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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부터 주팔이는 틈만 있으면 암자 밖으로 나가서 숲 사이나 바위 아래
에 혼자 앉아서 부주비전과 망단기결을 공부하고 김륜이 없는 사이를 엿보아서
선생에게 모르는 것을 물었다. 거의 한 달이 되는 동안에 주팔이는 두 권 책에
있는 것을 책 없이 외지는 못하나마 책 보고는 다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주팔
이가 너무 자주 암자 밖에 나가는 것을 김륜이가 수상하게 생각하여 “형님, 어
디를 혼자서 그렇게 나가시오?” 묻기까지 하였으나 주팔이가 “가을바람 난 뒤
로는 공연히 울적할 때가 많아서 암자 안에 들어앉았고 싶지 않아.” 말하여 김
륜이도 “그러면 형님은 산중에 오래 있지 못할 사람이오.” 하고 웃어버리었다.
어느 날 식전에 선생이 주팔을 불러앉히고 “주팔아, 너는 오늘 가거라. 육칠 삭
같이 지내던 정에 섭섭한 맘이 없지 아니하나 갈 사람인 바에 하루 이틀 더 있
어서 무엇하느냐, 떠나가거라.” 말한 뒤에 한참 있다가 다시 “오늘 오시에 만
세루에 가서 있으면 자연 만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오시 전에 주팔이가 그 암자를 떠나게 되었다.
주팔이가 눈물을 머금고 선생에게 하직하니 선생은 “오냐, 잘 가거라. 연분
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사오년 후에는 륜이를 내보내고 나도 향산을
떠날 터이다. 나는 머리를 다시 기르고 거사 노릇하며 산천 구경을 다닐 터이다.
” 말하고 마루 끝까지 나와서 주팔을 어서 가라고 재촉하더니, 주팔이가 떨어
지지 아니하는 발을 억지로 몇 발짝 떼논 뒤에 갑자기 잊은 말이 생각나는 듯
이 “주팔아!” 불러서 주팔이가 돌쳐서는 것을 보고 “아니다. 잘 가거라.” 말
하는데 섭섭하여 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주팔이는 다시 한번 하직하고 눈
물을 뿌리며 암자 밖을 나왔다. 주팔이는 따라나오는 김륜의 손을 잡고 “아우
님, 따라나오지 말고 들어가오. 선생님이 혼자 계시니 어서 들어가오. 아우님, 선
생님을 잘 뫼시고 지내시오.” 하고 김륜과 작별한 뒤에 한 걸음 두 걸음 걸
어서 산을 내려왔다.
삭불이가 팔월 초생에 서울을 떠난 뒤에 개성 와서 며칠 동안 유련하였고, 또
평양 와서 연광정과 부벽루로 돌아다니며 놀던 중에 밤 늦도록 술을 먹은 탈이
든지 우연히 병이나서 한 보름 동안이나 시름시름 앓았었다. 삭불이가 보현사
큰절에 와서 여러 중들을 보고 주팔의 용모를 대며 “이런 사람이 온 일 있소?
혹시 본 사람이 있나요?” 물어야 한 사람도 보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삭불이는 주팔이가 범에게라도 물려죽지 않았는가 생각하여 중을 보고 “그러면
올 봄 이후에 혹시 이 산에서 호환을 당한 사람이 없는가요?” 물으니 중은 고
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호환 없소이다. 호환은 고사하고 달리라도 오사하는 사
람이 없소이다. 금강산 같은 명산에도 간혹가다 제 명에 죽지 못하는 사람이 생
기지만 이 산만은 자초로 그런 일이 없소이다.” 하고 향산이 영산인 것을 자
랑하였다. 삭불이는 주팔의 종적을 찾으려고 헛애를 쓸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였
다. 서울 가서 이승지보고는 “묘향산을 구석구석 다 뒤지다시피 하였건만 주팔
의 그림자도 못 보았습니다.” 말하면 고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삼 일 동안 삭
불이는 큰절에서 묵으면서 중 하나를 앞세우고 이곳 저곳 구경을 다니었다. 삭
불이가 향산 들어온지 나흘 되던 날이다.
구경곳을 지도하던 중이 어디 가고 없어서 삭불이는 구경을 나서지 못하였다.
