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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15)

카지모도 2024. 1. 12.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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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너 죽어."

희재가 흙을 끼얹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가, 흙더미 앞에 쭈그리고 앉

은 붙들이의 엉덩이를 발로 찬다. 다섯 살바기의 조그만 발길질이라지만 약이

올라 차는 것이라 등판까지 울리는데, 붙들이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준다.

"이라 와서 보랑게 그러네요. 이것 봐요. 내가 새로 맹글어 준당게요. 이께잇 거

천지에 쌔고 쌨는 거이 흙뎅인디. 흙무데기가 무신 황금단지간디요오... 이렁 거

다아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집이고 참말로 곡석이간디요...?"

"내 놔. 내 꺼 내놔. 내 놔아."

희재는 발길질을 멈추고 두 주먹으로 붙들이의 등을 두드린다.

"그렁게 내가 시방 새로 맹글어 주잖어요오. 인자, 그만 우시요. 이께잇 노무 흙

데미, 내가 산에 가서 바지게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지어다 부서 디리께요.

기양 이 마당에다 아조 산꼭대기를 파다가 그들먹허게 부서 디리께요. 예? 울지

마시요. 아앗따아, 그만 울어요오."

그러나 희재는 동그란 얼굴을 위로 발딱 제끼고 목청을 놓아 운다. 그 소리에

놀란 붙들이의 얼굴이 샛노래진다. 애기 도련님 희재의 여린 목에 푸른 힘줄이

돋아 이마빡에까지 뻗친다. 한자리에 앉아 있던 영재는 덩달아 따라 울고 있다.

붙들이는 희재의 조부인 기표가 사랑채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조바심에, 마당

에 흩어진 흙더미를 쓸어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다. 두 어린 것들은 큰집의 집

그늘에 앉아 담 밑의 흙무더기에서 흙을 떠다가 집짓기를 하고 놀고 있는 중이

었다. 손아래인 영재는 공연히 제 형의 본을 따라 흙장난만 하고 조막손에 흙을

쥐었다 놓았다 헤적거리기만 하였으나, 희재는 달랐다. 행여 흘릴세라 조심스럽

게 깨진 사기대접에 흙을 담아 들고 중문간 그늘 밑으로 날라다가 부어 놓고,

다시 또 가서 퍼 오고 하는 품이 실제로 그 흙대접이 무슨 곡식 노적가리나 황

금인 양하였다. 몇 수십 차례를 그렇게 되풀이하여 흙을 퍼 날라다가 드디어

"이거 내 땅이야. 너 오지 마."

하고 영재한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사금파리 조각으로 제 양껏 넓은

자리를 잡아 둥그렇게 금을 그어 경계를 삼았다. 그리고 그 금을 따라 도도록하

게 흙담을 둘러 놓고 담 안에 칸을 나누면서, 이거는 안채, 이거는 사랑채, 이거

는 곳간, 이거는 헛간, 이거는 행랑채 이거는... 하고 일일이 구분을 지었다. 그

중 곳간이 제일 넓었다. 영재는 영문도 모르고 희재가 만드는 것들을 재미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앙징스러운 손을 뻗어 곳간이며 사랑을 쥐어 보려 한다.

그럴때 희재는 번개같이 덤벼들어 영재의 손을 쳐냈다. 희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으면 크게 넓게만 만들었다. 그런 뒤에, 곳간의 네모 벽안에다가 수북이 흙

을 부었다. 금방 소담스러운 흙봉우리가 솟았다. 희재는 옆에 있는 흙을 두 손으

로 떠다가 주르르 쏟아 붓고, 다시 떠다가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부을 때마다

"이거는 쌀."

"이거는 콩."

"이거는 보리."

하고 말했다.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송 돋아나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은 곳간에

쌓인 흙더미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희재는 떨어진 땀방울 위에 다시 흙을 부

었다. 흙이 더미를 이루고 봉우리가 높아질수록 희재의 손은 더욱 빨라지고 신

명이 나서 벙글벙글 웃음이 번져났다. 희재는 지금 막 이제 거의 바닥이 나 버

린 흙을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영재가 헤적거리며 놀고 있는 흙사발이 눈에 들

어와 그것을 제 앞으로 채 오려고 하는 찰나였다. 낡은 짚신발이 우왁스럽게 희

재의 집을 밟아 버린 것이다. 으아아앙. 발에 밟힌 담이 무너지고, 박살이 난 곳

간의 산더미 같은 곡식들이 우르르, 쏟아져 버리는 순간 희재의 울음이 터져나

왔다. 물지게를 지고 뒤뚱뒤뚱 무엇엔가 골몰하여 중문간을 넘어서던 붙들이는

갑자기 발 밑에서 터지는 희재의 울음 소리에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그리

고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의아하여

"왜 그렇게 우요?"

하고 꼬마 도령을 내려다보았다.

"죽어. 너 죽어."

