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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37)

카지모도 2024. 4. 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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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디 그 땅으로

 

기차 천장에서 비추이는 불빛이 메마른 주홍으로 가루처럼 부옇게 내려앉은

강모의 얼굴은, 움푹 패인 눈그늘과 창백한 콧날 음영 때문에 핏기가 없고 푸석

푸석한 마분지 가면 같아 보인다.

"빗자루냐? 좀 풀고 편안하게 앉어라. 갈 길이 멀어."

강태는 부스럭거리며, 선반 위에 올려 놓은 가방과 짐보따리를 매만져 반듯하

게 들이밀기도 하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내어 앞뒤로 주소 확인

도 하더니, 의자에 털썩 앉으며 어깨를 좌악 펴 등받이에다 부리고 기댄다.

그리고는 강모한테 농담을 던지듯이 한 마디 하고,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

면서, 마치 이제부터 출발하면 봉천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을

사람처럼. 꾹. 날카롭게 감은 눈이 뜨고 있을 때보다 단호하고 예리해 보인다.

기차 안 풍경은, 전주 매안 간에 가까운 이웃집처럼 노상 통학차를 타고 다닐

때와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여수에서 떠난 전라선 철도가 순천을 거쳐 구레, 곡성, 남원을 지나 전주에 이

르도록 걸린 시간도 적지 않은 것이었지만, 전라북도 도경을 벗어나서 충청도와

경기도, 한강을 건너 경성까지만 간다 해도 여기서부터 열 시간이 훨씬 더 걸리

는 거리라 멀 터인데. 평양, 대동강, 신의주,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 봉천이라니.

거기는 얼마나 먼 곳일까.

"아마 온 하루 밤낮을 꼬박 잊어 버리고 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스물네 시간

도 더 걸릴는지 몰라. 연착하고 연발하고."

"기차 속에서 밤을 새우며요?"

"세우기 힘들면 눕히렴. 느긋하게 마음 먹어. 만만디로 가는 길이니까. 떠나는

간다만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 않느냐. 이 한겨울 삭풍에 달 뜨는 만주 벌판을

달리면서 대륙의 정취를 한껏 맛보는 것도 좋겠지. 그 맛에 다 마적질도 하지

않겠냐?"

"마적이야 말을 타겠지."

"차나 말이나."

두 사람은 실없이 말에 서로 웃어 버렸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설렘과 두려움이 뒤엉킨 긴장을 감추기도 어려워 일부

러 눙치는 것이다.

"기왕 이렇게 길이 멀 줄을 알았으면 아예 침대표를 끊을걸..."

아까 정거장에 당도하여, 강태한테서 만주로 가는 삼등 완행열차 기차표를 받

아 들고, 선 채로 몇 마디 나누다가, 강모는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말했다.

차표는 강태가 끊어 오기로 했던 것이다.

강태는 이 말에 강모를 쳐다보지도 않고 간단히

"부르조아지."

라고 일축해 버렸다.

"꼬딱하니 앉아서 그 먼 길을 어떻게 갑니까? 몇 시간도 아니고 몇 십 시간씩

걸리는 데를. 막대기라면 몰라도."

"서서 안 가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라. 이런 좌석조차 못 구해서 자리가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들은 서서 간다."

"그거야."

"형편? 이제부터는 너도 그다지 좋은 형편이 아니야."

걸어서 가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겠지.

맞는 말씀이오.

무엇을 타고 이렇게 가든지 멀리만 갈 수 있으면, 나는 좋습니다.

달 뜨는 만주도 해 지는 벌판도 나에게는 상관없습니다.

강모는 건네받은 기차표를 양복 저고리 안주머니에 깊이 넣었다.

면죄부.

이것만 있으면 벗어날 수 있다.

죄.

강모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한숨보다 깊은 그 말을 어둡게 삼킨다.

삼킨 말이 덩어리져 걸린 가슴을 누르며, 자리에 앉아 그는 비로소 사방을 둘

러보았다.

