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주팔이는 이월달에 서울을 떠난 뒤에 급할 것이 없는 길인만큼 중로에서 달소
수를 넘어 허비하고 삼월 망간에 묘향산을 들어서게 되었었다. 묘향산은 희천,
영변, 여원, 덕천 네 고을 사이에 사백여 리 동안에 웅거하고 서리어 있는 겹산
이라 상봉인 비로봉 외에 석가봉, 관음봉, 원만봉, 향로봉, 법왕봉이며 미륵, 칠
성, 지장, 시앙, 가섭, 아난이란 이름 가진 봉이 첩첩이 싸이어 이곳저곳에 솟아
있고, 팔만구암자라는 말이 나고 내산에 삼백육십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도록
절과 암자가 많은 곳이라 서도 대찰로 일국에 이름이 높은 보현사 큰절 외에도
도승의 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안심사와 폭포의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상원암 같
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골짝마다 봉우리마다 토굴이나 암자가 없는 곳이 없는
데, 금강굴이다 불영대다 또는 내원암이다 하는 중이 있는 곳도 많지마는 상중
하 도솔암이나 또 상중하 비로암이 있다고 하는데 중이 없어 퇴락한 곳도 많고,
무슨 암자 무슨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 빈터만 남은 곳도 적지 아니하였다.
주팔이가 만세루에 올라앉아 천주암이 높은 솟은 탁기봉을 바라보기도 하고
단군대에 올라가서 조선 시조 단군님이 나셨다는 단군굴을 들여다보기도 하였
다. 주팔이가 큰절에서 얻어먹고 작은 암자에 와서 자기도 하고 이 암자에서 얻
어먹고 저 암자에 가서 자기도 하여 이리저리 왕래하는 중에, 낮은 땅의 복사꽃
과 높은 산의 진달래를 신기하게 보지 않고 낮에 우는 접동새와 밤에 우는 소쩍
새를 예사롭게 듣도록 묘향산 안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다.
주팔이가 일간 떠나서 서울로 돌아가려고 맘을 먹고 있던 때에 삼성대에서 멀
지 아니한 곳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에서 이상한 사람 하나를 만나보았다. 그날
주팔이가 비로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수미대, 백운대를 거치어 삼성대
에 와서 다리를 쉬고 앉았다가 우연히 이 암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암자 밖에
서서 퇴락한 것을 보고 “여기도 중이 없는 모양이로군”하고 혼자 탄식하며 안
을 들어가 보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길을 찾아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암자 안에
서 사람의 말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아이구, 사람이 있네” 하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간즉 겉은 퇴락한 암자지만 안은 정결하다.
마당에는 비질을 깨끗이 하였고 마루에는 걸레질을 깨끗이 하였다. 볕에 말리
려고 뜰에 널어놓은 송엽외에는 티끌 하나가 없어 보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방을 들여다본즉 두 사람이 마주 대하여 앉았는데 한 사람은 책상다리로 앉았고
또 한 사람은 꿇어앉았다. 책상다리한 사람은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남겼고
참선하는 수좌가 입는 것 같은 누더기옷을 입었는데 나이가 사십 가량 되어 보
이고 꿇어앉은 사람은 머리도 깎지 않고 옷도 반반하게 입었는데 나이가 이십이
못 되어 보이었다. 주팔이는 들여다보아도 방안에 있는 사람은 내다보지 아니하
는 까닭에 주팔이가 사람이 온 것을 알리려고 기침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은 흘끗 한번 내다보고 말이 없이 책상다리한 사람의 얼굴을 치어다보고 책
상다리한 사람은 여전히 모른 체하고 앉아서 내다보지 아니하였다. 주팔이가 널
린 송엽을 피하여 뜰에 올라서
며 “구경 다니다가 잠깐 다리를 쉬러 들어왔습니다.” 말을 통하니 책상다리
한 사람이 그제야 내다보며 “그 마루에 앉아 쉬어가시오.” 대답하고 나서 젊
은 사람에게 향하여 “나가 있다 오너라.” 이르고 젊은 사람 앞에 펴놓았던 책
을 접어 치우니 그 젊은 사람이 일어서 마루로 나왔다. 주팔이 그 사람이 나오
는 것을 보고 다리를 쪼그리고 앉으니 그 사람이 편히 앉으라고 권하였다. 주팔
이는 어려워하는 빛을 보이며 "저는 천인이올시다. 이렇게 앉았기도 황송하오이
다." 말하고 다리를 더욱 쪼그리니 젊은 사람이 웃으며 "관계없소. 편히 앉으오.
