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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19)

카지모도 2022. 10. 19.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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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꺽정이의 비위에 맞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별다를 사람이 아니라

김덕순이었다. 김덕순이가 본래 탈속한 사람이 환란을 겪은 뒤로 더욱이 속이

서그러져서 양반의 티가 조금도 없었다. 갖바치의 집에서 꺽정이를 만나던 날

첫인사가 “촌수를 따지면 내가 너의 아재비다.” 하고 그 뒤에 “우리 누님이

가끔 너의 말씀을 하며 상면하고 싶다고 하더라. 언제든지 한번 나하고 같이 창

녕을 가자.” 하고 말하는 품이 참말 족척간에 말하는 것과 같았다. 첫째는 덕순

이가 훌륭한 양반 사람으로 양반의 티를 부리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는 덕순이

가 고리삭은 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또 그 다음에는 덕순이가 힘꼴을

쓰는 까닭에 힘겨룸을 할 만하여 가지가지 모두 꺽정이의 비위에 맞았던 것이

다. 그때 꺽정이의 나이 덕순이보다 배나 넘어 아래지만, 외자로 해라를 받는 외

에는 동무 쇠임직하게 대접하며 덕순이와 서로 상종하였다.

덕순이가 십이삼 년 동안은 창녕 이판서의 집에서 그 부인의 동생으로 지내

고, 남곤이가 죽고 심정이까지 죽은 뒤에는 그 아버지의 묘하인 충주 땅에 와서

형님 덕수와 같이 그 어머니를 봉양하고 지내되, 오히려 성명을 숨기던 사람이

갑자기 서울로 올라와서 본성명을 내놓고 지내게 된 사정을 명백히 알게 하려니

자연히 조정의 전후 형편을 이야기하여야 하겠고, 조정 이야기에는 궁중 형편까

지 겸하여 이야기할 것이 있으므로 중간 이야기가 조금 장황하다.

김안로가 풍덕에서 귀양살이할 때는 사화 중 인물의 죄없는 것을 주장하던 자

가 조정에 들어와서 정권을 잡은 뒤로는 그 주장을 입밖에 내지 아니할 뿐이 아

니라, 조정에서 일어나는 공론까지 친근한 대신을 시켜 꺾어버리게 하였다. 김안

로가 영수가 되고 허항, 채무택이 같은 인물이 동류가 되어 일국의 정치를 좌우

하던 판이라, 안로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 두번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안

로의 비위를 거스르는 사람이라면 어느모로든지 옥사에 걸리어서 죽거나 귀양

가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안로가 권을 잡은 뒤로 오륙 년 동안에 해마다 몇 번

씩 옥사가 일어나서 왕시 지친으로부터 여염 남자까지 죽고 귀양간 사람이 얼마

인지 알 수 없었다.

중전의 형이 되는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동궁이 저희들의 생질이 아닌 까닭

으로 동궁에 대하여 항상 불리한 생각을 품던 터에 중전이 경원대군을 탄생한

뒤로는 더욱이 대군을 장래 임금으로 받들 생각이 있어서 동궁의 외삼촌 되는

윤임과는 장차 맞서게 될 조짐이 있었다. 윤원로가 그 아우 원형과 의론하고 세

력 좋은 김안로를 저희 편으로 끌려고 원로의 딸을 안로의 손자에게로 통혼하였

더니 안로는 동궁을 보호한다고 떠들고 나선 사람일 뿐 아니라 당시 형조판서

윤임과 사이가 좋은 터이라 두말 아니하고 그 혼인을 거절하였다.

김안로는 그때 벼슬이 좌의정이라 조만한 일이 아니면 별로 출입을 아니하는

터인데, 윤판서를 보고 윤가의 통혼 거절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윤판서를 찾아왔

다. 그때 장의동 윤판서는 마을에서 나와서 화초 잘 기르는 장원서 사령 박수경

과 화초장이 홍인서를 데리고 화초를 가꾸다가 대신이 왔다는 선통을 듣고 바삐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서 공손히 맞아들이었다. 좌정한 뒤에 김정승이 “요사이

동궁 제절이 어떠하시답디까?” 하고 물으니 윤판서가 “어제 문후하였습니다.

