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더러 년이래?” “네년더러 년이라구 못한단 말이냐!” “사람이 살려니까
별꼴을 다 보겠네.”하고 하님이 혼잣말하는 것을 봉학이가 “무엇이 어째!
이년, 다시 한번 말해 봐라!”하고 호령할 때 마친 궐내에서 재상 하나가
퇴궐하여 나오니 봉학이와 하님이 다같이 한옆으로 비켜서서 재상의 나오는
길을 틔워 놓았다. 재상이 문밖에 나오자 비켜섰던 하님이 앞으로 쫓아
나오며 “아이구 미동 대감마님, 쇤네 좀 보십시오.”하고 소리를 질러서
그 재상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네가 영부사댁 정경부인 시녀 아니냐?”
하고 하님을 알아보았다. “대비마마 저녁 수라에 드릴 찬을 가지고 왔는데.”
하님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재상이 “수라간 찬보다 좋은 찬이 무엇
이니?”하고 물었다. “찬은 좋지 않아도 정경부인 마님이 정성으로
바치시는 겝니다.” “얼른 들어가 바치고 가지 왜 여기 섰느냐?” “문지
기 양반이 못 들어가게 한답니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럴 리가 무에요?
선인문으로 가라고 못 들어가게 해요.” 재상이 하님의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
면서 봉학이를 손짓하여 부르니 봉학이가 가까이 나가서 허리를 굽히었다. “자
네 벼슬이 무엇인가?” “외소부장 이봉학이올시다.” “외소부장이야? 전에는.
” “정의현감으루 있었습니다.” “그래 서울 온 지 얼마나 되었나?” “인제
두어 달 되었습니다.” “이 금호문은 조신들이 드나드는 문이지만 저 기집하인
은 그대로 들여보내게.” 재상이 잡이를 불러 타고 간 뒤에 봉학이가 하님을 보
고 “들어가게.”하고 말하니 하님이 입속말로 알아듣지 못하게 종알종알하며
들어 갔다. 한번 들어간 하님이 다시 나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봉학이 대신 문
을 수직하러 오며 곧 뒤미처 금부 나장이가 나졸을 데리고 봉학이를 잡으러 왔
다. 그 하님이 윤원형의 첩인 정난정의 신임하는 시녀 옥섬인 것과 그 재상이
윤원형의 족질 윤춘년인 것은 봉학이가 금부에 잡혀온 뒤에 비로소 알았다.
봉학이가 수문하는 관원으로 궐문 밖에서 대신댁 계집하인을 붙들고 희롱하였
다고 신문을 받았다. 봉학이가 계집을 희롱한 것이 아니라고 극구 변명하였으나
뒤에 왕대비전 분부가 있는 일이라 금부 당상들이 변명을 잘 들어주지 아니하고
주장질까지 시키었다. 형문 한두 차례 톡톡이 맞은 뒤에 봉학이가 금부에서 놓
여났으나 벼슬은 떨어지고 말았다. 벼슬 떨어진 것보다도 허물 뒤집어쓴 것이
억울하여서 봉학이는 이우윤께 하소연하려고 매일 이우윤댁에 가서 살다시피 하
거만, 이우윤이 사진하거나 출입하지 않으면 손을 보거나 안에 들어가고 봉학이
에게 하소연할 틈을 주지 아니하였다. 이우윤이 미타히 여기는 줄을 짐작한 뒤
로 봉학이는 억울한 중에 일층 더 억울하여 얼굴에 풀기까지 없어졌다. 하루 지
나고 이틀 지나고 사흘 나흘이 지난 뒤 봉학이가 이우윤댁에 가서 있다가 점심
먹으러 왔을 때, 계향이가 봉학이의 풀기 없는 얼굴을 보고 “오늘 아침에도 구
사또를 못 뵈셨구려.”하고 말하니 봉학이는 대답 없이 입맛만 다시었다. “댁에
