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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권 (14)

카지모도 2022. 9. 18.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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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교리가 승소비전의 급한 길이라 감영에서 감사를 만나 하룻밤을 지낸 외에

는 별로 지체없이 역마다 역마를 갈아타고 함흥을 떠난 지 십여 일 만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교리가 홍화문 안에 들어와서 우선 거접할 곳을 전날 관

주인의 집으로 정하고, 친족과 친구에게 기별하여 입을 관복과 부릴 하인과 탈

말을 빌려온 뒤 예궐하여 숙배하고 유순, 김수동 이하 시임재상과 박원종, 성희

안 이하 정국공신들에게 문후하고 그 외에 친척 고구를 심방하였다. 이리하여

이교리가 분주히 몇 날을 지내는 동안에 재생한 사람으로 대접도 잘 받았거니와

백정의 사위 노릇하던 이야기를 싫도록 되풀이 아니하지 못하였다. 이 며칠 동

안에 이교리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반정 당시의 자세한 이야기를 얻어듣게

되었다. 첫째 반정할 꾀는 성희안에게서 시작이 되었는데 성희안이가 이조참판

으로 연산주의 총애를 받다가 일조에 낙직된 뒤에 꾀를 내어서 박원종과 연락을

맺어 가지고 거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과, 구월 초하룻날 정밤중에 의병들이 훈

련원에서 모이는데 이 소문을 빗밋이라도 들은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훈련원

으로 몰려들어서 길이 멜 지경이었다는 것과, 또 초이튿날 식전에 창덕궁앞 파

자교 근처에 의병이 결진하엿을 때 박원종이 부채를 들고 지휘하는 것이 대장

같아 보이었다는 것을 이야기로 들었고, 군사들이 잠저를 옹위하러 갔을 때 그

때 진성대군이던 지금 전하께서 무슨 다른 변이 난 줄로 알고 자결하려고 하셨

는데 그때 대군 부인인 신씨께서 말머리가 집안으로 향하면 무슨 변이 난 것이

지만, 말머리가 밖으로 향하면 보호하러 온 것이니 조금 참으시라고 말렸다는

이야기와 공신들이 신씨의 아버지 되는 신수근이는 죄가 있다고 죽이고 죄인의

딸을 왕비로 두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여 고정을 못 잊어하시는 전하를 우기어서

왕비를 폐하게 되었는데 대전에서는 지금도 항상 중전을 생각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연산주가 궁에서 쫓겨나올 때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이 홍포자락

을 적시더라는 이야기와 연산주 부인이 궁문 밖을 나올 때 비단신이 발에 붙지

아니하여 헝겊 오라기로 신발을 동이었더라는 이야기와, 청파 무당의 집에 나가

서 자라는 전날까지 세자이니 대군이니 하던 아기들 중에 어린아이 하나가 오늘

저녁에는 꿩고기 반찬을 왜 아니 주느냐고 물어서 연산주 부인이 눈물을 흘리더

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시임 영의정 유순이는 반정 당일에 진중에 불려와서 어

찌할 줄을 모르고 박원종을 보며 영감이 용상에 앉으려오? 성희안을 보며 영감

이 용상에 앉으려오? 하였다는 웃음거리 이야기도 얻어들었고, 시임 우의정 김

수동이는 공신들이 반정할 일을 알리고 나오라고 한즉 처음에는 목을 내어밀며

베어가라고 하고 진중에 나온 뒤에도 대체를 잘 잡더라는 칭찬하는 이야기도 얻

어들었다.

이교리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에 이래저래 개연한 맘을 금치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어느 시골로 내려가서 봉단과 같이 일생을 안온하게 지내려는 생

각이 불현듯이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직 상소 한 장을 올리었는데, 상소의 대

지는 아래와 같았다.

