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주 대접할라느냐?” “약주는 가서 받아오지만 안주를 어떻게 하느냐?”
하고 공론하는 말을 단천령이 방에서 듣고 “여보게 초향이, 술을 줄
라거든 안주는 푸새김치라두 좋으니 따루 장만하지 말게.” 하고 말하였다. 초향
이가 단천령 옆에 와 붙어앉아서 공연히 소리내서 웃기도 하고 정답게 가만가만
이야기도 하는 중에 초향이의 어미가 술상을 차려 들여보냈는데 술은 소주요,
안주는 배추 겉절이와 마늘장아찌뿐이었다. 단천령이 소주를 즐기지 아니하나
권에 못 이겨서 두어 잔 마신 뒤에 초향이더러 “자네두 한잔 먹게.” 하고 초
향이 손에 든 주전자를 달라고 하니 “저는 술을 접구도 못합니다.” 하고 초향
이는 주전자를 내놓지 아니하였다. “술이란 운에 먹는 음식인데 나 혼자 무슨
맛인가. 나두 고만 먹겠네.” “안주 없는 술이나마 한두 잔 더 잡수시지요. 제
가 대작하는 대신으로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참말 자네가 시조를 잘 짓는다
데그려. 하나 지어 불러보게.” “잘 짓고 못 짓고 지으라시면 짓겠습니다.” 초
향이가 시조를 생각하느라고 얼마 동안 잠자코 있다가 “할 말이 없는 듯 많고
많은 듯 없어서 시조가 안됩니다. 웃음거리로 들어줍시오.” 하고 말한 뒤 단정
하게 앉아서 시조를 불렀다. “상공은 금지옥엽 이 내 몸은 하향천기지기라 입
에 올려 일컫지는 못하오나 정에는 위아래 층이 없사올 듯하외다.” “자네 수
고를 갚기 위해서 나두 되나마나 시조 하나 지어서 화답함세.” “시조 부르실
때 제가 가야고로 어우르까요?” “좋지, 장단이 혹 틀리거거든 가야고루 잘 싸
주게.” “그렇게 말씀하면 고만둘랍니다.” “자네가 어울러 주지 않구 고만두
면 나두 부르지 않구 고만두겠네. 그러지 말구 가야고를 어서 이리 가지고 오게.
” 초향이가 가야금을 가지고 와서 줄을 퉁기며 안족을 들이키고 내키고 한 뒤
에 단천령이 시조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가야금 소리 곱게 흘러서 남청의 웅
장한 맛을 더 돋우었다. 그대의 높은 재주 귀에 저저 들었기로 그대를 보랴 하
고 천리 먼길 예 왔노라 그대가 싫다 않으면 같이 놀다가리라. 단천령이 시조
삼장을 다 부르고 나서 “종장 사의가 자네 맘에 어떤가? 싫다구 하지 않을 텐
가?” 하고 물으니 초향이는 말없이 방그레 웃었다. “싫다 않으면 여기서 자구
싫다면 더 늦기 전에 가겠네.” “멍석자리로 나가시겠단 말씀입니까? 멍석은
벌써 거둬치웠습니다.” “나를 여기서 자게 할라면 내가 길을 와서 곤하니 좀
일찍 자게해주게.” “녜, 그러십시오.” 초향이가 술상을 마루로 내보내고 가야
금을 벽에 갖다 걸고 방을 훔치고 자리를 내겨 까는 동안에 단천령은 피리를 품
에서 꺼내서 머리맡에 놓았다. 초향이가 자리를 다 깔아놓은 뒤 피리를 집어들
고 “이게 대가 아니고 뼙니다그려. 무슨 뼙니까?” 하고 물어서 “두루미 다리
뼈루 만든 겔세.” 하고 단천령이 대답하였다. “대피리보다 소리가 잘 납니까?
