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다 저녁때 오주가 산더미 같은 나뭇짐을 지고 정첨지 집 못미처 있는
우물 옆을 지나오는데 물동이를 내려놓고 섰는 여편네들과 쌀을 씻고 앉았는 여
편네들이 참새같이 지저굴거리던 중에 여편네 하나가 내달아서 “곽서방 마침
잘 오는구려. 여보 나뭇짐 버티어놓고 두루박 좀 건져주오. " 하고 오주를 붙잡
았다. “여보 귀찮소. " “이녁 주인네 집 두루박을 내가 얻어가지고 왔다가 우
물에 빠뜨렸소. 좀 건져내오. " “빠뜨린 사람이 건지구려. " “내가 건져낼 수
있으면 이렇게 청할라구. 여보, 그러지 말고 좀 건져주구려. " “성가시어 못살겠
네. 내가 나뭇짐 갖다 두구 바지랑대 가지구 오리다. " “바지랑대 저기 있소. "
오주가 그 여편네에게 붙잡혀서 나뭇짐을 버티어놓고 바지랑대로 두레박줄을
건지는 중에 우물 가까이 사는 동네 소임의 안해가 돌전 어린애를 업고 물을 길
러 나왔다. 여러 여편네 중에 체신 없는 젊은 여편네 하나가 어린애를 귀애한답
시고 하다가 도리어 울려놓았다. 오주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두레박줄을 끌어
올리느라고 애 업은 여편네가 온 줄을 몰랐다가 뜻밖에 애 우는 소리를 듣고 깜
짝 놀라서 거의 손에 잡히게 되었던 두레박줄을 도로 떨어뜨리게 되었다. 오주
가 바지랑대를 내던지고 돌쳐서서 소임의 안해를 흘겨보다가 우르르 쫓아가서
옆에 섰는 다른 여편네들을 잡아제치고 우는 애를 어머니 등에서 빼앗으러 들었
다. 애어머니는 질겁하여 새된 소리를 지르고 여러 여편네들은 혹은 덩달아서
소리를 지르고 혹은 오주를 붙잡고 날치었다. 오주가 제미 소리를 지르며 곧 애
어머니를 우는 애 업은 채 번쩍 들고 우물에 가서 텀벙 집어넣고 속이 시원한
듯이 껄껄 웃고 나뭇짐도 내던지고 정첨지 집으로 뛰어갔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와서 우물 속의 여편네를 건져냈다. 물이 깊지 않고 빠질
때 별로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히 애 어른 다 목숨은 보전하였느나, 그 여편네
의 친정과 시집에서 오주를 때려죽인다고 들고 나섰다. 정첨지가 동네의 유력한
사람이라 소임을 불러다가 오주의 미친 병을 말하고 “병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죈가? 천행으루 이왕 모자가 다 무사했으니 요란스럽게 굴지들 말게. 오주를 섣
불리 건드리면 여러 인명을 상할 테니 동네에 큰일일세. 나두 오주를 집에 두었
다가 무슨 누를 받을는지 모르니까 차차 봐가며 내보낼 작정일세. "하고 타일러
서 오주의 저지른 일을 무사 타협시키었다.
오주가 앓고 나서 신뱃골 갈 때 청석골을 들렀지만 유복이가 꺽정이와 같이
칠장사 선생에게 새해 세배하러 가고 집에 있지 아니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하였
었다. 소임의 떨거지의 말썽이 끝이 나서 오주가 소임과 화해하던 날 저녁때 정
첨지 아들이 밖에 있다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쇠죽 쑤는 오주를 보고 “여게 오
주, 자네가 형님이라구 하는 사람 밖에 왔네. "하고 일러주었다. 오주가 쇠죽을
쑤다 말고 뛰어나와서 삽작 밖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형님 어디
있소?”하고 큰소리를 질러서 찾으니 “나 여기 들어앉았다. "하고 유복이가 머
슴방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오주가 한달음에 방문 앞에까지 뛰어와서 “
형님 오래 못 봤소, 벌써 왔소?”하고 유복이를 들여다보니 유복이는 벌써 왔다
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들어오너라. "하고 문길을 비키어 주었다.