삭불이가 점심 먹고 심심하여 만세루에를 올라오니 머저 와서 앉은 사람이 있
다. 삭불이가 한참 동안 그 사람의 아래위를 훑어보다가 가까이 와서 “인사 청
합시다.”하고 말을 붙이니 그 사람은 저으기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할 뿐이
다. 삭불이가 재차 “뉘댁이시오?”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탐탁치 않아 하는
모양으로 “뉘댁이랄 것도 없지요. 나의 성은 류가요.” 하고 말하기를 피하려는
듯이 고개를 밖으로 돌려 천주암을 바라본다. 인사하려던 삭불이가 조금 무료하
여 ‘그 자식 못 배워먹은 자식이다. 남이 인사하자는데 고 모양이란 말이냐.’ 속
으로 생각하며 “여보 이분.” 하고 말을 붙이는데, 말투가 시비가락을 차리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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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불이는 일어선 채 앉지도 않고 앉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인사하다 말고
외면하는 것은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하고 주먹을 쥐는데 그 사람은 바
로 앉아서 삭불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배운 버릇이 아니올시다.” 하고 빙그레
웃는다. 그 말대답은 공손하나 웃는 모양이 사람을 같잖게 여기는 것 같다. 삭불
이는 그 웃는데 열이 났다. “못 배웠어? 좀 배워야지.” 하고 쥐었던 주먹으로
그 사람을 치려고 하였다. 그 사람이 어느틈에 손을 내밀어서 삭불의 팔목을 쥐
며 “이것이 무슨 짓이오.” 하고 여전히 빙그레 웃으니 삭불이는 열이 바싹 올
랐다. 그 사람에게 쥐인 팔을 채쳐 빼려고 하니 그 사람은 팔목을 놓으며 쪼그
리고 앉는다. 삭불이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에이 자식.” 하고 쪼그리고 앉
은 사람을 나동그라지라고 발길로 질렀더니 그 사람이 동그라지기는 고사하고
슬쩍 몸을 가로 비킨 까닭에 발길이 헛나갔다. 삭불이가 헛발길을 하고 몸이 잠
깐 휘뜩거리는 동안에 그 사람이 삭불의 디디고 섰던 다리를 잡아당기었다. 삭
불이는 궁둥방아를 찧었다.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삭불이를 그 사람이 잡아 앉
히며 “여보, 인사가 너무 과하였으니 인제 고만두고 앉아서 이야기나 합시다.”
하고 정답게 말하나 삭불이는 말도 아니하고 일어나려고만 한다. 일어나려면 잡
아 앉히고 잡아 앉히면 일어나려고 하여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동안에 삭불이는
얼굴의 핏대가 삭기 시작하여 얼마동안 잡아 앉히는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가 그제야 아까 말대답으로 “인사가 너무 과하것다. 아따 그래 그만두자.”하고
싹싹하게 웃었다. “유서방이랬지? 여보 유서방, 어디 사오?” “고향이 함흥이
오.” “함흥? 여기는 무엇하러 왔소?” “구경 왔소.” “구경? 언제 왔소?”
“삼월에 왔소.” 삭불이가 번번이 그 사람의 말을 한마디씩 뇌고 말끝을 달아
묻더니 “삼월?” 하고 뇌고서는 낯이 간지럽게 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사람이 빙글빙글 웃으며 “왜 그렇게 남의 얼굴을 들여다보시오?” 물
으니 삭불이가 “내가 댁 화상을 좀 볼 일이 있소. 댁이 정말 유가인가, 아닌가?
” 말하고서 역시 빙글빙글 웃는다. “그래 화상을 보니 유가 같소?” “유가
같지 않소. 양가 같소.” “화상 보는 법이 용하구려.” 삭불이는 이 말을 듣더
니 버썩 대어들어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며 “댁이 양주팔이 아니오?” 물은즉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대답한다. 삭불이가 찾으러 온 사람을 찾았
다. 삭불이는 맘에 기뻤다. 주팔이를 찾은 일보다 이승지 내외에게 생색날 일이
맘에 기뻤다. 삭불이가 “잘 만났소. 잘 되었소. 나는 이승지의 젖동생 김서방이
란 사람이오. 댁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소. 어제까지 사흘 동안 중 하나를 앞세우
고 이 암자 저 암자로 댁을 찾아다니었소. 암자도 경치게 많습디다. 오늘은 길라
잽이 중놈을 놓치고 찾아나서지 못했더니 못 나선 것이 잘 되었구려. 처음에 이
목구비를 보든지 앉은키 대중으로 보든지 서울서 듣고 온 말과 맞는데 그래도
몰라서 사실로 기연가미연가했어요. 성만 외대지 아니하였더면 쓸데없는 시비도
아니 날걸. 아무렇든지 잘 되었소. 어, 잘 만났소.” 하고 한바탕 수선스럽게 말
한 뒤에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 수작이 있었다. “대체 그 동안 어떻게 지냈
소?” “이 암자 저 암자로 다니며 얻어먹고 지냈지요.” “무얼 하고 지냈단
말이오?” “날마다 산에 올라다니는 것이 일이었소.” “그러면 별로 한 일도
없이 이승지 내외분 심려만 시켰구려. 지금 이승지 내외분은 심려하느라고 밤잠
을 못 잘 지경이오.” “미안하게 되었소.” “서울 가면 이승지에게 핀잔깨나
좋이 받으리다. 나는 이번 길에 죽을 고생하였소. 평양서 병이 나서 하마터면 객
사할 뻔하였소.” “불안하오.” 나중에 식불이가 “우리 내일쯤 떠납시다.” 말
하니 주팔은 “나는 오늘 산 밖에를 나갈 작정이오. 당신은 향산 구경이나 더
하시고 뒤에 오시구려.” 말한다. 삭불이는 일껏 찾은 생색거리를 놓칠까 보아
“구경이 다 무어요. 떠나려면 같이 떠납시다.” 말하여 그날 해가 거의 신시 때
나 된 뒤에 삭불이가 주팔이와 작반하여 향산을 떠나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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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팔이와 삭불이가 먼 길에 별 연고 없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승지 내외가
주팔을 보고 반가워하여 기한 어긴 것도 나무라고 소식 끊은 것도 원망하고 주
삼의 내외가 와서 기다리다 간 것도 이야기하고 첫아들 낳은 것도 자랑하고 또
향산 구경 이야기도 여러 차례 물어보았다. 그리하고 특별한 반찬을 해먹인다,
새옷을 지어 입힌다, 여러 가지 정다운 대접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하였다.
