와 함성과 일렁이는 달집의 불

, 그리고 얼어붙은 하늘에 무수한 금박 불티 날리며 흩어지는 폭죽들로 뒤설

레어 매암돌고 있는 이만큼은 너무나도 교교하였다. 풀벌레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엄동의 한산에 서리 같은 달빛이 내려 산 그림자는 더욱 검은데, 거멍굴로

난 소롯길은 푸르도록 흰 가리마를 달빛 아래 드러내니. 명절은 사람들의 것이

지 산천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거멍굴은 더더욱 교교하였다. 근심바우 웅크리

고 앉은 동네 어귀로 들어섰지만, 달빛이 쓸어 내리는 찬 손길에 지붕을 맡기고,

집집마다 모두 집을 비워 택주네도, 공배네도, 평순네도, 당골 백단이네도 지게

문이 굳게 닫힌 채 불빛이 없었다. 빈 마당에 깔린 달빛은 밤새 쌓인 눈처럼 사

람 스친 흔적이 없고, 고샅길도 숨서리조차 달빛에 빨리워 창호지보다 창백하였

. 옹구네는 이토록 숨막히게 비어 있는 마을을 처음 보았다. 그럴 일이 없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대보름 달맞이를 가거나 달집 태우는 풍물

놀이를 구경가거나, 마을 사람들 다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오게 되었디,

이렇게 옴시레기 비어 버린, 제 숨소리가 메아리로 울릴 지경인, 괴괴한 마을은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네는 왈칵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다들 어

디 갔능고? 금방 그 사람들과 함께 있다 오는 길이건만 옹구네는 등줄기를 훑는

소름에 진저리를 치며, 아까보다 더 잰 걸음으로 내달렸다. 농막으로 가는 걸음

이었다. 그러나 농막도 비어 있었다. 으아, 참말로 환장허겄그만잉. 이놈의 인간

. 문짝을 열어제치며 됫박 같은 방안을 아무리 씻고 들여다보아도 사람 그림

자 없는것에 힘이 빠진 그네는, 엉덩이를 방 문턱에 걸치고 앉아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마당을 바라보았다. 무어 마당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냥 좀 평평한 한

데에 불과한 그 한 뙈기 마당이 그네에게는 둠벙만하게 느껴졌다. 쭈그리고 앉

은 그네는 볼따구니가 얼얼하였지만 방으로 들어갈 생각도 바깥으로 나갈 생각

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막막하기만 하였다. 이 세상에 참말로 나는 혼자구나.

는 하염없는 서글픔이 무서움도 삼키고, 추위도 삼키고, 집에서 어미를 기다리고

있을 옹구도 삼키고, 달빛으로만 허기를 채우며 텅빈 마을의 텅 빈 집들을 하나

하나 둘러 삼키었다. 그리고 아직도 심연나게 불가에서 맴돌 고리배미 삶들의

겨운 몸짓이 아득하고 눈물나는 세상의 멀고 먼 그림자 시늉인 것만 같아서,

개를 떨구었다. 나만 혼자구나. 너는 어디로 가서 누구랑 놀고 있능고. 허기사

나는 아무껏도 아닝게. 옹구네 수그린 고개 뒷덜미로 싸르락 싸르락 달빛이 내

려앉았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던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춘복이를 포기하

, 시린 모가지를 움츠리며 우선 저 사는 오두막으로 돌아왔던 옹구네가, 결국

은 다시 두루치자락을 움켜쥐고 종종걸음으로 내달린 농막에, 춘복이는 아까 같

은 꼴을 하고 와 있었다.

"하이고오. 오사네"

들이당짱에 팍 꼬부라진 침을 놓으며 침을 놓으며 주질러 앉는 그네를, 춘복이

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얼핏 비친 달빛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얼굴은 푸르

게 질려 있었다.

"어디 갔다 왔대?"

재차 물어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겁고 깊은 한숨을 토하였다.

어찌 보면, 그가 힘없는 창호지처럼 펄럭 쓰러지지 않는 것은 뱃속에 삼키고 있

는 그 한숨의 무게 때문인 것도 같았다. 춘복이는 제 한숨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왜 이러까. 자꾸만 몸 속에서 진기가 연기같이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손금

사이로 힘없이 새는 속 기운은, 주먹을 쥐어도 모아지지 않고 그만 스르르 풀리

며 흩어져 버리었다. 다리에도 힘이없어, 깍지를 끼고 모아 세운 무릎이 픽 모로

쓰러지려 하였다. 꿈인가. 안 그러먼 내가 헛것이 씌여 도깨비한테 홀렸이까.

게 아니라먼 그런 일이 대관절 어뜨케 그렇게 꿈맹이로, 참말로, 똑 거짓꼴맹이

, 일어날 수가 있단 말잉가. 그러나 그것은 꿈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며,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믿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믿기에는 너무나 엄

청난 일 아닌가. 맨 처음 강실이의 이름을 가슴 밑바닥에 새겨 박을 때, 그 아픔

과도 같고 전율과도 같던 절실함이 서러운 천골의 뼛속까지 울리게 하였는데.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쇠끝에서도 싹이 트는 것일까, 거꾸로 박힌

끌 같은 그 이름에서, 들키면 큰일나는 소원이 이파리 돋고 그것은 점점 자라

가지 벋으며 무성해졌으니. . 죄라고 하여도 할 수없었다. 이미 염념불망, 오직

한 생각에 사로잡힌 그 자신을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던 회오리의 나날이,

디어 제 몸을 제가 감아 무섭게 응집되는 것을 누구라서 막을 수 있었으리.

엉기고 뭉친 기운은 하늘도 풀 수 없고, 하늘 아래 그 누구도 풀 수 없었다.

로지 단 한 사람, 강실이만이 그 울혈을 풀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춘복이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소원을 이룬 것이다. 나는 소원을 이루었다. 그런디 내가

왜 이러까. 그는 무너지게 허탈하였다. 온몸을 절박하게 채우고 있던 울혈이 멍

든 덩어리째 울컥울컥 쏟아져 버리던 순간, 춘복이는 핏줄마다 고이고 막힌 설

움까지 함께 토하며, 울었다. 아비와 할아비와 그 윗대의 할아비 때부터 질기게

도 꼬여 온 핏줄의 동아줄이 툭, 소리를 내며 장쾌하게 끊어져 풀리는 것을 그

는 느끼었다. 그는 속박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켜켜이 버캐 끼어 바위보다 무거

워진 누대 천골을 뼈째로 토해 내며, 그는 가벼운 몸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위에 뜨는 무중력의 나뭇잎마냥. 그러나 어인 일인가. 원한으로 짓뭉개어 덩어리

진 무거움을 폭죽같이 터뜨려 쏟아버리고, 쑥대강이 부엉머리 머리털마다 깃털

이 돋아나 나부끼며 가벼웁게 날아야 할 몸뚱이가, 이윽고 헐렁한 바지 저고리,

허울만 펄럭이는 가랑잎처럼 바스러지려 했던 것이다. 농막으로 돌아오는 그의

투박한 발은 제대로 땅을 눌러 딛지 못하고, 허청허청 허공을 밟고 있었다. 지하

수만 리, 지상으로 아득히 구만 리까지도 우람하게 뿌리 벋고 가지 벋은 나무의

무성하고 실거운 가지에다, 목마른 입술을 붙이고, 수액 진진한 젖을 빨며 저 하

늘 끝 끝 상상에 물오르는 나뭇잎이 아니라, 제 이파리 미천한 엽맥의 수분마저

도 그 나무한테 모조리 흡입당해 버린 채, 기진하여 그만 하릴없이 떨어져 날리

는 가랑잎. 한낱 가랑잎 한 장. 이상하게도 그는 강실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멀

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토록이나 응어리지게 바라던 순간은 그의 오래고 오랜

간절함을 비웃으며 너무도 어이없이 지나가 헛본 듯하고, 소원을 이루었다 하나,

실은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으니. 그가 정욕에 마음을 두었다면 모르겠거

니와, 한 사람의 한세상을, 뿐만 아니라, 가지 끝에 접붙어 묵은 몸 껍질을 깨뜨

리고 새 잎사귀로 태어나, 그 거대한 나무의 뿌리부터 가지 꼭대기까지 온 그루

를 내 것으로 하고자 탐내었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떠밀려난 무참함으로 그는 허공을 딛으며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그저 거기 접

붙어서 그 거목의 수천 수만 잎사귀 가운데 명색 없는 이파리 하나 되는 일조차

도 언감생심 참람하게 생각되어,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몸 가진다고 다 되는 것

이 아니여. 작은아씨가 참말로 내 사람 되야, 내 자식 낳고 사는 그런 일이 내

앞에 당허는 날이 오까. 그는 다시 어찌해 볼 길 없는 나뭇가지 꼭대기를 올려

다보는 심정으로 정월 대보름 빙천의 흰 달을 시리게 우러러 보았다. 아까 동산

날망에 올라 늑대같이 울부짖으며

"달 봤다아아."

폐장이 터져 나가게 소리 질러 그 희고 맑은 달을 가진 뒤, 온몸을 구부리고 엎

드리어 빌었던 소원이 아직도 저 둥근 얼굴 어디엔가 흔적이나마 묻어 있기를

빌면서. 내가 왜 이렇게 울고만 싶단 말이요? 달님. 내가 무얼 잘못했소? 천만

없소. 그러는 춘복이에게 끼쳐드는 또 다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어떻든 사단이

났으니, 매안이 뒤집히고 일이 벌어지기는 벌어질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작은 숙

덕거림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로. 그 회오리의 복판에 춘복이가 눈구

녁 뜨고 서 있었다. 그께잇 거 끄집혀 가서 디지게 뚜드러 맞고 빽다구 뿐질러

지는 거이 내가 겁나겄냐. 덕석몰이 개 잡디끼 몽뎅이질 헌대도 나는 안 무섭다.

그대로 대그빡 쪼개져 죽는대도 나는 겁 안 난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는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며 뼈가 바스라지는 형장에 있

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혹독한 태질이라도 못 당할 춘복이가 아니었으니.

렇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형체가 없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잡을 수도 없는, 운명의 속 깊은 아가리에서 끼쳐 오는 그 어떤 기운일

는지도 몰랐다.

"일은 저질렀지마는."

춘복이는 옹구네를 바라보지 않은 채 한숨처럼 겨우 그 말을 밀어냈다. 옹구네

한테 말하기는 정말 싫은 일이었으나, 아무래도 그네가 알아야 할 일인 까닭이

었다.

"?"

느닷없는 그 말에 옹구네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같이 낯색이 질리면서 입을 쩍

벌렸다. 순간, 그네의 머리카락이 올올이 일어섰다. 그리고 저고리 앞섶이 부르

르 떨렸다.

"하이고, 가만 있어 바."

그런 중에도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옹구네가 목에 걸린 침을 삼켰다. 거르르

, 바튼 목을 깎으며 숨이 넘어갔다.

"찬찬히 이얘기해야 내가 알제."

"더 들을 말이 머 있다고?"

"아 왜 없어어?"

옹구네가 주먹을 들이대듯이 턱을 바싹 춘복이 턱밑으로 들이밀었다. 억누른 목

소리에 날이 서 앙칼졌다.

"왜 이러요?" 모르는 일도 아님서 같이 궁리해 놓고."

춘복이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이고매.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선 옹구네 머리 속은 펀득펀득 생각들이 한꺼번에 번개를 쳤다. 그랬

그만잉. 그러니라고 그랬그만잉. 아이고, 너는 그러고 댕기니라고 없엇그만잉?

그런 너를 찾니라고 나는 언 발에 감발허고 헤맸그만잉? 무신 열녀 났다고,

는 지집 품고 딩구는디 나는 여그, 느그 집 문턱에 걸터앉어, 들으가도 나가도

못허고 쭈그리고 앉었었다. 이놈아, 아이고오, 내 팔짜야. 내가 어쩌다 너를 만나

이 수모를 당헌다냐. ? 모르는 일도 아님서? 오냐, 내가 안다. 아는 일이다.

리 서로 대가리 맞대고 궁리헌 일잉게, 이런 날 닥쳐오는 거이 당연허고말고.

나 사램이 그러능 거 아니다. 아니여. 내가 아능 거 달르고 당연허리란거 달르

, 니가 나한테 허는 인사가 또 달른 거이다. 니가 나를 암만 무시헌다드라도

이러먼 못쓰는 거이여. 나 불질러서 너한테 졸 거이 없제. 오늘만 살고 내일 죽

을 거 아닌 담에야. ? 지내가는 홰냥년을 데고 자도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

는다는디. 이건 머 만리장성을 쌓는 거이 아니라 쌓든 만리장성도 말 한 마디로

허물어 부리네. 긍게. 싸가지 없이. 정 띨라고 작정을 했그만, 나 볼일은 끝났다

그거여, 시방? 안될걸? 그렇게는 안되야. 너만 사램이고 나는 사람 아니냐? 하이

고오, 기가 맥헤서 참말로.

"춘복이 재주 좋네이."

옹구네는 한숨을 늦추며 중치 대신 늑막을 질렀다. 대가리 송곳맹이로 세우고

달라들어 밨자 놀랠 사람도 아니고, 무단히 잘못 건드러 노먼, 아닝게 아니라 일

은 저릴렀능게빈디, 이 마당에 머이 아숩다고 나 같은 년을 지 저테다 둘라고

허겄냐. 떨어낼라고 허겄제. 성가싱게. 그렁게 숨돌려. 너는 마느래가 아닝게로.

시앗 본 본마느래맹이로 길길이 뛰고 굴르고 허먼 니 손해여. 너는 시방 그럴

처지가 아닌 걸 너도 알어야여. 설웁지만 처지는 알어야여. 숨쥑여. 씨리나 애리

나 쉭이고 들으가. 야를 저트다 둬도 벨 손해는 없겄다, 아니 이문 볼 일이 많겄

, 그런 생객이 들게 해야 여. 그러고 뒷날을 바. 알었제? 뒷날에 갚으먼 되야.

내일 안 죽응게. 모레도 안 죽응게. 오냐. 내 채곡채곡 싸 놨다가, 실에다 바늘로

뀌여서 줄줄이 달어 매놨다가 인자 그년한테 갚어 줄랑게. 내가 받은 설움에다

이자 쳐서 남싸게 갚어 줄랑게. 두고 바라. 우선은 일을 성사시키야제. 내가 한

귀영텡이 들어 주어야여. 까 쥑이고 잪지마는. 아이고, 이놈의 년놈을 기양. 성질

대로라면 한달음에 달려들어 쥐어뜯어 놓고 싶었지만, 그네는 분이 받치고 화가

날수록 음성의 꼬리를 차악 낮추며, 결코 흥분하거나 두서없이 날뛰지 않고,

둥대지도 않고, 조근조근 누비듯이 한 땀 한 땀 찰지게 말하는 사람인지라, 우선

숨을 돌렸다.

"긍게 시작은 되얐그만."

"시작잉가 끝잉가."

"먼 소리여, 시방? 인자부텀 정신 바짝 채리야겠그마는."

"달라들지 마시오. 나 아무 소리도 헤기 싫응게."

무릎 걸음으로 뽀짝 당겨 앉는 옹구네한테 춘복이는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고

비켜날 옹구네가 아니었다. 그럴수록 감치는 목소리로 살갑게 앵기며 그의 깍지

낀 무릎에 손을 얹어, 마치 무슨 손위 누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겁내지 말어. 잘될 거잉게에."

모가지 다잡아 암상으로 몰아세우는 대신, 눅눅한 손바닥을 제 손등위에 덮는

옹구네를 춘복이도 이번에는 가만 두었다.

"아이, 백지장도 맞들먼 낫다는디, 사람 하나 들어올리는 일을 혼자 헐 수 있당

? 그것도 머 어디 예삿사램이여? 그 사램이. 금쪽 같고 구실 같어서 놓칠세라

깨질세라, , 샘현육각 나발 불고 나쟁이 사령 앞 세워서 호위를 허드래도 도독

맞으까 조마조마헌 사람을, 자개 혼잣손으로 어뜨케 들고 와? 거그서 여그가 어

디라고. 이 멀고 험헌 질을, 북망산만 헌허고 멀고, 문경 새재 까끄막만 무섭고

높은 거이간디? 매안으서 거멍굴 오는 질도 그리 쉽든 안헐 거이여. 자개 혼자

그 사람을 이고 메고 오기는 말여. 까딱허면 저 앞냇물이 황천 되고 이 뒷동산

이 북망산 되고 말 수도 있을 거이네이. 허나, 기왕지사 대장부가 칼을 한 번 뽑

았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제. 근디 그께잇 노무 호박 찔러서 머에다 쓸 거잉가

? 하루 저녁 밥상에 너물이나 무쳐 먹고는 그만이제. 무단히 칼만 아깝게.

까운 거이 다 머이여? 그 칼로 지 모가지 칠수도 있는디. 무섭제. 거 칼을 아무

나 뽑아? 저 죽을라고? 그렁게 지대로 쳐야여. 지대로. 기왕지사 칼을 뽑았응게로."

옹구네는 춘복이 손을 아귀에 힘주어 잡았다.

"죽냐 사냐여. 자개는 시방 호랭이 속눈섭을 뽑은 거이나 똑 마찬기지여, 오늘

밤으. 어쩌꼬. 혹시 꼬랑지를 붙들었다먼, 죽기 살기로 매달여 가다가 죽게 생겠

으먼 까짓 꺼 탁, 놔 부리고 말겄지만, 그러먼 죽근 않겄지만, 나둥그러지기사

좀 허드래도 말이여, 이건 호랭이 낯바닥 한복판에 그 눈구녁 딱 디리다보고 젤

로 짚은 디 백힌 솟눈섭, 젤로 곱고 아까운 놈을 착 뽑아 제캤이니."

옹구네는 춘복이 얼굴이 마치 호랑이 낯바닥이나 되는 것처럼 제 얼굴을 바싹

가까이 다가대고, 눈동자를 춘복이의 동공 한가운데 정지시켜 뛔뚫어지도록 노

려보았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족집게를 만들어 정말로 그의 놀란 속눈썹 하

나를 뽑으러 하였다. 그네의 손톱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칼침 같았다. .

"왜 이러요?"

춘복이가 홱 얼굴을 비키며 옹구네 손 등을 쳐 밀어냈다. 옹구네는 손을 내렸다.

"그렇다 그 말이여. 자개는 다 아는 장난 시늉에도 요렇게 고슴도치 갈기를 세우

는디, 속눈썹 뽑힌 호랭이가 그 담에는 어쩌겄능가. 눈에다 불을 씨고 뎀비겄제.

시뻘건 아가리 쩌억 벌림서, 대박에 잡어먹을라고 안허겄어? 집채뎅이 같은 그

호랭이 네 발톱을 어뜨케 당히여? 도망도 못 가제. 어디로 도망가. 그 낯바닥 앞

으서. 그 발톱이 도망가는 뒤꼭지 촤악 찢어 내릴 거인디? 할퀴어서."

춘복이는 다만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깍지 낀 무릎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꺾

어 그림자 일룽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렁게 헐 수 없어. 맞닥띠려 죽을 작정허고 한판 붙어야제. 니가 죽냐 내가 죽

. 사람 기운 무선 거이네이? 전에 전에 그랬다대. 내가 에레서 들었는디,

년 묵은 지네허고, 거그 지네가 살고 있는지 몰르고는 그 집에 하룻밤 묵고 갈

라든 선비허고 한밤중에 쌈이 났는디, 그렁게 그 지네가 선비를 잡어먹을라고

그랬겄지맹, 지네는 독이 있잖이여? 천 년이나 묵었응게 오죽헐 거여? 그 천 개

나 만 개나 되는 발로 선비를 친친 감고는 아가리에서 독을 뿜어 내는디, 꽁꽁

묶인 선비가 죽기를 한허고 온몸에 독을 피워 지네 아가리에 맞대고 뿜었다대.

사램이 머 무신 독이나 있어? 그런디 그게 아니래. 사람 독이 이 세상에서 젤로

무섭디야. 그 선비가 새파랗게 독이 올라 지네한테 맹독을 뿜었는디 종당에는

그 지네가 죽어 부렀대. 사람 독에 쐬여서. 그렁게 호랭이 무서랄 거 없어.

맞보고. 정신채리고. 내 독을 써야 여. 눈꾸녁 비딱허는 날에는 죽응게로."

옹구네는 단호하게 말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어도 같이 살어. 나랑."

목소리가 어금니에 물렸다.

"자개가 헐 일 있고 내가 헐 일이 있응게, 인자 찬찬히 첨부텀 다 말을 해 바.

내가 들어야 알고, 알어야 모사를 허제. 저질러만 노먼 멋 히여? 성사를 시기얄

것 아니라고?"

그 말 끝에 비로소 춘복이는 쉬엄쉬엄 한 숨을 섞어가며,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

래 사립문간에서 강실이를 본 순간부터, 대나무숲 마른 댓잎자리 부서지며 서걱

이던 이야기까지를 밀어냈던 것이다. 옹구네는 이야기 중간에

"오오."

"그래서?"

"그래 갖꼬?"

라고만 한 마디씩 박아 넣을 뿐 제 말은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춘복이 말은 숨

소리 한낱도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그 말들은 쇠고챙이로 살을 뚫어 찢으며

그네의 중치에 박혔다. 모질어라. 저 말허는 것 좀 바. 하이고오, 이런 노무 인생

이 다 있구나. 내가 암만 속은 따로 두고 전후 개려 이 말 저 말 딛기 좋게 했

다손 치드라도, 지가 데꼬 자든 지집 앉혀 놓고, 눈도 한나 깜박 한허고, 미안허

단 말 한 토막도 없이, 이러고오 저러고오 허는 것 좀 바라. 니가, 내가 마느래

라도 그러리야. 마느래 아닌 년은 더럽고 설웁구나. 야속한 쓰라림이 가슴 찢긴

곳으로 스며들어 옹구네는 아픔을 참노라고 숨을 멈추었다. 문서가 없다고 심정

도 없겄냐. 이 매정헌 노무 인간아. 그날, 기우는 보름달에 긴 그림자를 시름없

이 끌고 오두막으로 돌아온 옹구네는, 분이 머리꼭지까지 받치는 대신 가슴 밑

바닥이 체구멍처럼 허전하게 빠지는 것을 느끼었다. 숨을 쉬어도 체에다 물 붓

는 것같이 허방으로 다 새어 버리고, 밥을 먹어도 안 먹은 것마냥 허기가 졌다.

걸음에도 맥이 없었다. 그것이 정월 대보름 때 일이었다.

 

 

21. 수모

 

"남편이 소실을 두는 것은, 나 자신에게 몹쓸 질병이 있거나, 몸소 집안일을

할 수 없건, 혹은 혼인한 지 오래되었어도 아들을 낳지 못해 제사를 받들 수 없

게 된 데 까닭이 있다. 남편이 비록 소실을 두려 하지 않더라도 이런 정황이면,

옛날의 어진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한테 권하여, 사방에 널리 알아 보아 어질고

정숙한 사람을 구해다가, 그 여인을 예법대로 가르쳐 자신의 수고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투기를 하겠느냐. 혹 내게 병이 없고 아들이 있는데도 남

편이 여색을 탐내서 여러 희첩을 두어 본성을 잃고 행실을 어지럽게 가지며,

혹하고 음란한 일에 빠져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집안의 재물을 탕진한다면,

마땅히 정성스러운 뜻으로 힘써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권하며 경계하고, 듣지

아니하거든 울기까지 하여, 말하는 마음이 사랑하고 아끼는 데서 나온 것이지

투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인다면 어찌 그가 감동하지 않으

, 깨닫지 않을 리 있으랴. 다만 부녀자가 성품이 좁아서 그 분함과 독기를 참

지 못하고 화를 터뜨려 부부 서로 반목하게 만들며, 심지어는 저주하고 해치는

등 못하는 짓이 없기에 이른다면, 어찌 가히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붉은 비단실로 옆구리를 꿰어 묶은 필사본의 궁체 글씨는, 아직도 그것을 옮기

어 쓰던 그때의 먹빛을 임리하게 머금고 있다.

"선량하고 정숙하지 않고서야 어째 부녀자로서의 몸가짐을 지키며, 순하고 부드

럽지 않고서야 어찌 남을 섬기며, 정결하고 성실하지 않고서야 어찌 신명을 흠

향하게 하겠는가. 부지런하고 검소한 행실에는 좋은 보람이 있는 법이라, 여기

부녀자의 예절에 관한 책을 짓는다."

도톰한 백지를 펼치어 한 점 한 획 먹을 찍어 글자로 옮길 적에, 마음에도 그처

럼 지워지지 않은 자문을 새기라, 효원의 모친 정씨 부인은 출가 앞둔 여식에게

일렀었다. 바늘 끝에 먹물 찍어 살을 찌르며, 비명 대신 무늬를 핏속에 저며 넣

는 문신보다 더 아프게 한평생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것이 '부의'이니.

이름하여 '부녀자의 예절'이라. 명나라 성조의 후비 서씨가 지은 내훈과 명나라

반소가 지은 여계, 그리고 당나라 송악소가 지은 여논어에 명나라 유씨부인이

지은 여범이 곧 '여사서'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헌, 여교, 명심보감,

, 내규 수십 권을 등불 아래 한 절 한 절, 책함으로 하나가 되도록 밤마다 읽

고 베끼어, 이토록 이고 지고 시집으로 왔건만. 내 이것을 쓸 적에는 그저 아녀

자의 성품과 행실을 올곧게 하는 가르침이려니 하였을 뿐, 참으로 내가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될 줄이야 어이 알았으리. 한 집안의 주부 된 부인지덕으로 반

드시 갖추어야 할 어진 성품과 바른 행실이며 언어, 복식, 행동거지, 교육, 그리

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인류와 조상 받드는 제사의 법도,

거기다가 집 안팎 살림살이와 대인 관계에 대한 이런 일 저런 일을 가리고 가르

친 이 책들은, 이제 장차 남의 문중으로 시집갈 처자의 머리맡에 밤낮으로 놓이

어 필사되었으니. 이는 휘황한 보패, 오채 비단이 따르지 못할 소중한 혼수였다.

그리하여 후일에 그네가 어머니 되었을 때, 딸이 또한 그 책들을 소중히 베끼어

시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다. 효원이 필사한 부녀자의 예절과 도리들도 모두

모친 정씨부인이 친정으로부터 해 온 것이니, 그것은 또 정씨부인의 안어른이

그네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책을 보고 쓴 것이었다.

"효원아, 부인은 마땅히 경서, 사기와 논어, 소학을 대강이라도 읽어서 그 뜻을

통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 집안 가문들의 성씨며 조상의 계보를 알아두어야 하

느니라. 역대 나라 이름에 성현 군자의 이름자도 익혀야지. 그 중에서도 여사서

만큼은 읽는 데 그치지 말고 한 자 한 확을 모두 외우도록 하여라. 외운 구절들

이 곧 네 마음이 되도록, 허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큰 덕인즉.

람들이 너한테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옳지, 남들로 하여금 네가 덕

이 없다는 말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남의 부인으로서 덕이 없는 것만큼 부끄러

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효원의 부친 허담은 또 그렇게 일렀었다.

"명나라 말엽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만, 들어 두면 훗날 도움이 될일도 있으리

."

우아현이라 하는 땅에, 공생 손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공생이란 그 고을에서

뽑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된 사람을 말허지, 그 손패가 진씨를 아내로 맞었

드란다. 진씨는 현숙하고 덕성스러운 부인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지극 공순

하게 섬기는데다 남편을 극진히 받들었지만, 서운하게도 아들이 없었다. 그래 손

패를 위해서 널리 사람을 구한 끝에 하씨라 하는 이를 들여 첩으로 삼었는데,

이 하씨도 역시 유순해서 진씨와 더불어 나날을 즐기며 사랑하기 꼭 자매같이

했다더라. 그러던 하루, 그만 뜻밖에도 손패가 죽고 말었구나. 진씨는 그때 그렇

게도 기다리던 아이를 잉태하여 회임하고 있었지. 하씨 나이는 겨우 열일곱 살

이었다. 그 정경이 딱하지 않으냐. 하여 부인 진씨가 낭군도 없는 첩 하씨를 불

쌍히 여기고

"나이 아직 피지도 못한 그대의 인생이 아깝고 가엾다. 개가하라."

권하니, 하씨는 울면서

"첩이 비록 천한 몸이나 어찌 감히 한 지아비를 따르는 의리를 배반하리이까.

컨대 곁에서 모시고 살면서 늙게 해 주소서."

간곡히 애원하였으나

"네 앞길이 너무 길다."

고 진씨가 끝내 듣지 않으려 했더니라. 이에 하씨가 결연히 은장도를 뽑아 들고

제 귀와 코를 단칼에 잘라 결심을 보이려 했단다.

"놓으라. 이 무슨 짓이나."

