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저게 왠일이야?” 늙은이와 계집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고 “아이구, 우리
세간을 어떻게 하나. " 동자하는 여편네는 근두박질하여 밖으로 나갔다. “불이야!
” 소리가 연해나며 이웃들이 모여와서 불을 잡기 시작하였다. 계집아이는 감
영으로 뛰어가고 늙은이는 안을 비울 수 없어서 안마당에서만 왔다갔다 하였다.
다행히 사람이 빨리 서둘러서 불이 커지지 못하고 잡히었다. 불 잡은 사람들이
차차 흩어질 때 비로소 계향이가 계집아이를 데리고 감영에서 나왔다. 아직 가
지 않은 사람들을 인사하여 보낸 뒤에 계향이는 심부름하는 사내에게 불난 까닭
을 물었다. “불기없는 광채에서 어째 불이 났을까?” “모르겠습니다. " “모르
다니 불날 때 어디 있었기에 모른단 말이야?” “방에 누워 있다가 불이야 소리
를 듣구 뛰어나왔습니다. " “먼저 소리친 사람은 누구야?” “울 밖에서 누가
소리를 질렀는가 봐요. " “울 밖에 아이들이 있었던가?” “몰라요. 아마 없었
지요. " “아마 없었지요라니, 등신 같은 소리 작작 해요. " “광 처마 끝에 불이
활활 붙는 걸 보구 정신이 없었세요. " “몹쓸 아이놈들이 와서 불장난하다가 불
을 낸 게 아닐까?” “남들은 도깨비불이라구 하던데요. " “전에 없던 도깨비가
갑자기 어디서 왔어?” “귀신방에 있던 도깨비가 함혐하구 나왔는가 부다구 말
들 해요. " “별소리 다 듣겠네. " 계향이가 심부름하는 사내에게 불 잡은 뒤 어
수선한 것을 치우라고 이르고 안방에 들어와 앉았을 때 사령들이 밖에서 안마당
으로 들어오며 “계향이 잘 만났네. " “자네 만나기 참 어려웨. " 하고 너털웃
음들을 웃었다. “웬일들이오?” “웬일? 우
리 온 게 웬일이냐 말이야? 자네게 술 먹으러 오지 않았네. 자네가 우리 따위를
술 주겠나. " “계향이 자네 관가에 잡혔네. 자, 나오게 같이 가세. " 사령들은
곧 신발 신은 채 마루 위에 올라섰다. 계향이가 이비장에게 통기할 동안 사령
들을 앉혀두려고 억지로 좋은 낯을 짓고 나오며 “신발들 벗고 방으로 들어갑시
다. " 하고 말하니 앞선 사령이 “우리더러 신발 벗으라지 말구 자네가 신발 신
게. " 하고 엇나가는 말투로 대답하였다. “술 한잔 드릴 테니 들어들 가십시다.
" “이비장 불러다가 우리들을 접대시킬 생각인가?” “이비장이 내 비장인가
요? 내가 오란다고 오게. " 앞선 사령은 “글쎄, 자네 말이 그럴 듯하나 우리가
바쁘니 빨리 가세. " 하고 코웃음을 치고 뒷선 사령은 “이비장이 오면 또 진남
루 아래서처럼 호령 듣구 쫓겨가게. "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인정을
막는 법이 어디 있소? 그러지들 마시오. " “무얼 그러지 말아. 우리하구 무슨
부어터질 정이 있어서 술을 먹으라나. " “바른 대루 말이지 우리가 자네 술을 먹
는댔자 인정 쓰구 안 잡아갈 수 없네. " 두 사령이 한마디씩 계향이의 말에 대
답한 뒤 앞선 사령이 먼저 우르르 달려들어 계향이의 손목을 잡고 “자네가 우
리들 붙들어놓구 이비장에게 통기할 생각이 있는 줄 아네. 잔말 말구 어서 가세.
" 하고 내끄니 계향이가 입술을 악물고 손목 잡힌 손을 뿌리치다가 “여보, 나하
구 무슨 원수진 일 있소? 왜 이렇게 나를 죽이려고들 하오. " 하고 악증을 내었
다. “우리가 자네를 안 잡아가면 사흘들이 볼기에 사람이 죽을 지경일세. " 계
향이가 마루 앞에 있던 계집아이가 어느 틈에 어디로 간 것을 보고 혹시 말하기
전에 감영에 가서 통기할 의사를 냈는가 생각하고 동안을 좀 끌어보려고 “그러
면 신발차들이나 드릴께 받으시오” 하고 말하니 손목 잡은 사령은 “신발차 고
만두게. " 하고 딱딱하게 구는데 다른 사령이 “인정으루 이왕 준다는 것이니 받
아가지구 가세. " 하고 동무를 권하여서 동무 사령이 계향이의 손목을 놓았다.
