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첫새벽에 서림이가 꺽정지의 얼룩말을 자견하여 타고 서울길을 떠났
다. 이 얼룩말은 꺽정이가 전 봉산군수 윤지숙이게서 뺏어온 것인데, 걸음을 잘
하여 겨울 짧은 해에도 일백이삼십 리 가기는 무난하였다. 서림이가 첫날 혜음
령에서 혜음령패의 괴수를 만나서 그 집에 가서 자고 다음날 아침때 좀 지나서
남대문밖 김치선이 객주에를 들어와서 뒤채의 조용한 방을 치우고 들어앉은 뒤,
주인 김선달과 포청에 갇힌 처남 빼내올 도리를 의논하였다. “좀스러운 야경벌
이하다가 잡혔으면 포청에서 두 달씩이나 가뒤둘 까닭이 있나요? 벌써 형조루
넘겨서 결말을 지었겠지. 오래 가둬 두는 내막을 먼저 알아봐아겠소.”“그래 나
두 그렇게 생각하우. 그런데 그걸 오늘 곧 알아볼 수가 있겠소?”“그렇게 빨리
알아보기는 좀 어려운걸요.”“내가 이번 길이 대단 총망해서 내일 아니면 모레
는 도루 갈 텐데 오늘 내일 양일간에 일이 포서만이라두 잡히는 걸 보구 갔으면
좋겠소.”“주선을 잘해서 일이 속히 되더라두 열흘이나 보름은 걸릴 텐데 이틀
동안에 어떻게 하겠소. 그건 안될 말씀이오.”“영부사나 정경부인의 허락만 맡
아놓으면 고만이니 이틀 동안에 그게 될 수 없겠소?”“영부사나 정경부인 귀에
말이 속히 들어가두룩 하자면 중비를 많이 써야 하구 영부사나 정경부인 입에서
허락이 당장 떨어지두룩 하자면 뇌물을 많이 바쳐야 하우.”“뇌물 중비 엄불려
서 대개 얼마 가량이나 들겠소?”“다다익선이지만 적어두 두자 상묵 이삼십 동
들 걸요.”“얼마가 들든지 드는 대루 김선달이 먼저 쓰구 나중 회계를 닦읍시
다.”“이십 동 잡구 절반은 내가 남의 것이라두 끌어댈 테니 절반은 달리 구처
해 보시우.”“나두 변통을 해보겠지만 김선달이 힘을 더 써주시우.”서림이가
한온이 부탁보다도 상목 변통할 일이 긴급하여 김선달과 대강 의논을 마친 뒤
곧 최서방을 찾아보러 문안으로 들어왔다.
서림이는 최서방의 집이 전날 한온이의 큰집 사랑 뒤 납작한 초가로 알고 찾
아가 본즉 뜻밖에 그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다. 들어 있는 사람의 말이 최
서방은 이달 초생에 수표교 천변으로 이사갔다고 하고 이사간 집 좌향을 캐어물
어서 대강 짐작한 뒤 다시 수표교 천변으로 찾아오면서 ‘옳지, 이자가 저의 주
인에게 보낼 셈을 보내지 않구 그걸루 이사를 한 게다. 사람이 영리하다더니 영
리한 값을 하는 게다.’하고 서림이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최서방의 새 집은 훌
륭한 와가이었다. 서림이가 문밖에서 주인을 찾으니 최서방이 동저고리 바람으
로 나오는데 명주 바지저고리가 거상에 벗어져 보이었다. “이 집을 어떻게 찾
으셨소? 그전 집으루 가셨습디까?”“그랬소.”“어서 들어오시우.”최서방이 큰
방을 두고 큰방머리 조그만 방으로 서림이를 인도하며 “저 방은 되지 못한 걸
어질더분하게 벌여놔서.”하고 큰방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발명하듯 말하
였다.