놀란 진씨가 급히 그 칼을 빼앗고는 같이 붙들고 통곡하며, 외로운 앞날에 서로

의지한 것을 깊이 맹세하였다. 그리고 하씨는 아들을 낳았다. 이로부터 두 사람

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이 아들을 어루만져 기르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길쌈을

하며 고달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는데, 아들이 점점 자라자 공부하기를 권하

고 가르치기에 힘써, 훗날 이 아들은 박사제자에 임명될 만큼 훌륭히 되었더란

. 그리고 진씨와 하씨, 두사람은 다 같이 칠십여 세수를 누렸단다.

"이 말을 왜 허는고. 어떤 경우에라도 부녀자가 남몰래 덕행을 쌓으면 반드시 그

아들딸들이 번성하고 잘 자라, 후분이 좋은 것인 즉. 내 대에 참으면 자식 대에

보답이 따르느니라. 헌데 사납고 표독한 부인은 곧잘 한 가지 작은 일로 분함을

못 이기어 원망하며, 신세를 한탄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울부짖어 앙칼진 소리

로 집안을 할퀴는 일 허다하나, 부디 그런 사람 어디 있다는 말도 너는 듣지 말

아라. 정실부인과 첩의 사이에 은혜를 베풀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 고금에 비록

많지 않지마는, 내가 남의 아내 되어 한 집안의 주부가 되면, 뜻밖의 일도 혹 생

길 수 있으니, 이런 옛이야기도 허실삼아 들어 두면 그럴 때 서로 견주어 고찰

할 수 있으리라."

항상 마음을 너그럽고 넉넉하게 먹어라 허담의 음성이 귀에 울린다. 이상한 일

이었다. 이와 같이 질정하기 어려운 순간에 그네는 어머니 정씨부인이 아니라

아버지 허담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하오나, 아버지. 이 일은 다릅니다. 단순히

첩을 본 일이 아닙니다. 저는 몸에 몹쓸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히 집안일에

힘쓰지 못할 그 무슨 까닭도 없으며, 봉제사할 아들을 두지 못한 것도 아니었습

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오유끼라는 기생첩을 두었삽고, 그 일에 저는 단 한

마디 언급은 그만두고라고 낯빛조차 바꾼 일 없어, 전혀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 이 일을 아는 체하는가보라."

주먹을 어금니 물 듯 쥐고 마음도 그같이 사려먹었습니다. 속은 상하여도 하치않

어서, 어이없고 우스운 마음이 앞선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희첩이란 사내들이

항용 두는 것인지라 한편으로는 그러려니 여기려고 마음을 누르기도 하였습니

. 하온데 이 사람은, 이제, 단순히 여색을 탐내어 음란에 빠지거나 열첩을 들

인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차마 입 밖에 내어 말하기 참람한 일을 저지른 채,

부모를 돌보지 아니하고, 종손으로서 선영을 버리고, 처자 명색 또한 다 팽개치

, 간 곳을 모르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과연 무엇 때문에 본성을 잃고 이대도

록 미혹에 빠졌으리이까. 아니면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의 본성이겠습니까. 효원은

강실이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 버린다. 그리고 양미간을 깊이

찌푸린다. 주름 잡힌 눈살이 칼날같이 패인다. 그네는 격양된 심정을 다스리기

어려워 은연중, 자애로운 어머니보다 엄중하신 아버지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면 아버지 또한 남자이기에 그를 빌어 강모의 내면을 더듬어 보

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친정에서 아버지의 소실을 본 일은 없었을지라

. 그러나,'소실' 때문이라면 내 심정이 이토록 무참하리. 효원은 저도 모르게 고

개를 저었다. 안상에 펼쳐 놓은 필사본 책 위에 두 손을 주먹 쥐어 얹은 채 우

뚝하니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그네는 오직, 아니라. 아니라. 뇌고 있었다.

"부녀로서 남의 말만을 듣고 마음에 거슬리어, 그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않

, 높고 낮은 신분도 헤아리지 않고, 발끈 노여운 기운을 일으켜 낯빛이 붉어지

고 목까지 빨개져서 말을 가려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 길하지 못하

고 상서롭지 못한 형상이다."

효원의 눈빛이 글자를 훑어내린다.

"이런 이는 남편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혹은 일찍 죽거나, 혹은 일찍이 과부

가 되거나, 혹은 아들딸을 낳아 기르지 못하느니."

이런 강경한 말씀의 경계가 없다 하여도, 효원이 그렇게 경박한 성행을 드러낼

사람은 아니었지만, 몇몇 번이나 무망간에

"콩심이를 불러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물어 볼까."

싶다가, 차라리 봉출이를 다잡아 묻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보다는 봉출이가 옹

구네한테 들었다니 그 아낙을 직접 면대하여 자초지종 소상히 듣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네는 서성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네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것은 상전으로서 체신없는 일이기도 하였거니와,

"음란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만약 그런 말이 들리면 귀를 가

리고 급히 피해야 한다."

라고 익혔는데, 거꾸로, 아랫것한테 들은 말을 되짚어 다시 말하고 다시 듣고 하

는 것이 어찌 당키나 한 일이랴.

"사람이 재물을 잃으면 다시 모을 수 있지만 상전이 한 번 그 위의를 잃으면 아

랫사람들한테 다시 존경받기는 어려운 일이니라. 종을 부르는 소리는 급하고 높

아서는 안된다. 그 소리가 바깥 사랑채에 가는것도 두려운 일일진대, 하물며 이

웃 사람들에게까지 다 들리도록 외장쳐 부르리오? 이는 상스러운 짓이다. 더욱

이 계집종과 무릎을 맞대고 마주앉아 집 안팎 세사 자잘한 일을 숙덕이고, 저잣

거리 바깥마을 시정 소문을 잡다히 뒤담아 듣는 것은 천한 일이다."

효원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몰아내는 주문으로 부녀의 예절을 읽고 또 읽

다가, 문득 정씨부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친 허담의 음성을 상기하고, 그 틈바

구니로 끼여드는 강실이의 그림자에 가슴이 벌어지듯 아픈 것을 가까스로 아물

리어, 한 번 더 책에다 눈을 준다. 그러나 몰아내려 하여도 강실이의 모습은 뒷

머리에 탱화처럼 걸린다. 암채 뇌록색 구름 무늬를 밝고 벗어질 듯 살빛이 비치

는 천의를 날개처럼 두른 수수백 수수천 부처들이, 한 손에 천도 들고 한 손에

는 도화 꽃가지 벙글어지게 들어 적색, 청색 황색, 흑색, 백색이 현란한 단청에

에워싸인 탱화. 사찰의 대웅전 벽면에 걸린 탱화의 부처야 그 같은 모습을 하실

리 있으리. 그런데도 효원의 윗머리에 드리워지는 휘장은 걷어낼 길도 없이 금

단청으로 나부끼며, 스러지게 애달픈 천의에 감기어 보일 듯 말 듯, 우는 듯,

는 듯한 부처가 복숭아 꽃가지를 허공에 들고 있는 것이다. 흰 고깔 쓴 부처,

털 달린 홀 부채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운 채 눈빛만 얼비치는 부처, 물결같이

흐르는 구름의 한 자락을 휘어감아 날개로 삼은 부처, 발그레 두 뺨이 꽃빛으로

물들어 바라보기 미어지게 어여쁜 부처. 스치는 미소를 자욱이 머금어 안개 뒤

에 숨은 부처, 내리감은 눈매에 처연한 속눈썹 그림자 어린 부처, 석채, 당채,

녹빛 쓰라리게 아련히 우러나는 온갖 색을 품어 들이며 옷자락 여미어 돌아서려

는 부처, 이만큼 나앉은 부처. 저만큼 연연한 부처. 성황당, 칠성각, 산신당 벽면

에 알록달록 무섭고도 휘황하게, 그러나 오랜 세월 저절로 바람 속에 풍화된 빛

깔 때문에 아득한 저승의 저 너머를 느끼게 하던, 요사르러우나 거역할 수 없는

비현실로 사람을 사로 잡는 무신도 속의 여인들 같은 그 부처들은, 하나같이 똑

같은 얼굴로 수백 수수천 모습을 지었다가, 다른 자태는 빛 바래듯 멀어지고 하

나만이 홀연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 얼굴이 너무 덮쳐와 번지어 또렷이 볼 수

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강실이의 얼굴이었다. 한 울안에 함께 사는 시누이

가 아닌 탓에 아침 저녁 얼굴을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러면 종시매 얼굴을

모를 리 있으랴. 모르다니. 오히려 너무나 선연하여 지워지지 않을 만큼, 처음

보았을 때부터도 강실이의 모습에서는, 다만 곱다고만 해 버릴 수는 없는 자용

이 옷빛깔과 그 옷의 선에서 우러났었다. 이능애부지자매자.

"남의 아내가 되어 능히 남편의 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매우 드물다."

라고 예전의 어른이 글로 경계하며, 그리해서는 안된다. 도리를 가르쳤지만,

이 무슨 남편의 종매여서가 아니라, 자신과는 참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놀라움

과 낯설음, 그리고 이상한 부러움 같은 것들이 휩싸고 들어와, 강실이를 마주할

때는 일부러 더 무심하고 범연한 척했던 것이다. 그런 효원의 태도는 자칫 거만

하고 붙임성이 없게도 보였다. 청암부인 아직 생존하여 있을 때, 설을 맞아 큰집

으로 올라와 방안에 둘러앉은 어른들게 세배를 하던 강실이가

", 이제 새형도 들어오셨는데, 오라버니 내외하고 강실이도 세배해야지?"

하는 청암부인 말에 발그롬히 귀밑이 붉어지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던 자태가 지

금도 눈에 선하다. 연분홍 치마에 연노랑 명주 저고리를 홍두깨 올려 지어입은

강실이는, 느슨하게 땋은 검은 머리에 검자주 제비부리 댕기를 매고 있었다.

모는 효원과 나란히 하고, 강실이는 그들의 맞은편에 서서 연분홍 포기로 수줍

게 피어난 치마폭을 부풀리며 나부시 내려앉아 절을 할 때, 두 내외는 함께 수

그리어 맞절을 하였다.

"어째 그리 강실이는 절도 곱게 허는고. 누구네 집안으로 시집을 갈란지, 그 집

에서는 아마 삼대 적선을 했을 것이네."

누군가 강실이 등뒤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효원의

절은

"왕후당상."

같았다고 뒷말을 했다 하였다. 그날은 범상히 넘기고 만 자리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일이 있은 다음에 그처럼 둘이 서로 앙큼하게도 시치미 떼고 마주앉은 세배

자리였던가, 아니면 아직은 그 일 있기 전인 자리였던가."

새삼스럽게 곰곰 되짚어지면서, 강수 혼신 사혼이 있던 날을 헤아려 세어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이 어떤 낯빛이었는지, 한 번 떠올렸던 광경을

다시 떠올리고, 다시 떠올리고, 하면서 그때마다 속에서 부글부글 치밀어 오르는

덩어리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몇 걸음 안되는 작은집 사립문간으

로 들이닥쳐

"이리 오라."

부를 것도 없이 강실이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젖혀 그 얼굴을 꿰뚫어 들여다

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네는 무거운 이마를 주먹으로 받친 채 깎아지른 절

벽처럼 앉아만 있는 것이다. 수모. 효원은 이 엄청나고 뜻밖인 상황에 깊은 수모

를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연기에 이르러 한 사람의 아내

된후, 그와 더불어 오손도손 크고 작은 일을 의논하며, 자식을 낳고 훈육하여,

그 또한 장성하면, 새 둥지를 이루도록 합심하는 부부 일상이, 첫날밤 첫 자리

처음부터 거부당한 근원이 바로 거기 있었단 말인가. 단순한 일시 정욕이 아니

라 근원적인 마음의 바탕을 그곳에 두고, 싹틔워 둥치를 이루며 제 존재를 부비

어 어우러지고 싶었던 사람이, 거기 있었단 말인가. 강실이는 일개 형상을 띤 어

'여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이 가서 닿지는 못할 그 무슨 한 '세상'으로 효

원에게는 느껴졌다.

"본디 분가루 같은 사람인 것은 내 알아보았지마는."

향기 자욱하고 보얀 형체 보이는 것 같지만 막상 집으려 하면 가루만 묻어날 뿐

흩어져 버리는 분. 그러면서도 바르면 보얗게 드러난는 분. 그것이 강실이인 것

같았다. 강실이가 비록 종시매라 하나, 만일 색기 있거나, 암팡지거나, 요사스럽

다면 차라리 이보다 덜 무참할 것도 같았다.

"너는 어떤 사람한테 무엇인가가 되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구나."

설령 그것이 비극이나 혹독한 장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 몫이다. 나는 이 사

람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네가 차지하고 있는 마음 자리는 마땅히 내 자

리인 것이다. 나는 문서로 약조하고 육례로 맹세하여, 하늘이 알고 사람이 아는

그의 부인이 되었으니. 이 사람은 내 것이다. 그런데 너는 누구이냐. 내가 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도 한 할아버지 한 조상의 피붙이로 태어나 한 울안에

노닐면서

"삼종은 한 부엌에서 난다."

는 말 그대로 한식구 다름없이 먹고, 놀고, 마주보고, 어제 본 달빛과 오늘 보는

햇살을 같이 나누며, 나는 모를 너희들의 시간을 지단실같이 날줄로 씨줄로 은

밀하게 엮어 냈을, 너는 대관절 누구이냐. 이리 오라. 이리 나와서 얼굴을 보이

. 효원은 오채 단청 구름무늬 뇌록빛 뒤편에서 수수십 수수백으로 나뉘어 펄

럭이는 강실이의 챙화를 홱 낚아채, 위폭에서 아래폭까지 부욱 찢어 갈기갈기

조각조각 흩어 버리며

"네가 사람이냐."

강모에게인지 강실이에게인지 모를 분기를 한숨으로 토한다.

"내 차라리 상것으로 났더라면."

그네는 참지 않아도 좋을는지 몰랐다. 효원은 치미는 성정을 내리눌러 참는 대

, 기껏 펼쳐 놓은 필사본의 한 구절을 몇 번이고 되풀이 읽는다.

"잔혹한 성품을 가진 부녀자는 계집종에게 벌을 줄 때, 음란하고 추잡한 형벌을

가하기를 좋아하며, 머리털을 뽑고, 볼을 쥐어틀고, 바늘로 찌르고, 쇠를 달구어

지지고, 더러운 것을 입에 쓸어 넣고, 발가벗겨 거꾸로 달아매는 등, 그 참혹함

과 악독함이 대단한데, 그런 집은 반드시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까지 읽던 눈이 저도 모르게 다시 앞 구절로 옮겨간다. 내 너를

거꾸로 매달으랴. 효원의 숨이 거칠어진다.

"새아씨, 방에 지싱가요."

누마루 바깣에서 안서방네가 안에다 대고 살피듯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내가 잠깐 올라오느라고."

방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동계어른 이헌의의 손부 사리반댁이었다. 그는 동경에

가 있는 강호의 아내로, 효원보다 대여섯 살 위였다.

"날이 아직 차지요?"

효원은 안상을 웃목으로 밀며 일어서 사리반댁을 맞았다.

"청암 할머님 영연에 와 뵈입고 이리로 들왔구만. 자네 좀 보고 갈라고. 설 쇤

지가 언제라고, 보름도 다 지났는데 사람 노릇을 여태 못했어, 내가."

"별 말씀을, 제가 가서 뵈어야 하는데."

", . 상중에 어디를 댕겨. 자네 애쓰네. 영 어떻게 신색이 안 좋아 뵈이는고

. 가신 분한테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남은 사람들은 또 정신채리고 살어야

, 기왕에 당한 일 돌이킬 수가 있는가? 내 몸을 우선 돌봐야 부모한테도 효도

, 가신 어른한테도 효도야. 사람이 많이 축났어어. 이제 기운채려. 살림할라 이

렇게 큰 집에 맥 놓을 틈이 어디있다고?"

". , 형님. 뭐 수정과라도 한 모금 잡수실라요?"

"아이고 걱정도 말어. 나 금방 가. 잠깐이라도 그냥 마음 좀 쉬었다 갈라고 들왔

, 뭐 먹으러 왔는가?"

막 반몸을 일으키려는 효원을 붙들어 앉히며 사리반댁이 말린다.

"무얼 저리 읽어?"

"그저 산란해서."

"여교, 명감, 몸썰난다. 참말로 나도 저것 무슨 자랑이라고 궤짝으로 차고 넘치게

베껴 써서, 신주단지 보물처럼 지게 위에 무동 태워 갖꼬 덩실허니 뫼시고 왔지

마는, 우리 친정에 안어른께서 허시던 말씀이 저 무거운 책함들 열두 궤짝보다

더 진실허데."

"무어라 하시던가요?"

"내 이름이 무엇인 줄 알어? 택호말고. 효덕이야. 효도 효, 큰 덕. 자네 효짜는

새벽 효지? 소리는 같은데 나허고 뜻은 다르고만. 이 이름이 내 아명인데. 나는

그저 무심히 부르면 대답하고 컸지. 부모한테 효도하고, 덕성스러운 성품을 지니

도록 하라는 뜻인가 보다, 그러면서."

그런데 나이 되어 효덕이 매안에 정혼하면서, 하루는 그 어머니가 여식을 앞에

앉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 네 이름 지은 이가 누군 줄 아느냐?"

고 물었다 그것이 궁금해 본 일 없는 터라 효덕은 새삼스러워 고개를 갸웃하였

.

"내가 지었다."

"어머니가요?"

"내력이 있느리라."

"무슨"

지금 너는 장녀로서 형제 맨 위에 있지마는, 네 앞으로 오라비 셋이나 있었단다.

그런데 다 잃고 말았지. 일찍 떠나갈 자식들이어서 그랬던가, 그토록 희고 맑고

둥그런 아들들이었다. 참 알 수 없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난 그 아이

들이 어느 누가 소홀히 할 리 꿈에라도 있으랴마는 첫돌 맞기 전후해서 참 여우

한테 홀린 것같이 거짓말처럼 죽어 버리니. 하늘 아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탄하리요. 일을 당할 때마다 내가 잘못해서 부정이나 탄 것처럼 몸둘 바를 모르

겠고, 시부모님 뵈옵기 바늘방석이며 남편을 보기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하늘

이 부끄러웠다. 자식을 셋이나 잡아먹은 어미라고 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지. 그러다가 천만다행 네 번째로 회임을 하게 되어 온 집안이

그야말로 그날부터 산일가지 보약 탕제 약탕관 그칠 새 없도록 구완을 하면서,

이번에도 아들 낳을 것을 의심 안했지. 위로 내리 셋이나 아들만 낳았으니까.

리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실한 아들을 낳어서 금이야 옥이야 잘 길러 대를 이

을 대들보로 만들어야 하니까. 너희 할머님께서는 머리에 몸소 살을 이고 삼십

리 먼 길, 부처님 가피가 남다르시다는 절에까지 그 쌀을 이고 삼십 리 먼 길,

부처님 가피가 남다르시다는 절에까지 그 쌀을 단 한 번도 머리에서 내리지 않

은 채 찾아가서 백일 불공을 드렸으며, 집에서는 날마다. 정화수에 비는 정성이

대단하셨고, 너희 할아버님 일각이 여삼추로 남아 출산 손자 보기를 학수고대하

셨는데. 한밤중 축시 복판에 막상 낳은 것은 쓸모없는 계집이라. 사랑에서 자명

종 사발시계를 고누보고 신생아 태어난 시를 놓치지 않으려 하시던 네 할아버님

께서 그만 낙심하여 분노하사, 그 구하기도 힘이 들고 값도 천금이나 나가는 귀

물시계를, 군내 모두 다 해도 가진 집 몇 안되는 그 자명종 사발시계를 번쩍 들

어 마당에다 힘껏 내팽개쳐 박살이 나고 말았었다. 대르르르. 시계가 깨지면서

부딪쳐 그랬던가. 오밤중 먹장 칠흑 한복판에 놋쇠를 두드린다. 그런 소리가 날

. 경풍을 하게 깜짝 놀랄 그 소리에 온 집안이 소동이 나서 뒤집히고, 안방,

건넌방, 산방이 다 기겁하여 일시에 소란했다. 너희 할아버님 노여우심에 나는

간이 오그라붙고, 너희 할머님은 허탈하여 두 번도 더 너를 안 보려 하셨더니라,

부모님이 그러시니 너희 아버지도 자연 섬서하여 서먹서먹 너 있는 곳에 자주

오지 않으셨다. 아무도 네 이름을 지어 주는 이 없었지. 나는 서러워서 너를 안

고 젖먹이며 남모르게 많이 울었구나. 그런데 우리 집안에는 가내노비 순덕이가

있지 않으냐. 순덕이 말이다. 얼굴은 그저 평평하게 안 생겼드냐? 무어 이쁘다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마는, 보오얗게 살이 올라 넉넉해 보이고, 몸도 건강하고,

지런하고, 성품이 정직해서 집 안팎에 들어오나 나가거나 신용이 있고. 참 괜찮

. 그 순덕이가 나 시집오니까 당혼해 있더라. 저 시집갈 나이가 차 있더라고.

나 신행 오던 해 봄, 마당에 모란꽃 필 때, 순덕이를 혼인시켰는데, 비부는 집안

에 있는 종이었다. 만석이. 큼지막하게 무심히 잘생긴 종이더라. 종들이 시집가

고 장가가는 것은 저희들끼리 뒤안 마당 한쪽 귀퉁이에서 하는 일이라 상전은

참섭을 안하는 것이 상례지만, 그래도 남치마에 노랑저고리랑 바지 저고리 예물

로 지어 주고, 음식도 푸짐히 내려서 하루 종일 재미나게 먹고 놀고 즐기게 해

주지. 그렇게 짝을 지은 순덕이 만석이가 부부 되어 금슬 좋게 지내는 것은 참

보기에도 놓았더니라. 뼈대 있는 양반의 가문 사부가의 집안에서 본데있게 잘

배우고 행신하는 종들은, 어지간히 서툰 양반 뺨을 치게 아는 것도 많고 태깔도

도드라져, 순덕이 내외가 함께 집을 나서 장을 보러 가면, 멋모르는 사람 누구라

도 이들에게 함부도 대하지 않았다.

"양반의 시집살이는 민어 가시같이 억세고도 섬세해서, 효덕아, 나는 정말 우리

집안보다 좀 수월한 가문으로 시집가야지 했었다."

너희 외가도 참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집안 아니냐. 양반이란, 남 보기에 위세 있

고 품격 있어 감히 우러르기 아득해 보이지만,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그 미묘하

고 까다로운 법식, 절차 심리적인 중압감에 앉고 서는 것이나 행동거지 갈피 갈

피가, 조금만 어긋나면 비웃음을 피할 수 없고, 조금만 아차 해도 큰일이 나는

것이라. 말 안해도 헤아려 알아야만 양반이지. 그리고 무엇이든 제가 다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비단을 다듬기를 달걀과 같이 반들반들하게 하고, 베를 다리기

를 매미 날개마냥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이, 아랫것들 시켜서 될 일이냐? 그 공

들이고 매만지는 부녀자 손끝이 매사에 구석구석 미쳐야 하고, 그 다듬는 것과

꼭 같은 마음이 일상사 먼지만큼도 틀림없이 없어야 하는 것이 양반의 아녀자이

. 그래도 친정에 있을 때는 제 부모 제 자식에 저희 종 저희 상전이라 허물이

없지. 시집을 가 보아라. 그것이 다 흉되고 흠이 될 일 백사장에 모래알 깔리듯

끝도 없는 것이 양반의 댁 부녀자 행실이다. 거기다가 제약은 또 좀 많으냐.

덕의 모친은, 도내에서 이름났다 하는 반족의 낭재들 집안은 시집살이 고되다고

아예 마음에서 밀어 두었으나, 어른들의 뜻은 그네와 같지 않아서 결국 사리반

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이 사리반 시집에 와서 순덕이 만석이가 남다른 모습으

로 비친 것도, 그들의 자유스러움 때문이었으리라.

"시집이라고 와 보니, 위로 층층 어려우신 시어른들 시조부모 시증조모님까지 계

시고, 신랑은 낯설고 어색하여 한자리 마주하기도 꺼끄러운데, 말붙일 누구 하나

살가운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친정에서 데리고 온 교전비가 아는 얼굴

일 뿐. 조심해야 할 일만 켜켜로 산더미 같은 시집살이에, 신랑이라도 이무러우

면 좀 나았을까. 허나 그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정해 주신 날 아

니면 한 방에 있지 못하고, 낮으로는 혹 마당이나 어디서 마주쳐도 남 본 듯이

반가운 빛 감춘 채 낯색을 변치 말고 스쳐야 한단다. 어디 남이라고 그렇게 대

? 오히려 남을 신랑대하듯이 했다가는 크게 오해 사고 인심 타령 들을 것이

. 버릇 없다. 무시했다는 말 듣기 십상이고."

그러나 신랑에게는 그래야 흉이 안되었다.

"장부가 안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은 부인의 부끄러움이다."

하여 도무지 그런 내색이 없도록 지내야 하는 것이 옳으니 부인의 치마꼬리를

따라 다니는 신랑은 '암사내'라 해서 경멸하였다.

"내외간이 마치 무슨 뻣뻣한 장작개비 나무토막 목석이나 한가지였다. 남들이 볼

까 두려운 탓이었지."

그런데 순덕이 내외는 달랐다. 그들은 종이었으므로. 법식 절차에 매이지 않은

그들이 내외법 있을 리 없으니. 계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고 사내는 나뭇간에서

나무를 지어 나르다가, 서고 쪼그리고 앉아 이 말 저 말 무람없이 주고받으며

웃고, 장난도 치고, 무슨 일엔지 순덕이가 눈을 흘기며 주먹을 들어 때리려는 시

늉을 하자 만석이는

"아쿠쿠쿠."

뒤로 물러나며 두 팔로 제 얼굴을 가리어 막는 시늉하는 양이, 누구의 눈에라도

정답게 보이었다. 거기다가 연년생으로 투실투실한 아들을 삼형제나 나란히 낳

았던 것이다. 종의 소생으로 딸을 낳으면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없었다. 양반의

자녀로도 딸이라면 서러운데, 종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모진 마음 먹고 갓난

것을 엎어 놓을까도 싶은 것이 종의 딸이었다. 종의 딸은 깔축 없이 종이 되었

. 물론 상전으로서는 종이 딸을 낳았다는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노비는 어미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라, 만일 종의 자식이라도 아들이라면 혹 양민의 처자한테

꿈같이 장가들일 수도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 아들의 자식들은 종의 족쇄에

서 풀려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종이 딸을 낳으면 반드시 상전에게 바쳐

야 하나, 아들은 조금 달랐다. 그런 아들을 셋이나 와글와글 끌어안은 순덕이.

내리 삼형제를 어이없게 다 잃어버리고, 겨우 얻은 딸은 이름도 얻지 못한 채

세 살 먹고 네 살 먹도록

"아가."

라고만 부르던 여식에게, 효덕의 모친은 홀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발시계 부

서지던 비명 소리가 노여우신 시아버지 고함이나 다름없어, 어디 대고 말 한 마

디 붙여 볼 수도 없었던 그네가, 자박자박 걷는 어린 딸의 새앙머리를 땋아 주며

"효덕아."

라고 불렀다. 그리고 출가를 앞두어 분주하던 어느 하루, 모친은 효덕을 마주하

고 지나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네 이름짜 지을 때, 나는 속으로 비는 바가 있었단다. 사람의 자식으로 나서 효

도는 인륜의 근본이라, 앞글자는 효도 효짜로 하고, 뒤에 오는 큰 덕짜는 그게

순덕이 덕짜다. 다름아닌. 나는 네가 순덕이 팔자만 같기를 바랬니라. 신분이 낮

아서 종이라 천하다지만, 그 일개인으로 보면 그만한 상팔자가 어디 또 있겠느

. 의식이 풍족한 대갓집의 종이니 먹고 입을 것을 걱정하리, 덕망 있고 학식

있는 상전의 종이니 구박받아 매 맞을 일을 걱정하리, 보고 배울 것을 걱정하리.

명색이 상전인 나는 줄줄이 다 날리는 아들을, 알토란같이 옹골지게 기르는 순

덕이가 나는 부러웠다. 순덕이 내외는 금슬도 내내 그렇게 좋았니라. 아까 보고

또 마주치는데도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온 얼굴에 웃음이 피어 눈짓하고 지나치고."

장날이면, 아껴 놓았던 물빛 치마에 흰 저고리 날아가게 차려 입고는 머리도 곱

게 빗고, 만석이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햇살

은 다사롭고 투명한 발을 내렸다. 장날, 장에 가는 심부름은 으레 이 두 사람이

맡아 했던 것이다. 안채의 심부름은 순덕이가, 사랑채 심부름은 만석이가 하였

. 그들이 다정한 걸음으로 장에 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순덕이 팔자를 누가 당하리."

싶어졌다. 날이 저물어 어스름이 내릴 무렵이면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나란히 돌

아왔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양손에 각기 주렁주렁 보따리와 꿰미들을 든

채로. 얼굴에는 아직도 장터거리에서 본 광경들과 새로운 풍물에서 묻은 흥분이

홍조로 남아, 내외 마주 손짓 발짓 흥에 겨워서.

"그럴 때 순덕이 얼굴은 참 보기에 좋더라. 사람 사는 게 저런 것이지 싶고."

