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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41)

카지모도 2024. 4. 1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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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멍굴 근심바우

 

서산 노적봉을 등뒤에 병풍같이 둘러 세우고 멀리 아득한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마을 매안의 지형은, 검푸르게 우거진 소나무 산 노적봉의 기

맥이 아래로 벋어 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면서 평평한 둔덕을 짓고 고이는데, 그

자락 끝에 나붓이 드러난 발등과 같이 도도록하다.

그냥 뒷동산이라고 불리는 산 자락 기슭에는 해묵은 밤나무가 들어차 우뚝하

거나 드러누운 바위의 큰 덩어리들과 어우러져 동무를 하고 있는데, 이 밤나무

숲을 뒤안으로 한 원뜸이 마을의 맨 위쪽이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암수 서로 마주하고 서

있는 종가의 솟을대문 아래쪽으로는 형제, 지친과 그 붙이의 집들이 모여 있다.

"송무백열,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더니만, 이것은 행무행열, 큰

집에 은행나무가 무성하니 우리집에 살구나무가 즐거워하는 격이네 그려. 허기

는, 은행이나 살구가 무슨 속이 같어도 그리 같아서, 살구 행, 동자를 쓰겄는가

마는."

하고 기응이 말하며 웃은 일이 있는 오류골댁 살구나무 둥치는, 가을이면 눈이

시린 궁청의 하늘 아래 황홀 휘황하게 물이 드는 노란 은행나무 눈부신 떨기를

한겨울 내내 제 가슴속에 담아 두었다가, 이른 봄 땅이 녹기 시작하면 멀리 연

두빛으로 트이는 봄 하늘 아래, 비로소 애달프고 자욱한 연분홍의 구름 머리로

꽃 피어 대구로 화답하였다.

이만큼 내려와 가운데 모인 중뜸의 언덕과 사립문 어귀에는, 그들의 새끼 나

무들이 다문다문 흩어져 자리를 잡았는데, 어느결에 어미 나무가 되어 있곤 하

였다.

그리고, 노적봉에서 날아온 솔씨가 어느 때쯤 떨어진 것일까. 매안에는 마을의

굽이마다 적송이 몇 그루씩 모여 서 있었다.

막 등천하려는 듯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기상의 붉은 몸에 용의 비늘 같은

갑옷을 입고 푸른 머리를 성성한 바람 속에 드리운 적송은, 울근불근 뿌리의 뼈

가 땅 위로 드러나 있었다.

마을 왼쪽을 끼고 물이 흐르는 계곡이 그 흐름을 낮추어 개울로 변하는 아랫

몰 언저리부터는 무논이다.

울안마다 감나무가 지붕을 넘어 선 키에 가지를 늘리우고, 또 나름대로 배나

무와 모과나무들을 마당 귀나 사립문 옆에 데불고 있는 매안의 집집들은, 지천

으로 흔한 돌을 주워 쌓은 돌담말고도 심심치 않게 물소리를 내는 대나무로 울

을 두른 곳이 많았다.

아랫몰 발끝에 서서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면 어머니의 앞자락 같은 안온함이

느껴지지만, 뒤돌아 노적봉을 올려다보면 그것은 부성의 웅자가 분명하였다.

이 산의 풍광 명미한 골짜기에, 일찍이 용성지에도

"그 경치가 아름다워 호남에서 이름난 절"

이라고 씌어진 사찰, 호성암이 있다.

본디 그 규모가 커서 수도하는 승려가 무려 이삼십 명이나 되었다던 이 절은,

옛날 어느 도승이 좋은 절터를 찾아 남원의 산천을 두루 돌아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주위의 빼어난 경치에 취한 채 걸음을 멈추고

"참으로 절을 세우기 알맞은 도량이로다."

탄복하였다는 곳이니.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황희 정승의 작은아들 남원공 황수신이

"남원의 옛이름은 대방으로 산과 들, 냇물이 비단같이 아름답고 기름지다. 넓

은 들이 백 리나 뻗쳐 있어 그 산자수명하고 살기 좋기가 실로 신선이 살고 있

다는 하늘과 같으니라."

고 말한 구절의 한 갈피인 셈이었다.

그러나 '백 리 넓은 들'은, 요천강과 적성강이 흐르는 유역의 평야부를 말하는

것이리라.

지리산맥이라고도 부르는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일대 분수령을 이루면서 서

로 나뉘는 지붕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의 맨 윗머리가 되

고 서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섬진강의 맨 윗머리가 되는데, 서쪽으로 가는 여러

줄기 흐름은 이 골 저 골 물이 모이고 모이면서 합류하며, 남원군의 산동면에

이르면 제법 긴 강이 된다.

여기서부터 물의 이름을 요천이라 부른다. 이 강물은 산동면 아래 이백면을

거쳐 남원읍의 동족을 휘감으며 유유 완만하게 비단필처럼 흘러가, 전라남도와

접경하고 있는 금지면에 이르러 적성강 하류와 만나 합수하니, 이제 순자강을

이룬다.

도도하게 굽이치며 흐르는 이 강이 섬진강의 크고 깊은 강물에 이르면, 푸른

물 흰 모래로 어울리어 구례, 곡성을 지나고 경상남도 하동땅을 적시면서 남해

로 가는 것이다.

이 강물의 유역들은 지질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기름진 평야를 가없이 이

루어 내니, 요천강 유역에는 가방평야요, 적성강 유역에는 금지평야여서, 그 아

득한 넓이는 실로 백 리를 가고도 남았다.

이런 남쪽의 넓은 평야부를 제하면,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의 준령들이 드높고,

다른 쪽으로는 노령산맥이 위용을 떨치고 있는데, 이 노령산맥은 다시 여러 지

맥으로 갈리어, 북쪽으로 마이산맥, 서쪽으로 부흥산맥을 이루어서, 동, 북, 서 삼

방면 모두가 크고 높은 산맥의 줄기와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 바로 남원

군이었다.

이렇게 큰 산맥들에 에어싸인 남원군의 동쪽 어깨는 그 중 산악이 높아, 어깨

꼭대기에 올라앉은 운봉면은 제가 속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삼도

접경 몰랭이로, 겨울 적설기에는 눈이 내리는 대로 얼어붙어 빙판이 된 채, 이듬

해 봄이 돌아와 남들은 꽃 핀다는 춘삼원이 지나가고 모내기 해야 할 사월이 되

어서는 얼음이 겨우 녹기 시작하는 산간 고원지대이다.

그러나 지리산맥과 노령, 마이산맥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산 위에 산이요, 산

너머 산으로, 높은 산과 깍아지른 골짜기, 그리고 빼어난 봉우리와 험준하고 가

파른 고개들이 첩첩으로 연하여 있어, 곳곳마다 신선이 노닐 만한 청량한 계곡

과 구름이 스치는 기암 절벽들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신가한 것은 이 운봉의 지형이다. 이렇게 높고 고원의 어깨마루 지대

에, 운봉면과 아영면, 그리고 그 옆에 동면까지 삼개면을 이룰 만큼 넓은 평원이

여원치 고개를 막 넘어서면 한눈에 풍요로이 펼쳐져 들어오는 것이다.

이곳에 동천, 서천의 물길 또한 넉넉하니 마을은 물론이고, 가히 가방평야, 금

지평야와 더불어 이 고장의 삼대 곡창이라 불리어 무색하지 않은 운봉평야가 생

겨난 것이다.

이처럼 두드러진 산간 고원의 치솟은 어깨나, 맑은 강이 흐르는 평야부의 비

옥한 가슴말고는, 대체로 넓은 지역에 걸쳐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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