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향이가 처음에 향산 구경 올 것을 작정할 때 저의 삼종조가 향산 중으로 당
호가 수월당인데, 수월당 노장스님이라고 하면 향산 안에서 모를 리 없다고 하
더니 단천령이 보현사에서 젊은 중 하나에게 물어본즉 과연 잘 알아서 그 노장
이 십여 년전에는 큰절 주지로 있었으나 지금은 큰절의 번뇨한 것을 피하여 내
원암에 가서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향산에 들어오던 이튿날 단천령이 초향이와
같이 내원암에 와서 그 노장을 만나보니 나이 근 팔십 된 늙은이가 근력이 정정
하여 기거동작이 젊은 사람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초향이는 내원암에 머물러
두고 단천령은 그 노장의 상좌 둘에서 큰 상좌를 지로승삼아 데리고 고적 구경
을 나섰다. 쓰러져 가는 암자와 다 쓰러진 암자가 도처에 눈에 뜨이어서 단천령
이 상좌중더러 “암자들을 퇴락하게 내버려두구 중수 않는 것이 웬일이냐?”하
고 물으니 “와서 있을 중두 없는데 물역을 들여서 중수해 놓으면 무어합니까?
”하고 상좌중은 대답하였다.
“보현사에 매인 암자가 수에 모두 몇이나 되느냐?” “예전부터 전해 오는
말은 묘향산 안에 팔만구 암자라구 합니다.” “예전 팔만구 암자가 지금 몇이
나 남았느냐?” “지금두 퍽 많습니다.” 현재 암자 수는 상좌중이 똑똑히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삼성대를 와서 보고 앉아 쉴 만한 자리를 살피는 중에 단천령이 한 곳에 와서
깨어진 기왓장과 삭은 재목이 풀 속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두 전에
암자가 있었구나.” “녜. 여기 있던 암자는 이름이 삼성암인데 전에 이인이 한
분 와서 기셨답니다.” “전이라니 팔만구 암자 있을 때 말이냐?” “아니올시
다. 몇십 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 이인이 지금은 어디 있느냐?” “돌아가
셨습니다.” “그래 이인을 너두 봤느냐?” “소승은 세상에 나기두 전에 돌아
가서 못 뵈었습지요만, 소승의 스님은 이인과 친하게 지냈답니다.” “무엇이 여
느 사람과 달라서 이인 소리를 들었다더냐?” “도술이 갸륵하더랍니다.” “갸
륵한 도술을 어디 들은 대루 이야기 좀 해봐라.” “이인의 일을 스님이 잘 아
니 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삼성대에서 내원암으로 오니 해가 거의 승석때가 다 되었었다. 구경을 따라다
니던 하인과 마부는 전날 묵던 큰절에 내려보내서 묵게 하고 단천령은 초향이과
함께 내원암에서 저녁 대접을 받고 자게 되었는데 석반들을 먹고 나서 노장과
셋이 솔밭같이 앉아서 한담할 때 단천령이 삼성암 이인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전에 삼성암에 있던 이인은 중이로되 법호두 없구, 당호두 없구, 속인 적
성명 이천년이란 것두 역시 본성명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연산주 임술년 소승
의 나이 스물한 살 적일입니다. 이 해 오월에 소승의 은사 스님이 우연히 난 병
환이 대단 위중해서 소승이 영변읍내루 의원을 청하러 가게 되었는데 해는 길지
만 읍내를 당일에 들어가자면 첫새벽 떠나야 하는 까닭에 잔입으루 절에서 떠나
서 한 삼십 리 가량 새벽길을 걷구, 가지구 가던 백설기루 아침 요기를 하려구
샘물을 찾아갔더니, 중 하나가 샘 둥천에 앉아 있다가 소승을 보구 너 인제 오
느냐 하구 마치 소승을 기다리구 있던 사람같이 말을 합디다. 머리를 깍은 것은
