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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51)

카지모도 2024. 4. 23.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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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바. 없는 디."

"큰아부지라도, 작은아부지라도, 누구 아부지 핏줄이고 탁인 사람 한 번만 봤

으먼. 그런 사람 만나먼, 이어어케 손 한번 대 보먼 아부지 살 같을 것맹이여."

"살."

"잉."

막걸리를 마시던 술청의 도부장수는 어느결에 일어나 가 버리고, 저무는 주막

의 됫박만한 방에 비스듬히 마주앉은 두 모녀는, 말이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이고

만 있었다.

"양반, 상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못 배워 모르면 그것이 상놈인 것이다. 근본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라도 이 세상에 났으면 낳아 준 부모가 있고 또

그 부모의 부모가 있지 않으냐. 헌데 그 가닥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가닥을

놓쳐 버리면 그것이 곧 상놈이니라. 곧 선조의 유래를 모르고, 제 아버지, 어머

니가 누구인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 위 상대도 모르고, 지금

의 자기가 있게 된 그 말미암음을 모르게 되면, 상놈이라고 한다.

자기의 선조가 미약하고, 향교 출입을 못하면 양반이라고 할 수 없지마는, 그

렇다 하더라도, 자기 조상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모르고 사는 것하고는 다르지.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자기 조상에 대해서 잘알면, 어디서 어떻게 무슨 가

닥으로 무슨 파가 갈려 나왔는지, 또 그 가닥들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지금은

무엇을 허는지 챙겨 볼 수가 있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자연히 서로 연락도

되고, 출입도 넓어져 견문이 생기고 아는 사람도 많아져서, 사는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사람은 어쩌든지 제 조상줄을 놓치면 안된다."

언젠가 주막에 들러 목을 축이던 매안의 사람이 어떤 젊은이를 상대하여 하던

말이 귀에 남았지만, 비오리나 그 어미는,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찾아볼 만한

붙이라고는 없었다.

그런 중에도, 남 다르게 태깔이 고와지는 비오리를 위하여 비오리어미는 황아

장수한테서 옷감을 끊어 놓기도 하고, 방물장수 서운이네 한테서 시집가는 데

필요한 바느질 용품이며 하얀 분백분을 사두기도 하였다.

"나는 어머이 탁했다고 넘들이 그러든디."

"아이고오, 몸썰난다. 나를 탁에서 무신 존 일이 있다고 나를 탁에."

"어머이가 머이 어디가 어찌간디?"

"그런 소리 말어라. 당최 허들 말어. 이? 너는 인자 말 헐만 헌 디서 말이 나

먼 기양 치워 불란다. 고온 때 가시기 전에."

하던 비오리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꽃심이 진분홍으로 피어나는 복사꽃 가지

아래로, 남의 소실이 되어 집을 떠나갔다.

남원 읍내에서 꽤 큰 한악국을 하는 진의원을 따라간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는 마흔두 살로, 비오리 나이의 꼭 두 배였다.

"고리배미 솔밭 주막에 큰애기가 그렇게 이쁘다고 소문이 자자허든디."

맨 처음 그가 주막으로 찾아왔을 때 한 말이었다.

그는 흰 두루마기를 떨쳐입은데다가 머리는 상투를 쳐버리고, 발에는 하얀 백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때는 막 봄이 무르익으려 할 때여서 주막 옆구리의 솔밭 언저리에 저절로

벙그는 각시복숭아꽃 숨결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었다.

남의 중매도 더러 심심찮게 하는, 방물장수 하던 서운이 할미가 그날 따라 일

부러 맞춘 것처럼 같은 시간에 주막으로 놀러 나왔는데, 아는 사람이라고 진의

원을 반가워하였다.

그네는 진의원에게, 방물짐을 막 며느리에게 넘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그간

댁에서 신세 많이 졌었노라는 것을 말하고, 앞으로 며느리의 방물도 많이 팔아

주시라고, 한 가지 이야기를 할 때마다 고개를 꼽박, 꼽박, 하면서 숙이곤 했다.

서운이 할미는 비오리어미와 나이도 비슷하고 처지도 닮은 점이 있어 다른 사

람보다 서로 더 허물없이 지내왔었다.

두 노파는 둘 다 영감이 없었고, 기대고 살 만한 남정네나, 아들이 없는데다

한쪽은 과년하여 시집 보낼 딸이 있고, 한쪽은 며느리가 혼자되어 갓난이 하나

품에 안은 과부가 되었는데, 그 모습이 자신의 젊었을 때 같아서 비오리어미는

서운이네한테 마음을 많이 써 주곤 했다.

"마은 살이 넘었잉게 벌쎄 메느리는 봤제잉. 그래도 자개가 의원이고 약국도

헝게로 녹용으로 인삼으로 존 약은 다 혼자 먹고, 속상헐 일 벨라 없이 살어 놔

서 사람 땅땅히여. 인심도 무던허고, 나보고 말 잘해 돌라고 그러등만."

