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간의 벽지는, 농사를 지어 먹고 살 만한 한 뙈기 땅을 구할 길이 없으
니 결국 불을 놓아 일구는 화전민 생활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반대로 산이 전
혀 없는 허허 벌판은 또 땔나무를 얻기에 힘이 들 것이므로, 산과 들이 알맞게
어우러진 지형이 살기에 제일 좋다는 생각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예로부터, 사람이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는데 제일 좋은 명당은, 비산비야, 산
중도 아니고 들도 아닌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 곳이라야 인물이 나고, 마을이 번성하며, 오래 오래 자손이 이어져 향화
가 끊이지 않는다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런 곳이 피난에 가장 적지라는 말인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매안의 지형이 바로 비산비야였다.
노적봉의 영기가 벋어 내린 발등에 터를 잡아서 그 발 아래 논을 밟고 서 있
는 형국이 매안의 지세였던 것이다.
그곳에 처음으로 입향한 현조 한 몸의 자손이, 몇 백 년 동안 나고 또 나서
온 매안에 가득 차고, 잔등이 너머 다시 작은집 마을 하나를 더 이루도록 창성
한데.
이런 벌족한 동성 마을의 이만큼에 외따로 멀리 물러앉은 여남은 집 산성촌
거멍굴은, 서로 생업이 달라 세 무더기로 끼리끼리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처음에야 그렇게 길이 나뉜 곳이 아니었지만, 철도가 생기면서, 저만큼 있는
몇 집과의 사이에 금이라도 그은 것같이 된 대여섯 가호는, 언덕배기만한 동산
아래 엎드려 있었다. 발치에 작은 개울을 끼고 있는 그 동산은 얼른 보면 무심
한데, 뜻밖에도 제 키와 덩치에 맞먹을 만큼 시커멓고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제
가슴에 덜컥,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바위 덩어리의 형상이었다.
마치 한없이 큰 사람이 무슨 근심스러운 일이 있어 웅크리고 앉은채, 이마를
무겁게 수그려 제 가슴 쪽으로 기울인 형상이 분명한 바위였다. 높이는 올려다
보아 서너 길이 넘을 것 같고 넓이는 장정 대여섯이 팔을 있는 대로 벌린 만한
데, 가슴이라 할 곳은 우묵하게 패여 들어가 있어 더 거멓게 보였다.
검은 근심.
그것을 쓸어 내리지 못하고, 웅크린 무릎 위에 시름 없이 얹어 놓은 두 팔도
모양이 확연하였다.
그런데 이 바위 덩어리는, 앞 모습만 그렇게 역력할 뿐, 뒷등은 무덤을 업은
것처럼 동산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동산의 한복판에 검은 바위 덩어
리가 어둡고 깊게 박힌 것도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이 바위를 두고 '근심 바우'라고 불렀다.
그리고 숯덩이리 같은 검은 이 바위의 빛깔을 빌어 생겨난 동네 이름이 '거멍
굴'이었다.
거멍굴 어귀 근심바우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백정 택주였다.
그는 눈이 바늘같이 가늘고 온 낯바닥에 누런 수염이 소털처럼 가득 덮여 있
는데다가 어깨가 쩍 벌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 나이 수월치 않아 흰 머리가
더북한 택주는, 대대로 그 집에 나고 죽고 하면서 살아온 세습 칼잡이다.
택주 옆에 모여 사는 대여섯 집들은 모두 택주의 살붙이로 아우와 조카들인데
다 같이 칼 잡는 일을 했다.
그는, 남원 읍내 천거리, 천삼백여 평 넓은 광장에 장날마다 열리는 우시장에
가서 소를 골랐다.
장날이면 삼도 팔군에서 삼백 마리 이상이 몰려오는 이 우시장에는 암소보다
황소가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좋은 황소를 사거나 팔려는 사람들이 전
국에서 모여들어, 그 거래 규모가 첫째 아니면 둘째에 이르렀다. 그러니 성수기
에는 집채만한 황소가 무려 오백여 마리나 누렇게 물결을 이루며 광장을 채웠
다.
전라북도의 남원, 순창, 장수, 임실, 그리고 전라남도의 곡성, 구례, 경상남도
함양, 거창에서는 모두 이곳으로 왔는데, 도야지는 백오십이나 이백 마리 가량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돼지나 개는 백정의 손까지 빌리지 않고 보통 자기들이 집에서 잡는지라, 택
주는 주로 소를 잡았다.
