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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7)

카지모도 2024. 2. 2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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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면서부터 시작해서 초겨울이 되도록 분주한 집 안팎의 일로 이기채가

사랑을 비운 사이에 도망치듯 빠져나온 강모였다. 그의 얼굴은 여름보다 더 말

할 것도 없이 상해 있었고, 목소리조차 버슬거렸다. 그는 말이 없다.

강태의 눈빛이 강모의 모습을 쏘아본다.

“너,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 개개인의 천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바둑판같이 미리 짜여진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을 어떻게 생각허

지? 누백 년 누천 년 세월과 문화가 켜켜이 쌓여 요지 부동의 전통으로, 혹은

물 밑바닥 같은 잠재 무의식 전통으로, 견고하게 판짜기 돼 있는 사회적 현실,

말하자면 신분 세습이나 그 세습이 만든 계급은 낱낱의 개인을 인정하지 않아.

무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 무리는 모두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아니, ‘있지

’라기보다 ‘있어야’한다. 그것은 엄격한 규범이니까. 눈다르고 코 다른 개개의

사람들이 규범의 강제 명령으로 모두 판에 박은 의식을 가져야만 한단 말이다.

물론 상당한 권리와 신분을 보장받고 태어난 너로서,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

없이 이 말을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허나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별도로, 사회

로부터 강요받게 되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너도 알아야 한다. 그 개인이

아무리 특출해도, 또 남이 가질 수 없는 재능을 내면에 가지고 있어도, 서자나

얼자, 노비, 상민들은 양반 상전에 대해서 무조건 피압박적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부당한 일이지. 봉건 신분 제도에서, 또 근대에 이르러, 그것은 좀더 다른

양상의 갈등을 야기시키는데 그게 바로 자본가와 무산자의 갈등인 게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것은 예전의 신분 계급보다 더 치열하고 지독한 압제와 피

압제의 관계로 부딪치기 마련이지. 있는 자는 있는 만큼 누리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고 말 테니까.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아흔아홉 섬 쌀을 가진 사람이 한 섬 쌀을 가진 사람

한테 내 쌀을 백 가마로 채우게 너의 한 가마를 달라고 한다지 않았느냐. 아흔

아홉 가마 가진 눈에는 그까짓 한 가마 있으나 없으나 별 거 아닐 것 같고, 기

왕에 없는 형편, 그 한 가마 없으나 있으나 별차이 없어 보이는 게지. 자신의 숫

자를 채우기 위해 남의 전부를 빼앗으면서도 명분이 있는 사람들. 이것이 자본

가다. 구십구분지 일과 백분지 백의 비중이 가늠되지 않는 편견, 이것이 자본가

의 의식이야. 그러니 빈곤한 한 가마가 전 재산인 무산자는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 필연적인 갈등 관계는, 이제 두고 봐라만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며, 투쟁은 곧 혁명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혁명인 이론이 아니라 유

혈이다.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그 무엇의 영향이나 압제를 받지 않고 오직 자기

가 책임을 지며, 자기가 제 존재를 스스로 성장 발전시켜 인생을 이루어갈 수

있는 사회야말로 바람직 하지 않겠어?

그러나 부당하게 가진 자가 있는 한, 그런 사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불가능한

거야. 거기다가 가진 자나 자본 계급은 결단코 저절로 멸망하지도 않지. 또 자본

계급과 무산 대중이 평화스럽게 타협할 수는 더더구나 없는 일이다. 결국 먹느

냐 먹히느냐라는 사생결단의 피투성이 싸움이 있을 뿐이다. 이 두 계급에 싸움

이 벌어진다고 할 때 너는 어느 편이냐, 그리고 나는 어느 편이냐.“

강태는 다시 청주 잔을 든다.

초겨울 저녁의 스산한 바람 소리가 어디서 들릴 것만 같다.

그것은 강모의 몸 빈 곳에서 일고 있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한 겹 창호지로 막힌 장지문 바깥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

고, 자리를 끝낸 사람들이 일어서서 돌아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다.

