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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20)

카지모도 2022. 10. 2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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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윤판서가 임동지 이외에 몇 사람을 데리고 술상 앞에서 고담준론을 시작하여

그칠 줄을 모를 때에, 마침 형조 좌랑 정희등이 공사로 와서 보기를 청하였다.

정좌랑은 성질이 강직하여 허물있는 사람을 면박주기 잘 하고, 아무리 귀인이

라도 위인이 부정하면 사람 같지도 않게 보는 까닭으로 누구나 다 꺼리는 사람

이다. 그가 전에 상처하였을 때, 김안로가 사위를 삼고자 하여 통혼하였더니 통

혼하러 간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일평생 다시 장가를 들지 아니할지언정 김씨

의 집 사위 노릇은 아니하겠다.” 하고 두 번 말 못하게 거절한 것이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삼사이랑의 좋은 벼슬을 다니지 못하고 공조.형조의 낭관 부

스러기로 돌게 된 것이었다. 윤판서가 정좌랑의 보잔다는 말을 듣고 눈살을 찌

푸리며 “술이 취해서 잠이 들었다고 말해라.”하고 하인에게 일러 내보냈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그 하인의 다시 들어오며, 그 뒤에 정좌랑이 따라왔다. 정좌랑

이 사랑 일각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윤판서는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할 수

없이 아랫목에 드러누워서 잠이 든 체 하였다. 정좌랑이 방에 들어서서 좋지 않

는 기색으로 잠깐 아랫목을 내려다보더니 선뜻 술상 앞으로 와서 상을 들어 그

자리에 메어쳤다. 놋그릇 소리가 요란하였다. 윤판서가 놀라 일어나며 “이것이

웬일이야?” 하고 말하는데 언성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정좌랑이 “대감이 척

완중신으로 국사를 위하여 주소동동할 처지인데, 처지 불구하고 술잔 잡수시노

라고 마을에 나오시지 않는 것이 대감 생각에는 옳으신 일입니까? 그러고 아까

일각문에 들어설 때 언뜻 본즉 앉으셨던 대감이 갑자기 누우시는 모양이니 공사

로 보이러 온 요속을 보지 않으시려고 거짓말하시는 것이 대감 생각에는 실체가

아닙니까?”

윤판서는 술에 취하고 무안에 취하여 얼굴이 주홍빚이 되었다. 흐르는 술과

흩어진 안주를 청지기가 치운 뒤에 정좌랑이 꿇어앉아서 간단히 공사를 말하고

총총히 일어서려고 하니, 윤판서가 무안한 것을 풀려고 “내게 술이 있으니 한

잔 자시고 가시오.” 하고 만류하였다. 정좌랑이 윤판서의 만류하는 말은 들은

체 만체하고 “오늘 작죄가 적지 않으니 다음날 사과하겠습니다.” 하고 일어서

나가니 윤판서는 다시 또 무안하였다. 윤판서가 무안 본 끝에 화가 나서 술을 다

시 내오라고 하여 양에 겨운 술을 먹고 전후 부축하고 소실의 집에를 왔다.

옥매향이가 취한 윤판서를 맞아들이어 쥔 뒤에 일변 관망을 벗기고 대님, 허

리띠를 풀고, 일변 하인을 불러 새앙차를 달이게 하였다. 윤판서가 개개 풀린 눈

으로 옥매향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옥매향이가 “처음 보시는 사람 같습니까?

”하고 방그레 웃으니 윤판서가 옥매향의 손목을 잡으며 “참말 이쁘다.” 하고

옥매향의 손목을 놓지 않고 혼곤히 잠이 들었다. 옥매향이는 윤판서가 잠을 깰

까 하여 손목을 잡힌 채로 옆에 붙어앉았더니, 윤판서가 갑자기 한두 번 욕지기

를 하고 번고하기 시작하여 옥매향의 치마 앞이 흥건하게 되었다. 옥매향이가

치마를 갈아 입고 양치물과 새앙차를 아이종 들리고 들어왔을 때 윤판서는 다시

잠이 들기 시작하였다. “잠드셨세요? 양치질하시고 새앙차 좀 잡수시지요.”