“신이 비록 전고에 드문 은전을 입사와 다시 천일을 우러러보게 되었사오나 국

법을 범한 죄는 도망할 길이 없삽고, 또 화를 겪은 뒤로는 모든 세념이 사라져

서 은퇴하올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옵서는 천지하해와 같은

도량으로 신의 벼슬을 갈아 주시기를 바라오며, 또 신이 북도로 도망하와 구명

도생하옵노라고 천인의 딸과 육례를 갖추었삽는데 지금 데려오자 한즉 신 같은

불사한 것도 조신의 하나이라 전하의 조정에 부끄럼을 끼치올까 두렵삽고 버리

자 한즉 고를 같이 하고 낙을 같이 아니하옴이 인정에 어렵사올 뿐 아니라 신이

어리석사와 서로 버리지 않기를 맹약까지 한 일이 있사오니 천지부모는 구구하

온 사정을 내리 살피사 신이 물러가서 천인의 안해와 같이 일생에 성대를 구가

하옵소서. 신은 황공함을 무릅쓰고 말씀을 아뢰옵나이다.

 

3

이교리가 사직 상소를 올리던 이튿날, “알았다. 사직은 허락치 아니한다” 는

뜻으로 간단한 비답이 내리었다. 이교리가 며칠 뒤에 다시 상소를 올리리라 마

음 먹고 있는 중에 홍문관 하인이 나와서 번을 들어달라고 말하였다. 이교리가

“나는 사직하려는 사람이라 번을 들지 못하겠은즉 다른 양반께 가서 보아라”

하고 거절한즉 그 하인은 “다른 양반이라니요? 한바탕 줄달음박질을 치고 나으

리께로 왔습니다. 나으리가 못 드신다면 오늘 또 맷복이 터지는 겁니다”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교리가 “그러면 네가 오늘 내 아들이란 욕을 많이 하였겠

구나” 하고 웃으니 그 하인은 조금도 황송하여 하는 모양도 없이 “황송합니다

만 나으리 아시다시피 번들라고 해서 아니 드는 양반은 모두 내 아들이지요”

하고 역시 웃었다.

“지금 나으리가 누구냐?” “장교리 나으리입니다. 나으리 아시겠지요? 장돼

지라고 돼지같이 생긴 양반이에요. 그 양반도 화는 나겠지요. 처음번에 아흐레동

안 장번입니다. 소인들이 아무리 여러 댁을 쫓아다니어야 돼지가 좀더 들게 내

버려 두라고 하고 번을 갈아 주시지 않습니다그려. 소인들만 죽어나지요. 그 돼

지 같은 양반이 매끝이 되어요. 소인들이 날마다 그 양반의 화풀이를 받느라고

참말 죽을 지경입니다. 내 아들이란 욕마디로야 셈이나 됩니까? 또 오늘 저녁에

도 번을 갈아 주시는 나으리가 없고 보니 소인의 매는 떼논 당산입니다. 여보십

시오, 나으리. 사직을 하시더라도 그 전에 오래 계시던 홍문관에 한번쯤은 들어

와서 보시고 사직하시지요”

이교리는 하인의 말에 맘이 솔깃해져서“그래라, 오늘 저녁 한번 번을 들어

주마” 허락하게 되었다. 이교리는 장교리를 만나서 괴 이야기나 하고 한번 웃

으려고 하였더니 장교리는 장번 끝에 번을 갈아 줄 사람이 들어온 것만 다행하

게 생각하며 총총히 수인사하고 나서 “처음에 멋모르고 선뜻 번을 들지, 알고

는 여간 맘 아니 가지고 들기 어렵겠습디다. 이번에 아흐레 동안 사람이 갑갑해

서 죽을 뻔 하였소이다”하고 도야지 같은 얼굴을 치어들고 한번 씽긋 웃고는

총총히 나가버렸다. 그날 밤에 이교리가 홍문관에 번든 것을 위에서 알게 되었

다. 이교리는 편전에 불려들어가서 북도에서 고생하던 일을 일장 이야기하여 아

뢰고 나중에 상소의 대지를 되풀이하여 사직할 뜻을 아뢰니 왕이 “너의 일은

전고에 듣지 못한 드문 일이라 내가 그 뒤를 아름답게 하여 주리라” 말씀하고

한참 있다가 “너의 의가 좋은 안해를 천인의 딸이라고 버리지 마라” 말씀하였

다. 이교리가 편전에서 물러나온 뒤에 술이 내리어서 이교리는 임금의 은혜를

감격하게 생각하며 혼자서 취하였다.