” “아까 들을 제는 대피리와 어떻든가?” “아까 들을 제는 대피리로만 알았
습니다.” “내일 가까이서 잘 들어보게.” “제가 지금 시조를 또 하나 부를 테
니 피리로 어울러 주시겠습니까?” “그리하세.” 이날밤 어인 밤가 어른님을
뫼시도다 종없이 웃고 싶고 하염없이 울고 싶다 아마도 기쁨에 겨워 미칠 듯하
여라. 단천령이 종장 끝에 군장단까지 다 불고 피리를 입에서 뗄 때 “대피리보
다 소리가 더 청청하고 강한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초향이가 말하니
단천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고만 누우십시오.” “자네두 눕게.” “어
미를 잠깐 보고 와서 자겠습니다.” 초향이가 건넌방에 가서 별로 오래도 있지
아니하였건만, 단천령은 그 동안에 벌써 잠이 어렴풋이 들다가 도로 깨었다. “
불을 켜놓구 자나?” “아니요, 끄지요” 달이 서창으로 들이비쳐서 방안은 등
잔불 켯을 때보다 도리어 더 밝고 초향이의 얼굴은 등잔불 밑에서 볼 때보다 몇
배 더 아름다워 보이었다. 이튿날 식전에 단천령이 초향이에게 부탁하여 아이년
을 하처 잡은 집에 보내서 의관을 바꾸어오게 하였다. 하처에 가야 별로 소간사
가 없는 까닭에 초향이의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고 눌러앉아서 아악.향악.당악의
각기 좋은 곳을 들어 이야기 하가다 이야기가 번지어서 장악원의 제도 변천을
이야기하고, 세종대왕 때 관습도감사 박연이란 이가 악공을 교습시키던 방
법이 아직 남아서 조라치들 공부가 수월치 않은 것을 이야기한 끝에 “자네두
서울 와서 장악원 같은 데 시사해 보면 어떤가?” 하고 물으니 초향이는 한숨만
짓고 대답이 없었다. “자네가 서울 와 있어 본다면 내가 이번에 올라가서 주선
해 보겠네.” “서울 왈자들에게 부대낌을 받으러 서울까지 갈 맘은 아직 없습
니다. 장악원이나 내의원 같은 데 주선해 주실 생각을 마시고 나리댁에 시사를
시켜 주십시오.” “내집에 와서 시사를 하겠다? 그것 좋은 말일세. 처음에 장악
원이나 내의원으루 올라왔다가 나중 내집으루 옮길 도리를 해보세그려.” “옮
겨 주실 것만 단단히 언약하시면 좋지 않은 시사라도 싫단 말 않고 가겠습니다.
” “내가 언약하기는 어렵지 않은데 우리 집에는 안에 호랑이가 하나 있어서
자네가 옮겨왔자 하루를 배기기가 어려울걸.” “부인이 아무리 무서우시기로
무지스러운 볼기야 때리겠습니까. 볼기 맞는 데 기생 노릇이 이에 신물이 납니
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맘을 먹으면 어디 다시 생각해 보세.” “언제쯤 올
라가시겠습니까?” “아직 작정 없네. 이왕 말하구 온 게니 일간 묘향산이나 갔
다와서 작정하겠네.” “묘향산을 보름 후에 가시면 저도 뫼시고 가겠습니다.”
“자네가 같이 간다면 오늘이라두 가구 싶은데 보름 전에는 못갈일이 있나?”
“보름 점고를 맞아야지요.” “점고 때문에 못 간단 말인가? 탈하면 고만 아닌
가.” “제가 사람이 고약해서 남더러 사폐 보아달라기도 싫고 또 보아달래야
보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초하루 보름 점고는 몸져 누워 앓지 않으면
빠지지 않고 치르고 그 대신 여느때는 관가에를 별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
내일이 보름날 아닌가?” “아리 모렙니다.” “그러면 글피 떠나보세.” “무얼
타고 가십니까?” “나는 타고 온 나귀가 있지만 자네 탈 것을 준비해야겠네.
자네 말탈 줄 아나?” “올 봄에 중씨 나리께 보이러 갈 때도 말타고 갔었습니
다.”“그럼, 내가 삯마라두 얻어놓음세. 자네 가야고가 단벌인가?” “왜요?”
