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이가 와서 묵던 객주의 안팎 사람들은 모두 엄오위장으로 알고
객주 주인이나 잡히면 물어볼 텐데, 주인은 몸을 피하여 아직 잡지 못하고 그뒤
에는 밀고한 최가밖에 서림이의 얼굴을 알만한 사람이 없어서 서림이 입에서 직
토를 받으려고 서두르던 판에 제 붙이가 서울 안에 있단 말이 귀에 뜨이기도 하
거니와 그보다도 윤영부사댁 도차지의 이종되는 사람을 대적으로 잘못알고 잡았
으면 잡아온 포교들과 문초받는 부장은 말할 여지 없고 대장까지도 추고쯤을 당
하게 될는지 모르므로 부장이 뒤가 나서 서원과 수군수군 공론한뒤 서림이를 내
려다보며“네 이름은 무어야?”하고 물었다.“외자이름은 개올시다.”“엄개야?
오냐, 내 말루 네 이종이 영부사댁 도차지라니 그 사람에게 물어봐서 이종이 아
니라기만 하면 너는 죽구 남지 못할 테니 그리 알구 있거라.” 하구 뒤를 누르
고 즉시 포교들더러 끌어내다 두라고 일러서 서림이는 처음에 와서 있던 굴속
같은 컴컴한 방으로 다시 꺼들려 나왔다. 서림이가 임시처변으로 거짓말을 하여
당장 방망이질은 면하였으나 거짓말 한 뒤가 걱정이었다. 일이 풀리고 더 옭히는
것이 손동지 말 한마디에 달렸는데, 손동지가 엄오위장을 알 까닭이 없고 설혹
김선달에게 말을 들었더라도 이종 아닌 사람을 이종이라고 말할리가 없다. 김선
달이 들면 손동지더러 외착나지않게 말하라고 시킬수도 있겠지만 포청안에 잡혀
앉은 사람이 김선달에게 통기할 재주가 무슨재주냐, 이리저리 궁리했자 모두 괴
목에 방울 다는 궁리라 서림이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짓말이 탄로나서
혹독한 단련을 받을때 바로 불지 않으면 악형에 죽을것이고 바로불면 망나니 칼
에 죽을것인즉 일된 품은 죽었지 별수가 없는데 서림이 마음에 가득 찬것은 살
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서림이 앉은 방은 말하자니 방이지 굴이라는게 마땅하
였다. 뒤와 좌우는 전벽이요,오직 앞으로 널문 하나가 있는데 널문 밖은 포교들
이 죄인을 닦달하는 헛청이라 햇빛이 들어올데가 없고 바닥은 흙이었다. 서림이
가 손발이 시린것은 고사하고 몸이 아래서 굳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손을 놀리
지 못하여 비빌 수도 없었다. 뒷결박을 잔뜩 지워놓은 까닭에 손은 꼼짝 못하고
겨우 일어서서 발만 동동거리었다. 서림이가 마침내 널문에 와서 몸을 기대고
팔꿈치로 문짝을 쳤다. 네댓 번이나 친 뒤에 비로소 밖에서 “이놈아, 가만 있지
못하구 무슨 지랄이냐!” 하고 꾸짖는 소리가 낫다. “목이 말라 죽겠습니다. 더
운물 한 모금 먹여 줍시오.” 속에서부터 떨려나오는 말소리가 서림이 자기 귀
에도 가련하게 들리었다. 그러나 밖엣 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무어야?”
하고 채쳐 물어서 “물 한 모금 줍시오.” 하고 서림이는 소리를 가지껏 질러보
았다. 얼마 동안 지난 뒤에 널문이 열리며 포교 하나가 한손에 물바가지를 들고
서서 “이리 나서라.” 하고 바가지를 입에 대어 주는데 물은 더운물이 아니요
얼음이 버적버적하는 찬물이었다. 서림이가 한 모금 간신히 마시고 “아이구, 이
가 시립니다.” 하고 고개를 치어들었다. “고만 먹을테냐?” “더울물을 한 모
금 주실 수 없습니까?” “더운물은 없다. 고만 도루 들어가거라.” “할 말씀이
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제 사정을 말씀할 게 있습니다.” “사정이
구 활쏘는 데구 다 고만두구 어서 들어가거라.” 하고 그 포교는 굴속으로 들이
쫓으려고 하는데 헛청 안침에 있는 방에서 나이 많은 포교 하나가 내다보며 “
여보게, 무슨 할 말이 있다거든 이리 끌구 오게.” 하고 말하여 서림이는 포교들
들어앉았는 방 앞으로 끌려왔다. “네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어?” 하고 나이
많은 포교가 물어서 “네.” 하고 서림이가 여공불급하게 대답하였다. “할 말이
무어냐?” “제가 워낙 몸이 튼튼치 못한 위인인데 만일 저쪽 흙바닥 방에서 밤
을 지내게 되면 영락없이 얼어죽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주십시오.” “오냐. 포
청에서두 너를 얼려 죽이진 않을 테니 염려 마라!” “그러구 또 여쭤볼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말이야?” “정말 서림이가 잡히면 저는 곧 놓이겠
습지요?” “도리를 말해라. 어디 들어보자.”“그 도리는 대장 앞에 들어가서
말씀을 할 테니 대장을 좀 뵈입게 해주십시오.” “대장께서는 벌써 퇴청하셔서