소를 잡는 것은 개를 잡는 것보다 더 쉬웠다.
어떤 황소도 택주 앞에서는 용을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수장으로 쓰는 헛
간의 천장에 있는 높은 가로대 중동에 동아줄을 걸고, 늘어진 줄 끝을 둥그렇게
고리 내어 소의 목에 걸면, 소는 주루루 눈물을 흘렸다.
가로대에 걸린 동아줄 한쪽을 잡아당겨 도수장 귀퉁이에 박힌 기둥에다 단단
히 묶으면, 소는 앞발이 들리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때 소 머리의 양 뿔 사이 고지통을 도끼나 참나무 몽둥이로 단 한번만 내리
치면, 그 큰 소는 그만 힘없이 죽었다.
동아줄을 풀어내릴 때,
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쓰러지는 소를, 네 다리가 공중으로 가게 반듯
이 눕혀 놓고는 재빨리 목에서부터 날렵한 칼로 배를 갈라 껍질을 벗긴다. 시뻘
건 피 뭉치나 다를 바 없는 창자 내장을 다 들어 내고 부위별로 고기를 발라 내
는 손은 칼끝보다 정확하다.
가죽은 다시 기름을 완전히 벗겨 내고는, 털을 불에 그슬려 잘 비벼낸 다음,
떡 치는 안반처럼 두껍고 넓은 나무판에 좌악 펴서, 사방에 못을 박아 팽팽하게
말린다.
오그라지거나 틀어지지 않게 말린 가죽은 바로 갖신 짓는 갖바치한테로 갔다.
만일 가죽으로 안 쓰려면, 털을 그슬린 뒤에 기름을 얇게 벗겨 내지 않고, 도
톰하게 그대로 둔 채 덩어리 덩어리 썰어서 장을 붓고 끓이며 졸인다. 이것이
'껍데기 자장'인데, 그 맛이 담백하고 졸깃졸깃해서 상등 반찬이었다. 그러나 이
런 것은, 음식을 갖추어 먹고 잘 지내는 집에서 해 달라고 할 때만 만들었다.
머릿고기, 살코기, 앞다리, 뒷다리, 꼬리뼈에 온갖 뼈를 다 추리고 나면, 택주의
아낙 달금이네는 살코기만 골라 광주리에 담는다.
갈고리가 달리고 점점이 눈금이 찍힌 긴 저울대를 꾹 찔러 넣고 달금이네는,
고기 담긴 광주리를 보자기로 덮어 머리에 이고서, 이 마을 저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고기를 파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네가 자주 가는 곳은 매안이었다.
그곳에서는, 무슨 큰일이 아니면 미리 기르던 소를 내주어 택주한테 잡으라고
하거나, 아니면
"어디에 쓸, 얼마만한 소를 잡아 오너라."
하고 전갈을 보내 왔다. 그럴 때는 택주가 알아서 소를 구하고, 잡고, 손질까지
다 해서 가지고 올라갔다.
그러나, 보통은 달금이네가 이고 간 광주리에서 필요한 만큼 내려놓곤 하였다.
젊어서부터 머리가 회색이 된 오늘까지 이고 다닌 걸음이라, 달금이네는 이제,
어느 날 어느 때쯤 어떤 양반의 댁에 어느 만큼의 고기가 필요할 것인지 먼저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대개 기제사나 어른들의 생신이 주였다.
또 매안에서도 어느 날 어느 시쯤 달금이네가 고기 광주리에 저울을 꽂아 이
고 나타날 것인지를 미리 짚어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럴 줄 안다."
는 것이지, 서로 꿈에라도 한자리에 마음을 나란히 두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중하고 준절한 신분의 벽이 까마득한 절벽의 아가리처럼 벌어져, 달금이네
가 아닌 거멍굴의 그 누구라도 그것은 건너뛸 수가 없었다.
건너뛰다니.
바라보기에도 너무나 아뜩한 곳이었다.
아니, 그냥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달금이네가 서 있는 이쪽은 낭떠러지 아래
쪽이요, 매안은 천 길 단애 깎아지른 저 암벽 위 꼭대기였다. 누가 무슨 재주로
그 꼭대기까지 날아올라가, 다시 또 그만큼이나 되는 저쪽으로 건너뛸 수가 있
단 말인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는 제일 천한 것이 종이라는데, 그 종만도 못한 처지의
백정 아낙 달금이네는 한숨 지었다.
종이나 호제, 하인, 머슴들조차 하대하여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누구라도
그네한테는
"해라."
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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