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골댁이 그런 소리를 듣던 것도 벌써 칠팔 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때
당장으로는 저 집에 쌍초상 나게 생겼다고 수군거렸으나 다행히 그네는 정신을
수습하고 살아 남기는 남았다. 다만 그런 일이 있은 뒤로 그네는 몰라보게 수척
해지면서 끝내는 숨이 차 오르는 병까지 얻어 버리고 말았다. 숨만 그렇게 가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 먹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소리나 사
람의 기척 그림자에까지도 깜짝 놀라 한참씩 숨을 못 쉬곤 하였다.
"에이그, 천지신명도 무심하시지. 기왕에 한 목숨을 기어이 데려가실 양이면 실
한 놈은 남겨 두고 못난 놈을 업어 가시지, 귀신도 인물을 가리는가. 강수같이
용하고 듬직한 아들을 잡어 가시누 그래."
열아홉의 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동녘골댁 강수가 숨을 거두었을 때, 율촌댁은
혀를 차며 말했다.
"소리 소리 허는 것 아니다. 사람 목숨에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는고. 인지상
정으로 그냥 생각 없이 쉽게 던지는 말이 죄로 가는 일이 많으니."
무심코 한 율촌댁의 말을 받은 청암부인이 핀잔하였다.
"어찌 됐든 두 자식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살었으면 다 잃은 것에 비기겠느냐.
행여 듣는 데서는 그리 말허지 마라. 곱추도 자식이니라."
청암부인은 자신의 마음속에다 새기듯이 말했다. 그 다음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는 않았으나, 청춘에 먼저 간 청암양반을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시늉만 남아
있더라도 살아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리. 문 열어 보면 방에 앉아 있고, 바라보
면 얼굴이 보이고, 속에 있는 말 털어놓으면 들어 주고. 내가 그 외의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대저 남편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울타리라. 무심한 사람.
나를 이렇게 벌판에 세워 놓고 먼저 목숨을 거두어 길을 떠나 버리니, 나 혼자
서 일구는 이 모든 경영이 황량하도다. 무슨 일이 그렇게도 급하여, 가면 다시
올 수도 없는 길을 그다지도 서둘러 갔었는고. 내게 병신 자식이라도 하나 남겨
주고 갔으면 마음이 이렇게 적막하지는 않을 것인지. 기채가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변덕스러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때로 서운도 하고 야속도 허다... 동
녘골 질부가 참척을 본 것은 절통한 일이나, 남은 자식은 그래서 더 중하고말
고.)
청암부인이, 먼저 간 어린 신랑 준의를 때때로 생각하는지 않하는지는,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미루어 짐작으로 (아무리 당신이 천하에 보기 드문 여중군
자라고 하지만 홀로 앉아 있을 때는 여인일시 분명한데, 서방님 생각을 하지 않
으실 리가 있을꼬. 내색을 안하시니 그 깊은 속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하고 접
어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감히 입을 열어 부인의 심중을 물어
볼 수 있겠는가.
"동녘골댁 강수가 아무래도 숨을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벌써 칠팔 년이나 흘러가 버린 지난날의 일이지만, 어느 하루 아침. 이기채는 문
안을 들어와 청암부인에게 말했다. 그때 부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않아 있다가 "강수가 지금 몇 살이든고?" 하였다.
"열아홉이지요."
"...열아홉이라..."
청암부인의 말끝이 애석한 한숨으로 흐려지면서 흔들렸다.
"꽃다운 나이로다."
그때 문득 이기채는 청암부인의 비스듬히 내리는 눈빛과 말투에서 그네가 낭군
준의의 모습을 좇고 있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웬
일인지 송구스러워서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목숨이란 한 번 지면 기약이 없는 것을, 떠나는 사람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서
둘러 가느니, 야속한 일이로다."
"다 제 명이 그뿐이라 그렇게 부모를 남겨 두고 생병을 얻어서 먼저 가는 것이
지요, 뭐."
"내 그런 옛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있는 것인지 없는 것
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전생에서 서로 지극한 업을 지은 사람들은 이승에서도
지극한 사이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 서로 베푼 마음이 간절하고, 선한 공덕을 많
이 쌓은 사람들이 부부나 부모 자식간으로 인연을 맺는다는 게야. 그러니 오죽
이나 애지중지하는 사이겠는가. 허나 반대로 원수 척을 진 사람들이 또 그렇게
뗄 수 없는 인연으로 가까운 곳에 태어나거나 만나거나 한다는 말을 들었다."
"원수라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것인즉 전생에서만도 질릴 일인데, 무엇 하러
이승에 까지 와서 다시 만난답니까?"
"그래서 인연이란 조심해서 맺어야지. 원수를 지어 놓으면 갚아야 할 게 아닌가.
뼛골에 사무친 원수를 갚는 길은 서로 뗄 수 없는 처지로 만나 평생 동안 지척
에서 괴롭히는 일이거나, 기가 막히게 애틋한 사이에서 먼저 죽어 버려 남은 사
람들을 애통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원수도, 은혜도, 너무 지극해서 갚으려
할 때는 한 다리만 건너도 벌써 힘이 약해져 안되지. 한 지붕 아래 한 방의 한
이불 덮는 사이가 아니면 갚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그런 맹랑한 말이 어디 있을까. 이기채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하지
는 않았다.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라서 아물아물하다만 전에 옛적에 어떤 사냥꾼이 있었다
는 게야. 어찌나 명사수였는지 한번 팔매를 던지면 공중에 날아가던 매도 떨어
졌다는 사람이지. 그 사람이 하루는 자기 집 밭머리에서 팔매 하나로 까마귀 세
마리를 잡았더라는구나. 그게 귀신이냐 할 수 있는 일이지, 어디 사람의 솜씨냐.