그래서 효덕의 모친은 효덕에게

"너는 순덕이 팔자만 닮아라."

하였던 것이다.

"순덕이가 이 세상에 오직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양반 하나뿐인데, 이미 순덕

이한테는, 양반이고 아니고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단다. 그까짓 허울이나 경계

같은 것은 무엇에도 쓸 일 없는, 그냥 자연. 그냥 사람, 사람다이 사는 사람으로

나한테는 보이더라."

사리반댁은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래서 내가 순덕이 덕짜를 쓰는 사람이라네."

효원은 아까 무심코, 심정이 북받치어 속으로 내뱉던 말

"내 차라리 상것으로 났더라면."

을 떠올렸다. 그리고 양반의 고명따님, 무남독녀 금지옥엽 어여쁘고 애중한 여식

의 이름에 종의 팔자 닮으라고 이름을 붙인 그 어머니 심정이 짚일 듯도 하였다.

"순덕이 덕짜도 무색허지 무어. 나는 시집으로 신행 오자 새낭군님 신랑은 동경

으로 갔으니. 공부하러 떠나는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고. 독수공방이라는 말조차

도 못 꺼냈지. 그래서 내가 낮으로는 시어른 섬기고, 밤으로는 빈 방에서 혼자

무얼 한 줄 아는가?"

""무얼 허셨든고?"

"노래를 불렀지."

"노래요?"

효원이 의아하여 사리반댁을 바라보았다.

"철재도 인제 내년이면 입춘문 쓰게 되겄지?"

사리반댁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입춘대길', '건양다복' 혹은 '국태민안'

이라고 대문에 써붙이는 입춘문, 입춘서는 글 잘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 집안에

서 제일 나이 어린 꼬마동이 사내아이가 썼다.

"우리 집에도 입춘문 쓸 만한 소년이 있다."

는 것을 남들에게 널리 과시하는 뜻도 있고, 그 순진무구한 고사리 손으로 콧

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돋아나게 정성을 다하여 쓴, 순결한 글씨를 부적으로 삼

아 한 해의 복을 비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철재가 올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

내년에 이르러는 입춘문을 쓸 수 있게 되리라는 말을 띄운 사리반댁은

"국문 천자 노래가 있거든."

하였다.

"심심할 때 외워 보소."

가갸거겨 가신임은 거년에 소식이 돈절하고 고교구규 고대한님 그리다가 구곡간

장 다녹는다 나냐너녀 아의회포 너라도 전해다오 저기러기 노뇨누뉴 노던정경

눈앞에 완연히 삼삼하네 다댜더뎌 달에갈길 저물고 더디고 더디도다 도됴두듀

동산위에 두견새 소리도 구슬프다 라랴러려 낙엽성에 역력히 과거사를 생각하니

로료루류 뇌성소리 우루룩 속이고 지나갔네 마먀머며 마음속에 먹은정이 오나가

나 임의생각 모묘무뮤 모진임은 무정코 독하기 제일일세 바뱌버벼 밝은달을 벗

삼아 앉아서 탄식하니 보뵤부뷰 보고싶어 부지중 눈물이 솟아나네 사샤서셔 상

사한마음 서름이 솟아서 못살겠네 소쇼수슈 수시마다 수심가 자탄이 절로난다

아야어여 아바님은 어머님 정화가 진정이지 오요우유 오라버님 우리집 가사를

살펴주소 자쟈저져 잠을 자니 적적한 공방의 고독한몸 조죠주쥬 주인잃은 가을

하늘 기러기 울고간다 차챠처쳐 창문밖에 처량한 그소리 처연하고 초쵸추츄 촛

불앞에 그림자 홀로이 앉었으니 카캬커켜 캄캄하온 야밤중 올이가 없네그려 코

쿄쿠큐 코를고니 쿠루룩 쿠루룩 잠이들어 타탸터텨 탄식하니 터지는 가슴을 어

이하리 토툐투튜 툭툭치며 내신세야 이럴줄 내몰랐네 파퍄퍼펴 팔자한탄 퍼붓는

눈물은 어이하랴 포표푸퓨 풍랑에 조각배 둥실 높이떴네 하햐허혀 하릴없이 처

량한 내꿈도 허사로다 호효후휴 후세에서나 다못한 연분을 맺어보세 얼씨구 절

씨구 지화자 좋다 아니 놀고서 무엇하리 곡조를 붙이지는 않고 낭창하게 구송으

로 외어 읊는 사리반댁의 국문가를 들은 효원이

"차암, 무슨 그런 노래가 다 있답니까?"

모처럼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사리반댁 이야기를 듣고, 노래 가사를 듣고, 하노

라고 어느결에 아까의 심정이 많이 눅어진 것이었다.

"그 노래, 형님이 지으셨소?"

"배운 것이야."

"총기도 좋으시오."

"인생사 굽이굽이 구절양장이지. 가갸거겨 나냐너녀 글자 배우는 노래에 붙은 가

사가 이렇게 애간장을 녹일 적에야."

"청승스럽소."

"나도 신여성이나 되어 학교 공부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양반의 가

문에 멧방석 같은 주춧돌보다, 너른 세상 바닷가에 모래알이 더 속 시원할 것

같으데. 주춧돌이면 무엇 해. 가슴을 찍어 누르는 두리기둥이 천 근 만 근 태산

같이 무거운 걸. 온 집채 덩어리를 그 기둥으로 받쳐서 내 가슴이나 뭉개지게

짓눌러르지."

사리반댁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눌러 보였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흔연하

고 음성이 둥글어서, 못 견딜 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리반'이면

매안보다 못할 것 없는 범절의 가문으로, 그 결이 명주올같이 올올이 섬세하고

기상은 참대 같아 하늘을 찌르는 집안인데, 사리반댁은 멧방석 같은 주춧돌보다

차라리 저 거칠 것 없이 푸르게 트인 바닷가의 모래알이 나으리라 말하고 있었

.

"한번 시집오면 이제 다시는 다른 세상 꿈을 못 구고, 이 울안에, 매안의 항아리

속에서만, 들앉어 살어야는가?"

"다른 세상이라니요?"

"학교도 가고 공부도 하고."

"사리반서방님 동경서 이번에 오시거든 사뢰 보시지?"

효원이 농으로 응하였다.

"순덕이 덕짜 이야기도 하면서, 나 사는 세상은 무엇이냐고 대들어 볼까? 번개보

다 잠깐 다녀가서 일년 열두 달 다시 보기 어려운 사람인데, 그나마 온 동네 인

사 다녀, 저녁마다 대접 받어, 사랑에 손님 끓어, 시어머님 동무 해드려, 언제 얼

굴도 못 봐, 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요."

효원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뇌었다. 그네는 어지간해서는 한탄을 하거나 무엇

에 자신을 비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금은 탄식이 절로 나

오려 했던 것이다.

"말이나 이렇게 서로 허고 나면 좀 낫지. 그래도."

사리반댁은 희고 둥근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는 것이 몸에 배어, 고달

픈 말을 하는데도 찌그러지는 시늉이 없다. 한 문중의 제일 연장자로서 인품과

덕망이 인근에 널리 존경받을 만하고 학덕이 높은 어른이라 문장으로 받드는 동

계어른의 시하에서, 표 내지 않고 남편 없는 시집을 살자면, 그네도 결코 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해 넘어 가겄네. 나도 가야지. 인제 보니 내일 모레가 초하루네? 영동 할머니가

올에는 따님을 모시고 올란지 며느님을 모시고 올란지."

사리반댁은 일어서며 말했다. 이월 초하룻날은 영동 할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오

는 날이다. 초하룻날 내려와서 스무날을 지상에 머물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 그네는 바람과 농작물의 풍흉을 다스리는 신이라, 한 해 농사가 잘 되게 해

주시고 항상 재수 있게 해 주시라고, 사람들은 이날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는 여

신이니, 고운 것을 좋아해 울긋불긋한 헝겊을 매달고 늘이워서 제단이 된 부엌

의 부뚜막과 장독대를 장식하고, 이른 아침 첫새벽 동이 트기 전에 정화수를 흰

사발에 떠 놓고, 주부가 그 앞에 손을 비비며 온 가족과 집안의 평안을 빌었다.

그리고 식구 수대로 백지에 불을 붙여 하늘에 소지를 올렸다. 이른 아침 맑은

기운에 투명한 불꽃으로 타오르며 스러지는 식구들의 소지에는 정결하고 영롱한

기원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콩을 볶았다.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 볶아라."

, 타닥, 토닥, . 튀는 콩을 주걱으로 저으면서 외우는 주문은 둘러선 아이들

차지였다. 이렇게 하면 집안에 노래기가 없어지고, 그 콩이 볶이는 것처럼 금년

농사에 모든 병충해가 다 볶이어 없어진다고 어른들은 말했다. 노래기와 병충해

는 콩을 볶아 없애고 막는다지만, 가슴속에 이는 불길을 볶아서는 무엇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 영동 할머니는 혼자 내려오지 않고 해마다 그 딸이나 며느리

중에 하나를 데리고 오는데, 딸을 데리고 오는 해에는 아무 일도 없으나, 며느리

를 동반하여 함께 오는 해는 심한 바람을 몰고 온다고 하였다. 며느리의 바람.

그것은 결코 순탄치 않은 것인가 보다. 먼 산에 부옇게 바람꽃 일고, 흙먼지 뒤

집히며 휘몰아쳐 그 세찬 맞바람을 못 받아 돌아서게 하는, 며느리 함께 오는

영동일이면 어찌할고, 심란한지, 하는 사리반댁 음성이 바람을 머금고 있다.

 

 

22. 안개보다 마음이

 

사람의 일이, 토방에서 대문간만 나가려도 자칫 잘못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수가 있는데, 한나절 좋이 걸어가야 하는 십 리 길은 어떠할꼬. 떨쳐입은 진솔옷

에 흙탕물도 튀어오르며, 비단 갖신 고운 발로 지렁이도 밟으리라. 내 앞을 가로

지르는 미친 개, 누런 황소도 만나겄지. 길도 또한 평탄치만은 않아서, 냇물도

건너며, 고개 넘어, 산모롱이 길게 휘돌아 지루하게 멀리 걷기도 할 것이다.

리가 그러할 때 하루 해 온종일 깜깜하기까지 걸어야 하는 백 리라면 어떠할까.

가다가 길이 끊어진 곳도 있고, 돌짝밭 가시덤불 뒤엉킨 골짜기도 있거니와 집

도 절도 없는 길에 고적하고 막막하기 뙤약볕 속 나그네 같은 고비도 있을 것이

. 거기다가 천 리 길이야. 하루도 이틀도 아닌 그 길을 가자면, 낯선 곳의 낯

선 방에 캄캄한 밤 무섭긴들 아니하리. 더러 도둑을 만날 수도 있겄지. 가진 것

다 잃고 빈 몸으로 나서는 객지의 사립문 밖. 하물며 인생이랴. 한나절 걷는 십

리 길도 아니요, 하루 해 꼽박 넘어가는 백리 길만도 아니고, 한 열흘 혹은 보름

밤낮으로만 가면 되는 천리 길도 아니다. 나서부터 지금가지 쉬임없이 걸어왔고,

이제부터도 쉬지 않고 몇 십 년을 걷고 걸어가야 마지막에 당도하는 길. 인생.

그것이 과연 리 수로 몇 리일가. 그 멀고 먼 길에 꽃 피고 새 울어 동무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랴만, 홀로리 고독하게 한세상을 등에 지고 다만 묵묵히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야 한다. 나는. 그러다 고꾸라지는 일 없으리오. 넘어져 깨지고

피 흘리며 주저앉아 팍팍한 걸음을 탄식할 제, 아아,나의 한세상이여. 고꾸라진

자리에 꼬챙이 없으면 그저 일진 사나운 것을 탓하며 손바닥이나 스라리게 씻기

고 말 일이지만, 돌팍에 걸려 앞으로 어푸러진 그 자리에 불행히도 칼끝이 거꾸

로 박혀 있어, 찔린 살이 벌어지고 붉은 피 선지로 엉기며, 멍든 가슴을 깊이 버

힌다면. 내가 무슨 장사여서 비명을 참을 수 있으리. 효원은 칼끝이 살을 찌르며

파고들어 뼈에 미치는 소리를 들었다. 참혹하다. 허나, 한 번 넘어졌다고 주저앉

아 썩으랴. 앉은 자리에 곰이 피게 꼼짝 않고 탄식만 하고 있으랴. 누가 와서 일

으켜 주기 바라며 좌우를 둘러보고, 어루만질 손길만 기다리다 앉은뱅이가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설령 앙가슴의 붉은 살이 다 벌어져 너덜너덜 넝마처럼

펄럭이고, 뼈다귀 허옇게 드러나 시린 바람에 마른다 할지라도, 박힌 칼날 꼬챙

이를 맨손으로 뽑아 내고, 나는 가야 한다. 만일 그 칼날 뽑히지 않고 죄 없는

두 손만 베인다면. 가슴에 칼 박은 이대로 일어서야지. 그런 날의 하늘이 맑을

리 없어서, 한겨울 천지가 얼어 생기가 막히는 폐색이거나, 골수에 찬 비 꽂히는

우천아래 울음마저 지워지고 가리워져, 억울한 가슴을 두드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젖은 몸 위에 바람의 회초리 후려치는데 얼음 끼치는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빙렬하는 아픔은 또 어찌할 것인가. 허나, 위로는 필요없다. 선병

. 같은 병 겪어 본 사람 그 누구의 고언도 나는 마다하리라. 하늘 아래 나같은

, 단 한 사람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다만 나 혼자서 내 하늘을 이고, 우러러

단 한 방울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라. 어금니가 썩어도 나는 결코 이 일로 입을

벌리어 탄식하지 않으리. 비록 나 혼자서 홀로이 나 자신에게 이르는 말일지라

, 이 일을 두 번 다시 되뇌어 곱씹지 않으리라. , 아무런들 이만한 일에 굽은

다리를 못 펴고, 이만한 일에 넘어져서, 갈 길 먼 가슴을 상할 것이냐. 이 앞으

로 내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오직 나를 지탱하고 의지해야 할 곳은 나의 속, 나의

가슴, 나의 머리, 나의 중심뿐일 것이어늘, 지금 다 써 버리고, 지금 다 내주어

썩여 버린다면 내 어찌 살아가리. 남의 것 맡아 할 일은 그만두고 오직 내 한

몸 유지하여 살아가려도 그 유지할 만큼은 남겨 두어야 하리니. 내 가슴이 내

양식이라.

내 마음이 나의 시량인즉. 뼛속에 끼치는 추위로 이 세상이 고적하여 그 어디에

도 몸 비비어 온기를 얻을 곳 없다 하여도. 내 심중이 든든하다면 스스로 땔나

무를 구하러 헤매지 않을 것이요, 어느 한 사람 나한테 마음을 나누어 주지 않

는다 하여도, 내 속에 내 먹을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비루하고 누추하게 남의

문전에서 동정을 얻으려고 서성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효원은 어금니를 깊이 물

었다. 그가 속으로 사려문 ''의 이름이 '강모'인지 '강실이'인지는 그네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 ''는 두 사람이 겹치어 어우러낸 어떤 형상이었

는지도 모른다. 그 형상은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안개가 덩어리져 뒤웅크러진

듯도 하고, 무슨 연기나 구름 뭉게 같기도 하였다. 내 결단코 저 속으로 얼크러

들지는 않으리라. 이만큼에 서서, 저 오리무중, 아득하고 짙은 안개 자욱한 남의

마을로 나는 들어가지 않겠다. 그것은 너희들의 것이겠지. 나는 다만 너희들의

그 안개 바깥으로 밀려나, 낯설게 떨어져서 무참히 고개 돌리고 있지만, 그렇지

, 나는 몸을 솟구치리라. 안개와 먹구름에 나도 같이 휘감기어 뒤얽히면, 가도

가도 길은 보이지 않을 터이지만, 논도랑인지 갈대밭인지 모르고 허방을 길로

삼아 움퍽 짐퍽 진흙투성이로 헤매겠지만, 나는 너희들의 울녘에서 떨어져 나오

리라. 그리고 나를 들어올리겠으니. 검은 구름과 안개 속에 있을 때는 습하고 암

담하여 젖은 몸에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지라 숨조차 막힐 터이나. 보다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면, 홀연 구름머리 테를 벗고 솟구칠 때, 그곳에는 청천의 푸른

하늘이 궁창 그대로 끝닿은 데 없이 드리워져 있지 않겠는가. 장막 한 겹에 불

과한 이 운무에 생애를 걸지 마라. 내 힘으로 찢을 수 없는 것이라면, 놓아 버리

. 그 안개의 구덩이에 나를 던져 무익하게 익몰하는 어리석음 대신에 나는 내

마음을 끌어올려, 벗어나리라. 이 안개보다 내 마음이 높아져야, 나는 벗어난다.

천하에 내가 되어 가지고 이만한 안개의 구렁텅이에, 언제까지 이 몸을 담고 있

을 것인가. 효원은 숨을 들이쉰다. 깃털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숨죽인 숨을,

지보다 조금씩 오래오래 다스리며, 몸 속에 들끓는 숨을 몰아내고, 고요한 새 숨

이 온몸 가득 차 오르도록 크고 깊게 들이마신 숨을, 그네는 참을 수 있는 데까

지 참는다. 숨이 서로 싸운다. 효원은 이 혼미한 안개를 몰아내고, 드디어 머리

꼭지와 손톱 발톱 끝에 차 오른 숨이 그네를 무중력의 공간으로 띄워 올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효원의 온몸에, 피가 팽창하며 징소리가 울린다. 괭 괭 괘

앵 괭 괴굉 괭 괭 괘개앵 강수의 혼신 명혼이 있던 날 밤의 징소리다. 허공을

휘어 감아 만수향내 뭉뭉히 피어 오르는 마당을 두드리던 그 징소리와, 어디 한

데 바깥에서 야기를 쏘이어 습하고 찬 몸으로 들이닥치던 강모의 허하고도 거친

. 이제는 비로소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한 날의 밤 거의 같은 시각에 그 형

체도 잡히지 않는 망혼의 저승 향내 자욱한 징소리를 두 여인에게 나누어 심어

주고, 홀연 저 홀로 몸을 감추어 버린 강모를 향야여, 효원은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쉰다. 이번에는, 강모를 삼키는 것 같다. 너는 내 것이라. 어쩔 수 없다.

가 너에게 매이어 있으니, 내가 너에게 매이어 있는 한 너는 내 것이라. 비록 그

형체 없을지라도. 너의 안개 속에 뒤엉키어 같이 범벅이 되거나, 너보다 더 높은

곳으로 떠오르거나, 인력이 닿는 한 이 끝과 저 끝에서라도, 할 수 없이 너는 내

것이라. 효원은 호리병 속에 한세상을 빨아들여 가두는 술사처럼, 자신의 몸 속

으로 강모를 빨아들인다. 그 숨결을 따라 강실이가 에워쓴 안개가 함께 딸려 들

어온다. 효원은 온 겨울 내내 그렇게 어금니를 물고 숨을 들이쉬고만 있었다.

숨은 그네의 심중 한 자락을 위로 끌어오리는 듯도 하였으나, 무서운 가슴의 한

쪽에 먹진 물주머니처럼 가라앉아 매달려 있었으니. 그네는 참으로 중심을 잡기

가 어려워, 겉으로 보기에는 표나지 않았으나, 빗금으로 기우뚱 날카롭게 심경을

긋고 있었다. 그 빗금을 타고 위태로운 겨울이 아슬아슬 미끄러질 때, 설도 쇠

, 정월 대보름도 다 지나간 뒤, 이월 초하룻날 영동 할머니가 어느 해보다 심

한 바람을 부옇게 온 하늘 휩쓸며 몰고왔는데, 농가에서는 이 달 초엿새날 좀생

이별을 올려다보며, 징용, 공출, 수상하고 그악한 세월 속에서나마 가련한 풍흉

을 점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초아흐렛날.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튼다."

는 무신일 무방수날인지라 귀신 없는 이날을 놓치지 않고, 무엇을 해도 탈이 없

다 해서, 집집마다 안방 건넌방의 가재 도구들을 옮기기도하고, 지붕이며 바람

, 부뚜막이나 뒷간 들을 수리하기도 하며, 아낙네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장을

담그었다.

"장 담기에 제일 좋은 날은 암만해도 정묘일이지 머."

율촌댁은 마침 큰집으로 올라온 오류골댁한테 말했다.

"그럼 내일이지요?"

"하아. 자네도 내일 담을라는가?"

"그럴라고요."

"그게 참 요상헌 일이데. 무얼 그러랴 해도 신날 장을 담으면 꼭 장맛이 시고,

물날 담으면 꼭 장이 묽어진단 말이야."

"그러니 날 놓치면 큰일지요. 오도 가도 못허고 신일 수일에 장 담게 되면 참 난

감헐 일 아니요잉? 일년 농사 안 중헌 것이 없지마는 장맛 버리면 한 해 음식

다 버리는 것이니."

"아이고, 삼백예순다섯 날 끼니끼니 하루에도 세 끼니 천 번도 넘는 밥상에 온갖

절사, 크고 작은 상 차릴 적에 장맛 아니고 무엇으로 버틸 재간이 있는가."

인가의 요긴한 일 장 담그는 정사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

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추 하소 앞산에 비가 개니 살진 향채 캐오리라 삽주 두

릅 고사리며 고비 도랏 어아리를 일분은 엮어 달고 이분은 무쳐 먹세 낙화를 쓸

고 앉아 병술로 즐길 적에 산처의 준비함이 가효가 이뿐이라 아낙네 평생의 일

로 밥상 차리는 것보다 크고 중한 일이 없어, 일년 열두 달 삼 시 세 끼 언제라

도 김치를 준비해야 하고, 모든 음식에 간을 맞추는 장류에, 각종 젓갈이며 장아

찌 같은 밑반찬이 고루고루 상비되어 있어야만 하였으니. 제 철에 메주 쑤어 장

을 담그고, 된장 고추장을 알맞게 마련하는 일이야 주부의 가장 근본되는 일이

었다. 거기다가 봄철이면 고사리 고비 취나물을, 가을에는 호박 가지 무 버섯 들

을 말리었고, 끓는 물에 슬쩍 데쳤다가 말리는 고춧잎, 날것대로 썰어 말리는 고

지나물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서해안 생굴을 소금 탄 물에

깨끗이 서너 번 씻어 헹군 뒤 소금 뿌리고 끓는 물에 탐 고춧가루 넣어서 버무

려 담근 어리굴젓. 논에 사는 게를 잡아 산 것 그대로 설설 기는 것을 오지동이

에 담고 물을 부어서 흙물을 다 토해 내게 하고는, 진간장을 부은 뒤 며칠은 그

냥 두었다가, 그 장을 따라 달여서 붏은 고추 말린 것이랑 마늘을 같이 넣어 다

시 동이에 붓고, 며칠마다 한 번씩 서너 차례 간장을 따라내 끓여 붓는다면,

랗게 익은 게젓의 등딱지 속이라니. 새까만 간장의 달큰하고 쫀독한 맛에 따끈

한 흰 밥을 비비고, 게젓 등딱지에 밥 한 숟가락 얹어 먹으면 진수성찬 수라상

이 부럽지 않은 게젓 아닌가. 또한 조기젓 멸치젓 창란젓 새우젓 아가미젓 명란

젓 화석어젓, 언감생심 쉽게는 넘볼 수 없는 민물새우 토하젓.

"젓 담는 솜씨야 형님 따라갈 사람 있을라고요?"

오류골댁은 장독대에 선 율촌댁을 도우면서 말했다.

"솜씨가 무어 따로 있어? 정성 들어가면 누구나 다 같지."

일찍이 시어머니 청암부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율촌댁의 젓갈 솜씨며 다른

음식 솜씨들을, 율촌댁 자신도 은근히 자부하고 있는 태로 대꾸하는 손위 동서

에게 ,오류골댁은 혼자말처럼

"강실도 시집가기 전에 여기 와서 낱낱이 다 배우고 가얄 것인데. 그래야 어느

시집으로 가든지 문견 없다 소리 안 들을텐데요. 저희들 살림이랴 뭐 어디 해먹

기를 제대로 허는가, 갖추기를 제대로 허고 사는가. 흉잽힐 일 많지요."

", 자네같이 알뜰허고 음전헌 사람이 어디 또 있어?"

"알뜰 다르고 문견 다르지요."

그것은 그랬다. 없는 중에 쪼개어 모양 내고 가꾸는 것이, 해 보고 먹어 보고 입

어 보아 몸에 익은 태깔과 격식에 비길 수 있으리야.

"알뜰하기로는 남평 아짐 따를 사람 조선에는 없을 것 같지마는 황서방댁이 당

한 경우를 생각하면 남 일 같지만은 않네요."

오류골댁이 말하는 황서방댁은, 남평 이징의의 여식인데 바로 가까이 수월 황문

으로 출가하였다. 인근에 누구라도 아는 문벌 있는 문중이었다. 오류골댁은 강실

이한테도 그네의 이야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아 그 무네미 아짐이 범연헌 사람이냐? 집안 살림이 궁벽해서 끼니가 차거운

중에도 남평 할아버지 성품이며 남평 할머니 음식 범절이 어디 비길 데 있다고?

너도 알잖으냐. , 실 한 땀을 금쪽같이 애끼는, 서슬이 시퍼렇게 선 양반이 바

로 남평 할머니시다. 그 내력을 받은 이가 무네미 아짐이지."

그런데 시집 황문은 친정과는 다르게 이런 저런 것을 갖추고 사는 집이었다.

식도 넉넉하고 의복도 치레에 귀빠지지 않았다.

"워낙 눈치 있고 솜씨 빠른 무네미 아짐이라, 없는 집에서 있는 집으로 간 티 안

내고 무난히 넘어가다가, 근친을 오게 되얐네. 때마침 친정 조부 제사를 당했드

란다. 겸사해서 잘 되었다고 황서방이 서두르는데, 인제 며칠 후에면 매안으로

올 판인데 말이다. 하루는 어디를 나갔다 오드니, 허어, , 우스운 꼴을 다 봤다

고 그러드래."

"무엇이 그리 우스우시요?"

황서방댁이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제사 구경을 했소."

""제사 구경이요?"

""

"제사가 우습다니."

황서방댁이 의아하여 개키던 옷을 손에 든 채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황서방은

아내의 앞에 앉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다 보아도 남의 제사 흉은 안 본다는데."

다가앉는 신랑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혼자말로 어색함을 가리며 개킨 옷을

횃대에 거는 황서방댁의 귀에

"도구통이 제상인제 우습지 않겄소?"

하는 남편의 말이 꽂혔다.

"도구통?"

"제상이 높아야 하는 것은 알았던 모양이오마는, 아직 제상 마련을 못했던가,

당에서 도구통을 불끈 들어 방으로 들여오길래, 이 웬일인가 했더니, 그 위에다

소반을 덮어 올립다다. 도구통 위에 갓 쓴 것마냥 귀떨어진 소반이 씌워지고,

소반 위에 제수를 진설하더란 말이요. , 이런 수도 있구나, 싶어 궁색한 편법

이 가긍도 했지만, 나막신을 깎어 팔어서라도 조상 제사 제상은 하나 마련해야

, 도구총에 진지 잡숫는 귀신들이 처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그 형상

이 우스워서 내 헛웃음이 다 나왔소."

남편의 말에 황서방댁은

"그래요?"

소리도 못하였다. 그것이 바로 갈 데 없는 자기 집 친정의 제사 풍경인 탓이었

. 이남 평생 청수를 탕으로 대신하고 홍동 백서 어동 육서 조율이시를 한 번

도 고루 갖추지 못할 만큼 가난하게 차린 제수였으나, 정성만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제수 미약한 것을 늘 죄송히 여기고 한스러워 하였다. 그러

, 그것보다 항상 더 한스러웠던 것은 제상 하나 없는 것이라고 슬쓸히 뇌던

어머니 남평댁의 누른 얼굴이 덮치듯 떠올라, 황서방댁은 모골이 송연했다.

"신명은 형체가 없으시니 방바닥에 앉으시면 어떠하고 공중에 떠 있으면 어떠신

. 귀신의 밥상이 도구통이면 어떠하고 도구통 씌운 소반이면 또 어떠해? 정성

을 흠향하고 몸소 둘러보러 오신 선령의 밝은 마음이 제상 모양을 가리실까.

굿대 끝에다 그림을 그려 매달아도 인신이 통할 만큼만 참으로 진정을 다헌다

, 굳이 제수 안 올려도 아실 것인즉."

이징의는 쪽빛 두건을 쓴 머리를 검푸르게 이고 앉아 잘라 말했다. 하이고, .

남평댁은 거기에 두 말도 더 보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황서방댁은 큰일이 났

던 것이다. 혼수로 해 가지고 간 사유 금붙이나 패물, 또는 반닫이에 몰래 간직

해 둔 비단 명주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어떻게 금전을 마련하여, 근친

가기 전에 친정에다 제상을 마련해 놓을 것인가. 안 들었으면 모르려니와, 지금

바로 절구통 재상 흉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그대로 친정의 흉을 잡히게 생긴

황서방댁은 그만 중치가 막혔다. 한 마디로

"몰풍"

이라 고개를 돌려 접어 버릴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황서방댁은 이튼날로

황망히 남모르게 매안에 왔던 것이다. 그것도 친정이 아닌 원뜸의 청암부인에게로.

