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네를 우리가 상빈 대접하려구 뫼셔 온 줄 알았습나? 선비 양반,
미안하지만 우리 눈에는 사람 같지 않구 초개같으니 칼루 치구 앗으루
도리는 걸 알맞은 대접으루 알구 더 바라지 마소. ” 서림이는 농조로 말하는데,
신진사는 정색하고 아래와 같은 긴말을 훈계하는 어투로 말하였다. “옛말에 양
상에 군자가 있고 녹림에 호걸이 있다 하니 그대네 중에 군자도 있을 것이요,
호걸도 있을 것인데 그대네가 어찌하여 대당 소리들만 듣고 의적 노릇들은 하지
않는가. 의적이 되려면 의로운 자를 도웁기 위하여 불의한 자를 박해하고 약한
자를 붙들기 위하여 강한 자를 압제하고 또 부자에게서 탈취하면 반드시 빈자를
구제하여야 할 것인데 그대네의 소위는 빈부와 강약과 의.불의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박해하고 압제하고 탈취하되 인가에 불놓기가 일쑤요,
인명을 살해하는 게 능사라 하니 이것이 그대네의 수치가 아닐까. 그대네가 전
일 소위를 다 고치고 의적 노릇을 해볼 생각이 없는가. 다 고쳐야 할 일이지만
그중에도 지중한 인명을 무고히 살해하는 건 천벌을 받을 일이니 단연코 고치라
고. ” 서림이가 신진사의 말을 다 듣고 냉소하며 “우리가 선생님으루 받들어
뫼실 톄니 입당하시겠소?”하고 물었다. “지금 말과 같이 꼭 나를 선생으루 대
접하겠소? 빈말루만 선생대접한다는 건 미덥지 못하니 꺽정이가 내 앞에 와 꿇
어앉아서 내말이면 팥으루 메주를 쑤래두 어기지 않겠다구 하늘을 가리켜 맹세
하면 입당해보겠소.“ 서림이의 입당 권유도 진정이 아니지만, 신진사의 입당 허락도
역시 진정이 아니었다. 서림이가 고개를 돌려 꺽정이를 보고 웃으면서 “저 선생님을
어떻게 할까요, 놔보낼까요?” 하고 물으니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끄떡하였다. 서
림이가 신진사를 약방으로 보내서 한생원과 같이 앉혀 두게하고 끝으로 봉산 선
비 하나 남은 것을 마저 잡아오게 하였더니 그 선비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말문
이 꽉 틀어막혀서 죽인다고 땅땅 어르는데도 살려달란 말 한마디 못하고 사시나
무 떨듯 떨기만 하였다. “세상에 불쌍한 인생두 많다. 신진사 말마따나 천벌이
무서우니 살려줄까?”하고 서림이가 혼자 말한 뒤 그선비도 갖다 앉혀 두라고
약방으로 보내었다. 이리하여 평산·봉산 선비 여덟 사람 중의 세 사람만 살아
나가게 되었다. 세 선비를 탑고개로 내보낼 때 꺽정이가 한생원·신진사 두 선
비는 노수를 주어 보내라고 분부하여 김산이가 두자 상목 다섯 필씩 주었더니,
한생원은 촌촌걸식하여 갈망정 도둑놈의 재물로 노수를 쓰지 않는다고 당초에
받지 않고 신진사는 받아가지고 탑고개에 와서 호송하는 졸개들에게 행하로 다
주어 갔다.
평산·봉산 선비들이 잡히던 날부터 불과 사오 일 후에 종실 단천령이 탑고개에
서 잡혔다. 단천령은 태종 별자 익령군의 증손이요, 글 잘하고 거문고 잘하는 수
천부정의 손자니 이름은 억순이요, 자는 주경이다. 그 적형 함천 부수 억재와 형
제가 난형난제로 음률에 정통한 중에 형은 거문고를 잘 타고 아우는 피리를 용
하게 불었다. 함천의 거문고는 조부의 계적으로 청출어람이란 정평이 있었고, 단
천의 피리는 득음하기 어려운 거문고와 달라서 누가 불든지 소리가 나는 악기라
곡조만 배워서 불면 고만 다 될 것 같지만, 사람의 입술과 피리의 혀가 서로 합
하여 둘이 하나 되어서 소리의 신통한 지경이 생기는 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배
울 수도 없는 것이다. 단천령의 피리 부는 것을 들어보면 입김이 피리를 울려서
소리를 내는 것 같지 않고 천지 안에 가득한 피리 소리가 조그만 피리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다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서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단
천령의 피리가 용한 것을 밝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겠지만, 단천령이 피
리 잘 부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경향에 많았다. 무무한 시골 사람 하나가 단천령
을 함경도 단천군수로 알고 또 피리를 봄철에 아이들 부는 호드기로 알고서“세
상이 망할라니 별일이 다 많지. 호드기 잘 부는 걸루 유명한 원님두 다 있담.”
