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꿈에 애기를 보면 깨고 나서 근심질 일이 생긴다
고. 애기라는 것이 그만큼 애물이라는 뜻일 게요. 잠시 잠깐도 헛눈 팔면 안되
고, 너무나 애중히 섬겨도 안되고, 강아지나 풀나무 같이 저절로 크는 것도 아니
고."
김씨부인은 마치 아이를 길러 본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지도 했다.
"그래도 삼신할머니가 보듬고 키워 주시니 그 힘으로 사람되는 게지, 그게 어디
인력만으로 크겠소?"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삼라만상에 다 지켜 주는 신령이 있지 않은가. 물에 가
면 물귀신이 있고, 산에 가면 산신령이 계시고, 부엌에 가면 조왕신이 집안을 지
킨다. 그뿐인가. 하늘에는 일월성신, 땅에는 지신이 있어 천지의 기운을 조화롭
게 다스린다. 심지어는 닳아빠진 부지깽이조차도 오래 쓰면 넋이 생겨 아무 데
나 버려서는 안된다. 막대기 하나도 사람 손에 길들여지면 한밤중에 파랗게 불
꽃을 일으키는데, 하물며 목숨 있는 것들이랴. 그 중에도 영물 중의 영물이라는
사람은 일러 무엇 하리. 그러나 이기채는 몸이 약했다. (저것이 어미 젖도 채 떨
어지기 전에 나한테로 와 그런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짐승이나 사람이나 젖을
배불리 먹어야 성정도 온순하고 체구도 튼실한 것을. 제 아무리 정성으로 먹인
다 한들 암죽이 어찌 젖만하랴. 내가 혹여 저것한테 죄 지은 것이나 아닌가.) 얼
굴빛이 노르께한데다가 도무지 살이 오르지 않는 이기채는 이미 그때부터도 깐
깐한 성격을 감추지 못했다.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생모 보기가 몹시도 무안하였
다. 공연히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형님도 참 별 말씀을 다 허십니다. 아이가 실하고 부실한 것이 어찌 키우기 탓
인가요? 본디 제가 그렇게 타고난 것이지요. 제 품에서 컸다고 지금보다 무에
더 나아지겠는가요? 잘 먹지도 못하는 에미 젖이 암죽보다 나을 게 무에 있을라
고요?"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라 그런 생각이 들었네."
"그런 말씀은 차후에도 하지 마서요. 기채가 어디 제 아들인가요. 형님 정성으로
이만이나 컸는데 아직도 빌려온 자식 같으신가 보네요. 요새는 저도 기표란 놈
때문에 치다꺼리할 일이 하도 많아, 아이고. 형님이 내 대신에 기채 기르시노라
고 얼마나 노심하실까, 외나 제가 죄송하드구만요."
"그리 말해 주니 내 고맙네."
"형님, 저한테는 기표가 큰놈이에요. 기채 낳을 때 어쨌는지는 생각도 안나고, 시
방은 새집이로 서툴러요."
청암부인은 손아래 동서 이울댁의 말에 위안을 얻기는 했지만, 마음이 아주 놓
이는 것은 아니었다. 한 뱃속에서 나온 두 아들이건만 자기에게로 양자 온 기채
는 그렇게 약질로 애간장을 녹이는데, 그와는 달리 생모 품에서 크는 기표는 아
직 돌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 살 터울인 제 형의 몸집에 맞먹을 만큼 크고 충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청암부인에게는 민망하고 애석하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
네는 이기채의 담력을 길러 주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또 하나, 청암부인의
마음 한쪽에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는 근심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것은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일이 없는 말이었으며 내색조차도 한 일 없었지만, 이기채를 무릎
에 받아 안는 순간부터 그네의 마음에 덜컥 내려앉은 생각이었다. 이제 막 고물
거리는 어린 것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라볼 때 그 암담함은 더욱 깊어졌다. (저
손이 크고, 저 발이 자라서 과연 장정이 되어 줄 것인가.) 참으로 사위스러운 생
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네는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암죽을 떼고 밥숟가
락을 거꾸로 쥔 채 밥상 앞에 앉은 세살바기 이기채의 왜소한 몸집을 내려다보
면, 숨어 있던 불안이 거멓게 밀려왔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그네는 헤아릴 수
가 없었다. 그러던 하루 김씨부인이 무심히 반짇고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사람 사는 일이 한바탕 개미꿈이라드니, 나도 이제 늙어가는가."