최서방이 서림이와 같이 방에 들어왔다가 점심을 이르고 온다고 도로 나가려
고 하는 것을 서림이가 점심을 먹고 왔으니 고만두고 앉으라고 붙들어 앉히었
다. “언제 이사를 했소?”“인제 한 열흘밖에 안됐소.”“집이 훌륭하구려.”“
주인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이 저이 모일 처소가 적다구 추렴들을 내서 이 집을
사놓구 나더러 들랍디다. 이런 좋은 집에 든 것도 막비 주인의 덕이오.”“남소
문 안에 집이 여러 채라니 그 중에서 한 채 골라서 써두 좋지 않소?”“주인집
은 모두 속공됐지요.”“속공이 안된 집두 여러 채란 말을 들었는데.”“나중에
사출이 나서 죄다 속공되구 말았소. 생각하면 기가 막히우.”“내가 이번에 어디
가는 길에 서울을 잠깐 들리게 되었는데 한두령이 부탁하는 말이 있습디다.”“
추심하라신 셈 말씀이겠지요? 추심이 도무지 잘 안돼서 지금 속을 썩이는 중이
오.”“추심이 못 됐으면 못 됐다구 기별이라두 해달라구 합디다.”“추심이 당
초에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벌써 기별이라두 했겠지만 될 듯한 데가 많으니까 얼
른 수합해서 보내 드릴라구만 생각하구 기별두 못했소. 지금두 저 방에서 문서
조각을 벌여놓구 앉았었소.”“더러는 추심됐소?”“추심된 것두 있지요.”“그
럼 두자 상목 열 동만 나를 줄 수 있겠소? 주인의 빚 추심한 걸루 안 되면 나중
도중 셈으루 메꿔두 좋소.”“주인의 수표를 가지구 오셨소?”“수표는 안 가지
구 왔지만 염려 말구 내주우.”“염려야 무슨 염려요. 그렇지만 셈이란 건 그렇
지가 않아서 말씀이오,”“상목 열 동은 내가 받은 수표를 해주리다.”“언제쯤
쓰시겠소?”“오늘 쓰게 해줄 수 있겠소?”“오늘이오? 그건 좀 어렵겠는데 내
일 쓰시우.”“내일 식전에 쓰게 되겠소?”“오늘 밤에 주워 모아서 내일 식전
쓰시게 해보지요.”“나는 광주땅에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 곧 갈 텐데 상목은
내일 식전 와서 가져가두룩 일러두구 가겠소. 오는 사람이 엄외장의 상목 맡은
것을 내달라구 하거든 의심 말구 내주시우. 그러구 수표는 지금 써놓구 갈 테니
지필을 좀 빌려주우.”“광주땅에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이렇게 총총히 가실라
구 하시우?”“그 일은 나중 회로에 와서 이야기하리다.”“언제쯤 회정하시겠
소?”“이삼 일 후에 다시 오리다.”서림이는 최서방이 종시 못 미더워 보이어
서 자기의 행지를 이와 같이 기이고 이야기하였다. 최서방이 술 한잔 먹고 가라
고 붙드는 것을 서림이는 이삼 일 후에 와서 찾아 먹을 테니 아직 맡아두라고
실없은 말로 거절하고 최서방 집에서 바로 일어서 나왔다.
