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학이가 그제야 뜰 위 뜰 아래에 우뚝우뚝 섰는 관속들을 내다보고 다 물려
내보낸 뒤에 “곤하시거든 좀 누우시려우?”하고 꺽정이더러 물었다. “곤하긴
무어 곤하겠나?” “아까 보니 술이 꽤 취하신 것 같습디다.” “임꺽정이가 사
십 평생에 처음 원님 기신 동헌에 들어오느라고 좀 취한 체했네.” “그럼, 우리
내아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다가 저녁을 먹읍시다.” “아무리나 하세.” 봉학이
가 꺽정이를 데리고 내아로 들어왔다.
계향이가 봉학이의 큰기침 소리를 듣고 방에서 마루로 쫓아나오다가 패랭이
쓴 사람과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해괴하게 생각하면서 마루 한구석에
비켜섰다. 봉학이가 꺽정이를 방으로 인도하고 계향이를 돌아보며 “양주 장사
가 오셨으니 들어와 보입게.”하고 말하였다. 양주 장사 임꺽정이가 백정의 자식
인 줄은 계향이가 전에 들어 알건마는, 패랭이 쓴 것을 눈으로 볼 때 장사는 놀
라웁지 않고 백정은 창피하여 마루에서 한동안 주저주저하고 있다가 “얼른 들
어오게.” 봉학이의 재촉을 받고 방에 들어와서 “어서 보입게.” 또다시 봉학이
의 재촉을 받고 절 한번 하였다. 계향이는 꺽정이에게 인사를 마치고 곧 도로
마루로 나가고 봉학이는 꺽정이에게 유복이의 이야기를 다시 묻기 시작하였다.
“유복이가 장가를 숫색시에게 들었소?” “남의 마누라를 첫날밤에 가로채었
다네.” “남의 기집을 가로채구 무사했소?” “마누라 뺏긴 자가 귀신이여.”
“귀신이라니? 기집 뺏긴 사내를 죽였단 말이요?” “참말 귀신이여.” “참말
귀신이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유복이가 장가를 희한하게 들었네. 내
이야기하께 들어보게.”
꺽정이가 유복이의 장가든 것을 이야기하느라고 유복이의 소경력을 거의 다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강령 가서 부모의 원수를 갚은 것을 이야기한 다음에 맹산
가서 앉은뱅이 병을 앓는 동안 표창질 익힌 것을 이야기하고, 또 덕물산 장군당
새마누라 가로챈 것을 이야기하다가 최영 장군의 귀신이 영검해서 산 사람 마누
라 얻는 것을 이야기하여 이야기가 올라가고 내려가고 또 가로새어 가리산 지리
산이 될 때가 많았으나 봉학이는 갈피를 찾아 물어가며 재미나게 들었다. 그 동
안에 날이 벌써 어두워서 관비 하나가 방에 들어와서 촛불을 켜놓고 “저녁 진
지를 어떻게 하라십니까?”하고 물으니 봉학이는 상을 곧 들이라고 분부하였다.
봉학이가 꺽정이와 같이 저녁을 먹어가며 유복이가 장군당 마누라를 빼가지고
맹산으로 도망하는 길에 청석골 도적 오가의 집에 가서 같이 사는 이야기를 마
저 들었다.
“유복이가 지금 도적질을 하는구려.” “도적두 이만저만한 도적이 아니라
댓가지 도적이라구 유명짜한 도적이라네.” “댓가지 도적이란 건 무슨 별명이
오?” “인명을 상하지 않으려구 댓가지루 만든 표창을 쓰는 까닭에 생긴 별명
이여.” “형님에 가까이 있으면서 유복이를 도적놈 노릇하게 내버려 둔단 말이
오.” “내버려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가 무어요? 그 자식
을 붙들어다가 농사를 시키든지 장사를 시키든지 하지 못한단 말이오.” “농사
나 장사 시키려구 적굴에서 데려 내왔다가 포교 손에 잡혀 보내면 도적질두 못
해먹구 죽지 않나.” “내가 서울 가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바루잡아 주어
야겠소.” 꺽정이는 대답이 없었다.