그 사람은 어찌나 좋던지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단다. 물론 희색이 만면하여, 그
날 밤에 까마귀 고기를 내외간에 앉아 맛나게 먹었지. 그런데 그날 밤에 안사람
이 수태를 하게 됐다. 사냥꾼은 아제 남부러울 것이 없어서 기고만장. 하는 일에
힘이 나고 신명이 나지 않았겠느냐."
그리하여 연년생으로 하들 삼형제가 태어났는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생기고 영
특하며 효성이 남다르게 뛰어나 사냥꾼 부부는 행복하기 더할 나위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하룻날 뜻밖에도 밭에서 아악,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숨
이 넘어가게 자지러지는 그 비명 소리에 황망히 뛰어나간 사냥꾼의 아낙은 뜻밖
에도 큰아들이 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신없이 달려가 아들을 일
으켜 세워 보았으나 아들은 이미 절명한 뒤였다.
"아침나절에 밥 잘 먹고 뛰어 놀던 아들이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왜 그렇게 되었
는지 알 길도 없이 죽어 버린 게야. 허나,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마당으로 옮겨 놓고 망연자실 넋을 놓아 울고 있는 아낙을
밖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당신네 아들이 개울에 빠져 숨이 진 것을 우리가 메고 왔소."
뜻밖에도 동네의 장정들이 어깨에 메고 온 둘째아들을 내려 놓은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아낙은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생떼 같은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아낙은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죽은 듯
이 혼절하여 있는데 사냥꾼이 돌아왔어. 그 사람은 또 얼마나 놀랐으리요. 그게
무슨 참담한 꼴이겠는가...? 혼비 백산 눈이 뒤집힌 사냥꾼은 나머지 아들을 찾
으러 온 산야를 헤맸지.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어. 비오듯이 땀을 흘리면서 집으
로 돌아와 어처구니 없는 횡액에 가슴을 치며 고꾸라져 통곡을 하는데, 집안 어
디선가 아들의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게야."
창황히 뒤안의 헛간 쪽으로 가서 소리 나는 곳을 찾았다. 가느다란 신음은 분명
히 헛간에서 나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다급하게 문짝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태까지 찾아 헤매고 다니던 막내아들이 덫에 치여 피를 흘리고 있지 않
은가.
"아이고, 아가."
그 덫은 사냥꾼이 있는 솜씨를 다해서 만든 튼튼한 것으로, 멧돼지를 잡을 때
쓰는 것이었다. 아비가 미친 것처럼 울부짖으며 가까스로 아들의 발목을 잡아
빼내 주었을 때는, 이미 아들이 숨을 거두고 난 다음이었다. 아비는 아들을 찾으
러 어리석게도 바깥을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을 탄식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
리고 덩클 덩클, 피를 토했다. (아아, 한 자식만은 건질 수 있었던 것을, 내 집안
에서 내가 만든 덫에 내 자식이 치여 숨지다니. 세상 천하에 이런 기구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늘은 참으로 계신가. 귀신이 계신다면 이 속을 아시는가.) 세
아들을 단 하루에 잃어버린 사냥꾼 내외의 상심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
이었다. 그들은 먹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하면서 피골이 상접하여 꼬챙이처럼
말라가게 되었다. 사냥꾼은 사냥도 나가지 않은 채 잃어 버린 자신에 대한 애착
으로 번민하였다. 이웃 사람들조차도 그들 내외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버
린 두 사람은, 숨만 붙어 있을 뿐 송장이나 한가지였다. 자연히 그들은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목숨에도 마음이 없었고, 세상에도
아무 뜻이 없었다. 그러한 사냥꾼의 하룻밤 꿈에 아들 삼형제가 나란히 나타났
다.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환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그들은 낭랑하게 제 아비를 부르는 것이었다. 사냥꾼은 꿈인 줄도 모르고 미친
것처럼 두 손을 벌리며 어푸러질 듯 달려가 아들을 품에 안으려 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다시 쫓아간 아비를 피하
며 이쪽으로 저쪽으로 팔짝 팔짝 옮겨 앉는 자식들을 애가 타게 잡으려던 사냥
꾼은
"야속한 자식들아. 어찌 그리 이 아비 심정을 모르느냐. 꿈이라도 좋고 생시라도
좋으니 한번 안아 보기나 하자. 이 아비 가슴에다 못을 박고 죽은 것도 불효거
늘 무슨 억하심정으로 내 가슴을 또 다시 이렇게도 매정하게 태우느냐."
사냥꾼은 피를 토하며 목이 매어 울부짖었다. 그제서야 아들 하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싸늘하게 비웃는 말투였다.
"네가 아비라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아비인 사냥꾼은 아들이 내뱉는 말에 대경 실색 질려서 말을 잇지 못한 채, 발
이 얼어붙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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