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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16)

카지모도 2022. 10. 13.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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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 늙은이는 홀아비의 혼자 살림으로 조그만 통노구에 밥이나 죽이나 끓여서

소금찬으로 먹고 지내는 터이었다. 길가던 사람이 혹시 날이 저물어서 자고 가

게 되면 자기네 행중 양식을 자기네 손으로 끓여먹게 하는데, 퉁노구를 빌리고

나무를 줄 뿐이지 막무가내로 다른 청하는 것은 받지 아니하였다. 손이 양식을

가지지 아니하여 굶어 자게 된다고 쌀 한 보시기 떠주는 법이 없었다. 늙은이가

꺽정이를 귀엽게 여기어서 없던 법을 개시하여 자기 양식으로 대접하는데 장사

라 양도 클 것이라고 퉁노구에 가득히 밥을 지어 많이 먹으라고 권하기까지 하

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늙은이가 꺽정이의 집 일도 물어보고 꺽정이의 공부도

물어보고 하는 중에 갖바치의 말이 나니 “내가 평산 박연중에게서 갖바치의 말

을 들은 일이 있다. 연중이란 사람은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더라.” 하고 늙은이

는 꺽정이더러 “너 그래 그에게 무얼 배웠니? 글 배웠니?” 하고 물으니 꺽정

이가 “병서를 배웠소. 내가 글을 못하니까 이야기로 배웠소.”하고 대답하였다.

“병서를 이야기로 배워? 그래 잘 알겠디?” “대강이야 알지요.” “어려운 병

서를 이야기로 가르치는 사람도 용하지만 이야기만 듣고 아는 너는 더욱 용하

다.” 하고 늙은이는 꺽정이를 칭찬하였다. 밤이 들어 바깥이 캄캄한데 늙은이가

꺽정이를 보고 “너 먼저 자거라. 내 어디 좀 다녀오마.” 말하고 나가더니 보리

밥 한 솥 짓기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잠이 혼곤히 들었다가 무슨 소리에 놀라 깨었다. 방문 앞에서 사람

의 말소리가 난다. 늙은이의 쟁쟁한 소리와 다른 사나이의 무뚝뚝한 소리가 섞

이어 들린다. “내일 혼자 들여놓으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은 다른 사나이

의 목소리요 “염려 말게.” 하고 대답하는 것은 늙은이의 목소리다. 나중에 쨍

쨍한 소리가 “수고했네. 잘 가게.” 하고 인사하니 무뚝뚝한 소리가 대답한다.

그 대답이 끝난 뒤에 방문이 열리며 늙은이가 들어서니 꺽정이는 일어 앉았다.

“이때껏 자지 않았니?” “아니오. 자다가 지금 깨었소.” “곤할 터인데 아니

되었다. 다시 자거라.” 하고 늙은이는 꺽정이 옆에 와서 앉으며 “양식도 달리

거니와 너를 맨밥 먹이기 답답해서 양식하고 반찬하고 얻어 왔다. 내일 아침에

고기 반찬해서 한밥 잘 먹자. 첫닭이 울었다. 어서 자자.” 하고 늙은이는 목침

을 베고 눕기가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꺽정이가 속으로 ‘이 밤중에 어

디 가서 얻어왔을까? 훔치어 온 것이 아닐까?’ 하고 별생각을 다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이른 식전에 꺽정이가 일어나서 보니 늙은이는 먼저 일어났었다. 늙은

이가 방에서 나오는 꺽정이를 보고 “이애, 저것을 윗방에 좀 들여놓아라.” 하

고 봉당에 놓인 멱대기를 가리키니 꺽정이는 “그러지요.” 하고 쉽사리 멱대기

를 들여놓았다. 쌀 열 말을 한 말 무게같이 드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이 담에

는 쌀을 얻으러 갈 제 너하고 같이 가야겠다. 어젯밤에 짊어지고 오는 사람이

하도 낑낑대서 속이 터질 뻔했다.” 하고 웃었다. 이 날 식전부터 꺽정이가 늙은

이의 시중을 들기 시작하여 차차로 밥도 꺽정이가 짓고 집안도 꺽정이가 치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꺽정이가 늙은이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며칠을 지내었다. 그 동

