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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9권 (5)

카지모도 2023. 8. 5.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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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천령이 훌륭한 창의를 벗고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입고 통량갓과 탕건과 망건을

벗고 탈망한 헌 제량갓만 쓰니 의복이 날개란 말이 빈말이 아니어서 청수한 얼굴까지

갑자기 틀려 보이었다.

단천령이 구지레하게 차리고 하인도 안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주인은 속으로 ‘저

양반이 어디 가서 암행어사질을 할라나.’ 하고 생각하였다. 단천령이 하처에서 나설 때 햇발

이 다 빠지지 않았었는데, 동문안 초향이의 집을 물어서 찾아오는 동안에 벌써

땅거미 다 되어서 저녁 연기 잠긴 속에 달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싸리문 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안방에는 불이 켜 있으나, 불 있는 안방과 불 없는 건넌

방이 다같이 조용하여 마치 사람 없는 집과 같았다. 주인을 서너 번이나 연거푸

부른 뒤에 ”순아, 밖에 누가 오셨나 부다. 나가 봐라.“ 여편네의 곱지 않은 말

소리가 안방에서 나더니 불 없는 건넌방에서 계집아이년 하나가 나와서 싸리문

뒤에 와서 엉성한 바자 틈으로 내다보녀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나가는 손이 하룻밤 자자구 왔다.“ ”우리 집에는 손님을 치지 않아요.“

”잘 데 없는 손이 하룻밤 재워 달라구 왔어.“ ”글쎄, 손님을 재우지 않아요.

“ ”네가 이 집 주인이냐?“ ”아니오.“ ”그럼 들어가서 주인께 말씀이나 전

할 것이지 네가 주제넘게 재운다 못 재운다 어 맨망스러운 년이로군.“ 하고 아

이년을 꾸짖을 때, 안방문이 열리더니 늙은 여편네 하나가 마당으로 내려왔다.

”웬 양반이오?“ 하고 묻는 말소리로 아이년을 불러 내보내던 사람인 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과객인데 하룻밤 자구 가자구 왔소.“ ”우리 집에선

과객을 재우지 않소.“ ”과객 재우는 집이 어디 따루 있소?“ ”잔소리 말구

얼른 다른 데나 가보우.“ ”나는 과객질하는 법이 여느 과객과 다르우.“ ”다

른 게 무어요? 모지라진 게요.“ ”내가 과객질 십 년에 어느 집에든지 가서 한

번 자자구 청한 뒤에는 갖은 구박을 다 받더라두 그 집에서 잤지, 다른 집으루

옮겨 가 본 일이 없소. 이법을 내가 과객질 처음 나설 때 작정해 가

지구 십 년 동안 변치 않구 지켜 내려오는 것인데 어떻게 다른 집으루 가겠소.

“ ”임자의 작정한 법 임자나 알 게지 우리가 알 까닭이 무어요?“ ”그러니

다른 데루 가란 말은 마시우.“ ”첫째 우리 집에는 손님 재울 방이 없소.“ ”

