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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7권 (37)

카지모도 2023. 6. 18.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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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손 어머니가 다리만 성하면 이봉학이가 아무리 말리더라도 혼자 서울로 쫓

아올 것인데 쫓아오지는 못하고 겁겁한 마음을 억지로 참느라고 눈물까지 내었

었다. 여러 사람이 기진하도록 기다린 끝에 꺽정이가 오기는 왔으나, 해가 벌써

서쪽으로 다 기울어져서 길을 더 가지 못하고 비선거리서 자게 되었다.

서울서 떠난 뒤 나흘 되는 날 저녁때 일행이 무사히 이천읍내에 당도하였는데

이때 해가 노루 꼬리만밖에 남지 아니하여 광복산까지 대어가자면 밤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교군꾼과 짐꾼들은 모두 자고 가자고 말하는 것을 꺽정이가 듣

지 않고 밤길로 나가기로 작정하여 이봉학이가 박유복이와 백손이더러 “우리

셋이 홰꾼 노릇하자.” 하고 말한 뒤 홰 세 자루를 준비시키고 졸개는 빈몸으로

먼저 나가서 선통을 놓게 하였다. 이천읍내서 저녁 요기들까지 하고 밤길을 걸

어서 광복산으로 나오는데 삼십 리 남짓 오니 황천왕동이가 혼자 와서 마중하고

다시 이십 리쯤 더 오니 배돌석이와 곽오주와 길막봉이가 같이 와서 마중들 하

고 광복산에 다다르니 늙은 오가와 서림이가 여러 두목과 졸개들을 거느리고 산

밑에 내려와서 기다리고 안식구들까지 산 위에 나와 서서 기다리었다. 여러 두

령이 꺽정이의 돌아온 것을 바로 큰 경사같이 여겨서 소잡아 찬치하려고 하는

것을 꺽정이는 못하게 금지하다가 “형님이 오래간만에 오셔서 두목과 졸개들은

한번 호궤하는 것두 좋으니 금지하지 마시우.”

이봉학이의 말을 듣고 여러 두령들 하는 대로 내벼려두고 알은체 아니하였다.

꺽정이가 돌아오던 이튼날부터 이삼 일 동안 소잡고 도야지 죽이고 떡 만들고

술 걸러서 도중 상하가 배들을 불리었다. 꺽정이가 새로 도임한 원이나 감사처

럼 사흘 만에 비로소 일을 보기 시작하였는데 여러 두령들을 모아놓고 공식으로

할 말하고 들을 말 들은 뒤에 서림이를 돌아보며 “서종사, 군법을 좀 물어볼

것이 있소.”하고 말하였다. “무었이오니까?” “부하루서 대장을 멸시하는 일

이 있으면 그 죄가 무엇에 해당하우?”

서림이가 꺽정이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대답이 조금 더디었다. “참하여 마땅

합니다.” “또 종없는 말루 도중 인심을 소동시키는 일이 있으면?” “그것두

참하여 마땅합니다.”

꺽정이가 바로 밖을 향하고 “이리 오너라!” 하고 좌우 시위를 불러서 “서

림이를 잡아내라.” 하고 호령하였다. 좌우 시위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다

가 “빨리 잡아내게 못하느냐!” 벽력 같은 호령 소리에 경겁하여 당장 서림이

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의관을 벗기구 계하에 꿇려라.” 계하에 꿇어 엎

친 서림이를 꺽정이가 내다보며 “너는 네 입으로 참하여 마땅하단 죄를 두 가

지 겸쳐 지었으니 죽어두 원통하게 새악 마라.” 하고 이르니 서림이가 고개를

치어들고 “제가 언제 대장을 멸시한 일이 있으며 도중 인심을 소동시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발명을 시작하였다. “너의 죄상은 내가 다 알구 있으니 발명

