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덕순이가 집 문간에를 와서 보니 밤도 늦지 아니하였는데 대문은 벌써 닫히었
다. 들창에 불빛이 보이는 행랑방이 없지 아니하나 문 열라고 소리치기가 어려
운 까닭에 사랑 뒷담께로 돌아가서 담을 넘어 들어왔다. 사랑방, 수청방 할 것
없이 불이 켜 있는 방이 하나도 없다. 사방이 캄캄하였다. 덕순이는 사람 없는
사랑마당에 주주물러 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고 안중문간
에 와서 중문을 밀어보니 역시 빗장이 걸리었다. ‘어머니도 아니 계시고 젊은
동서끼리 집을 지키고 있으니까 밤 저녁이면 집안이 휘휘해서 일찍 문을 닫히는
게다.’ 하고 생각하며 덕순이는 발씨 익은 대로 다시 사랑 뒤로 돌아와서 안으
로 통한 일각문 담을 뛰어 넘어왔다. 아무리 뛰엄질 잘하는 덕순이가 사뿐 뛰었
다고 하더라도 땅에 떨어질 때 소리가 나지 않을리 없다.
앞마당에서 개가 야단스럽게 짖었다. 그러나 ‘이 개.’ 하고 문 열어 보는 사
람이 없는 양이었다. 개가 물 밑 종부담 뚫어진 곳으로 기어나와서 뛰어들어온
사람에게로 와락 덤비려고 하다가 젊은 주인의 냄새를 맡고 펄펄 뛰며 반기는
뜻을 표하였다. 덕순이는 경황없는 중에도 개의 뜻을 저버리지 못하여 대가리를
쓰다듬어 주고 개는 답례하듯이 젊은 주인의 손등을 핥아주었다. 덕순이가 안방
뒤를 돌아서 지쳐놓은 부엌문을 열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집 안을 둘러보니 안
방과 건넌방은 문이 첩첩히 닫히었고 아랫방만 덧문 한쪽이 열리어 있다. 방마
다 희미한 불빛이 있는 것이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련만 내다보는 사람은 하나
도 없었다. 덕순이가 ‘안해도 잠이 들었나?’ 하고 생각하며 아랫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철 아닌 병풍이 앞으로 둘러치었는데 붉은 깃발 같은 것이 그 병풍
에 걸치어 있다. 병풍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이 문 여는 데 놀라서 “누구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머리가 헙수룩하고 얼굴이 흉상스러워서 사람인
지 귀신인지 분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누구인 것을 언뜻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덕순이가 눈을 씻고 들여다 보다가 “연중 어멈인가?” 하고 물은즉
“애구 서방님이오?” 하고 곧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덕순이가 방안으로 들어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붉은 깃발이 명정이다. 분으로 쓴 글씨가 있다. 첫머리
는 병풍 너머로 넘어갔으니 전주이씨지구 여섯 자가 덕순의 눈에 보이었다. 덕
순이는 가장 정신을 잘 차리는 듯이 '전주이씨라니? 전주이씨가 누구일까?‘ 하
고 의심하며 "연중 어멈, 아씨 어디 갔나?" 하고 물으니 연중 어멈은 대답이 없
이 눈물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하다가 "연중이는 어디 있어요?" 하고 도리어
물었다. 덕순이는 맑은 정신이 돌았는지 "아씨가 죽었나? 언제 죽었나?" 하고 물
어서 연중 어멈이 목메인 말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아씨는 서방님이 떠
나신 뒤로 진지 한 끼를 잘 잡숫지 아니했세요. 이 댁 마님이 잡혀가신다 본댁
영감이 잡혀가신다 한뒤 맑은 물 한 모금도 변변히 잡숫지 아니했세요. 밤낮 서
방님 일이 걱정이 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서방님 말씀이었세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신 뒤에는 밤저녁에 개만 짖어도 서방님 오시나 내다보라고
하시겠지요. 한번은 어멈이 ‘서방님이 오시기는 어디를 오셔요?' 하고 말씀하니
까 '그래 어멈 말이 옳아' 한숨을 쉬시더니 '어멈 나는 죽지 않을 테야. 한번 만
나 보입고 죽지 그냥 죽을 수가 있나?' 하고까지 말씀하던 양반이... 서방님! 조
금 일찍 오시지요 원이나 풀고 돌아가시게! 운명하시던 날 본댁 마님이 조카 양
반을 데리고 오셨는데 아씨가 외사촌을 보시고 '언제 오셧세요? 고생이나 과히
안하셨세요?' 하고 말씀하시기에 처음에는 몰랐더니 나중에 '아버님은 어디로
가시게 하였느냐? 선산 음식이 고약하지 아니하더냐?' 모든 말씀이 그 양반을
서방님으로 알고 하시는 말씀입디다. 본댁 마님은 어머니로 알아 보시든지 어머
니! 불러 가지고 '나는 인제 죽어도 한이 없어요. 한번 만나보기가 원이었더니
인제 원을 풀었어요' 하고 불과 얼마 아니 되어서 자는 것같이 운명하셨세요. 서
방님 진외가댁에서와 아씨 외가댁에서들 오셔서 초종을 치르시는 중인데 오늘은
지관을 데리고 산에들 가셨세요. 모레쯤 장사를 지내신답디다." 덕순이는 눈물도
나오지 아니하고 답답한 가슴이 메어질 것 같을 뿐이었다. 생각도 없이 병풍을
제치고 관머리에 가서 앉아서 두 손으로 관을 만지며 "일어나오. 고만 일어나오.
