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들의 화살은 한데 떨어지는 것이 많고 또 빗맞는 것이 많았으나 봉학이의
화살은 하나가 나가면 반드시 적병이 하나씩 꺼꾸러졌다.
봉학이가 옆에 놓인 화살을 반도 채 다 못 써서 적병이 뒤로 물러나가기
시작하였다. 봉학이가 적의 퇴진하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나가
서 뒤쫓으려다가 퇴군하는 적을 뒤쫓을 때는 복병을 조심하여야 한다고 들은 말
이 있는 까닭에 적의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고만두었다. 적이 멀리가서 눈에
보이지 않은 뒤에 군사 몇십 명을 성 밖에 내보내서 죽은 적의 머리를 베어오라
하였더니 적이 퇴진할 때 머리를 잘라간 것이 많아서 베어온 머릿수는 십여 개
밖에 안 되었다. 성 앞문에서는 적의 머리를 십여 개나마 얻었지만, 성 뒷문에
서는 한 개도 얻지 못하여 첨사가 봉학이를 볼 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는 것
을 봉학이가 보고 “한 성을 둘이 같이 지키는 터에 적의 머리를 가지구 네것 내
것 할 거 있습니까?” 하고 말하여 첨사는 좋아하였다. 날이 저물고 저녁밥이
다 되어서 봉학이가 첨사와 같이 저녁상을 받았을 때 첨사가 반주를 더 가져오
라고 말하는 것을 봉학이는 고만두라고 말리었다. “몇 잔씩만 더 합시다. " “
반주는 고만 하구 얼른 밥 먹구서 밤 지낼 준비를 차립시다. " “밤 지내는데 무
슨 준비를 차릴 것이 있소?” “내가 작년에 영암서 지내 보니까 왜적이 밤을
타서 엄습을 일쑤 잘합디다. 달 밝은 때는 막기가 외려두 낫지만 오늘 밤같이
달두 없는 때는 적병이 줄을 매거나 사다리를 놓구 성으루 기어올라와두 성 위
에서 감감히 모르구 있게 됩니다. " “죽도 소산 일등 좋은 화살이 많이 있으니
준비 걱정 마시오. " “아무것두 보이지 않는 어둔 밤에 살을 함부루 쏘아 내던
지기가 아깝지 않습니까. 지금 순찰 사또께서 수성장으루 영암성을 지키실 때
쓰시던 방법이 있으니 그대루 준비해 두십시다. " “어떤 방법이오?” “끓는 물
을 끼어얹구 불끄러미를 내던지고 돌덩이 기왓장 사금파리를 내려치는 것입니
다. " “그만 준비는 힘들 것이 없소. " 저녁상을 물린 뒤에 첨사는 군사와 백성
들을 시켜서 작고 큰 돌덩이와 기왓장 도깨그릇 깨어진 것을 주워 모아서 여러
무더기를 만들어놓고 백성들 집집이 끓는 물을 준비하라 하고, 또 길고 짧은 홰
를 많이 만들라고 하였다. 긴 홰는 켤 것이요, 짧은 홰는 던질 것이었다. 첨사의
군사와 봉학이의 군사를 떼떼로 나누어서 앞뒤로 성을 돌게 하고 첨사와 봉학이
도 번갈아 나가서 순시하기로 하였는데 밤이 이경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도 없었
다. 순시를 마치고 들어온 첨사가 “공연히 헛준비를 했는가 보오. "하고 말하니
“비오기 전에 집 이어서 낭패될 거 있습니까. " 하고 봉학이는 대답하였다. 첨
사와 봉학이가 같이 앉아 이야기하는 중에 삼경이 되어서 봉학이가 순시하러 나
가려고 할 즈음에 왜적이 성 밑에 왔다고 앞성에서 급한 기별이 들어왔다. 첨사
가 시급히 취군을 시키고 봉학이와 같이 앞성으로 쫓아오는 중에 뒷성에서 같은
기별이 와서 봉학이는 첨사와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뒷성으로 달려왔다. 앞뒤
성에서 아우성을 치니 성을 넘으려던 왜적이 들킨 줄을 알고 한편에서 불질을
하며 한편에서 성으로 기어올랐다. 그러나 성 위에서 돌덩이와 기와쪽을 던지고