하여 소용없다.” “제가 혹시 뉘 모함에 들었는지는 알 수없으나 그런 죄를 지

은 일은 꿈에두 없습니다. 인명에 관계 없는 작은 죄라두 모호하게 죄주는 법은

없으니 제 죄상을 아신 대루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네가 내 험담을 한 일이

없느냐, 또 여럿이 같이 서울루 가거나 사방으로 흩어지자는 말을 한 일이 없느

냐?” “제가 무슨 험담을 하였다구 들으셨습니까?”“기집에 흘렸느니 신세를

망치느니 그런 소리를 안 했느냐? 했다면 그게 나를 멸시하구 험담한 것이 아니

구 무어냐?” “제가영웅이란 원래 색을 좋아한다구 말한 일이 있은 법합니다.

영웅호색이란 옛말이지 제 말두 아닙니다. 대장께서 색에 범연치 않으시단 말이

나기에 제가 영웅이신 까닭이라구 말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험담입니까? 더

구나 그게 무슨 멸십니까?” “ 그래 한 가지는 네 발명대루 죄가 되지 않는다

고 하자. 또 한가지두 마저 발명할 말이 있느냐?” “발명할 말씀이 있다뿐이오

니까. 그 말은 제가 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도중 여러 사람의 맘을 소동시

키려구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할 때 이두령,황두령 두 분밖에 더 들으신 분

이 없는 걸 보셔두 아실 일이구 또 졸개 하나라두 그 말루 소동된 일이 없는 걸

보셔두 아실 일이 아닙니까. 대장께서 오래 도중을 떠나기신 까닭으루 도중 일

이 정체되어서 어떻게 하면 대장을 속히 내려오시게 할까 여러분이 모두 고심들

할 때 제가 옅은 생각으루 대장께서 그런 말을 들으시면 맘이 혹시 움직이실는

지 모른다구 말한 것이올시다. 그게 죄될 것두 없을 것인데 무슨 죽을 죄가 될

까닭이 있습니까. 설사 죄없이라두 죽이시면 죽지 별수 없는 목숨이지만 억지로

죄명을 씌우시면 죽어두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서림이가 절절히 발명하는 말을 듣고 말없이 여러 두령을 돌아보았다. 꺽정이

가 서림이와 황천왕둥이 두 사람을 속으로 벼르는 중에 서림이는 홍와조사하였

다고 죽여 없애려고까지 마음을 먹고 온 터이라 공사를 개시하는 첫날 바로 죽

이려고 거조를 차리게 된 것인데, 서림이의 발명을 듣고 본즉 실상 죽일 만한

죄가 없어서 도리어 어색하여졌다. 꺽정이가 여러 두령을 돌아본 것도 다른 뜻

없이 전수히 어색한 데서 나온 일이건만 여러 두령들은 거진반 다 꺽정이가 각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는 줄로 짐작하였다. 그중의 늙은 오가가 계제를 놓칠까

겁내는 것같이 얼른 먼저 “ 서종사의 말이 조금두 은휘 없는 말이오. 만일 죽

일 죄가 있으면 군법 아래 언감생심 두호할 리가 있겠소만 사실루 죽일 죄가 없

으니 서종사를 용서해 주시우.” 하고 말하는데 평소의 능란한 말주변이 다 어

디 갔는지 말이 대단꺽꺽하였다. 늙은 오가의 말이 끝난 뒤에 “죽일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쓰나요?” 박유복이의 말을 “죽을 죄 없이두 죽는 사람이 세상에