하고 말한 것이 굴러굴러 단천령 친구들 귀에 들어가서 단천령을 호드기 원님이
라고 조롱들 한 일까지 있었다. 익령군은 말한 것 없고 부천부정도 서자라 그
가법이 적서에 대하여 까다롭지 아니하므로, 그 손자 육형제 중의 적출 삼형제
와 서출 삼형제가 모두 우애가 있었다. 그런 중에도 적출의 둘째 함천부수와 서
출의 둘째 단천령은 취미가 서로 합하여 우애가 특별하였다. 설산은 비록 각각
하였으나, 의복차 음식감이 조금만 신기하여도 서로 나누지 않는 것이 없고 예
사 조석도 형제 겸상으로 회식하는 때가 많고 더구나 봄날 꽃달임이나 가을밤
달구경 같은 운치 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형제 모이어서 거문고와 피리 어우르는
것을 인간에 다시 없는 즐거움으로 여기었다. 함천부수가 평안감사 유강과 친분
이 두터워서 이 해 늦은봄에 평양을 놀러가는데, 단천령은 그 형님을 뫼시고 갈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공교히 서울집을 떠나지 못할 사정이 있어서 못 갔더니 함
천부수가 평양서 돌아와서 그 아우를 보고 “기백이 너하고 같이 안 온 것을 매
우 섭섭히 말하더라. 기백이 이번에 나를 위해서 관하 각군의 음률 아는 기생들
을 일부러 뽑아올려다가 각기 소장으루 취재를 보이는데 영변 기생 초향이의 가
야고는 수법이 무던하더라. 초향이는 양녕대군께서 구난가를 지어 주셨다는 정
향이의 증손녀라나 종증손녀라구 하더라. 명기의 혈통이 달라서 지조두 있다더
라.“ 하고 이야기하여 단천령은 초향의 가야고를 한번 들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영변까지 가볼 생각은 없었는데, 그후에 유감사가 그 형남에게 보낸
편지 협지에 초향의 말이 함천 나리의 거문고를 들었으니 그 계씨 단천 나리의
피리마저 들었으면 평생 원이 없겠다고 한다니 주경이를 권하여 한번 평양을 보
내라, 그러면 내가 초향을 불러다가 계씨에게는 천침까지 시켜서 그 계집의 평
생 원을 풀어주겠노라는 웃음의 사연이 있었다. 이 협지 사연을 보고 단천령은
영변을 가볼 생각이 나서 속으로 벼르는 것이 한 달 두 달 밀려나오다가 왕세자
관례가 끝난 뒤에 비로소 묘향산 단풍을 구경하기 겸 초향의 가야고를 들으러
간다고 나귀 타고 하인 하나 데리고 영변길을 떠났었다. 단천령이 평양을 지날
때 유감사를 찾아보았는데 유감사가 초향을 평양으로 불러온다고 하는 것을 이
왕 묘향산을 가는 길이니 고만두라고 굳이 사양하고 평양서 바로 떠나려고 하였
더니, 유감사가 붙들고 놓지 아니하여 수일 동안 묵어서 구일날 금수산 모란봉
에서 단풍놀이까지 하고 구일 다음날 떠나서 사흘만에 영변을 득달하였다. 단
천령이 전례서의 섭사 다니는 토관의 집에 하처를 정하게 되었는데, 주인 섭사
가 처음에는 행색이 초초한 것을 보고 자기 방에서 내다보고만 있더니 나중에
서울 귀인인 줄 알고 하처방 앞에 와서 하정배로 문안을 드리었다. 단천령은 표
향산이 영변읍에서 백여 리 길인 줄 짐작 못하지 않건만 “묘향산이 예서 몇 린
가?“ 하고 묻는 것으로 말 시작을 내었다. “묘향산 구경 오셨습니까? 읍에서
일백 삼십 리나 됩니다.”“약산은 가깝다지?”“네, 동대는 바루 지척이올시다.