안에 늙은이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도 검술 이야기만은 입밖에도 내지 아

니하였다. 꺽정이가 어느 날 “만나게 된다든 사람을 언제나 만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늙은이는 “참, 검술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마고 했지. 대체 검술

은 배워 무엇하니?” 하고 말하는 것이 딴청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저 배워

두었으면 좋으려니 생각할 뿐이지, 무엇하려는 작정은 없소.” “작정없이는 배

울 수 없을라. 그 사람이 잘 가르쳐주지 않을걸.” “가르쳐주거나 아니 가르쳐

주거나 사람을 만나보아야지요.” “만나보기는 쉽다. 오늘 저녁에는 만나게 하

마.” 하고 늙은이는 꺽정이를 보고 빙글빙글 웃었다.

 

18

저녁밥이 끝난 뒤에 늙은이가 “검술하는 사람을 만나러 나가자.” 하고 꺽정

이를 데리고 집 뒤로 돌아와서 “여기 잠깐 섰거라.” 하고 꺽정이를 뒷마당에

세워두고 다시 앞으로 나갔다. 이때는 초생이라 반달이 서천에 걸리어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꺽정이가 한참 동안 이리저리 거니는데 홀저에 뒤에서 머리꽁

지를 지근지근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며 한

참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 번개같이 돌쳐서서 손으로 꽉 잡으려고 하니 눈앞

에서 어른하는 새까만 물건이 새같이 날아서 몇 간 밖으로 물러갔다.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바라보니 아래위에 검은옷을 입고 머리에 검은 수건을 쓴 사람

이 손에 막대를 잡고 섰다. 꺽정이가 앞으로 나가며 자세히 얼굴을 바라보니 그

사람이 아니요, 곧 주인 늙은이다. “내가 검술을 아는 사람이다.” 그 목소리는

평시같이 쨍쨍하지 아니하고 독 속에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에도 그

런 듯합디다.”하고 꺽정이가 가까이 가려고 한즉 늙은이는 뒤로 더 물러서며

“네가 나를 한번 붙들어 보아라.”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늙은이를 붙들려고 손

을 벌리고 쫓아다니는데 늙은이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여 붙들릴 것 같으며

붙들리지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못 붙들겠소.”하고 우뚝 서니 “그것 보아라.

늙은 사람이 천하 장사에게 붙들리지 않는 것도 검술이다.”하고 늙은이는 웃으

며 막대를 내던지었다. “인제 나를 붙들어 보시오.” “너야 몇 걸음 안에 붙들

지.” “못 붙들면 어떻게 하실라오?” “어떻게 하긴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이

냐?” “못 붙들면 검술을 가르쳐 주실라오.” “아따, 그래라. 그 대신 붙들리

면 어떻게 하려느냐?” “무엇이든지 말씀하면 말씀대로 하지요.” “좋다. 그

리 하자.” “자, 붙드시오.”하고 꺽정이가 달음질을 치기 시작하였는데 참말로

몇 걸음 나가기 전에 늙은이의 손이 등에 와서 닿았다. 꺽정이가 용을 써서 몸

을 공중으로 솟치어 피하니 “어 장사다. 그렇지만 내 손에 붙들리고 말 것이니

보아라.”하고 늙은이는 날아다니는 새와 같이 가볍게 몸을 놀리어서 꺽정이가

이리 피하면 이리 앞을 막고 저리 피하면 저리 앞을 막았다.

꺽정이가 ‘이렇게 몰리다가는 참말 붙들리겠다.’하고 생각하며 뛰엄질을 시

작하였다. 처음에는 넓이로 뛰어 앞을 막는 늙은이의 너머로 몇 간씩 뛰어나가

다가 그래도 늙은이에게 몰리니까 나중에는 높이로 뛰었다. 힘껏 용을 써서 한

번에 집을 뛰어넘었다. 늙은이가 지붕 위로 뛰어올라와서 앞마당에 섰는 꺽정이

를 내려다보며 “장사라 할 수 없다. 못 붙들겠다.”하고 앞마당에 사뿐 내려서

서 꺽정이의 손을 잡고 “내가 한 나이나 젊었을 때 같으면 너의 뛰엄질도 못

당할 내가 아니지만 인제는 늙었다.”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제 내기는 어떻게 하실라오.” “시행하지. 자, 고만 방으로 들어가자.”하

고 늙은이가 꺽정이를 방으로 들어와서 옷을 바꾸어 입고 앉은 뒤에 꺽정이더러

“이리 와서 앉아라.” 하고 말하여 앞에 가까이 앉히고서 “너에게 검술을 가

르치기 전에 몇 가지 다짐을 받을 일이 있다.”하고 점잖게 말하였다.

