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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9)

카지모도 2022. 10. 6.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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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덕순이가 상투를 풀어 귓머리를 땋은 뒤에 머리꽁지에 흰 오라기 당기를 들이

고 흰 무명 고의적삼만 입고서 웃옷을 입지 아니하고 망건 자죽을 가리려고 머

리를 수건으로 동이고 짚신을 신고 나서니 훌륭한 총각 상제라, 아무리 눈밝은

포교라도 이 총각이 김사성댁 둘째 자제로는 알아낼 수 없게 되었다. 덕순이가

을쇠로 변하여 가지고 갖바치와 같이 흥인문 밖에를 나왔다. 이판서가 두 사람

이 왔다는 말을 듣고 곧 방으로 들어오라 하여 갖바치는 장지 밖에 앉고 덕순이

는 갖바치 옆에 섰는데, 덕순의 옷깃이 눈물에 젖을 뿐 아니라 이판서의 눈에도

눈물이 돌았다.

갖바치가 말을 하기 시작하여 이판서와 이런 말 저란 말 하는 중에 이판서의

맏아들 함동이가 들어왔다. 함동이가 갖바치를 보고 친숙하게 인사 하였다. 이판

서가 덕순을 가리키며 “너, 저 사람에게 절해라.” 하고 일러서 함동이가 절하

려고 할 때, 갖바치가 “새로 생긴 외삼촌이야.”하고 함동이에게 말하며 덕순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절하고 난 함동이가 두 손을 맞잡고 그 아버지를 향하여

“진지 여쭈러 나왔습니다.” 하고 나온 까닭을 말하니 이판서는 먹는다 아니

먹는다 말이 없이 “너의 어머니에게 말하고 안 뒤 별당채를 치우라고 해라.”

하고 일렀다. 함동이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 이판서가 갖바치를 보고 “아침밥을

같이 먹세.” 하고 말하는데 갖바치가 “아닌게 아니라 우리도 아침을 먹지 않

았습니다. 새벽부터 수선을 부리다가 그대로 왔습니다.”하고 말한즉 이판서는

“그러기에같이 먹자고 말하지 않나.” 하고 적이 웃었다. 별당에 들어와 앉은

뒤에 이판서가 갖바치를 돌아보며 “아침밥 먹기 전에 남매간 만나보게 하지.”

하고 빙그레 웃으니 갖바치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판서가 부인을 별당으로 오라 하여 그 부인이 아이종 하나만 데리고 별당에

들어와서 마루에 올라서는데, 갖바치가 눈짓으로 가리켜서 덕순이는 잠깐 주저

주저하다가 마루로 나가서 부인을 향하여 공손히 절하였다. 부인은 맞지 않고

받기가 미안하든지 유표하지 않게 슬그머니 몸을 비키었다.

이리하여 덕순이가 유명한 함흥 봉단이를 누님으로 상면하였다. 나이 삼십오

륙 세 된 소복 입은 부인이 얼굴에 복기가 많을 뿐 아니라 태도에 점잖은 것이

드러났다.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내다보는 이판서는 ‘여편네는 까닭

없는 눈물도 잘 흘린다.’ 생각하고 뜰 아래에 섰는 아이종은 ‘양자로 들어온

동생을 보시고 부모 생각을 하시는 게다.’ 생각하였지만 부인은 참말 저러한

동생이나 하나 있었더면 본집이 없어지다시피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

고 눈물을 흘린 것이엇다. 부인이 이면 수습으로 덕순에게 말을 붙이는데, 차마

또렷하게 ‘해라’를 하지 못하고 말 뒤가 없이 말하였다. 아침 뒤에 갖바치는

덕순을 뒤에 남겨두고 돌아갔다. 덕순이가 양을쇠가 되어 이판서집 별당채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이판서 말은 대감이라 하고 이판서 부인 말은 누님이라고

하고, 이판서집 하인들에게는 도령 칭호를 받고 이판서의 아들딸에게는 아저씨

소리를 들었다. 이판서는 열네 살 먹은 함동이, 아래로 여덟 살 먹은 딸과 네 살

먹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외삼촌 아저씨.” “외삼촌 아저씨.” 하고

덕순을 따랐다.