불끄러미를 떨어뜨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서 왜적이 좀처럼 성 위에까지 올라오
지 못하였다. 왜적이 낮에와는 달리 뒤쪽으로 뒷성으로 많이 몰려왔는데 돌무더
기와 끓는 물그릇은 앞성으로 많이 날라가서 뒷성에서는 쓰기가 부족하였다. 봉
학이가 근처 백성들 시켜서 매운 재와 똥오줌을 퍼나르게 하여 성 아래로 끼어
얹었다. 삼경에 들어온 왜적이 날샐 때에 비로소 물러가서 성 안에서 군사 백성
할 것 없이 하룻밤을 반짝 새우게 되었다. 아침때가 지난 뒤에 왜적이 다시 들
어와서 성을 에워싸고 치는데 어제 낮과 밤 두 번 다 이를 못 보아서 분병이 되
었던지 기세가 사나웠다. 무서운 불질이 성벽의 돌을 부수고 성문에 구멍을 뚫
었다. 성 위에서는 믿느니 활인데 방패가 줄닿아서 사람을 가리고 방패틈에서
불질을 하는 까닭에 화살이 사람을 맞추기 어려웠다 첨사와 봉학이가 피로한 군
사들을 동독하여 막기를 힘썼으나 적병은 마침내 성 밑에까지 들어와서 좌우로
흩어져서는 성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고 한편에서는 성을 타고 넘으려고 하였다.
성 위에서는 덩이돌을 내려굴리고 끓는 물을 끼어얹었다. 성안 백성들의 여편네
까지 다 나섰건만 막는 손이 모자라서 성벽 한 곳이 헐리기 시작하였다. 이 기
별을 듣고 첨사는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봉학이가 군사 사오십 명을 몰고 급히
쫓아와서 창칼 가진 군사는 헐리는 곳 좌우에 숨겨두고 활 가진 군사는 헐리는
곳 정면에 벌려세웠다. 성이 헐어지며 적병이 뛰어들어오다가 앞에서 가는 화살
에 넘어지고 좌우에서 나가는 창과 칼에 꺼꾸러졌다. 봉학이가 재목과 돌로 헐
린 곳을 막으려고 근처 백성들을 불러서 지휘하는 중에 적병이 다시 떼로 몰려
들어오는데 앞장선 적장 하나가 갑옷과 투구로 몸을 단단히 하여 방패가 없어도
화살을 겁내지 않았다. 봉학이가 대우전을 시위에 먹여들고 잠깐 노리고
있다가 투구 채양 아래 내놓은 한편 눈을 쏘아 맞혔다. 적장이 눈에 꽂힌 살을
빼서 내던지며 천둥같이 소리를 지를 때 입이 잠깐 드러나자, 대우전 또 한 개
가 그 입을 꿰었다. 넘어지려는 적장을 뒤따르던 적병들이 붙들고 도망하여 나
가려고 하니 봉학이가 사수들을 휘동하여 앞으로 나가며 어지럽게 쏘아서 적장
외에 적병 여럿을 꺼꾸러뜨렸다. 그러나 칼든 적병들이 비켜나며 곧 불질하는
적병들이 나타나서 사수 칠팔명이 불을 맞고 쓰러지는데 봉학이 옆에 가까이 있
던 사수가 두셋이나 쓰러졌다. 한동안 불과 화살이 오고가고 하다가 불이 그치
며 적병이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봉학이가 일변 성 헐린 곳을 막게하고 일변 쓰
러진 사수를 돌아보는데 된불 맞는 죽은 송장은 처치하게 하고 선불 맞고 죽지
않은 사람은 구호하게 하였다. 그 뒤에 봉학이가 성 위에 올라와서 성 밖을 바
라보니 적병들이 해변으로 몰려나가는 것이 무엇에 쫓겨서 도망하는 것 같아서
웬일인가 의심하며 다시 멀리 바라보니 기치가 보이고 인마가 보이고 얼마 뒤에
북소리가 들리고 나팔소리가 들리었다. 첨사에게로 가려고 성에서 내려오는 길
에 첨사가 마주 쫓아오며 “구원병이 왔소. " 하고 소리치고 봉학에게 와서 손목
을 덥석 잡으며 “인제 우리가 살았소. " 하고 한숨까지 내쉬었다. 첨사는 바로
성문을 열고 구원 오는 인마를 맞아들이려고 하는 것을 봉학이가 “참말 구원병
인지 혹시 적병인지 확실히 안 뒤에 성문을 여십시다. " 하고 말리고 첨사와 같
