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이가 예방비장의 말을 들은 뒤에 한번 남몰래 옥부용과 만나서 사정을 이
야기하고 옥부용의 집에 발을 끊고 상종 않는 표를 남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친
한 기생 도화의 집에 가서 숙식하고 있었다. 옥부용은 간간이 서림이를 생각하
여 한번 병 핑계하고 집에 나와서 서림이를 만나자고 밤에 계집아이를 보냈더니
서림이 계집아이더러는 먼저 가라고 돌려보내고 나중에도 오지 아니하여 옥부용
이는 “도화에게 반해서 벌써 나를 잊었구나.”하고 서림이를 원망하고 “안 만
나두 고만이다. 어디보자.” 하고 서림이를 벼르기까지 하였다. 어느 때 창성서
초피.수달피를 많이 구해 와서 좋은 것은 진상품으로 따로두고 그 나머지는 선
사품으로 집어둘 때 서림이 감사 몰래 선사품에서 수달피 한두 장을 훔쳐내다가
도화를 주어서 도화가 그 수달피로 덧저고리 안을 받쳐 입었다. 옥부용이가 이
것을 알고 감사에게 고자질하여 감사가 그 당장에 도화를 불러다가 수달피 안
받친 덧저고리를 바치라고 야단을 치게 되었는데, 서림이는 이때 마침 수지국에
가 있어서 도화의 수달피 덧저고리로 야단난 것을 빨리 알자 못하였다. 서림이
가 수지국에 있다가 감사에게 불려서 선화당으로 들어오며 보니 도화가 층계 아
래 쪼그리고 앉았는 모양이 잡혀온 것이 분명하였다. ‘도화가 무슨 일로 잡혔
을까. 내게 무슨 언걸을 입혔을까.“ 서림이가 의심을 먹으며 층계 아래에 와서
도화에게 가까이 서려고 하니 나장이 중간을 가로막았다. 감사가 서림이 대령하
였단 말을 듣고 곧 앞창을 밀치고 내다보며 ”서림아, 네죄를 아느냐!“ 하고
호령을 내리기 시작하여 서림이는 어리둥절하였다. ”막중 진상할 물건을 훔쳐
다가 기생년을 주다니 죽일 놈이다.“ 감사의 호령을 듣고 서림이가 비로소 수
달피 탈인 줄 짐작하고 발명할 말을 생각하며 ”소인이 언감생심 그런 짓을 할
리가 있소이까.“ 하고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감사가 통인을 시켜 수달피 안 받
친 덧저고리를 내보이며 ”이놈,그것 좀 보아라! 그것이 네가 훔쳐다 준 것 아니
냐? 그런 짓을 할 리가 있소이까? 빤빤한 놈 같으니. 너 같은 놈은 그대로 둘
수 없다. 곤장 좀 맞아 보아라!“ 추상같이 호령하고 곧 곤장 칠 거조를 차리게
하였다.
“소인이 수달피 두 장을 손쓴 일은 있사오나 훔친 것은 아니올시다” “네가
훔치지 않았으면 수달피가 어디서 났단 말이냐?” “요전에 창성서 피물 가지고
온 하인이 수달피 두 장을 따루 가지구 와서 소인을 주옵는데 소인이 싫다구 받
지 않았삽드니 부사가 보내신 걸 도루 가지구 가면 탈을 당한다구 하인이 지성
으루 받으라구 하옵구 마침내 두구 갔소이다. 소인이 그 수달피를 토수안이라두
넣기가 맘에 께름하온 까닭에 내버리는 셈으루 도화란 년을 주었소이다”, “창
성부사에게 뇌물받은 것이고 진상물품에서 훔쳐낸 것이 아니란 말이냐?" "창성
서 온 피물 중에 초피가 이십오 장이옵구 수달피가 십삼장이온데 초피 이십 장
과 수달피 십 장은 진상품으루 골라두옵구 그 나머지 초피, 수달피는 선사품으
로 묶어두옵는 것을 사또께서 감하옵신 바이오니 여기 내다가 조수하게 하옵시
면 소인의 애매하온 것을 곧 통촉하실 줄 생각하옵네다”
창성서 온 수달피가 십오 장인 것을 서림이 두 장을 줄이고 십삼 장이라고 말
하였다. 그때 감사가 물목을 보고 서림이를 내주어서 물건을 조수하게 받게 하
였는데 서림이가 물건을 받고도 물목을 자기 손에 두었다가 두 장을 가무린 뒤
에 슬그머니 없애버린 까닭에 서림의 거짓말을 잡아낼 거리가 없었다.