그 이튿날이다. 위에서 특지를 내리었다. 이교리의 직품을 돋우어서 동부승지

를 제수하고 그 안해 양씨에게 숙부인 직첩을 내리라는 특지이다. 이교리가 이

러한 은명을 받은 뒤에는 망극한 성은을 저버리고 굳이 조정에서 물러가려 함은

신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직할 맘을 그치고 출사하게 되었는데, 숙배

하러 들어온 이승지를 왕이 인견하고 “너의 안해는 인제 천인이 아니요, 조정

의 명부이다” 말씀하며 면상에 웃음빛을 나타내더니 나중에 웃음빛을 거두며

한숨을 짓고 “너는 나보다 낫다” 하고 말씀하였다.

다른 때같으면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들이 이승지의 벼슬이 까닭없이 갑자기

올랐다고 다투고 또 더구나 백정의 딸 숙부인은 변이라고 떠들었으련만, 일반

조정에서 이승지에게 동정하던 때라 양사 간관들이 별로 다른 말이 없었을 뿐이

아니라, 백관 중에서는 미사로 칭송하는 사람이 도리어 많았었다. 그리하여 이승

지가 교리로 백정의 사위 노릇하였다는 이야기는 벌써 팔도에 자자하고 백정의

딸이 지금 숙부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서울 안에 가득하게 되었다.

 

4

이승지의 집과 종과 세간은 거제에서 도망한 뒤에 적몰을 당하였었다. 그때

적몰한 것을 조정에서 도로 내어주고 또 호화롭게 사는 선배와 제배들이 이것저

것을 보내주고 갖다 주고 하여서 이승지는 북부 안국방 대안동에 새로 와가 한

채를 장만하여 이사하고 살림살이를 떡 벌어지게 차리었다.

이승지가 거처하는 큰사랑에 대병풍 소병풍이 둘러치이고 방 윗목에 이른 매

화분까지 놓일 뿐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아직 주인도 없는 세간살이가 미비

한 것이 없이 갖추었다. 부엌에 큰솥, 작은솥이 늘비하게 걸리고 장독간에 대독,

중두리, 항아리가 보기 좋게 놓이고 대청에 뒤주와 찬장이 쌍으로 놓였는데 뒤

주 위에 용중항아리까지 쌍을 지어 놓이고 안방에는 문채 좋은 괴목장과 장식

튼튼한 반닫이가 겉자리 잡아 놓였는데 장 위와 반닫이 위에는 피죽상자, 목상

자가 주섬주섬 얹혀있고 이불장 위에는 이부자리가 보에 싸여 있고 재판 위에는

요강, 타구, 화로뿐이 아니라 놋촛대, 유기등경까지 놓여 있다. 그리하고 집에 있

는 사람들이 수가 적지 아니하여 큰 집이 커 보이지 아니한다. 안에는 의복을

맡은 침모 중에 관복을 짓는 관디 침모가 따로 있고 살림의 권을 쥔 차집의 아

래 원반빗아치, 곁반빗아치와 원동자치, 곁동자치가 갖추어 있고, 그 외에 상직

꾼, 아이종, 다듬이꾼, 솜 피는 할미까지 있어서 안방 외에 여러 방에 주인 없는

방이 없고 사랑에는 세간 청지기, 수청 청지기와 큰 상노, 작은 상노가 두 수청

방에 나뉘어 있고 차차로 드나드는 문객들이 작은 사랑에 모여 있어서 사랑에

쓰지 않는 방이 없다. 행랑에 내외 가진 종들과 행랑사람이 있고 하인청에 교군

을 메고 말을 모는 구종들과 교군 뒤나 말 뒤를 따라다니는 별배들이 있는 중에

안을 드나들며 안심부름하는 안별감이 따로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이렇게 많지만 한 달 삼십 일에 번을 들다 볼일 못보는 동부승지 영감

외에 원주인이 하나도 없으니 사랑은 세간 청지기의 살림이요, 안은 차집의 살

림이라 이승지가 틈이 있는 대로 세밀하게 총찰하나 안살림은 자연히 사랑살림

만큼 규모가 짜이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안주인을 맞아올 일이 급하였다. 이승지

가 함흥으로 하인을 보내는데 주팔에게 편지를 부치는 외에 함흥 군수에게 편지

하여 전날에 자기가 힘입은 것을 치사하고 내행이 올 때 힘을 빌려달라고 청하

였다.

