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조정암 이하 여러 사람이 쫓겨나고 보니 조정은 남곤 심정의 판이라 썩은 고
기에 쉬파리 꾀듯이 남고 심정의 집 문에 사람의 얼굴 가진 물건들이 수없이 많
아 모여들었다. 엊그제까지 조광조를 정암 선생이라, 김식을 사서 선생이라 하던
무리들이 “광조는 미친 놈이다.” “식은 소견없는 놈아다.” 하고 욕설하기를
예사로 하고 남곤 심정을 개도야지같이 여기고 죽일 놈같이 벼르던 사람까지 밑
못 씻겨서 한을 하고 얼굴 보는 것을 큰 영사로 생각하게 되니 권에에 붙좇는
쥐 같은 무리의 행사가 예나 이제나 다를 것이 없다. 유생들이 광화문 앞에서
야료하던 날 금부에 갇히는 축에까지 끼였던 황계옥이가 무리에 섞이어서 남곤
심정의 문하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뒤에 황계옥이가 두어 유생과 연명하
여 상소 한 장을 올리었는데, 그 상소는 광조 등의 죄상이 만만 중하여 죽이어
마땅하다고 말한 것이었다. 계옥의 상소 뒤를 받아서 남곤 심정의 동류인 대관
과 간관들이 좌의정 안당 이하 삼십여 인을 조광조의 당으로 몰아 죄를 주자고
성명 단자를 올리었다. 조광조등 여러 사람이 귀양길을 떠나던 날 김전이 우의
정이 되어 정부에 들어오며 안당이 좌의정으로 승차하였었다. 위에서 영의정 정
광필과 우의정 김전을 불러서 계옥의 상소와 대간의 단자를 보이고 어떻게 처치
할 것을 하순하니 정광필은 물론 불가하다고 말씀하였거니와 김전까지도 궁극스
럽게 다스릴 것이 없다고 아뢰었다. 위에서까지 “광조 등도 죄를 당한 뒤에는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치겠지. 지금 그 동류를 죄로 다스리는 것이 불가할 뿐 아
니라 애초에 붕당이란 말이 불가한 말이야.” 하고 말씀하는데 남곤 심정에게
불좇는 중신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대간의 의사인즉 사와 정을 함께 섞어
둘 수 없다는 것인 듯하외다.” 하고 얼굴이 뻔뻔한 말을 아뢰니 임금이 도리어
“사라고야 할 수 없지.” 하고 말씀하였다. 그리하여 조광조 등에게 가죄하지
아니하고 안당 등에게 죄를 주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더니 불과 수일 후에
뒤에서 엄교가 내리어서 이왕 죄받은 사람에게는 다시 죄를 더하고 아직 죄받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새로 죄를 주게 되었다. 이것은 그 동안에 안팎에서 참소가
들어간 까닭이다. 조광조는 능주서 사약을 받고 나머지 일곱 사람은 제주 남해
의주 온성 등 원방에 안치를 당하고 안당은 대간 단자 첫비두에 오른 사람이라
파직을 당하고 정광필은 안당을 구하다가 또 황계옥의 상소를 만나서 영중추로
좌천되고, 이장곤은 죄인이 자 부른것을 가만두었다는 죄목으로 대간의 탄핵을
만나서 삭직을 당하고 파성군과 숭선부정은 대간 단자에 이름이 올라서 원찬을
당하고 이학년까지도 결곤을 당하였다.
가죄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한 뒤에 덕수가 처가 하인 우음산이라는 장사와
자기 집 하인 주동을 데리고 밤 도와서 선산을 내려갔다. 덕수가 그 아버지를
보고 서울 소문을 말하니 그 아버지는 “불이 사방에서 일어나니까 무엇이든지
다 태우고 나서야 말 터이겠지.” 하고 한숨을 쉬는데 마침 김식을 보러 왔던 그
제자 이신이가 자리에 나앉으며 “가죄가 소인들의 농간인지 알 수 없으니 잠시
피하셨다가 사실로 임금의 뜻인 줄 아신 뒤에 자수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소인
들의 농간에 목숨을 바치시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고 말하니 옆에서
듣던 덕수와 덕순은 그 말이 일리가 없지 아니한 줄로 생각하였다. 이신이가 김
식이 모르게 덕수 형제와 의논하고 도망할 계획을 세웠다. 김식에게 양에 겨운
술을 권하여 정신없이 취케 하고 이웃의 마소까지 잠이 든 오밤중에 도망하게
되었는데,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이 취한 김식을 장사 우음산이 등에 업고 덕
순과 연중이가 좌우 양옆에 따라가며 부축하고 덕수와 주동과 이신이는 자박자
박 걸어서 뒤를 따라갔었다. 십리길을 넘어 간 뒤 새벽녘 찬바람에 김식의 술이
깨었다. 일이 이렇게 된바에 김식이도 할 길이 없어 영산 사는 제자 이중의 집
에 가서 은신할 곳을 작정하기로 하고 여러 사람을 데리고 영산길을 찾아가게
되었다.