삭불이는 이승지에게 칭찬을 받았을 뿐이 아니라 부인의 몸 받아 나온 계집 하
인에게 부인의 치사를 받아서 생색이 바라던 이상으로 나게 되었다. 주팔이는
전날 거처하던 방에 삭불이와 같이 있게 되었는데, 그 전 혼자 있던 때와 달라
서 성가신 일도 없지 않지마는 말벗이 있는 까닭에 심심치 아니하고 또 그 동안
이승지의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기어서 전같이 번을 들지 아니하므로 밤
저녁 손님이 없는 때는 가끔 주팔의 방에 내려오기도 하고 주팔을 큰사랑으로
불러올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이승지가 낮에 집에 있게 되었는데 기어다니게 된 어린 아이를 처네
로 싸서 안고 주팔의 방에를 나왔다. 주팔이는 아랫목을 피하여 윗목 한구석에
앉고 삭불이는 마루로 나와 앉았다. 이승지가 안았던 어린아이를 방바닥에 내려
놓으며 “이놈이 한두 칸은 훌륭히 기어다니네.” 하고 아이를 주팔에게로 향하
여 엎치어 놓으니 주팔이가 손을 내밀며 “아가 이리 온 이리 온.” 하고 불렀
다. 어린아이가 주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기어돌아서 “아빠.” 하고 이승지에
게 매어달리니 이승지가 웃으면서 “오, 낯이 설어? 그렇지만 사내자식이 낯을
가려서야 쓰나.” 하며 두 손으로 아이를 붙들고 주팔을 바라보며 “얼마 전까
지도 엄마, 맘마밖에 모르던 것이 인제는 제법 아빠, 아빠 하네.” 하고 귀엽게
여기는 눈으로 아이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주팔을 바라보고 “전수히 외탁이야.
눈매든지 콧날이든지. 입 큰 것이나 친탁이랄까?” 말하니 빙그레 웃으며 보고
있던 주팔이가 “잘생겼어요.” 하고 아이를 칭찬하였다. 이승지가 어린아이를
붙들고 가동가동하다가 주팔을 보며 “자네도 얼른 장가를 들어서 이런 재미를
보아야 할 터인데.” 하고 창문 밖을 내다보며 “삭불아.” 불러서 삭불이가 “
네.” 하고 영창문 밖에 와서 섰다. 이승지가 “주팔이 재취가 급하니 상당한 곳
을 너도 좀 일러보아라.” 말하니 삭불이는 “글쎄올시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주팔이가 “급치 않습니다. 아직 고만두시지요.” 말
하는 것을 이승지가 “급치 않다니, 자네 나이가 사십이 내일 모레야. 그리고 자
네를 잡아앉히자면 살림을 차리게 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고 우리 내외가 공론
했네. 자네는 딴소리 말게.” 하고 삭불을 불러 내다보며 “네 생각에 물어볼 만
한 데가 있겠느냐?” 물으니 삭불이는 또 “글쎄올시다.” 하고 한참 있다가 “
한치봉의 첩노릇하던 계집이 있는데 사람도 얌전하고 나이도 지긋합니다. 올
서른네 살인가 그렇습니다. 치봉이 죽은 뒤에 친정 어미에게 가서 있다가 얼마
전에 그 어미가 죽었습니다. 올케 되는 계집사람이 사나워서 지금 하루를 같이
지내기가 민망할 지경이라나요. 그래서 몸만 의탁할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좋으
니 한 곳 지시하라고 소인에게 부탁한 일까지 있습니다. 그 계집이 어떻습니까?
” 하고 이승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승지가 “한치봉의 첩?” 하고 상을
찡그리다가 “대관절 사람이 어떠냐? 네가 잘 아느냐?” 말하는데 주팔이가 이
승지를 보고 “남의 첩노릇하던 계집이 고생살이를 잘하겠습니까? 그 계집만은
물어볼 것도 없이 고만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승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어린아이가 상을 찡그리며 끙끙거리었다. “이놈이 행실을 하는 것이로
군.” 하고 아이를 포대기에 도로 싸안고 일어서며 “그것은 이따 다시 이야기
하세.”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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