댁으루 나가셨구 지금 종사관 한 분이 청에 기시니 종사관을 뵈입구 말씀을 할
테냐?” “대장을 뵈입게 해주십시오.” “네가 대장 앞에
가서 발괄하면 무슨 좋은 수나 생길줄 아는 모양이구나. 오냐, 대장댁에 가는 사
람이 있으면 네 말을 춤해 보라구 하마. 무슨 처분이 내리면 알려 줄 테니 아직
저 방에 들어가 있거라.” 서림이 옆에 섰던 포교가 서림이를 끌어다가 다시
굴속 같은 방에 집어넣고 널문을 닫았다. 서림이를 문초받던 포도부장이 포교
하나를 데리고 손동지를 보러 갔는데, 윤영부사댁 도차지 보기 어렵기가 조정
재상만 못지 아니하여 바로 들어가서 보지 못하고 밖에 있는 하인에게 거래를
시키었다. 처음에는 그저 덮어놓고 잠깐 뵙자고 하였더니 바쁜 일이 있어 뵙지
못하겠다고 하고, 나중에는 포도청 공사로 왔다고 그예 보자고 하였더니 영부사
댁 일이 포도청 공사보다 더 소중하여 바쁜 일을 놓아두고 볼 수 없으니 갔다가
이 다음에 오라고 하였다. 그 부장은 일껀 갔다가 그대로 오기 창피하여 엄개란
사람이 이종이냐 아니냐 물어보자고 할 마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막중 공사를
중간에 하인 놓고 물어보기 중난하여 고만두었다. 손동지가 포도부장을 보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다. 포청에서 잡으려고 한다는 김치선이를 자기가 숨겨
주었는데, 포도부장이 정녕코 치선이의 종적을 알고 내달라고 말하러 온 줄로
지레 짐작하였던 것이다. 그 부장이 사람은 보지 못하고 창피만 보고 포청에 돌
아와서 종사관에게 사실을 고한즉 종사관이 한참 생각하다가 “영부사 대감께
가서 뵈입구 도차지를 잠깐만 보내줍소사구 말씀을 여쭤보는 수밖에 없네.” 하
고 말하였다. “영부사 대감을 지금 가 뵈입구 오실랍니까?” “내일 대장께 여
쭤보구 가겠네.” “서림이루 알구 잡아온 놈을 밤에 어디서 재우라면 좋겠습니
까” “북간에 넣어 두라지.” “그놈이 만일 영부사댁 도차지의 이종이면 뒤에
말썽이 날 듯한데 간에 넣지 말구 당번 포교들더러 데리구 자라면 어떻겠습니
까?” “그래두 좋겠지만 포교들더러 잡도리를 허수히 하지 말라구 단단히 신칙
하게.” “밤에두 번갈아 가며 하나씩 자지 말구 지키라구 이르겠습니다.” 그
부장이 친히 포교들 있는데 나와서 포교들에게 신칙할 말부터 먼저 일러놓고
포교 하나를 시켜서 서림이를 데려내다가 뒷결박을 풀고 방에 들여앉히게 하였
다. 서림이가 손발도 비비고 더운물도 얻어먹은 뒤 대장을 보입게 하여 달라고
청한 나이 많은 포교를 보고 “아까 말씀한 것 대장께 취품해 보셨습니까?” 하
고 물으니 그 포교가 눈을 지릅뜨고 보면서 대답이 없었다. 그 포교는 서림이의
말을 실답지 않게 듣고 건정으로 대답하였던 까닭에 대장에게 품할 생각을 염두
에도 두지 아니하였었다. “내 말씀을 우습게 들으셨는지 모르나 흰소리가 아니
라 내가 들면 서림이는 고사하구 꺽정이두 잡을 수 있습니다.” “정말이냐?”
“내 말이 거짓말 아닌건 사흘 안에 아실수 있지요.” “꺽정이를 사흘 안에 잡
을수 있단 말이지?” “오늘부터 준비를 차려야지 오늘 넘으면 날짜가 불급이
돼서 소용없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가 대장꼐 여쭙구 준비
를 차리겠다.” “그건 안됩니다. 내가 대장을 뵈옵기 전엔 말씀을 할 수 없습니
다.” 나이 많은 포교가 옆에 앉은 젊은 포교 하나를 돌아보며 “뜨물에두 아기 서
는디 누가 아나. 자네 가거든 말씀을 여쭤보게.” 하고 말하니 젊은 포교는 고개를
끄덕하였다. 이때 사령 하나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그 젊은 포교를 나오라고
손짓하니 그 젊은 포교가 다른 포교들더러 “나는 바루 가우.” 하고 밖으로 나
갔다. 그 젊은 포교는 포도대장댁 대령 포교인데 대장의 심부름으로 포청에를
왔던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서 방에 등잔불을 켜놓은 뒤 포교들이 각기 자기네 집에서 가져온
저녁밥을 먹고 대궁을 모아서 서림이를 주었다. 서림이가 대궁밥이 먹기 아니꼬
우나 주린 창자를 달래느라고 한술 떠먹는 중에 먼저 왔던 젊은 포교가 다시 와
서 서림이를 가리키며 “저자를 데리러 왔소.”하고 나이 많은 포교더러 말하였
다. “부장께 말씀했나?” “벌써 어저께 말씀했소.” “그저께 갔겠네그려. 배
행은 몇이나 가라든가?” “나까지 서넛이 같이 가랍디다.” “묶어서?” “아
니 그대루.” 서림이는 데리러 왔다는 말을 듣고 곧 숟가락을 놓고 가자기를 기
다리고 있다가 포교 셋의 옹위를 받고 포청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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