방이 없으면 봉당두 좋구 헛간두 좋소. 한뎃잠은 십 년 동안에 많이 자봤으니

염려 마시우.“ ”우리 집은 여편네들만 사는 집이라 외간 남자를 봉당 헛간에

두 재울 수가 없소.“ ”삽작 안은 내근하다면 삽작 밖에서라두 자구 갑시다.“

”그건 맘대루 하구려.“ ”여기 바깥마당에서 자구 갈 테니 깔구 덮을 것이나

좀 빌려주시우. 개가 아닌 바에 맨땅에서야 잘 수 있소.“ ”깔구 덮을 게 무어

요? 원앙금침 잣벼개 말이오?“ ”원앙금침이면 더욱 좋구 그만 못한 객침이라

두 좋소.“ ”미안하지만 우리 집에는 객침이 없어 못 빌리겠소.“ ”가을밤 찬

이슬을 맞구 밖에서 자라며 객침 하나 빌려주지 않는 그런 인심이 어디 있단 말

이오?“ ”누가 여기서 자랍디까. 다른 데루 가지.“ ”다른 데루 가란 말은 안

될 말이구 객침이 없으면 멍석이라두 한 닢 빌려주우.“ ”멍석을 빌렸다가 말

아서 걸머지구 가면 어떻게 하게.“ ”여보, 내가 멍석 도적이오? 그게 무슨 소

리요!“ 늙은 여편네가 혼잣말로 ”마당에서 잔다구 멍석 빌려 달라는 과객은

생전 처음 보아.“ 하고 지껄이더니 얼마만에 헌 멍석 한 닢을 아이년과 마주

들고 삽작 밖으로 나왔다. ”무거운 걸 들어다 주는데 가만히 보구 섰소? 어서

와 받으우.“ ”거기 내던져 두면 내가 나중에 갖다 깔구 자리다.“ 늙은 여편네

가 홧증난 말소리로 아이년더러 ”여기 놔라.“ 말하고 싸리문 바로 앞에 멍석

을 내려놓았다. ”끼니때가 지났는데 군조석을 시키기가 미안해서 저녁은 굶어

자니 내일 아침 한 끼 잘해 주시우.“ ”녜, 진수성찬으루 아침 진지를 해 드리

오리다.“ 늙은 여편네가 비꼬아서 대답한 뒤 싸리문을 닫아 거는데 한동안 지

체하고 아이년을 앞세우고 들어갔다. 초향이의 집이 뒤는 바로 자그마한 동산이

요, 앞은 훨씬 나가서 행길이요, 오른편은 뒷산에서 뻗어내려온 언덕인데 언덕

밑에 샘이 박히고 왼편은 김장 배추를 심은 채마전인데 채마전 지나서 남의 집

이 있고 언덕과 채마전 사이의 바깥마당이 멍석 여남은 닢 깔고 넉넉히 되는데,

마당가에는 실도랑이 나고 도랑가에는 낙엽된 수양버들 서너 주가 띄엄띄엄 섰

다. 영변 도호부 성중이건만 자리가 궁벽하여 촌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천령이

헌 멍석을 대강 떨어서 넓은 마당 한중간에 갖다 깔고 앉았다. 품에 지니고 온

학경골 피리를 손에 내들고 만지면서 ‘초향이가 과연 지음하는 기집이면 내 피

리 소리를 듣구 안 쫓아나올 리 없으렷다’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학경골 피리

란 두루미 다리뼈로 만든 피리다. 단천령 집의 기르는 두루미가 개에게 물려죽

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단천령이 두루미 다리뼈로 피리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

하고 시험조로 만들어 본 것이 뜻밖에 일품으로 좋았다. 채는 좀 짧으나 소리는

제법 크게나고 소리의 울리는 맛이 대피리와 달라서 맑고도 가볍지 않고 강하되

새되지 않았다. 단천령은 그 이후로 줄곧 학경골 피리만 불고 대피리는 별로 불

지 아니하였다. 학경골 피리를 여남은 개 좋이 장만하였는데, 이번에 가지고 온

것이 그중에 소리 제일 잘 나는 것이었다. 단천령이 곧 초향이를 불러낼 생각으

로 피리를 다시 품에 넣고 일어나 도랑가에 가서 갓을 벗어 버들가지에 매어달

고 베개삼아 벨 만한 돌 하나를 들고 왔다. 찬 이슬이 내리는데 덮으려고 멍석

을 이불 개키듯 세골접이로 접치고 찬 돌을 그대로 베지 않으려고 멍석 밑에다

가 놓고, 그리고 또 두루마기를 벗어 착착 접어서 덧베개로 놓은 뒤에 마치 통

이불 속에 들어가듯 멍석 속에 들어가서 목 위만 내놓고 번듯이 누웠다. 달은

하늘 복판에 가까이 와서 있고 흰구름장은 온하늘에 군데 군데 떠 있었다. 구름

이 밝은 빛 가리는 것을 달은 좋게 여기지 아니하여 여러 구름장들을 한달음에

뚫고 나가려고 달음질을 치는 것같이 보이었다. 달이 구름장에 들어가면 희미하

고 나오면 환하여 희미하고 환한 것이 연해 섞바뀌어 변하였다. 단천령이 한동

안 달을 치어보다가 잠을 청하여 보려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멍석이 아래서 배