그러나 동대 구경은 꽃피는 봄철이 좋습니다.”“이 골에 가야금 잘하는 기생이
있다지?”“있다뿐입니까. 여럿이올시다.”“가야금 잘하는 기생이 하나 있다던
데.”“아마 초향이 소문을 들으셨나 보오이다. 음률에 밝으시기루 유명한
서울 양반 한 분께서 올 삼월에 평양감영에 오셔서 평안도 기생들을 취재를 보
이셨는데 그때 칭찬받은 기생이 그 여러 총중에 초향이 하나뿐이었답니다. 그년
이 그렇게 앙똥하구 방자합니다. 불러서는 안 옵지요만 그년의 집에를 뫼시구
가면 가야고를 한번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것두 여느 사람이 가서는 안됩니다.
일껀 저 혼자 뜯다가두 손님이 가면 집어치우구 뜯지 않습니다.“ ”제가 막이
하향 천기루 그렇게 방자하구 볼기를 안 맞을까?“ ”왜 안 맞겠습니까. 우선
이번 사또께서 수청들라시는데 거역하다가 볼기를 두어 차례 톡톡히 맞았습니
다. 그년이 가야고만 잘뜯지 인물은 그리 출중나지 못한 까닭에 볼기 두어 차례
루 용서를 받았습지요. 만일 인물이 사또 눈에 들었더면 그년이 목숨이 붙어있
구서야 수청 안 들구 배기겠습니까.“ ”그년의 재주란 가야금뿐인가?“ ”시조
를 곧잘 지어서 부릅니다.“ 시조를 제가 짓는단 말이지?” “녜, 지어두 당장
앉은 자리에서 지어 부르기를 곧잘 합니다.” “방자한 것이 병통일는지 몰르나
재주 있는 기집일세그려.” “그년의 지은 시조 하나 들어보시렵니까.” 창 밖
에 오동나무 까막가치 집이 되니 거문고 만들어서 예 곡조나 올려과저 어드메
봉이 황 찾아 홀로 울고 예나뇨. 이 시조 하나만 들으셔두 그년이 얼마나 앙똥
하구 방자한 걸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년의 집은 어딘가?“ ”동문안이
올시다.“ ”동문안이 여기서 초간한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들었네. 그런데 내가 점심을 설치구 와서 시장하니 저녁을 좀 일찍
해줄 수 있겠나?“ ”녜, 곧 해 드리두룩 하겠습니다.“ 주인이 밖으로 나간 뒤
에 단천령은 초향이가 지음을 하나 못하나 한번 시험하여 보려고 궁리하였다.
저녁은 재촉한 보람이 있어서 밥상을 일찍 들어왔다. 단천령이 밥을 먹고 상을
물린 뒤 주인을 불러서 ”내가 어떤 사람을 찾아보러 갈 텐데 밤에 늦게 올는지
두 모르구 또 늦으면 자구 올는지두 모르니 기다리지 말게.“ 하고 말을 일렀
다.. ”삽작문은 닫아걸지 않구 지쳐 둘 테니 혹 늦게 오시거든 그대구 밀어 여
십시오.“ ”지쳐두지 말구 닫아 걸게. 내가 와서 들어올 수 없으면 열어 달라구
소리함세.“ ”흔히 지쳐만 둡니다.“ ”나 위해서 지쳐 둘 건 없단 말일세. 그
러구 내가 자네에게 청할 일이 한 가지 있네.“ ”무엇입니까?“ ”내가 쓸데가
있으니 헌 갓하구 헌 두루마기를 좀 얻어주게.“ ”그건 무엇에 쓰실랍니까?“
”쓰는 데는 나중에 말함세.“ ”갓이구 두루마기구 헌 걸수룩 좋습니까?“ 주
인이 물으니 단천령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주인이 나가서 부서진 제량갓과 때묻
은 두루마기를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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