덕순이가 태평으로 지내며 성안 소문을 들어보니 며칠 동안 포교들이 벌떼 헤

어지듯이 사방에 흩어져서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도 죄없이 잡아갈 것같이 무시

무시하고 서울 안을 가가호호 적간하는데 묻는 것은 김덕순이와 박연중이 두 사

람이었다고 하였다. 어느 날은 동부도사가 이판서를 와서 보고 “김식의 아들

김덕순이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판서는 서슴지 않고 “본 일이

있지.” 하고 대답하였다. “아, 언제 보셨세요.” “연전까지 보았지. 작년 설에

도 아마 내게 세배를 왔었지.” “네, 작년 겨울 이후에는 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려.” “볼 수가 있나? 말을 들으니까 덕순이가 나를 원수로 알아서 남정승보

다 나를 먼저 처치하겠다고 벼르더라는걸.” “대감을 원수로 알다니 지각없는

자올시다.” “저의 아버지를 잡아 가두고 귀양 보내고 할 때 내가 금부에서 있

었으니까 내 맘을 알아주지 못하고 원수로 벼르기도 용혹무괴이지.” 도사는 다

시 수어하다가 돌아갔다. 저녁때 사람 없는 틈에 이판서가 덕순을 보고 도사와

수작하던 말을 옮기고 가만히 “네가 내가 와서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 하고 빙그레 웃었다.

 

7

남곤이가 자객이 왔다 갔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얼마 동안은 얼굴이 사색이

되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었다. 밖에 나서기가 무서워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첩의 집에 숨어 엎드려서 밤을 지내는데, 밖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깜

짝 놀라니까 그 첩이 보다 딱하여 “여보시오 대감, 아녀자가 부끄럽지 않으시

오? 그렇게 질겁을 하시다간 간이 졸아붙으시겠세요.” 하고 비웃어 말을 하니

남곤이가 그래도 첩에게 취조하게 된것은 비위에 거슬리어 “방자하게 되지 못

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하고 뇌까리고 “어찌하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

단 말인가.” 하고 자탄하며 해가 높이 뜬 뒤에도 남곤이는 겁이 남았던지 자기

집 하인과 의정부 하인들을 불러다가 전후를 옹위케 하고 큰집에를 돌아왔었다.

늙은 청지기에게 전후 사실을 대강 들은 뒤에 골방에 갇히었던 상노를 불러

친히 자객의 말을 물어보니 상노는 곤히 자다가 놀라 일어나 잠결, 겁결에 본

일이라서 대답이 똑똑치 못하였다. “첫째, 사람이 몇이더냐?” “둘인 것 같았

습니다.” “두 놈이 다 칼을 가졌더냐?” “아마 칼들은 갖지 않았었습니다.”

“아마가 무어냐? 똑똑치 못한 놈 같으니, 그래 그 도적놈들이 나이 젊더냐?”

아마라고 말하다가 꾸지람을 받은 상노가 생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한 놈은

몸집이 뚱뚱한데 한 사십 넘어 보이고 또 한 놈은 하늘 파충하게 키가 큰 데 한

삼십쯤 되어 보입디다.” 옆에 섰던 청지기가 “이놈, 어젯밤에 내가 물을 때는

그것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하고 책을 잡으니 그 상노가 “지금 가만히 생

각해 보니까 그런 듯해요.” 하고 고개를 숙이었다. 남곤이가 어이가 없어 “에

이놈, 저리 가거라.”하고 상노를 물리치고 마당에 떨어졌던 수청 청지기를 부르

려고 하다가 그 청지기가 뒷골이 쪼개져서 집에 나가 누웠다고 하므로 그러면

물을 것 없이 그만두라고 하였었다. 자객이 도망하는 것을 본 사람은 한둘이 아

니었으나 어둔 밤에 본 것이라 그 말이 다 각각이엇다. ‘흰옷 입은 것이 화초

밭으로 뛰어갔다.’, ‘검은 그림자가 후원으로 들어갔다.’,그중에 심한 말은 관

쓴 것이 번쩍하더니 없어지더라 하고 그것이 도깨비 짓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

였었다. 남곤의 집은 북악 밑으로 후원에 폭포도 있고 바위도 있었다. 자객들이

처음에 북악산 기슭으로 들어와서 바위 뒤 같은 데 숨어 있다가 나중에 다시 산

기슭으로 도망한 것이라고 생각들 하였었다. 남곤이가 칼 맞은 베개를 가져오라

하여 베개를 입힌 자리옷이 허리가 잘린 것을 보고 몸에 소름이 끼쳤다.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옆에 있던 일가 사람을 돌아보며 어둔 밤에 홍두깨로 “여

보게, 내가 소인인가?” 하고 물어서 그 일가 사람이 당황하여 하다가 “글쎄요.