내가 여기 왔소." 하는 말이, 관 속에 든 사람을 잠든 사람으로 아는 것 같았다.
3
안방에는 귀먹쟁이 늙은 할미와 계집아이들만 자는 까닭으로 개 짖는 소리가
나고 신발 소리가 나는 것을 도무지 몰랐지만, 건넌방에서 자는 덕수의 안해와
상직꾼은 알고도 무서운 생각이 나서 밖을 내다보지 못하였다. 아랫방에 문 여
는 소리가 나고 연중 어멈의 이야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뒤에야 덕수의 안해
가 상직꾼을 내보내 보았다. 무서움을 타는 상직꾼이 나가고 싶지 않은 것을 억
지로 나가더니 무엇을 보고 놀란 사람같이 방으고 뛰어들어왔다. 덕수의 안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치어다보고 앉으니까 상직꾼이 수상스럽게 바짝 가까이 오
며 "서방님이오." 하고 바깥을 가리키니 덕수의 안해는 남편이 왔다는 줄로 듣고
"서방님이 오셨어? 왜 아랫방으고 먼저 가셨을까?“ 하고 허둥지둥 이부자리를
치우는데, 상직꾼이 우두커니 보다가 한참 만에야 깨우친 듯이 가만히 "작은서방
님이 오셨어요. " 하고 말하니 덕수의 안해는 "그러면 진작 작은서방님이라고 그
러지." 하고 조금 알상스럽게 말하고 치우던 이부자리를 그만두고 벗어 놓았던
치마만 다시 입은 뒤에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관머리를 잡고 멍멍하게 앉았는
시동생을 보고 인사 대신에 울음을 내놓으니 엉엉 울기밖에 아니하던 연중 어멈
은 덩달아서 곡성을 내었다. 상직꾼이 쫓아내려와서 "아씨, 바깥 행랑에 포교가
와 있어요. 수상하게 알리다. 울음을 그치시오.” 하고 말리어 곡성이 막 그치
자, 중문을 박차는 소리가 들리었다. 상직꾼이 겁이 나서 벌벌 떨며 "저것 보아
요. 포교 아니라구요." 하고, 말하며 덕순의 형수가 "서방님 어서 피하시오." 하
고, 연중 어멈이 흉내내듯이 "서방님 어서 피하시오. " 하고 말하며 눈만 두리번
거리던 덕순이가 땅이 꺼시게 한숨을 쉬고 벌떡 일어서서 간다 온다 말이 없이
밖으로 나갔다. 상직꾼은 "나는 죽어도 못 나가겠어요." 하고 나가지 아니하고
연중 어멈이 칠팔십 먹은 할미나 다름없이 꼬부랑거리고 나가서 중문 빗장을 따
놓았다. 들어온 사람은 포교가 아니요, 덕순의 진외당숙이다. 마침 산에 갔다 돌
아와서 안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듣고 다른 연고가 있는가 하여 들어온 것이었
다.
