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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53)

카지모도 2024. 4. 25.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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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이 할미 얼굴에 이윽고 미심쩍으나마 안도의 빛이 번지는데, 곁에서, 나이

그 중 많은 부칠이가 머뭇머뭇 무슨 말을 얼른 꺼내지 못해 움찔거린다.

"그런디 말여, 자네는 그렇게 확실히 월백 같고 설백 같지만, 동네에는 또 동

네법이 있잉게로. 풍행이 난잡헌 것 아니란 징명을 헐라먼, 저 그 동엄에 어른한

테로 조께 같이 가야겄는디, 어쩌까잉. 거그가서 자네가 직접 발명을 해 보소.

시방 자네 오기를 지달르고 지실 거잉만."

그러자 비오리가 하얀 이를 싸악 드러내고 웃었다.

갑작스러운 그 웃음에 등골이 쭈뼛해지며 놀란 것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동엄 어른네 마당으로 가능 것은 에럽잖으나, 징명은 에럽겄소잉? 버얼

건 대낮에 사람들 다 둘러선 마당에서 멍석을 깔어 놓고 머엇을 어뜨케 징명을

허까요? 암만 해도 그 징명을 헐라먼 동엄 어른보톰 하나씩 번을 갈라 나를 봐

얄 거잉게 요리 오시얄랑갑소. 이번 일은 내가 절단난 것 아니랑 것만 아시먼,

다른 말은 다 뜬소문인 것도 자연히 알게 되실 것 아닝가요?"

하도 막 대고 하는 말이라 듣는 쪽이 오히려 민망해진 사람들이 서로 면구스

러운 눈치만 보는데, 비오리는 썩 한 무릎을 내앉으며 팔을 쑥 내밀더니 모갑이

손을 나꾸어 잡는 시늉을 했다.

"누구, 아재가 몬야 징명을 해 보실라요?"

모갑이가 악연하여, 잡히지도 않은 손을 뿌리친다.

"이 사램이 시방 누구 망신을 줄라고 작정을 했능가?"

얼굴은 물론 목덜미 손등까지 벌겋게 물드는 모갑이를 보고, 눈시울에 핏기가

오른 비오리는

"이판사판, 나도 죽냐 사냐요."

하더니만 고개를 숙이고 투두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동엄 어른도 징명을 헐라먼 이리 오시라고 허시요. 내가 해 디리께."

그 말을 던지면서 비오리는 훌떡 일어나 술청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구슬픈

목소리로 천역덕스럽게 흥타령 한 대목을 길게 토해 냈다.

 

월명사창에 슬피 우는 저 두견아

네가 울랴거든 창전에 가 울지

세상을 잊고 사자는데

앞에 와 슬피 울어

남의 심사를 산란하게 하느냐아

아이고 대고오 어허어어

성화가아 났네에 흐으으응

 

그날로부터 비오리는 술청에 나앉았다.

사람이 보이니 소문도 조금씩 누구러져 누가 더 이상 비오리한테 무슨 말을

캐묻지는 않았다.

비오리는 손님이 뜸하고 호젓한 날이면 모정에 혼자 나와 앉아 구슬프고 서러

운 목으로 흥타령을 하였다.

적송의 붉은 몸뚱이를 부여 안은 소리는 한 굽이를 휘돌아 감으면서 푸른 머

리 솟구친 공중으로 소리의 머리를 풀며 처창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을 쪽으로 파고들어갔다.

"우리 동네 황진이 났네 그려."

"황진이는 무신 황진이. 비오리는 기양 풋소리 해 보는 거인디."

"아, 죽은 황진이 엇다 쓸랑가? 산 비오리가 낫제."

"비오리가 황진이 될라먼 말여, 저 호성암으 중 한 놈 호레야제잉."

"지적선사만헌 중이 있어야 호리제."

"앗다. 구색한 갖추먼 되제. 멀 그리 까락까락 따져, 따지기를."

"긍케, 도 딱는 사람들이 딱으라는 도는 안 딱고 떡만 달어 먹어서 저렇게 젤

이 멩색도 없이 없어졌이까? 시방은 머 페사 다 되다시피 해버리지 않이여."

"거 빈 말은 아니네."

"오직허먼 호성안 중 떡 달디끼 헌다는 말이 다 속댐이 되이까."

"아이고, 그 이 얘기는 언지 들어도 재밌등만, 호성암이 그게 상댕이 큰 절이였

능갑드라고. 중들이 한 삼십 명씩 뫼아서 수도를 허는디, 해마동 오얼 단옷날이

되먼 떡을 맨들어서 잔치를 허는 전통이 있었드리야, 거창허게 떡을 해 갖꼬는

몬첨 불전에다 불공을 올리고는 어뜨케 되겄어? 부처님이 그 떡을 참말로 야몽

야몽 잡숫겄어? 결국은 중들 차지제잉. 근디 이 시님들이 욕심이 많아서 서로

한 볼테기라도 더 먹을라고 쌤이 난단 말이여. 수선시럽고. 그런디다가, 낮에 떡

을 나누먼 불공 디리로 온 신도들한테도 다 나눠 줘얄 거 아니여? 글 안해도 아

까워 죽겄는디. 그래 생각다가, 낮에는 아닌 데끼 점잖허게 그대로 놔 뒀다가,

해가 떨어지고 한밤중이 되먼 신도들이 다 간 뒤에 기양 막 뎀베들어서 서로 먹

을라고 헌단 말이여? 젊은 중들은 더군다나 한 입이라도 더 먹을라고 야단법섹

이여. 그래서 씰 거잉가? 그래 서로, 누구든지 공평허게 떡을 먹을라먼 어치게

헐 거이냐, 존 방안이 없겄능가, 궁리를 했드라네이."

