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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1권 (15)

카지모도 2022. 9. 19.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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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봉단의 일행이 서울서 도착한 뒤 달포 동안 이승지 집 안팎 하인들 사이에는

봉단의 근본을 들추는 뒷공론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주인영감

을 꺼리어서 겉으로 대접하나 겉대접 대신에 뒷공론이 말 아니게 심하였다.

“정수리에 감쪽을 붙인 꼴이라니 천생 시골 백정의 딸이야” “입은 옷 꼬락

서니라니 보병것이나마 제도가 되었어야지” “그 삼촌 명색을 보지, 시골 백정

놈 주제에 조카딸 자세하고 점잔빼는 꼴이라니 눈이 시어 못 보겠어” “백정의

딸년더러 마님이라고 부르자니 작년에 먹은 올벼 송편이 되살아 올라올 지경이

야. 도망이라도 해야지, 이 집에서 못살아” 달포 지난 뒤에 뒷공론이 조금 변하

였다.

“감쪽을 떼고 머리를 쪽지니까 이쁘장스럽던데. 그렇지만 아무래도 시골 백

정의 딸이라 태가 나지 아니해” “동이 짧은 회장저고리를 입은 것이 대단히

거북살스러워 보이드군. 긴 치마를 늘이니까 마당발이 가려져서 흉 하나가 덮이

겠지?” “말수가 적은 것이 잔소리는 심하지 아니할 모양이야. 차차 지내보면

알겠지만 백정의 딸로는 사람이 제법이야” 달포가 가까워진 뒤에는 뒷공론이

처음과 아주 딴판으로 변하였다.

“이쁘고 맘씨 좋고 시골 사투리 외에는 훌륭한 젊은 마님이야. 어디가 백정

의 딸 같기나 해?” “그 삼촌도 여간 유식하지 아니한 모양이야. 함흥서는 백

정학자라고 유명하더라지?” 뒷공론을 받고 지내는 동안에 봉단이는 남모르게

애도 많이 태우고 속도 많이 상하였다. 주팔이는 이승지가 따로 방을 하나를 치

워 준 까닭에 옷 입고 주는 밥 먹고 가만히 방에 들어앉아서 심심하면 책자나

떠들어 보고 지낼 뿐이니까 별로 견디가 어려운 일이 없었지만, 봉단이는 그렇

지 못할 것이 천생은 아무리 총명하여도 병신 구실을 아니하지 못할 처지다. 침

모, 차집 이하 여러 사람에게 둘러 지내며 서투른 것을 익히고 모르는 것을 배

우노라니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할 것이 정한 일이다. 이승지가 번

나와서 내외 단둘이 마주 대하여 앉게 되는 밤 저녁이외에는 일시라도 맘을 놓

고 지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애를 태우고 속을 상하는 대신에 문견이 나날이 늘어갔다. 워낙 소명

한 재질이라 남이 하는 일을 한두번 눈여겨 보면 못할 것도 없기도 하였지만,

관디 침모가 나이 지긋하여 아는 것이 많고 더욱이 사람이 좋은 까닭에 바느질

도 배우고 언문도 배우고 서울 풍속도 배우고 또 양반집의 봉제사 접빈객하는

범절까지도 배웠고 차집은 성미 있는 사람인 까닭에 비위를 맞춰가며 음식 만드

는 법을 아무쪼록 골고루 배웠다. 그리하여 한달이 채 못 되어서 바느질이나 또

는 음식 만드는 것이나 거의 막힐 것이 없었다. 번상을 차릴 때 “저 명란 접시

에 움파를 곁들여 놓는 것이 좋지 않소?” 차집보고 말하고 옷을 지을 때 “이

저고리 깃은 모를 좀더 동글리는 것이 보기 좋지 않겠소?” 침모보고 말을 하여

도 침모나 차집이 고개를 외치지 않을 만큼 되었다. 부리는 사람에게 대한 말은

아이종 이외에는 곁동자치에게까지도 ‘해라’를 쓰지않고 ‘하오’를 쓰던 것

을 이승지가 그리 말라고 말하여 아랫도리에 도는 하인에게 간혹 “해라”도 쓰

지만 대개는 말끝이 없는 반말을 쓰고 솜 피는 할미 같은 늙은이와 관디침모나

차집같은 대접할 사람에게도 깍듯이 ‘하오’를 쓰던 것이다.