"그런 말씀은 왜 허시는가요?"
"정신이 아물아물, 무얼 봐도 마음에 남지를 않고 헛본 것같을 때가 많아져서 안
그렇소..."
"몸이 허하신가 봅니다."
"그렇기도 허겠지. 나도 나이 삼십 중반을 넘긴 지 몇 해나 됐으니 이제 중늙은
이 아니요?"
중늙은이. 아닌 게 아니라 김씨부인의 겉모습은 염려하다거나 살빛이 두드러지
는 편이 못되었다. 어느덧 처음 보쌈으로 업혀왔을 때 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 때 문득 생각해 보면 내가 흙덩어리 같기도 하고, 나무토막 같기도 하고.
무심하기는 내 몸뚱이나 흙이나 나무토막이나, 하나 다를 게 없는 것 같소. 아마
나는 넋이 진즉에 빠져 나간 모양이요. 남어 있는 것은 형상뿐이고, 빈 집이나
매한가지라. 앞뒤 문짝 다 열어젖혀 놓고 바람이나 지나갈까, 누가 나를 채워 주
겠소...?"
김씨부인은 실패에 실을 감을 양으로 다시 반짇고리를 끌어당겼다.
"그래도 내가 청춘을 서러워 않고 세월이 가잔 대로 쉽게 쉽게 따라 늙는 것은,
초상을 두 번이나 치러서 그러는가 싶소. 참 이상한 일이지. 처음에 뜻밖의 일을
당허고는 그 양반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나도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마당에
왔다갔다 하는 문상객이며 사람들이 모두 허깨비로 뵈는 것이었소. 내, 그 경황
중에도 속으로 그랬지. 사람이 살었달 것이 없는데,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어
있는 줄 아는가 보다. 마치 움직이는 그 사람들이 흐늘흐늘 망혼들 같았으니. 그
러다가 두번째로 보쌈까지 와서도 또 궂은 일을 당허지 않었소...? 그때는 정말
로 이가 시립디다. 내 기구한 팔자를 서러워할 겨를도 없이 그만 살이 얼어붙어
버린 게요."
한참 동안 김씨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묵묵히 실패에 실만 감았다. 청암부인
도 실타래를 감고 있는 두 손목이 뻑뻑해지도록 입을 열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
렸다. 웬일인지 그 말은 김씨부인의 가슴 속에 가장 무겁게 얹혀 잇는 말일 것
만 같아서였다.
"사람은 뼈와 살로 되어 있으니, 뼈로는 일을 하고, 살로는 정을 나누는 것인가
싶습니다. 헌데 나는 이미 살이 식은 사람이 아니요? 그러니 무슨 청춘이 한될
일이 있겠소...?"