서로의 숨이 눅진눅진 묻어나리만큼 붐비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옷가지나마

그런대로 갖추어 입은 남자와 부인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행색들이 남루하였고,

낡은 양복 윗도리에 솜을 두실두실 둔 핫바지를 꿰어 입거나, 솜 놓은 미영 저

고리에 몸뻬를 걸친 아낙네들이 추워서 팔짱을 낀 채, 둥덩산 같은 짐덩이 보퉁

이들 틈바구니에 엉키어 앉고 서고, 두런두런 불빛 아래 이야기하는 모습들은,

왜 그런지 을씨년스럽고도 뒤설레는 것이어서 미묘하게 들떠 보였다.

하기야, 기차라는 것 자체가 길 위에 뜬 것이라, 그 안에 실려 흔들리는 사람

의 마음인들 어찌 고요히 가라앉아 있으리. 비애도 희열도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이 당연할 일이다.

이런 중에도 어디쯤부터 오는 사람일까, 잠을 이기지 못한 더벅머리가 엄동의

얼음판자 기차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져, 비쩍 마른 새우처럼 꼬부린 채 자고 있

었다. 바로 그 옆, 큼지막한 보따리에 걸터앉은 중늙은이 영감 하나도 꿉벅굽벅

조느라고 이마를 의자 손잡이 모서리에다 곧 부딪쳐 찧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렁 위의 바가지들.

이삿짐을 꾸린 듯 보이는 고리짝과 이불더미 짐꾸러미 끈에는 와그랑 다그랑,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조롱박이며 작은 바가지 쪽박, 쌀이는 이남박, 그보다

좀더 큰 함지박에 조그만 됫박들이 길떠나는 일가족의 중요한 세간살이로서, 마

치 그 식구들 앞앞의 얼굴이기나 한 것처럼 둥그름히 누렇게 매달린 채 오롱조

롱 묶이어 있었다. 너무나 정성스럽게 달아매어진 그 바가지들 형상은 우습고

엄숙했다. 그리고 눈물겨웠다.

별 신기한 것을 다 구경한다는 표정으로 기모노 입은 일본 여자 하나가 기차

선반을 올려다보며 키들키들 손가락질을 하는데, 저만큼 문간 옆 뒤쪽에 앉은

중년의 아얌 쓴 여인이 웬일인지 눈살을 찌푸린다.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뛔애애액.

희미한 새벽이 푸르스름 전주역 골기와 등허리 너머로 차갑게 트여 오는 시

각, 기차는 어느결에 스스릉 미끄러지며 새벽빛을 뿌옇게 뒤덮어 가리우는 연기

를 목메이게 내뽐는다.

뛔애액.

이것은 비명인가, 기염인가.

부르짖어 대답할 리도 없는 그 무엇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도시의

새벽과 산야의 복판에 대고, 목이 쉬도록 부르는 소리, 외마디.

강모는 서서히 흐르는 기차 차창 바깥 건물과 기둥과 전송객들을 다급하게 내

다보았다. 그들은 휘익 스치며 멀어진다. 기차의 허이연 입김이 그들을 지운다.

뛔애애액.

기적이 운다.

저 소리의 이름을 '기적'이라 지은 이는 누구였을까.

그는 어떻게 이 시꺼먼 몸뚱이에서 저토록 우람하게 토해 내는 증기의 산더미

구름을 보면서, 쉰 목소리로 토해 내는 저 엄청난 굉음 탁성을 가리켜 기적, 증

기의 피리 소리라고 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피리나 대금, 단소, 또는 흔히 호적이라 하는 태평소 날라리와는 그 크기나 빛

깔 모양새부터가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 기차를 보고.

그러나 한편으로 두 물건이 생김새부터 서로 아주 다른 것만도 아니어서, 문

자를 다루는 이들의 상상법이 엉뚱하면서도 딴은 그럴 듯한 한지라, 강모는 문

득 기가 막힌 심정으로 실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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