하루는 이승지가 감기기운이 있어 공고에 탈하고 집에 누웠는데, 아무리 하여

도 사랑은 부산하여 성가시다고 안방 모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서 부인이 안

방에 나가 있을 사이가 없이 마님 여쭈라고 불러들이었다. 심부름하는 아이종들

은 나가고 내외만 있을 때 누운 이승지가 앉은 부인의 배를 가르키며 “밥을 하

루 몇 끼나 먹기에 배가 저렇게 부른고?”하고 웃다가 그치고 손가락을 꼽아보

며 “일곱 달로는 배가 부르지 아니한 셈이오. 예사 밥 좀 많이 먹은 사람의 배

밖에 아니 되오그려” 하고 치마 밑으로 배를 만져보려고 하니 부인은 몸을 피

하며 “이승지 영감이 안해 대접을 김서방같이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눈

으로 웃는데 이승지는 가만히 “이승지도 봉단이 생각은 놓지 못한다던데” 하

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날 내외가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부인이 섣달 그믐이

멀지 아니하였다고 설쇨 준비를 걱정하다가 이승지가 “우리 살림으로 설 쇠기

가 처음이니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하는 말에 “뒤에 딴 말씀은

못하십니다.” 하고 뒤를 다져두었다. 며칠 지난 뒤 이승지 부인이 차집을 데리

고 집안 사람들에게 세찬 줄 것을 의론하는데, 모든 것을 과하도록 후하게 정하

여 주인 영감에게 말하니 영감이 처음에는 너무 과하다고 말하다가 “딴 말씀

아니하신다더니” 한마디에 웃고 부인의 말을 좇았다. 그 뒤로는 하인들 상에

백정을 들추는 뒷공론이 그치었다.

 

7

설이 지나가고 경칩 추위까지 새봄이 돌아왔다. 그 동안 주팔이는 이승지의

명주옷까지 얻어 입고 입쌀밥으로 배를 불리고 지냈으나, 아무 할 일도 없이 나

돌아다니다가 하인들에게라도 망신을 당하면 자기의 조카딸은 고사하고 주인 영

감의 안면까지도 깎일 것이라 갑갑한 것을 참아가며 가만히 방구석에 들어앉았

었다. 조카딸의 얼굴을 보기는 한 달에 한 번이 어려웠고 주인영감과 한 방에

앉아보기는 열흘에 한번이 드물었다. 말벗이 되어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까

닭으로 종일 말하는 것이 마디수를 헤아릴 만큼 적었었다. 주팔이는 자기가 겨

울 벌레의 신세와 방사하다고 생각하여 겨울 벌레를 두고 글귀까지 지은 일이

있었다.

주팔이가 남창을 열어놓고 눈 녹은 뒤 남산의 부드러운 자태를 바라보고 앉았

다. 종남산 새봄이라는 글제로 귀글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울적한 심사가

글구멍을 막았던지 글이 한 구도 잘되지 아니하여 뜰 아래로 내려와서 이리저리

거닐었다. 얼마 뒤에는 뜰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낙수받이의 모래를 두 손가락

으로 집었다 놓았다 하였다. 그리하는 중에 꼬물꼬물 돌아다니는 개미들이 눈에

뜨이었다. 댓돌 밑에 있는 개미굴을 찾아와서 드나드는 개미를 들여다보느라고

다시 쪼그리고 앉았는데, 개미들은 혹 혼자 따로 떨어져서 앞발로 수염을 닦달

하는 놈도 있고 혹 오다가 다시 서로 만나서 수염으로 인사하는 놈도 있고 그

외에 양기를 받아서 기운을 내려는 듯이 따뜻한 햇볕을 쪼이며 이리저리 돌아다

니는 놈이 많았다.

