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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9)

카지모도 2024. 2. 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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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는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큰일날 말씀입니다.”

“아니다. 할머니가 생전에 이루신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이, 뒤집어 말하면 소

작인들에게서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고 그악스레 긁어 모았다는 증명밖에 더 되

겠어? 정당한 물물 교환으로 할머니와 소작인이 서로 평등하게 이익을 나누었다

면, 도저히 그런 재산을 모을수가 없는 일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으냐? 그 양반은, 지주로서의 특권과 횡포를 최대한으로 누리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

“형님은 그렇게도 할머니를 증오하십니까?”

강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쥐고만 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마

셨다. 뒤로 젖힌 그의 턱과 목으로 흐르는 선이 날카롭다.

“봄에 꾸어 먹은 곡식을 가을에 이자 붙여 갚는 환자야, 나라에서도 다 행하

는 상례법이었습니다. 없는 사람이 긴요히 쓸 때 빌려주고 나중에 가을 걷어 받

는 것이 무어 잘못입니까? 전고에 조선의 숙종 임금 6년, 남원부사로 부임한 조

위유는 백성들이 여러 가지 역사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갖은 애

를 다 써서 처음으로 보민청이라는 기관을 세우고, 말 오십 필을 준비 했다고

합니다. 모든 관용 물자 수송에 이용하려는 것이었지요. 말 그대로 백성이 괴로

움을 덜어 주고 도와 주는 곳이라, 이것이 생긴 후로 백성들은 무거운 짐을 등

에 지고 먼 곳까지 나르는 노역이 없어져, 조부사의 선정을 높이 치하했다지 않

습니까?”

허나 이렇게 편리한 기관도 기본 재산이 없어, 이를 계속 유지 운영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조부사는 논 오십 마지기를 사들여서 보민청 기본 재산으로 삼고,

그 소작료나 이자 수입으로는 본청 운영을 했던 것입니다. 허나 세월이 갈수록

쓰임새가 늘어나 자금이 모자라니, 후에 영조 33년에 부임한 부사 이인석이 다

시 논 사십 마지기를 마련해서, 같은 방법으로 활용해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증식의 과정에서도 장리는 쓰인 방법이에요.”

강모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할머니 청암부인이 남도 아닌 종손자 강태

한테 이처럼 여지없이 매도당하는 것이, 마치 자기 탓이기나 한 것 같아, 그는

단호히 반론을 편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 조부사가 세운 사객청만 보아도 증거는 분명합

니다.”

사객청은 손님 맞는 일을 치르는 관청이었다.

남원도호부는 직할 구역 48방 이외에 남원을 에워싸고 있는 1부.1군.9현, 즉

담양부와 순창군, 그리고 임실.무주.곡성.진안.용담.옥과.운봉.창평.장수의 아홉 개

현을 관할하여, 그 규모가 가히 호남의 웅도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용성

관은 날마다 공무를 띠고 분주히 드나드는 높고 낮은 관원들을 접대하느라 북적

북적 붐비었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내방객들 치다꺼리에 관수미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 산더미같이 밥을 해도 빈 숟가락 돌리기가 일쑤였다. 따라서 자연히

부성에서 밥술이나 먹고 사는 집의 신세를 자주 지게 되니,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보민청을 세운 조위유 부사는 궁리 끝에 백성들한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손님들을 전담하여 대접하는 사객청을 세웠던 것이다.

“허나, 비용 없이 이런 일을 어떻게 꾸준히 행할 수 있겠습니까? 조부사는

백미 백 석을 사객청 기본 재산으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사객청에서는 이 쌀을

가지고, 춘궁기에 아쉬운 사람한테 빌려 주었다가 약간의 이식을 붙여서 가을에

는 거두어들였던 것입니다. 그 수입 가지고 모든 내객들 접대하는 비용을 했던

게지요. 이로 인해서 출장 관원들의 관폐와 민폐는 크게 덜어져 백성들이 환호

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조부사의 운영 방법이 대단히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합니

다. 그래서 남원부성 부민들이 조부사의 선정을 칭송하며, 길이 잊지 않으려고

송덕비를 아로새겨, 광한루 한복판에 우뚝 세워 놓은 것 아닙니까? 형님도 보셨

지요?”

영세불망.

할머님께서도 마찬가지시지요.

“흥, 송덕비? 그것은 대체로 끔찍한 허위다. 너는 남원부사 조위유만 알고, 고

부군수 조병갑은 모르느냐? 탐관오리. 그는 고종 30년에 흉년이 들자 농민들한

테 강제로 세를 징수하는데, 부유한 농민들을 무참히 잡아들여 온갖 죄목을 씌

워서 이만여 냥 재물을 빼앗았으며, 태인현감을 지낸 제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

다고 백성의 피와 기름을 짜내 천여 냥 돈을 거두기도 했다. 만석보에 관한 일

이며 전봉준까지는 이야기를 끌고 갈 필요도 없어, 저 즐비한 똥막대기, 비석거

리, 그것은 진부한 위선의 행렬이며 압제의 사열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세웠다는

그 송덕비에 적힌 노래, 그래, 덕을 노래한 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인민은 과연

몇이나 될까? 대개는 단 한 자도 읽지 못한다. 모른다. 눈끔쩍이 까막눈. 그렇다

면 과연 저 번쩍이는 비석은 누구 보라고 누가 세운 것인가. 우스운 일이지. 우

리는 이것부터 부셔야 한다.”