이교리는 함흥을 떠난 뒤에 두 달이 가까웠다. 봉단이는 서울 소식을 기다리

며 하루 이틀 보내는데 배는 조금 불러지고 얼굴은 몹시 야위었다. 하루는 원이

주삼을 관가로 불러들이어서 “이교리 나으리가 그 동안 동부승지로 승직이 되

어 이승지 영감이 되시고 너의 딸이 숙부인이 되었다”일러주고 “숙부인이라는

것이 나라에서 주시는 귀한 칭호라 시골 백정의 딸은 고사하고 서울 양반의 집

딸도 저마다 못하는 것이다. 너희 같은 고리백정의 집에서 숙부인이 나다니 전

고에 없는 일이다. 너의 딸은 인제 조정에서 부인을 봉하여 주신 사람인즉 너의

동네 사람, 아니 너희들 내외까지도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불러서는 못쓸것이니

그리 알고 위하여라”가르쳐 보냈다.

주삼이가 “숙부인 마님, 숙부인 마님” 중얼거리며 미친 사람같이 뛰어나와

서 집에 들어서며 “경사가 났다. 집안에 큰 경사가 났다”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마당을 도니 주삼의 안해도 “무슨 경사요?” 주팔이도 “무슨 경사요?”

묻고 봉단이까지도 “무슨 경사입니까?” 묻는데 돌이만이 저의 고모부가 한 발

은 짚신 신고 한 발은 맨발로 껑충거리고 돌아다니는 꼴을 우두머니 보고 있었

다. 주삼이가 간신히 진정하고 봉단의 숙부인 된 기별을 들려 주니 주삼의 안해

가 봉당 위에서 마당으로 껑충 뛰어 내려와서 “내 딸이 숙부인이야” 소리를

지르더니 두 활개를 벌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얼싸 좋다, 내 딸이 숙부인이

다. 숙부인이 내 딸이다. 얼씨구좋다” 하고 내어놓는 소리가 그대로 노랫가락이

다.

진정하였던 주삼이가 “내 딸이 숙부인이야, 내 딸이 숙부인이다” 하며 그

안해의 뒤에 서서 다시 어깨를 으쓱거리었다. 춤이 끝난 뒤에 주삼이가 원의 가

르쳐 주던 말을 옮기고 “인제는 봉단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맙시다” 하고 안해

를 돌아보니 그 안해는 별안간 화를 벌컥 내며 “숙부인이거나 무슨 부인이거나

내 밑구멍으로 나온 것을 이름도 못 부를까? 부르거나 말거나 내 맘이지 누가

이래라저래라 한단 말이오” 하고 여러 사람의 얼굴을 점고하듯이 돌아보니 주

삼은 무료하여 말이 없고 주팔은 빙그레 웃고 있고 숙부인 당자는 고개를 숙이

고 있고, 이때껏 아무 말이 없던 돌이는 “아주머니 말이 옳소, 옳아”하고 대답

하였다.

 

5

그날부터 며칠 동안 주삼의 집에는 치하하러 오는 사람에 문이 메었다. 주삼

의 결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 왕래가 없던 양민까지도 많이 왔고, 한번 온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두서너 번 온 사람까지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중에 여편

네들이 많이 와서 윗방에는 늙은 여편네, 젊은 여편네가 사오 인 칠팔 인씩 함

께 몰려 앉을 때가 흔하였다. 말하자면 한동안 주삼의 집 윗방이 동네 여편네의

도회청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여편네가 모이면 종작없는 잔소리가 많다.

