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권커니잣커니 먹느라고 술을 네 번이나 더 내왔다. 술기운이 팔구 분 오
른 뒤에 꺽정이가 봉학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자네는 대체 이 세상이 어떻
다구 생각하나?”하고 물었다. “어떻다니 무슨 말이오?” “좋은 세상이냐 망
한 세상이냐 묻는 말이야.” “글쎄 좋은 세상이라군 할 수 없겠지.” “내가 다
른 건 모르네만 이 세상이 망한 세상인 것은 남버덤 잘 아네. 여보게 내 말 듣
게. 임금이 영의정감으루까지 치든 우리 선생님이 중놈 노릇을 하구 진실하기가
짝이 없는 우리 유복이가 도둑눔 노릇을 하는 것이 모두 다 세상을 못 만난 탓
이지 무엇인가. 자네는 그렇게 생각 않나?”하고 꺽정이가 흰자 많은 눈으로 봉
학이를 바라보았다.
꺽정이의 입에서 말이 부프게 나올 때 눈동자 위로 흰자가 많이 나오는 것은
아이 적부터 있던 버릇이라 봉학이가 꺽정이를 보고 웃으면서 “형님 눈 괴상하
게 뜨는 버릇이 그저 남았구려. 동소문 안에서 같이 지낼 때 내가 곧잘 형님 눈
을 흉내내었더니 형님이 나를 가르쳤다구 우리 외할머니가 형님을 야단친 일까
지 있지 않소. 형님, 생각나우?”하고 이야기를 달리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꺽정이는 가볍게 “그랬던가” 한마디로 봉학이 말을 막고 자기의 하고 싶은 말
을 계속하였다.
“자네는 나더러 유복이를 도둑눔 노릇하게 내버려 두었다구 책망하지만 양반
의 세상에서 성명 없는 상놈들이 기 좀 펴구 살아보려면 도둑눔 노릇밖에 할 게
무엇 있나. 그 전에 심좌랑이 우리보구 반석평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했었
지. 남의 집 종의 자식으로 재상까지 되었을 젠 여간 좋은 운수를 타구난 사람
이 아닐 겔세. 예전부터 오늘날까지 수없는 종의 자식에 잘난 사람이야 반석평
이 하나뿐이겠나. 우선 우리 알기에두 홍주 서기 같은 사람은 효행 있구 행검
있구 글두 잘한다네. 그 사람이 나이 우리버덤 두어 살 아래니까 앞으루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제나 내나 그대루 썩었지 별조 있겠나. 그 사람이 양반의 집
종의 자식이 아니구 양반의 자식이었으면 벌써 대사성이니 부제학이니 들날렸을
것일세. 내 생각을 똑바루 말하면 유복이 같은 도둑눔은 도둑눔이 아니구 양반
들이 정작 도둑눔인 줄 아네. 나라의 벼슬두 도둑질하구 백성의 재물두 도둑질
하구 그것이 정작 도둑눔이지 무엇인가.”
꺽정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봉학이는 꺽정이의 말이 끝난 뒤에 긴 한숨
을 한번 내쉬고 “형님, 그런 속상하는 이야기는 고만두구 다른 이야기나 합시
다.”하고 말하였다.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지. 청석골 도둑눔들 이야기나 해
들려줄까?” “유복이와 돌석이 외 졸개들 이야기요?” “유복이와 돌석이 외에
괴수가 둘이나 더 있다네.” “아주 대적패요그려. 그 괴수들도 다 비범한 인물
이오?” “하나는 성명이 곽오주구 하나는 성명이 길막봉인데 둘 다 힘꼴들 쓰
는 사람이야.” “그자들은 청석골 붙백이 도둑놈들이오?” “아니 유복이버덤
뒤에 도둑눔 된 사람일세.” “그자들의 도둑놈 된 내력두 들을 만한 게구려.”
“길막봉이가 남의 집 처녀를 훔친 것두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곽오주가 제 자식
을 죽인 것은 희한한 이야깃거린 줄 아네.” “제 자식을 죽이다니, 천하에 흉악
한 놈이구려.” “흉악한 놈인가 불쌍한 놈인가 내 이야기를 듣구 말하게.”하고
꺽정이가 이야기를 시작하여 먼저 곽오주의 일을 되숭되숭 다 이야기하고 다음
에 길막봉이 일까지 대충대충 이야기하였다. 그 동안에 밤이 이미 깊어서 “미
진한 이야기는 두었다 하구 고만 잡시다.”하고 봉학이가 통인을 불러서 술상을
치우고 자리를 펴게 하였다.
자리에 누운 뒤에 꺽정이가 “가리포 싸움 이야기나 좀 듣세.”하고 말하니
봉학이가 “형님 곤하지 않소?”하고 묻고 그 다음에 한동안 자기의 지난 일을
대강 이야기하였다.
꺽정이가 봉학이를 찾아오던 날부터 며칠 동안 정의읍내에서는 원님 찾아온
손님 이야기가 자자하였다. “원님 찾아온 손님이 상놈이랍디다.” “상놈이 다
무어요? 백정놈인갑디다.” “우리 안전하구 척분으루 형님 아우 한다니까 백정
놈은 아니겠지.” “그 손님이 힘이 천하 장사라우.” “우리 안전께서 영암 전
장에서 손님이 힘을 보신 일이 있답디다.” “남방어사가 영암 북문 밖 싸움에
죽게 된 것을 그 손님이 살려냈는데 무슨 군령을 어기었다구 남방어사가 인정없
이 효수시키려구 하는 것을 우리 안전께서 빼놔 주셨다우.”
정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꺽정이의 일을 말들 하였는데 말근본은 대개 나 내
아 관비의 입에서 나왔었다.
봉학이는 꺽정이를 관가에서 묵히고 싶었으나 꺽정이와 자기가 모두 비편하여
관가 근처에 정한 사처를 정하여 나가서 묵게 하고, 또 천왕동이 일을 전위하여
제주에 올라가서 초하루 보름 점고날 외에는 마음대로 쏘다녀도 좋도록 부탁하
여 천왕동이도 정의 와서 꺽정이 사처에서 같이 묵게 하였다. 봉학이가 꺽정이
와 천왕동이를 데리고 각처로 구경도 돌아다니고 사슴 사냥질도 나다니어서 한
반 달 심심치 않게 보내었다. 이 동안에 새 현감이 제주 내려왔단 기별이 와서
봉학이가 정의를 떠나는데 꺽정이는 천왕동이를 데리고 먼저 제주로 간 까닭에
봉학이의 일행은 계향이와 책방뿐이라, 인마 통히 합하여 열이 넘지 못하나 정
의 관속 백성 천여 명이 제주까지 쫓아왔었다. 봉학이가 제주서 떠날 때 정의
사람들은 뱃머리에 와서 하직하여 눈물을 뿌리고 천왕동이는 언덕 위에 주저앉
아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정의 사람의 하직을 받느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몽
학이와, 천왕동이더러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꺽정이가 둘이 다 눈에 눈물이 괴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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