안 기십디까?” “댁에 기시면 손님이 오셨습디까?” “손님이 안 왔으면 아낙
에 들어가 기십디까?” 계향이가 세 번 묻는 말에 봉학이는 번번이 고개만 가로
흔들었다. “그럼 왜 말씀을 못하셨소?” “책 보시어.” “책 보신다고 말씀 못
하면 어느 때 말씀하시겠소.” “나를 지금 미타히 생각하시는데 불쑥 들어가서
말씀을 여쭐 수 있나. 불러 물으실 때만 기다리지.” “공연히 비슥거리면 참말
허물이나 있는 줄로 아시지 않겠소. 이 다음엔 불러 물으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들어가서 전후사 이만저만 하다고 말씀을 여쭈시오.” “글쎄.” 봉학이가 점심
한두 술 떠먹은 뒤에 다시 이우윤댁에 와서 보니 대배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이우윤의 계씨 이정승이 와서 형제 같이 담화하는 중이었다. 봉학이가 바로 수
청방으로 들어와서 이정승께 문안이나 할까 생각하고 있는 중에 큰사랑에서 “
이리 오너라!” 소리가 나서 젊은 청지기가 “녜.” 대답하고 가더니 얼마 안 있
다 도로 와서 “이정의 나리, 영감께서 오라시오.”하고 말하여 봉학이는 “날
오라시어?”하고 벌떡 일어섰다. “영감께서 지금 수청방에 온 사람이 누구냐
물으시기에 나리라구 말씀을 여쭈었지요.” 청지기의 공치사같이 하는 말을 봉
학이는 듣는지 만지 하고 큰사랑에 와서 이정승께 문안한 뒤 두 손길을 맞잡고
섰다. “벼슬 떨어지고 무슨 맛에 서울 있느냐? 시굴 가서 농사나 짓지.” 이유
윤의 역증난 말을 듣고 봉학이가 허리를 굽신하며 “황송하오이다.”하고 잠깐
우물우물하다가 “소인이 벼슬은 떨어졌사오나 실상 허물은 없소이다. 이것만은
통촉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하니 “수문하는 관원으로 궐문 앞에서
대신댁 기집하인을 희롱한 것이 허물이 아니면 무엇이 허물일까!” 이유윤의 꾸
중이 내리었다. “기집하인을 희롱한 것이 아니올시다.” “어디 네 발명 좀 들
어보자.”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벼르고 벼른 봉학이가 그날 일을 자초지
정 이야기하여 발명하였다. “대신댁 기집하인이 궐내에 바치는 찬품을 가지고
왔는데 어째 얼른 안 들였느냐. 그것은 허물이 아닌 줄 아느냐?” “금호문은
조신만 드나드는 문이라구 듣자온 까닭에 얼른 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신이
못 드나드는 내전에까지 들어가는 기집하인이 금호문을 드나들지 못할 것이냐.
그만 요량도 없는 사람이 벼슬을 다니겠느냐. 벼슬 떨어진 것이 잘된 일이다. 시
굴 가서 땅이나 파먹구 살라.” 대답도 못하고 섰는 봉학이를 이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더니 슬며시 손을 들어서 나가라고 손짓하여 봉학이는 수청방으로
물러나왔다.
“벼슬 떨어지구 무슨 맛에 서울 있느냐. 시굴 가서 농사나 짓지.” “벼슬 떨
어진 것이 잘된 일이다. 시굴 가서 땅이나 파먹구 살아라.” 먼저 말씀은 허물이
있는 줄로 알고 한 말씀이고 뒤의 말씀은 사정을 다 듣고 한 말씀인데 어찌하여
뒤의 말씀이 먼저 말씀보다 더 심하실까. 이유윤의 처음 말과 나중 말을 봉학이
는 속으로 비교하고 일시 역증이 아니거니 생각하였다.