며칠 후에, 서운이 할미가 조심조심 눈치보는 척하면서 옆에 앉은 비오리한테

들으라고 말했다. 비오리어미는 속으로 반은 접어 넣고 밖으로 반은 펼쳐 보이

는 소리로

"마흔이며, 호박이 노랑물이 막 들라고 헐 땐디."

하고 미심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노랑 호박, 잘 익으면 그것같이 해먹을 껏 많고도 맛나까? 깎어서 호박 오가

리 해 놓고, 눈 펑펑 쏟아지는 날이먼 호박떡 해먹고, 누렇게 조청맹이로 풀어서

호박죽 쒀 먹고, 또 있제잉. 호박 범벅도 맹글어 먹고, 아이고, 맛나라. 그것뿐이

여? 늙은 호박은 약에도 좋잖이여?"

"노랑 호박 한 뎅이 갖꼬 아조 물고를 낼라고 작정을 했그만이."

"나이는 좀 있제. 말이사 바로 말이지만. 그런디 차라리 이런 자리가 실속 있

고, 사람 점잖고 갠잖다고오. 솔직이 이짝 헹펜도 있는디이"

"헤기는, 나이 마흔이먼 쉬염도 지댄허니 지룰라고 허고, 이자 어른 가락을 뺄

라고 헐 때지."

"진의원이 거 할량이라고. 놀 찌 알고, 여자 애낄 찌 알고. 왜, 약도 잘 짓고,

글도 많이 허고. 유식허잖여?"

진의원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오리에게 하루는 금방 시집가게 생겼

는데 아직도 애기냐고, 이름을 하나 지어 주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비취 비 자, 달 월 자, 비월이었다.

"꼭 너한테 맞는 이름이다. 너는 비취로 깎은 달이로다."

고 몹시 흥겨워하던 그는

"저만한 적송 속에 초당이 서 있는데 이름이 없을 수 있느냐."

하면서, 하루는 좁으장한 현판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왔다.

"못 쓰는 글씨지만 손수 썼다."

하는 현판에는 '송풍정'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잔 재미가 많았던 그는, 비오리에게 소리선생을 하나 붙여 주기도 했다. 남원

권번 출신인 소리선생은 비오리를 데리고, 요천수가 푸른 비단 띠처럼 흘러가는

흰 모래밭으로, 또 요천수에 발을 담근 암벽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는 정자 금수

정으로, 같이 다니면서 소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저 소리 맛만 보는 것이지 테머

리를 하고 덤벼들어 배우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이나 제자나 심심파적

으로 하는 셈이었다.

두어 해를 그렇게 보내고는, 어찌 되었든 다시 고리배미로 돌아온 그네에게

나은 것은 '비월'이라는 이름과 검푸른 적송 숲의 모정에 걸린 숭풍정의 현판뿐

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돌아온 그네를 보고 수군거리면서 그냥 부르기 쉽게 비오리,

비오리 하고 불렀다.

"비오리가 왜 못 살고 왔당가?"

"그 속이야 누가 알어? 팔짜겄지."

"술에미 딸이라고 첩으로도 안 쳐 주었으까?"

"모르고 데리갔간디? 첨부텀."

"아니, 무신 흉악헌 소문도 있기는 있등만."

"흉악이라니?"

"아이고, 내 입으로 욍기든 못허겄어."

사람들 귀가 쫑긋 일어섰다.

고리배미로 돌아온 비오리는 한동안 덧문을 깊이 닫고 그림자 얼씬도 하지 않

은 채, 죽은 듯이 지냈다.

"무던히 울었드라대."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내외간의 정이란 것이 열 살 줄에는 몰라서 살고, 스물 줄에는 좋아서 살고

서른 줄에는 정신없이 살고, 마흔 줄에는 못 버려 살고, 쉬흔 줄에는 서로 가여

워 살고, 예순 줄에는 등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해 산다."

고 하더라만.

첩이라 하는 것은 본디 맹랑하여 그 어디에도 들지 않는 모양인가. 홀로 무색

하게 돌아온 비오리를 두고 고리배미 사람들은 샘가에서, 동네 사랑에서 모이기

만 하면 수군거렸다.

"왜 저러고 왔이까잉?"

"말도 말어. 나도 어디서 들은 소린디. 저렇게 태깔도 곱고 목청도 좋은 비오

리를 마흔 넘은 중늙은이 진의원이 기양 덤썩 물어갔어니. 살진 암캐 물어간 호

랭이맹이로 아 통으로 씹어 먹어도 비린내 한나 안나고, 눈에다 넣어도 아픈지

모리게 이뿌지 않겠능가? 진의원 따라간 그날부텀 진의원 물팍이 비오리 요대기

고, 진의원 품속이 비오리 베람박(바람벽)이여. 오직허먼 심지어 약을 지을 때도

보듬고 앉아서, 한 손으로는 버들가지맹이로 낭차앙헌 비오리 허리를 감고, 남은

한 손 갖고 마지못해 보도시."

"옘병을 허등게비."

"너 같으먼 앙 그러겄냐?"

"그렇기도 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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