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떠나는 사람들
“만약에 이 지상에 오직 군소 국가들만 존재한다고 하면, 아마 지금보다 인
류는 훨씬 더 평화롭고 자유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한 뱃속의 새끼도
아롱이 다롱이라고 하는데, 생성 존재의 근원이 다르고 역사와 문화가 다른 국
가, 엄청난 이권 조직인 국가가 너나없이 어슷비슷 올망졸망 그만그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각기 그 나라의 힘대로 세력이 달라져서 종국에는 힘센 놈. 약한 놈
이 생겨나기 마련인즉. 강대 국가의 존재란 불가피하지. 그런데 강대 국가가 있
으면 반드시 상대적으로 약소 국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고 강대 국가와 약소
국가의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평화.평등이 아닌 약육강식이 이루어진단 말이야.
약육강식. 천지만물 삼라만상의 본능적 현상이 바로 약육강식이 아니냐. 말없는
우주의 원칙이 그러할진대 국가와 국가, 가문과 가문,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
관계가 명확하게 집행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조선의 처지도
강에 먹힌 약의 대표적인 것이지만...군소 국가는 나라가 작어서가 아니라 약하
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는 거야. 반대로 강대 제국은 나라가 커서가 아
니라 강하기 때문에 번성하는 것이고. 결국 그 나라의 선.악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이 국가 번영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는 셈이지. 비단 국가에만 그런 것이 작
용되는게 아니야. 무릇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오직 힘이 필요해. 힘. 물리
적인 힘만이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존속의 첫째 조건이 되는 거야.”
강태는 더부룩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앞에 놓인 청주잔을 든다.
손톱 주변에 허연 꺼슬이 일어나 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이마를 덮으며 흘러내린 머리칼에 가리어진 눈썹이
새까맣다. 그래서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하관이 좀 빠른 듯한 모습은 아버지 기표를 그대로 닮았다. 그러나 차갑
게 다물고 있을 때의 입술 선은 어찌 보면 기표보다 더 이지적이고 냉정한 성격
으로 느껴지게 한다.
강모의 얼굴도 초췌하다.
지난 여름 오유끼의 사건으로 집안이 뒤집히고 난 뒤, 이기채는 강모를 작은
사랑에 가두어 두다시피 하였다. 심지어는 안채의 어머니 율촌댁에게 가는 것조
차도 금하였으며, 그러지 않아도 소원한 효원의 건넌방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
었다.
몇 십 년 만이라는 가뭄은 유난하여 누런 먼지가 황토빛으로 지붕을 뒤덮었는
데, 큰사랑에서는 놋재떨이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도 멎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부자가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또는 특별히 꾸중
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강모를 방안에 가두어 둔 채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하였다.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스물한 살씩이나 먹은 장정, 애기 애비가
된 자식을 어린애들처럼 방안에다 가두고 그러시요?”
율천댁은 보다 못하여 이기채의 사랑에까지 나와 탄원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기채는 이기채대로 바늘끝같이 과민하여 신경이 벌겋게 청혈되어 있어서,
옆에 누가 서기도 두려워했다. 그가 지나가기만 하여도 살을 베는 바람이 일어설
정도였다.
이기채는 강모를 증오하였다.
강모는 아버지 옆방에 갇히어 녹아 내리는 더위와 허적함, 그리고 견디기 어
려운 모욕감 때문에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강모의 얼굴빛은 누렇다 못하여 검은색을 띠었다.
“너도 마셔라.”
“예.”
강모는 술잔을 든다. 깍정이만한 도자 술잔의 푸르스름한 광택이 얼굴의 검은
빛을 더욱 검게 보이게 한다.
그들은 오랜만에 이렇게 서로 마주앉아 있는 것이다.
“결국 군소 국가의 매 앞에 병아리같이 그 존망이 위태로워, 우여곡절을 겪
고 싸우고 버티어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강대 제국에 완력으로 연합되어 버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불쌍한 것은 그러한 군소 국가에 태어난 국민이지. 자체
를 방어할 만한 힘도 없고, 궁핍을 면하게 해줄 방도가 없는 국가에 태어난 국민
으로서는, 남의 나라 종노릇을 하는 것이야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것은 국
가와 국민의 운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한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인 거야.”