기고 위어서 누르고 또 벤 것이 거북하여 밤새도록 잠을 청하여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가을 달밤의 임자는 벌레들이라 샘 둥천에도 벌레 소리, 채마전 머

리에도 벌레 소리, 도랑가와 싸리문 안에도 벌레 소리, 사방의 벌레 소리 요란한

중에 별안간 가야금 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천령은 눈을 한번 떴다가 다

시 감고 귀를 기울였다. 줄 고르는 것이 끝나면 바로 계면조가 시작되었다. 가야

금 수단에 조화가 붙어서 사람의 말할 수 없는 애틋한 심정을 가야금 시켜 대

신 말하는 듯하였다. 백낙천을 울리던 심양강 위의 비파 소리가 저처럼 애원하

였을까, 단천령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가야금 소리를 한참 듣다가 멍석 밖에 반몸

을 일으키고 앉아서 피리를 불어서 가야금 곡조를 맞추었다. 피리 소리와 가야

금 소리가 한참 서로 어울리는 중에 가야금 소리가 똑 그치어서 피리도 그치었

더니 얼마 아니 있다 가야금 소리가 다시 나서 피리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곡조가 다 끝나기 전에 가야금 소리가 또다시 그치고 이번에는 방문 여닫는 소

리가 나는 것 같고 또 사람의 신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단천령은 초향이가

피리 소리를 듣고 쫓아나오는 줄로 짐작하여 더 농락하여 볼 생각으로 얼른 피

리를 품에 품고 멍석 속에 얼굴까지 파묻고 드러누웠다. 삽작문 여는 소리가 나

고 짝짝 신발 끄는 소리가 바로 머리맡에 와서 그치고 한참 만에 ”손님?“ 하

고 부르는 것은 멍석 빌려주던 늙은 여편네의 목소리였다. 단천령이 자는 체하

고 대답을 아니하니 늙은 여편네가 연거푸 서너번 손님을 부르다가 멍석위에 손

을 대고 흔들었다. 단천령이 더는 자는 체할 수가 없어서 자다가 놀라서 깨는

것같이 엉 소리를 지르고 멍석 밖으로 반몸을 일으키며 곧 늙은 여편네더러 ”

웬일이오? 밤중에 멍석을 쓸 일이 있소?“ 하고 물었다. ”손님, 지금 세피리를

부셨소?“ ”세피리요? 아니오.“ ”지금 여기서 누가 부는 것 듣지두 못했소?

“ ”나는 자느라고 못 들었소.“ 단천령이 생파리같이 잡아떼니 늙은 여편네는

입속말로 ”별 이상스러운 일두 다 많아.“ 하고 혼자 중얼거린 뒤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좋이 지난 뒤에 가야금 소리가 다시 나는데 곡조도 화평한 평