“여벌이 있으면 갈 때 하나 가지구 가세.” “가야고를 가지고 가자면 지고 갈
사람이 따로 있어야지요.” “내가 데리구 온 하인이 있으니까 그놈 지워 가지
구 가지. 대체 거추장스러운 악기는 이런 때 재미없는 까닭에 나는 거문고를 안
배우구 피리를 배웠네.” “어디를 가시든지 하인들을 데리구 다니시는데 거추
장스러운 악기면 어떻습니까. 거문고가 거추장스럽다고 안 배우셨단 말씀은 공
연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송장 묶은 거 같은 것을 길에 뻗지르고 다니기가
무에 좋은가?” “그럼 이번에 가야고를 안 가지고 갈랍니다.” “이 사람아, 골
내지 말게. 거문고나 가야고가 그래 피리만큼 간단스러운가, 자네 말해 보게.”
“퉁소 단소 젓대 생황 등속이 다 간단스럽지요. 어디 피리뿐입니까?” “그렇
지. 그런데 그중에서 피리가 제일 간단스럽단 말이야.” “제일 간단스러운 것이
제일 좋은 것은 아니겠습지요.” “제일 좋은 것이라구 억지를 쓰고 싶으나 자
네가 가야고를 안 가지구 간다구 뻗댈까 겁이 나서 고만두네.” “참말로 간단
스러운 걸 취해서 피리를 배우셨습니까?” “거짓말을 할 리가 있나. 우리 형님
이 거문고를 같이 배우지구 하시는 것을 나는 굳이 싫다구 하구 단소를 배웠네.
” “단소도 잘 부십니까?” “단소두가 아니야. 단소를 피리보다 더 잘 불지.
그렇지만 세상에서 야속하게 안 쳐주니 할 수 있나. 우리 이야기는 고만하구 자
네 거추장스러운 악기와 내 간단스러운 악기를 한번 어울려 보세.” 초향이가
웃고 일어나서 가야금을 가지고 와 앉아서 줄을 골랐다. “이거 보게. 어디 가지
구 다니기가 거북한 건 차치물론하구 집안에서두 뻗쳐놓을 자리가 있어야지, 줄
을 번번이 골라야지, 이것이 얼마나 거북살스럽구 번폐스럽구 거추장스러운가.”
“가야고 타박은 고만하시고 무엇이든지 먼저 내세요.” “향악 영산이나 한바
탕 해볼까?” “좋지요.” 이야기가 그치며 바로 피리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어
울러 났다.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세상 시름을 다 잊고 밤낮 웃고 지날 때 이틀 사흘은
눈깜짝할 사이나 다름이 없엇 어느덧 보름이 지나 열엿새날이 되었다. 단천령이
초향이를 데리고 향산 구경길을 떠나는데 단천령은 나귀를 타고 초향이는 집부
담 삯마를 타고 단천령의 하인은 길양식 자루와 술병을 짐 만들어 지고 가야금
은 삯마 마부가 짊어졌다. 유산 나선 길을 조여갈 까닭도 없겠지만 수석이 좋다
고 쉬고 단풍이 곱다고 쉬고 곰배곰배 쉬어서 일백삼십리 길을 사흘에도 해동갑
하여 왔다. 그 날 보현사에서 자는데 중들이 단천령을 서울 양반인 줄 알면서도
색다른 동행이 있는 까닭으로 씁씁히들 대접하였다. 이날 밤에 달이 밝은데 청
정법계라 달빛도 깨끗한지 천지간에 티끌 한 점이 없는 것 같았다. 단천령이 초
향이를 데리고 밖에 나와 거닐다가 하인을 불러서 가야금을 가져오라 이르고 만
세루로 올라왔다. 그림폭 같고 꿈자취 같은 가까운 봉우리와 먼 묏부리를 돌아
보는 중에 가야금이 와서 초향이는 달빛이 비치는 곳에 앉히고 단천령은 난간을
의지하고 서서 한 곡조를 어울렀다. 가릉빈가의 묘한 소리가 시방에 두루 찬 듯,
균천광악의 희한한 곡조가 구소에서 내려오는 듯 세상에서 흔히 듣는 풍류소리
와 다른 것은 누가 듣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중들이 하나씩 둘씩 밖으로 나왔
다. 이때 보현사 선방에서 조실을 맡아보던 지식 있고 도덕 있는 청허당 휴정선
사까지 밖에 나서서 바라보았으니 젊은 중들이 누 아래 모여서서 치어다보는 것
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향산의 이날 밤 달은 오로지 단천령과 초향이를 위하여
밝은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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