‘전 같으면 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만 일에 제 손으로 전정을 막아버린
단 말이냐. 지각없는 소리 말고 가만 있거라 꾸중을 하시고 뒤로 복직을 주선해
주실 듯한데 벼슬 떨어진 것이 나를 괘씸히 보신 일이 있나. 그럴 일도 없고 혹
시 당신이 환로에 싫증이 나셔서 내게까지 그렇게 말씀하셨나. 그런 눈치도 없
고 전에 없이 심한 말씀을 하실 까닭이 무엇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렇던
지 일시 역증풀이는 아니신 모양이니 인제 나는 끈 떨어진 두룽박이다. 서울 있
어 소용 없으면 말씀대로 시골로나 가보겠다. 시골로 간다면 교하밖에 갈 데가
없는데 교하는 재미 적고 전주 가서 살아볼까. 이럴 줄 알았더면 계향이 집이나
팔지 말랄 걸 공연히 자발적게 팔아 없앴지. 어느 시골이 좋을까. 산수 좋은 곳
에 초가삼간 지어놓고 전후좌우에 갖은 화초 심어놓고 꽃향내가 사철 그치지 않
는 속에 계향이의 가야금이나 듣고 누웠으면 대장부 살림살이 그만해도 족하려
니. 군총에 뽑혀서 전라도 내려가던 때를 생각하면 이정의니 이부장이니 택호를
얻은 것도 의외의 공명이다. 막이 십 년 이십 년 벼슬을 다닌댔자 나 같은 미천
한 놈에게 병수사도 차례에 안 올 것이니까 진작 벼슬을 하직하는 것도 역시 좋
다. 그러나 오뉴월 화롯불도 쪼이다 물러나면 섭섭하다지.’ 봉학이는 마음이 번
조하여져서 앉았다 섰다 하다가 나중에 ‘집에 가서 술이나 먹어볼까.’ 생각하
고 집으로 돌아오니 계향이가 기색을 살피면서 “말씀을 또 여쭙지 못하셨소?”
하고 물었다. “여쭐 말씀 다 여쭈었네.” “그럼 무슨 딴 걱정이 생겼소?” “
일껀 말씀을 여쭈었더니 벼슬 떨어진 것이 잘된 일이라구 나더러 시굴 가서 땅
이나 파먹구 살라시데.”하고 봉학이가 이우윤 형제 앞에서 말한 것을 이야기하
고 이유윤의 처음 말, 나중 말을 그대로 옮겨 들리니 계향이는 “어째 말씀이
그러실까?”하고 눈을 깜짝깜짝하다가 “옳지 알겠소. 그 말씀이 역중에서 나온
말씀이오.”하고 말하였다. “내가 잘못이 없는 줄 아시구 하시는 말씀이 더 심
하신 걸 보면 내게 따루 역증나신 일이 있는지두 모르겠네.”
“나리께 역증나신 것이 아니고 작은댁 대감께 역증이 나신 게요.” “우애가
유명하신 형제분 사이에 무슨 일에 역증을 내시겠나.” “내 생각엔 작은댁 대
감께 나리를 복직시켜 주라고 청하시다가 작은댁 대감이 잘 듣지 않으시니까 역
증이 나신 것 같소.” “내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아시기두 전에 복직을 청해
주실 리가 있나.” “설사 나리 잘못으로 낙사가 되었더라도 복직을 청해 주시
겠지요.” “내 잘못으루 낙사되었으면 복직을 청해 주실른지 모르겠네.” “아
무래도 내 생각엔 나리 복직 청하시다 틀린 것 같소.” “재미없는 벼슬 복직된
대두 맘에 좋을 거 없네. 영감 말씀대루 시굴루나 가보세.” “시굴도 좋지요.”
“이 집을 팔아가지구 시굴 가면 밭날가리쯤 집에 껴서 살 수 있으렷다.” “전
주집 판 것도 있으니까 조그마치 전장도 장만할 수 있겠지요.” “내가 술이 먹
구 싶으니 있거든 가져오구 없거든 받아오라게.” 얼마 동안 뒤에 봉학이는 술
상을 앞에 놓고 계향이의 쳐주는 잔을 한잔 두잔 거듭하면서 시골 갈 일을 다시
공론하였다.