15
이중은 학식이 유연하고 가세가 풍족하여 영산서 높이 행세하는 사람이라 그
집에 내인거객이 그치지 아니하여 분요한 때가 많았다. 어느 날 해진 뒤에 김식
의 일행이 그 집에 들어가니 이때 마침 이중이는 서울 가서 없고 그의 서제 이
용이가 집을 맡아보고 있는 중이라 이용이가 김식의 행색을 수상하게 생각하며
일행을 맞아들이었다. 이용이는 김식이가 도망길 나선 것을 안 뒤에 “내일이라
도 곧 하인 하나를 서울 보내서 형님을 내려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집의 사
랑은 사람의 왕래가 많아서 비편하니 형의 소실의 집을 치워 드리겠습니다.”
하고 시원시원하게 말하여 이중이 없는 것을 은근히 걱정하던 김식 삼부자가 일
제히 안심이 되었다. 이중의 첩의 집을 치우고 일행이 옮긴 뒤에 이용이가 틈틈
이 와서 보고 밤저녁 일 없는 때는 오래 앉아 이야기하여 도망꾼들의 맘이 적지
아니 위로되었다. 하룻밤은 이용이가 김식 삼부자와 같이 은신할 곳을 이야기
하다가 “형님이나 오고 한 뒤에 차차 의론하면 은신하실 곳은 있겠지요마는,
어디로 가시든지 일행이 많은 것이 걱정입니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히 탄로나기
쉬우니 저의 소견 같아서는 자제들과 하인들은 보내시고 홀몸으로 피하여 다니
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말하니 김식이는 옳게 듣고 덕수 형제를 돌아보며 “이 사람의 말이 옳다. 너희
들은 다 가는 것이 좋겠다. 나 혼자 여기 있다가 이 사람의 백씨 오거든 의논하
여 할 터이니 너희들은 곧 가도록 해라.” 하고 말하였다. 덕수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고 “그렇기도 합니다만 혼자야 말씀이 됩니까? 주동이나 연중이나 하나
를 데리고 다니시지요.” 말하고 덕순이는 그 형을 돌아보며 “형님이 하인들과
이신이를 데리고 가시면 내가 아버지를 뫼시고 다니지요.” 말하여 의논을 얼른
정치 못하는데 이용이가 “하인 하나쯤은 관계없을 듯합니다.” 말하고 덕수 형
제를 돌아보며 “형제분이 가신대도 따로따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체 이신이란 자는 하인도 아니고 그거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서 김식이가
“그자는 본래 관노 출신으로 중노릇한 일도 있고 또 퇴속하여 미장이 노릇한
일도 있는 자인데, 내 집에 담을 치러 왔을 때 우연히 사람이 공부할 정이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두고 글자를 가르쳐 준 일이 있어.” 하고 이신의 내력을 말한
즉 이용이는 “목자가 보기에 시원치가 않습니다. 그자를 먼저 보내십시지요.”
하고 말하였다.
이튿날 김식이가 이신을 불러서 “우리가 여럿이 함께 다니기도 비편하고 하
여 서방님 형제도 장차 보낼 작정인즉 너부터 떠나가거라.” 하고 이르니 이신
의 말이 “영감께서 어디 가서든지 안신하시는 걸 보입고 가야지, 인정도리에
중도에서 떠날 수가 있습니까?” 하고 이신은 고만두고 덕수더러 주동을 데리고
떠나라고 하니 덕수가 가더라도 좀더 뫼시고 있다 가겠다고 말하다가 “집일이
어찌 될지 몰라서 심려가 적지 않으니 너는 우선 서울로 도로 가보아라. 더 같
이 있다 가면 무엇하느냐? 잔말 말고 떠나거라.” 하고 일러서 덕수는 할 수 없
이 내려올 때 같이 왔던 주동을 데리고 서울길을 떠나게 되었다.