김씨부인이 감는 실꾸리에 한숨이 감긴다. (살이 식은 사람.) 청암부인은 김씨부
인의 말을 되받아 속으로 뇐다. 그렇게 말하는 김씨부인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
어 있었다. (때 맞추어 저절로 식어 준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끓어 넘치는
국물도 다 시간이 가면 미지근해지고, 더 두면 썰렁해지는 법. 사람이라고 다르
랴. 허나, 그렇게 식기까지 기다릴 수조차도 없어서 입김으로 불고 부채질로 찬
바람을 일으키어 서둘러 식히는 일도 더러는 있다. 우리 두 사람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기구한 명운을 탄식하고는 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의 몸이란 살로
만 되어 있지는 않은 것. 뼈로는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비록, 더불어
정을 나눌 사람이 없어 그쪽으로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으나, 아직은 뼈가 젊
으니 일을 해야지. 아마도 이 할 일 많은 가문에 들어온 내가 헛눈 팔까 보아
이렇게 홀로 버티게 한 것 같구나. 감축하옵게도 기채를 양자로 주셨으니 정성
으로 기르리라.) 그렇게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보이는 청암부인이 지우지 못한 그
림자는 신랑 준의였다. 그리고 마음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은 다름아니라
그 그림자의 그늘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박복한 두 여인네의 품안에 어린 생명
을 맡기려 들어온 기채가, 혹시라도 부정을 타지는 않을까. 보쌈마님 김씨부인이
타고난 운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 또한 소년과부로 남 사는 세상을 못 사는
사람. 행여, 이 거센 운수에 짓눌려 기채가 다치지는 않을 것인가.) 그러나 입 밖
에 내서 말을 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그네는 말에 정령이 붙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결코 함부로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 깊은 곳
에 지나가는 생각조차도 불길한 것은 황급하게 털어내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안하려 안하려 해도 떠오르는 이 생각은, 무엇 때문인가.) 결국 청암부인은, 피하
여 달아나던 생각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저것도 요절을 해 버리면 어쩌나... 정
성으로 길러서 열 살을 넘기고 열다섯을 넘긴다 한들,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덧없이 죽어가면 그 노릇을 어찌할 꼬 누구는 죽고 싶어 죽겠는가. 하늘이 주신
명이 그뿐이면 어쩌랴. 이 집안의 운이 비색하여 모두 선대에서 단명하였는데,
이 아이라고 벗어날 수 있을까. 더욱이 이와 같이 음침한 기운이 집안에 아직도
고여 있는데.) 청암부인도 말도 못할 두려움에 숨을 죽였다. 어디 가서 속 시원
한 언약을 받을 곳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무거운 속을 털어내 놓을 곳도 없었다.
돌아보면 첩첩산중이고 올려다보면 텅 빈 하늘뿐이었다. (세상에 막막하기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김씨부인이 곁에 있다 하나 그는 나와는 또 다르다. 막
말로 그 양반은 이제 죽으나 내일 죽으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받아 안은 나보다는 그래도 가볍다.) 천지에 의지할 곳 없다는 생각이
등골에 사무치며 오르르 몸이 떨렸다. 그 순간 청암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
을 움켜쥐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인력이 자극하면 천재를 면하나
니. 이 뼈가 우뚝 서서 뿌리를 뻗으면 기둥인들 되지 못하랴. 무성하게 가지 뻗
으면 지붕인들 되지 못하랴. 그네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양자 기채를 서리 맺힌 눈매로 바라보았다. 기채는 세 살 버릇 그대
로 밥숟가락을 수북하게 해 본 일 없이 마디게 자라났다. 그는 밥만이 아니라
다른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명절이면 색다르게 준비되는 음식들도
손가락 끝으로 한 점 떼어먹는 시늉만 할 뿐, 상을 밀어내면 그뿐이었다.
"아가. 이 엿 좀 먹어 봐라. 이것저것 잘 먹지도 않는데 허기지겄다. 이런 엿은
입에다 넣고만 있으면 저절로 안 녹냐? 먹는 데 힘들 것도 없겠구마는."
청암부인이 애가 닳아 모반에 엿을 담아 내주어도 어린 기채는 기껏 한 조각 정
도만 맛을 보았다.
"입에서는 달고, 뱃속에 들어가면 빈 속에 진기도 있을 텐데."
노르께한 낯빛으로 앉아 있는 이기채를 온갖 말로 달래어 겨우 한 조각을 더 먹
이고 나서
"그럼 무엇 해주랴?"
하고 물어도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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