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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2권 (34)

카지모도 2024. 2. 2.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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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강모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효원이 미처 일감을 치우기도 전에 사나운

몸짓으로 물어뜯을 듯이 그네를 덮쳤다. (아니, 이 사람이.) 효원은 무의식중에

그를 밀어냈다. 무슨 거역을 하겠다든가 마땅치 않아서가 아니었다. 너무나 갑작

스럽게 들이닥친 강모의 행동이 일변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당황했기 때문이었

다. 그것은, 평상시의 강모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난폭함에 놀란 탓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그네는 알 수 없는 모욕감

에 휩싸였던 것이다. (나야 제 사람이니 언제라도 하란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노

릇이지만.) 효원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힘대로 강모를 밀어내며 바람벽에 등

을 버티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감아쥐었다.

"왜 이러시오?"

이것이 그네의 말이었다. (불도 안 끄고...) 효원의 눈에 등잔불이 들어왔다. 새

혓바닥 같은 불꼬리가 펄럭, 흔들리더니 긴 그을음이 실처럼 오른다. 그네는 지

금 강모가 본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디 바깥에서 있다 오

는 야기가 옷갈피에서 스며나오고, 무엇보다 그는 허탈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

는 효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는 마치 자기 먹이를 채가려는 사람을 향

하여 으르렁거리는 것과도 같은 노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적의조차도 느껴지

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침묵이 차 올랐다. 침묵이 부풀면서 서

늘한 식은땀이 돋아난다. 이러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한 효원이었다. 순리대로 이

루어질 일에 대하여 이렇게 쫓기듯 서두르는 강모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효원

은 묘한 앙심을 느꼈다. (몇 년 몇 달을 두고 증오나 하듯이 팽개치고 돌아보지

도 않더니, 무슨 까닭으로 이 밤에 이러는가. 필경 곡절이 있을 것이다. 아무래

도 예삿일은 아니다. 순탄한 양기라면 이와 같으리. 내 아무리 규방에서 보고 들

은 것이 없이 살아왔고, 시집이라고 와서도 하릴없이 지내왔단들 이만한 짐작도

못할 것인가.) 그것은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효원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느닷없

는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네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반닫이 장롱 속에

접힌 채로 있는 삼팔주 명주 수건이 허옇게 펄럭였다.

"소용이 있으리라."

고만 말하며 접어 넣어 주던 어머니 정씨부인의 모습도 지나갔다. 그러면서 순

간 청사등롱과 사모관대, 나무기러기, 청홍의 이부자리며 마당에서 들리던 낭랑

한 웃음 소리들이 환각인 듯 떠올랐다. 위로는 천지신명과 부모님을 비롯하여

아래로는 토방 위의 강아지까지도 한 마음으로 복을 빌어 주던 밤이었다. 그런

밤에 효원은 가슴을 동여맨 대대마저도 풀지 못한 채 꼬박 앉아서 밝혔다. 그때

의 암담하던 답답함이 새삼스럽게 치받쳤다. 그 모든 밤을 다 헛되이 내버리고,

야합도 아닌데 무엇이 급하고 무엇이 무서워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효원의 머리

가 물로 씻은 듯 차갑게 가라앉으며 몸이 굳어졌다. (오늘 밤에는 절대로 안된

다.) 왜 그렇게 단단한 결심을 하였을까. 그네는 어금니까지 시퍼렇게 물었다. 그

러나 스스로에게 이르는 그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그네의 어금니가 벌어지고 말

았다.

"아."

톱니가 살 속에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이 몸의 한가운데로 날카로운 금을 긋고 지

나갔다. 그것은 겁간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절차도 짓뭉갠 채 당해 버린 일

끝에, 그네가 맛 본것은 무참한 쓰라림뿐이었다. 텅 빈 가슴이 식어 내리면서 눈

자위에 뜻 모를 눈물이 번지는 것을 그네는 간신히 참아냈다. 토할 길 없는 시

커먼 돌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 같은 무거움이 그네를 누르기도 하였다. 효원은

그날 뜬 눈으로 앉아서 밤을 새웠다. 그런데 하늘의 섭리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효원의 육신 한 구석에 박힌 증오의 옹이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삶의 현상이란 저희들끼리 저절로 아우러지고, 서

로 독을 풀고, 스스로 갚아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재 때문에라도 창씨개명은 안했어야 하는 것을."

청암부인은 핏덩이 증손자를 내려다보며 탄식하였다. 그것은 참을래야 참을 길

이 없는 통분함이었고 설움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것에 대한 깊은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내 어찌 이것한테 할미 소리를 바랄 수 있겠느냐. 성씨 하나도 물려주지 못하는

주제에 할미는 무슨..."