저녁상을 물린 뒤에 봉학이가 꺽정이를 데리고 다시 동헌으로 나왔다. 봉학이
가 천왕동이의 귀양 온 곡절을 물어서 꺽정이가 배돌석이의 살인한 이야기를 시
작할 때 통인 하나가 방에 들어와서 “내아에서 듭시라구 여쭙니다.”하고 아뢰
니 봉학이가 “왜?”하고 통인을 바라보았다. “안으서님께서 잠깐 뵈입겠다구
하신답니다.” “글쎄, 무슨 일이 있다느냐?” “그건 알지 못하옵니다.” “다
시 가 일아보아라.” 통인이 염석문 밖에서 관비를 불러서 물어보고 다시 나와
서 “안으서님께서 무슨 일은 말씀 안 합시구 잠깐 내아에 듭시라구만 여쭈라십
니다.”하고 아뢰었다.
봉학이가 속으로 밤참할 것을 의논하려고 부르나 생각하며 꺽정이를 보고 “
잠깐 들어가 보구 나오리다.”하고 곧 일어서 내아로 들어왔다.
봉학이가 내아 층계 위에 올라설 때 계향이가 마루 끝에 나와서 맞았다. “왜
부른 거야?” “잠깐 방으로 들어가세요.” “할 말이 있거든 여기서 하게.” “
조용히 할 말씀이 있세요.” “조용히 할 말이 무어야?”하고 봉학이가 마루로
올라왔다. 봉학이와 계향이가 방에 들어와서 단둘이 마주 앉은 뒤 봉학이가 다
시 “조용히 할 말이 무어야?”하고 물으니 계향이는 “무에 그렇게 급하세요.
”하고 상글상글 웃었다. “재미나는 이야기를 듣다 말구 들어왔어.” “무슨 이
야기가 그렇게 재미나셔요.” “이야기를 같이 듣구 싶은가?” “아니오. 그런데
오늘 밤에 동헌에서 손님하고 같이 주무실랍니까?” “그래. 그건 왜 묻나?”하
고 봉학이가 물끄러미 계향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계향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귓속말로 “손님만 동헌에서 재우구 나는 들어와 자까?”하고 웃었다. “점잖지
않게.”하고 계향이가 얼른 손을 빼어 가지고 따로 앉아서 “정한 사처 하나를
치우고 손님을 나가 주무시게 하면 어떠까요?”하고 물으니 봉학이는 “왜 그
래?”하고 괴상히 여기는 기색을 보이었다. “글쎄 말이에요.” “글쎄 말이라
니, 그렇게 해야 좋을 일이 있나?” “내 소견엔 그렇게 했으면 좋을 것 갔애요.
” “어째서?” “패랭이 쓴 손님을 동헌에서 재우면 뒤에 말썽이 없을까요?”
“말썽이 무슨 말썽이야.” “관가 동헌은 사사집과 달라서 지금 오신 손님 같
은 이를 재울데가 못 되지 않아요.” “별 우순 소리를 다하네.” “목사가 알면
탈이 있을까 보아 걱정이에요.” “목사가 지금 나하구 무슨 상관이 있어서 걱
정인가.”“관속이나 백성들의 입도 무섭지요.” “아따, 쓸데없는 걱정 되우 하
네.”하고 봉학이가 증을 내니 “소견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고만이지 화까
지 내실 거 무어 있세요?”하고 계향이도 새촘하였다. 봉학이가 잠깐 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내가 백정의 아들을 보구 형님 형님 하는 것이 맘에 창피한가?
”하고 계향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 뒤를 이어서 “사람이 그래선 못 쓰
네.”하고 타이르듯 말하였다.
“내야 창피할 것이 무에요.” “자네가 아이 적부터 언니 동생하구 지내던
동무가 있다구 하세. 그 동무가 시집을 잘 가서 숙부인이나 정부인을 바친 뒤에
자네가 찾아갔는데 자네를 기생이라구 소대하면 자네 맘이 어떻겠나. 괘씸할 테
지. 아무리 염량을 보는 세상이라두 사람이 그 동무 같아서야 쓰겠나. 더구나 사
내 대장부가.” “네, 잘 알았세요.” “잘 알았거든 밤참으로 술상이나 잘 차려
내보내게.”하고 봉학이는 일어섰다.