“뇌물받은 것도 정치할 만한 죄지만 이 다음 창성에다가 알아보아서 네 말이
맞지 않으면 함께 치죄할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하고 감사가 서림이는 곤장을
치지 않고 내보내고 도화는 덧저고리를 도로 주어서 내보냈다. 서림이가 말을
잘 꾸며서 당장 곤장은 면하였으나 뒷날 걱정이 아주 없지 않은데다가 감사가
서림을 믿는 마음이 줄어서 진상할 물건 수습하는 일을 서림에게 일임하여 두지
않고 예방비장을 시켜 총찰하게 하였다. 예방비장이 일은 잘 알지 못하며 공연
히 까다롭게 굴어서 서림이가 성가시기 짝이 없는 중에 서방님 낯 보아가며 아
기씨 대접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서림이가 감사의 신임을 못 받는 줄 짐작하고
대접들이 현저히 전과 달라져서 서림이는 앙앙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 뒤로
서림이는 진상할 물건을 구하여 들일 때마다 자신의 실사귀를 잊지 않아서 슬금
슬금 뒤로 돌리는 것이 있건만, 일 모르는 예방비장은 서림이에게 속아서 감사
가 총찰시킨 보람이 없었다.
김명윤이 평안감사로 오며부터 구하여 들인 모든 물건을 섣달에 세찬들 보낼
때 진상하도록 하려고 미리 봉물을 짐 꾸미며 물목을 발기 적게 하였다. 토산물
품은 관하 사십이관에서 거두어 바친 산삼, 사향, 안식향과 초피, 수달피, 청서피
와 백옥, 오옥, 담청옥, 수포석, 마노 등속이요, 중국물품은 주단으로 홍공단, 백
공단과 운문단, 운문사와 궁초, 공릉 등속이 있고, 문방제구로 단계 벼루와 호주
붓과 휘주 먹도 있거니와 옥필통과 금향로도 있으며, 유명한 사람의 서화도 있
고 옥잔과 옥저와 옥장도와 자마노지환은 오히려 신기할 것도 없고, 옥다리미와
비취 대접과 자가 넘는 산호 가지와 돌에 섞인 덩이 주사가 모두 진귀하고 굵기
가 콩알만한 둥근 진주와 밤에 광채 나는 흰구슬은 희한한 보물이었다. 서림이
물목 발기를 적느라고 예방비장청에 종일 있다가 사처로 돌아오니 도화는 저녁
상을 보아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 좀 늦었네. 밥 먹었나?” “나리 오시
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어째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진상할 물건 발
기 내느라고 종일 해를 보냈네.” “물건이 얼마나 많으면 발기 내는 데 하루가
걸립니까?” “한편으루 물건을 조수해 가며 발기를 내니까 당연 더디지.” “
진지 곧 잡수시렵니까?” “배가 고팠네. 어서 갖다 주게.” 서림이 저녁 밥상을
받은 뒤에 도화가 상머리에 앉아서 말을 물었다. “진상 갈 물건에 희한한 것이
많답지요.” “많구말구.” “그중 제일 보배가 무엇입니까?” “야광주가 제일
되겠지.” “야광주란 것이 무엇입니까?” “야광주란 것이 밤에 광채 나는 구
슬일세.” “어둔 데서도 광채가 납니까?” “촛불이나 등불 밑에 광채가 찬란
하게 난단 말이야.” “구경이나 한번 했으면 좋겠네. 그 구슬이 몇 개나 됩니
까?” “단 한 개지. 그런 보배가 어디 그렇게 많은가.” “그 다음 좋은 보배는
무엇입니까?” “글쎄, 준주가 그 다음일까.” “준주는 저도 구경했습니다.”
“준주두 준주 나름이지. 그런 굵은 준주는 자네는 구경 못했을 걸세. 사또두 처
음 보셨다네.” “얼마나 굵읍니까?” “콩알 굵기만 할 걸세.” “나는 녹두알
만한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것을 밀가루와 같이 싸서 두면 새끼를 친답지요.”
“그러면 자네가 구경했다는 것은 준주가 아니구 무궁줄세.” “준주와 무궁주
와 다릅니까?” “다르구말구. 무궁주에는 준주 같은 광채가 나지 않네.” “그
럼 나는 준주도 구경 못했습니다그려. 진상 갈 준주도 단 한갭니까?” “굵은 준
주는 한 개구 그버덤 잔 것은 여러 갠가 부데.” “준주가 잔 것이 여럿이거든
한 개 갖다가 구경 좀 시켜주십시오.” “이 사람 누구를 죽이려구 그런 소리를
하나. 진상 갈 준주를 훔쳐내 보게. 나는 말할 것 없구 자네두 요전 수달피 몇
곱절 혼이날 걸세.” “남만 안 보이면 고만이지요. 여보세요 나리.” “진상 갈
봉물은 벌써 선화당 벽장 다락에 들어가 있네.” “핑계 마세요.” “핑계가 아
닐세. 오늘 죄다 상자에 담을 것 상자에 담구 궤짝에 넣을 것 궤짝에 넣었네.”
“고만두세요. 나리두.” “저런 사람 보게. 공연히 골을 내네.” “누가 골을 내
오.” “여보게 가만 있게. 선물로 보내는 데두 잔 준주가 있으니까 어디 보세.