아까 선생님께서 오늘 신시에 점잖은 천인이 찾아오리라 말씀하시더니 지금 신
시 때나 되었을걸." 하고 해를 치어다보려고 고개를 기울이는데, 방안에 앉았던
선생님이란 사람이 "윤아, 입을 가볍게 놀려서는 못쓰는 법이야." 하고 젊은 사
람을 나무라서 그 사람도 말이 없고 주팔이도 말이 없이 한참 동안 앉았었다.
주팔이가 너무 오래 앉았기가 미안하여 일어서며 그 젊은 사람을 보고 "가겠습
니다." 하고 뜰에 내려와서 방안을 들여다보며 "다리를 잘 쉬어 가지고 갑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선생님이란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이었다.
10
주팔이는 산길로 내려오며 생각하였다. '그 사람이 무엇일까? 도승일까? 이인
일까? 내가 갈 것을 미리서 알고 있었다지! 도기가 있는 외모만 모더라도 분명
히 이상한 사람이야! 내가 그 사람 밑에 가서 제자 노릇이나 해보겠다. 제자 되
겠다고 청하면 선선히 들어줄까? 지성감천이라니 어디 정성을 들여보지.' 주팔이
는 중 있는 어느 암자에 와서 그날 밤을 지나고 이튿날 첫새벽에 일어나서 채
잘 보이지도 아니하는 산길을 더듬더듬하며 올라갔다.
그 암자의 문은 열리어 있었으나 암자 안은 쾨쾨하여 인기척이 없었다. 암자
안에 들어와서 본즉 방문은 닫혀 있다. 아직 기침을 아니한 것이거니 주팔이는
생각하며 가만가만히 비를 가지고 달그락 소리도 나지 아니하도록 조심하며 마
루를 정하게 닦아 놓았다. 날은 환히 밝아서 해도 들 때가 되었는데 방문은 아
직도 열리지 아니하였다. 주팔이는 마루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방안에서 기침
하기를 기다리다가 문 앞길이나 쓸어놓으리라 생각하고 뜰 아래로 내려오는데,
그때 "손님이 와서 집안을 치워노셨군." 말소리가 먼저 들리며 젊은 사람이 문밖
에서 들어왔다. 주팔이는 깜짝 놀라며 마주 나가서 "어디를 이렇게 일찍이 갔다
오십니까?" 물으니 젊은 사람은 선생님이 행기하러 가시는데 뫼시고 갔었소.”
대답하고는 “새벽에 행기하러 가셔요?” 묻고 또 “선생님은 다른데 가셨습니
까?” 물어야 젊은 사람은 말 많이 하기를 피하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어 그렇
다는 뜻을 보이고 뒤를 돌아보아 뒤에 온다는 뜻을 보일뿐이었다.
얼마 아니 있다가 선생님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주팔이가 집안 치워놓은 것을
짐작하련만도 말 한마디가 없고 공손히 인사하여도 역시 말 한마디가 없었다.
젊은 사람이 방문을 열어놓고 선생이란 사람이 방안에 들어앉은 뒤에 주팔이가
뜰 아래에 서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히고 “말씀 여쭙기
가 외람하오나 제자로 두시고 가르쳐 주시기를 소원입니다.” 하고 공손히 절하
였다. 그 대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었으나 대답이 없다. 주팔이는 다시 공손히
절하고 일어나서 “하인으로 두시고 부리어 주시기라도 하시면 원이 없겠습니
다.” 말하니 “하인 쓸데 없소.” 간단한 대답으로 거절한다. 주팔이는 서 있었
다. ‘옛사람은 선생의 집 문앞에서 석 자 눈이 쌓이도록 서 있었다하니 나도
그만한 정성을 보이리라.’ 주팔이는 속으로 생각하며 두 손길을 맞잡고 단정하
게 서 있었다. 다리에 피가 내리도록 서 있었다. 다리가 떨리었다. 그래도 그대
로 서 있었다. 다리가 남의 것 같이 되었다. 그래도 그대로 서 있었다. 나중에는
주팔이가 쓰러지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아니하여 썩은 나무
같이 쓰러졌다. 방안에서는 내다보는지 아니 보는지 말 한마디가 없고 선생과
제자가 수작하는 나직나직한 말소리가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주팔이가 맨땅에
주저앉은 뒤에 젊은 사람이 방에서 나와 가엾게 여기는 눈치로 주팔을 바라보면
서 선생님이 올라오라신다고 말하였다. 주팔이는 인제 허락이 나는가 보다 생각
하며 기어올라가다시피 하여 마루로 올라갔다.