"그래서 저울로 달어 먹기로 했그만."

"그렁게. 저울로 달어서 나누먼 머 털끄터리만치도 틀림이 없잉게. 그러기로

헌 담에는, 오월 단옷날 한밤중에 넘들은 다 자는디, 호성암 중들이 촛불을 써

놓고 두세두세 둘러앉어서 저울로 떡을 달고 있드라네. 도 딱는 시님들이 허는

짓인디 얼매나 우숩겄어? 첨에는 그런 말이 배깥으로 안 나가고 비밀이 지켜진

뫼양이지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소문이 한 입 건네 두 입

을 지내갔네. 그리 갖꼬는 왁짜허니 나 버렀지."

"아 긍게, 저 노적봉 밑이 매안서는, 농사철에 비가 안 오먼, 산 밑잉게 물이

귀허잖이여. 서로 논에 물 댈라고 물쌤이 안 나겄능가. 서로 자개 논에 물 댈라

고 넘으 논으로 들으가는 수통을 막고, 밤을 새워 지키고 그런단 말이여. 그러다

가 니 물이니, 내 물이니 쌤이 나. 그럼서니 논에 물이 얼만큼, 내 논에 물이 얼

만큼 있다고 서로 재 보고 비겨보고 양보를 해라 마라, 그렇게 시끄럴 때, 옆으

서 점잖게 한 마디 헌당만, 거 호성암 중 떡 달디끼 허능가?"

"왜 여그서도. 고리배미 나가시 걷을 때나 먼 일이 있어서 추렴헐 때 안 그런

다고? 으레 욕심이 과헌 사람 나오고, 남달리 인색헌 사람도 나오고, 그러먼 한

마디 허제."

"호성암 중들 저울에 떡 달디끼 헐 수는 없느니이."

뒷목을 꾸욱 누르면서 사또 목소리 시늉을 하는 바람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한바탕 웃고 말았다. 어쩌면 은연중, 그 욕심 과한 사람과 인색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둘러앉아 하고, 재미나게 어울리던 시절도 옛

날인 것만 같다.

둥그렇게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고리봉도 고리봉이지만, 이상하게 마을의 지

형도 마치 초승달 두 조각을 동쪽과 서쪽에 맞물려 놓은 것 같은 모양이어서,

어찌 보면 동그란 보름달의 속을 도려낸 것도 같고, 아니면 가락지 같기도 한데,

누구는 그보다는 말발굽 같은 모양이라고 하는 이 고리배미의 각성바지들은, 고

달픈 생업에 자신의 무겁고 헐벗은 세상을 의탁하며 오늘 하루, 내일 하루를 그

런대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게 고달픈 것은, 동척

의 농사를 맡아 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웬일인지, 자신이 농사를 짓고 있는 농사꾼이라는 생각보다는, 꼭 무슨

하루살이 농사 품팔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참혹한 중에도 불안이 가실 날이 없

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어중"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 종이에, 지문도 없이 닳아져 버린 엄지손가락을 눌러 인

주 범벅이 되고 만 계약서 한 장.

이것은 참으로 낯선 문서였다.

지금까지 작인들은, 소작을 부치거나 뭇갈림을 할 때, 무슨 문서를 쓰고, 계약

을 하고, 지어 먹는 기간을 정하고 해 본 일이 없었다.

"네가 짓도록 해라."

고 말하면 그것으로 되었고, 한번 부치게 된 땅은, 웬만한 변동이 없는 한 짓던

사람이 그대로 짓는 것이며, 아무리 자주라 하여도 작인의 기득권을 가벼이 하

지 않았다.

그래서, 대를 물려 어느 한 집의 논을 부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동척은 달랐다. 연, 월, 일을 정한 기간 동안만

계약을 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그 규정이 까다로운데다가 소작료 또한 엄

청나서 일년 내내 뼈가 빠지게 일을 하고, 가을이면 추수를 다한 다음에도 빈

껍데기만 남게 되고 말았다.

 

소작계약서

귀사 소유의 이면 기재의 토지를 금반 본인이 경작의 목적으로 소작하도

록 승인하여 주심에 대하여 하기 조항을 확약함.

1. 소작계약의 기간은 소화 년 월 일로부터 소화 년 월 일까지로 함.

 

으로 시작되는 이 계약서에 깨알같이 박힌 조항들은 글자를 모르고 고리배미 농

사꾼에게는 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읽을 수 없다고 해서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

었다.

27. 본 계약에 관한 소송은 귀사 이리 지점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재판소를 관할

재판소로 함.

 

에 살벌하게 적힌 것처럼 아차 잘못하면 재판소로 끌려 갈 판이어서, 동척 농사

맡은 사람들은 늘 전전긍긍, 가슴이나 손바닥에 예리한 칼날을 품고 사는 것같

이 아슬아슬하였다.

거기에는, 본인 스스로 경작하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소작지 및 소작지

에 관계되는 경계, 도로, 수로, 휴반(밭도둑), 물꼬 등 경작에 필요한 것은 본인

의 비용으로 관리 수선하겠다는 약조로부터, 귀사의 허가 없이는 소작지의 경계,

지형 또는 토지의 주된 사용 목적이나 성질 등에 따라 전, 답, 과수원, 임야 등

으로 토지의 종류를 표시한 지목을 임의로 변경하지 않음은 물론, 가옥의 건축

등도 일체 하지 않겠다는 항목, 그리고 귀사가 지정한 보통 작물을 토지의 용법

에 따라 재배하겠다는 것들이 세세 낱낱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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