조거니와 청이 먼저보다 훨씬 낮았다. 가야금으로 피리를 자아내서 들으려고 줄

소리를 짐짓 중이는 것이 환하였다. 단천령이 가야금을 맞추어서 피리를 불긴

불되 멀리서 부는 것같이 들리도록 역시 청을 낮추었다. 소리만 다 내지 않지

재주는 다내서 빠른 듯 가야금을 싸주고 느린 듯 가야금을 돋워 주되 장단 한

점 빈 구석이 없었다. 가야금 소리 그칠 듯 그치지 않고 곡조를 다 마치었다. 곡

조가 끈난 뒤 단천령은 처음 누울 때와 같이 얼굴만 멍석 밖에 내놓고 드러누워

서 안에서 무슨 기척이 나려니 마음으로 기다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싸리

문께 가벼운 신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단천령이 머리를 잠깐 치어드는 듯하

고 바라보니 아이년이 앞서고 그 뒤에 젊은 계집이 따라 나오는데, 키는 크도

작도 않고 얼굴은 달덩이 같고 먼광이 나서 싸리문 앞에 달빛은 더 환한 것 같

았다. 이 계집이 초향인 것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단천령이 자는 체하려

느니보다도 바라보고 누워 있기 겸연한 생각이 나서 눈을 감았다. 신발 소리들

이 멍석 옆에까지 와서 그치고 소곤소곤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나더

니 아이년이 새된 목소리로 ”나리.“ 하고 불렀다. ‘탕건 안쓴 사람을 나리라

고 부르게 하니 피리 소리 듣고 짐작이 난 것이로군.’ 단천령은 속으로 생각하

며 눈을 떠보고 부지런히 일어 앉았다. ”네가 나를 깨웠느냐?“ ”녜, 나리 일

어나세요.“ ”나리가 웬 나리냐?“ ”우리 아씨께서 단천 영감 나리신 줄 다

아셨세요.“ 아이년 말끝에 ”존전에서 아씨가 무어냐!“ ”아씨는 아씨거니와

영감 나리가 무어냐?“ 하고 단천령은 껄껄 웃었다. ”아무리 모르고 한 일이라

도 찬이슬 내리는데 한데 기시게 해서 죄만합니다. 어서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

가시지요.“내 행식이 고만 탄로난 모양일세그려.” 단천령이 초향이를 보고 한

번 웃은 뒤 멍석자리에서 일어나서 툭툭 떨고 안으로 따라들어오는데, 베었던

두루마기와 매어단 갓은 아이년더러 가지고 들어오라고 일렀다. 안방에 들어와

서 단천령이 먼저 앉은 뒤 초향이는 한 팔 짚고 절하고 옆에 와 앉아서 말끄러

미 얼굴만 치어다보고 말은 하지 아니하였다. “맨상투바람에 꼴이 보기 우스운

가?” 단천령이 당치 않은 말을 물어서 초향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꿈

에라도 한번 보입고 싶던 나리께서 제 집에는 오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하고 말하는데, 정이 말 밖에 넘치는 것 같았다. “내가 이번에 겉

으루는 묘향산 구경 온다구 하구 실상은 자네의 가야금을 들으러 왔네.” “여

기를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다 저녁때 들어왔네.” “들어오시는 길로 바

로 제 집을 찾아오셨습니까?” “전례서 섭사 다니는 사람의 집에 사처는 정했

네.” “그런데 의관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길어서 봉적하셨습니까?” “아니 자

네게 와서 과객 행세하려구 폐포파립을 빌려가지구 왔네.” “나리께서 저를 농

락하셨습니다그려. 그러나 제가 만일 가야고 고만두고 일찍 잤던들 하룻밤 한데

서 떠실 뻔하셨지요?” “내가 한번 피리만 불면 자네가 자다가라두 쫓아나올

줄 믿구있었는걸.” “처음 계면조 부실 때는 본 사람이 없어서 어리석은 소견에 혹

신선이 내려와서 저를 희롱하나 생각했었지만, 나중 평조 부실 때는 아이년이 울 틈으

로 망도 보았고 또 제 맘에 짐작도 나서 나리께서 오신 줄 알았습니다.” 이런

수작들을 할 때, 늙은 여편네가 건넌방에서 건너와서 단천령을 보고 “초향이의

어미올시다.” 하고 인사한 뒤 초향이더러 “나 좀 보자.” 하고 모녀 같이 마루

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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