중이나 수염은 속인같이 길게 기르구 꿈에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말
을 하니 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두 괴상해서 소승은 대답두 못하구 뻔히 보구
만 있었습니다. 그 중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네가 지금 영변읍내 의원 아무개를
청하러 가지 않느냐 하구 의원의 성명까지 알구 말합디다. 대체 누구신데 어떻
게 그렇게 소상히 아시느냐구 소승이 물었더니, 그 중이 묻는 말은 대답 않구
내가 지금 너의 스님의 병을 봐주러 가는 길이니 나하구 같이 가자. 영변읍내
의원은 가서 청해야 오지두 못하구 오더라두 그 의술 가지구는 병을 고치지 못
한다 하구 말합디다. 그 중의 외모만 보더라두 허튼말을 할 사람 같지 않아서
소승이 그 중을 데리구 도루 절루 왔었습니다. 그 중이 와서 스님의 맥을 보구
약을 쓰는데 첫번 약 서너 첩에 대세를 돌리구 나중 약 한 제에 그 위중하던 병
환이 운권청천이 되었었습니다. 소승의 스님두 그 중의 내력을 몰라서 여러 가
지루 물어봤지만 그 중이 차차 알라구 하구 잘 말하지 않습디다. 하여튼 중병을
고쳐 준 은인이니까 간단 말하지 않는 것을 가라구 할 수야 있습니까. 그래서
한 달 두 달 같이 지내는 중에 스님이 그 중에 어떻게 반했던지 다른 데루 간다
구 할까 봐 겁을 내게 되었었습니다. 대소사 무슨 일이든지 스님이 그 중의 훈
수를 받게 되었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일이 여의하게 되구 그 말을 안 들으
면 일이 낭패보게 되니 그런 훈수를 누가 안 받겠습니까. 일 년 남짓 지난 뒤에
그 중이 강서 구룡산으로 간다구 하는 것을 스님이 향산에 있으라구 굳이 붙들
어놓구 그의 소원대루 삼성암에 혼자 와서 있게 하구 지필묵 가지구 책 저술하
구 삼십여년 동안 있다가 소승의 스님이 열반에 드신 뒤에 그 중은 처음에 간다
구 하던 강서 구룡산으루 갔는데 나중에 들으니 가던 이듬해 기해년 그곳에서
이 세상을 떠났답디다. 그 중이 여기 있는 동안에 속인 제자 두 사람을 거두어
두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그 스승만 못지않은 이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내
력은 소승이 잘 압니다. 그 사람은 본래 함흥 백정 양주팔인데 이 장자곤 이찬
성의 처삼촌이구 나중 동소문 안에 무명씨 갖바치루 조 광자조 조대사헌의 친구
이었답니다. 그 사람이 기해년에 강서 구룡산에서 자기 스승의 종신하구 그 길
루 여기 와서 소승의 제자루 삭발했었습니다. 소승에게서 얼마 동안 있다가 경
산으로 간다구 가더니 죽산 칠장사에 가서 있었다는데 승속간에 생불 대접을 받
다가 사오 년 전에 서천극락으루 갔답디다. 지금 세상에서 해서 대적이라구 떠
드는 임꺽정이가 그 사람의 제자랍디다. 임꺽정이가 그 사람의 재주를 다 배웠
으면 호풍환우두 할는지 모르구 둔갑장신두 할는지 모르구 백리 천리 밖 일두
앉아서 환히 내다볼는지 모릅니다. ” 노장의 긴 이야기가 끝난 뒤에 단천령은
노장을 보고 “그런 줄 몰랐더니 대사가 도둑놈의 대선생이군. ” 하고 웃음의
소리를 하였다. 초향이가 단천령을 보고 “임꺽정이 있는 데가 청석골이라니 청
석골이 어딘가요? ” 하고 물으니 단천령은 노장에게 웃음의 소리 하던 심경이
아직 변치 아니하여 “그건 왜 묻나. 꺽정이를 찾아보러 갈 생각이 있어? ” 하
고 실없은 말을 하였다. “내가 왜 도둑놈을 찾아보러 다니는 사람인가요? ”
“도둑놈 찾아보는 사람이 어디 따루 있나. 누구든지 찾아보면 찾아보는 게지.