이 와서 군사를 대오를 정제하여 성 앞 문턱에 머물러 놓고 다시 첨사와 같이 성
문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호남병마절도사기가 벌써 성 가까이 들어
왔었다. 전라병사 남치근이 친히 병마를 통솔하고 온 것이었다. 봉학이가 그제야
성문을 열게 하고 첨사와 둘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밖에 나가서 남병사를 맞아들
였다. 병사가 입성한 뒤 봉학이가 첨사와 같이 병사를 뫼시고 서서 지난 싸움을
말씀하던 끝에 “소인의 생각에는 수륙이 합세하오면 적선을 무찌를 수가 있을
것 같사온데 어떠하올지. " 하고 말씀하니 남병사는 틀을 지으면서 “명일 오시
에 이 앞바다에서 수륙합공하자고 수사와 약회하고 온 길이다. " 하고 말하였다.
이튿날 낮에 남병사가 장졸을 거느리고 해변으로 나오니 우수사가 두대박이 큰
배 십여 척을 끌고 오시를 대어왔다. 그러나 적선이 미리 다 도망한 뒤라 병사
와 수사는 승전고를 울리며 가리포성으로 들어왔다. 이번 싸움에 죽은 왜적이
전후에 여러 백 명이 되건만 머리 밴 것은 칠십여 개 밖에 안 되었다. 왜적의
머리는 병사에게 바치고 봉학이 부하의 죽은 사람은 상여로, 상한 사람은 승교
바탕으로 바로 전주로 돌려보내었다. 병사와 수사가 각각 떠난 뒤에 봉학이는
부하 팔십여 명을 거느리고 해남으로 떠나갔다. 봉학이가 해남을 갈 때는 강진
읍을 다시 들르지 않았으나 해남서 올 때는 강진읍에 중화참을 대었다. 현감이
외면 수습으로 나와 마중하고 하루 묵으라고 만류하는 것을 봉학이는 앞길이 바
쁘다고 장흥 나와 숙소하였다. 변부사가 그 동안 봉학이의 맡긴 왜적의 머리를
감영으로 올려보냈는데 그 회편에 봉학이에게 온 편지들을 부사가 맡아 두었다
가 내주었다. 봉학이가 진서 편지를 볼 만한 공부가 없는 까닭에 편지들을 품에
지니고 사처에 와서 군중의 서사 맡아보는 사람을 불러다가 앞에서 읽히는데 읽
어서 모를 말은 새기게까지 하였다. 감사의 사찰에는 무예를 믿고 경적하지 말
라는 경계와 도처에 민심을 안돈시키도록 힘쓰라는 부탁이 있고, 예방비장 서간
에는 안부 외에 전공이 혁혁한 것을 치하한다는 말이 있었다. 서사가 예방비장
의 서간을 접어놓고 다른 서간을 들 때 봉학이가 “그건 뉘 편진가?” 하고 물
으니 서사는 “속을 봐야 알겠습니다. "하고 겉봉을 뜯고 간지 속을 빼었다. 편
지 비두에 대번 “남들은 그대에게 치하편지를 하는 모양이나 나는 치위 편지를
할까 생각하네. " 엉뚱한 말이 나왔다. “그게 대체 뉘 편진가. 형방비장의 편진
가?” 서사가 연월일 끝을 찾아보고 “녜, 그렇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치
위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어서 아래를 보게. " “그대에게 왜적의 대가리 수천
급을 주며 계향이 한몸과 바꾸어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하겠는가? 나는 아
네. 그대가 바꾸어 주지 않을 것을. 아니 한몸은 고사하고 살 한 점과도 바꾸어
주지 않을 것을. " 서사의 새기는 사연을 듣고 봉학이는 “실없는 조롱 편질세그
려. 저저히 새길 것 없이 대강만 일러주게. " 하고 말하였다. “새 부윤이 그 동
안 도임하였는데 사람이 온당치 않다는 말, 부윤이 계향이를 수청들이려고 하는
데 계향이가 거역하였다는 말, 이런 말입니다. " “그 편지는 고만 접어놓구 남
은 편지 한 장이나 마저 보게. " “이 피봉두 형방비장 글씨올시다. "
“어째 편지를 한번에 두 장씩 한담. 실없는 사람이로군. " 서사가 피봉을 뜯