계향이가 다락문을 와서 열고 한동안 꿈질거리는데 사령들이 여러 차례 재촉하
였다. 손목 잡던 사령이 나중에 증을 내며 “신발차 준다구 우리를 속이구 이비
장 나오기 기다리는구나. " 하고 흙신발로 방안에 뛰어들었다. 계향이가 그제는
하릴없이 두자 상목 여덟 필을 두 목에 나눠 들고 “찾느라고 좀 지체가 되었
소. 약소하나마 한 목씩 가지시오. " 하고 각각 내주었다. 사령들이 상목을 나누
어서 몸에 지닌 뒤에 곧 계향이를 잡아세웠다. “내가 자네를 잡아다 두구 나오
는 길루 곧 이비장께 통기해 줌세. " “내 손에 매가 오면 내 어깨가 으스러지더
래두 매에 인정을 둠세. " 사령들이 신발차를 후히 받고 좋아서 계향이에게 인정
있는 말을 해 들리며 관가로 끌고 갔다. 계집아이가 감영 안에 들어갔을 때 봉
학이는 선화당에 올라가고 처소에 있지 아니하였다. 얼마 동안 뒤에 봉학이가
어슬렁어슬렁 처소로 내려오는데 계향이의 집 계집아이가 울면서 앞으로 내달았
다. “왠일이냐?” “큰일났세요. " “화재가 났다더니 집이 다 탔느냐?” “아
니에요. 아씨를 잡으러 왔세요. 그 동안 잡아갔는지 모르겠세요. " “누가 잡으러
와?” “사령들이오. " 봉학이가 말을 더 묻지 않고 곧 “가자. " 하고 계집아이
를 데리고 계향이의 집에 쫓아와서 보니 계향이는 벌써 잡혀가고 늙은이와 동자
하는 여편네가 단둘이 울가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간 제는 얼마 안 되었습니
다. 이 사람의 사내가 관가에까지 따라갔다 온다고 갔는데 아직 안 왔습니다. "
늙은이의 말을 미처 다 들을 사이도 없이 봉학이는 되쳐 나와 다시 본관으로 쫓
아왔다. 봉학이가 관가에 거의 다 와서 계향이의 집 행랑사람을 만났다. “매질
시작되었느냐?” “매질 소리는 아직 안 났습니다. " 봉학이가 바로 삼문 안으로
들어오는데 사령 관노들이 가로막았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나를 모르느냐?”
“왜 모를 리가 있습니까? 나리가 오셨다구 곧 거래할 테니 잠깐만 기다립시오.
" “거래할 거 없다. " “거래 안 하구 못 들어가십니다. " “무었이 어째! 이놈
들아, 저리 비켜라. " 봉학이가 사령 관노들을 밀어젖히고 동헌 마당에 들어서
보니 계향이를 댓돌 아래 꿇려놓고 부윤이 동헌 대청에 나앉아서 호령하는 중이
었다. 봉학이가 서슴지 않고 동헌 댓돌 위로 올라오며 “영감!” 하고 소리를 질
렀다. 부윤이 잠깐 동안 봉학이를 노려보다가 관속들을 바라보며 “어째 내 말
도 들어 보지 않고 잡인을 들인단 말이냐!” 하고 호령하였다. “영감 눈 없소,
내가 여기 못 올 사람이오?” “뉘게다 하는 말이야. 문무관원의 체통을 모르는
군. " “여보, 긴말 할 것 없이 저 기생은 내 허락 없이 치죄 못하오. " “어째
못해. " “못한다거든 못할 줄 아오. 저 기
생은 내가 데리구 가겠소. " 봉학이가 대청에도 올라가지 않고 급창들이 섰는 댓
돌 위에서 부윤과 아귀다툼을 한 뒤에 곧 댓돌 아래로 내려와서 계향이를 붙들
어 일으켰다. 부윤이 대청 앞에 나와 서서 관속들을 내려다보며 “그년 달아나
지 못하게 붙들어라. " “그년을 빼앗기면 너희놈들이 깡그리 죄책을 당할 테니
알아차려라!” 호령하니 관속들이 있는 대로 우 모여와서 계향이와 봉학이의 앞
을 삑 둘러막았다. “비켜나거라!” “말루 일러선 못 비켜나겠느냐!” 봉학이가
관속들을 꾸짖으며 눈으로 손에 쥘 물건을 찾다가 댓돌 아래 형틀이 놓이고 옆
에 맷단이 놓인 것을 보고 얼른 가서 매를 뽑아 두서너 개 껴잡아 가지고 관속
들을 후두들겼다. 앞으로 대들던 놈은 면상을 맞고 뒤로 돌아선 놈은 등줄기를
맞고 아이쿠 지이쿠 엄살하는 소리가 요란한 중에 “이게 무슨 행패야!” “어
괴변이다. " “감사 자세 너무하는군. " 부윤이 꾸짖는 소리가 동헌 대청의 들보
를 울렸다. 봉학이가 한 손에 매를 든 채 한 손으로 계향이를 끌고 삼문 밖으로
나오는데 부윤의 불호령 소리가 뒤에서 들릴 뿐이요, 관속은 앞에 막는 놈이 없
었다. 계향이의 집 행랑사람이 삼문 밖에 있다가 반겨 내달아서 봉학이가 계향
이더러 행랑사람을 데리고 앞서 가라고 보낸 뒤에 손에 든 매를 내던지고 천천
히 뒤를 따라오다가 중간에서 행랑사람은 계향이의 집으로 보내고 계향이와 같
이 바로 감영 안으로 들어왔다. 봉학이와 계향이가 처소에 와서 편히 앉은 뒤에
계향이는 새삼스럽게 눈물을 머금고 “뒷일을 어떻게 해요?” 하고 걱정하기 시
작하였다. “부윤이 가만히 있을까요?” “가만히 안 있으면 누구를 어쩌겠니?
