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학이가 낮에는 선화당과 비장청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해를 지우고 저녁밥은
감사의 분부로 선화당 대청에서 다른 비장들과 같이 먹고, 석후에는 감사를 뫼시고
서서 몸으로 겪은 일과 눈으로 본 일과 귀로 들은 일을 대강 다 말씀하고 이내 감사
께 저녁문안을 마친 뒤에 비로소 처소로 내려왔다. 봉학이의 처소는 전에 있던
곳이니 공방에서 병방으로 소임이 바뀐 후에도 감사의 말씀으로 처소만은 옮기
지 아니하였었다. 호젓한 처소에 계향이가 혼자 촛불을 돋우고 앉았다가 봉학이
를 맞아들였다. "저녁밥은 어디서 먹었느냐?" "여기서 먹었세요. " "집에서 들여
왔더냐?" "나으리가 통인에게 전갈까지 해 보내주시고 웬 딴 말씀이세요?” “
나는 그런 일이 없는데 실없은 형방이 어주전갈을 시킨 모양인가. " “이번에 참
말 형방 나으리 덕을 많이 보았세요. " “새 부윤 영감에게 수청을 들었으면 아
무 일두 없었지 누가 거역하라더냐?” 계향이가 봉학이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나는 사람 아닙니까.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기생에 수절이 당한가. " “누
가 수절한다고 말씀해요?” “수절 안 하면 아무 놈에게나 수청들 것 아니냐?”
“기생은 뭐 정도 없나요. " “기생의 정이란 장마때 물같이 갈래없이 흐르는 것
이지. " “너무하십니다. " 계향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졌다. 봉학이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어주며 “눈물 여린 사람하구는 실없는 소리도 못 하겠다.
" 하고 끌어안아서 무릎에 올려앉히는데 계향이가 상을 찡그리며 얄깃얄깃하고
앉았다. “장독이 났다더니 아직 낫지 않았구나. " 봉학이가 매맞은 자리를 옷위
로 만져보며 “천하에 몹쓸 놈두 다 많다. " 하고 부윤을 욕하였다. “나는 나으
리를 다시 못 보입고 죽는 줄 알았세요. 그 무지스러운 매를 한번 더 맞았더면
죽었지 별 수 없을 게요. " “네가 죽었더면 부윤두 잇속 없었지. " “나으리, 인
제부터는 어딜 가시든지 나를 데리고 가세요. " “오냐, 네 맘만 변치 마라. " 봉
학이와 계향이가 자리 보고 누운 뒤에 베게 위에서도 서로 속살거리느라고 단야
에 닭까지 울리었다. 봉학이는 계향이의 분을 한번 풀어주고 싶으나 관직에 눌
려서 부윤을 걸지 못하고 부윤은 계향이의 고집을 그예 꺽어보고 싶으나 체면에
걸려서 봉학이와 다투지 못하여 얼마 동안 아무 갈등이 없이 지내었다. 그 동안
에 감사가 가리포 전공을 위에 장계하였더니 감사와 병사와 수사에게는 각각 관
디차를 하사하고, 가리포 첨사에게는 가자은전이 내리고, 이봉학이에게는 종육품
병절교위 직책이 내리고, 군사들에게는 매인에 무명 두 필씩 상급이 내리었다.
감사가 봉학이의 데리고 갔던 군사들과 및 유족을 불러모아서 나라 상급을 나눠
준 뒤 주육으로 호궤하고 영하의 대소관원을 진남루에 모아가지고 큰 잔치를
벌이었다. 기구가 장하거니 포진이 범연하랴. 누 안에는 꽃같은
자리를 펴고 누 밖에는 구름 같은 차일을 쳤다. 자리 위에는 관원이요, 차일 속
에는 풍악이다. 감사는 혼자 높이 앉고 부윤과 도사는 모로 앉고 각 비장은 감
사가 특별히 자리 주어 검률, 심약같은 적은 관원들과 한옆에 몰려앉아서 광대
놀이와 기생 가무를 구경들 하였다. 술상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늘여놓인 뒤에
술상머리에 기생들이 앉아서 잔을 드릴 때 권주가들을 불렀다. 병방비장 봉학이
가 말하자면 이 잔치의 주인이라 봉학이의 수청 기생 계향이가 기생 중에 제일
세가 났다. 감사까지도 웃으며 “계향아, 내게 와서 술 한잔 쳐라. " 하고 부르는
데 부윤만은 부르지 아니하였다. 계향이가 부르지 않는 데 가서 “술 한잔 치오
리까?” 하고 이쁜 체할 까닭이 없어서 부윤의 자리는 빼놓고 돌아다니었다. 부
윤이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을 때 부르지 않은 것은 생각지 않고 빼놓고 다니는
것만 괘씸히 여겨서 계향이를 불러다가 상머리에 앉히고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
았다. “이년, 너 어째 내게 와선 술 한잔 안치느냐?” “술 치란 말씀 언제 하
셨습니까. " “내 말을 기다렸다! 오냐 그럼 술을 쳐라. " 계향이가 마지 못하여
술 한잔을 쳐서 드린 뒤에 “인제 저리 가겠습니다. " 하고 일어서려고 하니 부
윤이 “내가 가란 말 하기 전엔 못 간다. " 하고 꾸짖어서 주저앉히었다. “네
눈엔 이비장 외에 사람이 없느냐?” 부윤의 슬까스르는 말을 “네, 그렇습니다.