강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을 하고 있을 때보다도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 훨씬 차갑다. 사기처럼 단
단하고 날카로운 얼굴은 강태가 강모보다 팔구 세는 연상으로 보였으나, 쇠잔한
표정에 시달리느라고 탈진한 듯 보이는 강모는 얼른 보면 강태보다 더 겉늙어
보인다.
실제로 두 사람은 두 살 차이밖에 안되었다. 조금만 의기가 통한다면 호형호
제 할것도 없이 막 터 놓고 지낼 수 있는 처지인 것이다. 거기다가 종항이 아닌
가.
그런데도 강모는 강태에게 깍듯이 형님에 대한 예우를 다하였다. 그만큼 강태
를 어려워한 점도 있었고, 또 성격상의 차이로 그다지 친숙하게 지내지 않는 탓
도 있었다.
“강자와 약자. 과연 무엇이 강자이고 무엇이 약자인가? 간단해. 힘을 가진 자
는 강하고, 힘이 없는 자는 약하다. 힘? 그렇다면 힘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인품도, 체력도,학문도, 가문도, 힘이 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구체적으로
사회적인 힘을 발휘할수 있는 것은 결국 자본이야. 그것은 분명하고 강력해. 자
본이 있는 자는 강하다.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자는 약하지. 있는 자와 없는 자,
이 적대적인 위치의 두 계급은 필연적으로 반목하고 갈등한다. 이 갈등은, 있으
면서 좀더 착취하려는 자의 폭력과, 없으면서 어떻게든 생존해 남으려는 자의
몸부림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온단 말이야. 그것은 한 마디로 압제자와 피압제
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
그런 관계는 다른 형태로도 나타나, 자유인과 노예, 귀족과 평민, 봉건 영주와
농노, 장인과 직인, 이들은 역사 이래 서로 적대 관계에 있어서. 헌데 이들은 적
대 속에서도 서로의 이익을 위해 외형적으로 꾸준히 그 관계를 유지해 왔거든.
그만큼 투쟁과 갈등의 역사도 긴 셈이지. 이들은 때로는 은밀히 암투로, 때로는
치열하게 끊임없이 싸워 왔으니까. 이 싸움이야말로 한 역사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고, 한 계급이 무참히 짓밟히거나 또는 두 계급 모두가 비참하게 멸망하는 것
으로 끝나기도 했다.“
강태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다문 입귀가 칼끝 같다.
강모는 강태의 모습에 이상하게 기가 질리는 기분이 되었다.
“너는 궁도령으로, 하층민 계급이 아니니까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쪽 이야기
가 한낱 피상적인 이야깃거리 정도로 들리겠지. 그렇지만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살고 누리기 위한 조건들, 또는 기본적인 아무 권리도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제
몽뚱이 사지를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한 재산인 노동자, 농민, 그 빈곤한 하층민
계급이, 사실은 인류의 대부분이야.
즉 약육당하는 계급이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집안만 보더라도 문중의 종가
인 큰집 하나를 빼고 나면 나머지는 거의가 곤궁해. 다 떨어진 문서 쪽지에 양
반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하다만.
그래도 문중 사람들은 가문과 학식이 있으니까 기본적인 긍지와 생활은 보장
돼 있다. 그러나 도래도래 그 몇 집을 빼고 난 인근 주민, 소작인, 하인, 노비, 거
멍굴, 사람들, 그 외에도 엄청난 착취에 시달리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한 사
람들을 직접 네 눈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 논이나 밭이나 혹은 다른 자본의 아
무런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노동력만을 생존 수단으로 가진
이 사람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단 말이다. 그것은 이미 착취당하기
로 사회와 약조된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는 말
도 있다만, 그 하찮은 언덕 하나가 없어서 순수하게 자신의 손발만으로 살아가
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분이 결정되는 거야.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분이란 자신의 사회적 위치, 그 위치에 따르는 권리를 말
하지. 신분이 자기 일생을 결정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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