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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18)

카지모도 2024. 1. 15.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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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들의 아비가 아니라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이냐. 아무리 유명을 달리하

였다고 한들 이런 터무니 없는 망언을 하다니. 나는 너희들을 잃은 뒤에 노심초

사 애통하고 한스러워 이제는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건만, 너희들은 어느새

아비도 몰라볼 만큼 무정해졌단 말이냐. 이놈들아..."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설움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비정한 아들

들을 향하여 다시 한번 두 팔을 벌렸다.

"너는 듣거라."

이번에는 다른 아들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냉랭하고 차가운 말투였다.

"우리들이 너와 함께 순한 인연을 짓고 만난 사이라면, 이렇게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한꺼번에 죽어 없어지겠느냐. 우리들은 너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으

로 태어난 것이니라."

"원수라니, 너희가 나와 무슨 원수를 지었관대 이런 처참한 꼴을 당하게 한다는

것이냐?"

"자기가 지어 놓은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니, 받은 응보에 대해서도 깨달

음이 전혀 없구나. 보아라. 우리들은 네가 연전에 밭에서 팔매로 쏘아 맞힌 까마

귀들이다. 멋모르고 노니는 우리를 돌멩이 한 개로 한날 한시에 죽였으니, 우리

원혼이 분을 참지 못하고 네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다. 남다르게 인물도 출중하

고 남다르게 효행이 빼어났던 것도, 모두 다 훗날에 너를 절통하게 하려고 그리

한 것이다."

말을 마친 삼형제는 그 자리에서 홀딱 몸을 뒤집어, 그만 까마귀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전생을 몰라서 생사의 인연을 놓고 설워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모두 다

제 받을 몫을 받는 것이야."

청암부인은 까마귀 형제들의 이야기 끝에 한숨을 쉬었다. (나도 죄가 많은 사람

이 분명하다. 아마 전생에서는 내가 그 사람을 두고 먼저 죽었는지도 모를 일.

아니면 내가 무슨 못할 짓을 그렇게도 모질게 했었던고.)

"어머니.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하늘의 이치에 따른 것이지, 어찌 한낱 허황된

이야기를 따른 것이겠습니까?"

"그 하늘의 이치라는 것은 또 무엇이랴. 사람의 지혜, 분별지로 알아내기 어려운

일인 것은 전쟁이나 다를 바 없느니라."

이기채는 청암부인의 심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말머리를 돌렸다.

"허나, 강수 그놈이 죽게 된 것은 참으로 맹랑한 일이올시다."

"맹랑하다니..."

"젊은 나이에 사내놈이 그래 부모를 남겨 두고, 병신 아우를 앉혀 놓고, 병도 많

고 많은데."까지 말하던 이기채는 차마

"상사로 병을 얻어 그에 죽게 생겼다니, 이런 못난 놈이 세상 어디 있습니까? 그

것도 상피로 말입니다." 하고 말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어린 나이의 조카뻘이지

만 이미 온전치 못하여 목숨을 버리다시피 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마음에 걸

린 탓이었다. 하지만 청암부인이라고 해서 그간 오랫동안 떠돌던 소문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상사불견이면 어찌 병인들 나지 않으리."

방안에 무거운 한숨이 고였다. 결국 강수는 숨을 거두었다.

"심지가 그것밖에 안되는 놈의 소갈머리. 죽었대서 울 것도 없어. 거적에다 말아

서 길바닥에 내버리면 그만이야. 아 시끄러워, 울지도 말어. 그런 놈은 자식도

아니야."

동녘골댁이 터지는 곡성을 참아 내지 못하고 체읍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녘골양반은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의 눈자위가 짓무른 듯 벌겋게 충혈되어 있

었다.

"세상을 살다가 참 이런 꼴을 당허지 말어야는 것이여. 자식 키워서 이런 보갚이

를 받어야 헌다면 어느 놈이 자식을 낳겄는가. 이런 놈의 허망헌 꼴이 있어 그

래. 허허어..."

강수는 이름 값을 못하고 죽은 셈이었다. 편안 강자에 목숨 수자를 붙여 준 부

모는 그의 목숨이 짧은 날에 스러지고 말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

나마 평탄치 못한 젊음으로 제 목숨을 갉아 먹다가 쇠진하여 저절로 숨이 지고

말 것도 미리 헤아렸었는지.

"죽기를 잘한 놈이니 생각도 말어. 천륜도 모르는 놈. 제 놈이, 남 가진 인정만

있었대도, 그런 경우 없는 짓을 허지도 않았을 뿐더러, 눈시퍼렇게 뜨고 있는 부

모 형제 다두고, 나 몰라라 허고 제 목숨만 걷어 가겄는가. 그런 인정머리 없는

놈, 제 생각으로만 꽉 차서 눈 먼 놈, 인제 그놈 말은 나 숨 떨어져 죽을 때까지

입 밖에 꺼내지도 말어. 누구든지 주둥이에 그놈 이름 올리기만 해 봐. 내 손에

죽을 테니."

