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
청암부인은 강모를 바라보던 눈길을 옆으로 기울여 베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
다 다시 강모를 바라본다.
"왜요? 할머니, 베개가 불편하세요?"
강모는 얼른 베개를 고쳐 주며 물었다. 청암부인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 시
늉을 하더니, 다시 눈짓으로 베개 밑을 가리켰다.
"베개 밑에 뭐가 있어요?"
그네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길을 따라 강모는 베개 밑에 손을
넣었다. 베개 밑은 눅눅하였다. 땀 기운이 서린 탓이리라. 강모는 할머니의 겨드
랑이에 손을 넣은 기분이 들었다. 겨울날 찬 바람 속에서 방으로 들어오면 청암
부인은
"이리 온, 할미가 따뜻하게 해 주지."
하면서 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가 할머니의 켜드랑이에 넣어 주었다.
"따숩지?"
정말로 그곳은 아늑한 골짜기였다. 명주 저고리에 솜을 두었기 때문이었을까, 아
니면 할머니의 몸이 따뜻했던 때문이었을까.
"찬 데서 방에 들어와 가지고 바로 아랫목에 손 넣지 마라. 동상 걸린다."
그러면 강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의 겨드랑이에 손을 묻은 채 얼굴을 그네
의 뒷등에 비비곤 하였다. 그때, 눅눅한 듯 혼혼하던 체온. 강모는 베개 밑에서
손바닥만하게 접은 납작한 명주 수건을 찾아냈다. 그것은 넣어둔 지 오래된 모
양이었다.
"이것 말씀이신가요?"
강모가 명주 수건을 꺼내 들고 청아무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할머니."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이 없다.
"할머니."
강모의 목소리는 다급하였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혼수
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네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어찌
보면 마른 나무로 깎아 만든 도상 같기도 하였다. 탈진이 될 대로 되어 수분이
없는 그 얼굴은, 이미 애증이나 영욕의 끈끈하고 축축한 늪지에서 건져 올려져
햇빛에 건조되고 있었다. 장지문에 녹아 엉기고 있는 여름 한낮의 뙤약볕이, 청
암부인의 무감한 누른 얼굴 위에 거미줄을 하얗게 슬어냈다. 그래서 그네의 얼
굴에는 명주 올이 얽힌 것처럼도 보였다. 강모는 가슴 밑바닥이 어이없이 빠지
는 것을 느꼈다. 그곳은 허방이었다. (할머니. 제가 어찌 해드렸으면 좋겠습니까.
반평생 받기만 하면서 살아왔으니, 이제라도 무엇을 어찌 해드렸으면 좋겠는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어쩌다가 저는 이런 모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까요. 할
머니. 할머니이.) 터지는 울음을 누르며 강모는 손에 들고 있던 명주 수건을 조
심스럽게 펼쳤다. 금이 가게 접혀진 그 안에는 미농지로 한 겹 더 싸인 것이 들
어 있었다. 뜻밖에도, 그것은 돈 삼백 원이었다. 귀퉁이를 나란히 맞추고 누워
있는 종이돈에서는 물큰 땀냄새가 났다. 할머니와 체취였다. 그리고, 아까 할머
니의 희미한 눈빛 속에다 반절이나 덜어 넣었다고 생각하던 그 어둠보다 훨신
더 크고 깊은 어둠이, 명주 수건에 싸여져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청암부인은
강모에게, 그네의 가슴 가장 어두운 곳에 멍들어 있던 어둠을 명주 수건에 싸서
건네준 것이었다. 강모는 손수건을 구겨 쥐었다. 손수건에서 후욱 할머니의 눈물
냄새가 끼쳐 왔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엎드려 울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2권 (39) (0) | 2024.02.07 |
---|---|
혼불 2권 (38) (0) | 2024.02.06 |
혼불 2권 (36) (0) | 2024.02.04 |
혼불 2권 (35) (0) | 2024.02.03 |
혼불 2권 (34) (0) | 2024.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