주팔이가 종남산 새봄도 잊어버리고 잠착히 개미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날

번을 나와 집에 있던 이승지가 안에서 주팔의 방으로 나오는 일각문을 나서서

쪼그리고 돌아앉은 주팔을 보고 “댓돌에 대고 대죄할 일이 있는가?” 하고 껄

껄 웃으니 주팔이는 놀라 일어나서 돌아서며 별로 의미도 없이 “아니올시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승지는 그 대답이 우스워서 또다시 껄껄거리고 주팔이는 운

에 딸리어서 입을 벌리고 웃었다. 이승지가 창문 앞 툇마루에 걸터앉은 뒤에 주

팔이가 그 앞에 서서 “그러지 않아도 영감을 뵈옵고 좀 여쭐 말씀이 있었는데

오늘 마침 한가하신가 보오이다그려”말하니 이승지는 섰는 주팔의 얼굴을 치어

다보며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이리하여 주팔이와 이승지 사이의 문답

이 한참동안 길게 계속되었다.

“간단히 말씀하면 영감께 잠깐 하직을 여쭈려는 것이올시다” “하직이라니?

왜? 무슨 불만이 있나?” “아니올시다. 등 덥게 입고 배부르게 먹고 지내니 무

슨 불만이 있겠습니까만, 원래 산야에서 자란 것이라 서울이 갑갑할 때가 많습

니다.” “서울이 갑갑해? 차차 있어나면 갑갑증이 없어지지” “다시 서울을

오더라도 시골 가서 돌아다니다 오겠습니다” “아니야, 시골 갈 생각 말고 서

울 있어. 내가 내외간에 의론한 일도 있지만 자네가 일생을 홀아비로 지낼 까닭

이 있나. 그러니까 내가 여편네 하나를 구해서 서울 살림을 차려 줄 작정이야”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할 수 없을 것이 무엇인가? 남의 정을 막지 말

게” “영감께 정이 들지 아니하였다면 서울을 올 까닭도 없고 천한 종적으로

거북한 것을 무릅쓰고 서울서 한겨울을 날 까닭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겨우살이

를 마친 벌레와 같이 꿈실거릴 생각이 나서 잠깐 하직을 여쭈려는 것입니다. 뵈

옵고 싶은 정이 간절하면 또다시 오겠습니다” “허허, 고집 아니할 것을 고집

하네그려. 그래 가면 함흥으로 가려나?”

주팔이는 다리가 아프든지 툇마루 한끝에 올라앉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고향에 가려는 것이 아니올시다. 평생에 명산대천을 구경하려는 소원을 가지

고 이십 안에 명천 칠보산과 회령 두만강을 구경하고 이십이삼때에 회양 금강산

을 구경한 외에는 다른 유명한 산천을 구경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제 차차 좀 소

원을 풀어볼까 합니다” “산천 구경이 소원이거든 우선 북한가서 삼각산이나

구경하게” 하고 이승지가 웃는데 주팔이는 웃지도 않고 “삼각산은 구경할 기

회가 앞으로 많이 있을 듯하니까 먼 데 있는 산천부터 구경하렵니다. 우선 남으

로 내려가서 지리산, 한라산을 구경하거나 또는 서로 가서 묘향산을 구경하거나

하렵니다”하고 결심한 것을 말하였다. 이승지가 주팔의 결심을 돌리기 어려운

것을 본 뒤에 “그러면 지금 영변부사가 나의 친한 사람이라 편지를 해줄 것이

니 묘향산이나 곧 올라오도록 하게” 허락하였다. 며칠 뒤에 주팔이는 왕반 두

달을 작정하고 묘향산 구경을 떠나갔다.

 

8

주팔이 떠난 뒤에 얼마되지 아니하여 이승지 집의 객식구가 다시 하나 생기었

다 그 객식구는 이승지의 유모의 아들이다. 그전에 거제 배소에까지 전위하여

찾아갔던 삭불이다. 어느 날 저녁때, 이승지가 사랑방에 혼자 누웠는데 젊은 수

청지기가 방으로 들어와서 “어떤 젊은 자 하나가 밖에 와서 영감마님을 뵙겠다

고 한답니다”말하였다. 이승지는 누운 채로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지 않았단

말이냐? 젊은 자가 누구란 말이냐?” 청지기를 나무라니 청지기는 “어디서 왔

는냐고 물어야 그것은 대답하지 않고 삭불이라고 여쭈면 영감마님께서 아시다고

하더랍니다” 말하자마자 이승지가 “무어 삭불이?” 하고 벌떡 일어 앉으며 “

어디 있느냐?” 하고 급히 물었다. “하인청에 있답니다” “어서 불러라”.