최서방이 천변에 나와 섰는데 광주땅에 간다고 말한 사람이 곧장 장통교 편으
로 올라올 수 없어서 서림이는 큰길로 휘돌아서 남대문 밖을 나가려고 수표교를
건너와서 베전병문을 향하고 나오는 중에, 대님 한 짝이 풀어져서 얼굴 가리었
던 모선을 접어서 소매에 넣고 풀어진 대님짝을 고쳐 맬 때 의복이 남루한 사람
하나가 앞에 와서 “언제 오셨습니까?”하고 인사하였다. 잘 아는 사람도 아닌
데 길에서 아는 체하는 것이 반갑지 아니하여 서림이가 인사 대답을 어물어물하
였더니 그 사람이 눈치를 알고 “저는 전에 남소문 안 사랑에서 심부름하던 사
람입니다.”하고 말한 다음데 “저의 젊은 주인이 안녕하십니까?”하고 한온이
의 안부를 물었다. 서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고하우.”하고 대답한 뒤 그제
는 인사성으로 “지금은 어데서 사우?”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손을 들어서 가
로 뚫린 사이 골목 안에 있는 움집을 가리키며 “저기 저 움퍼리가 제 집입니
다.”하고 대답하였다. “지내는 형편이 어려운 모양이구려.”“형편 여부가 없
습니다.”“최서방에겐 다니지 않소?”“최서방이오? 그놈은 말두 맙시오.”“최
서방하구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그놈하구 사이 좋을 까닭이 없지요. 주
인집에서 낙향한 뒤 그 놈의 행사를 보면 이 천기간에 용납할 수 없는 놈입니
다. 어디루 뫼시구 가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조용한 안침술집이 이
근처에 없소?”“왜 없어요? 골목 안에 조용한 집이 하나 있습니다.”“그럼, 그
리 가서 술 먹으며 이야기를 들읍시다.”“자, 그럼 가시지요.”하고 그 사람이
앞을 서서 인도하였다. 그 사람의 움집을 지나서 얼마 더 골목 안으로 들어오다
가 어떤 조그만 집의 지쳐놓은 일각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문간 흙바닥에는 트
레방석들이 놓이고 문간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청포 조각이 걸리었었다. 그
사람이 그중 정한 트레방석을 골라서 서림이를 앉힌 뒤 안을 향하고 “안주를
잘해서 술 한상 내보내시우.”하고 소리치고 서림이 앞에 와서 비슷 마주 앉았
다. 서림이가 최가의 행사를 알고 싶은 마음에 “내게 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
요? 정녕 최서방 이야기겠지.”하고 먼저 말을 자아내었다. “최가놈의 죄상을
제가 다 이야기할 테니 가서 젊은 주인께 이야길 좀 해주시오.”“이야기해야
할 일이면 하지 말래두 하지.”“그놈이 첨지 영감 손에서 잔뼈가 굵은 놈인데
그전 은혜 꼬물두 생각 않구 주인집을 인제는 더 볼 것이 없다구 막보구서 가지
루 해를 붙입니다. 그런 천하게 죽일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무슨 해를 어떻
게 붙인단 말이오?”“주인집에서 남 준 빚을 그놈이 다 받아먹구 주인이 맡겨
두구간 집이구 세간이구 그놈이 다 팔아먹었습니다.”“빚은 추심해서 주인에게
루 보낼 계구 집들은 다 속공됐다는데 최서방이 무얼 팔아먹었단 말이오?”“그
건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데 있던 집은 말 말구 남소문 안에 있던 집만 말
하더래두 속공된 건 다섯 채뿐이구 속공 안된건 삼곱절 열댓 채나 되었습니다.
그 집들을 그놈이 팔아먹는 통에 집 없는 거지가 여럿 났습니다. 저두 남소문
안 주인집에 들어있다가 집이 팔려서 쫓겨난 놈이올시다. 그러구 세간두 미리
돌려놓은 것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도깨그릇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죄다 그
놈의 아가리루 들어갔습니다.”“집하구 세간하구 팔았으면 빚 추심한 것하구
함께 주인에게루 보내겠지.”“그놈두 말은 보낸다지만 보내긴 무얼 보내요? 좋
은 집 사들구 기생 외입하고 포교 대접하구 흥청망청 쓰는 놈이 꿈에나 보내겠
습니다.”“그 사람의 새 집은 그 전 남소문 안 사람들이 모일 처소가 없어서
추렴내서 사주었다며?”“그놈이 그런 말을 합디까? 터무니없는 멀쩡한 거짓말
입니다.”“그런 줄 몰랐더니 꽤 맹랑한 사람이구려.”“그놈이 기생을 상관해두
하필 젊은 주인하구 좋게 지내던 소월향이란 년을 상관해 가지구 지금 죽자살자
한답니다. 거러구......”이때 술상이 안에서 나와서 그 사람의 말은 잠시 중단되
었다.