" 계향이가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이년, 지금 한 말 다시 한 번 해봐라. 발칙
스러운 년 같으니. " 부윤의 언성이 높았다. 봉학이는 벌써부터 부윤의 자리를
자주 돌아보는 중에 부윤의 높은 언성을 듣고 얼굴빛이 변하였다. 계향이를 부
윤 앞에 더 오래 두는 것이 불긴하거니 생각하는 감사가 부윤을 바라보며 “여
보 영감, 술이 취했소그려. " 하고 말하니 부윤은 얼른 단정하게 앉으며 “아니
올시다. " 하고 대답하였다. “계향이가 무얼 잘못했소?” “아니올시다. " “아
니라니?” “그년이 발칙스럽게 말대답을 합디다. " 감사가 곧 계향이를 불러다
가 앞에 세우고 부윤 영감에게 말대답하였다고 몇 마디 호령한 뒤에 밖으로 내
보냈다. 잔치가 파하기 전에 감사가 먼저 일어나고 부윤과 도사가 다음에 일어
났다. 각 비장 외에 적은 관원들이 큰길에 나와서 감사를 보내고 또 한 번 누
아래 내려와서 부윤과 도사를 보내고 다시 새로 한판을 차리려고 누 위로들 올
라갈 때 봉학이는 계향이를 찾아서 데리고 올라가려고 슬그머니 뒤에 떨어졌다.
봉학이가 계향이를 찾는 중에 홀저에 앞 행길에서 계향이의 악쓰는 소리가 났
다. 봉학이가 달음질로 행길에 나와 본즉 사령 둘이 계향이의 양편 팔죽지를
잡아 끄는데 계향이는 아니 끌려가려고 바둥거리며 악을 쓰는 중이었다. “이
놈들, 기생 놓구 게 섰거라!” 하고 봉학이가 소리를 지르니 사령들이 계향이를
놓지도 않는 대신 끌지도 못하였다. “이놈들, 냉큼 놓지 못하느냐!” 사령들이
서로 돌아보며 슬며시 팔죽지들을 놓자, 계향이는 곧 봉학에게로 달려와서 손에
매달리며 울음을 내놓았다. “울지 마라. 남 보기 창피하다. " “나으리, 내가 잡
혀가서 그 몹쓸 매를 또 맞으면 나는 죽소. " 봉학이가 사령들을 보고 “너의 원
님이 이 기생을 잡아오라더냐?” 하고 물으니 사령들이 함께 “네. " 하고 대답
하였다. “이 기생은 내가 잡혀 보낼 수 없으니 그리들 알구 가거라. " “소인들
이 그대루 가면 본관 사또께 죄책을 당합니다. " “무엇이 어째! 너희놈들이 죄
책을 면하려구 잡아가야겠단 말이냐? 잡아갈 수 있거든 잡아가 봐라. " 이때 마
침 “이비장. " 하고 형방비장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봉학이는 누 위를 향하고
“지금 곧 올라가네. " 하고 소리쳐 대답한 뒤 다시 사령들을 바라보며 “다리뼈
들을 퉁겨놓기 전에는 못 가겠느냐!” 하고 얼러댄 뒤에야 사령들이 저희끼리
서로 보고 “그대루 가세. " “탈났네. " 하고 말하며 돌아서 갔다. 부윤이 동헌
에 앉아서 계향이를 잡아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사령들이 빈 손으로 들어오는 것
을 보고 “잡아오란 기생년은 어떻게 했느냐?” 하고 호령을 내리니 사령 하나
는 그저 잡아 잡숩시오 하는 모양으로 “녜. " 대답하고 또 사령 하나는 천연덕
스럽게 “계향이를 잡았습니다. " 대답하였다. “잡아왔다면 어니 있느냐?” “
잡았다가 뺐겼습니다. " “뺏기다니 뉘게 뺏겼단 말이냐?” “감영 이비장이 뺏
어갔습니다. " “슬그머니 잡아올 것이지 누가 떠들고 잡아오라더냐?” “소인들
은 떠든 일 없습니다. 그년이 악을 써서 비장이 듣구 쫓아왔습니다. " “이놈들
아, 내가 잡아오랬지 뺏기고 오라더냐!” 부윤이 곧 형틀과 매를 들이라고 하여
두 사령을 각각 매 십여개씩 때리고 “너의 두 놈이 사
흘 안에 계향이를 잡아 대령해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놈 볼기에 살점이