” “나리도 꺽정이를 더러 찾아보셨습니까? ” “아직 못 찾아봤네. 자네 앙갚
음을 해서 속이 시원한가? ” “말씀을 함부루 해서 죄송합니다. ” 초향이의
사과하는 말을 단천령은 적이 웃으며 듣고 나서 “꺽정이의 소문이 굉장한 건
알 수 있네. 영변 구석에 있는 자네가 다 청석골 이름을 아니. ” 하고 말끝을
조금 달리 돌리었다. “우리 골 사또께서 서울로 올려보내시는 봉물을 두 번이
나 연거푸 꺽정이에게 뺏겼답니다. 그래서 청석골 이름을 들었습니다. ” 하고
초향이가 말한 뒤에 노장이 단천령을 보고 “꺽정이 까닭으루 서관대로가 막히
다시피 될 때가 많다지요? ” 하고 물었다. “아주 막히기야 할까만 도로에 작
경이 부절히 있으니까 막힌단 소리두 날 만하지. ” “꺽정이가 평안도루 온단 소문을 혹
들으셨습니까? ” “그놈이 잡힐 듯하면 강원도루두 내빼구 평안도루두 내뺀다
구 말들 하드군. ” “일시 피신하려 오는 게 아니라 아주 붙박여 있으러 온단
소문을 혹 들으셨느냔 말씀이올시다. ” “별반 그런 소문은 못 들었어, ” “꺽
정이가 아마 평안도루 올 모양인갑디다. ” “대사가 무슨 짐작이 있나? ” “
짐작으루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천 향풍산 정진사 중 하나가 향일에 와서 이
야기를 하는데 꺽정이가 성천, 양덕 접계 두메 속에 와서 적굴을 만든단 소문이
있어서 그 중이 일부러 무인지경 산속을 찾아들어가 본즉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새루 지어놨더랍니다. 그놈이 필경 평안도루 옮겨올라기에 성천 산중에 와서 그
런 큰집을 지었을 것 아닙니까. ” “꺽정이가 청석골을 버리구 성천 두메구석
으루 올 리가 있다구. ” “그 중이 꺽정이를 먼빛으루 보기까지 했다든걸요. ”
“그것이 어느 달 일이라든가? ” “지난달이랍니다. ” “그 중이 절에서 추석
을 쇠구 나섰다니까 아마 이십일경이겠지요. ” “그게 꺽정이가 아니구 다른
도둑놈일세. 꺽정이는 지난달 이십일경에 서울 장통방에 와 파묻혀 있다가 잡힐
뻔했다는데 성천 와서 집 역사를 시키다니 날아다닌대두 안될 일 아닌가. ” “
그놈이 분신술을 하는지두 모르지요. ” “꺽정이가 이인의 제자란 말은 오늘
저녁에 대사에게 처음 들었지만 제가 만일 앞일을 미리 안다면 기집 셋을 잡히
게 가만 둘 리가 없구, 둔갑장신을 한다면 밤중에 오간수 구녕으루 도망할 리가
없을 것일세. 장통방에서 실포한 때 꺽정이는 오간수 구녕으루 빠져 내빼구 서
울 안에 있던 꺽정이 기집 셋만 잡혔다네. 그러니까 꺽정이가 다른 재주는 가졌
는지 마치 몰라두 분신하는 재주를 가진 것만은 나두 잘 아네. ” “꺽정이가
분신술 부리는 걸 보신 일이 있습니까? ” “내 눈으루 본 일은 없지만 본 이나
진배없지. 꺽정이가 지금 조선팔도에 없는 데가 없으니 분신 안 하구야 그렇게
도처에 있을 수가 있나. 그런데 분신하는 방법은 별게 아니구 다른 도둑놈들에
게 이름을 빌려주는 거야. ” 하고 단천령이 웃으니 “꺽정이 같은 큰 도적은
좀도적들에게 이름을 도적맞는 일두 더러 있겠지요. ” 하고 노장도 웃었다. 밤
에 잘 때 단천령과 노장과 노장의 상좌들은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초향이만 혼자
딴 방에서 자게 되었다. 초향이가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우수수 하는 바람
소리에 공연히 처량한 생각이 나서 잠을 못 이루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였다.