” “사또께 와서 여쭐는지 모르지요. " “여쭈어도 할 수 없지. " “사또께 먼
저 여쭈어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글쎄, 형방과 의논해 볼까?” “그래
보세요. " 봉학이가 형방비장에게 와서 전후 사연을 이야기하니 형방비장이 다
듣고 나서 “자네가 큰일을 저질렀네. 사또께 그대루 여쭐 일이 아닐세. 석고대
죄하게. " 하고 가르쳤다. 식후에 봉학이는 선화당 뜰 아래 대죄하고 형방비장이
감사 앞에 나가서 봉학이의 대죄하는 사연을 아뢰었더니 감사가 미간을 찌푸리
고 말이 없다가 얼마 뒤에야 “이봉학이는 저의 처소에 물러가 있되 내가 부르
기 전에 내 눈앞에 보이지 말라고 일러라. " 하고 처분을 내리었다. 밤에 감사
가 도사를 불러서 다른 공무를 상의한 끝에 병방비장이 부윤 관정에 가서 야료
한 일을 이야기하고, 또 일의 원인이 기생 다툼인 것을 말한 뒤에 어떻게 조처
하면 좋을까 조처할 방침을 문의하였다. “비장도 방자하지만 부윤도 점잖지 못
합니다. 다시나 알륵이 생기지 않도록 양편을 누르시고 옹용 조처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 “나도 옹용 조처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하나 부윤이 어떻
게 할라는지 알 수가 없네. " “부윤이 뒤에 셋줄이 있어서 다소 오기가 없지 않
은 모양이나 영감께서 말씀하시면 안 들을 수 없겠습지요. " “부윤이 나를 오래
겪어보지 못한 까닭에 내가 공정하게 말하는 것도 봉학이를 두둔하는 줄로 곡해
하기 쉬우니까 난처한 일일세. " “영감께서 공사에 사정이 없으신 것은 부윤도
짐작할 터인즉 곡해할 리 있습니까. 만일 곡해한다면 지각이 부족한 사람이지요.
" “글쎄, 그럴까. " 감사는 그쯤 말하고 다른 수작 하다가 도사를 내보냈다. 이
튿날 아침 후에 부윤이 감사를 와서 보고 비장 이봉학이가 관정에 돌입하여 행
패를 무쌍히 하였다고 말하고 나서 “하관이 불민한 탓으로 소조를 당하였으니
수원수구하오리까만 이런 소조를 당하고야 무슨 면목으로 관속을 대하며 인민을
대하겠습니까. 하관은 오늘로 인을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하고 인궤
를 감사 앞에 들여놓았다. 부윤이 벼슬을 버리고 간다는 것은 감사가 허락 아니
할 것을 짐작하고 하는 말이요, 또 감사가 봉학이를 두둔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
이다. 부윤의 속을 꿰어뚫고 보듯이 하는 감사가 부윤의 여기를 지르려고 속으
로 생각하고 “이 일이 작은 일인 듯해도 실상 작은 일이 아니오.” 하고 말
시초를 내었다. “작은 일이 아니다뿐입니까.” “그러니까 영감이 벼슬 버리고 간
다는 것은 좀 덜 생각한 일 같소.” “무엇이 덜 생각한 일이오니까?”“일을
내 손으로 묵살하지 못하고 위에 장계한다면 위의 처분이 내리시기까지 영감이
여기 있어야 하지 않겠소?”“장계 사연을 어떻게 합실지 모르나 구경 사또께서
처리하시게 됩지 달리 무슨 처분이 내리시겠습니까.” “그것이 영감이 덜 생각
한 말씀이오. 내 소견으로 말하면 이봉학과 계향은 찬배를 면키가 어렵고 영감
은 삭탈쯤 당하기가 쉽고 그리고 나는 파직 아니면 추고를 당할 듯하오.” “일
이 그다지 중대하게 되도록 장계하실 것이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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