동녘골양반은 숨이 받혀 말을 똑똑 끊어 가며 그렇게 뇌이고는 동녘골댁과 어리

보기 곱추인 강우를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질린 모자는 흘리던 눈물조차도 지

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문중의 사람들도 동녘골댁 식구들을 만났을 때, 문상의

말 대신에 다만 혀를 차며 어두운 얼굴로 심중을 전하였다. 그것은 동녘골양반

의 심기나 괴로움을 헤아리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강수의 죽음이 문

중에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탓이었다.

"상사병으로 죽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닌데, 그것도 상피라니. 참으로 망측한 일은

망측한 일이야.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가 있어? 허어, 참."

이기채는 그때 기표를 마주하고 앉아 무거운 음성으로 연신 같은 말을 되풀이하

였다.

"그래도 강수 그놈이 죽기를 잘했지. 살었으면 더 큰일도 낼 뻔하지 않았습니

까? 막말로 그것들이 흘레라도 붙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결국 본인은 물론

파문을 당하고 온 집안 권속들도 일문에서 쫓겨나, 거적을 메고 유리걸식을 하

게 되었을 겝니다."

"거 무슨 말을 그렇게 독허게 허는가? 그리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

지? 젊어 한때 빗나간 가쟁이에 잘못 찔린 것이니, 어쩌든지 제 마음을 잘 다스

리고 정신차려서 회생하기를 빌었든 게지."

"회생을 할 위인이 그렇게 죽는답니까? 젊은 나이에, 앞길이 구만리같이 창창한

인생을 마다하고, 상사가 뼛골에 사무쳐 세상까지 버릴 성품이라면, 살아 남았대

도 그다지 순탄치는 못했을 겁니다. 그나저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저도 마찬

가지올시다."

"아, 생각을 해 보아. 많고 많은 것이 처자요, 나이 차면 어련히 혼담이 오고 갈

것인가. 아무리 기운 집안이라도 성씨가 있는데 아무려면 중인 혼사할까. 눈이

옆구리에 달려도 분수가 있지, 대소가 큰애기에 넋을 홀려 대장부 일신을 망친

단 말이야?"

"그러기에 환장을 한 것이지요."

기표는 날카롭게 대꾸한다.

"다른 문중에서 행여라도 이런 소문, 알까 겁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선대에 울리

던 세도며 덕행에 학문조차, 이제는 한낱 족보에 남은 자랑거리처럼 돼 버려서

가뜩이나 아슬아슬, 자칫 한미한 집안으로 내려앉으려는 이 마당에, 이제는 상피

마저 붙으면 도무지 집안 체면이 무에 되겠습니까. 개 도야지 한가지로, 눈에 뵈

는 대로 덤비고 엉키는 꼴이. 그게 어디 제대로 사는 사람 집구석 꼴이냐고요.

중인 상것들도 본 데 있고 배운 데 있는 사람들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며, 저

알아서 오죽이나 삼갈 일인데도 말입니다."

"허 참. 맹랑한 일은 맹랑한 일이야. 입에다 담기도 민망한 사연이고 말고. 여하

튼 이제 강수 그놈이 저렇게 청춘에 요절을 해 버렸으니, 남은 부모 형제들 처

참하고 구차한 형상은 또 어찌 봐야 허는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이거는 자고 새면 일이 생겨 도무지 종을 못 잡겠으니, 이게 무슨 징조

는 징조야."

"전에도 더러 이런 일들이 있기는 있었지요. 소문을 안 내고 덮어두면서 쉬쉬 입

을 막았으니 망정이지."

그러나 행세하는 집안의 문서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고, 점잖은 부인들

이 자녀를 대하여 그런 이야기를 옮길 리가 없으며, 인륜도덕을 하늘의 뜻으로

받들고 골수에 맺히게 새기는 반가의 동서들끼리 그런 소문을 숙덕거릴 리 없어

서, 알게 모르게 지워져 버린 패륜의 사연들이 어찌 하나 둘이랴. 패륜. 강수는

그 무거운 굴레에 목이 눌려 숨이 진 셈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무도 모르게, 그

자신조차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열화에 스스로 소진하여 버린 것이었는지도 몰

랐다. 문중에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길 수도 없어서,

종가의 사랑에 모여앉아 서로들 쓴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진예가 출가를 했음이요. 만일 그 애가 아직도 여

기 남아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진 마당에 어디 혼인인들 제대로 했겠소?"

"어허, 모르시는 말씀이요. 소문이란 화살보다 빠른 법, 이 소문이 예사 소문이

요? 둔덕만 하나 넘으면 최씨들 사는 곳인데, 그게 사흘이 걸리겠소오, 나흘이

걸리겠소. 오늘 해 안으로 골백번이나 왔다갔다 했을 거요. 그 사람들 성정을 몰

라서 하는 말이요? 하늘을 쪼갠다하면 쪼개야 하는 사람들이고, 물을 가른다 하

면 갈라야 하는 사람들 아니요? 향내 나는 양반이라 도도한 그 집안에서, 새며

느리 맞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에 이런 괴이한 소문에 접하고 나면, 그 다음

에 어찌 할는지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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