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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8)

카지모도 2024. 2. 25.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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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 취했구나.”

강태가 잔을 들며 강모를 본다.

“예, 취했습니다. 오늘 술 좀 마셔야겠습니다. 형님, 나도 한번 취해 봅시다.

나는 지금 무엇에든지 흠방 빠져서 물에 빠진 새앙쥐같이 되고 싶습니다. 익사

라도 하고 싶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왜 나는 취해지지 않습니

까? 그건 왜 그래요? 나는 구경꾼. 나는 내 운명에서도 구경꾼 노릇밖에는 못하

고 죽을 거요.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아니, 이 사람이 정말로 취했구만. 자,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늦었어. 나는

또 갈 곳이 있다.”

“아직 멀었는데 뭘 서두르십니까? 그렇게 서두리지 않아도, 인간이 함께 있

는 시간이란 찰나에 불과한 것인데, 오늘 내가 좀 마시면 안되겠습니까?”

“주정을 하려는 것이냐?”

“아니요. 아닙니다.”

강모는 술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물끄러미 도꾸리를 바라본다.

“그럼, 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디 네 말 좀 들어 보자.”

“사실 난 할 말도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이상하구나.”

“그러나 어쨋든 이대로는 안되겠습니다. 더는 못 견디겠단 말씀이오. 나는 살

아 있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그래서?”

“혁명, 나도 그 혁명이라는 걸 좀 하게 해 주십시오, 형님. 유혈이면 더욱 좋

습니다.”

“이 사람이. 혁명이 무슨 몽상적인 연애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가?”

“그렇다면 형님, 당신은 실속도 없이, 허울 좋은 이론만 밝은 이론가올시다.”

강태의 눈에 모가 선다.

“몽상...그래요. 나는, 나의 인생을 다만 몽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허나 뒤집

어 보면 누구의 인생인들 몽상이 아니리요...혁명이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곧 커다란 몽상일 겝니다.”

“너는 어쩔 수 없는 부르조아야.”

“부르조아? 그럼 형님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압니까?”

“그만 마셔라. 일어서자.”

“형님, 당신도 부르조압니다. 반대로 나도 프롤레타리압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형님은 도대체 그 혁명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합니까? 진정으로 이 사

회에 변혁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혁명을 하고, 사유 재산

을 폐지하고, 모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하고, 그래서 진짜 평등 사회를 과연 실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 그것은 명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내 생각은 이래요,

형님 말씀대로 인류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강자와 약자의 꾸준한 갈등

과 투쟁 속에서 역삭를 이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강자의 권력과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약자의 설움과 분노는 그만큼 큰 것이

지요. 그들의 분노와 설움이 드디어 포화 상태에 이르러, 폭동이든 반란이든 간

에 이름이야 무어라고 붙여도 좋지만, 하여튼 변혁을 일으킨단 말이요. 형님 말

씀마따나 혁명을. 그래서 강자가 무너지고 약자가 세력을 잡는 수도 있겠지요.

허나, 민중은 대다수이니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일선에서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대표자를 뽑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대표자는 새로운

강자 집단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복수심에 가득 차서 훨씬 더 잔혹하게, 언젠가

자신이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민중의 무서운 잠재 세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조직적인 말살까지를 곁들여서... 종이 채를 잡으면 형문부터 한다

지 않아요? 종이 종한데 상전 노릇하는 것은 더 무섭지요. 형님의 혁명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약한 자들이 형성한 권력, 이들은 또

다른 계급을 형성할 게 아닙니까? 이미 그들은 어제의 약한 자가 아니라, 이제

는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 강자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탄압당하는 계급이 반드시

상대적으로 생겨날 것이고.

말하자면,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그게 그것 아닙니까, 형님의 내심에는 이름만

바꾼 독재자적인 교묘한 야심이 숨어 있단 말씀입니다.“

강태는 사기처럼 차갑고 단단한, 창백한 얼굴에 푸른 빛을 띠면 강모를 쏘아

본다. 입귀가 아까처럼 칼끝 같아진다. 상 위에 놓인 술잔을 잡은 손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연, 진정한 평등 사회가 이 땅 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이

상에 불과합니다. 하찮은 미물 곤충도 강한 놈은 약한 놈을 잡아먹습니다. 물론

사력을 다하여 강적과 싸워 내는 놈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그 한순간에

불과한 것, 한 번은 이기겠지만 돌아서면 다른 놈한테 결국 잡혀먹힙니다. 하다

못해 잡초, 들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그렇지요. 번식력이 강하고 뿌리가 억센 놈

은 생명력이 약한 풀뿌리를 죽게 합니다. 약한놈이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

디에도 없습니다. 자연이고 인간 사회고, 약한 놈은 학대받아야 합니다. 학대받

고 일찍이 죽어야 한다고요...곤충, 미물, 잡초의 생리마저도 이러한데, 하물며 인

간에 이르러 무슨 말을 더 합니까?”

