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안 마을이 있는 사매면은, 남원읍에 맞닿아 인접한 곳으로, 군의 복판에서
서북 간방으로 약간 빗기어 앉은 이 면에 이어, 서쪽 손으로부터 복쪽 머리를
돌아 동쪽으로 띠를 이루며 거대한 삼태기처럼 주위를 에워싼, 대강면과 대산면,
그리고 덕과, 보절, 산동, 이백, 주천, 송동, 수지 같은 면들이 다 이 구릉지대에
속했다.
이 준평언의 구릉지대 안에는 크고 작은 들이 산재하여, 주위 경관을 데불고
농사짓기 마땅한 곳도 있고, 척박한 토질에 손가락이 갈퀴처럼 벌어지는 곳도
있었다.
이런 지세를 높고 크게 에워싸고 있는 소백, 마이, 부흥을 두고 사람들은 삼대
산맥이라 하였다. 이 산맥들은 저마다 한 영봉에 그 정기를 갊아 넣었으니, 동쪽
의 소백산맥은 지리산 묘경을 이루었고, 성수산맥이라고도 불리는 북쪽의 마이
산맥은 천황봉을 우뚝 세웠으며, 서쪽의 부흥산맥은 저 노적봉에다 위엄있고 의
연한 기상을 아무려 세상에 보여 주고 있었다.
이 노적봉의 발등이 매안 마을이다.
마을 끝 아랫몰에 이르러, 치마폭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논을 가르며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점잖은 밥 한 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동안을 걸으면 정거장에
닿는다.
본디 이곳은 무슨 이름을 따로 붙일 일이 없었던 논 가운데였다.
그러던 것이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곳에 정거장이 생긴 것이다. 이 지
점은 매안뿐만 아니라 그만그만한 주위 사방 마을과 여러 골짜기며 조금 더 멀
리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까지 사람들이 골물처럼 모여 오기 알맞은 곳이었다.
논 위에 철도가 놓이고 정거장 역사가 세워지면서 역장의 관사와 역관의 집,
그리고 밥집이며 점방이들이 처마를 맞댄 옆에 몇 채의 새 집이 들어서고 주막
과 여각이 어울려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근처에 없던 모양의 동네가, 철갑차와 더불어 새 풍물을 보이며
제법 불어나 정거장 동네는 북적거리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남원도호부로부터 서울까지의 거리는 육백오십오 리인데 걸어서 이레하고 반
날이 걸리느니라."
고 하였다.
그래서, 철도가 생기기 전, 멀리 한양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괴나리봇
짐을 등에 메고, 몇 켤레의 짚신을 갈아 신으며,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걷고
걸었던 것이다. 먼 길에 재를 넘고 물을 건너며 하염없이 걸어갈 때 오직 죽장,
망혜, 단표자를 벗 삼으니 죽장은 대나무 지팡이요, 망혜는 짚신이고, 단표자는
도시락과 물떠먹을 표주박이 아니겠는가.
옛날, 남방에서 북으로 서울을 가는 길은 크게 나누어 경상도 길과 전라도 길,
두 갈래였다.
그런데 경상도 길은, 소백산맥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추풍령과 죽령, 그리고
조령 새재를 넘지 않고는 아무리 해도 한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반면에 전라도 길은, 섬진강의 유역을 따라 남원을 거쳐서 진주를 지나고 공
주로 접어들어 서울로 가는데, 비교적 순탄한 길이라, 한양에서 뻗는 팔도 길을
통틀어 말할 때, 남원을 통하는 전라도 길이 가장 부드러운 길이라고 일컬어 말
했다.
예전에는 이런 길목의 요소마다 찰방이 있었고, 찰방이 있는 곳을 역이라 하
였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풍의 외관직으로, 세조 8년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찰방과 역승을 각 3인씩, 경상도에 각 5인씩, 황해도에 역승
은 없이 찰방만 2인씩 두었는데, 이들은 역승의 잘잘못을 규찰하거나 주군수령
의 탐학과 민간의 고통을 살펴서 엄히 다스리는 것이 주 임무였다.
또한 전시에는 봉화를 올리고, 언제나 급한 관용, 공용에 대비하여 역에다 역
마와 역졸을 챙겨 두었다.
찰방은 대체적으로 역리를 포함한 역민을 관리하고, 역마를 보급하며, 사신 접
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의 최고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북방지역에서는 군사적 성격의 역촌을 순행하면서 부방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도로는 나라의 뼈대요 핏줄이며 강토의 국방 기밀이기도 하며, 평상
시에는 운송의 수단이지만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징발하는 말또한 나라의 일급
재산이어서 찰방은 각별히 신임받는 관리를 임명했다.
거기다가 행정면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이나 정랑직의 명망 있는 문신
을 차출하여 지방 주현에 파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
했으니, 민생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에 따라 나라에서는 역의 관리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특별히 역둔토를 역
에 딸려 내려 주었다.
찰방 있는 곳은 한양으로부터 그 고을에 들어가는 첫 머리 초입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과 시정의 소식에 빨랐다.
그래서 장사하는 시정아치들이 자연히 사방에서 모여들고, 물산의 교유가 저
절로 이루어져 큰 장이 서게 되었다. 이것이 다 역을 중심으로 되는 일이라, 찰
방이 있는 역은 흥성거리게 마련이었다.