김식이가 영산을 온 뒤 십여 일 만에 이중이가 서울서 내려왔다. 그 선생의
은신할 곳을 이중이가 이리 저리 생각하여 보다가 영축산 절벽 위에 있는 법화
사에 친한 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김식에게 말한즉 김식의 말이 “일전에 내
가 괘를 하나 뽑아본즉 산인훼사란 말이 있고 또 덕순이가 서울서 올 때 어떤
점쟁이가 중이 일을 낭패한다고 말하더라니 절로 갈 묘리가 없지 않은가?” 하
여 이중이는 “글쎄요.” 하고 생각하는데 이용이가 옆에서 김식을 보고 “이신
이가 중노릇한 일이 있다셨지요?” 하고 일깨우니 김식부터 이신을 믿지 못하는
까닭에 “그러면 보내지.” 말하고 이중이도 “신이도 중노릇한 일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올곧지 못하니 곧 보내십시다.” 말하여 이신 보낼 공론을 하는
중에 이용이가 “큰일을 당하여는 조그만 인정을 돌볼 수 없으니 만일 의심이
나거든 보낼 것이 아니라 죽여 없이 합시다.” 하고 권하였으나 김식이가 “점
같은 것을 믿고 사람을 죽이는 법이 있나? 길양식이나 후히 주어서 보내지.”
하고 곧 이신을 불러 가라고 말하여 떠나보내었다.
16
이때 철원 현감 하정은 김식의 철친한 사람이라 김식은 칠원 가면 잠시 피신
할 수 있을 것을 생각하여 덕순을 앞서 보내어 통기하고 그 뒤에 곧 칠원으로 오
는데, 현감을 찾아오는 예사 손님의 행색을 차리느라고 김식은 말을 타고 연중
과 우음산은 말 뒤를 따랐었다. 하현감이 중로까지 하인을 내보내서 관아로 맞
아들이어 팔구 일 동안 같이 거처하였다. 관속들의 눈이 있어 관아에서 더 오래
묵이기가 어렵게 되니 하현감은 김식에게 말하고 자기의 본집으로 가게 하였다.
내일이면 떠나기로 되던 그 전날 밤에 김식이가 덕순을 조용히 불러가지고 “
부자가 같이 다니자면 탄로나기 쉬운 것은 고사하고 남에게 누가 적지 아니하니
우음산만 남겨두고 너는 연중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거라. 서울집도 성하게 있을
는지 모르나 만일 위태한 일이 있거든 어디로든지 피신하여 구명도생하려무나.
너는 망명죄인의 아들일 뿐이지 무슨 죄야 있느냐. 그다지 위태한 일도 없겠지.
” 덕순이가 우음산 대신 남아 있겠다고 눈물을 흘려가며 말하였으나 그 아버지
가 “아비의 맘을 더 괴롭게 하지 마라.” 하고 말하여 덕순이는 더 말하지 못
하였다. 이튿날 덕순은 그 아버지의 말대로 연중을 데리고 서울로 떠나고 김식
은 우음산을 데리고 현감의 본집으로 와서 이곳에서 달포 넘어 묵었었다.
이신이가 영산서 떠나는 길로 곧 서울 올라가서 김식이가 지금 이중의 집에
있는데 그 아들과 문객을 데리고 남곤과 심정과 홍경주 세 사람을 해치려고 음
모하는 중이라고 고발하여 김식의 부자를 잡으려고 금부도사가 영산을 내려갔
다. 하현감이 서울 소문을 듣고 곧 기별하여 김식이는 조마조마하게 며칠을 지
내는 중에 금부도사가 칠원읍으로 가더라는 소문을 듣고 자기를 잡으러 간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그날로 현감의 집을 떠나서 무주 사는 제자 오희안의 집을 찾
아가는데 그 동네 가까이 와서 길가 농군에게 집을 물으니 농군이 “저기 저 산
밑에 있는 큰 집입니다.” 하고 집을 가리키고 “오서방님은 망명죄인을 집에
붙였다고 엊그제 서울로 잡혀 갔지요. 동네서 다 알다시피 언제 붙이기나 했나
요.” 하고 분히 여기는 말이었다. 김식이가 이 소식을 듣고는 오희안의 집으로
들어갈 덧정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섰다. 지향 없는 길을 걸어서 지리산 속을 들
어왔다.
