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꼭 일 나기 기다리는 사람같이 그렇게 잘라 말허는고?"
"감춰 봐도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요? 망신스러운 것은 이미 가릴 수가 없게 됐
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게 낫지."
"어허어어. 이래서 다 예부터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하고, 샘길에 여아를 내보내
지 마라 경계하지 않았든가. 여자의 목소리에 음기가 자욱한지라. 본디 그 소리
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되는 법. 진예 탓도 적다고는 못허지."
"그런데, 도대체 그것들이 무슨 일을 어느 만큼이나 저질렀길래, 이런 사단이 나
고 말었을까요?"
드디어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안채
에서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부인 몇몇이 문안 삼아 청암부인에게 들렀다가 그
대로 앉아 해가 기울도록 일어설 줄 몰랐다. 도중에 한둘은 먼저 내려가기도 하
였지만, 새로 올라온 사람도 있어, 같은 말이 몇 번씩 반복되기도 했다.
"아짐, 법도대로라면 강수가 살었대도, 덕석말이를 당했겠지요?"
그 말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청암부인을 대
신하여, 말한 사람의 재당숙모 흠실댁이 나섰다.
"덕석말이만 당허고 마는가? 몰매까지도 맞고, 안 죽을 만큼 닥달을 당헌 끝에
온 동네 끌려 돌고 다니면서 회술레를 당허고, 그 길로 내쫓기는 게지."
"안 죽으면 다행인데, 그러다가 죽은 목숨도 부지기수라대. 죽어도 별 수 없는
것이라. 그런 자식을 둔 부모까지도 마을에서 쫓겨나는 판국에 누가 옆에서 말
리지도 못하고, 말릴 일도 아니지. 어른들이 허시는 일이고 법도를 따른 것이니."
"그렇게 죽으면 시신도 못 거두는 것이라면서요?"
젊은 축인 솔안이댁이 어른들 말씀 사이로 끼여들었다.
"시신이 다 무엇이야? 그대로 거적에 말어서 동구 밖에다 버리는 게지."
"아이그, 저런."
탄식을 터뜨리는 사람은 나이 엇비슷해 보이는 연동댁이었다.
"남부끄럽고 민망해서 결국은 남은 식구들도 다른 데로 떠나는 겨우가 보통이지
무어. 그러다가 끈을 놓치고 상놈 되는 거여."
"타성바지 천대허는 게 다 그런 까닭 아닌가..."
흠실댁 말에 청암부인은 침중하게 대했다.
"아니 그런데 강수가 그런 걸 몰라서 그랬을까요? 모를 리 없으면서 왜 그렇게
허무맹랑한 심사를 품고, 청춘에 인생을 버립니까?"
얼굴이 얇은 연동댁이 눈썹을 꺾어 찌푸리며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으니 제 딴에도 괴로워서 번민한 것일 테지. 상사만도 병인데다가 법
도에도 어긋나는 사정을 혼자서 못 견디고, 애꿎은 목숨만 내버린 것 아니야. 어
이그으. 철딱서니 없는 것."
청암부인의 손아래 동서 이울댁이 쯧, 쯧, 혀를 찼다.
"철딱서니 없다고만 동정할 일도 아니지요. 기왕에 죽은 것은 가련하지만, 이런
해괴한 정상을 예사롭게 여긴다면, 부녀, 모자, 오누이, 남매라고 어디 믿을 수
있겠습니까? 끔찍하여 입에 담기 송구하지만, 대저 일가 친척 대소가라는 것이,
지친 육친 한가지인데 애초에 그런 마음을 품는다는 것부터가 금수 아니고서는
못할 짓. 친형제 남매를 능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솔안이댁 음성에 쇤소리가 났다.
"여보게, 그렇게 독하고 모질게 말 안해도 다 그런 일은 해서는 안된다 하고, 못
할 일로 생각지 않는가?"
야무지게 말끝을 오무리던 솔안이댁은 청암부인의 책망에 멈칫하였다. 그리고
모처럼 입을 연 청암부인에게로 방안의 사람들 눈이 쏠렸다.
"사람의 마음이란 다스리면 성현 군자도 되고 제세 영웅도 되지만, 자칫 고삐를
놓친다면 사나운 말 한가지라. 내 속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결국은 나를 발길질
하고 짓밟게 되지. 미처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밟혀 죽는 게야. 허나, 잘 다스리
고 길들이고 정성껏 보살피면 천리라도 달리는 준마가 되고, 일세를 풍미하는
명마도 되네. 강수가 그 고삐를 잘못 쥔 것이 애석한 일이야.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허수로이 알기 쉽지만, 사실은 눈에 뵈는 것의 주인은 눈에 안 보
이는 데 있거든... 심정이야 어디 손에 잡히는가? 허나, 이 심정이 상하면 밥을
먹어도 체하고, 심정이 슬프면 마른 눈에도 눈물이 고여 흐르는 이치를 생각해
보게. 형체 없는 마음이 능히 목숨조차도 삼키는 것이 놀랍고 두려울 뿐이네."
좌중은 청암부인의 말에 잠시 조용해졌으나, 앉은 부인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의
구심의 낯빛은 미처 감추어지지 못하였다. (이상도 허시다. 제일 큰어른으로 가
장 노여운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마음을 논하시다니.)
"사람들의 마음이란 헤아리기 어렵네. 여기 모여서들 분분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겉으로 보면 묘한 구석이 숨겨져 있거든. 강수는 이미 저승의 객이 되어 버렸는
데, 오죽이나 사무쳤으면 태산이라도 들어 옮길 청춘의 나이에 제 목숨 하나도
다 부지 못하고 죽어갔을꼬. 무주고혼 거리 중천에 떠도는 그 어린 것이 가련하
기 짝이 없건만, 이승에 남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이리저리 헤집고 되엎으며
남모르게 재미도 있어 한단 말일세. 내 말이 너무나 야속한가? 이미 세상이 싫
어서 떠나 버린 혼백의 일을, 세상에 남은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공론하면서
뒷자리를 시끄럽게 어지럽히는 것도 망자한테 미안하고, 덕있는 일은 못 되는
것, 그만들 이야기하세."
그러면서 청암부인은 눈을 내리감아 버렸다. 그 바람에 자리는 피하여지고 부인
은 혼자 남게 되었다. 목숨. 세상에서 이보다 값진 것이 어디 있으랴. 목숨이 있
으므로 만물이 비롯되고, 목숨이 지면서 만물 또한 따라서 지고 만다. 이미 목숨
을 거두어 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공허한 일이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은 허공이나 한가지라.) 며칠이 지나고 나서 동녘골댁으로 내려간 그
네는 같은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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