제절은 별로 못지 않으십디다.” 하고 대답하고 나서 “그러지 않아도 대감께

말씀하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자리를 가까이 옮겨앉았다. “망상스러

운 윤원로 형제가 동궁을 천치라고 훼방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요만, 요사이는

동궁의 수한이 단축하시라고 사람을 보내서 산천기도를 한답디다. 그것이 원로

형제의 짓이면 오히려도 모르겠으나, 내전에서 시키시는 일이라니 이런 변이 어

디 있겠습니까?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씀이오니까?” 김정승이 이 말을 듣더

니 그 대답은 접어놓고 “원로가 저의 딸을 집의 큰손자놈과 혼인하자고 통혼하

데그려, 깜냥없는 것이.” 하고 말한 뒤에 단정히 앉았던 자리를 움직이어 입을

윤판서의 귀에 가까이 대고 “여희가 있고는 신생이 살기 어려울 것 아니오? 대

감, 생각해 보시오.” 하고 다시 단정하게 물러앉았다.

 

5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하고 재우쳐 묻는 것은 주인 윤판서이고 “폐위.

” 하고 간단히 대답하는 것은 김의정이다. “어렵지 않습니까?” “될 수 있지

요.” “글쎄요.” 하고 윤판서가 고개를 비트니, 김의정이 나직나직하나 힘지어

들리는 말소리로

“될 수 있다뿐이오. 저정에서 들고일어설 만한 실덕만 잡아내면 어려울 것도

없소. 신씨를 폐출할 때 상감이 고집 세우시지 못하던 것을 생각해 보시오그려.

” 하고 한동안 말을 그치었다가 잠깐 빙그레 웃고서 “중전이 맹랑한 양반이

야. 나를 끌어보려고 은근히 애를 쓰겠지. 자기 소생 따님 중에 제일 똑똑하다는

경현공주를 내 작은자식에게 하가하려고 형제가 나가서 한집 며느리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까지 말씀하더라지. 나는 못 들은 체해버렸소. 중전이 소료가 틀

려서 속상했을 것이오. 이번에 윤원로가 큰자식과 사돈하잔다는 것을 내가 못한

다고 막았으니까 이것도 중전은 재미 없이 생각할 것이오. 이와 같이 중전 편에

서 내게 붙이는 것을 내가 차버리다시피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동방의

성군이 되실 동궁을 조금이라도 저버리지 아니하려는 까닭이오. 사실로 지금 조

정에 진심으로 동궁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대감하고 나밖에 또 누가 있소? 우리

두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동궁께 일이 없도록 보호하여 나갑시다.” 하

고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윤판서는 김의정의 말을 듣고 일변으로 갸륵하게 생

각하며, 일변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김의정이 돌아간 뒤에 윤판서가 한참 동안 혼자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다가 갑

갑증이 나든지 화초밭으로 나와서 국화분을 돌아보며 “곁가지를 다쳤구나. 수

경이와 인서는 다 갔느냐?” 하고 옆에 따라나온 상노를 보고 물으니 그 상노가

“간다 말씀 못 들었습니다. 하인청에 나가 보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가서

얼마 아니 있다가 두 사람과 같이 들어왔다. “아니들 갔구나.” 화초장이 홍인

서가 앞으로 나서며 “오늘 대감께 특별히 청할 말씀이 있는데요.” 하고 허허

웃으니 윤판서가 인서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무슨 청? 요전과 같이 포청에 갇

힌 사람 빼놓아 달라는 청인가?” “요전은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을 포청에서

중대한 죄범같이 다루는 것이 일이 우습기에 소인이 대감께 와서 말씀을 사뢸

뿐이었습지요, 청이 무슨 청입니까?” “저자식 보아 포장에게 편지해 달라던

사람은 누구인고?” “하여튼지 그것이 소인에게는 긴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

하온데 이번은 소인에게 긴한 일이올시다.” “무슨 긴한 일인가? 어디 들어보

자. 말해라.” “말씀합지요. 다른 청이 아니오라 소인이 홀아비 살림에 멀미가

났습니다. 대감께서 장가 좀 들여주십시오.”