강태의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뻗친다. 불빛을 받은 힘줄의 그림자가 꿈틀한

다. 그러나 강모도 지지 않는다.

“형님, 하나 물읍시다. 도대체, 더 좋으면 누구를 위해서, 더 나쁘면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나는 다만 혁명을 통해서 평등 사회를 이루고 싶을 뿐이야.”

“형님, 그렇다면 혁명을 하십시오. 부디 찬란한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래

서 이상을 실현하세요. 그러나 이제 두고 보십시오. 당신들은 새로운 권력자들이

될 테니까. 옛날의 권력자들은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행사했지만, 형님,

이제 당신들은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게 될 겁니다. 악순환이

에요. 그래서, 존재는 끝없는 갈등이올시다.”

강모의 얼굴이 슬프게 기울어졌다.

희미한 촉광의 전등 불빛이 강모의 검은 얼굴을 쓰다듬듯이 흘러내린다. 옆방

의 손님들이 와글와글 떠들면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린다. 뒤따라서 젊은 여자들

의 아양스러운 인사말이 끈끈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에서 부연 분냄새가

풍긴다. 누가 어떻게 하는지 몸을 꼬아 틀며 터뜨리는 웃음 소리가 터진다. 취한

남자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곁들여지며 바깥은 더욱 어지러워진다.

“형님, 이 세상은 꼭 그렇게, 압제자, 피압제자, 이런 것들로만 되어 있는 것

도 아니잖습니까? 중간 집단도 있습니다. 어느 쪽도 아닌...

중인 계급 말씀이요. 관리나 소시민들, 상인, 자영 농민들. 우리 집안에서만도

오류골 숙부님 같으신 분은 자본 지주도 아니고 농노도 아니올시다. 당신 인생을

말없이 살고 계신 어른 아닙니까? 욕심도 없고 획책도 없고...빼앗지도 않고, 빼

앗기지도 않고...순리대로 나서 순리대로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사람 사는 모습

이 저마다 다른데, 어찌 그렇게 칼로 배어내듯이 이쪽 아니면 저쪽일 수가 있단

말이요...? 형님 속에도 가진 자로서의 근성이 있고, 내 속에도 터져 버리고 싶

은, 무엇인가를 일으키고 싶은 억눌린 피가 고여 있습니다. 허나, 나는 어느 쪽

도 아니올시다. 구경꾼이에요. 나는 이렇게 한평생 기웃거리다가 죽을 겁니다.“

“네가 그러고 있는 동안, 이빨이 칼날이 되도록 시퍼렇게 갈고 있는 놈도 있

다는 것을 염두에 두두록 해라.”

“그게 누굽니까?”

“춘복이.”

“춘복이요? 거멍굴 농막에 사는...?”

“그놈을 유심히 보아 두는 것이 좋을 게다. 무슨 일을 내도 단단히 낼 놈이

지. 그놈이 일을 내게끔 세상은 변하고 있고.”

강태는 웬일인지 그 말을 하고 나서는 무섭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그러더니 그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떠나려고 한다.”

“?”

“떠나겠다. 아버지 체면으로 부청에 좀 다니기는 했다마는, 내가 이 청춘에 왜

놈들 공출 심부름으로 세월을 보낼 수가 있겠느냐.”

“그럼, 부청 일은 정리를 하신 건가요?”

강태는 고개를 끄덕 했다.

“곧 가십니까?”

“응.”

“수천 숙부님도 허락을 하시고요?”

“아버지는 모르고 계시지.”

“그럼?”

“그냥 가는 거다. 혼자 떠나는 거야.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언지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어. 허나 아버지와 내 인생은 별개의 것이다. 사는 방식이 달라.

아버지는 협의원에 선출도 되시고 일본 시찰도 다녀오셨다. 그리고 면의 행정에

도 참여하시면서, 어쩌든지 당신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하고 계시는 것을 내 잘

알지. 그 내막도 있다. 호별세 오 원 이상 납부자, 다액 납세자의 명단에 오른

것을 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셨지. 이제는 됐다고까지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버

지가 어떻게 그렇게 다액 납세자가 되셨는지도 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가난했

었거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에는 어긋나겠지만그 양반은 한 마

디로 거간이지. 큰집 살림을 등에 업고, 큰집 사랑과 마름 사이를 오가며 한 가마

씩 남기기 시작한 거간 노릇을 이날까지 해온 거야. 날이 갈수록 규모를 늘려

가겠지. 아마 큰집 율촌 백부님께서도 다 알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손해 끼치지

않는 한도에서, 구전 주는 셈치고 눈감아 주셨을 게다.

그렇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냐? 어쩔 수 없이 부청

말단 직원 노릇 좀 했다마는 이제는 내 뜻대로 살아 볼 것이다. 네 말마따나 투

사가 될 사내가 칠십 평생을 다 살 수 있을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또 이씨 문중 남자들, 수 못한다면, 그피가 내겐들 흐르지 않겠느냐...오래오래 비

루한 행복에 빌붙어 사느니 피가 우는대로 살아 볼 생각이다.“

강태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강모의 머리 속에는 강태의 아내인 새터댁의 동그스름한 얼굴과

그의 아들 희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기표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의 눈빛

에 번쩍 날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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