고 보니 간지에는 언문으로 고목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은 언문입니다. " “
언문이야? 이리 내게. " 계향이 고목에 형방비장의 피봉은 계향이가 남의 눈가림
으로 써달란 것인 모양이었다. 새로 도임한 전주부윤이 계향이의 죽은 형 계랑
과 전에 연분이 있던 까닭에 형의 생각으로 아우를 찾아서 수청을 들이려고 하
는데, 계향이가 한사코 거역하여 매까지 죽도록 맞고 옥에 갇히었다가 형방비장
의 주선으로 집에 나와서 장독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사연이 고목에 장황히 씌어
있었다. 봉학이가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서사 소시에 조심하여 내색하지 않고
편지들을 집어 간수하였다.
이튿날 봉학이가 부하를 거느리고 장흥서 떠나서 그날은 오십리 보성 와서 숙
소하고 다음날은 팔십 리 낙안 와서 숙소하고 또 그 다음날은 오십 리 순천 와
서 숙소하였다. 봉학이가 해변골을 다 돈 뒤에 전주로 회정하는데, 이제는 길을
재촉하여 순천서 떠나서 육십 리 잔수역 중화하고 또 다시 육십 리 곡성 읍내
숙소하고 곡성서 사십리 남원 와서 부사를 만나보느라고 지체되어 중화한 뒤 칠
십 리 임실 와서 숙소하고 임실서 전주 칠십 리는 점심때 조금 겨워 들어왔다.
봉학이가 장흥서 떠난 지 엿새 만에 사백 팔십 리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감사
가 좌기하고 앉은 뒤에 봉학이가 부하 팔십여 명을 거느리고 군례로 보입고 물
러나와서 부하를 흩어서 각각 집으로 돌려보낼 때 가리포 싸움 소문을 들어 아
는 군사들의 부모 처자 형제가 보두 나와서 아비니 자식이니 남편이니 또는 형
제가 무서운 싸움에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을 울며 웃으며 반기는데 봉학이만은
이와 같이 반기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봉학이는 외로운 생각과 부러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 차서 흩어져 가는 군사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을 때 옆
에서 “나으리. "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계향이라 봉학이가 곧 끌
어안고 싶은 것을 여러 사람의 눈이 거리끼어서 억지로 참고 고개만 끄떡이었
다. 봉학이는 아까부터 눈물을 억제하고 있던 터에 계향이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눈물이 곧 나올 것 같아서 “내 처소에 가 있거라. " 하고 한마디 말한 뒤
에 얼른 돌아섰다. 형방비장이 어디 있다가 앞으로 대어들며 “이 사람 울지 말
게. " 하고 웃으니 봉학이가 계향이를 가리키며 "자네 서모더러 하는 말인가?"
하고 슬며시 욕으로 대답하였다. "자네가 순천가서 욕하는 것을 배워가지구 왔네
그려. " "욕두 배우는 데가 따루 있나. " "순천, 영광이 욕의 본향이라네. " "순
천, 영광 사람이 자네 말을 들으면 참말 욕하겠네. " 봉학이가 형방비장과 같이
웃고 지껄이며 감영 안으로 들어올 때 계향이도 뒤를 따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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