” 하고 대답한즉 남곤은 “소인, 소인.” 하고 입으로 중얼거리다가 손으로 방

바닥을 치며 일어섰었다.

그날 낮에 남곤이가 심정이를 찾아왔었다. 어젯밤 자객의 변을 말하고 김식의

아들 김덕순이와 그 하인 박가가 모두 장사라니까 분명 그놈들의 짓으로 생각한

다고 말한즉, 심정이도 역시 그러할듯하다고 하고 “들으니까 김식의 장사를 충

주서 지냈다고 하니 김식의 무덤 근처를 엄밀히 기찰하게 하면 덕순의 종적을

알게 될 것 같소이다.” 하고 말하여 일변으로 서울 안에서 가가호호 적간을 하

게 하고 또 일변으로 충주를 내왕하는 사람을 기찰하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심

정이가 주안 한 상을 내오라고 하여 주객이 두서너 잔 술을 마시었을 때, 한 사

람이 뜰 앞으로 지나가며 큰소리로 “두 소인이 마주 앉았구나.”하고 껄껄 웃

으니 남곤이가 발끈 화를 내며 “여보 대감, 저게 누구요?”하고 물었다. 심정이

가 “그것이 소인의 아우올시다. 실성한 사람이에요. 가릴 것이 못 됩니다. 소인

의 낯을 보아 용서하십시오.”하고 빌다시피 말하니 남곤이가 “실성한 사람이

군자, 소인을 어찌 구별하겠소?”하고 화가 풀리지 아니하였다. “구별을 못하기

에 대감을 소인이라고 하고 또 저의 형을 소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구별없

이 하는 말 같지는 않은데.”하고 남곤이는 쓴입맛을 다시었다. 대개 남곤이가

자기로도 소인이거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이 소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을 들을 때는 화가 가는 것을 걷잡지 못하였었다. 구렁이를 보고 구렁이라고

하면 싫어한다는 격이였었다.

 

제 5장 형제

 

1

심정의 아우 심의는 심지의 정직한 것이 그 형의 간교한 것과 다르고 성미의

소탈한 것이 그 형의 악착한 것과 달라서 그 형과 같이 이끗을 밝히지 아니하므

로 벼슬은 비록 당하 육품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숭품 중신인 그 형으로는 비하

여 말할 수가 없도록 인품이 높았었다. 그 형의 처심과 행사가 올곧지 아니한

것을 볼 때에 눈물을 흘리며 간한 일까지도 없지 않았으나 그 형의 말로는 “오

냐, 너의 말이 옳다.”하고 뉘우치는 빛을 보이면서 그 처심과 행사는 고치지 아

니하여 항상 근심으로 지내더니 그 형이 남곤과 부동하여 조광조 이하 여러 명

사를 모함한 뒤에는 심병이 나서 실성한 사람같이 되었었다. 심정이가 형제간

우애만은 제법 무던하여 아우의 병을 고치려고 갖은 애를 다 쓴 까닭에 그의 병

이 조금 가라앉았으나 세상에 낙이 없는 사람같이 입을 벌리고 웃는 일이 없었

었다.

어느 날 심의가 길가에서 우연히 최수성을 만나서 “원정 오래간만일세, 언제

서울 오셨나?”하고 말을 붙이니 최수성이 “나는 누구라고? 사마우 일세그려.

”하고 허허 웃었다.

사마우는 공자의 제자이니 공자를 죽이려던 환퇴의 아우이다. 심의가 잘못 알

아듣고 “마우라니? 사람이 아니고 마소란 말인가?” “아니, 자네 형이 환퇴만

큼 갸륵하단 말일세.”하고 얼굴을 젖혀들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심의는 무료하

였다. “지금 자네 어디를 가나?” “우리 숙부 되시는 승지영감을 잠깐 보고 그

리고 곧 좋은 친구 하나를 심방할라네.” “좋은 친구라니 누구?” “좋은 친구가

있지. 자네 같이 가려나?” “가지, 그렇지만 자네 숙부에게는 가기 싫어.” “그

러면 숙부 문안은 제례하지.”하고 최수성이 심의를 데리고 심방한 좋은 친구는

혜화문 안 갖바치였다. 심의가 갖바치를 안 뒤로는 거의 매일 찾아다니게 되어

서 얼마 아니 지나는 동안에 서로 정분이 생기었다.