이렇게 청하는 홍인서는 윤판서집 계집종 중에 눈에 드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다. 윤판서가 호반의 풍도로 허허허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하였다. “어렵지 않은

청이다. 장가를 어떻게 들여줄까? 색시 장가를 들여줄까? 기생 장가를 들여줄

까?” “색시고 기생이고 할 것 없이 댁 종 하나만 주시면 원이 없겠습니다.”

“그것은 더욱 쉽다. 내 집안에 있는 아이종 어른종 할 것 없이 모두 불러낼 것

이니 네 맘대로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보아라.” 하고 상노를 보고 “너 마님께

들어가서 아이종들과 서방 없는 어른종들을 모다 불러 내보내시라고 말씀해라.

내외 낀 것 외에 하나라도 빠지고 안나오는 년이 있으면 물볼기다.” 하고 다시

허허 웃고 말이 없이 섰는 박수경이를 돌아보며 말을 붙였다. “너는 생각이 없

니? 너도 하나 골라보지.” “싫소이다. 있는 것도 주체궂어 못 살겠소이다.”

“첩으로 하나 골라보아라. 먹을 것은 내가 대어 주지.” “첩도 싫소이다. 그

속에서 자식새끼가 나면 댁의 씨종이나 늘려 드리게요.”

이때 안에서 어른종 아이종이 떼를 지어 몰려나왔다. 넓은 사람 마당이 그들

먹하도록 수가 많았다. 키 크고 몸이 가냘픈 것도 있고, 키 짧고 몸이 똥똥한 것

도 있으며,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계집아이도 있고, 멋있게 몸을 놀리는 낫

살 먹은 계집도 있었다. 윤판서가 상노를 바라보고 “인제 다들 나왔느냐?” 묻

고 나서 홍인서를 돌아보며

“어디 골라보아라.” 하고 말하여 인서가 이리 저리 기웃하다가 손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6

홍인서가 고른 계집은 나이 근 삼십한 어른종인데 대가의 맏며느리와 같이 복

성스러웠다. 전갈 잘하기로 불리는 계집이라 각 집에 전갈 다니느라고 드나들

때 인서의 눈에 뜨이어서 복성스러운 얼굴이 맘에 들었던 것이었다. 윤판서가

인서를 보고 “우리 집 전갈꾼을 뽑아 가려느냐?” 하고 웃으니 인서는 “황송합

니다.” 하고 웃었다. 이때 하인 하나가 밖에서 들어와서 상노를 불러 가지고 무

어라고 말하는데, 윤판서가 “무어냐?” 하고 물으니 상노가 주인 대감의 앞으

로 가까이 나와서 “임동지가 밖에 오셨답니다.” 하고 하인의 말을 옮기었다.

윤판서가 계집 하인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홍인서에게 “혼인이 급하거든 불복

일로 성혼하자.” 말하고 박수경이를 향하여 “인서 혼인날 술 먹으러 오너라.”

말하고 그 다음에야 상노를 보고 “임동지를 들어 오래라.” 하고 말하며 사랑

으로 올라갔다. 임동지는 윤 판서와 한 동리에 사는 임준이란 사람인데, 윤 판서

집에 종종 오는 터이라 대접받는 손님이 아니었다. 윤판서가 비슷이 앉아서 “

어서 오시오.” 하고 거만하게 말하니 임동지는 장지 밖에 와서 꿇어앉으며 “

날 사이 문안 어떱사오니까?” 하고 공손히 인사하였다. “참, 내가 물어볼 말이

있어. 자제가 임백령이와 친하다지?” “같은 홍당지들이니까 면분은 있겠습지

요만, 상종은 없는갑디다.” “자제 같은 인물이 임백령 문하에 다닐 리가 없는

데 누가 그러드군. 그런데 자제가 내게는 영 아니 와.” “자식이라도 어떻게 만

만치 않은지 모릅니다. 자주 와서 문후하라고 이릅니다만, 조관 명색으로 대관

문하에 자주 드나드는 것이 좋지 못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려.” “자제가 기

개가 놀랍다는 말은 들었지. 자네 같은 사람이 무서워. 내가 조그마치라도 조정

에 득죄나 하면 영감하고 친하다고 용서할 리 없을 것이야.” “모릅니다. 그럴

만한 일이 있다면 대감께 까지 범하려고 할는지. 저의 아비라도 용서할 것 같

지 않아 보이니까요. 입이 너무 발라 걱정입니다.” “영감은 임백령에게 더러

가시오?” “일년 일차 세배를 갈 뿐입니다.” “영감께 말이지, 내가 첩을 얻을

때 임백령이가 해괴망측한 짓을 하더니 지금도 그 맘을 끊지 못하는 모양이야.