"잠을 안 자고 베를 짜서 반드시 머지 않아 갚을 터이오니, 부디 제상 하나 살

만한 돈을 내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일평생 서로 존중하고 살아야 할 내외

지간에 면목 깎이고는 바라보기 어려운 일인지라, 염치를 무릅쓰고 청을 드립니다"

새댁 황서방댁의 수그린 이마를 물그러미 내려다보던 청암부인은

"그리하라. 안서방 시켜서 장에 갔다 오라 할 것이니 너는 어서 돌아가거라.

일 모레 내외 동행해 올 사람이 이렇게 미리 다녀가는 것이 남 보기에 수상쩍다."

하고 손짓으로, 얼른 일어서라, 시늉하였다. 엉겁결에 뜻밖의 제상이 지게에 실

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은 남평댁이었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덩실하니 다리 솟은 제상에 제수를 받으신 선령은 흔흔하실 것이로되, 이징의는

"끌 끌 끌."

누구에게인지 모를 혀를 찼다.

"껍데기에들 매이어서."

라고도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남평댁은 사위 앞에서 너무나 떳떳

하였고, 황서방댁은 그날부터 상값을 갚기 위하여 베틀에 앉아 온 밤을 새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큰집에 와서 눈썹 너머로만 배우고 익혀도, 어느 댁 큰살림이 눈설 리 없겄그마

. 일 배울라허니, 그만 백모님이 이렇게 하세 허셔서."

"내 앞에 닥치면 다 잘해. 강실이 걱정은 그만두고, 부모 할 일로 어디 혼처 자

리나 야물게 골라 보아. 그 애는 아직도 별 말이 없는가? 어디서?"

"애 터지게 그마안 하고 있네요. 이게 무슨 일이까요?"

"알어는 보아?"

"울안에 마당맴만 도는데 제가 알어본들 거기서 기기지요. 서방님들이 좀 나서

주시면 오죽이나 좋을까. 지금은 또 그럴 정황도 아니고. 벙어리 냉가슴이라더

, 저를 두고 허는 말인가 싶그만요."

"상은 상이고, 일은 또 일이니, 나도 사랑 사롸 보께. 너무 애닳지 말어. 그러다

가 다 된 밥에 코 빠질라. 아무한테나 내줄 수는 없젆은가. 인제 곧 임자 나설

것인데. 일직 간다고만 꼭좋은 것인가 뭐? 가야 한다니 왔지, 시집와 보니 좋

?"

"죄 많어 여자지요."

"죄도 많고 일도 많고."

"탈도 많고 시름도 많고."

두 동서는 마주 받으며 잇던 말 끝에 서로 보고 웃었다. 내일은 장을 담그는 날

이라, 매일같이 맑은 물로 닦아내는 장독을 오늘따가 어느 때보다 정성들여 돌

보고 매만지는 유촌댁 손길에 햇빛이 묻어났다. 오류골댁은 옆에서 그 일손을

거든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대 뒤안 장꽝 장독대에 즐비한 장독 뚜껑을 반드시

열어, 신선한 공기를 쏘이게 하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의 깨끗한 햇볕을 쪼이

게 하는 장독들. 쌀 세가마가 들어간다는 우람한 독아지는 대를 물린 장독이요,

그 옆에 해를 묵여 걸쭉해진 진간장과, 진하지 않은 간장 청장 항아리가 놓이고,

김칫독들이 어깨를 반듯하게 맞댄 맨 뒷줄은, 한낱 흙을 구워 만든 독이라기보

다 위엄 있는 가문의 엄위를 자랑하며 버티고 앉은 마나님을 보는 듯하였다.

리고 그 앞에 중간 크기인 중들이 독들은 된장을 다복다복 담은 것이 나란히 몇

개씩, 또 두태를 종류별로 담은 항아리에, 다시 한 줄 앞으로 물러앉은 좀더 작

은 단지들은 고추장이며 담북장 밀가루 담은 것이다. 맨 앞줄 올망졸망 앙징스

럽고 조그만 단지 단지에는 가지가지 장아찌에 조청과 자반 깨 젓갈 들이 들어

있었다.

"그 집안 장독대를 보면 가격을 알 수 있다."

는 것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작게는 여나믄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

의 크고 작은 장독들을 어마어마하게 줄 맞추어 키 맞추어 세워 놓고 앉혀 놓

, 그 어느 것이나 모두 한결같이 기름이 자르르 흐르도록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어, 마치 햇빛 아래 잘 빗은 처자의 검은 머리 흑윤 같아야 하는 장독대. 그러

니까 장독 살림이 옳게 큰살림이었다.

"장은 모든 음식맛의 으뜸이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아니하면 좋은 채소와 고기

가 있어도 좋은 음식으로 만들 수 없다. 설혹 외떨어진 촌야에 사는 사람이 고

기를 쉽게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맛 좋은 간장이 있다면 반찬에 아

무 걱정이 없다. 우선 장 담그기에 성심을 기울이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살림의 도리다."

라고 증보산림경제의 장제품조 첫머리에도 씌어 있지만, 문자로 적히지 않았다

고 그만한 것을 모를까.

"그해 장맛이 좋아야 집안에 불길한 일이 없다."

고 널리 믿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장맛이 변하여 시거나 묽어지는

것은 아주 불길한 징조로 쳤으니, 행여라도 어찌 될세라, 아낙네들은 날마다 새

벽이면 문안 드리듯 장독대로 맨 먼저 나왔다. 그리고 정화수를 길어 올려 흰

사발에 고이 담아 장독 위에 바치곤 했던 것이다.

"장맛 없으면 음식맛 없고, 음식맛 없으면 밥맛 없지. 밥맛 없으면 건강 없고,

강 없으면 평안도 없다."

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으므로. 장 담그는 일은 아랫사람들한테 맡길 수

없다. 율촌댁이 오류골댁과 말을 주고받으며 장독 뚜껑들을 열어 빈 독은 거풍

도 시키고 아닌 독은 햇볕도 쪼여 주며 눈부시게 흰 행주고 독아지 몸을 닦고

있노라니, 효원이 창백한 얼굴로 나왔다.

"작은어머님 오셨그만요."

""

행주 든 손을 독전에 댄 채로 오류골댁이 돌아본다.

"자네 어찌 안색이 그래?"

"아닙니다."

"체했는가? 무얼 잘못 먹었어?"

"그냥 좀.."

얼굴에 푸른 빛이 역력한 효원의 낯색에 율촌댁도

"속이 안 좋다더니 아직도 그만 허야? 무에 꽉 막힌 것 아닌가? 어째 그래 뵌

."

라며 눈섭을 모은다.

"들어가 누워 있지 그럼. 정작 내일이 바쁜 날이지 오늘은 설거진걸. 조끔 있다

가 강실이도 올라오라고 그랬어. 일 좀 배우고 익히라고. 시집가서 흉이나 안 잽

힐라면 내가 잘 아는 수밖에 없거든. 건너다 본 눈썰미허고 내가 해 본 손끝허

고 어디 같은가. 한 번 이번에는 큰어머님 뫼시고 자네랑 같이, 공부로 장 좀 담

겨 보라고 그랬네. 이따 그 애 오거든 부를 테니 들어가 있어. 저런. 영 안색이

안 좋아."

아까보다 더 푸르게 질리는 효원의 낯빛에 율촌댁조차 며느리를 더는 못 서 있

게 하며, 안으로 들어가라 하였다. 그런데도 효원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뿐,

마치 그다리가 떨리면서 스러져 없어진 사람처럼 멍멍한 채로 발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너 그러고 서 있어야 무슨 일 허도 못허겄다. 어서 들어가래도. 고집 쉭이고.

따가 일헐 때 나와. 아이?"

율촌댁이 아예 나무라는 투로 말하자 겨우 정신이 난 듯 몸을 돌리는 효원은,

이대로 드러누워 앓고 말까. 내 너를 결코 보고 싶지 않다. 깊이 패이는 이맛살

에 가슴을 찔린 것같이 어금니를 문다. 그날 강실이는 큰집에 올라오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 하였다. 그리고는 날이 밝아 이름 새벽 싸아한 공기 속에 장을 담

그려 다시 한 번 장독들을 손질할 때, 효원은 율촌댁보다 먼저 장독대에 나와

있었다. 어느새 낯빛도 많이 가라앉아, 감 밤 사이 나았는가 싶기도 하였다.

긋하게 씻어 말린 장독 안데 메주를 찬찬히 넣고, 어제 준비해 둔 소금물을 바

가지로 떠서 다른 독에 따르는 그네의 손도 침착하다. 장 담글 소금물은 하루

전에 미리 타 놓아 찌꺼기를 가라앉혀 말갛게 만들어야 한다. 메주와 소금물의

절묘한 비례가 바로 장맛의 비밀이기 때문에 그 일은 율촌댁이 하였다. 효원이

말갛게 따라 놓은 소금물의 간을 보고, 독안의 메주를 가늠하고, 바가지를 기울여

감로수처럼 조금씩 소금물을 붓는 율촌댁의 뒷머리 낭자와 어개, 그리고 소맷자

락 도련에 칼끝 같은 정성의 서슬이 어린다. 효원도 옆에서 같이 숨을 모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온 머리끝이 대문간과 중문간으로 곤두서게 뻗치어 강실이

의 발자국 소리를 잡는 더듬이가 되어 있었다. 소금물을 다 붓고 그 위에 빨갛

게 이글이글 달군 참숯을 치그르르 띄울 때, 그네는 제 가슴을 그득 채운 쓰라

린 소금물 위에 그처럼 이름 하나가 시뻘건 숯불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치그

르르. 소금물에 데이는 참숯 불꽃인가. 치그르르. 참숯 불덩이에 데이는 소금물

인가. 소금물에 빠진 참숯은 온몸으로 함빡 그 짜디 짠 소금물을 다 빨아들이고

꺼멓게 죽는데, 소금물은 제 가슴 데인 자리에 시꺼먼 숯덩이를 멍같이 둥둥 띄

우고 있었다.

"장에 숯을 넣는 것은 궂은 냄새를 빨아들이라는 뜻도 있고, 살림이 불같이 일어

나라는 뜻도 있느니라."

아름다운 말이로다. 율촌댁은 붉은 고추 바짝 말린 것을 불에 구워서 또 소금물

에 넣는다. 하늘이 비치게 맑은 소금물 위에 구름이 어리고, 요요 선연한 색으로

투명하게 달구어진 붉은 고추가 검은 숯덩이 옆에 뜬다. 율촌댁은 또 대추도 그

렇게 구워서 소금물 위에 던져 띄운다. 치그르르. 이제는 비명조차도 없이 달구

어진 몸을 소금물에 던지고, 신음 소리도 못 낸 채 그 뜨거운 고추와 대추를 가

슴팍에 받는 소금물은 서로 겉돌며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서로 둘다 깊이 상

한 채. 효원은 머리 속이 아득해지는 어지러움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커다란

항아리 속의 그 화상이 그네는 무서웠다. 그러나 화상으로 데인 소금물의 수면

위에 비추이는 음 이월 봄 하늘은 얼마나 아련하고도 머나 먼가. 그네는 소금물

의 수면을 멀리 풀어 저만큼 하늘로 아득히 흘리어 떠내려 보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동그란 주둥이의 테두리에 테머리를 매인 채 혹독히 데이고만

있는, 이 짜디 짠 가슴을 아아. , 저 멀리 멀리로 풀어서 흘려, 다만 흘러가게

할 수만 있다면. 나를 풀어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야. 율촌댁은 창호지

눈부시게 하얀 백지로 오린 커다란 버선본을 펼치어, 곱게 풀을 바른 뒤, 이 세

상에서 가장 크고 성스러운 항아리에 공물을 바치듯, 항아리의 가슴 한복판에

거꾸로 붙인다. 가슴을 거구로 밟고 가는 버선발이 허공으로 둥실 떠어르는 것

같다. 버선본을 스치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가.

"아이고, 강실이, 인제사 오냐? 장 다 담었는데."

율촌댁이 중마당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류골댁과 나란히 강실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단단히 아퍼 가지고는요. 무단히 몸 아픈 것이 장 담는데 어른거리면 어쩔라는

가 싶어서. 아예 일 끝날 때쯤 오느만요."

율촌댁이 대신 대답하는데, 효원은 소금물 독아지 주둥이를 틀어쥔 채로 아까보

다 더 멀리로 고개를 꺾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아,내 이 고개를 어찌하랴.

 

 

23. 시앗

 

세월이 묵은 담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있는 장독대는 마당보다 두어 단

이나 높다. 자잘하고 반드러운 돌자갈을 쌓아 도도록이 채운 장독대에 즐비한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을 받아 서글프고 정갈하게

타오른다. 여름날이었다면 이런 시간, 장독대를 에워싸고 피어나는 맨드라미의

선홍색 꽃벼슬이며, 흰 무리, 다홍 무리 봉숭아꽃들, 그리고 옥잠화의 흰 비녀가

주황에 물들 것이지만, 분꽃의 꽃분홍과 흰 꽃들도 저만큼 저녁을 알리며 소담

하고 은성하게 피어날 것이지만. 지금은 꽃씨가 숨은 껍질이 땅 속에 묻힌 채

터지지 못하고 있으니, 노을은 저 홀로 주황의 몸을 풀어 어스름에 섞이면서 장

독대를 어루만져 내려앉는다. 그 장독대에 선 네 여인의 흰 옷과 검은 머릿결

갈피로도 노을은 내려앉는다. 그림자도 없이. 율촌댁이 행주로 몇 번이나 닦아낸

독의 넉넉하고 우람한 몸체에서는 사양에 차돌같이 매그럽고 견고한 광택이 위

엄있게 돋아났다. 그리고 그 불룩한 가슴 한복판에 거구로 붙은 버선본의 커다

란 발이 저녁 하늘을 밟고 있는 모양은, 확실히 이 장독이 그 어떤 거대한 힘으

로 이 네 여인을 거으리고도 남는, 더 큰 여인인 것을 느끼게 하였다. 저 버선본

만한 발을 가진. 하늘을 밟는 여인. 그는 누구 일까. 대대로 이 집안을 지켜오며

이 독에 장을 담그고, 그 장으로 식구들의 밥을 먹이며, 살로 가고 뼈로 가게 음

식을 만들어 먹이던 가모들의 혼과 그 손들. 혹은 그 손에 묻은 세상들. 아니면

. 해마다 정월이면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낼 때 반드시 장독대에

올릴 시루는 따로 쪄서 떡을 시루째 올렸으며, 동짓달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장독 주변에 뿌리고 또 한 그릇은 정하게 바쳐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장독

. 그리고 첫새벽 이른 시각의 푸른 미명에, 가장 크고 높은 이 장독 두껑 위에

다 떠 올려 바치는 정화수 한 대접. 그 대접에 담긴 꿈을 받으시는 장독대의 신

, 버선발을 하늘로 두르고 있다. 눈물 많은 세상에 머리를 뿌리 같이 박고,

은 자리 진창이며 설움의 구덩이에 잠기어 불은 아낙의 발과 발을 다 모아서 저

커다란 버선본에 한 자루 가득 담아, 가없는 하늘을 밟게 하는 장독대의 여신.

그는 누구일까. 이 장독대 뒤편에는 살이 담긴 조그만 단지 '철륭'을 모신다.

신 단지인 것이다. 해마다 한가위 전날, 단지 속의 쌀을 햅쌀로 바구어 넣는데,

여기서 꺼낸 묵은쌀은 밥이나 떡을 해먹는 것이 아니라 장독대 언저리 깨끗한

곳을 파고 정하게 묻었다.

"아깝게 왜 파묻어? 쌀을."

효원이 아직 꼬막 같은 새앙머리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 연일정씨 부인이 하는

일을 보고 옆에서 물었다.

"큰일날 소리. 이것은 그냥 쌀이 아니라 신체다."

"신체?"

"신의 몸이라, 그런 말이지. 신의 몸을 사람이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감히 그런

말 허는 것 아니다."

"쌀인데."

"어허어."

젊은 정씨부인은 목청을 누르며 엄하게 눈썹을 찡기어 보였다. 어린 날의 눈에

비쳤던 그 모습이 지금인 듯 선한데. 이제는 그네 자신이 한 집안의 가모가 되

어 정씨부인 대신 시어머니 율촌댁을 모시고 장독대에 선 효원은, 지난 정월 대

보름날 밤, 휘영청 밝은 달 아래 호젓하게 늘어선 장독들 뒤편의 철륭 모신 자

리에 참기름 불을 홀로 밝혀 놓았었다. 온몸에 달빛을 검푸르게 받는 독아지와

항아리 단지들이 이상하게 고적한 귀기로 윤이 흐르면서, 아득한 풍물 소리의

물맴이에 감기며 이만큼에 오직 말없이 앉고 서 있는 곁에서, 효원은 불 밝힌

철륭의 주홍 그늘을 내려다보며, 장독전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그

네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는 것만 같아서, 그네는 거꾸로 붙인 버선

본을 쓸어 안 듯 제 가슴을 큰 독의 가슴에 시리게 맞대며, 차가운 독전에 더운

이마를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의 이마에는 얼음테가 둘리어지는 것 같았었

. 눈 내린 밤 사이 부시게 흰 관을 소복히 쓰고 있던 장독들의 군단이, 정월을

벗고 음 이월 초순을 지나면서 다스운 온기로 옹기종기 마음 푸는데, 효원은 이

마의 얼음테가 아직도 뇌수에까지 끼치는 한기에 후르륵, 몸을 떤다.

"장독을 새로 살라면 꼭 한여름 칠팔월에 만든 걸로 사야 헌다. 그래야 야물어.

그런 독아지는 쇳소리가 나지. 따글따글허고. 잘 익어서."

오류골댁은 강실이한테 그렇게 일렀었다.

"좋기는 대물린 장독이 제일 좋니라. 겉보기로는 그저 다 같은 옹기 독아지 같지

마는 이 독아지 숨쉬는 구멍마다 그 집안 장맛 내는 내력이 스며 있어서, 그건

씻어도 씻기지 않고, 억지로 뭘 갖다 발러도 우러나지는 않는 것이다. 왜 사람

목소리도 안 그러디? 아들이나 딸이나 간에 그 어머니 아버지 음성들을 닮잖어?

목통에서 울리는 소리가 말이다. 장독에서 우러나는 그 맛이 꼭 그것 같어서 집

집이 장맛이 달러. 독아지 맛이 있는 법이란다. 작년 장맛이 독아지 숨구멍마다

숨어 들었다가 내년 맛에 우러나고. 그러니 빈 독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되고,

더러운 허접것들 우겨 넣어 놔도 못쓰는 거지."

그래도 대물린 장독은 맏며느리가 이어받게 마련이라, 분가하는 지손은, 여러 개

의 독 중에 하나 얻기도 하지만 새로 사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쓰던 것이

애통하게 깨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독아지 새로 살 때는 잘 봐야 헌다.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 놓고는 짚불을 붙여

서 주둥이 살짜기 들어올려 그 안에다가 들이밀어 놔. 그럼 엎어진 항아리 속에

연기가 차지 않겄냐? 모래 구녁이나 잘못된 데 있으면 연기가 새니라, 그리고,

그걸 꼭 세심허게 살펴야 해. 그냥 육안으로는 모르거든. 껍데기 멀쩡해도 그런

항아리는 못 써. 헛것이다. 장이 다 새 버려. 머리카락 같은 금만 가도 그건 헛

것이야."

오류골댁은 말했었다.

"큰집에 장 담는데 올라가 보자. 너도 그런 거 다 봐 둬야 헌다."

해 넘어가는 장독대의 즐비하고 아금박스러운 큰 독 중들이 작은독 단지 들이

가득한 한쪽모서리 귀퉁이에 위태롭게 올라선 강실이는 자신이 거꾸로 엎어진

항아리 같이만 여겨진다. 텅 빈 몸을 거꾸로 엎어 식은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오도 가도 못하면서 지푸라기 짚불을 지핀 가슴. 그나마 숨이 막힌 불꽃은 이미

꺼진 어둠 속에 오직 매운 연기 자욱히 들어찬 항아리. 이 항아리 보이지 않는

곳에 모래 구멍, 금 간 자리, 깨진 자국을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하리니. 기침조

차 할 수 없는 항아리는 연기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내 이러고 서 있지마는,

내 온몸에서 상한 연기 멍든 빛으로 자욱하여 냇내와 함께 흩어지겠지. 대실형

, 저러고 내색 않고 서 계시지마는, 어찌 나를 모르시겠느냐. 상한 독인 것을

어찌 모르시겠느냐. 피어 오르면서 꺼져 버린 지푸라기 불꽃은 누구의 이름일

것이며, 그 이름이 꺼지면서 이토록 독하게 채우는 연기는 또 무엇의 흔적일 것

인가. 이 연기는 천지에 내 몸의 상흔을 드러내어 퍼뜨리고 있겠지. 몸만이랴.

그것이. 강실이는 제 머리 위에서, 어깨 위에서, 가슴팍에서, 새어 나와 흩어지는

연기의 푸른 머리카락을 망연히 바라본다. 이미 들켜 버렸구나. 그네는 아까 이

장독대 가까이로 다가설 때 그것을 깨달았었다. 독전을 붙움켜쥔 효원의 결연한

옆모습에 날카로운 소름이 돋는 것을 강실이는 보았던 것이다. 효원의 차가운

얼굴에 칼끝같이 다문 입귀를 스치는 경련과 눈썹끝조차 움직이지 않던 무서운

경직이, 강실이한테는 천만 마디 말보다 더 큰 충격으로 무너져 덮쳐왔었다.

라리 후려치는 것이 덜 두려웠으리라. 효원의 전신에서 뻗치는 거부와 단죄의

기는 강실이를 지질리게 하고, 차마 감히 그 앞으로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하였

. 효원은 강실이를 완강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장독대는 범접할 수 없는 효원

의 강력한 자장이었다. 주춤거리며 가까스로 오류골댁을 따라 장독대 가장자리

까지 올라선 강실이는 더는 걸음을 떼지 못한 채, 절벽 끝의 위태로운 사람처럼

허공에 뜬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효원은 강실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새끼로 꼰 금줄에 붉은 고추를 끼워 넣는 율촌댁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촌댁은 새로 담근 장독의 전마다 고추 달린 금줄을 정성스럽게 두른다. 고추와

대추는 다산 풍요의 상징이니, 그네의 소망은 오직 번성에 있을 것이다. 내가 살

고 싶은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명으로 갓 태어나 강보에 싸여 어머니의 젖

만을 먹고 자라다가 드디어 강실이가 첫돌을 맞이하였을 때. 아기의 몫으로 마

련한 오목주발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한 쌍의 숟가락과 젓가락. 그것들은 장

난감처럼 조그맣고 앙징스러웠다.

"아까워서."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으나 버리지 않아 아직도 찬장의 한쪽에 곱게 얹히어 있

는 그 첫돌 식기들을, 강실도 가끔식 들여다보며 웃곤 했었다. 어른의 수저로 눌

러 뜨면 두 숟가락이 다 못될 것 같은 밥이지만, 돌날 아침에 하얗게 씻은 흰

쌀로 정성껏 밥을 지어 이 그릇에 소복히 담고, 미역국을 끓여서는 국대접에 뜨

,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제 수저를 앞에 놓아 아기의 아침상

을 차려 주면, 이제 이 아기도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게 사람 대접 받는 첫상이지. 그 전에야 기어댕기는 애기지만. "

첫돌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수저들은 대개 대여섯 살 때까지 썼다. 그러다가

예닐곱 살, 혹은 여덟 아홉 살이 되면 그보다 큰 그릇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만

큼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조석으로 대하던 제정다운 밥그릇이 하루아침에 커다

란 것으로 바뀌었을 때, 그 신기하고도 공연히 부끄럽던 기억이 강실이는 지금

도 선하였다.

"진짜 밥그릇은 바로 이것이지."

오류골댁은 반닫이 속에서 가끔식 놋그릇 반상기 일습을 꺼내어 늘어 놓아 보이

며 말했다. 그것은 강실이의 혼수였다. 찌개 구이 찜 생채 숙채 장아찌와 전 김

치 회 마른 반찬에 조림이며 간장 초간장 초고추장을 각각 놓을 수 있는 칠첩

반상기에는, 물론 신랑의 주발과 신부의 바리, 그리고 두 쌍의 은수저가 들어 있

었다. 첫돌이 되어 첫밥상을 받았던 것처럼, 신부는 성년이 되어 신랑을 맞이하

는 첫상을 이 그릇으로 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 반상기를 구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려니와 만일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준비하기 어려울 때라도, 시집가는

신부는 다른 것은 다몰라도 신랑 신부의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 만큼은 생략할

수 없었다. 이것만은 반드시 마련해야 하였다.

"네가 혼인해서 이제 시댁으로 갈 때 이 신랑 주발에다가는 흰 찹쌀을 담고,

부 바리에다가는 붉은 팥을 하나 가득 담는 거란다. 그래 가지고 각각 이렇게

대접에다 받쳐서 홍보에 싸지. 수저는 네가 곱게 수놓은 그 모란꽃 화사하게 흐

드러진 수저집에다가 한 벌식 넣고. 그렇게 가지고 가면, 느그 시댁에서는 신부

를 새로 맞이해서 구고례를 치르고는, 큰상을 채려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날 저녁에는 신부가 식기에 담어 온 흰 찹쌀 붉은 팥으로 찰밥을 지어 밥상에

놔 주니라."

그것은 신랑 신부가 서로 찰밥처럼 찰지고 다정하게 살라는 축수와 붉은색이 모

든 액을 물리쳐 주기 바라는 벽사 제액의 기원이 깃든 밥이었다. 성년의 첫 밥.

내 그 밥그릇을 채울 일이 없으리라. 이제는 내가 누구에게로 혼인하여 시집을

가며 누구를 위하여 흰 찹살에 붉은 팥을 담아가리. 나는 아마 지어미 될 일 없

으리라. 장독대에 선 강실이는 효원과 율촌댁, 그리고 어머니 오류골댁을 먼 세

상의 그림자처럼 바라본다. 여자로 태어나서 한 남자를 지아비로 맞이하여, 밥을

짓고 장을 담그는 여인들. 이른 새벽,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미명에 푸르스름

한 공기의 결을 걷으며, 돋아나는, 서리 같은 이슬이 함초롬히 맺힌 장독들의 정

결함. 그리고 그 뚜껑 위에 바치는 정화수 한 그릇. 그런 새벽을 나는 누리는 일

없으리라. 저와 같이 장중 우람하면서 아기자기한 장독들의 세월과 무리를 나는

거둘 일 없으리라. 강실이는 가슴 밑바닥이 허전하고 서늘하게 빠지는 것을 느

낀다. 앙가슴에서 등판까지 맞바로 꿰뚫어 대못을 친다 해도 다섯 치가 채 못될

가슴이 과연 얼마나 깊은 것이기에, 이토록 무섭고 까마득한 허방을 품고 있단

말인가. 아아,

"강실아."

오류골댁이 깜짝 놀란 소리로 다급하게 딸을 부은다. 강실이는 그 허방으로 떨

어져 내리는 검불처럼 장독대 아래로 휘청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낯빛이 파랗게 질리어. 펄럭. 내 어찌 이때까지 죽는다는 생각을 못하였던고.

죽으리란 생각을 못하였던고. 염치없고 무안한 목숨을 이토록 굳이 지탱해 온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네는 바스라진 가랑잎 한 장같이 힘없이 떨어진 찬 땅

위에 누워 혼미해지는 의식 한 가닥에 매달이었다. 오류골댁과 율촌댁이 황망하

여 강실이를 흔들어 깨우면서

"안서방네."

새되게 갈라지는 목청으로 화급히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귓결에 먼데. 효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부엌 뒷바라지가 투당탕 열리고, 안서방네

와 콩심이, 돔바리, 키네가 뒤안으로 튀어나오는데도 여전히 그네는 움직이지 않

는다. 붙박인 사람 같다. 그러나 눈초리는 매섭게 강실이를 쏘아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맥을 놓으며 까무러져 혼절하는 강실이를 들어올려 울러메고 우우, 소리

가 나게 안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효원은 뒤따르지 않았다.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들이 안채의 큰방 댓돌 위에 흩어지고, 장지문 여닫히는 소리와 신

발 끄는 소리들이 다시 마당에 쏟아지며 들려올 때가지도, 그네는 그냥 그 자리

에 서 있었다. 안에서 나온 콩심이가 사기 대접을 들고 나와 우물가로 가다가

"왜 저러싱가요?"

제 새아씨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른다."

효원은 잘라 말했다. 콩심이는 전에 제가 해 놓은 이애기가 있는지라 공연히 쭈

밋거리며 좌불안석 효원의 눈치를 살피었다.