젊은 사람이 쌀가루 한 봉지와 맑은 물 한 그릇을 주어서 먹었으나, 기다리는
선생의 허락은 나지 아니하였다. 그날은 마침내 선생의 허락하는 말을 듣지 못
하고 중에게 와서 자고 이튿날 또 첫새벽에 올라가서 마당 쓸고 마루 치고 선생
이 행기하고 들어온 뒤에 뜰 아래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날도 역시 전날과 같
이 선생의 허락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사흘 되던 날 첫새벽에 주팔이가 ‘정
성이 부족한 탓이다. 오늘은 그 암자에서 밤을 새우더라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
도록 정성을 들이리라.’ 생각하고 올라오니 그날은 선생이 행기하러 나가지
아니하고 암자에 있다가 들어오는 주팔을 보고 곧 “너의 정성이 무던하다. 이
방으로 들어오너라.” 말하였다. 이것이 주팔이의 기다리던 허락이다. 이리하여
주팔이는 머리 깎고 수염 있는 그 이상한 사람에게 제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11
십여 일이 지나는 동안에 주팔이는 여러 가지 일을 알았다. 선생의 성명은 이
천년이라 일컫고 나이는 기축생으로 금년 삼십구 세라는 것을 알았고 어느 도사
람인 것은 말한 일이 없어서 그 젊은 사람까지도 알지 못하나, 그 쓰는 말이 경
사인것으로 모아서 경기 사람인 것을 짐작하였고 선생이 처음에는 수월당 노장
중의 상좌로 출가한 까닭에 수월당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노장의 말인 것
을 알았고 그 젊은 사람은 강원도 태생으로 성명이 김륜이라 선생이 ‘륜아, 륜
아’ 부르는 것을 알았다. 안 것이 이뿐이 아니다. 이외에도 또 많이 있다. 수월
당 스님이 쌀· 쌀라구, 지, 필, 묵을 대어주되 달라는 대로 쓰는 대로 군소리 없
이 대는 것을 알았고, 선생이 주장으로 쌀가루·솔잎가루를 가지고 생식하는데
간간이 밥을 지어서 화식도 하고, 또 삼사 일씩 절곡하고 물만 마시기도 하는
것을 알았고, 선생이 행기하러 암자 밖에 나가는 때가 해진 되가 아니면 첫새벽
인 것은 산에 올라다니는 사람을 마나보기 싫어하는 까닭인 것을 알았고, 또 김
륜이는 남의 서자로 천대받기가 싫은 까닭에 삼 년 전에 집에서 뛰어나와서 산
천 구경을 다니다가 작년에 묘향산 구경 왔던 길에 선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지
금 십팔세의 소년인 것을 알았다.
주팔이가 처음 한 달 동안 선생의 심부름은 고사하고 김륜의 심부름까지 하느
라고 별로 공부한 것이 없이 지나고 그 다음달부터 선생의 저술하는 삼원명경이
란 책을 얻어보기 시작하였다. 이 책은 사람의 상중하 삼원 명수를 추구한 것이
니, 말하자면 사주책의 전서라고 할 것이다. 선생의 저술하여 놓은 삼원명경의
권수가 벌써 오십여 권이나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이데 선생의 말로 보면 나중
에 백여 권이 넘는 음양술수에 대하여 책권을 좋이 보았고 또 자기대로 다소 짐
작이 있는 터이라 삼원명경이 어렵지 아니하였다. 간간이 의심나는 곳이 있어
선생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익숙한 책을 보듯이 내려보았다. 그리하
여 참깨 같은 글씨로 적은 삼원명경 오십여 권을 한 달 안에 다 보고 나서 본것
을 가지고 선생과 같이 이야기 하게 되었다. 선생이 그 재분을 칭찬할 뿐이 아
니라 일 년동안에 십팔구 권밖에 보지 못한 김륜이는 놀라지 아니하지 못하였
다.