오주가 방안에 들어와서 유복이와 마주 앉으면서 “죽산 갔다 언제 왔소?”하고
물으니 유복이가 “어제 왔다. " 대답하고 곧 “너 그 동안 몹시 않았다지?”하
고 물었다. “그랬소. " “집에 와서 네가 앓았단 말은 들었지만 무슨 병으로 앓
았는지 몰랐더니 지금 너의 젊은 주인에게 말을 들어보니 병이 괴상하구나. " “
지금 다 나았으니까 괜찮소. " “아직두 다 낫지 않았다며?” “아니 다 나았소.
" “병이 다 나은 사람이 공연히 남의 집 여편네나 어린애를 우물에다 집어넣는
단 말이냐?” “내가 앓구 난 뒤부터는 당초에 어린애가 보기 싫소. 더구나 우
는 애는 박살을 내놓구 싶소. 남의 집 어린애를 우물에 집어넣은 것이 잘못한
일인 줄 알지만 이 담에 다시 그런 일을 안 하게 될지 내 일이라두 내가 장담
못하겠소. " “병 꼬투리가 남아 있어 그런 것 아니냐?” “그런지 모르겠소. "
“너 이 집 머슴살이 고만두구 내게 가서 같이 있자. " “산중에 어린애가 없어
좋기는 하지만 이 집 첨지 영감이 잘 들어줄는지 모르겠소. " “아까 그 아들의
말 눈치는 그럴 것 같지 않더라. 또 설혹 붙잡더래두 네가 떼치구 가면 고만 아
니냐. " “그는 그렇지요. 그러나 내가 청석골에 가서 무어 하우?” “무어 하다
니. 나하구 사냥이나 다니자꾸나. 꺽정이 언니가 너준다구 굵은 쇠도리깨를 일부
러 만들었더라. 이번에 내가 갖다 집에 두었다. 그 도리깨 가지구 사냥질 다니면
좋지 않겠니?” “그렇게 하겠소. " “그럼, 속히 머슴살이 고만두두룩 해라. "
“오늘 고만두구 같이 갑시다. " “여러 해포 있던 집을 그렇게 졸창간에 떠날
수 있겠니?” “간다구 말하구 사경이나 찾으면 고만 아니오. 잠깐만 여기서 기
다리시우. "
오주가 곧 안에 들어가서 정첨지 식구에게 머슴살이 고만두고 나갈 뜻을 말하
니 정첨지의 아들과 며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정첨지까지 힘지게 만류하지 아니
하였다. 오주는 그날로 정첨지 집을 하직하고 유복이를 따라가서 청석골 오가의
집의 한식구가 되었다.
수삭 지난 뒤부터 탑고개에 쇠도리깨 가진 도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흉악하
기로 소문이 났다. 댓가지 도적이 나온 뒤에 오가가 여차가 되고 쇠도리깨 도적
이 나온 뒤에 댓가지 도적이 여차가 되었다. 댓가지 도적은 물건이나 빼앗고 말
지마는 쇠도리깨 도적은 사람의 팔뚝이나 정강이를 장난삼아 분질렀다. 그래도
어른은 대개 목숨을 보전하여 보내지만 어린애는 보기만 하면 곧 박살하여 죽이
었다. 쇠도리깨 도적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개래동 정첨지 집에서 머슴 살던 곽
오주인 것은 다시 말할 것 없고 곽오주가 청석골 두령 한 사람으로 화적질할 때
각처에서 어린애들을 무지스럽게 죽여서 “곽오주 온다. " 소리 한마디가 우는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도록 무서운 사람이 된 것은 뒷날 이야기다. 오늘날
까지도 지각없는 부녀자들이 우는 어린애를 혼동할 때 “곽쥐 온다, 곽쥐 온다.
"하는 것을 보면 곽오주 이름이 당시에 어떻게 무서웠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망우당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이가 오형제인데 그 오형제 이름이 모두 달아날
주 변이라 곽쥐란 말이 곽월 오형제로부터 났단 말이 있으나 이것은 억설이다.)
-4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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