서림이가 그 사람의 부어놓은 첫잔을 먼저 먹고 다음 잔을 부어서 그 사람을
준 뒤 한 차례 두 차례 술잔을 연방 돌리는 중에 “성이나 서루 알구 지내야지.
성이 무어요?”하고 비로소 그 사람의 성을 물어보았다.“제 성은 권가 올시다.
”“권서방이야? 내 성은 아우?”“녜, 압니다.”“내가 가서 주인하구 이야기할
때 권서방이라구 말하면 주인이 알겠소?”“사랑에 있던 권가라구 말씀해두 아
시겠지만 제 이름이 개미치니 개미치라구 말씀합시오.”“최서방이 주인의 대리
잘 보는 걸 들은 대루 가서 이야기하리다.”서림이의 뒤하는 말을 권가가 듣고
잠자코 있어서 서림이는 다시 “주인의 팔라는 집을 잘 팔구 주인의 받으라는
빚을 잘 받은 것두 무던하지만 그보다두 주인의 사랑하던 기생을 주인 대신 사
랑한다니 대리를 그렇게 잘 보기가 어디 쉽소?”하고 자기 말에 주를 달고 웃었
다. “그런 이야기두 가서 하시는 게 좋지만 꼭 가서 이야기를 해주셔야만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그건 또 무슨 이야기요?”“좌포청에서 젊은 주인을
찾을 때 구산하러 나갔단 말을 곧이 듣구 포교들이 남소문 안 사랑에 와서 지키
구 있었지요. 그때 최가놈이 포교들을 친했던 모양이에요. 지금 포교들과 상종이
썩 잦습니다. 내 눈으루 보진 못했지만 포교 네 놈하구 오형제 의를 모았단 말
까지 있습니다. 하여튼지 그놈이 두길보기하는 건 의심없는 사실입니다. 젊은 주
인이 그놈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볼는지 모르니까 이건 꼭 가서 이야기합시오.
”“그거 참말 맹랑한 사람이오.”“죽일 놈이지요. 흩벌루 죽일 놈두 아니에요.
천참만육할 놈이지요.” “죽을 놈 소리 들어서 싸우.” 큰 구리주전자에 하나
가득히 내온 술이 어느 사이 다 없어져서 권가가 주전자 뚜껑을 누르고 따른 마
지막 잔이 반잔 될까말까 하였다. “반잔두 못 됩니다. 그대루 잡수시지요.” “
한 순배 더 내오라지.” “저는 더 못 먹겠습니다.” “술이 길지 못하구려.”
“어디 먹을 줄 압니까?” “그럼 이거나 마저 자시구 일어납시다.” “아니 잡
수십시요.” “사양 말구 어서 자시우.” 잔이 곯은 마지막 잔을 권가를 먹인 뒤
에 서림이가 몸에 지니고 나왔던 잔용 쓸 것으로 술값을 치러 주고 술집에서 나
와서 권가를 작별하고 남대문 밖 객주로 나왔다. 김선달이 어디 나가고 없어서
서림이가 혼자 방에 드러누워서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한온이의 말을 듣고 최가
에게 가서 주인하였더면 무슨 봉변을 하였을지 모르고, 또 자기가 사람이 데면
데면하여 최가에게 행지를 알렸더면 다른 지장이 생길는지 모르는 것을 주인도
안 하고 행지도 안 알린 것이 못내 다행하였다. 서림이가 천정을 쳐다보고 누워
있는 중에 밖에서 김선달의 목소리가 나더니 바로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벌써 오셨습니까?” “그랬소.”하고 서림이가 일어 앉으니 김선달은 방에 들
어와서 마주 앉으며 “영부사댁 도차지 손동지를 가서 보구 이야기했지요.”하
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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