윤판서가 옥매향의 시중으로 간신히 머리를 들고 시늉으로 양치질하고 새앙차

를 마시었다. “웬 술을 그렇게 많이 잡수셨세요.” “무어 어째?” “술을 많이

잡수셨단 말이에요. 동궁마마께옵서 술을 먹되 과히 먹지 말라고 하교하셔서 많

이 안 잡숫는다더니...?” “동궁이 어떠시어? 앞으로는 걱정없으시다. 중전이 며

칠 안가.” “중전이 며칠 안 가시다니요?” “김정승이.” “김정승이 어떻게

하셔요?” “어, 어.” “네? 네?” 옥매향이는 윤판서의 취담을 다 들어보려고

몸까지 흔들어 보았으나, 윤판서는 흔드는 손을 뿌리치고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9

수일이 지난 뒤에 일이었다. 윤판서가 어명을 받들고 새로 천봉한 고양 희릉

에 봉심을 나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오게 되었었다. 그날 밤에 옥매향의 집에는

앞대문과 안중문이 첩첩이 닫히고 아이종들은 모두 아랫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모린이는 혼자 분합마루에서 주안상을 차리었다. 얼마 뒤에 옥매향이 방안에는

뒷문으로 출입하는 손님이 방 주인과 나란히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고 하였다.

“나는 더 못 먹어요.” “이것 한잔만.” 하고 사나이가 술잔을 들어 입가에 대

어 주었다. “못 먹겠어요. 정말이에요.” “한 모금이라도 마시어야지. 내 손이

부끄럽지 않지야.”

옥매향이가 맛보듯이 조금조금 마시어 한 잔 술을 거의 반이나 마신 뒤에 사

나이가 “아따, 고만.” 하고 술잔을 떼어 가며

“나머지는 내가 먹지.” 하고 소리가 나도록 잔을 빨아 말리었다. 옥매향이가

“청실홍실 늘였나요?” 하고 빙그레 웃는데 얼굴에 술기운이 올라서 홍도화 한

가지가 봄비에 젖은 것 같았다. 사나이가 “나도 술을 고만 먹을 터이다.” 하고

말하여 술상을 치운 뒤에, 옥매향이가 일전에 주정받이한 것을 이야기하다가 말

끝에 윤판서의 취담을 이야기하였다. 사나이가 정신 나는 말을 들을 듯이 “그

래? 김정승이 어떻게 한다고?” 하고 채쳐 물으니 “고만이야.”하고 옥매향이

가 해해 웃었다. “무슨 밀의가 있는 것이군.” “그것 알 수 있나요.” “취중

에 진정발이라니 까닭없는 취담이 아니야.” “공연한 이야기를 했구려.” “공

연은 왜 공연이야.”

이튿날 첫새벽에 옥매향의 집에서 나가는 사나이는 임백령이었다. 임백령이가

윤원형을 와서 보고 옥매향에게서 들은 말을 옮길 때에, 추측한 생각을 보태어

서 윤임이와 김안로가 동궁 보호를 자탁하고 중전의 죄목을 잡아서 폐위하려고

계획한다고 말하고, 윤원형이가 자기 친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임백령의 말을 가

지고 공론할 때에 윤임이와 김안로가 동궁을 위하여 중전을 종사의 죄인으로 몰

아서 폐위하도록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는 중인데, 불일간 발단이

될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중전의 지친으로 참판 벼슬을 다니는 윤안인이가 내전

에 승후하러 들어가서 친족들의 공론한 말을 중전께 말씀할 때에 중전이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일문이 멸망을 당한다고 공동하여 그날 저녁에 중전이 대전 앞

에서 울며불며 하소연을 하였다.

임금이 중전의 하소연을 듣는 즉시로 윤판서를 패초하여 편전에서 인견하고

첫마디 말씀에 “경이 중전을 폐하려고 꾀한다지?” 하고 노기 있는 음성으로

하문하니 황겁한 모양으로 “그럴 법이 어데 있사오리까?” 하고 궁극하였다.