갖바치가 연중이와 같이 앉아 이야기하는 중에 덕순이가 풀기 없이 고개를 숙
이고 들어왔다. 갖바치가 자리를 비켜 주고 나서 “전에 나를 보이시던 사주 생
각하시오? 붉은 깃발이니 무어니 하던 것 말씀이오?” 사주에 아들이 없단다고
걱정스러워하던 이씨의 모양이 덕순의 눈앞에 어른거리며 눈물이 좌르르 흘렀
다. 갖바치가 “내가 공연한 말을 했나 보오그려. 그렇지만 가슴이 답답한 때 한
번 실컷 우는 것이 좋지요." 하고 말하자, 덕순이는 입술을 내밀고 코를 들여마
시며 울기 시작하여 흑흑 흐느끼기까지 하였다. 갖바치는 참말로 실컷 울라고
내버려 두는지 말이 없고 연중이가 ”서방님 웬일이오?" “서방님 댁에 또 무슨
연고가 있습디까?" "고만 진정하고 말씀 좀 하시오." 하고 말하며 말리었으나 덕
순은 말을 듣는지 마는지 하고 느껴 가며 울었다. 밥 두서너 솥 지을 동안이나
착실히 지난 뒤에 덕순의 울음이 그만저만 그치게 되니 갓바치는
"이제 다 우셨소? 속이 좀 시원하오?" 하고 묻고 연중은 “댁에 갔다 오며 그렇
게 정신없이 우시는 것이 대체 무슨 까닭이오?”하고 물었다. 덕순이는 가슴이
답답한 줄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이 꿈속 같았다. 초상난 집이라고 빈 집 같은
것도 꿈속 같고 연중 어멈의 꼴이 귀신 같은 것도 꿈속 같고 관머리에 앉았을
때 형수가 울던 것도 꿈속 같았다. 그뿐 아니라 꿈속에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
다. "내가 못된 꿈을 꾸는 게지." 하고 덕순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한동
안 지난 뒤에 갓바치가 덕순을 보고 "지금 서울서 오래 묵으시는 것이 위태한
일이오." 하고 연중이를 가리키며 "저 사람과 같이 다니시는 것도 위태한 일이니
까 각자 어느 시골로 가서 피신하는 것이 좋을 터인데 그럴 만한 데가 있겠소,
없겠소?“ 하고 물어서 피신들 할 곳을 공론하게 되었는데, 덕순이는 충주 가서
그 아버지 산소에 다니고 그 뒤에 신명인을 찾아가서 피신할 것을 의논하겠다고
말하고 연중이는 평산 사는 생가 외사촌이 사람이 진실하여 의지할 만하다고 말
하여 갖바치는 한 참 생각하다가 둘 다 좋겠다고 말하였다.
4
덕순이는 그 안해 장사의 발인하는 것을 먼빛으로라도 보고 떠날 생각이 있고
연중이는 그 어머니를 한 번 만나고 갈 맘이 있어서 두 사람이 모두 이삼 일 동
안만 서울서 묵게 하여 달라고 말하니 갖바치는 이것을 다 아는 듯이 “인정과
도리를 막으려고는 하지 아니하오. 두 분이 일동일정을 나 하라는 대로 한다면
이삼일쯤 묵어도 좋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묵으라고 허락하기가 어렵소.” 하고
말하여 덕순이와 연중이는 묵을 욕심에 무엇이든지 하라는대로 하겠다고 말하였
다. 그러나 이튿날 갖바치가 잠깐 어디 간 사이에 덕순이와 연중이는 갖바치 몰
래 무슨 공론을 하여 두었다. 그날 밤에 연중이가 갖바치를 보고 “어제 서방님
이 갔다오듯이 잠깐 가서 어머니를 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갖바치 허락 나기
를 기다리는데 갖바치는 말이 없이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덕순이가 옆에
서 “잠깐 갔다오겠다니 가라고 합시다." 하고 허락하기를 권하니 갖바치가 빙그
레 웃고 "어제는 꿈속같이 다니어 오셨으니까 오늘 밤에 연중이와 같이 가서 부
인의 관 위에 눈물 줄기나 흘리고 오실 맘이 있지요?" 하고 물으며 덕순의 얼굴
을 들여다보는데 덕순이는 무슨 음사나 들킨 것같이 가슴이 섬뜩하였으나 아닌
보살하고 천연하게 ”맘이 있다뿐이겠소? 그러지 않아도 말씀하고 싶던 차요.“
하고 말하였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리고 싶지만 정히 가고 싶거든 가시오그
려.” 하는 갖바치의 허락을 들은 뒤에 밤이 들기를 기다리어 덕순과 연중이는
몸을 가뜬하게 차리고 신끈까지 단단히 매고 갖바치의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의
가는 곳은 덕순의 집이 아니요, 남곤의 집이었다. 두 사람이 남곤의 집 근처에
왔을 때는 밤이 삼경이 지난 뒤라 골목 안이 적적하고 남곤의 집 솟을 대문이
굳게 닫히었었다. 두 사람이 줄행랑을 끼고 돌아 담이 있는 곳에 왔다. 담은 뛰
어넘기라도 하겠으나 담 안의 지형을 몰라서 뛰지를 못하고 덕순이는 아래서 망
을 보고 연중이가 몸을 솟치어 담에 손을 걸치고 다시 한 번 몸을 솟치어 담 너
머를 넘어다보니 그곳이 사랑 앞 화초밭머리이었다. 연중이가 담 위에 올라 걸
어 앉으며 아래에 있는 덕순에게 솟짓하여 덕순이도 담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
이 사뿐사뿐 뛰어내려서 화초밭 뒤에 선 큰 배나무 밑에 몸들을 숨기고 집안 동
정을 살펴보니 큰사랑, 아랫사랑, 수청방에 모두 불이 키었고 큰사랑만은 아래윗
간 덧문이 다 닫히었는데 사람틀은 잠이 들었던지 여러 방이 모두 괴괴하였다.