우음산이가 인가를 찾아가서 보리밥술을 얻어다가 한두 끼 먹기도 하였지만
김식은 며칠 동안 생솔잎을 씹어 허기를 면하고 바위 밑에서 잠을 잤다. 김식이
가 사약받은 조정암을 생각하고 또 원방 안치된 여러 친구들을 생가하여 선산
있다가 가죄를 당하여 절도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을 공연히 망명하여 누명을 입
게 되었다고 후회하였다. 면치 못 할 죽음을 면하려고 헛애 쓸 것이 없다고 맘
을 먹었다. “내가 배가 정히 고파 견디기 어려우니 고사리라도 캐어오너라.”
하고 우음산을 보낸 뒤에 옆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에 목을 매었다.
덕순이가 서울 집에 온 뒤 얼마 되지 아니하여 금부도사가 금부 나졸을 거느
리고 김식의 집을 나오는데 다행히 선통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덕수는 상투를
풀어 머리를 쪽지고 그 안해는 옷을 입고 안여편네들 틈에 숨어 있었다. 그때는
백호를 치지 아니하였던 까닭에 머리를 고치기가 용이하였고 덕수는 수염이 없
던 까닭에 사나이 표가 나지 아니하였다. 금부도사가 와서 집안을 뒤지니 사나
이는 하나도 없고 젊은 여편네들만 마루 구석에 뭉쳐 섰었다. 금부도사가 김식
의 부인을 보고 말을 물었다. “자제들은 어디 갔소?” “선산서 아니 왔세요.”
“큰자제는 왔다는데?” “몰라요. 아직 집에는 오지 아니했세요.” “알 수 없
는 일이군. 저 젊은이들은 다 누구요?” “며느리하고 먼촌 조카딸이에요.” 그
중의 한 여편네가 얼굴은 조금 여편네답게 어여쁘지 못하나 손은 분같이 희고
가냘폈다. 금부도사가 “그러면 당신이나 갑시다.” 하고 김식의 부인을 잡아갔
다.” 우음산이가 지리산에서 내려와서 자수하여 어명으로 김식의 시체를 검시
까지 하게 된 뒤에 김식의 부인이 놓여나왔다. 김식의 시체는 영남서 운구하여
충주 권폄하게 되었는데 일을 주장하여 한 사람은 김식의 부인 이씨요, 부인의
뒤를 받들어 일을 보살핀 사람은 김식의 제자 신명인이었다.
제 4장 뒷일
1
이중은 김식을 감춘 죄로 부령에 안치되고 오희안은 김식과 통모하였다는 죄
목으로 벽동에 찬배되고 하정은 김식과 무슨 음모를 같이 하였다고 무지무지한
곤장 사백여 도에 구경 장폐를 당하고 그 외에도 김식의 제자와 문객으로 죄를
당한 삶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신은 고발한 공으로 양민이 되어 충청도에 가서
살다가 강도 와주로 몰리어 그 고을군수 손에 맞아 죽었다. 뒷날 이야기는 고만
두고 이신이가 처음 고발할 때 김덕순과 박연중의 장사인 것을 말하여 남고, 심
정은 특별히 덕순과 연중을 잡으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영남 대로는 각
고을 군교를 풀어 목목이 지키며 행인을 기찰하게 하고 김식의 서울집은 근처에
포교를 묻어 출입하는 사람을 일일이 살피게 하였다. 숭선부정은 덕순의 장인이
요, 연중의 상전이라 속으로 소식을 통할는지 모른다고 옥에 잡아 가두었다가
애매하게 형장 개를 때리어서 영해로 귀야을 보내었다. 남곤은 덕순을 잡지 못
한 것이 큰 근심이되어서 밤잠을 편히 자지 못하였다. 자는 처소를 남에게 알리
지 아니하려고 하룻밤에 잠자리를 대서여섯 군데로 옮기는데 잠이 들려말려 할
때에 덕순이란 세차 보이는 남자가 칼을 들고 눈앞에 나서서 소스라쳐 잠을 깨
는 일이 많았었다.