“어이, 여기 술 가져와.”

바로 옆방에서 손바닥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예에, 예.”

젊은 여자가 호기롭고 다급하게 대답하며 게다를 따그락 따그락 끌고 주방 쪽

으로 가는 모양이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옆방에 한 패가 와글와글 떠들더니.

까르륵, 여자도 섞인 웃음 소리가 터진다. 젊은 웃음 소리가 간드러진다.

강태가 눈살을 찌푸린다. 강모는 그 웃음 소리에 착잡한 심정을 금하지 못한

다. 바람이 이는 공중에, 연기 같은 흐릿한 기운을 몰고오는 풍연처럼 그의 가슴

에 자욱한 먼지가 일어난다. 그것은 취기일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강모는,

벌써 반은 취한 것 같았다. 이야기는 주로 강태 혼자서 하고 강모는 잔을 비우

고만 있었으니, 취할 만한 때가 되기도 하였다.

“형님, 술 좀 더 허십시다.”

강모는 강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깥을 향하여 손뼉을 쳤다. 잠시 후에

젊은 여자가 쟁반에 도꾸리를 받쳐들고 들어와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앉더니,

상 위에 놓인 빈 도꾸리를 쟁반에 담아 가지고 뒷걸음을 치며 조용히 나간다.

기모노의 깃섶이 가슴 깊이까지 패어 있어 흰살이 드러나 보이는 여자다.

고사정의 망월. 모찌즈끼.

전에 오유끼가 있던 일본 요릿집이다.

강태는 금방 놓고 간 새 도꾸리에서 술을 따랐다.

“지난번에 쇠여울네가 큰집에 가서 부린 행패만 해도 다 그런 싸움인 셈이

다. 지금은 그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지만, 이제, 곧,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무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말하자면 혁명 말씀입니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야. 역사의 본능 같은 것이기도 하고.”

“나 같은 사람은 구경하다가 말려들어 죽을 겁니다.”

말투에 빈정거림이 역력하다.

“기생첩을 끼고 헛눈이나 팔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

강모의 얼굴이 순간 벌개졌다가 가라앉는다.

“사람 사는 것이 백양백태라, 내, 무어라고 말할 처지는 못되지만 너도 참 딱

한 사람이다. 그래, 젊으나 젊은 청춘에 벌써 그렇게 곰삭어서, 한평생의 경영으

로 기생이나 데리고 살다 말 것이냐? 그래도 소위 장부라면 무슨 뜻을 세워야

할 게 아니냐고...뜻을.”

“뜻이야 형님이 다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비루한 나야 이렇게 살다말지요,뭐.”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강태가 입맛을 쩍 다신다. 못마땅한 기색이다.

“긴 말 할 것도 없어. 이제 나이 겨우 스물한 살에 네 모습이 그게 뭐냐? 매

사에 우유부단, 꿈꾸는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로 그냥 오직 자신을 소비하면서

살다니 그게 말이 돼? 무슨 각오도, 결심도, 야망도 없이, 그렇게 살고 있어? 정

신을 차려라, 정신을. 앞으로도 오십 년은 더 살아야 할 사람이, 지금부터 이래

가지고서야 무슨 힘으로 그 세월을 버티고 살 수가 있단 말이냐.”

“형님...형님은 그렇게 오래 사실 생각입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혁명을 하실 분이 어떻게 오십 년씩이나 무사하게 목숨을 보존할 수가 있단

말이요?”

“허 참, 그래서?”

“그러고, 혁명 투사 아니라도, 우리 이씨 문중 사람들, 장수한 사람 없습니다. 단

명해요. 가운이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가 더 드세고 질긴 집안이올시다.

둘러보세요. 장년을 넘기고 칠팔십까지 장수하신 분, 눈에 띄는가. 어쩌다 남보다

는 좀더 길게 사신 분도 계시지만, 그런 어른들은 또 처덕이 박하여 삼취 사취

를 하셨어요. 나는 예감이 있어요. 오래 살 힘도 없지만, 살 수도 없을 겝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점점 이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지금?”