들어쌨지 않소.” 곽오주가 뒤받고 “형님 거조가 좀 과하셨소.” 이봉학의 말을

“과하지요.” “과하다뿐이오.” 배돌석이와 황천왕둥이가 붙쫓는 것을 꺽정이

는 듣는 체 만 체하고 가만히 있다가 얼마만에 “여럿 생각에는 서림이가 죄가

없단 말이지?” 하고 말하니 말참례 들지 못한 길막봉이가 “녜, 그렇지요.” 하

고 말을 대답하였다. 꺽정이가 다시 두말 않고 좌우 시위에게 “서종사를 방으

로 모셔들여라.” 하고 분부를 내리었다. 서림이가 의관을 다시 갖추고 좌우로

부축을 받고 방에 들어와서 자리에 앉으며 곧 꺽정이를 향하여 “유죄무죄간에

촉노한 것은 불민한 탓인데 용서하여 주셔서 황감합니다.” 말하고 머리를 굽히

니 꺽정이는 “불안하우.” 한마디로 대답하고 긴말을 하지 아니 하였다. 늙은

오가가 꺽정이를 보고“서종사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자면 불가부득 술이

있어야 할 테니 어떻소?”“우리 고만 술판을 차려보실라우?” 하고 너스레 잘

치는 봄색을 내놓는데 꺽정이는 고개를 외치고 바로 “이애 천황동아, 네게두

말을 좀 물어 볼 것이 있다.” 하고 천황동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안 보구 내빼온 것이라든지 너의 누이를 충동여 보낸 것이라든지

모두가 꽤씸한 일이지만 그런 건 다 덮어두구 네가 내 앞에서 마지막 하직을 하

느니 마느니 하지 않았느냐? 마지막 하직이란 게 어떤 것이냐? 소견을 말해라,

어디 좀 들어보자.”

꺽정이의 역정으로 하는 말을 황천동이가 숫제 대답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한

껏해야 호령이나 듣지 별일 없을 것인데 황천동이는 자기가 빰맞고 떠다박질때

때 배리 틀린 것이 누님의 정강이 부러진 것을 보고 다시 일층 더 틀려서 꺽정

이를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긴데다가 뒷생각이 원체 좀 부족한 탓으로 “그것도

참할 죄요?” 하고 엇나가는 대답을 하였다.

“무엇이야, 네가 참을 당하구 싶으냐?” “목을 잘르든지 사지를 찢든지 맘대

루 하시구려.” “네가 나를 넘보구 대드느냐?” “네, 넘봤소. 멸시했소. 참한다

지요.” 꺽정이는 얼굴에 핏대가 서고 눈귀가 찢어지게 되었다.

“불출아!” “능통아!” 좌우 시위 신불출이와 곽능통이의 이름을 꺽정이가 연

달아 불렀다. 좌우 시위가 “네, 네.” 대답하고 방문 앞에 들어서자, 꺽정이는

곧 졸개 대여섯 놈만 빨리 불러 대령하라고 호령하였다. 박유복이는 황천왕동이

더러 기탄없이 대답하였다고 나무란 뒤 황천왕동이를 대신하여 꺽정이의 용서를

빌고 이봉학이는 꺽정이에게 황천왕동이의 방자한 것을 쳐서 발한 뒤 화를 참고

조용히 꾸중하라고 권하였으나 꺽정이는 눈을 딱 감고 앉아서 검다 쓰다 대답

한마디가 없었다. 얼마 동안 안 지나서 좌우 시위가 졸개들을 데리고 황천왕동

이를 잡아 일으켜 방문 밖으로 내밀며 시위와 졸개들에게 “너희들이 이놈을 끌

구 나가서 당장 목을 베어 바쳐라. 시각을 천추하면 너희들두 다 목이 떨어질

테니 그리 알구 거행해라.” 하고 추상 같은 호령을 내리었다. 방안에 앉아 있던

여러 두령이 우둘 일어났다. “형님, 망령이 나셨소? 이게 무슨 일이오?”“영을

얼른 도루 거두시오.”“사생을 같이 하자구 맹세한 사람을 죽이다니 말이 되

우?”“무슨 큰죄가 있소. 불과시 말다툼한 죄루 죽인단 말이오?”“우리들을

그대루 두구는 황두령을 죽이지 못하우.”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할 만큼 여러 말이 함께 섞여서 떠들석한 중