어느날 선생이 김륜에게 대하여 “주팔이가 나에게 오기는 너보다 뒤졌으나
첫째 사람이 너보다 낫고 둘째 나이가 너보다 많고 셋째 재주가 너보다 앞서니
너는 주팔이를 형으로 대접하여라.” 말한 가닭에 김륜이는 주팔이를 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팔이는 책을 많이 본 사람이라 선생과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하
는데 삼교구류에 말이 막히지 아니하므로 말 적던 선생이 자연히 말을 수다히
하게 되었다. 선생이 주팔이를 보며 “주팔아, 너는 나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 온 뒤로 내가 말이 많아졌다.” 말하고 웃은 일까지 있었다. 선생이
주팔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기의 아는 천문지리와 음양술수를 아끼지 않고 가르
쳐 주어서 불과 사오삭 안에 주팔의 재주가 거의 선생을 따르게 되었다..
늦은 봄에 온 주팔이가 여름을 다 지내고 가을을 맞게 되었다. 팔월 추석날
밤이다. 선생, 제자 세 사람이 밝은 달이 비치는 마루에 나앉아서 역리를 이야기
하는데 건너편 산에서 여우가 울었다. 한 번 울고 마는 것이 아니라 괴상하게
여러 차례 울엇다. 이편을 향하여 우는 것 같았다. 캥캥하는 소리에 김륜이는 상
을 찡그리며 왼손을 펴서 들고 엄지손 끝으로 제 손가락의 마디를 짚어보더니
주팔을 보며 “여보 형님, 저 여우가 오늘밤 안으로 죽겠구려.”주팔이가 이 말을
듣고 한참 있다가 “이 시각에 죽겠는데.” 대답하고 선생을 보며 “선생님, 괴
상합니다. 점사를 내자면 불인불시에 토혈즉사라고 하겠은즉 칼을 맞아 죽는 것
도 아니요, 화살을 맞아 죽는 것도 아니데 무슨 까닭으로 피를 토하고 곧 죽게
되겠습니까?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이 “무슨 까닭?” 하고 몇 마디 주
문을 입안으로 중얼중얼 외며 여우가 우는 편을 항하여 손을 내밀고 손가락으로
딱딱 소리를 내더니 이때껏 캥캥 하고 울던 여우가 외마디로 캥하고 뚝 그치었
다. 세 사람은 역리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밤이 늦은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식전에 김륜이와 주팔이가 건넛산에 가서 본즉 크기가 종개만한 불여
우가 입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었다. 앞섰던 김륜이가 주팔을 돌아보며 “형님,
이 여우가 분명히 선생님 주문에 죽은 것이 아니겠소? 그 재주만 가지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지 않소? 우리 가서 선생님께 가르쳐 줍시사고 졸라봅시다.” 말
하는데 주팔이는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아우님, 고만두지.”
12
김륜이와 주팔이가 건넛산에서 돌아오니 선생은 삼원명경을 또 새로 한 권 쓰
기 시작하려고 책을 매고 있었다. 김륜이가 선생의 앞으로 나아가서 새삼스럽게
절을 하고 꿇어앉았다. 선생은 고개를 들고서 김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번
혀를 차고 다시 고개를 숙이었다. 김륜이는 주문을 배우고 싶은 생각을 참지못
하여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뫼시고 지내는 동안에 배운 것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 음양술수에 능란하다고야 말할 수 있습니까만 조박을 짐작하게는 되었습니
다. 그렇지만 선생님꼐서 주문에 까지 놀라운 재주를 가지신 것은 오늘이야 비
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인제는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거두어
두신 본의로 보아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다시 일어나서 절을 하니
선생이 매던 책과 책구멍을 뚫던 송곳을 놓고 김륜의 얼굴을 바라보며 “륜아,
너의 지금 배우는 술수를 몇 해만 더 익히면 일생에 의식을 걱정하지 아니할 것
이다. 부질없이 주문 같은 것을 배울 생각 마라.” 타이르는데 김륜이는 또다시
일어나서 절을 하고 "선생님, 다른 술법은 다 고만두시고 그것만 가르쳐 주시기
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고 조르니 선생이 '허허‘ 하며 한번 천정을 치어다보고
다시 김륜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내가 너의 맘을 바르게 지도하지 못하고 기이
한 술법만 가르친다면 나의 죄가 적지 않을 것이다. 너는 아직 나에게 있어서
맘을 바로잡도록 공부하여라. 정심공부가 주문 공부보다 너의 몸에 이로울 것이
다." 준절하게 말하였다. 김륜이가 속에는 아앙한 맘이 없지 아니하나 선생의 말
을 거역할 길이 없어서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주문 배울
생각을 억제하였다.