봉학이가 동헌에 나온 뒤에 중간 그친 꺽정이의 이야기를 다시 듣기 시작하였
다. 돌석이가 양반의 집 비부 노릇하다가 양반의 행랑 출입하는 버릇을 가르치
려고 양반 이마와 계집 눈자위에 자자해준 이야기를 듣고 봉학이는 한동안 허리
를 잡고 웃고 나서 “돌석이가 황주서 살인한 이야기나 마저 들읍시다.”하고
꺽정이의 이야기를 재촉하였다. 호랑이 잡고 경천역말서 역졸 노릇하고 계집 사
단으로 살인하고 봉산 와서 잡혀 갇힌 돌석이 이야기와, 사위 취재 보이고 득배
잘하고 장교 다니고, 유복이와 돌석이를 빼어놓고 그 언걸로 귀양 온 천왕동이
이야기가 뒤범벅이 되어서 이야기를 잘 알아듣는 봉학이로도 연해 재차 묻지 않
으면 돌석이 이야긴지 천왕동이 이야긴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밤이 든
뒤에 진 안주 마른 안주가 늘어놓인 술상이 밤참으로 나와서 봉학이는 꺽정이와
같이 술을 먹기 시작하였다.
“내가 형님과 술을 같이 먹는 것이 삼 년 만이구려.” “삼 년 동안이 맘에
는 삼십 년이나 될 것 같애.” “내가 서울 가면 자연 형님을 만날 테지만 여기
서 미리 만나기는 참말 뜻밖이요.” “내가 집에서 떠나기 전에 자네 벼슬이 갈
릴 줄을 알았더면 여기를 안 왔을는지 모를 걸세.” “모르구 오기를 잘했소. 제
주 세 골루 다니며 구경이나 하구 나갈 때 같이 갑시다.” “그건 봐가며 작정
하세.” “한라산은 한번 올라가 봐야지요.” “한라산은 전에 선생님 뫼시구 왔
을 때 올라가 보았네.” “참말 제주가 이번이 초행이 아니구려.” “자네가 여
기서 떠나기 전에 천왕동이의 귀양이나 풀리게 주선해주게.” “여기서는 도리
가 없으니까 서울 가서나 주선해 봅시다.” “제주목사에게 청해서 될 수 없나?
” “내가 한번 제주 가서 목사께 청하구 판관에게 부탁하면 귀양살이는 좀 편
하게 살 수 있을 게요.” “천왕동이는 자네가 힘쓰면 풀리게 될 줄 알구 나하
구 같이 오는 것을 퍽 좋아했는데 그거 안됐네.” “죄명이 중하지 않으니까 내
가 서울 가서 주선하면 곧 풀리게 할 도리가 있을 듯하우.” “자네두 알다시피
천왕동이가 성미는 바상바상한 위인이 갓 정든 안해를 떨어져서 지금 하루를 일
년같이 보내네.”“내가 수이 한번 제주를 가서 천왕동이를 보구 말두 일르구
또 천왕동이 일을 부탁두 하리다.” “ 수이라구 할 거 없이 내일 가세.” “내
일은 좀 어렵구 모레쯤 가지요.” “자네 힘으루 곧 풀어주지 못할 줄은 짐작
못한 건 아니지만 혹시를 바랐더니 틀렸네그려.” “술잔 식소. 어서 술이나 잡
수시우.” “천왕동이만 떼놓구 갈 일을 생각하니까 술맛이 다 없어지네.” “형
님이 꽤 심약해졌소그려.” “속을 썩히며 한세상을 약약하게 지내려니까 맘이
한편으룬 약해지구 한편으룬 독해지데.” “약해지면 약해지구 독해지면 독해지
지 어떻게 한꺼번에 약해지구 독해지구 한단 말이요.” “글쎄, 내 맘이라두 나
는 모르겠네.” “자, 술 잡수시우. 나두 오늘 밤엔 오래간만에 한번 취투룩 먹
어 보겠소.” “그 동안엔 원님 노릇 하느라구 술을 조심했나?” “조심은 둘째
치구 대관절 대작할 사람이 없으니까 취투룩 먹어지지 않습디다.” “그럼, 자
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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