청지기는 삭불이가 누구인데 주인 영감이 저렇게 반색하나 속으로 괴상히 생

각하며 수청방으로 나온 뒤에 설렁을 쳐서 하인을 불렀다. 이승지가 앞미닫이

한 짝을 열어놓고 앉았는데 삭불이가 들어와서 뜰 아래에 문안을 드리니 이승지

가 내다보며 말하였다.

“너 어디 가서 있었느냐? 너를 한번 만나서 싶어서 그동안 더러 알아도 보았

다만 어디 알 수가 있드냐?” “소인은 그동안 경상도 문경땅에 가서 있었습니

다” “문경은 어째서?” “영감님도 아시지만 소인의 동무 한치봉이가 연전에

죽었습니다. 그 뒤로는 서울서 생화가 잘 되지 아니하는 까닭에 문경까지 불려

갔었습니다” 이승지는 삭불이의 말을 듣고 “생화, 생화” 두서너 번 뇌고서

“문경가서는 무엇하였느냐?” 하고 물으니 솔랑솔랑하던 삭불이는 낫살을 먹

어도 별로 전과 다름이 없어서 몸을 잠시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깝신거리면서

“그저 그럭저럭 지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럭저럭이라니? 그럭저럭 그

생화란 말이지?” 하고 이승지가 맘에 마땅치 못한 듯이 “으응” 하고 입을 다

무니 삭불이는 두 손길을 마주 잡고 “영감마님께 기망하올 길이 있소이까?”

하고 허리를 굽신하였다. 이승지는 다소 화가 나는 어조로 “그런 생화를 두고

어째 또 서울을 왔느냐?” 하고 삭불의 얼굴을 노려보니 삭불이가 또 허리를 굽

신하며 “작년에 새로 온 원님이 너무 까다로운 까닭에 생화가 시원치 않으와

요. 그래서 다시 서울로 왔습니다” 하고 머리를 까딱하여 갓을 빼또롬하게 쓰

고 다시 한번 허리를 굽신하였다. 그날 밤에 이승지가 조용히 삭불이를 불러세

우고 나무라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한 뒤에 자기 집에 있으라고 말하여 삭

불이가 이승지 집의 객식구 노릇을 하게 되었다.

주팔이가 돌아온다던 두 달 기한이 되었다. 그러나 주팔이는 오지 아니하였다.

한 달 두 달 지나가서 주팔이가 서울을 떠난 뒤 반년이 넘었다. 그래도 주팔이

는 오지 아니하였다. 그 동안에 주삼의 내외가 서울 올라와서 얼마 동안 묵었는

데, 주삼이는 주팔을 만나보고 가겠다고 더 묵으려고 하였으나 주삼의 안해가

거북살스럽고 토심스러운 것을 참지 못하여 남편더러 가자고 재촉하여 도로 내

려갔고, 이교리를 배소에서 도망시켜 주던 거제 집주인이 서울 올라와서 이승지

의 후대를 받다가 오래는 묵을 수 없다고 돌아갔고, 또 이승지의 부인이 사월

초생에 아들을 낳아서 그 아이가 지금 백일이 지났다. 이승지가 처음 두 달이

지났을 때는 주팔이가 구경에 팔리어 늦는 것이라고 그다지 걱정을 아니하였으

나, 두 달이 석 달이 되고 석 달이 넉 달이 되어 차차 오래 되어갈수록 차차 걱

정이 더 되어서 내외가 앉으면 “길에서 화적에게 죽었나? 산에서 범에게 죽었

나?” 걱정이 한이 없었다.

이승지가 영빈부사에게로 알아본 즉 당초에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은 없었다

는 기별이 왔다. 이승지는 자기도 걱정이 되려니와 그 삼촌이 어디서 죽은 것이

라고 눈물을 흘리는 부인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기로 작정하

고 또 보낼 사람은 삭불이로 작정하였다. 이승지가 주팔의 용모와 거동을 세세

히 일러준 뒤에 삭불이를 묘향산으로 떠나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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