"아이고, 기양 기색을 허세 갖꼬요. 숨도 맥히솄는게비여요. 얼굴이 새애파러니

질렸는디 숨도 못 쉬여요. 막 달라들어서 시방 주무르고 야단이 났는디, 저보고

찬물 좀 떠오라고 그러시길래."

"그럼 얼른 물이나 떠 가지고 갈 일이지. 웬 사설이냐."

콩심이는 장독대에 우뚝 솟은 기둥처럼 높다랗게 서서 저를 내려다 보는 새아씨

앞을 개미걸음으로 지나, 우물 소게 풍덩, 두레박을 떨군다. 그 소리에 첨벙,

가슴이 놀란다. 아이고매. 혹시 새아씨허고 싸우솄이까? 그 일로? 그러다가 콩심

이는 고개를 갸웃 젓는다. 아무 소리도 안 났는대? 내가 아까 정짓간 있을 때

내다봤잖이여? 새아씨는 기양 이러어고 서서. 애기씨 오냐, 소리도 안허시든디?

무신 일이까잉. 내가 매급시 무단헌 소리를 해 갖고는 가심이 통꺼려서 당최 못

살겄네. 에이, . 그런디 그때는 안헐 수도 없었잖이여. . 콩심이가 물 사발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효원은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남 보기에

민망한 일이라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무리 종시매라고 하지만 그렇게 정이 없이 매차냐."

는 말 듣기가 십상이지만, 이 마당에 그네는 차마 낯색을 변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강실이가 눕히어진 큰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주 모

르는 척 할 수만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저 사람이 병이 들었구나. 효원은 무거

운 고개를 숙이었다. 안서방네가 큰방 문을 열고 나온다. 양손에 대야를 받쳐들

고 토방으로 내려서다가, 올라서는 효원을 보고는 잠시 몸을 비킨다. 그러더니

누군가를 보며 안서방네가 아는 시늉을 한다.안서방네 눈가는 곳을 따라 효원도

무심코 고개를 돌린다. 옹구네가 막 중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다 저물어서 어찌 와?"

안서방네는 뒤안 우물가로 쫓아오는 옹구네한테 묻는다.

"아니, 나 우례한테 바느질 멋 좀 물어 볼라고 왔다가 애기씨 혼절했다는 말 듣

고는 놀래서잉."

"소문도 참. 한자리에 같이 있었든 것맹이로 빨르네그려."

"왜 그러곘다요?"

옹구네가 안서방에 겉에 바짝 쪼그리고 앉는다. 눈빛이 번들거리며 광채가 난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비웃는 것인지 한쪽으로 틀어진다. 안서방네는 대답 대신 대

야에 담긴 수건을 헹구어 짜고만 있다.

"급체를 했든지, 허해서 그러시겄지. 본래 강골은 아니싱게."

안서방네는 걱정스러우나 심상한 어조로 대꾸한다. 벌써 노을이 잦아든 저녁 공

기는 어스름이 짙게 배어, 마주앉은 두 아낙의 모습을 희끄무레 엷은 어둠 속으

로 잡겨들게 하고 있다.

"혹시"

옹구네는 어스름보다 더 음습하고 낮은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더 잇지

않고 끊는다. 대야를 들고 일어서려던 안서방네는 다시 바닥에 수건 담긴 물대

야를 내려놓고는 되물었다.

"혹시라니?"

"애기 밴 거 아니까?"

? 하마터면 안서방네는 엉덩방아를 찧고 샘 바닥에 주저앉을 뻔하였다.

"아니 이 예펜네가 실성헌 거 아니여, 시방?"

", 그럴랑가아. 햇지, 누가 그렇다고 했소?"

"미쳐도 곱게 못 미쳤능게비."

"내가 왜 미쳐?"

"아이고, 멀미야. 이 예펜네 참말로 환장을 했능게비네잉. 마른 하늘에 날베락이

라드니, 지 정신이여? 음아, 눈 하나 깜짝 안허고잉?"

"의윈 부르로는 보냈다요?"

"의원? 아나, 의원. 의원은 참말로 니가 바야겄다, 야가 지 명에 못 죽겄네. 음마,

이게 무신 뚱딴지 같은 소리여. 긍게."

옹구네는 알고 있는 어떤 속이 있는 것처럼 침착하고, 안서방네는 가슴이 벌렁

거리며 퉁탕퉁탕 뛰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얼른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까지 후들후들 떨린다.

"헐 만헝게 허는 소리 아니요?"

"? 헐 만헝게 허는 소리?"

"의원 오면 진맥허겄지맹."

"진맥?"

"아 조께 몬야 아냐 나중 아냐, 그것뿐이제. 알기는 알게 될 일잉게."

"이리 와 바. 이리, 이리."

안서방네는 옹구네 말이 결코 미덥지는 않았지만, 기왕에 터진 말인지라 경위나

알아보려고 급한 마음으로 옹구네를 일으켰다. 비록 헛도깨비 헛방망이질 같은

말일지라도, 한데 자리 새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주고받을 내용은 천만 아닌

까닭이었다.

"콩심아. 이것 좀 딜이가그라이."

큰방 마루에 떠그럭 대야를 올려놓고, 안서방네는 옹구네를 이끌어 황급히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안은 바깥보다 어두워 서로의 얼

굴 윤곽조차 지워져 버리는데, 옹구네의 숨소리는 안서방네 귓바퀴를 적신다.

"내가 다른 디 가서는 이런 애얘기 입도 뻥긋 안했소잉. 나도 나 죽을 일은 안허

고 상게, 천허디 천헌 상년의 신세, 서방도 없이 삼서도 아직끄장 안 죽고 살었

겄제. 그런디 내가 첨으로 이런 말 허요. 나도 참 말 못허게 설운 년이요."

옹구네는 서두를 떼더니, 연전에 이씨 문중의 강수 혼백이 혼인 하던 날 밤,

밭에서 보았던 강모와 강실이의 청천벽력 같은 일을 지금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일 모양으로 소상하게 이애기하고는

"대실아씨가 그 일을 아실랑가 어쩔랑가 모르겄네요?"

어두운 속에서 안서방네 기미와 눈치를 살핀다.

"나는 모르는 일이여."

"새아씨 말이지 누가."

너 알고 모르는 것을 물었느냐는 투로 옹구네가 말을 자른다. 그것은 결코 지어

내는 말 같지가 않았다. 이제 안서방네는 옹구네를 채근 하였다.

"그래서?"

"나보고 미쳤다드니."

"안 미쳤으먼 똑바로 말을 해 바. 똑바르게."

"똑바르나 삐틀어지나 똑같은 일이여. 너무나 뻔헝게."

"그래서어."

"나 쥑일라요?"

"왜 쥑여?"

"이 말 하나 헝 것만도 사지 멀쩡헤기는 힘든 일인다. 믿을 자리라 내가 참 죽을

작정허고 헌 말이요. 그런디 그보담 더 헌 소리를 시방 내가 해야는디, 이 말은

나 하나만 죽고 사는 거이 아니라 여러 사람 생목심 달린 거이요. 그렁게 내가

보장을 받어야 말을 허제."

"보쟁이라니?"

"혼자만 일고 있겄다고 맹세를 해야지."

"허께 해 바."

"말이 쉽소."

"그러먼 어디다 달어매 꼬아주까? 에럽게?"

"나도 암만 상년이지만 살고 잪지 죽고 잪든 안헝게 그러제."

"그보담 더헌 소리란 거이 머이야, 그렁게."

"내 이얘기 좀 들어 보시오. 내가 조상을 잘못 타고나서 천하 상것으로 났소.

, 상것이라고 넘 사는 세상을 못 살 거이요? 나도 이팔 청춘 이쁜 나이 되야

, 옹구 아배 만나 귀영머리 마주 풀고 작수 성례 초리청에 찬 물 한 그륵 떠

논 부부를 지어, 우리 옹구도 낳고, 넘들이사 어뜨케 살든지 두 내우간 오손도손

애기 데고 의좋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생과부 신세가 되야 부렀는디. 아이고 내 팔짜야. 이노무 인생, 귀헌

것도 없고 놓은 것도 없습니다. 그저 기리운 것배끼.

"먼 이얘기를 허고 있는 거이여, 시방? 그 신세는 내가 다아는 신셍게 그만 말허

, 아까 그 경천동지 깜짝 놀랜다는 그 이얘기를 해 바. 무단히 돌려 빼지 말고."

안서방네가 옹구네 타령조를 듣다가 중간에 쐐기를 박는다. 순간 옹구네는, 춘복

이와 자신의 애야기부터 시작하여 춘복이와 강실이의 이야기로 이어 하려던 마

음을 바꾸어 먹는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상대방한테는 사족

이기 때문이었다.

"애기가 머 어쩐다고?"

안서방네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다그치듯 묻는다. 하도 황당한 말이라 이쪽

에서 조목을 대어 묻는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탓에, 그네는 옹구네가 들려 주

는 이애기를 들을 수밖에는 없었다.

"춘복이 애기를 뱄능가도 몰라서 허는 소리요."

단도직입, 거두절미로 토막을 내서 던지는 옹구네 말에 안서방네는 말 그대로

, 소리가 나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춘복이?"

라고 되물을 수조차 없었다. 옹구네는 그런 안서방네한테 한 마디씩 땀을 뜨며

말을 이었다.

"그날 애기씨가 왜 그랬등가 사립문 문간에 나와 섰드라요. 대보름 달 뜬 밤에

춘복이가 마침 일이 있어서 매안으로 올라가다가, . 애기씨가 살라고 그랬겄지

, 안 그랬으먼 그날 무신 일을 당해도 당했을 거이라요, 삽작문 저테 섰든 애

기씨가 그만 시르르르 맥을 놓드니 그렇게 기운 없이 혼절을 허시드라고 안허

? 멋 헐라고 혼자 나와 그러고 지셋능가. 주위는 적막, 아무도 없었등게비데.

모다 달놀이야, 불놀이야. 풍물이야, 다리 밟으러들 나가고 빈 집에 혼자 지시다

가 그 추운디 얼매나 오래 떨고 섰었등가, 그렇게 헛것맹이로 씨러지시드랑만.

춘복이가 너무나 놀래서 상하 신분이고 반상 신분이고 생각헐 계를이 없이 달라

들어, 그 차디차게 식어 부린 몸을 빠진 디 없이 다 비비고, 불고, 주물르고,

서는...... 얼매나 그랬다디야..... 하이간에 교옹장히 오랫동안 보듬고 앉어서 그랬

능갑습디다. 그래도 한 번 넋을 놔 부린 애기씨는 정신이 안 돌아오고,

류골 양반내외 어른들도 안 돌아오시고. 누구 지내가는 사람도 없었등게비데요.

속으로 얼매나 무섭고 놀래고 당황을 했든지, 누구라도 하나 지내가먼 사정을

말허고 매끼고 가겄드래요. 그런디 참 일이 그렇게 될라고 그랫등가, 그렇게 얼

매나아 되드락 암도 안 지내강게로오, 어쩌, 벨 수 없제잉, 애기씨 보듬고 앉었

다가 그대로 기양 가먼, 은공은 그만두고 외나 사람 쥑인다 소리 들을지도 모를

일 아니요오. 번언히 얼음밭에 혼절허싱 걸 봄서나도 기양 길가테 내불고 갔다

고 말이여. 죽을 지 암서도 내불고 갔다고. 아니 꼭 누가 그런 말 않는다 허드라

도 사람의 심정 가진 사램이먼 어찌 기양 그대로 갈 수 있겄능가. 개새끼라도

기양 두고 못 갈 거인다. ? 그래서 다시 애기씨 온몸을 머리끝으로부텀 발톱

끄트리끄장 어디랄 것도 없이 비비고, 주물르고..... 정신이 돌아오드락 보듬고는,

애기씨를 애타게 불름서 신체(시체)가 다 되야 부린 식은 몸을, 지 몸뎅이로 문

질러 뎁혀 디렛드라요."

안서방네는 숨도 쉬지 않고, 침도 삼키지 않았다. 다만 그 승냥이 같은 춘복이가

푸른 달빛 교교한 아래 배꽃 같은 강실이를 어루고 다루는, 누구 지켜보는 이

하나도 없었다는 정경을 상상하여 떠올리며 억색이 되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만일에 옹구네 말이 근거가 있고 거기까지가 사실이라면 그 다음 일은 묻지 않

아도 정해진 것이요, 그 정경을 떠올리기가 어렵지도 않았다.

"춘복이가 사람은 천해도 성정은 또 갠찮은 디가 안 있소, ? 어쩌든지 애기씨

살리는 거이 급해서 앞 뒤 볼거 없이 지양 지몸으로 이불을 덮어서 따숩게,

아오게 헐라고 얼매나 얼매나아 보듬고 있응게로, 얼음뎅이 같은 애기씨가 살어

돌아오드라요. 숨도 쉬고. 어드케나 그 기척이 반가운지 이양 왈칵 끌어안고 그

큰 몸뎅이를 꾸부린 채 뚝 뚝, 눈물을 떨굼서 울었다고 헙디다. 뜨거운 눈물에

놀랫등가, 아니먼 정신이 돌아와서 그랬등가, 안 그러먼 암만 혼절을 했었다고

허드래도, 암만 시집도 안 간 규중 애기씨라도 젊은 몸이라 그랬등가, 아 긍게,

믿을 말이요? 애기씨가 춘복이 목을 댕겨서 보듬음서 같이 우시드라요. 그러고

는 외나 뒤로 물러앉을라는 춘복이를, 인자 정신 들오곘잉게 춘복이 지 헐 일은

다 헝거 아니요잉, 그렁게 인자 일어날라고 그러는디, 외나 그런 춘복이를 애기

씨가 파고들어 붙들음서 그렇게에 서럽게 서럽게 우시드라요. 왜 그랬능가는 모

리겄지마는. 그렁게 춘복이 맘이 어쩌겄소. 춘복이 머라고 못헐 거이요. 상놈이

라 신분이 낮아서 그렇제 그것도 사램이고 한창 때 젊은 거인다, 넘 가진 감정

이 없겄서잉. 음양이 다 있는 거인다. 저도 모리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기씨

옷고름을 풀어도 가만 있고, 그보담 더해도 가만 있으먼, 내가 춘복이라도 그 담

에는 어쩌겄소? 아 그러고 막말로 살려 놨는디 임자가 누구여? 나는 말은 바로

허네. 거기다가 겁탈을 헌 것도 아니고, 애기씨 전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새 몸

이라먼 또 몰라. 그렇다먼야 암만 앞뒤가 머 어쩌고 저쩌고 해도 베락을 맞어

사지가 찢어질 일이겄지요. 그런디 이건 또 경우가 안 달릉가아? 하이간에 춘복

이 못 만났으먼 그날 그 밤에 벌세 애기씨는 이승 사람 이니였잉게. 어쩌야여,

이 일을."

안서방네는 턱이 떨려 말이 안 나온다.

"그래서 나 아까 애기씨 혼절했다는 말을 들응게, 그렇게 약헌 몸에, 엎친 데 덮

친 일을 말도 못허고 속을 졸이고 졸이는디다, 애기가 서서 그렁가 싶드라고요."

옹구네는 으레 그렇지 않겠느냐는 투로 말을 던지며, 덧붙인다.

"의원 불렀으먼 진맥허겄지맹,

이미 깜깜 해진 방안을 먹장으로 밀고 들어오는 어둠의 기세에 가슴이 짓눌린

안서방네는 저도 모르게 그 어둠을 밀어내려는 듯, 휘유우우. 깊은 한숨을 토한

. 그 동안 옹구네는 밑빠진 제 가슴속 체구멍들을 한 칸 한 칸 막는 일로 애

오라지 강실이 생각에 골몰하였다. 강실이 모습을 떠올리고, 춘복이가 강실이와

뒤엉키며 어우러지는 상상을 하고, 그것들을 이빨 갈아 증오하며 진흙을 짓이기

듯이 뭉게어 가슴 밑찬에다 쟁이곤 하였다.

"우례, 멋 헝가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아까 참에, 행랑채 우례한테 기웃 고개를 들이

민 옹구네는

"들오시오."

소리 들을 것도 없이 벌서 툇마루로 올라서고 있었다. 어미 곁에서 색색깔 헝겊

쪼가리를 늘어 놓고는 엉금엉금 서툰 바느질로 그것들을 이어 붙이던 꽃니가,

옹구네 들어오는 것을 말꼼히 바라 보았다.

"하앗다아, 곷니 바누질 허냐? 솜씨 좋네에, 시집가도 스겄다."

"아이, 야 야. 저리 치워라이? 수선시럽다. 저만치 한쪽으로 갖꼬 가서 허든지.

이리 앉으겨."

우례는 손에 든 바느질감을 반짇고리에 담아 넣고 한쪽으로 밀면서 주섬주섬,

대강 방바닥을 치웠다.

"봉출이는 어디 가고?"

"가가 시방 방에가 있을 때간디요?"

"헤기는. 종의 자식이 해 넘어가도 안했는디 방안 차지 못허제. 가도 엇어서 지

자리 찾어야 우례 속 맥힌 거. 걸린 고 맺힌 고 다 풀 거인디. 어엿헌 양반의

, 이씨 문중에 어뜬 자손이라고 구정물에다 땡감 맹이로 처박어 깢꼬."

"누가 듣겄소."

"들은 그 사람도 아니라고는 못헐 거이고."

"아이가, 그만 허랑게요. 꽃니 저거이 먼 이 있다요? 나발나발 무신 소리 허고

댕기먼 어쩔라고."

"애들 속이 더 노랑쥐여. 안 그러냐, 꽃니야?"

꽃니는 목을 질금 움츠리며 제 어미 눈치를 헬금 살폈다. 어매가 무어라고 하든,

옹구네가 나타나면 꽃니는 재미가 있었다. 이제 열 살 막 넘은 계집아이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비밀스러운 수군거림이 옹구네한테서는 늘 쇳대 소

리같이 절렁절렁 울렸고, 어린 눈에 보아도 가무잡잡 동그람한 얼굴에 샐쪽한

눈꼬리며 도톰한 입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뻐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옹구네는 꽃니를 애들이라고 무질러 몰아 버리지 않고 꼭 말참례를 시켜 주었

. 그런 것들이 꽃니는 은근히 좋았다. 언젠가 뒤안 마당에서 콩심이는 철재를

업고 서 있다가, 히끗 모퉁이를 돌아가는 옹구네를 보고 꽃니한테

"아이고, 촉새, 나는 옹구네만 보먼 준 것 없이 밉드라."

고 입을 비쭉 했었지만.

"우례도 나맹이로 전상으 죄가 많어서 넘 못 살 시상 가심 찧고 사는디, 인자는

갠찮은 날도 올 거이여. 세상이 배끼고 있거등. 이고 배끼고 있잉게 원한이

풀리는 날 곧 오제."

"꼭 와얄 거인다."

"아이. 내 말 조께 들어 보소."

옹구네는 음성을 낮추었다. 그리고 우례의 귀바퀴 가까이 입을 대고 속삭속삭,

저만치 앉아 있는 꽃니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한참이나 무슨 말

인가를 하였다. 꽃니는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

. 다만 하도 잘 아는 이름이라 아무리 낮은 소리로 이야기해도 저절로 들리는

것은, 오류골댁 작은 아씨라는 말과 춘복이라는 말뿐이었다.

"거그서 애기 하나 나먼, 가는 인자 봉출이허고는 거꾸로제 긍게. 처지가 아이고,

, 벨일을 다 보네이."

하고 하는데, 우두두두, 바깥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쏟아졌던 것이다.

"왜 이리여?"

깜짝 놀란 우례가 반사적으로 문짝을 탕, 열어제치자

"작은아씨가 씨러지곘다네."

빨래통을 툇마루에 황급히 내려놓고 장독대 쪽으로 내달리는 것은 소례였다.

래 위에 걸쳐 얹은 방망이가 마루로 통, 떨어지더니 떼구루루 토방으로 굴렀다.

옹구네 가슴도 방망이를 따라 굴렀다. 집안이 벌컥 뒤집히는 소동 속에서 옹구

네는, 어떻게 요때를 놓치지 않고 절묘하게 파고들 것인가, 삵괭이 눈으로 노리

면서 발톱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암가에서 안서방네를 낚아챈 것이다.

"근게 인과응보란 거이 꼭 있기는 있능갑서."

말긑에 옹구네가 토를 달았다.

"인과응보라니?"

안서방네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 채 도끼눈을 떴다. 마치 이 모든

사단이 옹구네한테서 비롯되기나 한 듯이.

"나 지금 막 우례한테 볼 일 있어 왔다고 안했소잉? 그 봉출이란 놈 말이라우,

가가 수천서방님 자식잉 거 모르느 사람 아매 이 근동에는 없을 거이그만요.

어매는 천해서 씨종의 딸년으로 붙백이 노비 노릇을 허지마는 봉출이 아배야 정

쇠가 아닝 거 다 알잖능게비, 그걸 머 누가 말해 줘서 안다요? 눈구녁 바로 백

힌 종자먼 그 눈에 그게 안 뵈이여? 수천서방님허고 봉출이가 머 아조 서로 대

고 찍어 논 것맹이로 탁는디? 봉사라먼 또 몰르지만. 그런디도 저럭 자식 말

은 자짜도 안챚음서 큰집이 종놈으로 내비둥게 나 속으로 그래집디다이. 양반으

피는 원래 상놈보다 독헌 거잉가아. 우리 같은 상년의 심정으로는 도대체 짚어

지들 읺등만. 개 뒤야지, 외양간에 마소도 다 지 새끼라먼 눈에다 불을 씨고,

새끼 난 암소 조께 봇시오, 그저 그노무 송아치를 기양 이뻐서 이뻐서어 지 셋

바닥으로 귀때기 꼭대기부텀 꼬랑지 끄터리끄장 다아 핥어 주잖능게비. 짐승도

그런디.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는디. 어뜨케 사램이, 그것도 양반이, 우리

같은 천골들 천헌 세상을 사시는 것도 아님서, 당신 자식을 안 돌아보시까잉.

만 신분이 있다고는 해도. 신분이 머리간디 핏줄보돔 질긴 거잉가아."

"아니 이 예펜네, 오늘은 간뎅이가 퉁퉁 부섰능갑네이?"

"인과응보랄 거이, 틀린 말 아니제. 작은아부지는 양반인디 노비를 봐서 봉출이

를 났고, 만약에 애기씨 뱃속에 춘복이 애기가 섰다먼, 가는 아이고, 가를 가라

고 해야여어 되렌님이라 해야여, 긍게 가아는 신세가 어뜨케 될 거잉고잉? 어매

를 따러가아? 아배를 따러가?"

에라이, 이런 빌어처먹을 노무 예펜네. 철썩. 그 말을 더 못 듣고는 순식간에 번

개불이 번쩍하게 옹구네 뺨따귀를 후려친 안서방네는, 볼따구니를 감싸쥐며 앞

으로 고꾸라지는 옹구네한테 으르렁거린다.

"주뎅이 찢어 놓기 전에 얼릉 나가. 나가고, 다시는 그런 더런 소리 어따 대고

허지 말어. 보자 보자 헝게로 이게. 어디다가 고개를 치키들고 되빤댁임서 되잖

은 소리 쌔왈대능 거여 시방?"

안서방네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토방에 올라서면서 발을 탕탕, 구르고 손으로

옷을 털어내는 소리가 방망이로 요대기 치는 소리만 하였다. 일부러 옹구네 들

으라고 그러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묻은 더러운 말을 그렇게 다

털어내 버리고 싶은 심정 때문에 그러기도 하였다.

"요망헌 노무 예펜네."

안서방네는 그 말을 잘라 뱉고는 휘잉 바람을 일으키며 안채로 들어갔다. 평소

의 안서방네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 그런다고 깅 거이 아닝 거이

되고 아닝 거이 깅 거이 될 거이냐? 어림없다. 뻗대다가 코 깨지제. 얼떨결에 싸

다귀를 얻어맞은 옹구네는 감싸쥔 뺨이 얼얼하기도 하였지만, 누구라도 보란 듯

이 처연하게 고개를 수그린 채 샘 바닥에 으그대고 앉아 있었다. 억울하고 가련

한 태가 온몸에 역연하도록. 그러다가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벌어진 앞섶을 추

스린 뒤, 몽당산이 치맛자락을 주름까지 눌러 펴 내리고는 솟을대문 바깥으로

나섰다. 어둑발이 깊이 내린 고샅의 검은 길을 허펑지펑 딛으며 원뜸에서 중뜸

으로 내려오고, 적송 구부러진 나무 밑을 돌아 귓결에 대나무 바람 소리 씻기는

모퉁이 지나, 아랫몰로 내려오는 그네의 모가지까지 눈물이 차 오른다. 아랫몰

인월댁네 초가지붕 처마 밑에 호젓한 등잔 불빛이 배어 나오고, 베 짜는 소리가

덜컥 덜커덕 들려왔다. 토닥토닥 옹구네의 힘없는 발걸음 소리가 베 짜는 소리

에 섞여들었다. 어디만큼까지도 따라오던 그 소리가 희미하게 지워지면서 이제

는 들리지 않는 개울가에 이르러, 옹구네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목을 치받고

터지려는 울음을 더는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아, 더러운 년의 인생이로다.

구네는 비로소 울 곳에 이르러, 차갑게 녹는 음 이월의 밤 개울물을 어둡게 구

부려 들여다보며, 흐르는 눈물을 흐르게 둔다. 넘들은 나보고 홰냥년이라고 손구

락질헐랑가 모르지마는, 생떼 같은 자식끄장 둔 년이 넘의 숫총각 따먹으러 밤

마실 댕긴다고 헐랑가는 모르지마는, 사람마동 팔짜 도망은 못헌다는디, 나라고

나를 어쩌겄냐..... 나도 나를 어쩌들 못히여. 헐 수가 없어......나도 열녀라먼 좋겄

......지둥맹이로 우뚝 서서 밧줄로 끌어댕겨도 외눈 하나 꿈적도 한허는, 그런

열녀라먼 얼매나 좋겄냐.....열녀도 타고나겄제......나는 상년이라 그렁가......상년이

라고 머 어디 다 나 같을라고. 내가 그렇게 타고났을 테지. 옹구 아배 죽고 나

, 나도 죽었니라, 허고는 죽은 디끼 옹구만 찌고 키움서 논일 댕기고 밭일 댕

기고 손톱이 모지라지게 베 짜고, 끄니 때 배 안 곯고, 그러다가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러자먼 옹구 장개도 보내고 메누리도 딜이고, 그럼서 손자도 보고. 우리

어매 고상했다고, 한 펭상에 애썼다고 따순 밥에 등 따시게 불 때 주는, 그런 늙

은이 되야서 대접받고 펜안히 살 수도 있을 거인다. 나는 왜 그렇게 못 살고 이

런 더럽고 서러운 세상을 살어양가. 이게 무신 꼴이냐. 서방은 아니라도 문서만

없제 지 사내 시앗 보는 일에 중매끄장 스고 댕기니. 사앗? 그러먼 강실이가 시

앗이제 머이여? 말로 치자먼 내가 몬야 살기 시작했잉게 내가 큰마느래고, 지가

나중 들옹게 지가 작은마느래지. 가가 소실이여 긍게. 나이로 바도 그렇고 순서

로 바도 그렇고. 내가 머 헌사램이라고 춘복이도 깜보지마는, 헌 것은 강실이도

마찬가지제. 내가 기죽어 쉭일 것은 한나도 없다. 그런디 나는 지가 품고 자는

남정네한테 지집 딜이게 해 줄라고, 대가리 짜서 모사허고, 일 뀌미고, 맞어 죽

을랑가도 몰름서 호랭이 굴로 들으가서 말 퍼치고. 그러다가 보레기 얻어맞고.

님 뺏기고 따귀 맞고. 님한테도 수모요, 시앗 쪽에다가도 수모다. 님은 너 저만

치 가라고 내치는데, 시앗의 종년은 너 여그 발도 디디지 말라고 후려치니. 도대

체 느그들은 무슨 권세냐. 느그들은 대관절 무슨 권세를 쥐고 있길래 그토록 잣

대밧대 거만하며, 나는 무엇을 못 가졌길래 이 수모와 박대를 받어야만 하는가.

대관절 무얼로 이것들을 다 갚을 수가 있으까. 얼음 섞인 개울물이 어둠 속에서

그래도 돌돌돌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옹구네는 주질러앉은 그대로 얼마를 그냥

물 소리 따라 울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때, 개울 위에 걸린 다리를 밟으며 그

림자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매안 마을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옹구네 눈에 비

쳤다. 누구여? 눈물 자국을 손등으로 씻어내며 그네는 눈시울을 모아 그림자를

꼬느어 보았다. 하나는 동저고리에 여리여리한 것이 조금 애젊은 듯하고 한 사

람은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이는데 나이 좀 수굿해 보였다. 옹구네는 사람 기척

에 퍼질러 울던 것이 민망하고, 이 밤중에 저게 누구인가 싶기도 해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누구대?"

가까이 다가온 그림자 하나가 원뜸의 깔담살이인 것을 알아보고는 짐짓 그렇게

목청을 냈다. 깔담살이와 함께 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했던 것이다. 깔담살이

도 옹구네를 알아본 것 같앗다.