“불 안 땐 굴뚝에 내 날 리 있을까? 나는 들으니 경이 김안로와 같이 발의한

일이 있다는걸.” “안로가 동궁 보호를 청탁하고 애매한 옥사를 일으킨 일이

없지 않사온즉 이러한 부언이 안로로 인하여 나는 줄로 신은 생각하옵니다.”

“안로 방자한 것이 목숨이 몇인고.” 하고 임금은 진노하여 김안로의 목을 당

장에 베어들이라고 전교를 내리고 싶었으나, 권세 잡은 재상을 함부로 처치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윤판서를 향하여 “내가 경은 믿는 터이나 안로는 괘씸

하니 처치할 도리를 생각하라.” 하고 말씀한 뒤에 윤판서를 물러나게 하였는데,

윤판서의 등골에 찬땀이 차이었었다.

임금이 중전의 말을 좇아서 김안로를 도모하라고 어필로 적어서 비밀히 윤안

인에게 내리었다. 윤안인이 밀지를 받은 뒤에 시임 대사헌 양연을 누차 찾아다

니다가 손이 없는 틈에 침방 안에서 만나서 조용히 어필 밀지를 보이고 김안로

도모할 일을 부탁하니 양연이 말이 “이것이 여간 중대한 일이 아니오. 잘못하

다가는 신명을 보전치 못할 일이오.” 하고 고개를 비틀었다. “그 대신에 일이

성공하는 날은 부귀공명이 소원대로 될 것 아니겠소.” “어디 해봅시다. 그러나

급히 하려다가는 탈이 날 것이니 서서히 생각해서 합시다.” “위에서 하루라도

급하기를 바라시는데요.” “가만히 계시오. 될 수 있소. 사오 일 후에 김안로가

작은아들 혼인을 지낸다니, 그날 안로의 당이 몰려가서 없는 틈에 양사가 합계

하도록 일을 주선해 봅시다.” 하고 양연이는 윤안인과 서로 밀약을 한 후 흩어

졌다.

 

10

김안로의 집 혼인날이다. 식전부터 안손님, 바깥손님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점

심때에는 넓으나 넓은 집의 방방이 사람이 가득하였다. 큰사랑 마루 앞에 마루

와 느런히 부계를 매고 안로가 모대하고 나앉아서 금관자, 옥관자 손님을 한자

리에 모았었다. 잔칫상이 벌어져서 술을 권커니잣거니 하는 중에 김안로가 도야

지머리 장정승을 돌아보며 “궐내에서 이때까지 선온이 내리시지 아니하니 무슨

일일까요?” 하고 물으니 장정승은 그 괴상한 면상을 앞으로 내밀며 “아니 내

리실 리 있소? 곧 내리시겠지.” 하고 대답하였다. 이날 이때까지는 김안로의 집

조그만 생일잔치에도 궐내에서 어주가 나오던 터이라, 안로가 선온이 더딘것을

괴상히 생각할 만하였다. 안로가 술 한잔을 마시고 안주를 집으려 할 때에 난데

없는 솔개 한 마리가 쏜쌀같이 내려와서 안로 머리 위의 사모를 움키다가 좌중

에서 “이놈!” “휘여!” 하고 소리들을 지르니까 솔개는 공중으로 날아가고 사

모는 자리위에 떨어졌다. 괴상한 일이다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좌중에서 수군수

군하는데, 채무택이가 일어서서 사모를 집어 안로를 주니 안로는 정신 빠진 사

람같이 사모를 받아 옆에 놓았다. 허항이가 이것을 보고 “왜 쓰시지 않고 놓으

십니까?” 하고 말한 뒤에야 다시 집어 쓰게 되었다. 이날 양연이는 대사간과

의논하고 양사 간관을 중학 안에 모아놓고 “논핵할 사람이 있소.” 하고 미리

준비하였던 계초를 내보이니 간관들 중에는 뒤가 좋지 못할까 의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양연이가 “여러분, 염려 마시오. 내가 뜻을 받은 곳이 있소.” 하

