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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3권 (50)

카지모도 2024. 4. 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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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솔밭은 고리배미의 장관이요, 명물이었다.

마을을 둘러보아 눈에 띄는 명승이나 정취로이 바라볼 만한 무슨 풍경 하나도

없이, 그저 둥실한 고리봉 아래 평평한 마을이 해바라지게 한눈에 들어오는 것

이 고리배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져 마을을 나직히 두르고 있는 동산이

점점 잦아내려 그저 밋밋한 언덕이 되다가 삼거리 모퉁이에 도달하는 맨 끝머리

에, 무성한 적송 한 무리가 검푸른 머리를 구름같이 자욱하게 반공중에 드리운

채, 붉은 몸을 아득히 벋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민촌에 아깝다."

고 이 앞을 지나던 선비 한 사람이 탄식을 하였다는 적송의 무리는, 실히 몇 백

년생은 됨직하였다.

이런 나무라면 단 한 그루만 서 있어도 그 위용과 솟구치는 기상에 귀품이,

잡목 우거진 산 열 봉우리를 제압하고도 남을 것인데, 놀라운 일이었다, 수십여

수가 한자리에 모여 서서 혹은 굽이치며, 혹은 용솟음치며, 또 혹은 장난치듯 땅

으로 구부러지다가 휘익 위로 날아오르며, 잣바듬히 몸을 젖히며, 유연하게 허공

을 휘감으며, 거침없이 제 기운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것은 오직 고요히, 땅의 정과 하늘의 운을 한 몸에 깊이 빨

아들여 합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붉은 갑옷의 비늘이 저마다 숨결로 벌름거리고, 수십 마리 적송은 적룡의 관

능으로 출렁거려 피가 뒤설레는데, 제 몸의 그 숨결로 오히려 서늘한 바람을 삼

아 사시 사철 소슬하게 솔숲을 채우는 이곳을 두고, 고리배미 사라들은 그저

"솔 무데기."

라고만 하였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정자는 그만두고 모정 하나 없이 그냥 소나무 아래 무심히

앉아 쉬고 놀고 하던 것을, 바로 바짝 그 옆에서 주막을 하여 돈냥이나 모은 비

오리어미가, 손님을 더 끌어 볼 욕심으로 궁리를 하다가 모정을 세웠던 것이다.

껍질만 벗긴 기둥목 소나무를 생긴 그대로 써서 네 귀퉁이에 박고, 송판으로 몇

조각 마루를 들인 뒤에, 볏짚으로 손바닥만한 지붕을 덮는 이런 일은 어려울 것

도 없어서, 솜씨 좋은 마을 목수 도식이가 사람 하나 데리고서 한 며칠 뚝딱, 뚝

딱, 하더니, 아주 사나흘 뒤에는 말끔히 마쳐 놓았다.

그것이 십여 년 전 일이었다.

관연 모정을 세운 것은 잘한 일이어서, 마을 사람들한테 좋은 일 했다고 치하

도 받고, 그 덕에 한 걸음이라도 더 하는 사람들에게 술도 더 많이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에 찾아드는 장사꾼들 말고도, 오고 가며 이 길목을 지나가던 길손

들까지도 솔 바람 소리 성성한 적송의 무리 속에 조촐하게 세워진 순박한 모정

에 눈이 가면 저절로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그래서 비오리네 주막은 종종걸음을 치게 부산하여졌던 것이다.

우선 이곳은 길이 좋았다.

이 근동 사방을 에워싼 크고 작은 뫼들의 물결과 주름 갈피에 박힌 여러 마을

에서 물곬같이 흘러나오는, 남원 읍내 쪽으로 가자면 이리로 빠지지 않을 수 없

는, 꽤 오래된 길이 구불구불 하얗게 벋어 오다가 평평하게 화악 퍼지면서 둥그

러미를 이룬 곳이 고리배미였다. 길은, 마을에다 한 짐의 땅을 넉넉히 부려 놓고

는 다시 홀가분한 줄기로 읍내를 향하여 흘러갔다. 거꾸로, 남원에서 북행을 하

재도 마찬가지여서, 아래쪽 삼동네는 물론이고 더 먼 곳에서도 이 마을 앞을 지

나야 역이고 원이고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

고, 웬만한 짐바리를 실은 마소라도 비좁지 않게 걸음을 떼어 놓는 길이 저절로

닦여지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머지않은 곳에 정거장이 생겨나고, 마을을 싸고 있는 고리봉 뒤자락

을 가르며 철도가 놓이는 바람에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기 전만 하여도 마

을 앞 갈림길 솔밭 옆의 비오리네 주막은 밤낮으로 흥청거렸었다.

"아이고, 그 오살 노무 철동가 머싱가 날라먼 요 앞으로 나제, 멋 헐라고 존

질 놔두고 대가리 홰액 틀어 갖꼬 외면을 허고는 저 지랄을 허고 절로 가, 개기

를, 잘 오다가."