에 늙은 오가의 입에서 “여보게 이사람들, 내 말 좀 듣게.” 굵은 말소리가 나

왔다. 늙은 오가가 여러 두령더러 “여럿이 한꺼번에 떠들어서야 대장께서 잘

들으실 수가 있나. 찬찬히 차례차례 말씀들을 여쭙게.”말하고 밖을 내다보며 “

아따 이놈들아, 나가지 말구 게 좀 있거라.” 소리치다가 꺽정이가 “장령을 어

린애 장난같이 여기는 모양이오.” 하고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다시는 입을 뻥

긋 못하고 한구석으로 비켜섰다. 여러 두령들 중에서 형님, 하며 꺽정이 앞으로

대어드는 사람도 있고 대장 형님 나 좀 보라고 꺽정이의 소매를 압아당기는 사

람도 있었다. 꺽정이가 소매를 뿌리치고 소요 떨지 말라고 소리를 지른 뒤에 여

러 두령들을 돌아보며 “천왕동이루 말하면 여럿들버덤 내가 사정으루 가깝지만

용서할수 없다. 이 자리가 사석 같으면 모르지만 대장이 부하에게 말하는 공석

에서 그 따위루 무엄하구 방자하게 말대답하는 것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이냐!

숫제 나더러 대장 노릇을 고만두라지 천황동이를 용서하란 말은 마라.” 하고

말을 이르는데 뜨문뜨문 하는 말에 꾹꾹 눌러 하였다. 박유복이가 한 걸음 여러

사람 앞으로 나서서 “대장 형님. 죄를 주시더라두 죽이진 마십시오.” 하고 말

하니 꺽정이는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대장의 체모를 보전하자면 천황동이를

안 죽일 수 없다. 죽이는 내가 죽이지 말라는 너희들버덤 속이 더 아프지만 그

건 사정이니까 사정으로 장령을 변개할 수 없다. 장래 다른 사람의 본보기루 천

황동이는 죽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천왕동이의 죄를 우리가 다 나눠서

당할 테니 천황동이의 목숨을 붙여 주십시오.” 박유복이가 애걸하듯 말하는 것

을 “쓸데없는 소리 마라!” 꺽정이가 불호령으로 내리눌렀다. 박유복이가 눈물

까지 떨어뜨리며 물러설 때 배돌석이가 야무진 말소리오 “나는 사생을 같이 하

자구 맹세한 황두령하구 함께 죽지 더럽게 살지 않겠소.” 말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럼 나두 같이 죽으러 가겠소.” 길막봉이가 배돌석이의 뒤를 이어나

가고 “죄를 나눠 당한다고 말까지 한 내가 남의 뒤에 떨어질 수 없으니까 나두

같이 가서 죽겠소. 일일이 하직 못하구 가니 용서하시우.” 박유복이가 길막봉이

의 다음에 나가고 “나두 갈 테니 같이 갑시다.” 곽오주가 박유복이의 뒤를 쫓

아 나갔다. 꺽정이는 어이가 없어서 우두머니 보고 섰는데 이학봉이가 앞에 나

와서 “다들 의리루 죽으러 가는데 혼자 떨어질 수 없어서 나두 형님을 버리구

가겠으니 용서하우 형님, 이 다음 저승에서나 만납시다.” 말하고 하직으로 절을

하였다. “자네까지 마저.”꺽정이의 말이 뒤가 없었다. 이학봉이는 뒷말을 기다

리는 것처럼 잠시 동안 꺽정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섰다가 한숨을 한번 쥐고 돌

아서서 “오두령, 서종사 마지막 작별이오.” 하고 말한 뒤 천천히 걸어서 방문

밖으로 나갔다. 뒤에 남은 늙은 오가와 서림이는 꺽정이의 하는 꼴을 두고 보자

고 약속한 것같이 둘이 입을 함봉하고 아무 소리도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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