고 안로와 및 그 당류를 논핵하는 합계를 위에 올리었더니, 위 아래에서 미리

짜놓은 일이라 합계 한번에 안로와 및 그 당류를 각각 배소를 정하여 귀양 보내

되 당일로 압송하라는 처분을 묻게 되었다. 궐내가 수선수선하였다. 선전관이 금

위군사를 영솔하고 나가서 안로의 집을 둘러싸고 들어갔다. 잔치집이 불끈 뒤집

혔다. 하인들도 도망하고 문객들도 도망하고 손님들도 도망하였다. 도망하다 붙

잡히는 사람들은 꼭뒤를 잡히고 발길에 차이었다. 안팎에서 곡성이 일어났다. 안

로는 넋을 잃고 앉았고 허항· 채무택이는 쥐구멍을 찾았다. 도야지머리는 대신

의 체모가 있는 터이라 선전관을 불러 앞에 세우고 “내 이름도 은명 중에 들었

는가?” 하고 물으니 선전관이 “대감 함자는 없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도

야지머리가 그제는 군사를 시켜 장정승댁 하인을 부르라고 하여 탈것을 대령하

라 한 뒤에 안로를 돌아보고 “나는 가오.” 하고 일어서 나갔다. 허항이가 이것

을 보고 본을 떠서 허참판댁 하인을 불러달라고 군사에게 일렀더니 옆에 있던

선전관이 “허항이 아니냐? 잔소리 말고 가만히 있거라.” 하고 호령하여 허항

이가 움찔하고 목을 움츠러들였다. 안로가 잡히어 나올 때에 혼인하려던 작은아

들을 돌아보며 “오늘 이후에야 누가 내 집과 혼인을 하겠느냐? 너를 일찍이 성

취시키지 못한 것 이 한이다.” 하고 눈물을 머금었다.

김안로와 허항과 채무택 등이 귀양길을 떠난 뒤에 위에서 선정전에 전좌하고

대신 이하 여러 조신에게 입시를 명하니, 그 조신들 중에는 병조참판 윤안인과

도승지 임백령과 기사관 임형수와 형조판서 윤임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원임 영의정 정광필이 오늘날 화근이 될 것을 짐작하고

안로를 물리치려다가 도리어 죄를 입었으니 가이없는 일이라 즉일 방면하

고, 이외에 안로로 인하여 귀양 가서 있는 사람을 모두 방송하게 하라.” 위에서

말씀이 있은 뒤에 병조참판 윤안인과 도승지 임백령이 함께 앞으로 나와서 안로

등의 죄가 중하여 사사함이 마땅하다고 아뢰니, 위에서 대신 외 여러 신하에게

하문하여 다른 의견이 없는 것을 보고 “안로를 차마 중죄로 다스릴 맘이 없으

나 물론의 돌아가는 바를 어기기 어려우니 사약하라.” 하고 전교를 내리었다.

며칠 뒤에 또 대계가 나서 허항과 채무택도 사약을 받게 되고, 당류 중에 가장

가벼운 자가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임금은 대신 이하 여러 조신의 청을 좇아서

김안로등의 복법한 것을 종묘에 고하고, 제신의 진하를 받은 뒤에 양연, 윤안인

등의 벼슬 자품을 돋우게 하였다.

 

11

양연이가 김안로를 몰아낸 뒤에 그 공로로 잠시 세력이 좋았으나, 그 집의 하

인이 주인을 자세하고 이웃 과부를 겁탈하다가 법관에게 발각된 까닭에 양연이

는 가장의 치가 잘못한 죄목으로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 뒤로는 물망 있는 사람

들이 차차로 조정에 등용되어서 유관, 권발, 이언적, 유인숙 같은 인물이 재열에

벌여서고, 사화에 섭쓸려 찬배를 당하였던 사람이 많이 풀리었는데, 이때에 파릉

군도 방면되고 숭선부정도 복직되었다.