우수수 소리는 그치고 우 하는 소리가 멀리 들리다가 차차로 가까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어찌 들으면 급한 비가 몰려오는 듯하나 남창에 달이 밝으니 빗소리
가 아니겠고 또 어찌 들으면 큰 물결 밀려오는 것 같으나 첩첩한 산중에 물결소
리 날 까닭이 없다. 높은 산 위에서 바람이 불어내려오거니 짐작하고 듣는 중에
용에게는 구름이 따르고 범에게는 바람이 따른단 말이 문득 생각나며 곧 범이
올까 무서워서 여럿 자는 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변스럽에 여길
듯 고만두었다. 방 뒤에서 별안간 버스럭 소리가 났다. 범이 와서 뒷벽을 발로
허비는 것만 같아서 몸이 으쓱하여졌다. 버스럭 소리도 수상한데다가 벽의 흙
떨어지는 소리가 완연히 들리니 범이 아니면 무엇이랴. 쥐랴. 쥐장난 같으면 우
르르 몰려다니는 소리도 나고 찍찍 소리도 날 터인데 한결같이 버스럭 소리만
날 뿐이고 버스럭 소리는 벽을 허비는 것이 흙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범인 모양이다. 계집 사람이 암자에 와서 자는 것을 산신령이
부정하게 여겨서 잡아먹으라고 밤을 보냈는가 보다. 인제는 변스럽게 여기거나
말거나 여럿 자는 방으로 가려고 일어 앉기까지 하였으나 방문을 열고 나갈 수
가 없어서 방에 들어와서 잡아먹으려거든 잡아먹어라 마음을 먹고 도로 드러 눕
는데 처니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몸을 한줌 되도록 오그렸다. 팔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덜덜덜 떨리었다. 이를 악물고 떨지 않으려고 하나 점점 더
떨리어서 오장육부가 다 떨리었다. 얼마를 떨었든지 떨다 떨다 지쳐서 잠이 들
었다가 새벽 종소리에 놀라 깨었다. 툇마루 구석 신중단 앞에서 예불하는 소리
가 나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 앉아 방문을 조금 뻐기고 내다본즉 지새는 달빛 속
에 흰 장삼 입은 상좌가 너푼너푼 절을 하고 있었다. 범이 중으로 변화한다는
옛날 이야기가 생각나서 뻐기었던 방문을 얼른 도로 꼭 닫았다. 예불이 끝나고
툇마루에 발소리가 날 때 참말 상좌인가 아닌가 시험하려고 “스님, 손님 다 일
어나셨소? ” 하고 물어보니 “녜, 다 일어나셨습니다. ”하는 대답이 작은 상좌
의 목소리가 분명하였다. 초향이가 비로소 마음이 놓이어서 여럿 있는 방
으로 건너가는데 그래도 툇마루와 마루를 지나갈 때 마당 쪽을 바라보며 바쁜
걸음을 걸었다. “벌써 일어났느냐? ” 노장이 묻고 “잘 잤나? ” 단천령이 묻
는 것을 초향이는 대답도 변변히 아니하고 노장을 보고 “밤에 무어 오지 않았
세요? ” 하고 물었더니 “오긴 무에 온단 말이냐. ” 노장의 대답이 하도 무뚝
뚝하여 밤 지난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았다. 구경을 다하는 동안 자기 암자에서
묵으라고 노장이 말하고 단천령은 노장의 말을 좇아서 일이일간 더 묵으려고 하
는데 초향이가 노장과 단천령을 번갈아 보며 “저는 오늘 나가겠세요. ” 하고
말하여 “자네 혼자 먼저 가겠단 말인가. 같이 왔다가 그런 법이 어디 있나? ”
하고 단천령이 책을 잡았다. “나리께서 구경을 더 하신다면 저 혼자 먼저 가겠
세요. ” “갑자기 웬일인가? ” “산에 다니시는데 따라다닐 수도 없고 혼자
암자에 떨어져 있기도 싫고 그래서 먼저 가겠단 말씀입니다. ” “그러면 같이
가자구 말을 해야 옳지 않은가. ” “그럼 같이 가세요. ”“엎드려 절 받길세그
려. 아무리나 그래 보세. ” 단천령은 묘향산을 다시 오기가 쉽지 못하여 이왕
온 길에 명승고적을 대강 고루 구경하고 갈 마음이 있었으나 초향이에게 끌려서
고만두고 가기로 하였다. 초향이가 단천령을 따라 묘향산에 간 동안에 영변 진
관에 매인 태천현감과 운산군수가 영변 와서 모이었었다. 을묘년에 호남에만 시
행한 제승방략의 분군법을 그 뒤에 각도에 다 시행하여 진관제도가 유명무실하
게 되었으나 영변은 다른 진관과 달라서 대도호부사가 병마절도사를 겸임하는
까닭에 진관에 매인 각읍 수령을 절제하는 것이 그전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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