남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라. " 하고 분부한 뒤 삼문 밖으로 끌어 내치게 하였
다. 계향이가 여느때도 밤낮 봉학이 처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이 진남루 아
래에서 혼나고 온 뒤로는 감영 안에만 파묻혀 있었다. 본관 사령들이 공연히 계
향이의 집 근처로 빙빙 돌다가 사흘을 지내고 억울한 매를 전보다 호되게 맞고
다시 사흘 한을 더 얻어 가지고 나올 때 두 사령은 서로 지껄였다. “우리가 무
슨 죈가?” “그 망한 개새끼년 하나 까닭에 우리 둘은 맷복이 터졌네. " “사흘
돌이루 매를 맞구 사람이 견디나. 어떻게든지 그년을 잡아야지. " “그년은 감영
안에 파묻혀 있구 우리는 감영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하나. " “그럼,
나는 오늘부터 집에 나가서 누워 있다가 사흘 후에 매나 맞으러 들어올라네. "
“그나마 잡으러나 다녀봐야지 언제까지든지 무한정 매만 맞구 살 텐가. " “잡
지두 못할 걸 잡으러 다니느라구 헛수고까지 하구 매를 맞을 것 무엇 있나. " “
가만 있게. 그년을 감영 안에서 꾀어내서 잡아보세. " “꾀어낼 수가 있겠나?”
“생각하면 좋은 수가 나오지그려. " “나는 열흘 굶구 생각해두 좋은 수가 나올
것 같지 않은데. " “여보게, 내 말 듣게. " 한 사령이 입을 동무 사령의 귀에 가
까이 대고 몇 마디 소곤소곤 말하니 동무 사령이 “되었네 되었어. " 하고 손뼉
을 치며 좋아하였다. 계향이의 집은 한번 날려 잇는 데도 이엉이 일백칠팔십
마름씩 드는 초가로 큰 집이나 집에 있는 식구는 단출하여 안에는 계향이 외에
살림해주는 늙은이와 부리는 계집아이가 있고 밖에는 행랑살이하는 사람 내외가
있을 뿐인데, 계향이가 집에 없으면 놀러와서 떠드는 손님도 없는 까닭에 집안
이 항상 사람 없는 집같이 조용하였다. 진남루 놀잇날 계향이가 집에 나와서 옷
갈아입고 간 뒤 연나흘 동안 감영 안에서 먹고 자고 집에는 한번도 나오지 아니
하였다. 조석밥은 집에서 들여가는데 계집아이가 감영을 드나들었다. 이날 저녁
때가 다 되어서 동자하는 여편네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늙은이와 계집아이는 마
루에서 반찬을 장만하는 중에 “할머니, 저녁반찬은 좀 소복소복 담으시오. " “
왜?” “저녁에는 이비장 나리가 초벌 요기하신다고 아씨하고 같이 잡술 때가
많습디다. " “이비장 나리가 사람이 재미있는 게야. " “재미있다뿐이오. 반찬을
집어서 아씨 입에 너주기까지 하신다오. " “그 맛에 감영안에서 조석을 자시는
구나. " “아씨가 참 이비장 나리께 반하셨어요. " “나는 그게 걱정이다. " “무
엇이 걱정이에요?” “한 사내만 가지고 죽자 살자 하면 다른 사내들이 좋아하
니. " “좋아 안 해도 고만이지요. " “요전같이 죽도록 매를 맞아도 고만이야?
” “참말 요새 사령들이 와서 아씨 안 오셨느냐고 물을 때는 맘이 송구스러워
요. " “돌아간 형님만 같으면 비장, 부윤 다 함께 손속에 넣고 놀리련만 그런
수단이 있어야지. " 늙은이와 계집아이가 주거니받거니 지껄이다가 별안간에 나
는 “불이야. " 소리에 놀라서 바깥뜰을 내다보니 바깥채에 불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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