“검술하는 사람은 죄없는 목숨을 해치는 법이 없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탐관오리 같은 것도 죄없는 사람일까요?” “죄없는 탐관오리가 어디 있을꼬?

” “그럼, 할 수 있지요.” “여색을 탐하여 칼을 빼는 법이 없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지요.” “악한 재물을 빼앗아 착한 사람을 주는 외에는

재물 까닭으로 칼을 빼는 법이 없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지요.

” “검술하는 사람은 까닭없는 미움과 쓸데없는 객기로 칼을 쓰지 않는 법이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에는 미운 것들이 많은걸요.” “악한 것을

미워함은 곧 착한 일이라, 그 미움은 금하는 것이 아니로되 까닭없는 미움으로

인명을 살해함은 천벌을 면치 못 할 일이다.” “아무쪼록 천벌을 받지 않도록

하지요.” “네가 지금 말한 것이 장래에 틀림없을 것을 다짐둘 수 있겠느냐?”

“다짐둘 수 있지요.” 이러한 문답이 있은 뒤에 늙은이는 꺽정이의 맹세를 받

고 제자로 정할 것을 허락하였다.

 

19

늙은이가 나무칼 두 자루를 만들어서 한 자루는 자기가 쥐고 또 한 자루는 꺽

정이를 쥐이고 칼 쓰는 법을 가르치었다. 쥐는 법과 겨누는 법과 치는 법과 찌

르는 법과 그 외의 모든 법을 입으로 일러주고 손으로 바로잡아 주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낮에는 주막 늙은이 노릇을 하고 밤에만 검술 선생질을 하던 것이

제자의 수단이 나날이 달라가는 데 재미를 붙이어서 낮에라도 앞길에 행인이 그

칠 때는앞마당에 앉아서 삼태기를 곁거나 맷방석을 틀거나 하지 않고 뒷마당으

로 들어와서 제자와 같이 나무칼을 잡게 되었다. 한 달 두 달 지나는 동안에 꺽

정이가 검술 배우기 시작한 뒤 거연히 일 년 세월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꺽정

이는 나무칼을 들고 악 소리를 질러가며 치고받고 하다가 쉬는 동안에 꺽정이가

우연히 선생 늙은이에게 “참말 칼이면 재미가 더 있을걸요.”하고 말하였더니

늙은이가 “너만하면 참말 칼 가지고도 할 만하니 어디 한번 해보자.”하고 방

으로 들어가서 깊이 간수하였던 환도 세 자루를 한꺼번에 꺼내 가지고 나왔다.

짧은 환도 한 자루는 젖혀놓고 긴 환도 두 자루를 집을 벗기어서 꺽정이를 보이

며 “둘 중에 어느 것이든지 너의 맘대로 골라잡아라.”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고른 뒤에 나머지를 자기가 쥐고 먼저 마당 중간에 나서서 “자, 이리 나오너라.

”하고 꺽정이를 불렀다. “칼끝에는 사정이 없으니 조심해라.” “염려 마세요.

” 두 칼이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치는 칼에 막는 칼이 날에서 불을 내고 들어가는 칼에 쫓아오는 칼이 슴베에

서 소리를 냈다. 얼마 동안 두 칼이 왔다갔다 하며 어울렸다 풀렸다 하다가 그

사이에서 “이애, 고만 쉬자.”하는 늙은이의 말이 떨어지며 선생 제자가 서로

갈라서서 이마의 땀을 씻었다. 땀이 든 뒤에 늙은이가 “내 한번 칼춤을 추어

보랴?”하고 짧은 환도를 빼어들고 마당에 나서서 전후좌우로 칼을 놀리는데 서

리 같은 칼빛이 백비단 같은 남빛과 서로 얼리어서 흰빛으로 사람을 휩쌌다. 번

쩍거리는 흰빛덩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었다.