조선 시대, 남원진 도호부의 찰방은, 오수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남
쪽으로 내려올 때, 남원진의 입구는 오수였던 것이다. 이 오수역에는 역사와 찰
방의 관사, 그리고 역의 소유인 둔전이 있고, 역마 스물일곱 필이 역졸과 함께
항상 대비되어 있었다. 역마를 갈아타거나, 역졸을 부려 관물을 나르거나, 공문
서를 전달하려고 먼 길을 가야 하는 관리들이, 말과 마부를 이용하고 또 숙박도
하는 곳이 '역'인지라, 여기는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 넘치었다.
이 역이나 비슷한 곳으로 원이 있었다.
먼 길 가는 사람이 이용하고 묵는 것은 같았으나, 오로지 관용이었던 것이 역
이라면, 원은 민간의 나그네 길손이 숙박하거나 머물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곳도 사람의 통행이 많고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남원에 본거를 두고 오수 찰방이 관할하는 곳은, 십일역, 십오원이었다. 그러
니까 오수역 찰방은, 역과 원을 다 합하면 모두 스물여섯 군데나 맡아 관장하였
던 것이다.
매안에서 오수역까지는 시오리 길이요, 원이 있는 밤두내 율두천원까지는 십
리 길이고 남원 읍내까지는 삼십 리 길이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서 찰방도, 역마도, 역졸도 모두 없어지고 그 대신 철도
와 정거장이 생겼다.
그것이 벌써 칠팔 년 전 일인데 다만 아직도 역이라는 옛말은 그대로 남아 뙈
애액, 검은 연기를 온 하늘에 뿜어 내며 시커멓게 달려드는 철갑차를 맞이하고
보내고 하였다.
찰방이 있던 역만큼이야 법석거리지 않지만, 그래도 정거장에는 언제나 사람
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어우러져 있었다. 상행으로 서울로부터 하행으로 여수에
이르기까지 기차를 타려고, 여러 마을 여러 골에서 이곳으로 나온 사람들이 보
퉁이를 하나씩 안고 들고 앉은 대합실은, 오수 장날이나 남원 장날이면 으레 더
많아지게 마련이었다.
예전부처 오랫 동안 그래 왔듯이, 시오 리 오수는 물론이고 삼십 리 남원장에
도 걸어다니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무슨 이기지 못할 큰 짐이 있을 경우에는
놉을 사는 것보다 차비가 더 적게 먹혀, 처음에는 낯설고 무서워서 쭈밋거리던
기차를 타게 되는 것이다.
이고 지고 나온 보퉁이와 꾸러미를 들고 장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이 정거장
에서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그만 저절로 물건을 바꾸고 사고 파는 일들이 이
루어져, 굳이 장에까지 안 가고 여기서 셈이 끝나 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자연히 장날이면 이 정거장 마당에 작은 장의 시늉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장날이라고 해도, 매안의 이씨 문중 사람들은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장 길에 익숙한 머슴이나 재바른 하인을 시켜 심부름을 보내기 때문이
었다.
만일 이도 저도 여의치 않은데 피치 못할 급한 일이 생긴 누가 있다 하더라
도, 장에 가는 일만큼은 정거장으로 나오지 않고, 오수, 남원까지 걸어서 소롯길
로 혼자, 눈에 뜨이지 않게 다녀왔다.
장바닥이란 원래 선비가 나설 곳이 아닌데다가, 반상이 마구 뒤섞이어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는 광경은 더구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런 일을 만부득이 하러 가는 경우라 할지라도
"팔도 모산지배가 위아래도 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정거장."
은 매안의 성품에 맞지 않은 탓이었다. 행세가 빠지는 집이라면 모를까, 넓은 갓
쓰고 두루마기 떨쳐입은 양반이 상것들하고 나란히 앉아 한자리에 가야 하는 철
갑차는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았다.
어디의 누구네 집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행동거지 모색으로 보아 상것
이 분명한 사람도 이쪽을 보고는 멀뚱멀뚱 하고 있거나, 토방에도 못 올라서고
뜰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하정배를 올려야 마땅한 신분의 것들이, 장
소 핑계를 대고 마주선 채로 우물쭈물 인사를 때우는 것도 도무지 아니꼬워, 차
라리 그 꼴 안 보고 내 다리 품을 팔지 싶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디 원행할 일이 생겨 만일 정거장으로 나오게 되면, 웬만한 사람
들은 먼 발치에서도 이씨 문중 누구인지를 알아보아 그쪽에서 먼저 미리 조신하
게 몸가짐을 고쳤다.
더욱이 혹 거멍굴이나 고리배미 사람들이 문중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깊이 수그리고 들지 못하였다.
거멍굴은, 정거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철도와 이만큼한 거리에 나란히 길
이 난 산 밑을 따라 한 식경쯤 걸으면 보이는, 근심바우 옆, 몇 가호 옹색한 마
을이다.
그저 다박솔이나 옻나무, 잡목들이 생긴 대로 우거진 나직나직한 동산들로 이
어지던 능선의 풍경이 문득 출렁 높아지는가 싶은 무산 봉우리 아래 자리잡은
거멍굴은, 소쿠리 하나 안에 들만치 도래도래 모여 앉은 납작한 초가집들의 마
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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