"여가 왜 있당가요?"

". 나 집이 가니라고오. 저물었네? 어디 갔다 온디야?"

나이 든 사람은 옹구네 곁을 휙 스쳐 잰 걸음으로 저만치 질러 가고, 깔담살이

는 옹구네한테 붙잡혀 몇 마디 대꾸를 하느라고 뒤쳐졌다.

"저 냥반이 누구냐?"

"광생당 진의원님 아니싱교."

그러먼 그렇제. 옹구네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었다.

"진의원님이 왜? 이 밤중에."

"아이고, 나 얼릉 가 바야요. 시방 아무 정신이 없고마는."

"원뜸에 뫼시고 가냐?"

"작은댁 애기씨 때미."

"오오."

어서 가 바라. 옹구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손짓으로 깔담살이를 놓아 주었

. 진의원은 남원에서도 괘 큰 한약국을 하는, 몇 년 전에, 진의원보다 나이 반

절 덜 먹은 스물한 살 고리배미 비오리가 각시봉숭아 꽃가지 벙글 때 소실살이

를 하러 들어갔었던, 그 사람이다. 그가 깔담살이를 앞세우고 매안 마을 입구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안서방네는 효원과 다급하게 마주앉아 있었다. 망설이다 몰

아붙인 숨이 목에 차 더듬거리는 안서방네 입시울이 일그러져, 곧 울음이 비어

져 나올 듯하다. 비죽비죽, 뒤틀린 얼굴이 퍼르르 경련을 일으킨다. 효원은 짐짓

냉담한 낯빛으로 안서방네를 쏘아본다. 콩심이한테 들은 말과 장독대에서 스러

진 강실이 일이 해괴하게 뒤섞여 얽힌 꾸리에, 자칫 제가 먼저 무슨 말을 떼면

여지없이 감겨들 수 있기 대문이었다. 안서방네가 효원의 무릎께로 한치 다가앉

는다.

"....."

마른 침을 삼킨 안서방네 음성이 갈라진다. 그래도 효원은 할 말이 있느냐고 묻

지 않는다. 때때로 말이 없는 것보다 더 큰 위엄은 없다. 비록 상전이라 하나,

나이로만 치자면 그 몇 배를 먹었다 할 안서방네는 효원의 침묵에 눌려 진땀이

난다. 새아씨가 평소 안서방네한테 경우에 닿지 않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랫것인데도 인정 사납게 하지 않아, 오히려 대접을 받는 편이건만, 차마 입이 떨

어지지 않는다. 반상의 지엄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효원이 뛰어넘지 못할 세월의

벽을 몇 십년씩이나 쌓아온 안서방네 인생이,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짐작만 해

도 아찔한 탓이다. 안서방네가 하는 양을 바라보는 효원의 눈살이 꼿꼿해진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싶은 긴장과, 무슨 말을 들어도 결코 놀라지

않으리라는 다짐이 스스로 곤두선 것이다.

"새아씨."

드디어, 안서방네가 고꾸라지듯 효원을 부른다. 더 밀릴 수 없는 절벽에서 발을

헛딛은 음성이다.

"말을 해."

"예에."

안서방네는 효원의 대꾸가 황감하여 이마를 조아린다. 더듬더듬하면서도 급박하

여 누가 곧 몰아쳐 오는 것처럼 서둘러 쏟는 단서방네 말이 공중에 뜬다.

"하도 말 같잖어서 듣다 말고 귀때기를 후려 쳐 주기는 했는디요, , 베락 맞을

말씀으로 만에 하나 천에 하나 그 예펜네 말이 근거가 있는 거이라면, 시방 의

원 뫼시고 진맥헐 때가 아닝가 싶기도 해서요. 전후 수습을 좀 허고 나서 의원

을 뫼세도 뫼세야제, 기양 들이당짱에 혹 무신 망발이나 나먼 어쩌까 허고요.

가 이런 말슴 디림서도 당최 송구시러와서. 무신 이런 일이 있으까요. 지 생전에

이런 일을 또...... 그런디요, ....... 벌세 의원이 당도헐 시간 다 되야 가능게빈디

...... 허다못해 애기씨를 댁으로라도 뫼세다 노먼 어쩌까요...... 혹시 무신 변이

생게도, 기양 암도 모르게 똑 식구끼리만 앉어서 듣는 거이 어쩔랑가. 아이고,

새아씨. 벌세 당도허겄네요이."

안서방네는 온 정신이 아니게 두서가 없었으나, 애가 잦게 허둥대는 충정은 절

박하고 안타까워서, 기가 막힌 일이었지마. 효원이 오히려 진정을 시켰다.

"지금 해 다 저물고 밤이 벌써 이슥한데, 여태 여기 있던 사람을 거두절미 앞뒷

말 설명도 없이 집으로 내려가라 하면, 인사도 아닐뿐더러 원망을 살 일 아닌가.

가만 좀 잘 생각을 해 보세."

효원은 감정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 제 마음 급한 것에만 정신이 쏠린 안서방

네는, 효원이 말 듣고 놀랄 것은 미처 챙기지 못한다. 춘복이......춘복이라니.

, 이게 무슨 일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번 당한 일이 아니었단 말이냐.

럴 리가. 효원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팽이를 치는 것 같았다. 옹구네도 알고,

제 안서방네도 아는 일이라면, 아닌게 아니라 온동네가 다 내놓고 떠드는 판에

나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작년 세안 동짓달에 콩심이란년이 숨넘어가게 말해

준 것이 가슴에 얹혀 생병을 앓고 있는 효원이, 이 뜻밖의, 경악을 할 언질에 억

장이 막혀 정신 수습이 안된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

오려고 한다.

"새아씨, 인사보다 망신이 더 무섭지요. 옹구네 그거이 예삿말 허는 것맹이지는

않든디......"

안서방네는 입술이 마르고 숨이 바튼다. 그러나 효원은 처음 안서방네한테 말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 이마를 깊이 찡긴 채, 난데업시 휘몰아오는 바람을 방패로

막으려는 사람같이 가슴을 내밀어 버티고만 있다.

"여그는 칭칭이 어른들이시고, 아랫것들 번다허고, 드나드는 사람 한둘이 아닌디

......아이고, 지가 기양 발 등에 불 떨어진 것 같어서."

안서방네는 곧 호닥호닥 뛸 것처럼 보였다. 그네는 아까 옹구네 뺨따귀를 올려

붙이고 곧장 안채로 들어왔으나, 그저 뒤안에서 모퉁이에서 안마당으로 서성거

리고만 다닐뿐, 도무지 엄두가 안 나서 입을 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

, 걸음 빠른 깔담살이가 진의원 모시러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차마 건넌방으

로 들어가지를 못하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 말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 것인고. 옮기기도 사참하였다.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을 뿐 아

니라, 말 꺼냈다 거꾸로 안서방네가 벼락을 맞을 일 또한 겁나지 않을 수 없었

던 것이다. 전에 안서방네 아비는 말한 일이 있었다.

"인자 니가 종의 가시(각시)가 되야서 상전을 뫼시고 살 적으 멩심 하나 해얄

것은, 다른 건 다 몰라도 니가 상전한테 나쁜 소식 전허는 일을 허들 말어얀단

거이다. 피해 부러야 여. 안 좋은 소식 듣고 심정 상허먼 베락은 너한테로 떨어

지고, 매급시 원망 사는 거잉게. 그저 존일, 존 소식을 고허는 거이 좋은 거여."

그런데 지금 그네는 '나쁜 소식' 중에서도 가장 나쁜 소식을 사뢰어야 하는 것이

. 하지 말으까. 안서방네는 공연히, 안에서 부르지도 않으시는데 물대야를 들

고 큰방으로 들어가 머뭇거리며 정황을 살피었다. 큰방에 눕히어진 강실이는 조

금 깨어나는 기척이 있기는 있었지만 식은 땀이 흥건하여, 율촌댁과 오류골댁이

머리맡에 지켜 앉아 근심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목에 차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은 순간, 안서방네는 치마를 무릅쓴 심정으로 효원의 건넌

방 문을 열었던 것이다. 안서방네는 입술이 바작바작 타서 안으로 허옇게 말려

들어갔다. 시방 벌세 중뜸 건너 이리 고샅으로 오고 있을랑가도 모르는디. 효원

은 무겁게 눈을 감았다. 안서방네는 기왕에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 이제라도 할 수 있는 한 망신만큼은 최소한으로 줄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집안에서 지금 그네와 효원뿐이니, 속된 말로 칼자루를 쥐

고 있는 것은 새아씨 효원이 아닌가. 안서방네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효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히 이마를 수그린 채 침묵을 풀지 않는

. 이것은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다. 아닌 밤중에 의원이 곧 올텐데 찬 바람

쏘이며 식은땀 흘리는 사람을 자기네 집으로 가라 한다는 것이, 어른들한테 이

해가 될 성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기응가지 아까 전갈을 듣고는 놀라서 큰사랑

으로 올라와 이기채와 함께 의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오래오래

풀기 어려운 오해를 살는지도 모른다. 눈을 감은 효원은 우선 그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만일 안서방네 말이 사실이 된다면, 더욱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회복할

수도 없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중요한가. 앞의

것은 나 자신이 당할 일이요, 뒤의 것은 저 사람 당허는 일이 될 터인테. 아니,

저 사람만 당허고 말 것인가. 가문이 온통 씻지 못할 오욕을 무릅쓸 것인데.

것은 곧 철재한테 멍에를 씌울 것인데. 효원은 다시 처음부터 얽히기 쉬운 명주

올 가리듯이 조목을 짚으며 상황을 짐작해 보고, 한 가닥 한 가닥 행각을 추스

린다. 그리고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안서방네가 입을 벌리며 효원이 일어서는

것을 올려다본다. 효원은 단호하게 대청마루를 건너 큰방으로 가더니, 율촌댁과

오류골댁 옆에 공손히 앉았다. 그리고 강실이를 내려다본다. 혼곤하게 눈을 감은

강실이의 납청색 회푸른 낯빛은, 말 못할 그 어떤 두려움에 속 깊이 질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여운 사람. 효원은 고개를 돌린다.

"긴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언데?"

율촌댁이 미간을 모으고 묻는다.

"지금 애기씨가 작은집으로 내려가야겠는데요?"

거두절미한 효원의 말에 율촌댁보다 더 놀란 사람은 오류골댁이었다. 그리고 누

워 있는 강실이도 그 말을 어렴풋이나마 들었는지 몸을 움칠하였다.

"너 지금 정신 나갔냐? 아니, 아니 너. , 누구 앞이라고."

"긴 말씀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서두르셔야 해요."

"이런 괘씸한 아, 이런...... 이런 일은 내 나고 첨 보겠네. 아니 너."

율촌댁이 얼굴에 기가 질린 노기를 띄우며 강실이 쪽으로 한 무릎 다가앉았다.

절대로 안된다는 표시였다. 오류골댁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만

있다. 서글프고 야속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어머님. 사정이 있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말을 해라."

"지금은 안됩니다."

어기가 찬 율촌댁이 엉버티고 앉은 효원을 금방 밀어붙일 기세로 반몸을 일으키

는데 오류골댁이 만류하며 쩟, 혀를 찼다. 그리고는 강실이가 덮고 있는 이불을

젖힌다. 삭정이같이 마른 몸이 진땀에 젖어 있다. 오류골댁은 여식의 옷자락을

어루만져 여민다. 손 등에 눈물이 돈다.

"어서 서둘러서 가서요. 의원 닥치기 전에."

효원이 재촉한다. 오류골댁은 갈수록 야속하고 알 수 없는 말들뿐인지라 아예

대꾸할 마음도 없었지만, 율촌형님이 무어라 하시든지 평소에 대실 질부에 대하

, 경우지고 대차서 재가하고 제세할 궁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던, 여자로

나서 아깝다 여기던 심정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라 인정 쓰는 것이

저런가. 무섭구나.

"아 이 밤중에 어디를 어떻게 간다고. 너는 지금 이 혼절헌 종시매를 느이 숙모

님이 둘러업고 밤길에 가시라는 게냐? 그게 어느 나라 법이냐, 도대체. ? 자네

가만히 있어. 큰일나겄네. 이러다가. 그러고오, 너 나허고 이얘기 좀 허자."

율촌댁이 오류골댁을 만류하며 다시 효원을 호되게 나무라는데 오류골댁은 강실

이를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검불 같은 강실이는 후둘후둘 떨리는 몸을 어머

니한테 의지한 채 차마 효원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더듬더듬 한 걸음씩 끌며 내

쫓기는 사람처럼 방에서 나간다. 그러는 오류골댁 모녀를 붙들어 앉히려는 율촌

댁 두 손을 효원은 틀어쥐었다. 손목을 잡힌 율촌댁이 이 불손함에 경악을 하여

입을 못 다무는데, 효원의 악력이 어떻게 세었던지, 율촌댁은 어금니까지 새파랗

게 지질려 버리고 말았다. 두 모녀가 무너지는 억장을 가누면서 반 걸음씩 반

걸음식 마당으로 내려서고 중문 지나, 솟을대문을 겨우 벗어나서, 오류골댁 사립

문에 이르렀을 때, 깔담살이가 진의원 모셔왔다고 큰방에 아뢰었다. 간발의 차이

로 그들은 엇비킨 것이다.

"작은댁으로 뫼셔다 디려라."

효원은 밖으로 나와 그렇게 말했다.

 

 

24. 진맥

 

"어찌 오시오?"

비오리는 낭창한 치마꼬리를 한쪽으로 휘이 걷어 감으며 일어서서 진의원을 맞

이하였다. 그의 탯거리에는, 한때 그의 소실이었던 흔적과 원망이 아직 다 지워

지지 않은 토라짐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쯤은 올 줄 알기나 했던 것처럼

흔연한 기색도 배어났다. 그것은 여러 해 주모 노릇으로 닦이어, 날선 몸의 모서

리가 둥그름해진 흔연함이기도 하리라. 사람의 몸에도 세월이 묻으면, 어느결에

장롱이나 반닫이에 스미는 손때 같은 것이 저절로 눅눅하게 스미어 어리는 것인

지도 모른다. 혹은 마음에도. 비오리는 지금 스물한 살이 아니었다. 진의원은 그

런 비오리를 비스듬히 내리뜬 눈길로 바라보며 방문 앞에 흰 구두를 나란히 벗

어 놓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중절모를 그네한테 건네준다. 그의 머리는

상투를 진작에 잘라 버린 단발이다. 진의원을 따라 들어온 바깥 바람이 등잔불

불꼬리를 훑으며 그을음을 일으키는데, 두루마기 벗는 자락이 다시 펄럭, 불 혓

바닥을 흔든다. 비오리어미는 아랫목에 깔린 이부자리를 황급히 주섬주섬 걷어

한쪽으로 몰아붙이며

"앉으시겨."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린 채 자리를 권하는데, 조글조글한 낯꽃에 번지는 반가움

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진의원한테 받아 든 중절모를 바람벽의 나무못에 걸고,

두루마기는 횃대에 접어 거는 비오리의 좁으장한 등판에 꼿꼿한 힘살이 일었다.

그런 모녀의 낯빛과 뒷 등에 홀낏 한 번씩 일별을 준 진의원은 무거운 무표정으

로 아랫목에 앉는다.

"저녁은 잡샀능교."

비오리어미가 낯바닥을 진의원 쪽으로 들이밀며 묻는다.

"어디 갔다 인제 옹가? 아이고, 내 궁둥이."

하며 밖에서 한나절이나 놀다 들어오는 어린 손자를 무릎 위에 달랑 올려 앉히

고는 궁둥이를 토닥거리며 어르는 늙은 할미처럼, 비오리어미는 진의원을 호물

호물 흐물어지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때가 언제라고."

진의원은 말끝을 무지른다.

"하이고오, 때 아는 냥반이 이렇게 때 아닌 오밤중에 뜽금없이 여그는 멋 헐라고

외겼다요? 나그네 객지 잠 잘라고 들렀능가아?"

비오리가 홰애 틀어진 눈을 흘긴다. 비오리어미는 그런 딸을 오끔한 눈짓으로

나무라며, 다시 고개를 진의원 쪽으로 돌려 눈두껑을 꿈적꿈적, 참으라고 시늉한

.

"밤도 짚고 날도 찬디 시방 어디 갔다 오싱기요?"

비오리어미 말에

"머 일부로 고리배미 솔밭 삼거리, 누구 볼라고 오매불망 오솃으께미? 무단히 짐

칫국 몬야 딜이마시다 급체허제."

비오리가 진의원 들으란 듯 어미를 핀잔한다.

"야가 시방 오늘 저녁에 산내끼 고능게비요. 그저 나이 자신 어른이 참으시겨.

반가워서 좋다고 저러능 거잉게. 아이고, 그나저나 어찌 그리 한 번 걸음이 멀어

서 맻 년이나 걸리시요잉? 요렇게. 내가 아조 보고 자와서 눈에 심지가 다 돋았

그마안. 사우 사랑은 장모란디, 이노무 장모는 가마니로 사랑이 열어도 갖다가

쟁일 디가 있어야제에. 아 막 기양 썩어 나가도 줏어갈 사우가 없잉게로오. 항상

날 저물먼 허망허드니, 인자 되얐네. 배깥에는 찬 바람 울어도 이 방에는 기양

춘풍에 훈풍이 그드윽 허그만요. 꽃 피겄소."

비오리어미가 진의원 둘레로 맴이라도 돌 것처럼 들떠서 웃음이 벙싯거리는데,

진의원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 비오리는 비오리대로 새초롬히 앉아만 있다.

"어매애, 나 좀 바. , 얼릉 나가서 술 한 상 봐 오리다. 둘이 앉어서 이얘기허

. 손도 녹이고 요리, 요리 와."

술청으로 어미가 나가자 진의원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술 생각 없다. 기양 잘란다고 그래라."

"주막에 손님이 왔는디 술을 안 팔겄소?"

"손님?"

"곱쟁이 장사는 못해도 본전치기나마 술은 팔어야제잉. 요새같이 험헌 세상에 임

자 만났을 때 덤테기 안 씨우먼, 우리맹이로 불쌍헌 인생들이 머얼로 먹고 산다

? 밑천도 없는디."

가시가 꼬부라지는 비오리 옆눈에 파르스름 원념이 비늘을 일으킨다. 그 비늘이

불빛에 파르르 떨린다. 얄포롬한 그네의 입술에도 푸른 비늘빛이 돋는다.

"네가 원망이 많구나."

진의원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새가 다 물어갔지 그게 여태끄장 남어요? 언지 쩍 일이라고."

"그래도 내가, 아는 집이라고 발길이 이리 닿는 것을 막든 안했다."

"장허시오."

"허어."

"여그사 머 재워 주고 멕에 주는 딩게 누가 무신 소리 못허지요잉. 그 대신 공으

로는 안됭게 산판만 안 틀리먼 나무랠 일 머 있겄소? 안다고 찾어온 손님. 객방

으로 나가시랄 수는 없고. 여그서 지무시기는 허시요만, 나는 어머이랑 저 방으

서 잘랑게."

비오리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려 하였다. 기색이 매초롬하다.

"앉어라."

진의원이 혀를 찻다. 그러나 그네는 어느새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

"저런 버르쟁이."

다시 진의원이 무어라 하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비오리어미가 술상을 개다리 소

반에 보아 막 들고 들어오는 것이다.

"야가, 야가, , 너 멋 허고 섰냐? 절 헐라고 그리여?"

방안의 수작을 다 엿들어 알고 있는 그네가 오똑 서 있는 비오리를 나무라며,

딸년의 어깨를 눌러 주질러 앉혔다. 할 수 없이 술상 머리에 앉은 비오리한테

오리 모가지 술병을 안기고는 어미가 눈치 빠르게 제 이부자리를 붇움어 안고

저 방으로 건너가 버리자, 진의원은 술잔을 들었다. 그는 비오리어미의 반색이나

비오리의 앵돌아짐조차도 잊어 버린 듯 아까처럼 무표정으로 무겁게 잔을 들고

만 있었다. 비오리가 얼른 술을 따르지 않은 까닭에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잔은

허공에 떠 있었지만, 그것마저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진공에

에워싸여 숨까지 눌리는 압박감이 그의 목을 조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는 숨

을 죽인 채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비오리의 갈피 갈피 멍울을 이룬

원구와 한탄이 진의원한테로 쏟아지는 대신, 좁은 모가지 하얗게 기다란 술병에

서 꿀룩, 꿀룩, 술이 거꾸로 토해진다. 비오리는 그것이 제 오장 속에 썩도록 고

인 말이라 생각하였고, 진의원은 저도 모르게 귓바퀴에 허연 궤털이 일어섰다.

그 소리가 꼭 아까 짚은 강실이의 맥 뛰는 소리로 들린 탓이었다. 굴룩, 꿀룩,

꿀룩, 꿀룩. , , , 탁 톡, , 톡 탁. 진의원의 등골에 진땀이 돋아났다.

이런 일이 있는가. 세상에. 이게 대관절 어쩐 일이란 말인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숨이 넘어가게 급헌 걸음으로 쉬도 안허고 달려와서 잘못 짚었능갑

. 그러지 않고서야 깔담살이란 놈이 어떻게나 잰 걸음으로 재촉을 허는지,

깜헌 밤길에 앞도 안 뵈이는디 긴장을 잔득 허고 와서, 아매 그래서, 내가 아차

잘못 짚었을 수도 있지. 아까 진의원은, 식은땀투성이로 혼곤히 반 정신을 놓아

버린 채 파리한 검불처럼 누워 있는 강실이의 맥을 짚었을 때, 천만 뜻밖에도

복중에 다른 맥이 또 뛰는 태맥이 잡혀, 순간 아찔하면서 뒤꼭지에 벼락이 쪼개

지는 것 같은, , 소리를 들었으니. 하마터면 그는 놀라서 고꾸라질 뻔했었다.

그야말로 그 태맥은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던 것이다. , 이런.

, 이럴 수가. 아니여, 아니여. 가만 있어 봐. 어디, 다시. 그는 양미간을 깊이 패

이게 찡기고는 두 눈을 꾸욱 눌러 감고, 심호흡을 몇 번씩이나 하며 맥을 다시

짚고, 다시 짚고 해 보았다. 그 옆에서 오류골댁과 기응은 마른 침을 바트게 삼

키면서 진의원 손끝만 숨죽이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긴장이 얼마나 팽팽하였던

. 그것은 사기가루 갬치 먹인 연실처럼, 방안의 공기를 수천만으로 날카롭게

쪼개어 실날 같은 칼날로 가르는데. 숨만 자칫 잘못 쉬어도, 고개만 까딱 잘못

돌려도, 눈동자만 비뜩 잘못 굴려도, 그 팽팽하게 당겨진 실낱의 예리한 칼날들

이 여지없이 숨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몇 백 번 몇 천 번을 고쳐 신중해도 모자라는 엄청난 일

, 퍼렇게 핏줄 드러난 강실이의 희푸르게 여린 팔목 위, 가지런히 모아 짚은

진의원의 네 손가락 끝 손톱 밑에서, 벌떡, 벌떡, 뛰고 있는데. 이것이 정말이라

면 천지가 개벽을 할 일이요. 만일 착오라면 그 진맥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태맥이라니. 그것도 다른 누구 아닌 오류골댁 강실이한테. , 참으로 요

상허고 괴이헌 일이로다. 계집아이 성장하여 큰애기 되고, 큰애기 나이 차서 남

의 집 부인 되어, 날 가고 달 가면 태중에 어린아이 당연하게 생기는 것. 그것은

저위로 왕후장상의 집안에 금지옥엽 귀한 따님 구슬 같은 뱃속이나, 아래로 오

막살이 장삼이사 무명색의 거친 베옷 한 자락 아래 고달픈 뱃속이나, 고루 공평

하게 나름대로 생명의 정기 일는 일이어서, 그 드러남이 천하에 마땅하지마는.

이것은 도대체 경우가 아닌 경우였다. 중언부언에 그 무슨 첨언이 가당치도 않

은 형상을 정면으로 맞붙들고 앉은 진의원은, 어느새 후들후들 속이 떨리어 말

문을 열지 못하였다. 마른 침이 아교가 되어 들어붙는 말문 대신 이마에 진땀이

배어나는 그를, 오류골댁 내외는 아예 숨을 눌러 꺼 버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말은 차마 못허겄는디. 강실이가 혼인하여 회임한 처지라면 이보다

더 순리로운 진단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규중의 숨겨진 쳐

녀로, 그것도 예사 집안 예사 사람 아닌 그네가 이처럼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을 부모 앞에 발설해야 하는 진의원의 감은 눈이 좀체로 쉽게 떠지지 않았다.

진의원이 어째 강실이를 모를 리 있으랴. 본디 그가 남원에 대물린 생업으로 한

약구구 광생당을 열어 놓고 있으면서도, 인근에서 찾아오는 손님들 못지않게,

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보다 더 속마음이 쓰이는 곳이 이곳 매안이

었다.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 몸에 병 없는 사람이 없어서, 하다못해 발바닥에 박

힌 티눈에서부터 귀때기와 손가락 발가락 그트머리 얼어터진 동상이나 고뿔에

배앓이를 비롯하여, 몸 안의 보이지 않는 오장육부 곳곳에 자리잡고 틀어앉은

그 많은 병의 갖가지 중상을 도무지 한두 마디 말로는 할 수가 없는 법인데.

아파서 찾아오는 사람은 재물이나 권세를 따로 묻지 않고 살피어 돌봐야 하지마

, 이 매안 이씨들의 크고 작은 병의 징후에 진의원이 참섭할 때는 매양 조심

이 되었다. 매안에서는 어지간한 속탈이나 짐작할 만한 질환들은 사랑의 약장에

비치된 약재로 화제를 내어 다스리고 했지만, 의원 손을 빌려야만 하는 질병에

는 잠원까지 사람을 보내어 진의원을 부르곤 하였다.

"그 사람이 제 윗대와 달라서 한량끼가 농후하지만, 진맥은 또 과연 진의원이라."

매안 사람들은 말했다. 그의 진맥은 인근에 선성이 높았다. 그래서 환자가 급작

스러운 증세를 보이거나 움직일 수 없는 중환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을 때,

는 화급하게 데릴러 온 사람들을 따라 곧잘 왕진을 나서곤 하였다. 밤길에도.

러는지라 일찍부터 매안 마을에도 걸음이 잦았으며 자연 이씨 문중 이 집과 저

집의 사람들 모습이나 체질, 성격, 그리고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과 병력들

을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기세는 하늘을 찌르며 성품은 대쪽같고, 현조가 분명

하여 그 후손으로서 학덕이 높은데다, 봉제사 접빈객에 촌치도 소홀함이 없는

엄격 후덕으로 좌우 사방 둘레에 '향내나는 양반'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그 고을

들을 이끌어 나가는 매안 이씨 문중에 병상 살피는 일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되

는 일이었다. 그런 연유에서만이랄 수는 없었지만 그는 매안을 오르내릴 때 평

소에도 사람들의 기색이나 행동거지를 무심한 듯 유심히 눈여기어 보아두곤 하

였다. 무릇 병이란 어느 날 어느 시를 예고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측 못

한 순간에 복병처럼 병처를 찌르고 할퀴며 후려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 닥

치기 전에 미리 그 사람을 세심하게 파악해 두는 것은 훗날 그 사람이 발병했을

때 여러 가지 자료로 긴요하게 작용되었다. 그러니 비록 집안 깊숙이 들어앉아

바깥 출입 안하는 강실이라 할지라도, 오며 가며 오류골댁 사립문간을 지날 때,

그네의 아리잠직 단아하면서도 온화 공순한 자태를 언뜻언뜻 아니 볼 수 없었

, 아리따운 맵시에 고운 머릿결 검은 윤기 자르르 뒷등으로 흐르는 연두색 저

고리와 연분홍 치마의 애달프게 스미는 빛깔을 아니 볼 수 또한 없었다, 그렇게

눈에 뜨인 모습만으로도 가히 매안 이씨 반가의 단려한 규수 분명한데, 난향같

이 번진 소문은 더욱 그윽하여 그 행실과 자채를 흠앙하는 칭송이 자자했건만.