가끔 내 첩에게 먹을 것도 보내지 한다지. 계집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가. 하

인이 문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쫓아버리고 하니 저만 망신이지.”하고 윤판서가

우스꽝스럽다는 듯이 코웃음을 웃었다.

윤판서의 첩은 당대 일색으로 유명한 평양 기생 옥매향이니, 처음에 옥매향이

하나 놓고 윤임, 임백령 두 사람이 서로 내 것을 만들려고 사단을 부리었는데,

옥매향이는 윤판서의 세력 좋은 것과 임 참판의 다정한 것 중 어느 것을 골라잡

을지 몰라 하다가 구경 세력 좋은 데로 쏠리어서 윤판서의 첩으로 들어앉았으

나, 종시 임 참판의 다정한 것을 잊지 못하여 임 참판과 연신을 끊지 않고 윤판

서가 공고로 집에 나오지 못하는 것을 미리 알게 되면 심복 하인 모린이를 보내

서 임 참판을 맞아오는 일까지 있었다.

임 참판이 도포에 갓만 쓰는 선비 모양을 차리거나 소매 없는 옷에 패랭이를

쓰는 천인 복색을 하고 남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밤중 새벽으로 드나들지마는,

말이 모란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여도 소문이 나기 쉬운 일이라 임백령이가

옥매향의 집 뒷문 출입을 한다는 말이 한 입 거쳐 두 입 건너 자연히 아는 사람

이 많아진 터이다. 임동지도 이 소문을 들은 사람인 까닭에 윤판서의 말을 듣고

‘모르는 것이 부처님이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임백령의 행사가 괴악

해요.” 하고 얼쑹덜쑹하게 대답하였다. 윤 판서는 그 대답의 뜻을 다 알아 듣지

도 못하면서 “괴악하고말고.” 하고 임동지의 말에 비위가 맞는 모양으로 말하

고 조금 동안을 띄어서 “내가 저를 미워하려니 생각하고 윤원형이와 상종하면

서 나를 해낼 공론을 한다지. 내가 그만 일로 저를 미워할 사람도 아니지만, 저

희들이 공론한다고 쉽사리 넘어백힐 사람도 아니야.” 하고 나중에 “영감, 그렇

지 않소?” 하고 임동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임동지는 “그렇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치고 말머리를 고치어서 “여보십시오, 대감. 실상 생각하면 소실이라

고 다 그럴 리는 없지요만, 소실은 아물래도 정실과 달라서 모든 일에 믿음성이

적습니다.” 하고 말하자, 윤 판서는 “암, 다르지.” 하고 헙헙하게 대답하며 임

동지의 말은 별로 새겨듣지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7

며칠 뒤 저녁때 윤임이가 김안로를 찾아왔더니 허항과 채무택이가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다. 각기 인사를 마친 뒤에 주인 손 네 사람이 조정 이야기를 시작

하여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는 중에 젊은 조신의 인물 이야기가 나서 윤임이는