별로 나다니지 아니하던 심의가 날마다 출입하는 것을 그 형이 알고 “요새

어디를 그렇게 다니니?”하고 물으니 심의는 갖바치에게 다니는 것을 그 형에게

말하고 싶지 아니하든지 거짓말로 “성균관 근처로 소풍 다닙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소풍 좋지, 그렇지만 혼자 다니지 말고 아이놈이라도 데리고 다

니지.” “아니놈 성가시어요.” “좋을 대로 하라.그러면 술이나 한 병씩 차고 다

니지.” “그건 좋겠지요.”

이리하여 심의는 갖바치와 둘이 마주 앉아 술 한병을 마시는 것으로 낙을 삼

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못할 말이 없이 된 뒤에 심의가 자신의 처신할

도리를 물으니 갖바치는 종이쪽지에다가 붓장난하듯이 광야우야, 무재무해라는

여덟 글자를 써 보이었다.

미친 것이냐? 어리석은 것이냐? 재가 없고 해가 없다는 뜻이다. 심의는

이윽히 들여다보더니 맘에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심의가 웃기를

시작하였다. 그 웃음이 나날이 늘어서 너무 과하도록 많아졌다. 심정이는 그 아

우의 웃음 많은 것이 역시 병이라고 생각하여 의약으로 고치려고 하였으나 심의

가 약을 먹지 아니하였다. 심의가 그 형을 보고 성균관 근처에 집을 사서 분거

하게 하여 달라고 말하여 형제 각거하게 되었는데 심정이는 그 아우가 소풍하기

편한 것을 취하여 동촌을 소원하거니 생각하고 갖바치와 가까이 살며 상종하려

는 것은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심의가 동촌으로 이사온 뒤에 며칠 지나지 아니

하여 갖바치가 이삼 일 동안 양주땅에 갔다 온다고 하더니 이틀 되던날 저녁때

찾아와서 “양주 와서 사는 동향 사람의 안해가 난산으로 위경이라고 하기에 가

보려고 했더니 다른 볼일이 생겨서 가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하니 심의는 “시골 안 갔거든 안 갔다고 기별이나 하지 나는 이틀 동안

심심해서 선비들 글 짓는 데 차작해 주고 소일했소.” “기별할 틈도 없었어요.

” 이 이틀 동안이 덕순이와 연중이가 갖바치에게 와서 묵던 때다. 갖바치가

심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서울 재미가 없어서 어는 시골로 가려고 맘을

먹은 지는 오래나 소위 가속이란 것의 모자가 누가 되어 주춤주춤하니까 시원할

것은 없으나 따라갈까 생각합니다. 동촌으로 이사오시자 시골로 가게 될 모양이

니 미리 섭섭합니다.” 하고 말하니 심의는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오. 못 하

오. 못가오.” 하고 펄쩍 뛰다시피 하였다.

 

2

갖바치의 집 세 식구가 이판서의 돌보아 주는 힘으로 호구하는 것은 심의가

이미 아는 사실이라, 갖바치를 이판서 따라가지 못하게 하자면 첫째 시량을 보

아주어야 하겠고, 남의 시량까지 보아주자면 우선 형에게 분재를 청하여야하겠

다고 심의는 생각하고 곧 갖바치더러 “나 형님 좀 보고 올라오.” 하고 가장

급한 일이나 있는 듯이 분주히 형의 집에를 왔더니 그때 마침 그 형이 남곤이와

같이 술을 먹는 중이라 그대로 돌아서려다가 짓궂이 한번 뜰 아래로 지나가며

소인들이라고 형을 휩쓸어 욕을 하고 형의 집에서 나오는데 대문간까지 나오도

록 미친 웃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 이튿날 첫새벽에 심의가 다시 형을 보러 쫓아온즉 큰사랑은 물론 덧문이

열리지 아니하고 수청방까지 괴괴하였다. 비부쟁이가 마당에서 비질을 하다가

비를 놓고 “나으리 일찍 행차하셨습니다. 대감께서는 아직 기침 않으셨습니다.