김덕순이가 죄없는 몸이 되어 본성명을 드러내고 서울 와서 있게 된 것이 조

정이 이와 같이 변한 까닭이다. 김식의 가택과 가산은 화를 당할 때 국고에 몰

수되었던 까닭으로 덕순이가 처음에 서울 와서는 안해 없는 처가에 붙여 있었

고, 그 뒤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 서울집을 장만하고 가족이 단취하

게 되었는데, 덕순의 형님 덕수가 집에 앉아 선생질을 시작하여 아이들의 강미

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가속들을 접제하였다. 덕수는 내외 가진 터이라 자녀를

낳기 시작하였고, 그 아버지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하는 덕무도 나이 벌써 이십여

세라 혼처를 택하여 성취하였다. 덕순의 재취는 집안에서 누가 권하지 않는 사

람이 없고 숭선부정의 집에서까지 권하건만, 덕순이가 왼고개를 치지 듣지 아니

하여 하루는 그 어머니가 조용히 덕순이를 불러앉히고 고집하는 뜻을 물었다.

“별 뜻은 없습니다만, 다시 장가들 생각이 없어요.” “그래, 아직 나이 있는

처지에 홀아비로 늙을 터이란 말이냐?” “홀아비는 어떱니까.” “늙은 어미를

생각하더라도 아예 그렇게 고집하지 마라.” “어머니께서 며느리가 없으신 터

같으면 나도 생각을 달리하겠습니다만, 지금 큰며느리 작은며느리를 거느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나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어느 손가락을 물면 아프

지 않겠느냐? 다 각각이지. 인제 나는 너의 장가드는 것만 보면 지금 죽어도 원

이 없겠다.” 덕순이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었다. 그 어머니가 이것을 보고

“어미의 원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느냐?” 하고 다그쳐 물었다. “어머니가 그렇

게 까지 생각하신다면 장가를 들어도 좋습니다만 중심에 맺힌 한이 있어 다시는

내외 재미를 보고 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심에 맺힌 한이란 걸 알겠

다. 한도 될 만하지. 그렇지만 사나이도 수절하느냐?” “죽기 전에 한번 다시

보기만 했어도 한이 덜 되었을 것이에요. 지금도 붉은 명정이 눈앞에 어른거리

면 맘이 저린지 아픈지를 모릅니다.” 하고 손등으로 눈에 어리는 눈물을 씻었

다. 그 어머니가 둘째며느리의 죽을 때 광경을 맏며느리에게 들어서 아는 터이

라 덕순의 눈물이 비회를 자아내어서 얼마 동안 모자가 마주앉아 눈물을 흘리다

가 덕순이가 “어머니, 고만두시오.” 하고 위로하여 비회를 조금 진정한 뒤에

그 어머니가 옆에 놓엿던 노랑 명주수건을 집어서 진물진물한 눈귀를 씻으며 “

장가 다시 들고 안 드는 것은 네 요량대로 해라.” 하고 한번 길게 한숨을 쉬었

다. 그 어머니가 불쌍한 죽은 며느리를 생각하다가 생각이 그 유모자에게 미치

어서 “연중이의 소식은 이내 못들었느냐?” 하고 물으니 “평산으로 여러 번

알아보았지요만, 자세히 모르겠어요. 무슨 다른 일로 관가에 붙잡혔다가 박연중

이란 성명이 사출나서 서울로 압송하게 되었는데, 그때 누가 옥에서 빼가지고

도망을 했다나요. 하여튼지 죽지는 않은 모양인데 소식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하고 덕순이는 궁금히 여기는 빛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애 어미는 자식의 얼

굴도 못 보고 죽었으니 그것도 불쌍하지 아니하냐.?” 하고 그 어머니가 다시

눈물을 머금는 것을 보고 덕순이는 “어머니,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십시다. 내가

내일 용인을 좀 갈까 합니다.” 하고 말을 돌리었다. “용인은 왜?” “조정암

자제를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용이나 정이가 다 어른이 되었겠다. 정이가

집의 덕무와 동갑인가 한 살 더 먹었나? 그러니까 지금은 이십이 넘었겠다.”

“용이는 죽었단 말이 있세요.” “이애야, 용이가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전하는 말이니까 가보면 적실한지 아니한지 알겠지요.” “가보아라. 너의 아

버지와 조참판과 지내던 정분을 생각하기로 사생 존망을 모르고 지낼 처지냐.”

하고 그 어머니는 옛일을 돌이켜 생각하고 언짢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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