이유윤은 봉학이 입에서 발명하는 말을 듣기 전에 봉학이가 억울하게 벼슬 떨
어진 것을 밝히 아는 까닭에 곧 보직시켜 주라고 계씨에게 청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계씨나 봉학이에게 속생각은 말하지 않고 계씨 면전에서 봉학이를 불러
다가 발명시키고 계씨의 귀를 울리도록 봉학이에게 심한 말을 하였었다. 그 계
씨가 봉학이와 같이 이유윤의 농락 속에 들어서 봉학이가 낙향할 준비를 차리는
중에 봉학이를 군기시 직장으로 복직시켜 주었다. 봉학이가 복직된 뒤 비로소
이유윤의 속생각을 깨닫고 계향이와 같이 감지덕지 말한 뒤에 낙향은 곧 파의하
고 군기시에 출사하였다. 군기시 관원은 도제조, 제조, 정, 부정, 첨정, 판관, 주부
가 직장 위에 있고, 봉사, 부봉사, 참봉이 직장 아래에 있어서 직장은 승상접하
의 성가신 일이 많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는 속담과 같이 옥섬이의
외숙 되는 사람이 군기시 부정으로 있어서 생질녀의 금호문 사단으로 봉학이의
이름을 들어아는 까닭에 처음에 벌써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고 한 열흘 지난 뒤
로는 봉학이의 하는 일이 탈 잡을 만하면 한번 눈 덮어두는 법이 없었다. 환로
는 염량 빠른 곳이라 부정이 새 직장 미워하는 것을 알며부터 첨정, 판관, 주부
들까지 봉학이를 정답게 대하지 아니하였다.
같은 직장 한 사람이 사람이 좋아
서 봉학이의 뒤를 많이 싸주는 까닭에 봉학이가 한번 술대접을 하려고 어느 날
마을에서 나오는 길에 집으로 끌고 왔었다. 봉학이가 동관과 같이 술을 먹어가
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금호문 사단을 이야기 하였더니 동관 직장
이 “영부사댁 시녀를 금호문에 들어가게 한 것이 동관의 일인 줄을 몰랐소.”
하고 말한 다음에 “그때 시녀의 이름이 무엇이랍디까?”하고 물었다. “금부에
서 나쟁이에게 이야기를 들으니까 시녀의 이름이 옥섬인데 영부사댁 정경부인께
신임을 받을 뿐 아니라 왕대비 전하께까지 총애를 받는답디다.” “옳지, 알겠
소. 동관이 부정에게 미움받는 까닭이 있소그려.” “무슨 까닭이오?” “부정이
옥섬이의 외숙이오. 이 말이 부정의 귀에 들어가면 큰 일이니까 마을에 가선 입
밖에 내지 마우.” “인제 아니까 금호문 동티가 군기시까지 쫓아왔구려.”하고
봉학이는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봉학이가 마을에서 설움을 촉촉히 받는 중에 이우윤이 함경감사로 나가게 되
어서 봉학이는 더욱이 의지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이감사가 함경도로 떠나기
전에 봉학이가 한번 조용한 틈을 타서 마을에서 설움받는 사정을 대강 이야기하
고 다시 비장으로 따라가기를 청하니 이감사가 “지각없는 소리 마라. 지금 세
상에 벼슬을 다니자면 비위가 좋아야 하니 비위를 참고 지내 보아라.”하고 봉
학이의 청을 들어 주지 아니하였다. 이감사가 떠난 뒤에 불과 한 달이 못 지나
서 봉학이가 한번 마을에서 부정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분난 김에 “시녀
생질녀를 두신 양반 장하시우.”하고 들이대어서 부정이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
리기까지 하였다. 봉학이가 직장을 즉시 내버리고 싶었으나 이감사께 상서할 동
안 참으려고 마음을 먹고 함흥까지 전인을 사서 상서하였더니 전인 회편에 봉학
이에게 오는 답장은 없고 계씨 대감께 갖다 드리라는 서간이 있었다. 봉학이가
그 서간을 갖다 드린 지 이삼 일 후에 봉학이의 벼슬이 갑자기 임진별장으로 옮
기었다. 군기시 직장이 임진별장으로 나가는 것은 심한 좌천이건만 봉학이도 도
리어 다행이 여겨서 불불이 서울 살림을 거두어 가지고 임진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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