부인은 손부 효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부인의

목소리에도 땀이 배어났다.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태어난 종손인데 이씨 성을 못 붙인단 말이냐. 이제야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온 보람을 다 했는데, 나라에 죄진 일도 없이 하루아침에

성을 뺏기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이 아이 하나가 태어나 주어서 나는

가문에 대한 도리를 다 하였다. 이제 구천에 돌아가 짐드신 조상님을 뵙더라도

이만하면 떳떳하다 싶었는데...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성씨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청암부인은 말끝을 맺지 못하며, 비분을 누르고 잠든 아기 철재의 조그만 주먹

을 가만히 잡는다. 여리고 봉긋한 봉오리 같은 주먹. 생각하면 지나간 세월이 꿈

결만 같다. 그 세월의 모든 고비와 질곡, 무서운 집념들이 모두 이 한 점의 생명

을 위하여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비로소, 천방지축 어지럽고 정신없던

나날들과, 편한 잠을 깊이 못 들고 항상 꼿꼿이 허리를 펴고 살아왔던 한세상의

기나긴 긴장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이 어린 생명 하나로 인한 평화로움은, 이미

죽은 선대의 선영과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안의 가솔들, 그리고 이제 다시 면면

히 이어질 후손들이 한마당에 모여 앉는 잔치 자리의 흥겨움이라고나 할까. 그

것은 이제 물길이 제대로 잡히고 순하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깊은 안도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청암부인은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뿌듯하고 그득

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불현듯 건넌방으로 건너오곤 하였다. 다만 애석하고

애석한 것은 창씨의 일이었다. 이런 심정은 일흔두 살 청암부인이, 사십칠 년

전, 이기채를 양자로 들여왔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기채를 품안에

받아 안았을 때, 스물다섯 살, 청상의 양모, 청암부인은 울컥 설움이 받쳐 올랐

었다. 어머니라는 호칭에도 가슴이 덜컥 하였거니와, 무릎에 안긴 아기의 살덩어

리가 가슴에 그대로 얹히는 듯 싶었었다. 내 무슨 운명으로... 젊은 청암부인은,

가슴에서 고무락거리는 어린 이기채를 방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형언할 길 없는

낯설음과 이상한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안하였다. 그

때 느꼈던 수치심과 불안은 그 뒤로도 아이가 웬만큼 자라도록까지 내내 가슴의

갈피 사이에 끼워진 채, 밖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청암부인과 이기채의 사

이에 남모르는 어려움을 만들게도 하였다. 그럴수록 청암부인은 이기채에 대한

의무를 다하였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 준 사람은 보쌈마님 김씨부인이

었다. 김씨부인은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궂은 운명 때문이었는지

천성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나, 나중에 쉰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도 웃는 얼굴을 보인 일이 몇 번 없었다. 몇 번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소리 내

어 웃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미소를 지은 정도였다. 그 대신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마루며 헛간이며 뒤안 마당과 텃밭을, 지성으로 쓸고, 닦고, 일

구고 하였다.

"집안에 사람 훈김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어서..."

가끔 그네는 청암부인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청암부인도 마찬가지였

다. 노복과 여비를 따로 둘 수 없었던 그때의 형편에 두 여인이 서로 의지하였

던 심정이란 기구하면서도, 그 만큼 절실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기채가 양자로

왔었다.

"애기 울음 소리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오. 청상에 두 과부만 우두커니 마주보고

살다가 이렇게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니, 갑자기 생기가 나고 재미도 절로 있

지 않소?"

김씨부인은 생전에 보여 준 몇 번의 웃음을 그때 웃었다. 처음으로 아기를 안고

잠들던 밤. 만가지 감회가 착잡한 가운데도 양모가 된 청암부인은 두려움을 가

누기 어려웠다. 어쩌면 자신의 속에서 자라나 자신이 낳았다면 그런 것을 느끼

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우선 아기를 안는 팔이 부드럽게 펴지지 않고 나무 막대

기처럼 딱딱했다. 그리고 품안에 묻힌 어린 것이 주둥이를 쫑긋거리며 어미의

젖을 찾는 시늉하는 것을 바라본 순간, 그네는 (어찌할꼬.) 싶은 망연함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뒤미처 무거운 짐을 맡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려놓을 수도 없

고, 함부로 들쳐 업거나 이고 갈 수도 없는 짐. 온몸의 정신을 한자리에 모아 소

중하게 지켜야 하는 짐. 그렇다고 울타리 두르고 겹겹히 감고 싸서 감추어 두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하는 것이랴. 이 어린 것을 한 가문의 뼈대 있는 종손으로

길러 내야만 한다. 그래서 스스로 일으킨 몸을 기둥처럼 세우고, 온 문중에 그늘

을 드리우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 날을 바라고 이 주먹만한 어린 것을 키워가

야 하는 것이다. (지푸라기로 대들보를 만들어야 하니, 그 일이 내 업이라.) 청암

부인은 한숨을 고쳐 쉬었다. (내 마음이 어미 될 준비가 전혀 없는데, 비록 핏덩

이 어린 소견이라 한들 나를 어미라 여기겠는가. 어린아이 세 살 이전에는 천지

조화의 무궁한 법칙과 자신의 앞날 운명까지도 다 예견한다는데, 내 행여라도

저를 짐스럽게 여긴다면 그 죄를 내가 받지.) 아무리 말 못하는 어린 아기이지

만, 이제 이미 모자의 인연을 맺어 한 품에 안고 안기게 되었으니, 어찌하든 어

미된 자의 행실과 심덕을 먼저 배우고 갖추리라. 그네는 속으로 다짐했다. 때 맞

추어 늑대가 바로 귀밑에서 아후 우으응 길게 울었다. 달구새끼, 토끼는 물론이

고 허술한 외양간의 송아지도 물어가는 늑대의 울음 소리였다. 그네는 흠칫 놀

라 저도 모르게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아이를 감싸며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김씨

부인 역시 아이를 생산해 보지 못한 여인이었는데 본디 성품이 무던한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가르친 것인지, 청암부인보다는 훨씬 손놀림이 수월하고 자상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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