“여보, 따님을 밸 때 무슨 치성을 드렸소?” “이 집 따님같은 딸은 열 아들

로 바꾸지 아니할 딸이니까 무슨 치성이든지 드리셨겠지” “백일동안 북두칠성

님께 정화수를 올리셨소?” “백일동안 산천기도를 올리셨소?” “기린산 신령

님이 영검하시답디다그려” “산신령님이 부처님만 한가요? 천불산 중천사 부처

님은 참말 영검하시답디다” “떵기떵기떵선아 날아가는 학선아, 노구메 진상

내 딸아를 들어보지 못했소? 기린산 가도 천불산 가는 이 꽃섬 사당집에 노구메

진상이 첫째지요” 이렇게 치성 이야기가 한바탕 벌어지기도 하고 “여보, 따님

을 밸 때 무슨 태몽을 얻었소?” “주인댁 따님 같은 딸을 낳는 데는 태몽도 정

녕 좋았겠지” “달을 삼켜 보면 귀한 딸을 낳는답디다” “뱀은 아들이고 구렁

이는 딸이랍디다그려” “가락지도 딸이래요” “가락지뿐이가요? 구멍있는 것

은 모두가 딸이지요” “윗동네 간난이 어머니는 간난이 밸 때 꿈에 쌍동밤을

따먹었더라오” “쌍동밤 가지고야 숙부인 딸을 날 수 있소?” “그래도 간난네

는 간난이가 나며 집이 늘기 시작했답디다” “용호댁네는 용꿈을 꾸고 아들을

나서 귀히 된다고 떠들더라니 그 아들 몽룡이가 지랄쟁이가 되어서 부모의 걱정

만 시킵디다” 이렇게 태몽이야기가 한판을 짜기도 하였다.

수선스러운 여편네는 머릿방에 가만히 들어앉았는 봉단을 쫓아가서 얼굴을 들

여다 보며 “마님을 바치더니 얼굴이 전보다 환하구려. 사내로 나서 영감을 바

쳤으면 좀 좋을 뻔했나” 하고 정이 뚝뚝 듣는 듯이 봉단의 손목을 잡으며 “서

울은 언제 가요? 한양 천리 한번 가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 여기 있는 동안이나

자주자주 만납시다” 하고 수다를 떨었다. 이렇게 수선한 며칠 동안 봉단이는

성가시고 귀찮아서 얼른 서울로 가고 싶은 생각뿐이더니, 그 뒤에는 부모를 떠

날 생각과 서울 가서 지낼 생각이 슬픔과 걱정으로 변하여서 도리어 하루라도

고향에 더 있게 되기를 바랐었다.

이리하여 별로 서울 기별을 기다리지도 않는 중에 서울 하인이 도착하였다.

주팔이가 이승지의 편지를 보고 서울 사정이 급한 모양이니 하루바삐 떠나야 한

다고 재촉할 뿐이 아니라 원이 이승지의 청으로 치행 절차를 차려 보내며 곧 떠

나라고 말하여 봉단이는 할 수 없이 총총히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때는 벌써

동지달 초생이라 흰 눈은 들에 덮이고 눈 위에 찬바람은 칼날같이 매서웠다.

주삼이가 “이 치운 때 홀몸도 아닌 사람이 어찌 가겠느냐?” 걱정하니 주삼

의 안해는 “칩거나 덥거나 갈 사람은 어서 가야지” 하고 주삼이가 “보교 안

바람에 발이 시려서 걸어가는 것만도 못할걸” 걱정하더니 주삼의 안해는 “솜

두둑이 둔 보선을 신겨 보내면 고만이지”한다. 이렇게 주삼은 걱정만 하고 다

니는데, 주삼의 안해가 치행하는 일을 이것저것 모두 보살피고 봉단이가 눈물을

흘리며 하직할 때까지도 어서 보교에 타라고 씩씩하게 굴다가 봉단이가 보교안

에 들어앉고 동네 여편네가 둘러선 중에 교군꾼이 보교를 메고 삽작문 밖으로

나갈 때는 따라나올 생각도 아니하고 봉당에 주저앉아 한바탕 울음을 내놓았다.

주삼이와 돌이는 5리 가량이나 따라와서 주삼은 “잘 가거라. 내년 봄쯤 한번

가마” 하고 돌이는 “이담에 가거든 외대나 말게” 하고 봉단과 작별한 뒤에

각각 배행하는 주팔과도 작별하고 돌아갔다. 주팔이는 머리를 수건으로 동인 위

에 패랭이를 젖혀 쓰고 동저고리 바람에 짚신 감발하고 서울서 내려온 하인과

함께 걸어서 보교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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