그러나 종시 그 생각이 속에 남아 있어서 그날 저녁에 주팔이와 같이 암자 밖
에 나섰다가 "여보, 형님?" 불러가지고 "그 술법은 선생님이 대단히 아끼시는 모
양이야. 그러나 그 까짓것 못 배운다고 죽을까." 하고 선생에게 대한 불만한 의
사를 보이었다. 주팔이는 아무 말도 아니하였지만, 속으로는 선생이 가르치지 아
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심지가 요양미정한 사람이 그러한 술법을 배우
는 것은 세상에 해될 뿐 아니라 그 사람 당자에게도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
다.
그날부터 이삼 일 뒤의 일이다. 선생이 붓이 모지라져서 쓸수 없다고 붓을 얻
으러 김륜을 수월당에 보내고 주팔이와 둘이 암자에 있었는데 선생이 "주팔아!"
부르더니 "너는 나에게 오래 있지 못할 사람이다. 수이 이별하게 될 터인데 너
같은 사람을 놓치고는 나의 아는 것을 전수 할 곳이 없을 것이다." 하고 자리 밑
에서 휴지책 같은 책을 두 권 꺼내서 손에 들고 "나의 아는 재주로 지금 너 모
를 것은 이 책 두권에 다 들었다. 륜이가 배우기를 원하는 술법도 이책 속에 적
혀 있다. 네가 이 책 두권을 가지고 공부하되 륜이를 알리지 말고 가지고 세상
에 나간뒤에도 어느 누구에게든지 보이지 마라. 네가 익숙한 뒤에는 불에 넣어
없이 하여라. 전수할 재목이 못되는 사람에게 전수하지 못할 것이매 대개 너에
게까지 가고 그치게 될 것이다. 보다가 모르는 것은 륜이 없는 틈에 몰아 물어
라." 하고 주팔을 내어주니 주팔은 공손히 절을 하고 받았다. 책 제목이 한 권은
부주비전이요, 또 한 권은 망단기결이다.
주팔이가 두 권 책을 큰 보배와 같이 품에 품고 다시 일어나서 절하고 앉은
뒤에 선생이 "이승지가 너 찾으러 보내는 사람이 벌써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그
사람이 중로에서 병으로 지체가 되어 달포 뒤에나 이 산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때는 네가 이 산을 떠나야 할 것이다." 말하는데 주팔이가 "저는 일평생이라도
선생님을 뫼시고 지내기가 원이올시다. 오는 사람은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말한즉 선생은 고개를 외치며 "아니다. 네가 나가야 한다. 만일 아니 나가고 이
승지의 편지가 영변 절도사에게 오게 되는 날이면 너는 붙들려나가고 나도 따라
소조를 치르게 될 것이니 너는 나가야 한다." 하고 한참 있다가 "내가 조용한 때
너에게 말할 것이 있다. 내가 이천년이가 아니고 정희량이다. 내 별호는 허암이
다. 내가 세상에서는 죽은 사람이다. 이것은 너만 알아라. 입밖에 내지 마라." 말
하는데 어조가 엄숙하였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꺽정 1권 (18) (0) | 2022.09.22 |
---|---|
임꺽정 1권 (17) (0) | 2022.09.21 |
임꺽정 1권 (15) (0) | 2022.09.19 |
임꺽정 1권 (14) (0) | 2022.09.18 |
임꺽정 1권 (13) (0) | 202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