이것이 대관절 어인 일인가. 그 바라보기 연연하고 꿈속같이 곱던 모습은 흔적

조차 간 곳이 없고, 이토록 창백하게 여위어 손만 대면 그대로 부스러져 버릴

것 같은 재의 형상이 다 된 강실이를, 진의원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네의 비장은 깊이 상하여 이미 말라 버린 상태였다. 노랗다못해 푸른 빛이 짙은

강실이의 안색에 놀란 진의원이 짚은 손 끝에 그 병맥이 역력하게 잡혀, 그는

그만 혀를 끌끌 찼다. 비장은 보통 비위라 하여 지라와 밥통을 하나로 쳐서 한

묶음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기능이 그만큼 서로 밀접한 때문인즉. 이처럼 비장이

상하였으니, 결코 밥을 제대로 먹었을 리가 없었다. 몸의 한가운데 달린 밥통 뒤

쪽에 둥그스름하면서 납작한 편원형으로 붙은 비장은 겨우 계란알 하나 정도의

크기이지만, 이 작은 주머니가 하는 일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다. 비장 주머니

안쪽 오목한 곳을 비문이라 부르는데 바로 이곳으로 몸 속의 동맥과 정맥이 직

접 들고나며 출입을 했다. 피의 순환을 하는 것이다. 심장에서 나온 피가 전신을

돌며 온몸에 자양을 공급하고, 쓸모없어 걸러진 찌꺼기를 걷어오는 길에, 가장

요긴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비장이었다. 맨 처음 사람이 생길 때, 아직 어

미의 뱃속에 담겨 있는 태생기에 벌써 그 주먹만한 몸에 비장도 같이 생겨 조혈

작용을 하고, 생후에는 슬모없는 피톨을 파괴하여 맑고 비옥한 피를 저장하는

비장. 여기서는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몹쓸 병원체를 물리쳐 부술 저항체

를 동시에 생산하면서, 골수의 조혈 기능을 조절하였으니. 심장이 허약하거나 잘

못된 사람을 치료할 때, 진의원은 막바로 심장에 약을 쓰는 대신 먼저 비장을

다스리고 손보았다. 그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사람이, 생각을 많이 하면 제일 먼

저 상하는 곳이 비장이었다. 그 상한 형태도 여러 가지여서 비장에 습기가 참

비습이 있는가 하면, 약하고 그냥 힘이 없어 무기력한 경우도 있고, 강실이처럼

말라 버린 경우도 있다. 이렇게 비장이 쪼그라들어 마르면 피가 마른다. 피가 마

르면 잠이 안 온다. 자려고 자려고 아무리 뒤척이고 애써도 끝내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은 더욱더 외곬수 한 곬로만 패이게 골똘해지니. 피가 마

르게 잠 못 이룬 아침에 무슨 밥맛이 있으리요. 전혀 먹을 수 없어서 숟가락을

들어올리면 놋내가 나고, 놋내에 비위가 돌려 울컥 숟가락을 밀어내 버리게 된

. 그러다 다시 밤이 와도 여전히 잠을 못 잔다. 그리고는 온몸의 피가 바작바

작 마르도록 골똘히 오로지 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병. 그것이 곧 상사였다. 상사

가 되면 비장이 마른다. 말하기 쉬워서, 사람 그립다고 죽기까지 하랴, 하지마는

'상사'라는 말이 '생각을 한다'는 것이니, '생각'이 깊으면 비장이 상하고, 비장

이 마르게 상하면 조혈을 제대고 못하는지라 피가 마른다. 피가 마르니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다. 아아, 무서운 일이다. 생각이, 그리운 사무침이, 사람을 능히

죽게 할 수 있다니. 진의원은 강실이의 맥에서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사를 읽

었다. 그런데다가 태맥까지. 이 무슨 당치않은 맥돌인가, 내가 벌서 늙었는가.

럴 리가 없는 일이 분명하여 진의원은, 잘못 헛짚은 것인가 하고 정신을 수습한

뒤 호흠을 정돈하고 침착하게 손가락을 모았다. 그럴 만한 자리에 그럴 만한 사

람한테서라면 모르지만, 하늘이 무섭지. 아니 어찌 내 손 끝에 이런 맥이 잡힌단

말이냐. 이게 누구라고. 이게 어뜬 집안의 어뜬 누구라고. 허 이런. , , ,

, , . 백 번을 고쳐 짚어 보아도 그것은 태맥이었다. 태아의 맥박이 진의원

손가락 놓인 강실이의 팔목 촌구맥의 촌 관 척, 척맥에서 피할 길 없이 감지되

었다. 척맥은 애기맥이다. 여인이 애기를 가지면,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당장 그

맥이 달라진다. 태아는 아무리 티끌같이 작은 알맹이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생명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 생명은 어미의 핏줄을 따라 같이 뛴다. , , ,

, , . 애기 안 가진 사람의 맥은 그와 달라서 톡, , , , , 고르고 일

정한 세기로 뛰는 것에 비하여, 아이 가진 맥은 태아의 맥박이 같이 뛰므로 이

중맥이 되어, 한 번은 톡, 강하게 뛰고 한 번은 탁, 약하게 뛰는 것이다. 비록 아

직은 핏덩이도 못되게 미미한 조내이나, 어미를 따라 제 맥을 찾아 뛰는 태아.

어미. 어미라니. 이 어인 일이냐. 강실이를 어떻게 지금 '어미'라고 부를 수가 있

단 말인가. 진의원은 털석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 옴짝없이 갇히

고 만 자신의 처지가 참담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의 입시울만 애터지

게 바라보고 있는 오류골댁 내외의 죄 없고 순박한 눈빛을 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은 진의원이 얼마가 지나도록 괴롭게 이마를 찡기고만 있자, 드디어 더 못 참

은 오류골댁이

"무슨 탈이 났으까요?"

묻고 말았다. 기응의 눈빛도 대답을 채근하였다. 이제 진의원은 더 어쩔 수 없어

오래 오랫동안 괴롭게 진맥을 하고나서, 진땀을 무섭게 말했다.

"암만해도 이건 태맥이라......."

그러고는 차마 무어라고 더 덧붙이지 못하면서 겨우

"비장이 몹시 말러서, 제가 보중익기탕을 한 번 써 볼랍니다. 그게 비장을 보허

고 약이 닿을 것 같그만요."

비장이 상허고 마른 것만으로도 강실이가 몸을 지탱하기 이미 어려운 지경에 이

르렀는데, 아이까지 들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앞앞이 입덧이 다 다른 마당

, 물 한 모금도 목에 못 넘기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우기 헤아릴 수 없을 지

경인즉. 어째 어제 아니고 오늘에야 기색하며 쓰러질 것이야. 강실이는 살았다

할까. 죽었다 할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의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루루

, 검은 하늘이 부서져 무너지며 집채만한 바위 덩어리로,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그 정수리 빠개지는 소리가 진의원에게도 역력히 들렸다.

까부터 온 방안을 수천만의 실날 같은 칼날로 그러며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긴

장과 침묵이 툭, 끊어졌다 칼날들이 쏟아졌다. 미동도 하지 않고 차라리 죽은 듯

누워 있는 강실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진의원은, 두 내외한테 하직조차 갖추지

못한 채 우물우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그의 일은 끝나기도 했으려니와 사

람의 심정 가지고는 그 자리에 더 머물 수가 없는 탓이었다. 일어서는 그에게

오류골댁도 기응도

"살펴 가시라."

는 말마저도 밀어내지 못한다. 먼 길에 왔다가 밤이 깊은 이 시각에 어찌 되짚

어 가겠는가, 여기 누추하지만 유하고 가라는 말은 더더욱. 오직 망연자실, 혼이

나간 잿빛 낯색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뿐. 겨우 밖으로 나와 구두를 챙

겨 신는 진의원의 흰 두루마기 뒷자락이 누가 잡아당기기나 하는 것처럼 얼른

돌아서지지 않았다. 저 지경이 된 연유를 알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그들의 앞에

벌어질 난감 참혹한 일들이 눈에 밟히게 선하여, 그는 어둠 속에서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 발걸음을 떼는 그의 귓전에

"진의원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류골댁 사립문간에 지키고 서 있던 안서방네였다. 공연

히 흠칫 놀란 진의원이 어깨를 한 번 부르르 덜며 짐짓 심상한 채

"어어, 춥다."

목소리를 꾸몄다.

"뉘시오?"

"저어, 이리 좀 들왔다 가시랑만요."

안서방네가 솟을대문 쪽으로 두 손을 내밀어 모시는 시늉을 하였다.

"누가?"

"저어...... 새아씨가 의원님 뵈입고 머 조께 여쭐 일 있으시단디요."

", 그렁가?"

뜻밖에도 효원이 대문 바깥 한쪽 옆에 나와 서 있는 것을 얼핏 본 진의원은 당

황한 기색을 띠며, 내외하는 자세로 몇 걸음 이만큼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서

방네가 그러는 진의원한테 낮은 소리로 무어라 이르자 그는 두어 걸음을 더 앞

으로 내디뎠다. 안서방네는 대문 옆의 효원과 이쪽의 진의원 사이에 섰다.

"가실 길이 가찹지 않으실 터인데 여기서 묵어가실 걸 그랬습니다."

효원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 낯빛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올시다."

""제가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 아까부터 나오시기를 기다렸그만요."

"무슨......"

"누구 시켜서 물을 말도 아니고, 걱정이 돼서."

"머이까요......?"

"진맥허신 이얘기를 들어보려고 그럽니다."

효원이 말끝을 내렸다. 그 음성에서는 대답을 우회하거나 눙칠 수 없는, 대답의

정곡을 꿰뚫어 미리 보고 있는 것 같은 위엄과 절실함이 느껴져, 진의원은 등골

이 찌르르 울렸다. 대답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순간적인 판단을 잘하지

않으면 아차 천 길 낭떠러지로 비끗 발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그는 자기도 모르

게 발부리를 안쪽으로 모았다. 피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말할 수도 없는 대답이

아닌가. 그런데 효원은 어둠 속에 어깨를 버티고 우뚝 서서, 대답하라, 하였다.

그 옆에 선 안서방네는 두 손을 웅크려 맞잡은 채 어깨를 옹송스리고, 진의원은

말문을 못 열었다. 세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밤바람이 으드드 떨리게 찼다.

진의원은 그 한기에 턱을 떨었다.

"짐작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 병이 무엇이든 제가 알아야 할 일일 테니 일러 주

십시오?"

"........짐작......이시라니요? 어떤.......?"

"제가 발설할 것이 못됩니다. 허나, 짚이는 바있으니, 그저 진맥 결과만 그대로

말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진의원 머리 속이 핑그르르 맴을 돌았다. 대가의 종부라 하나 아직 나이 젊고

거기다 여자인데도, 나이 훨신 더 먹고 외처 바람 많이 쏘인 남자인 자기가,

떻게 거역해 볼 수 없는 엄중함이 자신을 납작히게 눌러, 순간 어지러운 탓이었다.

"비장이 몹시 상해서 보중익기탕 화제를 냈습지요만."

"그러고요?"

", ."

"다른 맥은 없었습니까?"

효원이 자기를 쏘아본다고 진의원은 느꼈다. 자기의 둘레를 에워싸서 옭으며 흉

중을 꼬챙이로 꿰뚫는 것 같은 시선이, 사방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촌치의 어긋

남 없이 정통 꽂히는 서슬에 그는

"제가 잘못 짚었는가는 모르겄습니다만."이라고 말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쨌길래요?"

"태맥이라......"

야기가 써늘하게 등줄기를 훑어내리는가 싶더니 살갗에 소름 좁쌀이 쫘악 일어

섰다. 자기가 뱉은 말에 스스로 놀란 것이다. 효원의 어깨도 내려앉았다. 안서방

네는 오히려 오그린 채 움츠리고 있던 목을 번쩍 치켜올리며 효원을 바라보았

. 무슨 백척간두 단죄의 자리에서 풀려 나기라도 한 사람마냥 힘이 빠져 허청

허청 고샅길을 내려온 진의원은, 못할 일 한 사람이 되어 도무지 그 마음을 쉽

게 추스릴 수가 없었다. 본디도 강단이 있거나 지모가 약빠른 사람이 아니고,

류 남아, 흥이 많고 정이 많은데다 마음도 여린 데 있어 모질지 못한 그였으니,

그런 일을 한꺼번에 두 번 겪어, 다리에 힘이 빠졌던 것이다. 아이고, 내가 암만

해도 이 걸음으로 남원은 못 가겄고. 그렇다고 이 판국에 이기채의 사랑으로 들

어 묵을 염은 꿈에도 없는 그가, 뜨내기 나그네처럼 정거장 술막에서 돈 치르고

자고 싶지도 않아, 참 오래간만에 비오리네 주막으로 찾아온 것이다. 제가 나한

테 아마 원망이 깊으리라든가, 한 번 발을 다시 트면 그대로 길이 날 것이라든

, 그러고는 싶지 않다든가, 그것도 무방하다든가, 그 어떤 가닥도 추리지 않은

, 그저 남의 일인데 남의 일 같지 않게 자신이 그 복판에 서서 탈진이 되도록

정신을 써 버리고 난 지금, 텅빈 머리 속과 패어 나간 가슴패기를 어디 부드러

운 살에 부리고, 그 살로 온기를 얻어 머리 속 가슴패기를 채워 놓고 싶은 심정

으로, 그는 더 멀리 있는 누구한테로는 못 가고 매안에서 제일 가까이 닿는 비

오리한테 왔으나. 비오리는 비오리대로 제 할말이 응어리 많이 져 울혈되어 있

었고, 진의원은 진의원대로 위로보다 막막함을 술상에서 느끼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오시는 길이시오?"

나이 차이 스물한 살이나 졌지만 살을 알던 사이라 말은 맞먹는다. 비오리가 긴

사설은 뒤로 미루고, 진의원의 무겁게 질린 낯색을 찬찬히 살피며 묻는다.

"매안에."

"거그는 왜?"

"오류골댁 따님이 중환이드라."

"무신 병이 났간디요? 시집도 안 간 큰애기가 야밤에 남원서부텀 사람 불러오게

아픈 것 보먼 예삿병은 아닝게빈다이?"

"너는 몰라도 된다."

"자고로 병은 자랑허랬다는디 머 무신 병이라서 몰라도 되까잉?"

"별 것 아니라 그렇지."

"내가 무신 세 살 먹은 코흘리게요? 전후 사정 숨넘어가게 다급헝게 이렇게 불

러제키제, 쇠털맹이로 많은 날 다 두고. 훤헌 대낮 다 두고, 멋 헐라고 의원을

부른대? 에지간헝 것은 다들 집이서 약화제 낼 수 있는 냥반들이. 별 것 아닝

거이 아닝게 그렇겄지맹."

비오리는 지난 정월 대보름날 옹구네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건너 짚고 진의

원을 조이는데, 진의원은 아까 오류골댁에서 맞닥뜨린 촌구맥만으로도 머리터럭

뿌랭이마다 진땀이 맺힐 노릇이었고, 가까스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덜미 잡혔던

짐승마냥 한숨을 막 돌리려는데. 사립문간에서 안서방네한테 도로 붙잡혀, 솟을

대문 문간의 효원의 앞에 호령보다 더 삼엄한 추궁을 당하고는, 의원의 도리로

그래서는 안되는 비밀을 엉겁결에 발설한 뒤, 한편으로는 가책도 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제 종갓집 종부가 알어놨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벌어질 일이 금찍

도 하고, 이 어이없는 날벼락에 온 정신이 다 나가 버린 저 부모 내외가 가엾기

도 하고, 강실이 속내는 모르겠으나 수난치 않을 인생이 안쓰러워 마음 허물어

지는 끝이라, 이번에는 비오리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 재주로 물어도 결코

대답에 빠지지 않으리라 결심을 다잡았다. 대답이 곧 제 발 빠지는 늪이었던 것

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 웬 뒤통수인가.

"혹시 애기 섰습디여?"

"으엉?"

진의원은 뒤로 나자빠질 뻔하였다. 그 놀라는 모양을 말끄러미 보더니 비오리는

병의 전말이 짐작 간다는 듯 고개를 혼자 주억거렸다.

"너 베락 맞을래?"

"그른 말 했으먼 베락을 맞을 거이고 안 그러먼 안 맞겄지맹."

"사람 일을 그렇게 경망시럽게 말허는 것 아니다. 암만 농담이라도. 농담 끝에

살인난단 말. 듣도 못했냐?"

"아 누가 농담을 헌당가요?"

"그러먼 거 먼 소리여?"

"몰라서 묻는다요? 금방 자개가 다 말해 놓곤."

"내가 무슨 말을 해?"

"이이고오, 의원님. 입으로 허는 말만 말잉기요? 눈짓도 말이고. 낯색도 말이고,

목청도 말이고, 손짓 발짓 몸짓에다 제절로 풍겨지는 탯거리도 다 말 아니요?

내가 머 청맹과니 봉사간대 지 눈구녁으로 본 말도 못 알어들으께미? 아 의원님

은 머 누가 아푸다고 따악 와서 앉이먼, 살피고, 눈뚜껑도 뒤집어 보고, 입도 아

아 벌려 보고 안 그러요? 그런 것 나보돔 더 잘 아실 거인디 무단히 나를 갖꼬

머라제. 참말로 말을 안헐라먼 아조 깜쪽같이 딴 얼굴로 시치미 딱 띠든지. 그러

도 못해 놓고 나보고만 머래야. 머라기를."

진의원은 할 말이 없었다. 니가 술장사 몇 년 만에, 말허고 눈치만 늘었구나.

"오다 봉게 저어그 정그정에 새술막이 생겼드구마는 너는 갠찮어냐? 여그서 거

그는 한참잉게 상관없지?"

"주모가 이쁘답디다. 빡빡 얽어 갖꼬."

'빡빡'을 파내듯이 힘주어 말하는 비오리 새촘한 눈꼬리가 우스워, 진의원은 그

만 실소를 하고 만다.

"아앗따아, 웃을 지도 아네요잉? 여그는 머 웬수진 디 칼 꼽으로 왔간디 삼년

수삼 년 만에 옴서, 들이당짱에 어금니 까악 물고 말도 잘 안허고 장승맹이로

버티고 앉어만 있드니, 인자 웃소예? , , 내가 무신 죽을 죄 진지 알었네 기

. 그런디 나는 죄 진 일 없잉게. 머잉가 일이 나도 머 큰일이 났능갑다 했제.

오금이 안 떨어지게 낯색이 살벌허등만 어찌 그리 귀허게 웃었응게 비싼 돈 내

시오. 웃은 값."

"내야지."

"돈말고 말로 내시오."

"말이라니, 무슨 말?"

"돈보다 싼 말은 아니제."

"머이여?"

"그래, 맥 짚어 봉게로 애기 섰습디여? 얼매나 되 등가요?"

"그런일은 없어."

"없으먼 다행이고오, 있을라먼 있을 수도 있고."

"있을라먼 있을 수도 있다니?"

"왜 자개 말은 밀봉해서 애끼고 넘의 말은 공으로 들을하고 그러요?"

"무슨 씨잘데기 없는 소리를 어디서 얻어들었겄지. 넘들이 쓰다 쓰다 내부리고

가는 말, 빈 껍데기."

"알속잉가 빈 껍데깅가, 그 속은 암도 모를랑가?"

이미 대답을 말로 들을 필요가 없을 만큼 확연히 변하연 진의원의 안색을 볼모

로 잡고, 비오리는 빙글빙글 말의 주변을 돌았다.

"애기가 섰다먼 날짜끄장 내가 짚을 수도 있지마는 또 지천 들으께미 더는 못허

겄소."

비오리는 이제 그만 말 을 걷어 들이려는 시늉을 하였다.

"머이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여? 대관절."

"맥 나왔지요?"

진의원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의원도 아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똑같은 경우에 또 빠지다니. 진의원은 자괴감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효원도, 비오리도, 자기보다 먼저, 당사자인 강실이나 그 부모인 오류

골댁과 기응보다 먼저, 이 일을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던가. 이런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는가. 효원과 비오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릎 맞대고 앉을 일이

없는데, 매안의 원뜸 제일 높은 곳에 덩실하니 솟은 골기와 지붕 아래 깊숙이

들어앉은 새아씨도 알고, 고리배미 솔밭 삼거리 세갈래로 갈라진 난장 길목 주

막의 주모도 아는 일이라면,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단 말인가. 어쩐가 이것이

"헌데, 누구냐?"

"춘복이 아시오?"

진의원은 내가 오늘 밤에 죽을라는가, 싶었다. 사람이 하룻밤에 이토록 여러 번

을 한 가지 일로, 이마빡 돌기둥에 들이받는 것보다 더 꽈당, 꽈당, 아찔하게 놀

라는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는 도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 춘복이라니?"

"아 저 거멍굴에 농막 사는 떠꺼머리 춘보깅 말이요."

"아니......, , 너 시방 바른 말, 지 정신 갖꼬 허는 소리냐?"

"나는 안헐라먼 말제 헛소리는 안허요."

"그러먼, 그러먼 춘복이허고 오류골댁에 작은아씨가 정분이 났단 말이냐? 너 머

얼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여?"

"못 믿겄으면 춘복이한테 물어 봇시오. 에러울 것도 없제. 들으먼 펄쩍이나 뛰겄

그만. 하도 좋아서 청천 하늘에 대그빡 찧까 싶소예."

"아니 그러먼, 그 댁에 작은아씨가 춘복이를 그렇게 비장이 바싹 말러 온몸에 피

가 다 바트게 상사를 했드란 말이냐?"

"상사병은 딴 디서 났고."

"딴 디?"

"아먼요."

"어딘디?"

"숨 조께 쉬시요예. 숨이 가양 빽다구맹이로 목에가 걸렸네."

"말해 봐라."

"대실서방님이라요."

"누구?"

"상사도 기양 상사가 아니라, 일난 상사랍디다."

진의원은, 아악, 벌린 입을 이제 다물 기운도 없었다. 그냥 벌어지게 벌린 채,

만해도 내가 오늘 밤에 무엇에 씌였는가, 식은땀이 쫘악, 배어났다. 사람이 너무

갑자기 여러 차례 큰 중격을 받으면 우선 정신이 흩어지고, 몸에 기운도 따라

흩어지니, 그는 정신과 기운을 지금 너무 많이 써 버려 맥을 못 건질 만큼 허해

지는 것이었다. 그런 진의원의 뒷머리에 사람들 얼굴이 거미줄같이 얽힌다. 펀뜻

아까 원뜸의 대문간에서 본 효원의 모습이 칼날처럼 스친다. 그것은 어둡고 푸

른 칼날이었다. 효원은 진의원이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고는, 안서방네를 데불고

안채로 들어왔다. 건넌방에 함께 들어간 안서방네 얼굴이 온통 푸릇푸릇 멍든

것 같았다. 질린 것이다. 그런 안서방네를 지그시 바라보던 효원은 두 사람 사이

에서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소리로, 그러나 확실한 예감을 가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부터, 지금 이 밤으로부터, 단 한시도 놓치지 말고 작은댁을 지켜야 하네.

그 애기씨 걸음이 사립문 밖 단 한 발짝이라도 나오면 안돼. 절대로 어디 혼자

가시게 하지 말어."

"."

"방죽이나 뒷산 고목 근처에 행여라도 걸음허는가, 유심히 살피고. 안서방네 혼

자 그러기는 어려울 것인즉 콩심이랑 키녜, 접댁이 다들 알어듣게 일러서, 모두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영념해야 해. 순간에 큰일나니. 큰일나면 돌이키기 어려

. 저렇게 허약한데다가, 어찌 됐든 태중에, 일을 저지르면 그대로 변을 당허지.

그 애기씨 죽고 사는 것이 안서방네 손에 달렸네. 알겠지? 아이들한테는 아무

내색 비치지 말고, 다만, 작은아씨가 저렇게 몸이 편찮으시니 어디 혼자 다니시

면 위태로워 그런다, 라고만 하고."

"."

"낮보다 밤이 더 걱정이지만, 낮에도 방심하면 놓쳐."

"."

나이 수굿하게 늙어 고비를 넘긴 안서방네는 젊고 어린 새아씨 앞에 진심으로

부복하며 충정을 약조한다. 아아, 상전은 다르시다. 세상과 사람을 어찌 대해야

하는 것인지를, 이만큼 보여 주신다. 안서방네 이마에 공경이 어린다.

"사람의 목숨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매."

진창에 뒹굴어도 할 수 없다. 그 목숨과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보

다 산 사람을 우선 살게 해야 한다. 죄가 아무리 크고 벌이 아무리 무거워도,

숨보다 크고 무겁지는 않으리니. 그 모든 것은 일단 산 다음에 겪고 받을 몫의

절차일 뿐. 내 너를 증오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미루리라, 효원은 강실이의 목숨

이 제 목을 감고 엉겨드는 것을 느낀다. 네가 왜 나한테 얹히느냐. 효원은 숨이

막혀 그 또아리를 풀어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렁이처럼 감긴다. 떼어낼 수

가 없다. 이미 강실이는 남이 아니었다. 더욱이나 종시매 강실이는 철재의 당고

모로서, 아버지의 사촌누이. 무슨 일을 당하여, 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어 자

결하면, 이 좁은 매안골 항아리 안에서 끝날 일이 아니고, 천지가 좁다 하며 독

한 소문 흉악하게, 휩쓸고 다닐 터이니. 저 아이 아버지가 상피붙어, 제 종매를

죽게 했다아. 죄 없는 어린 아들, 창창한 앞날에 손가락질 기얹어서, 얼굴도 못

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집안에 벌어지면, 그 가문의 명예를

건지기 어려운 법. 철재를 살리려면 강실이를 살려야 한다. 집안을 보호해야 한

. 내 심중 같은 것은, 나 혼자 묶어야 한다. 효원은 밤이 깊어 이슥하도록 안

서방네를 나가라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다만 마주앉아만 있었다. 이마를 골똘

히 수그린 채. 어찌할 것인가.

 

 

25. 에미 애비

 

진의원이 마치 붙잡힐까 두려운 사람처럼 황황히 두루마기 자락을 걷으며 도

망치듯 일어서 나가 버리다, 방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 소리가 나게 졸아들었

. 졸아드는 침묵이 소주를 내린다. 거꾸로 뒤집어서 전을 봉하여 덮은 가마솥

뚜껑 꼭지에서 증류로 한 방울식 떨어지는 소주같이, 침묵은 오류골댁과 기응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그것은 검은 아교였다. 아교는 떨어진 자리에 돌처럼 굳는

. 굳어 버린 아교가 바위 덩어리보다 무겁다. 무거워 고개를 떨어뜨린 강실이

의 어미와 아비는 목에다 천근 돌로 만든 큰칼 둘러 쓴 죄인들마냥, 짓눌린 어

깨를 웅크린 채, 눈썹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손 발끝 머리카락 끝까지도 거멓게 굳어 버린 것 같기도 하였다. 숨조차 쉬지

않았다. 쉴 수가 없었다. 들이쉬는 숨마저도 돌덩어리가 되어 여윈 목에 걸리면

서 캄캄한 폐장 밑바닥으로 덜컥, 덜컥, 떨어지는 까닭이었다. 드디어, 폐장에서

목울대까지 차 오른 돌덩어리와, 졸아드는 큰칼로, 목을 조이며 여지없이 숨을

끊어 버릴 것만 같은 침묵이 컥, 맞부딪치는 순간. 기응은 소리 죽인 단말마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휙 고꾸라질 듯 강실아한테로 쏟아지는가 싶더니,

두 손을 움켜 와락, 그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아니, 왜 이러시오?"

기겁을 한 오류골댁이 기응의 팔을 나꾸어 잡으며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으나 기

응은

"."

거칠게 털어냈다. 잡색의 죽은 낯빛으로 사위어 눈 감은 채 미동도 하지 못하던

강실이는, 기응이 틀어쥔 멱살에 숨이 질려, , , 삭은 비명 같은 기침을 토하

였다. 그네의 멱살이 허공에 뜬다.

"아 말로 허시요오, 말로."

사태가 어떤 것인지를 어찌 모르리오마는, 제 그림자만도 못한 강실이를 채올려

일으키는 손아귀에 살기가 시퍼렇게 돋아 후둘후둘 떨리는 기응의 모습에 놀란

오류골댁이, 황급한 손짓으로 다시 그를 막으려 했다. 기응은 그네의 팔을 호되

게 쳐냈다. 뼈가 부러졌는가 싶게 아픈 팔을 한 손으로 감싸며 물러앉는 오류골

댁 눈에 기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던 노기로 앙분하여 터럭 뻗친

짐승처럼, 쥐어잡은 강실이를 갈갈이 찢으려는 것같이 비쳤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힘으로 강실이의 멱을 조이는 기응의 갈퀴손 손 등에 검퍼런 힘줄이 독에

차 불거지고, 검부라기 강실이는 그런 기응의 손목을 무망간에 부여잡았다. 그것

은 본능적인 몸짓이어서 틀어쥔 아비의 손아귀를 떼어 내려는 동작이었겠지만,

너무나도 기진한 손이라 백지장이 얹힌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찌 보면 아비 손

목을 감싸는 시늉으로도 보였다. 심지어는 제 손까지 합하여 아비와 함께 제 목

을 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고개가 되로 꺾이어 머리채를 떨군 강실이

의 희푸르던 낯빛이 졸린 목에 충혈되면서 가물어지고, 그네의 목줄디에는 바튼

심줄 등걸이 뻗쳐 선다. , .

"애 쥑일라고 그러시오? 손 놓고 말로 허라는데 왜."

"?"

말이라니. 하이구우, 말이라니.

"말로 해서 될 일이여, 이게."