그때에도 영문을 몰라 붙들이는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였으나, 이윽고 자기가

희재의 살림살이를 밟아 뭉개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물지게를 벗어

놓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이께잇 거 흙인디 머엇을 그렇게 운다요? 내가 금방 새로 맹글어 주께 울지 마

시요. 이거 다 흙이요, 흙."

하면서 아까대로 모양을 갖추어 집을 만들고, 대문 중문을 세우고, 곳간에 곡식

을 수북이 부어 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희재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며 귀

청이 찢어지게 울어댄다. 붙들이가 지은 집과 곳간에 쌓은 곡식은 희재의 것보

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였다. 마당에는 아까는 없던 노적가리까지도 수북수북

고깔처럼 쌓여졌다. 훨씬 부자가 된 것이다. 붙들이는 이거 보아란 듯이 희재 쪽

으로 고개를 돌린다. 허나 희재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른다. 그 어린 것의 숨이 넘

어가는 울음 소리에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집착과, 탄식에 가까운 통곡이 질

기게 섞여 있었다. 강모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일종

의 증오마저도 느껴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희재는 영재보다 겨우 두 살 위

였지만 조부 기표의 풍신을 닮아 벌써부터 키가 제 또래보다는 훨씬 더 컸고 몸

집 또한 다부졌다. 강모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 아이고 이께잇 거

흙인디 왜 그렇게 우요... 이께잇 노무 흙, 천지에 쌔고 쌨는 흙무데기가 무신 황

금단지간디요오, 이렁 거 다아 장난으로 집 짓고 노는 거이제, 참말로 집이고 참

말로 곡식이간디요. 이거 다 흙이요, 흙. 강모는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낸다. 붙

들이가 희재를 타이르던 좀 전의 말이 그의 귀에 남아 묻어 있어서이다. 그 말

은 끼얹은 흙처럼 귀를 덮었다. ... 이께잇 노무 흙 ... 이거 다 흙이요오, 흙.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어린 것이 그것이 흙인 줄을 어찌 알리오. 제 몫

이라고 고깔 봉우리 창고에 쌓아 들일 때, 오직 재물이요 곡식이라 여기면서 애

지중지 아끼고 흐뭇해하니, 흙이라도 제가 애착하면 재산이 아니랴. 이제 저의

재산을 잃었다 하면서 저다지도 서럽게 울고 통곡을 그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한살이가 저와 무엇이 다르랴. 흙덩어리를 긁어 모아 산적을 하

고, 그 먼지 같은 흙덩어리를 지키다가 속절없이 죽어간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지키려고 파수꾼을 두어 밤을 새우느니...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로다.) 문

득 강모의 머리에는 살구나무 아래 차려 놓았던 밥상이 떠오른다. 봄철이면 그

렇게도 하염없는 살구꽃 이파리가 눈발처럼 날리고 날리었지. 떨어진 꽃이파리

는 꼬막 조가비에 소복하게 담아 꽃밥을 만들고, 꽃잎이 지고 나면 흙밥을 먹었

다. 깨진 사금파리의 가장자리를 장독대의 돌멩이에 문질러서 곱게 다듬으면 그

것은 또 얼마나 어여쁜 접시였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사금파리 접시를, 강

실이는 소중하게, 정말로 금이라도 갈까 보아 조심하면서 옷고름 자락으로 윤이

나게 닦아내곤 하였다. (부질없다. 모든 것이 부질없구나. 지나가 버린 그날에는

꿈엔들 그것이 장난인 줄을 내 알았겠느냐...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목숨조차도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을.) 강모는 자신의 몸이 용마루 너머 아득한 하늘 저쪽으

로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처럼 무중력의 상태로 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상

한 서글픔에 몸이 잦아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실아...) 어찌하여 그 이름은

이다지도 서럽고 눈물겨운가. 가슴의 살 속 가장 그늘진 곳에 가느다란 금실처

럼 애잔하게 반짝이는, 보일 듯 말 듯한 그 간절함을 어떻게 차마 말로 할 수

있으리. 그것은 때대로 촛불의 심지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그네의 이름이 떠오르

면, 그 이름은 부싯돌같이 순간적인 불꽃을 일으키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만다.

그것은 강모의 힘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무리 숨을 깊이 들이마시어 꺼보

려고 하여도 속절없는 일이었으며, 가슴을 오그려 불꽃을 죽여 보려 하여도 허

사일 뿐이었다. 살에 박힌 심지는 살을 태우며 속을 잦아들어간다. 가슴 갈피에

매운 연기가 자욱해진다. 강모는 기침을 토하듯 한숨을 토한다. 그리고 저도 모

르게 몸을 돌려 대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그는 대문간에 이르러 더는

나가지 못하고, 발목을 붙잡힌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선 채로 오류골 작은집의 지

붕을 내려다본다. 오류골 작은집은 언제나 고즈넉하다. 사람의 소리도 바깥까지

는 들리는 법이 없다. (둥그런 초가지붕. 무지개 같은 강실아. 너 살고 있는 네

집의 정답고 욕심 없는 지붕이야 너에게 그물일 리가 있겠느냐... 저 지붕은 너

를 감싸고 덮어 주는 너울일 것이어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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