“그렇지 않다.”

강태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어서 일어서자고 하던 때와는 달리 그는 차갑게 말꼬리를 내린다. 그의 말꼬

리에 묻은 찬 기운이 시리다.

“너는 혁명의 아름다움을 아느냐?”

강태는 바늘 같은 눈빛으로 묻는다.

반대로 강모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퍼져 오른다.

그는 지금 알 수 없는 열기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꿈꾸고 있는 세계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것은 과거의 모반같은 것이

아니지. 지난날의 반란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가 달성한 것, 말하자면 옛

권력층에 대한 새로운 권력층을 형성한 것이었어. 허나, 오늘날 우리의 혁명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대다수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명제이다.”

“과연 거기서 형님의 역할은 무업니까? 지도자를 따르는 민중입니까? 민중을

지도하는 지도잡니까?”

“나는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기르고 있는 중이다.”

“거 보십시오. 벌써 형님은 하나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혁명을 목

표한다는 형님의 이론에서도 민중과 지도자라는 구분이 생길수밖에 없지 않습니

까?”

“그것은 명칭이고 역할일 뿐이지. 우리는 모두 동지야.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

로 자신을 해방하고 전 민중을 해방한다. 그 해방을 통해서만, 인류 사회는 비로

소 착취 없는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거다.”

“착취, 착취, 도대체 착취가 아닌 관계도 있을 게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렇

게 극단적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집안의 할머니도 착취자란 말씀인가요?”

“그렇지.”

“뭐어요? 형님.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아닙니다, 형님.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할머니도 처음에는 빈손이셨습니

다. 당신혼자 힘으로 그 재산을 이루신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훨씬 지독한 착취를 하신 거다. 교묘한 방법으로, 전혀 눈

치채이지 않게, 한쪽으로는 덕을 베푸는 척하면서, 소작인으로부터 빨아들일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재산까지라도 흘리지 않고 악착같이 빨아들인 거지.”

“아니, 형님. 진정으로 하는 말씀이시오?”

“봐라, 강모야, 물물 교환이라는 직접적 교환 방식으로 살아왔던 원시 시절에

는, 필요한 물건과 물건을 바꾸는데 거기에 이윤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 교환

방식은 정직하고 평등한 관계였지. 거기서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보다 이익

을 보는 일이란 없다. 물론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 동등하게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바꾸어 가졌어.

그런데 말이야. 자본주의적 본질은 그게 아니야. 돈에서부터 시작하여 돈을 얻

게 되는데, 처음에 가졌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으로 거래는 끝나지. 왜

사람이 교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지 않았던 것을 획득하게 된단 말인가?

적어도 어떻게, 처음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이 획득할 수 있게 되는가?

이상하지 않으냐,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너 그 이윤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

지? 요술인가? 환각인가. 아니야. 결국 자본가에게 노동자가 자기의 몫을 터무니

없이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주어야 할 몫을, 즉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이지.

노동자나 농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가 되겠지만, 이 사람들은 오직 노동력 하

나가 전 재산인 사람들이야. 그런데 이 노동력이 자본가의 자본, 즉 임금과 정당

한 물물 교환이 안되고 있는거다. 노동자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 일한 노동력

전부에 대하여 원시 사회의 물물 교환처럼 올바르게 보상받는 것이 아니고, 오

로지 몇 시간 몫어치만을 임금으로 받고 만다. 나머지의 노동 시간은 보상받지

못해, 그러니까 그 나머지 잉여 노동 가치는, 모두 기업가나 자본가, 혹은 지주

가 갖게 되는 거지. 말하자면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극히 일부분만을 값으로 받

는 셈인데, 자신의 나머지 노동, 거의 대부분의 노동은 고용주가 차지하게 될 잉

여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 바치는 것이다. 할머니와 소작인의 관계도 마찬가지

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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