” “어디 보자지 말고 꼭 한 개 갖다 주세요. 믿고 있겠습니다.” 하고 도화는
싱긋 웃고 서림이의 대궁상을 돌려놓고 밥을 먹었다. 서림이 도화에게 졸리어서
진주 한 개 가무릴 마음을 먹고 있는 중에 서울 갈 선물을 메지메지 나눠서 싸
놓으라고 감사의 분부가 내리어서 예방비장이 택호와 물종을 적어 들고 갈라 싸
는 것을 지휘하는데 진주 열 개는 이승지댁과 윤영부사댁에 보내도록 다섯 개씩
두 몫에 나눠서 싸놓았다. 예방비장은 선화당에 불려가고 물건 싸던 통인 둘에
하나는 밖에 나갔을 때, 서림이 남은 통인 하나를 심부름시켜 내보내고 방에 사
람이 없는 틈에 싸놓은 진주 한 목을 뜯어서 다섯 개를 네 개로 줄이고 감쪽같
이 다시 싸놓았다. 서림이 어찌 알았으리, 심부름시킨 통인이 방문 밖에서 엿본
것을. 저녁때 서림이가 태평으로 훔친 진주를 가지고 나간 뒤에 통인이 엿본 것
을 예방비장에게 고하고, 예방비장이 통인의 말을 감사에게 고하여, 감사가 서림
이를 당장 잡아들이라고 호령호령하였다. 감영 안이 떠들썩할 때 형방비장이 감
사 앞에 나가서 “전일 수달피와 이번 준주를 합해 생각하오면 서림이 뒤루 돌
린 물건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올 듯하오니 서림이의 숙식하는 도화의 집을 집뒤
짐해 보구 서림이를 잡아 족치는 것이 좋을 듯하외다.” 하고 품하여 감사가 그
리하라고 허락하였다. 형방비장이 감사의 명을 받고 집뒤짐하러 데리고 나갈 나
장이들을 불러모으는데 감영 관노로 있는 도화의 외사촌 오라비가 사단을 짐작
하고 도화에게 뒷길로 통기하여 주어서 도화가 선
통을 받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서림이에게 물으니 서림이가 선뜻 “장물만 들
쳐나지 않으면 자네는 빠질 수 있을 테니 내가 갖다준 물건을 죄다 찾아 내놓
게.” 하고 말하였다. 도화가 진동한동 세간에서 옥, 산삼, 피물 등속을 찾아 내
놓을 때 상목 몇 필이 있는 것을 서림이가 보았다. “그 상목두 치우세.” “이
건 아니에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기면 발명하기가 성가시니 내놓게.” 모
든 물건을 뚤뚤 뭉쳐 큰 보자기로 싸는데 진주도 그 속에 넣었다. “마루 밑에
집어너까요?” “집안에는 두는 것이 불긴해.” “그럼 뉘게 맡겨요.” “자네
맡길 데 없나?” “없어요.” “내가 어디 갖다 맡겨 봄세.” 서림이 보자기 싼
것을 들고 일어서며 “내가 들어오기 전에 만일 자네가 잡혀가게 되거든 내게서
물건 받은 것이 없다구만 잡아떼게. 그러면 무사할걸세.” 말하고 곧 밖으로 나
갔다. 얼마 동안 뒤에 형방비장이 나장이 팔구 명을 데리고 대들어서 도화와 도
화의 집 사람을 한옆에 몰아놓고 뒨장질을 시작하여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장물 잡아낼 것이 별로 없었다. 형방비장이 도화를 앞으로 불러내서 말을 물었
다. “서장사 어디 갔느냐?” “잠깐 어디 갔다 온다고 나가셨습니다.” “저녁
안 먹구 나갔느냐?” “저녁 잡숫고 나가셨습니다.” “준주는 너 주구 나갔겠
지.” “웬 준줍니까?” “잡아떼지 마라.” “정말 구경도 못했습니다.” “가
만 있거라. 이따 보자.” 하고 형방비장은 한동안 서림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나중에 도화만 잡아 앞세우고 감영으로 들어갔다. 서림이는 그날 저녁으
로 종적을 감추어서 김명윤이 삼사 일 동안 두고 서림이를 잡아 대령하라고 야
단치다가 말고 도화만 매를 쳐서 내보냈었다.
서림이가 그날 저녁에 바로 평양서 도망하여 서울로 올라오는데 평양 떠난 뒤
나흘 되던 날 금교역말 와서 잤다. 이튿날 눈이 부슬부슬 오는 중에 금교서 떠
나서 탑거리를 지나 탑고개를 넘어올 때 고갯길에 수건으로 머리 동인 수상한
사람이 둘이 나타나서 서림이의 걸머진 보따리가 큼직한 것을 보고 “보따리에
든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묻는 것을 “흔옷가집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
어디 보자.” 하고 둘이 함께 대들어서 서림이의 양편 팔을 붙들고 보따리를 벗
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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