덕순이와 연중이는 철원서 떠나서 서울로 오는 길에 문경 새재 근처에 와서
소로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우연히 어느 적굴에를 들어갔었다.
화적들이 두 사람을 해치려고 하다가 망명 죄인 김식의 아들 김덕순의 노주인
것을 알고 손님으로 맞아들이어 대접을 융숭히 하고 그중에 수두 되는 자가 덕
순을 대하여 “서방님, 서울 가실 것 없이 우리하고 같이 지냅시다. 지금 임금도
요전 임금같이 내쫓기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급살을 맞거나 해서 세상이 변하거
든 서방님이 나가셔서 보구니 숭륭대부도 하고 마치뚝딱대장도 하시구려. 지금
서울 갔다가 소인놈들 손에 조광조처럼 죽으면 무엇하오. 내 말대로 어디 같이
지내봅시다.” 하고 덕순을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니 덕순은 생각하였다. 자기 수
하에 무기를 갖추가진 강병이 수천 명만 있으면 거침없이 서울까지 지쳐올라가
서 남곤, 심정의 무리를 잡아다가 천참만륙 하겠으나 끝에 녹이 슨 창 개와 날이
무딘 환도 개 외에는 모두 박달나무 방망이밖에 가지지 못한 화적당으로 육십
명은 소용이 없었다. “서울집 일이 걱정이니까 올라가 보아야겠소. 형님이 있지
만, 몸이 약해서 급한 때는 자기 한몸도 주체궂어 할 사람이니까 어머니와 여러
식구들을 어떻게 하겠소. 내가 올라가 보아야지.” 하고 수두의 말을 거절하였
다.
그러나 날마다 “내보내 주리다.” 하고 말하면서 좀처럼 내보다 주지 아니하
는 수두에게 붙잡히어 덕순의 노주 두 사람은 그 적굴에서 한 달 가까이 묵었었
다. 길을 나서 보니 한 달 전이 옛날이었다. 길목마다 수직하는 각 고을 군교들
이 행인을 맘대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여 인심이 소란할 지경이었다. 덕순이와
연중이는 낮이면 으슥한 산골이나 궁벽한 촌가에서 숨어 지내고 밤이면 길을 걸
었다. 나중에 서울까지 무사히 오게 되었으나 덕순이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가
위태하여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점잖은 갖바치를 생각하고 연중이를 데리고
혜화문 안을 찾아왔다.
이때 갖바치는 문 밖에 나섰다가 두 사람이 인사도 하기 전에 “어서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하고 앞서 방문을 열어주고 덕순의 노주가 방에 들어앉은 뒤에
갖바치는 안으로 들어가서 밥 두 상을 갖다 주며 “시장들 할 터이니 어서 밥들
을 잡수시오.” 하고 말하는데 그 밥상이 미리 올 것을 알고 차려둔 것 같았다.
밥상을 치운 뒤에 덕순의 아버지가 지리산 속에서 자결한 것과 덕순의 어머니가
옥에 갇히었다가 얼마 전에 놓이어 운구하러 내려간 것과 덕수가 어디로 도망한
것과 덕순과 연중을 잡으려고 경향이 소란한 것을 갖바치가 대강대강 이야기하
여 들리었다. 덕순이는 천지가 아득하였다. 처음에는 넋잃은 사람같이 앉았다가
한동안 뒤에 갑자기 자리에 엎드러지며 소리없이 우는데 흘러나오는 눈물이 흥
건하게 자리에 고이고 흑흑 느낄 때마다 허리 위가 꿈틀꿈틀 하였다. 연중이가
일변 눈물을 뿌리며 흔들어 말리나 좀하여 그치지 아니하였다. 덕순이가 또다시
갑자기 머리를 들고 이를 가는데 그 얼굴이 귀신을 밟고 섰는 금강과 같이 무서
웠다. 덕순이가 “남곤이란 놈을.” 하고 주먹을 쥐고 일어서려고 하니 갖바치가
“정신없는 소리 마시오. 주먹으로는 원수를 못 갚소.” 하고 붙들어 앉히었다.
덕순이가 다시 얼빠진 사람같이 우두머리 앉았다가 갖바치를 보고 “집에나 좀
가보고 오리다.” 하고 말하니 갖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은 그리 하시오.
그렇지만 포교들의 눈이 무서우니 조심하시오.” 하고 가는 것을 말리지 아니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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