두 사람이 화초밭에서 나와서 큰사랑 뒤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사랑마루로 올라왔다. 덕순이가 윗간 덧문을 지그시 잡아당겨 보니 걸린 것이
아니라 스르르 열리었다. '인제 남곤이는 섬에 든 쥐다.‘ 하고 생각하며 연중을
돌아보고 한번 씽긋 웃은 뒤에 연중의 앞을 서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에는 장
지 밖에 한 사람이 누워 자고 장지 안 아랫목에 빈 자리가 깔리었다. 누워 자는
사람은 머리 꽁지가 있는 것이 상노아이인 모양이다. 자는 아이를 덕순이가 발끝
으로 건드리어 깜짝 놀라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놈, 꼼짝 마라.” 하고 먼저
여기를 지르고 “너의 주인이 어디 갔느냐?” 하고 말을 물었다. 상노아이는 사
시나뭇잎 같이 떨고 앉았다가 간신히 “마마님댁.” 한마디를 내고는 말문이 막
히어 말을 못한다. 덕순이와 연중이가 잠깐 서로 바라보다가 덕순이가 눈짓하며
연중이가 상노아이에게 대어들어 땋은 머리를 앞으로 돌려 제물 재갈을 물리고
방구석에 걸린 수건을 내려 두 팔을 뒤젖혀 동이었다. 연중이가 아이를 동이는
동안에 덕순이는 골방문까지 열어보았다. 연중이가 동인 아이를 번쩍 안아서 골
방 안에 집어다 넣고 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아랫목 머리맡에 걸려 있는 환
도가 덕순의 눈에 뜨이며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덕순이는 곧 벽에 걸
린 옷을 내려서 베개에 입혀 놓고 환포를 내려서 날을 빼어 높이 들고 두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나서며 번개같이 내리쳤다. 옷 입
힌 베개에 칼자죽이 깊이 났다. 보고 섰던 연중이는 씽긋 웃었다. 덕순이가 환도
날을 꽂아서 걸렸던 자리에 다시 걸어 놓고 연중이와 같이 돌아서 나오려고 할
때, 수청방에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었다. 두
사람은 불을 불어 끄고 윗간 문 옆에 붙어섰다. 청지기인지 무엇인시 한 사람이
문 앞에 와서 "왜 덧문을 열어놓고 자노?" 말하며 미닫이를 여는데 연중이가 별
안간에 앞으로 나서서 발길을 날리어 등가슴을 내질렀다. '아이쿠’소리와 함께
쿵 하며 마당에 나가떨어졌다. 수청방 문이 열리고 아랫방 문이 열리었다. 설렁
소리가 야단스럽게 났다. 덕순이와 연중이는 화초밭 사이로 뛰어 와서 훌훌 담
을 뛰어넘었다.
5
덕순이가 연중이와 같이 공론한 일은 하룻밤에 남곤과 심정을 죽이자는 것이
었는데, 남곤에게서 낭패 보고는 다시 의논을 더 하기로 하여 심정의 집엔 가지도
아니하였다. 덕순이가 연중이와 함께 남곤의 집에서 나오던 길로 손쌀같이 자기
의 집 사랑 뒷담께로 왔다. 전날에 뛰엄질을 내기하듯이 슬쩍슬쩍 뛰어넘었다.