죽어라, 죽어. 죽어어, 이년. 억장이 받쳐 자신의 앙가슴을 쥐어뜯는 대신, 강실

이 멱을 휘잡아 조이며 흔드는 기응의 튀어나온 두 눈이 핏발로 시뻘겋다. 피뭉

치 같다. 그것을 사람의 눈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한순간에 느닷없이 독한 살맞

은 산짐승이나 메도야지가 덩클덩클 붉은 선지를 가슴패기에에서 쏟으며, 온몸

의 갈기를 세우고는 피 젖은 두 앞발을, 잡을 것도 없는 허공으로 쳐들어 울부

짖는 처절함. 온 산이 다 무너져 내리게 울고 울어도 이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고, 제 복장 터진 창자를 움킨 채, 살 쏜 사람에게 덤비는 증오

와 살기가 무섭게 핏발 진 기응의 눈은, 순후 질박하던 모습을 간 곳 없게 하였

으니. 기응은 제 정신이 아니엇다. 그는 포효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방안의 닥달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 지나가던 누구라도

혹 듣게 된다면, 엎친 데 덮친다는 말로는 비유할 수조차 없는 곤욕이 밀어닥쳐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금니를 으드득, 부서져 갈아지게 악물고는

강실이 멱을 쥐어 흔드는 기응의 손아귀에, 강실이의 몸은 마른 잎 한 장같이

바스라진다. 그네는 이미 죽기로 작정을 한 사람 같았다. 그림자 우묵히 패인 그

네의 눈두덩은 혼이 나가, 한 번 감긴 이대로 다시는 떠질 듯 싶지 않았다. 재같

이 사윈 몸 여윈 목에 나무뿌리 앙상하게 솟구친 것처럼 뻗친 목줄띠만 그네의

뒤로 꺾인 고개를 버치어 주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사람의 기운이

나 본능적인 저항마저도 없는 모습에, 오류골댁은 그만 덜컥 겁이 났다.

"애 쥑이겄소예. 아 왜 목은 조르고."

더 못 참은 오류골댁이 벌떡 일어나 기응의 손아귀를 강실이 멱살에서 떼어 내

려 했지만, 기응은 한 발로 그네를 걷어차 버린다. 그는 끓어 터지는 분노를 질

정하지 못하여, 금방이라도 강실이를 때려 부수어 박살을 낼 것만 같은 기세로

다르쳤다.

"눈 떠라."

기응이 내리패듯 말했다.

"눈 뜨고 말을 해."

어디서 눈을 감고 있는 거냐. 눈만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눈만 감으면 아

무것도 안 보아도 되는 줄 아느냐.

"눈 떠."

그러나 강실이는 눈을 뜨는 대신 꺾인 고개를 모로 돌린다. 눈 감은 눈으로라도

아비의 눈을 피하는 것이리라. 그네의 이마에 시름없이 흩어진 머리올 카락이

헌한에 젖어, 흡사 검은 금 간 것만 같이 보인다.

"어떤 놈이냐."

도끼날을 박는 기응의 추궁에, 기울러진 강실 눈귀에서 습기 같은 눈물이 배어

난다. 그 눈물은 차마 흘러내리지도 못하고 머뭇머뭇 헌저레에 번지더니 그만

후르를 구른다. 힘없는 눈물이다.

"울 일을 왜 해."

울 일을 왜 해. 기응은, 어흐으응, 늑대처럼 오장을 토하여 우는 대신 잡은 멱살

을 치그어 올려 세우더니, 숨이 막혀 끊어지는 강실이를 여지없이 방바닥에 메

다박았다. 그리고는 어푸러진 그네의 창백한 흰 저고리 등판을 주먹으로 내리쳤

. . 소리로 무너지는 등판이 가슴 밑창가지 뚫려 빠져 버렸는가. 강실이는

두 팔을 내뻗은 채 움칠도 하지 않았다. 아이고, 아가. 오류골댁이 새노랗게 질

려 얼른 제몸으로 강실이를 덮는데

"비키라."

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내리친 주먹을 등판에 맞은 오류골댁은, 으윽,

명을 토한다. 엄천난 바위돌이 떨어지는 주먹이었다.

"이리 못 나와?"

기응의 눈에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핏발에 범벅이 된 불똥은 멍든 자주색으로

엉겨 튀어나오고, 단박에 강실이를 때려 죽일 것만 같은 주먹을 부르쥔 채 치켜

든 팔을 공중에서 떨고 있는 기응의 모습은, 보통때 단 한 번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신음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강실이의 좁은 등을, 엉거주춤

네 발로 엎드리어 어미몸으로 덮고는, 고개를 틀고 기응을 올려다보며 눈으로

애원하는 오류골댁 모습은 한 마리, 새끼를 감산 어미 개 형국이었다. 그것은 가

련하고 처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응은 그런 오류골댁을 끄집어 밀어 내동댕

이치고, 다시 한 번 그 주먹을 내리친다. .

" 말을 해라."

비명도 없이, 혼절한 듯 맞고 있는 강실이를 일으켜 앉힌 기응은 그네의 여윈

어깨를 잡아 흔든다.

"네가 이년, 나를 쥑일 셈이구나. 오냐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너는 살 수 있

으며 나는 살 수 있겄냐. 오늘 밤에 너 죽고 나 죽자. 어차피 내가 안 죽이면 문

중이 들고 나서서 온 동네 조리 돌리고 덕석에 말겄지. 안 봐도 뻔헌 일, 나 이

랬소오. 기달렸다가 망신허고 당허느니 쥐도 새도 모르게 이 방안에서 소문 없

이 죽는 게 백 번 낫지, 아이고호, 아이고호, 기가 차서. 아니 이게 웬놈의 벼락."

이란 말이냐, 소리를 소리를 다 맺지 못하고, 기응은 등잔대를 번쩍 들어올렸다.

매패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등잔대 꼭대기에 얹혀 있던 기름 접시가 방바닥으

로 떨어져 깨지면서, 쏟아진 기름 위에 심지의 불꽃이 후욱 번져, 삽시간에 널룽

널룽 불길이 울랐다. 방안이 화광으로 뒤덮인다. 기함을 한 오류골댁이 강실이가

덮고 있던 이불자락을 채들어 번개같이 불길 위에 던지며 혼비백산 그 위를 밟

고 뛰는데, 기응은 깜깜해진 방안 복판에서 으으으윽. 짐승 소리를 내며 울음을

깨물더니, 빈 등잔대로 바람벽을 후려치고는, 문짝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쳐 나와

버렸다. 그 바람에, 오류골댁 사립문간 토담결에 바싹 붙어 몸을 숨긴 채 집안

쪽을 유심히 사리고 있던 안서방네가 흠칫 올라 한 발 뒤로 물러 섯다.

"작은댁에 좀 내려가 보고 오게. 누구 눈에 안 띄게 조심해서."

효원이 시키는 말이 아니어도 건넌방에서 물러나오면 그리하려던 안서방네엿던

지라, 새아씨 분부까지 받은 터에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잰 걸음으로 어두운 대

문을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와, 아까부터 오류공댁 방안의 기척에 그네는 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고샅은 지나는 사람의 발짝소리 끊긴 지 오래인 한밤중

이어서, 시울을 맞댄 지붕과 지붕 아래  지문 덧문들이 어느덧 하나씩 둘씩 불

빛을 거두고, 솔리게 무거운 어둠만 밤의 허리를 넘어 정수리까지 차 오르는데.

오류골댁 장지문만 불길한 주홍으로 물들어 눈드고 있었다. 옹송그리고 서서 숨

죽이고 그 불빛을 바라보던 안서방네 눈에 벌떡 일어서는 기응의 그림자가 시커

멓게 보이더니, 이윽고 강실이를 멱살 잡아 채올리는 모습이며, 그네를 메다박는

그림자, 그리고 주먹을 들어 올려 내리치며 후려패는 정황들이, 말 소리 한 마디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소리 없는 가운데 너무나 선명하게 비치었으니. 우뚝 서

서 주먹을 든 기응의 검은 그림자는 주홍의 불빛 베혹 너머 두 눈 부릅뜬 사천

호아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만약에 그네가 종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저 안으로

달려 들어가 기응을 부여잡고 말릴 수 있었을까. 이 일은, 그럴 수는 없는 일이

었다. 그러기에 한 방에 있는 어머니 오류골댁조차도 속수무책 어쩌지 못하여,

만류하려고 매달렸다가 채이어 동그라지는 그림자를 안서방네는 애간장이 녹는

눈으로 동동거리며, 다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꼬. 어쩌고잉.

아이고, 작은아씨. 이 일을 어쩌까요잉.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하늘 아래 이 일은

그 누구도 어찌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이 일을 문중에서 알게 된다면,

금 이렇게 부모한테 맞는 것을 결코 모질다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몰매를 맞

, 조리를 돌리고, 마을에서 쫓겨나야만 할 것이다. 강실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응도 오류골댁도 동네에 남아 얼굴 들고 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닌가.

안의 향약에

""부모에게 불손한 자.""형제끼리 싸우는 자." "가정의 도리가 어지러운 자."

를 모두 조목조목 밝히어 극벌에 처한다 하였지만, 그 극상벌 중에서도 무섭게

준엄했던 것은 행실에 관한 것이었으니.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예의를 모르고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

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중에 첫재는 유부녀를 겁간, 간통하는 자였으며,

둘재는 수절하는 과부를 유혹, 위협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게 하는 자요. 셋째

는 상민으로서 양반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는 자였다. 그리고 다음은 젊은 사

람으로서 마을의 어른을 욕되게 하는 자였고, 도 일가친척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자를 엄벌하였다. 그리고

"간음한 자." "행실이 부정하여 마을의 기풍을 더럽히는 자."

를 모두 혹독할 정도로 삼엄하게 다스렸다. 이 사람들은 모두 향약에 정한 극벌

을 받았으며, 마을에서 엄격하게 소외시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는 우물물

을 길어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불씨도 빌려 쓰지 못하게 하였고, 말도 서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치지 않는 자는 영구히 마을에서 좇아내 근처에는 얼

씬거리지도 못하게 하였다. 조리를 돌리고, 심지어는 덧석말이 몰매를 치다가 과

하여 그만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세절목들을 다 합하여 뭉친다 하

더라도 지금 강실이가 당한 참절 비절 하나만 할 것이냐. 아녀자의 몸가짐이란

출가한 여인도 남 보는 데서 남편과 상없이 마주보고 웃으면 흉이 되는 법인데,

설령 범절이 서릿발 같은 집안 아니라 한들, 세상의 상리가 어디 시집도 안 간

큰애기가 아이 배어, 그랬노라, 할 수가 있단 말이가. 과연. 입에 담기도 해괴하

고 듣기에도 부끄러운 일 아니리오. 하찮은 목숨 함부로 뒹구는 길가의 버들이

나 담 밑의 꽃인 노류장화로서, 아무나 지나는 손마다 만지고 꺾는 계집이라면

혹 모르겠거니와, 그에 견주기조차 외람되고 차마 못할 바가이 작은아씨, 애기

. 서슬 푸른 매안 이씨 문중의 종가에 빙옥 같아야 할 지친이, 이 무슨 망측한

망행을 저지른 것이랴. 드러나면 날벼락이 천지를 맞부딪쳐 부싯돌을 칠 것이요.

그 가운데 강실이가 살아 남기 어려운 것은 불속을 들여다보듯 자명한 일이었

. 구구한 말이 차라리 구차한 이 마당에, 당사 본인 하나 망신하고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온 문중이, 인근은 물론이고 세상사람들로부터

"저 집안이 저러하다."

비덕, 비도로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니. 저 한 몸 잘못 가누어 이와 같은 참악

지경에 이르럿으면, 마땅히 그 본인은 칼을 물고 자결을 하거나, 목을 매어 죽거

, 욕되고 죄 많은 목숨을 부끄러이 끊는 것이 오직 당연할 뿐이고, 부모 또한

그와 같은 자녀를 살려 두어서는 안될 일이리라. 아무리 종의 아낙으로서 신분

이 낮다 하지만, 본데 있는 가문의 추상 같은 상전을 모시고 한평생의 뼈를 바

치며 일거수 일투족 조심스럽게 헤아려 살아온 안서방네가 그만한 경우를 짐작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래서 그네의 가슴은 더욱 오그라지게 조여들고, 애가 타

서 입술이 바작바작 마르는 것이었다. 그네는 사립문간에 남모르게 숨어서 오류

골댁을 지켜보면서도, 행여 누구 지나가다가 불빛 비치는 주홍의 창호지 덧문에

벌어지는 검은 그림자의 형국을 보아 버리면 어찌하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말소리 한 토막도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들리는 것보다 더 역력하게 방

안 정경이 눈에 보이는 탓이었다. 그러다가, 기응이 강실이를 내려치는, 퍽 소리

만큼은 안서방네한테도 들려 그만 저도 모르게 가슴을 쿡, 오그리고, 오그리고

하였는데, 별안간 그림자가 기우둥 흔들리더니만 덧문의 불빛이 출렁하면서 순

식간에 선홍으로 화악 일어나다가 황급히 새까맣게 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는 장작개비라도 거칠게 내던져 패대기치는 듯한 소리가 바락을 꽈당, 울리면

, 기응이 문짝을 박차고 뛰쳐 나온 것이다. 기응은 덫에 가슴을 치어 짓이겨진

짐승처럼, 우우우웅. 터지려는 울음을 꼭 안에다 틀어 넣으며, 사립문간 살구나

무 검은 둥치를 붙움켜 글어안고는. 어우우웅. 머리를 부딪드리었다. 어둠 속에

먹진 피가 어둠보다 더 짙은 먹빛으로 튈 것만 같은 몸부림으로 울음을 삼킨 채

으깨어지도록 나무 둥치에 머리를 부딪고 부딪뜨리는 기응의 모습은, 감히 엿보

는 것이 참람할 만큼 참혹하였다. 차마 그 자리에 더 서 있지 못하고 안서방네

는 자리를 떴다. 하늘도 무심허고, 천지신명도 무심허시제. 인자 어찌 살고. 인자

다들 어찌 사실랑고. 어찌헐 거잉고. 떨어뜨리면 발등 깨지는 쇳덩어리 무겁게

아슬아슬 붙들어 움켜안고 자갈밭 가는 사람처럼, 안서방네는 두 팔을 깍지 끼

어 가슴을 붙움킨 채 비척비척 종택의 행랑으로 올라가는데. 전주에 일이 있어

출타하였다가 밤 늦어서야 매안으로 돌아온 기표가, 이기채의 사랑에 들러 몇

가지 숙의할 것들을 서로 말하고는 이제 수천댁으로 내려가려 막 솟을대문을 나

서고 있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그를 못 알아 볼 안서방네가 아닌지라 황망히 허

리를 굽혀, 이제 가시느냐는 표시를 하자 기표는 의하다는 듯

"어디 갔다 오는고?"물었다.

"예에."

당황한 아서방네는 허리를 더욱 깊이 굽히며 별일 아니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기표의 눈빛은 안서방네를 차갑게 훑어내렸다.

"예에라니. 예를 갔다 온단 말인가?"

"아니, 저 그냥. 마실 조께."

"누구한테?"

"예에, , ........아랫몰 앵두네."

""앵두네?"기표는 칼침 꽂는 음성으로 안서방네 말을 다잡아 되받았다.

"갔다가 기양 저물엇그만이요."

"참 한가한 사람이로구만. 오늘 저녁에 집안 우환이 있었는가 보든데. 무슨 정신

에 아랫몰까지 마실을 다닐 수 있는고? 암만 종이라고 심정 스는 것이 그래 가

지고서야."

기표는 못박는 소리를 뱉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었으나 일부러 그처럼 모진 말

을 한 것은, 혹 그 말을 듣고 욱성이 치밀어 억울한 김에 어떤 엉뚱한 속내 이

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린 일침이었다. 아무래도 안서방네

기색이 어디 한들한들 마실 갔다 오는 사람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또 안서방네

는 그렇게 밤 이슥한 시각에 삼경이 가깝도록 놀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었고,

럴 수도 없는 처지여서 기표는 내심 수상쩍게 생각한 것이다. 집 안팎 대소가와

문중은 물론이고 아랫것들이며 마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결코 허술히 보지 않

는 것이 기표였다. 그는 사람을 마나면 누구라도 그저 스치는 듯 지나치면서도

날카롭게 일별하여 기색을 살피고 그 행동거지를 눈여겨 보아 두었다. 그럴 때

그의 눈빛에는 섬뜩하게 푸른 비늘이 일엇다. 사람들은 대개 기표의 그 찌르는

듯 차가운 시선을 맞바로 못 보고 우물쭈물 피하거나 두려워하였다. 그런 기표

가 안서방네와 마주친 것이다. 가슴이 갈고리에 찍힐 것처럼 불안하게 툭탁툭탁,

뛰는 것을 가까스로 누르며, 흔연한 척 허리를 굽히고 있는 안서방네 등골에 식

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다행히도 기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묻거나 채근하지 않

고 휙 소리가 나게 그네를 지나쳐 고샅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다행일 수만은 없

을 것이, 기표가 수천댁으로 가려다가 오류골댁 사립문간을 들여다볼 수도 있기

대문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안서방네는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기표의 뒷모습을 숨죽이어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고샅으로 내려가던 기표가 홱

몸을 돌려

", 무엇 보고 있느냐."

고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꿰뚫어 노려볼 것만 같아서, 더는 거기에 서 있

지 못하고 후들후들 다리가 떨려 그만 행랑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무사히, 그저

무사히. 천지신명이 굽어살피사 그저 오늘 밤만 조께 아무 탈 없이 지내가게 해

주옵소사. 그네는 중얼중얼 빌었다. 어째서인지. 이 불길한 오늠 밤의 저 측은

참혹한 정경만 들키지 않는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무슨

수가 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날 밝아 해 뜨면 온갖 재앙도 악운도 마치 몹쓸

꿈 악몽에서 깨어나듯, 한순간에 스러지고 없어질 것만 같았으나. 기표는 안서방

네 염려했던 대로 오류골댁 사립문간에 발을 멈추어 섰다. 오늘 저녁 뜻밖에도

강실이가 큰집 장독대에서 쓰러져 혼절했었다는 말을 이기채의 사랑에서 들은

터라,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되어, 만일 아직 잠들지 않았다면 잠시 들여다보고 갈

것이요, 불이 꺼져 있으면 그냥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류골댁 방문은,

방문마다 불이 꺼져 집안이 먹장 같은데, 기응이 살구나무 둥치에 머리를 부딪

뜨려 박으며, 우우우웅. 무엇인가를 견디지 못하여 몸부림으로 오장에서 틀어오

르는 울음을 억누르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놀란 기표가 강실이 얼굴을 펀뜻

떠올리며

"이 아이가 죽었는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가, 캄캄한 방문짝을 밀어젖히고 오류골댁이 더듬더듬

댓돌 위에 벗어 둔 신을 꿰어 신더니 기응에게로 다가왔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기표는 얼른 마당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어둠 속에 보아도 오류골댁

이 처연히 흐느끼며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 이게 대

관절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왜 이러시요오. 진정을허계야지. 이런다고 무슨 일이 된답디여."

오류골댁이 눈물 머금은 음성을 낮추며 기응의 손을, 붙안고 있는 나무둥치에서

억지로 뜯어 내었다. 그리고는 잣니의 등을 돌려 둥치에 대고, 기응을 두 팔로

막는다. 기응은 오류골댁을 밀어내려 하였으나 오류골댁도 전력을 다해 버티고

있어 뜻대로 안되니, 기응은 그만 땅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는 숨길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두 무릎에 묻는다. 그 옆에 웅크리고 따라

앉은 오류골댁은 아무 말이 없다. 다만, 그에 함께 우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몹시 비밀스럽고 은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무슨 일이 난 것일까.

저토록 처절하게 괴로운 일이라면 한밤중 아니라 더한 시각일지라도 큰집 사랑

이나 자기 기표한로 달려올 것인데, 그러지도 않으면서 내외 서로 울고만 있

다면. 아직 죽지는 않았으나, 입에 담기 끔찍하게 무서운 무슨 병에 걸린 것일

.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하마터면 기표는

"크으흠."

기침 소리를 내며 오류골댁 마당으로 들어설 뻔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기응이

침음하여 탄식을 토하였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일을 당허지 말어야 하는 것인다......자식 키워서 이런

꼴을 보자면 도대체 어뜬 시러베아들놈이 자식을 낳고 기르겄는가.....뼛골 녹게

딸자식 기른 보답으로 이런 날을 보네 그려. 자식이 아니라 웬수라더니, 웬수라고

어디 이런 웬수가 또 있을까."

허이구우, 기응은 고개를 쳐들고 별들마저 빛을 숨긴 음 이월 구름 덮인 밤하늘

을 넋빠진 사람처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청천에 벽력이 이런 것인가......."

오류골댁이 겨우 그 한 마디를 대꾸하고느 더 말을 못 잇는다.

"저걸 죽여야지 어찌 살려 놔. 여기서 무슨 골을 더 볼라고......"

기응의 목소리에 심지가 박혔다.

"다 해도 죽인다는 말은 마시오. 부모 말이 문서라는데."

"문서 아니면 저년이 살어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만 알고 나만 알고 감쪽

같이 숨겨질 일이라면 나도 귀신을 꾀어서라도 감추어 보고 싶지마는, 그렇게

될 일이 아니잖은가 말이오. 벌서 우리말고도 진의원이 아는데다, 그 입은 또 어

떻게든지 막어 본다 허드라도 저 배를 어쩔 것인가. 저 배를"

거기까지 말하던 기응이, 다시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가누지 못하고 주먹을 부

르쥐었다. 갑자기 아까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처참한 배신감에 휩사인 그

의 턱이 덜덜 떨린다. 그의 전신을 뒤집으며 어오르는 것이 증오인지. 억울함

인지, 원통함인지, 그는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뒤범벅을 모조리 뒤집어쓰고도 다

른 말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오욕스러움이 기응을 사로잡아 뒤흔들었다.

"저것이 말을 해야 사정을 알지."

"기왕에 저질러진 일인데, 어떻게든 수습을 해 봐야 안허겄소? 아무러면 사람 사

는 세상에 무슨 수가 있어도 있지 죽으란 법만 있을랍디여? 내일 저 애 정신 들

면 차근차근히 물어서 사람 살릴 궁리를 해 봅시다. 부모가 나서서 소문 내는

꼴 짓지 말고,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려야지요. 까닥 잘못허면 줄초상 날 일이

. 온 집안 문중에도 다 망신이고."

"똥칠이지."

똥칠, 이라는 말은 기표에게도 선명하게 들렸지만, 두 내외 주고받는 말은 두런

두런도 아닌 낮은 소리에, 은 한숨과 진 눈물이 섞여 있어서 토담 너머 사립

문간 고샅에서에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짐작으로 참괴할 일이 생긴 것

만은 알 수가 있었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평소의 성품대로라면 성큼 마당 안으

로 들어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대뜸 정면으로 물어 볼 일이었으나 그는 애써 참고 발길을 돌린다. 지금

저 두 내외의 하는 양으로 부아 말로 못할 충격이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은 분명

하지만, 야밤중에 시숙이, 울고 있는 제수씨 앞에 내정돌입처럼 들어서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탓이었다. 기응이야 동생이니 무관히 여긴다 하더라도. 내일

불러 물어 보리라. 기표가 수천댁으로 걸음을 떼어 옮길 때, 안서방네는 은밀히

건넌방에 들었다. 뒷마루로 소리 없이 올라와 문고리를 당긴 그네는 아직 잠들

지 않고 있는 효원에게 귓속말로 오류골댁 정황을 일러 전하였다. 효원은 무겁

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신중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안서방네, 오늘 밤에는 잠들지 말고 작은댁 좀 자꾸 내려가 보게. 새벽까지.

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되네."

고개를 수그리고 한 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알았다는 시늉을 하고는 중마당을

벗어나 중문을 나서고 바깥마당을 벗어나 솟을대문을 나서서, 공연히 하늘 천기

를 살피려는 사람인 양 사방을 둘러보다가 다시 행랑으로 들어오고, 그랬다가

잠시 후에 또 나가 보고, 무슨 발자국 소리 인기척이 고샅에 나지 않는가. 안서

방네는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그야말로 온몸의 터럭을 모두 바늘같이 곧추세운

것이다. 그러면서 칠흑의 밤이 겨우 한 겹 벗기어져 먹빛 속에 검푸른 새벽이내

가 귀기로 돋아날 무렵, 지금 막 일어나서 밥하러 나간다고 하기에도 이른 시각

인데, 대문간에 나와 서서 위이 고샅을 한번 둘러보고, 오류골댁 희미한 사립문

간과 아직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살구나무 검은 가지에 눈을 주던 안서방네는

얼핏 무슨 흰 그림자 같은 것이 눈에 스쳐, 저수지 청호로가는 쪽을 직감으로 바

라보았다. 어슴푸레 희마한 윤곽만을 반공에 드러내며 잠에서 깨지 않은 지붕돠

돌담 토담들이 끝나는 곳에서 휙 돌아가는 모퉁이로, 그 흰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 모퉁이는 저수지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작은아씨. 그러먼 그렇제

내 이러실 중 알었제. 안서방네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손에다 쥐어들고

정신없이 그 그림자를 뒤따라 쫓아갔다. 발걸음이 공중에 떠서 헛디뎌지는데다

후둘후둘 다리가 떨려 모르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잡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온 밤을 꼬박이 긴장하여 새운 끝에, 참으로 그런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 염려하고 지키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려 하니. 온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고, 누구 하나 깨워서 데꼬 올 것을. 나 혼자 어쩌꼬. 내가

이렇게 걸음이 늦은디, 나보다 저렇게 앞서 가시다가 아차 물에 빠져 버리먼,

가 혼자 어치케 건져야 옳이여? 아 이렇게 따러만 가먼 멋 헐 거이냐. 이런 미

련 곰통이. 헐 수 없제. 인자는. 어서어서 놓치지 말고 따러가는 수배끼. 안서방

네는 숨이 턱에 차서 모퉁이를 잡아 돌고,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내달렸으나,

실이는 벌써 물안개 오르는 저수지 제방에 아득히, 사람 아닌 것처럼 희미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부르먼 놀래서 외나 더 일을 빨리 저질르실랑가도 모

릉게로, 하이고, 이놈의 다리, , , 얼릉 갖, 얼릉 가. 안서방네가 걸음을 땀이

나게 재촉하고 잇는데, 강실이는 허이연 넋이 물가에 안개로 어린 것같이 스러

질 듯 망연히 서서, 멀고 먼 물 언저리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네의 눈앞

에 청호의 저수지 무섭게 고요한 물빛은 수면을 하늘에 두어 하늘을 그대로 되

비치고 있으니. 이 물에 들면 그곳은 하늘이 될 것인가. 강실이는 제방에 선 채

로 물끄러미 희부윰하게 트여오는 노적봉과 벼슬봉 능선 너머 하늘을 바라보다

, 그 산 능선 그림자 어둡게 잠기어 깨어나는 호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월 아짐 이 물 속에 몸을 던지시던 그 순간은 어떠하셨을까. 강실이는 인월댁의

흰 무명 소복을 떠올려 생각하였다. 평생토록 돌아오지 않는 지아비를 애오라지

기다려 서러운 옷 흰 치마 흰 저고리 입고 사는 아짐. 떳떳하신 아짐. 그분이 이

곳에 몸을 던진 것은 나같이 더럽고 처참한 욕 아니시었으리라. 살아 쓸데없다

하고 목숨이 부질없어 버리려 하셨을 뿐이리라. 허나 나는 살어서는 안되어서

나를 버리려 하니. 내 비록 죽는다 하여도 이 욕이 씻기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 당하면 더 큰 욕이어서 나는 지우려 하는 것이라. 청암 할머니, 열아홉에 홀

로 되시서 이 집안 이씨 문중으로 시집오신 후, 그 한세상을 기울려 이루어 놓

으신 저수지. 이 장하고 깊은 물에 나는 나의 쓸모 없는 몸을 던져, 그 맑으신

뜻을 더럽히게 되겠구나. 살아 생전 그토록 강실이를 귀애하시던 청암 부인의

얼굴이 호면에 떠오른다. 정월 초하룻날 세배를 하러 원뜸에 가면 완자살창 은

은한 안방에서 모반에 엿이며 강정 정과들을 담아 내주시던 할머니. 그리고 나

붓이 분홍치마 자락 봉긋하게 부풀리며 세배를 올릴 때, 그다지도 어여뻐하여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거두지 않던 청암부인. 아아, 할머니. 나 죽으라, 미리 알

고 이 깊은 저수지를 파 놓으셨더이까. 강실이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흘러내리게 둔 채로 두 발을 담았던 신을 벗어 한쪽에 나란히 놓은 뒤, 흰 버선

발을 곱게 모으고 섰다. 그리고 두 손을 맞잡아 이마까지 올린다. 누구에게 하는

절일까. 호면에 비친 청암부인, 아니면 이승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니면 저승의

알 수 없는 사자, 아니면 떠올리기 서러운 그 어떤 이름. 그도 아니라면 비록 짧

았으나 그 몸을 빌려 이승에 머물다 가는 자기 자신에게 하직인사로, 또 그도

아니라면 그저 다만 이제 자신의 목숨을 받아 줄 이 푸른 물에게일 것인가.

실이는 청호 저수지 푸르고 음산한 물가에서 처연히 누구에겐가 마지막으로 큰

절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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