꺽정이가 보다가 신명이 나서 “선생님, 나도 한번 해봅시다.”하고 소리를 치

니 선생 늙은이가 흰빛을 거두고 나서며 “너는 긴 칼을 가지고 한번 추어 보려

무나.”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긴 칼을 들고 나서서 춤을 추었다. 칼이 길뿐이 아

니라 손이 선생같이 재게 놀지 못하여 흰빛이 연하지 못하고 토막토막 떨어져서

중간에 선 사람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애, 신신치 않다. 고만두고 이리 오너라.

”하고 늙은이가 꺽정이를 불러다 옆에 앉히고 손에 쥐었던 짧은 칼을 보이며

“이 칼은 내가 목숨같이 아끼는 칼이다. 이십칠팔 년 전 난리에 내가 출전하였

다가 전중에서 얻은 것이다. 너 오기 전에는 내가 울적하면 이 칼을 가지고 지

금같이 칼춤이나 한번씩 추어야 속이 시원하던 것인데, 너 온 뒤로는 너 가르치

는 데 재미를 붙여서 칼춤 한번 추지 않고 지내왔다.” 말하고 칼날을 집에 꽂

으려고 하니 꺽정이가 “어디 한번 써봅시다.”하고 청하였다. 늙은이가 “무엇

에다 써볼까?”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짚단을 집어오라고 말하여 꺽정이가 집어

온 뒤에 짚 한 묶음을 아래위를 묶어서 세우고 “중간을 한번 베어 보아라.”하

고 꺽정이에게 칼을 주니 꺽정이가 받아들고 몇 걸음 밖에서 뛰어들어오며 한번

가로 쳤다. 짚 묶음은 칼을 맞지 않은 것과 같이 그대로 서 있었다. 선생 늙은이

가 이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짚 묶음 앞에 와서 발길로 툭 차니 아래위 묶은

것이 두 동강이 되어 땅에 쓰러졌다. “칼도 잘 먹지만 칼질도 제법이다.”하고

칭찬할 제 “무엇이 제법이오?”하고 말끝을 채며 마당 한구석에 들어서는 사람

이 있었다. 늙은이가 “그게 누구냐?”하고 호령기 있게 물으며 그 사람을 바라

보더니 “나는 누구라고. 자네 웬일인가?”하고 일어서서 마주 나가다가 돌쳐서

서 “꺽정아, 칼들을 가지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거라.”하고 말하여 꺽정이가 방

에 들어와서 한참 된 뒤에 늙은이가 혼자 들어오더니 분분히 검은 옷을 찾아내

서 짧은 칼과 같이 싸서 손에 들고 꺽정이더러 “내가 어디를 좀 갔다 올 터이

니 집을 잘 지키고 있거라. 늦어도 사오 일 안에 돌아오마.”하고 총총히 나가는

데 꺽정이는 ‘웬 사람이 무슨 일에 선생을 청해 가나’하고 의심하며 “안녕히

다녀오시오.”하고 인사하였다.

 

20

사오 일 된 다음 늙은이가 과연 닷새 만에 돌아왔다. 그 동안 어디 갔다온 것

은 늙은이가 말하지도 아니하고 꺽정이가 묻지도 아니하였다. 그 뒤 어느 날 밤

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어서 꺽정이가 거의 밤마다 나가는 뒷마당에를 나가지 못

하고 방안에서 늙은이와 마주 앉았는데, 늙은이가 옛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고

말하고 자기의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늙은이는 본래 서울 사람으로 외소군관을 다니었는데, 삼포왜변이 났을 때 방

어사 황형의 부하로 출전하여 제포대전에까지 참예하였었다. 그때 선봉부대는

녹각목으로 진전을 막아 산 위의 적병이 짓쳐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 석전군을

시켜서 돌팔매를 치게 하는 것이 장령이었는데, 그는 공을 탐하는 마음에 장령

을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녹각목 밖에 나서서 가까이 내려오는 적병들을 쫓아가