사랑 앞마당에 불빛이 환한 것이 어젯밤과는 딴판이라 두 사람이 같이 발자취를
감추고 가만가만히 수청방 옆으로 나와서 기웃이 동정을 살펴보니 마당 한 옆에
초초한 상여를 꾸며놓고 상여 앞 멍석 위에 상두꾼 몇 사람이 투전장을 뽑고 있
다. 연중이가 덕순의 소매를 지긋거리어 뒷마당 으슥한 곳으로 와서 “여보 서
방님, 내일 발인인가 보오. 오늘 밤엔 안팎에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니 부질없이
나서지 말고 그대로 갑시다.” 하고 권하여 두 사람이 다시 담을 뛰어넘어 혜화
문 안으로 돌아왔다. 갖바치가 그때껏 자지 않고 있다가 두 사람을 맞아들여 앉
은 뒤에 “두 분이 나를 속이고 부질없는 일을 하여 내일부터는 서울 안이 소란
할 모양이오.” 하고 말하는데 덕순이가 “무슨 일을 속이고 했단 말씀이오?”
하고 시침을 때려 하였더니 갖바치가 허허 웃고 나직이 “벼개가 무슨 죄요?”
하고 말하여 덕순이와 연중이는 일시에 깜짝 놀랐다. “남곤이가 시임대신이오.
대신을 모해하려던 사람이 서울 안에 앉아 배기겠소. 내일 아침 전으로 서울을
떠나야만 무사하겠는데 평산길은 태평하나 충주길이 위태하니 연중이는 새벽 일
찍이 떠나게 하고 피신할 곳을 다시 의논합시다.” 귀신같이 알고 있는 갖바치
의 하는 말을 덕순이나 연중이가 거역할 생각을 못하였다. 두 사람은 작별할 것
이 섭섭하여 지난 이야기, 앞이야기 하는 중에 날이 새기 시작하였다. 누웠던 갖
바치가 일어 앉으며 곧 연중에게 떠날 준비를 차리라고 말하고 벽장문을 열고 미리 준비하였
던 양식 전대를 내주었다. 연중이가 “서방님, 그러면 나는 떠나겠소. 죽지 않고
살면 다시 만나 보입지요.” 하고 일어나서 절을 하니 덕순이도 일어서서 “오
냐, 아무쪼록 살아서 다시 만나보자.” 하고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연중
이가 갖바치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한마디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뒷날 만나보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서 “만나보다뿐이겠나.
염려 말고 잘 가게.” 하는 말을 듣고는 “인제는 안심하고 가겠습니다.” 하고
갖바치에게 절을 하려 하니 갖바치가 “절은 무슨 절.” 하고 붙들었다. 연중이
를 떠나보낸 뒤에 갖바치가 덕순을 보고 “피신할 만한 곳이 한 군데 있기는 하
나 그곳에를 가 있자면 조금 욕스러운 일을 참아야 하겠으니 참을 수 있겠소?”
하고 물으니 덕순이는 두 번 생각도 아니하고 “참으라면 참지요. 대체 무슨 욕
스러운 일인가요?” 하고 말하였다. “홍인문 밖 이판서가 사람도 무던하고 선
영감과 교분도 없는 터이라 그를 보고 말하면 꺼리지 않고 잠시 숨겨줄 것이오.
또 그 집에서 창녕으로 낙향한다니 거기까지 따라가면 몇 해 동안이라도 안전하
게 피신할 수 있을 것이오.” “이판서 어른은 우리의 은인이오. 내가 은인을 원
수로 잘못 할고 벼르기까지 한 일이 있었소. 그건 어쨌든지 그런 어른에게 가서
의탁하는 것이 욕스러울 까닭이 무엇이오?” “그저 의탁이야 욕스러울 것이 없
지요만 욕스러운 일을 잡아야 의탁하기가 편할 것이오. 이판서가 삭직당한 뒤에
오는 손은 별로 없지마는 그래도 상하 이목이 번다한 집이니까 그 이목을 피하
여야 할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이판서의 장인 장모가 함흥서 단내외 살다가 가
을에 그 장인 먼저 하세하고 두어 달 뒤에 그 장모까지 작고하여 이판서 부인이
지금 겹상중인데, 그 부인이 부모의 후사를 위하여 양자 말을 하던 터이라 욕스
럽지만 부인의 아우 양도령 노릇을 하고 가서 있으면 일없이 이목을 속일 수 있
을 것이오.” “그것을 이판서장 내외만은 알아야 하지 않겠소?” “알아야 하고
말고요. 내가 어제 이판서에게 가서 미리 의논해 두었으니까 남들 듣기엔 말이
귀날 리 없지요.” 덕순이는 갖바치의 말을 좇아서 이판서 부인의 아우 노릇을
하기로 하여 갖바치와 같이 공론하고 성명을 양을쇠라고 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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