“두고 보면 알 일이지요.”

강모의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전등 불빛이 만들어 준 그의 앉은 그림자가 쇠잔하게 보인다.

“그럼 단명할 것을 미리 예감하고 기왕에 일찍 죽을 것, 부질없이 날치는 내

가 한심해 보인다. 그거냐?”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강태의 눈꼬리가 치켜진다. 그리고 쩟, 혀를 찬다.

“형님, 아까 착취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인간은 반드시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면에서만 착취당하는 건 아닐 겝니다.”

강모는 아까보다 좀더 취하였다.

그의 가슴속에 보통 때는 그저 막막하고 어수선하던 것들, 형태를 알수 없이

짓눌리는 것 같던 것들이 취하기 시작하면서 확연하게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는

데, 강모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다시 잔을 들어 비웠다.

허전함이 야기처럼 가슴을 쓸며 젖어내린다.

그리고 술이 지나가는 자리에 텅 빈 길이 뚫린다. 밤길이다. 음습한 동굴 속

같기도 하다. 그 어둡고 캄캄한 곳에, 홀로 후줄근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

인다.

그 모습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술잔을 비운다.

허전한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가 흥건하게 젖는다.

“형님, 사회 구조 속에만 계급이 생기고, 적대감이 생기고, 무능력한 노동자,

농민이 생기는 것은 아니올시다. 자기의 존재 단위를 깨닫지 못하고, 그 존재 단

위를 생산으로 확산시키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그 자는 바로 의식의 무산

자 아니요?”

강모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나는 가난한 자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짓눌렸으니 나야

말로 피지배 계급이 아닙니까? 아니, 태어나기도 전부터 짓눌린 채 어쩔 수 없

이 이 세상으로 밀려나온 건지도 모르지요. 할머니의 한 맺힌 기대, 아버지의 엄

격한 틀에 박힌 기대, 어머니의 눈치 섞인 기대, 가문의 무거운 기대, 종손에 대

한 허울뿐인 기대...안사람...그 태산 같은 사람의 기대...거기다가 인제는 터무니

없게 생겨난 자식까지도, 나에 대해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형님,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에 빈 손바닥뿐인데, 나는 내 몸뚱이 하나에 빈 손바

닥뿐인데, 나는 내 몸뚱이를 착취당하고 있는 거요. 이건 이름만 내 몸뚱이지 사

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어요. 하나 둘이 아니라 줄줄이, 주인들

이 성벽처럼 에워싸고 있단 말입니다. 모두가 나한테 주는 척하지만 오히려 빼

앗으려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나는 내 몫이라고는 가져 본 일이 없었소. 도대체가

내 생각조차도, 나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거요.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그

들의 공유물이었습니다. 형님. 그 지배 계급에 대해서 이 착취당하는 무산 계급,

없는 자가 할 일이란, 뭐라고요? 혁명? 하여튼지 간에, 혁명....이라고 하셨지요?

그게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도대체. 나, 그 혁명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터

져 버리고 싶어요. 형님. 나는 산화해 버리고 싶다고요. 붉은 심장을 허공 중에

꽃잎처럼 찢어 날리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나는 죽어가고 싶습니다. 형님. 형님은

좋으시겠소. 사상이 있고, 야망이 있고, 행동이 있으니, 빛나는 보람도 있을 게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잃은 것이 아니라 가져 본일도 없어요. 이

있는 둥 마는 둥 실없는 인생을 한번 뒤집어 보고 싶은 심정을, 형님, 아실 수

있겠습니까? 형님...나는 힘 가진 사람이 무섭습니다. 두려워요. 이목구비가 또렷

또렷, 튀어나올 것 같은 사람, 나는 겁납니다.“

강모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장황한 말을 쏟아 놓는 그의

모습이 불안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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