임동지의 아들 임형수가 인물이 잘났다고 칭찬하고, 채무택이는 송희규란 사람

이 인물은 맹랑한 모양이나 외모가 잔열하다고 비웃어 말하고, 김안로는 유희춘

이란 사람이 총명도 있고 성질도 온순하나 사람이 정갈치 못하다고 폄하여 말하

였다. 허항이가 김안로의 말 뒤를 따라서 “유춘의 정갈치 못한 것은 말도 마십

시오. 먼지가 켜로 앉은 갓을 쓰고 때천지가 된 옷을 입고 출입하는 꼴이라니,

더러워 볼 수가 없을 지경이지요.” 하고 깔깔 웃으니 채무택이도 또 뒤를 이

어서 “그 친구의 웃옷에는 언제든지 이가 슬슬 기어 다닌답니다 그려.” 하고

깔깔 웃었다. 윤임이가 “그런 사람은 말할 것이 없지만 주인 대감은 정갈하신

것이 너무 심하시어.” 하고 허항과 채무택이를 돌아보니 허항이는 “그러시다

고도 할 수 있지요. 입으시는 옷에 금이 한 번만 나면 벗으실 때까지 꼭 그 금

뿐이니까요.”하고 김안로의 눈치를 살피고 채무택이는 “면대해서 말씀 여쭙기

는 좀 황송하지만, 옥골선풍으로 단정하게 앉으신 것이 재상보다도 신선 같으십

니다.”하고 윤임이를 가르키며 “내가 이 대감과 조용히 의논할 말씀이 있으니

자리들을 좀 피하여 주시오.” 하고 말하여 허항과 채무택이는 다같이 무료하여

하면서 “물러가겠습니다.” “저녁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두 사람이 함

께 일어섰다. 그 뒤에 김안로가 윤임의 앉은 자리를 가까이 옮기게 하고 “전날

말씀하던 일을 집에 와서 생각해 보았소. 동궁이 촉수하시라고 산천 기도를 시

킨다는 것이 벌써 종사에 대한 큰 죄악이라 구태여 다른 실덕을 물을 것이 없지

않겠소? 산천 기도 다니는 것들을 붙잡기만 하면 그들의 입에서 원로 형제의 말

이 나올 것이고, 원로의 형제가 잡혀 들기만 하면 그 일은 여반장이 아니겠소.

그래서 기도 다니는 것들을 기찰하여 잡으라고 비밀히 포청에 일러 두었소. 하

나라도 붙잡히기만 하면 그 날로 곧 일을 바로잡을 작정이니 대감도 그리 알아

두시오.”

윤임이는 이 말을 듣고 아무 대답이 없이 고개만 끄덕이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해가 저물었다. 윤임이가 일후에 다시 올 것을 말하고 일어서려 하니 감

안로가 “별로 일이 없으시거든 내게서 저녁을 자시고 이야기나 더 합시다.”

하고 만류하였다. 윤임이가 “오늘 밤에 조그마한 일이 있습니다.” 하고 웃으니

김안로는 그 웃는 것을 보고 괴상히 생각하여 “무슨 일이오?” 하고 묻는데 윤

임이가 빙글빙글하면서 “종년 하나 시집을 보내는데 오늘 밤에 봉채를 받습니

다.” 하고 대답하니 “대감은 별일을 다 총찰하는구려.” 하고 김안로도 역시

웃었다.

그 날이 윤판서의 집 종이 홍인서의 봉채를 받는 날이었다. 윤판서가 모든 절

차를 차려주어서 법제로 혼인을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함진아비가 지고 온 함

을 윤판서가 손수 열었다. 이것이 남 의집 종으로는 꿈에도 받아보지 못할 호강

이었다. 그날 밤 봉채뿐이 아니라 이튿날 초례까지도 남의 집 종의 혼인 같지

아니하였다. 첫째는 윤판서가 홍인서를 사랑하는 까닭이지마는, 태반이 윤판서의

실없는 장난이었다. 홍인서 내외가 초례를 마치고 윤판서 앞에 와서 인사 문안

을 드리니, 윤판서가 인서의 안해를 보고 “너는 오늘부터 댁에 드난할 것없이

너의 남편을 따라가서 유자생녀하고 잘 살아라.” 하고 그 다음에 인서를 보고

“인제는 네가 내 집 사위야.” 하고 빙글빙글 웃었다. 인서의 안해는 고개를 숙

이고 있을 뿐이고, 인서는 “황송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신굽신하였다. 윤 판

서는 인서의 혼인잔치를 선비집 자녀의 혼인잔치보다 낫게 차리고 문객들 이외

에 동리에 사는 임동지 같은 친구까지 청하여 대접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윤판

서의 집에는 큰사랑, 작은사랑, 수청방, 하인청 할 것 없이 모두 술상이 벌어지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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