” 하고 다시 빗자루를 잡으려고 하는데 심의가 공연히 한번 허허 웃고서 “비

를 나 좀 다오. 내가 하번 비질을 해보겠다.” 하고 비를 받아들고 또 한번 허허

허 웃었다. 마당에서 한두 번 비질을 하다가 댓돌로 올라오고 댓돌에서 한두 번

비질을 하다가 마루로 올라와서 수청방 앞에 서서 한바탕 늘어지게 웃으니 방안

에서 자던 청지기들이 놀라 일어났다. 청지기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오며 “나

으리 오셨습니다그려.” 하고 자던 눈을 비비니 심의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

고 “이놈들, 어젯밤에 노름했구나. 어 죽일 놈들!” “이놈들, 어젯밤에 계집장

에 갔었구나. 어 죽일 놈들.” “이놈들, 어젯밤에 술을 처먹었구나. 어 죽일 놈

들.” 하고 횡설수설한 뒤에 큰사랑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마루에는 고사하

고 덧문에까지 비질을 하니 그 비는 싸리비라 소리가 요란하였다.

심정이가 늦잠이 들어서 곤히 자다가 놀라 깨어 “어떤 놈이 이러느냐?” 하

고 불호령하는 소리가 밖에 들리었다. 심의가 비를 들고 서서 큰소리로 껄껄 웃

고서 비를 마당으로 내던지니 이때껏 작은댁 나으리의 하는 짓을 보고 있던 비

부쟁이가 비를 주워들고 가만히 혼잣말로 “아무래도 미쳤어.”하고 다시 비질

을 시작하였다. 심정이가 아우의 웃음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 앉으며 수청

자던 상노를 시켜 덧문을 열어놓으니 심의가 신을 벗으며 말며 진동한동 방으로

들어와서 곧 형의 앞에 엎려 방성대곡을 하는데 펑펑 쏟아지는 눈물이 거짓

울음 같지 아니하였다. 심정이는 놀란 위에 더 놀랐다. 앞에 가리었던 누비처네

를 헤치고 나앉아서 아우를 붙들고 “이애, 왜 이러느냐? 이애 이애, 말을 하여

라. 말을 해. 응, 이애.” 심의는 울음 반 말 반으로 “여보 형님.” 하고 엉엉

울고 “엊그저께 밤 꿈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었어요.” 하고 또 엉엉 우니 심

정이가 “이애, 울지 말고 말을 해라. 그래 아버님과 어머님을 뵈었어? 그래?”

하고 어린아이 달래듯이 말하여 심의는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일어 앉아서 이야

기하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오셔서 나를 보시고 너의 형은 땅도 사고 종도 사고 자꾸

사는데 너는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산단 말이냐? 양주 곧은골땅 이십 석 자리

와 광주 너더리땅 오십 석 자리와 왕십리 미니리논 열 마지기와 방아다리 배채

밭 사흘가리와 천쇠어미와 상길이 내외는 너의 형더러 달라고 말을 해라. 영절

스럽게 말씀을 하시더니 어젯밤 꿈에 또 두분이 같이 어셔서 형더러 말하라니가

왜 말을 아니하느냐고 꾸중하십디다.” 하고 울음을 다시 내놓을 것같이 입을

비죽거리니 심정이가 “네가 달래도 줄 터인데 꿈에라도 부모가 말씀하신 것

을 주다 뿐이겠느냐. 지금이라도 곧 문서를 써주마.” 하고 심의의 말한 대로 종

이며 땅을 허급한다는 문서를 쓰고 수결을 두어서 아우에게 주었다. 심의가 종

문서와 땅 문서를 손에 받아들고 일어서서 너푼 절을 하고 “형님 더 주무시지

요.” 하고 방 밖으로 나오며 다시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십여 일 지난뒤에 심정이가 그 아우의 하는 꼴을 보려고 심의를 대하여 “엊

그제 방 꿈에 아버님 어머님이 오셔서 너더리 땅과 천쇠어미는 봉제사하는 큰아

들 네가 가져야 할 것이요, 너의 아우를 줄 것이 아니니 도루 찾으라고 말씀하

시더라.” 하고 울려는 시늉을 하니 심의는 서슴지 않고 “봄철 허튼 꿈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하고 껄껄 웃어버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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