며 목을 베었다. 성정이 포악한 황방어사가 이것을 알고 장령을 어긴 죄목으로

진전에서 처참하라고 영을 내리었다. 그러나 그가 다행히 죽을 수를 면하느라고

이때 마침 산 위의 적진이 깨어지며 무수한 적병이 개미떼같이 헤어져 바닷가로

도망하니 이것을 뒤쫓기가 급하여 영을 미처 시행할 사이가 없었다. 그는 이 틈

을 타서 도망하여 어느 촌가에 들어가서 군복을 벗어버리고 전전걸식하여 서울

로 올라왔었다. 그 뒤로는 그가 성명을 내놓지 못하고 구차히 숨어 지내는데 이

웃에 간특한 사람이 있어서 군관으로 도망한 눈치를 알고 포청에 밀고하여 포교

손에 잡히게 될 뻔하였다. 그는 잠시 피신하였다가 그 이웃 사람들을 죽이어 분

을 풀고 시골로 도망하여 몇 해 동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중에 지내게 되었다.

어느 해 서울 사람 하나가 그 동리에 사는 이성사촌을 찾아와서 그 집에서 형제

같이 친하게 되었다. 그 서울 사람이 평산 오던 이듬해에 칙사가 나왔다 가며

우리나라 계집아이들을 뽑아다가 오랑캐를 준다는 소문이 나서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딸을 둔 사람들이 부랴부랴 딸을 치우는데 그 사람이 그때 나이 불과 이십

여 세라, 근동 사람 중에 그 안해 없이 지내는 것을 안 사람이 밤중에

딸을 업어다가 맡기다시피 하였다. 서울 사람은 장가들려는 맘이 있는 것도 아

니지만 밉지 않은 계집아이가 안해로 생기니까 싫다는 말을 하지 아니하여 내외

가 되었는데, 혼인 소동이 간정된 뒤에 그 색시가 사촌의 안해에게서 남편 되는

사람이 무슨 죄를 짓고 숨어다닌다는 말을 듣고 친정 아비에게 말하였다. 친정

아비가 이 말을 듣고 관가에 고하여 서울 사람이 관가로 잡혀들어갔다. 그 서울

사람은 박연중이란 사람인데 당시 영의정을 죽이려던 사람이라 평산부사가 이것

을 알고 서울로 압송할 거조를 차리었다. 그는 형제같이 친하던 사람이 죽을 땅

에 들어간 것을 불쌍히 여기어서 칼 하나를 몸에 지니고 밤중에 읍에 들어가 옥

사장이를 찾아가서 칼로 겨누며 위협하여 옥사장이 시켜 옥문을 열리고 연중이

를 빼앗아 가지고 도망하였다. 연중이도 몸이 날쌘 사람이라 장독만 없었다면

그 밤중에 멀리 도망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연중이가 장독으로 걸음을 걷지 못

하는 까닭에 성황산성 근처 으슥한 숲속에 숨어서 이틀 밤을 지내고 사흘 되는

날 간신히 자모산성 근처로 옮겨와서 산속에서 다시 이삼 일을 지내었다. 그리

하는 동안에 연중이도 몸을 기동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이 갈 곳을 지정한 것도

없이 나서서 산으로 들어간 것이 연분이 되어서 그가 화적의 두목이 되어가지고

연중이와 같이 운달산에서 일이 년 동안을 지내었다. 그 뒤에 그는 그 두목을

연중이에게 물려주고 세상에 나와서 다시 얼마 동안 떠돌아다니다가 부평 계양

산 적굴에서 다시 화적의 괴수 노릇을 하였다. 화적 노릇하기가 종시 맘에 불쾌

하여 늙은 것을 핑계하고 적굴에서 나와서 주막 늙은이 노릇한 것이 육십이 지

난 뒤의 일이라 인제 오륙 년밖에 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전 연분이 있어서

운달산 사람과 계양산 사람이 연신은 그치지 아니하는데, 꺽정이가 처음 오던

밤에 쌀, 고기를 보내줄 뿐이 아니라 계양산에 급한 일이 있어서 늙은이에게 청

병을 오니까 늙은이는 모른 체할 수 없어 잠시 갔다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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