이제는 딸 비오리한테 술청 일을 다 넘기고 뒷전이나 살피는 비오리어미가 손

님이 뜸한 날이면 손님 대신 주막의 평상에 우그리고 앉아 하는 말이었다.

생김새가 매초롬하고, 몸매가 호리낭창한데다가, 저 혼자 서거나 앉아 있어도

감기는 듯한 태가 있는 비오리는, 그렇지만 온몸에서 파르스름한 찬 빛이 번져

났는데, 한창 나이가 되면서 물이 오르던 열아홉 스무 살 때는 새침한 얼굴에

도화색이 발그롬하여, 인근 사람들 입살에 어지간히 오르다가 결국 남의 집 소

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몇 해 못 지나, 어느 봄날, 고리봉에 진달래 애터지게 붉은데 꼭 제

어미 그만한 나이 때 모양으로, 작은 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보듬고, 다시 고리배

미로 돌아왔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비오리는 제 몸뚱이 저 혼자서 오고, 맞아주는 어미와

집이 있다는 것이며, 비오리어미는 모가지가 실내끼 같은 젖먹이 비오리를 등에

업은 채, 올 데 갈 데가 없어 막막하게 떠돌던 끝에 고리배미로 들어왔는데, 아

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비오리어미를 내쫓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네는, 누더기가 다 된 헌 옷 보따리 하나에 애기 하나 업고 고꾸라

져 주저앉은 마을 앞 솔밭 옆에 그대로 터를 잡은 것이다.

그것이 벌써 삼십 년 전 일이었다.

"애기 이름? 가이내년이 이름은 무신 노무 이름. 애깅게 기양 애기, 그러먼 되

제."

"그런 이름이 어딨다요?"

"어딨어. 여그 있제."

"커도 애기여? 나중에 인자 안 크간디?"

"크먼 큰애기고."

"하이고매."

"다 쓰잘디 없는 짓들이여. 이름 있으먼 멋 히여, 불르기 조먼 대답허기만 귀

찮제. 상놈의 이름은 안 불릴수락 존 거이여. 멀 알도 못험서. 아조 없으먼 더

좋고. 왜 그런지 알어?"

"일이나 시길라먼 불릉게 그러겄지맹. 이뿌다고 씰어 줄라고 부를랍디여?"

"아네. 성도 귀찮시러. 부모한테 받응 거잉게 엇다 띠어 내불도 못허고 자석한

테로 물려쥐기는 해야겄지마는. 머 써먹을 디가 있어야 생광시럽제. 나 그렁 거

멀라고 있능가 모르겄데잉. 산에 낭구는 이름도 성도 없어도 잘만 크등만."

"왜 이름이 없어? 도토리나무우, 상수리나무, 옻나무우."

"에라이, 그러먼 사람 보고는 씨리둥 사라암 그런당가? 그럼사 좋겄지, 오직이

나. 우리가 산에 나무 허로 가서 너 이름이 머이냐, 안 그러고, 너 무신 성짜 쓰

냐, 안 그러고, 양반이다, 쌍놈이다, 안 그러고, 딱 생김새 바서 그거 한나로 씰

거잉가 안 씰 거잉가 정허디끼. 사람도 사람 볼 직에 본성만 봄사 누가 마대?"

하고 말하던 비오리 아비는, 걱실걱실한 생김새 그대로 성질도 별로 조인 데 없

던 도부장수였었다.

이름 이야기를 몇 번인가 하다가 흐지부지되어 그냥 '애기'라고 부르던 비오리

와 비오리어미를 남겨 두고, 그 아비는 별 것도 아닌 일로 그만 어이없이 생목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때 일찍이 부모 동기를 잃어버리고 저 혼자 때갈로 크던 비오리어미는 세상

에 핏줄이나 연고라고는 머리에 쇠똥 갓 벗어진 딸년 비오리 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 이얘기 허먼 멋 히여. 기양 그렇게 생긴 사람이지 머. 너 맹이로

생겠능가아, 누구맹이로 생겠능가아."

열아홉이 되도록 '애기'라고 부르는 딸이 한번은, 저희 집 술청에 들러 탑탑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도부장수의 뒷등을 이만큼 벗긴 곳에 앉아서 무슨 생각에

잡힌 것처럼 바라보면서

"울 아부지는 어뜨케 생겠능고."

하고 혼자말로 묻는 말에 어미가 한 대답이었다.

비오리는, 제 아비가 도부장수라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혼자서

짐작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큰집 작은집도 없능가?"

"내가 말은 들었는디. 늑 아부지는 에레서부터 그러고 등짐 지고 댕겠다등만.

어디 한 간디가 붙어 살어야 그렁 것도 챙계진디이. 나는 가본 일도 없고, 찾도

못해. 말만 들어 갖꼬 알 수가 있간디? 머 재 넘고 물 건네 어디라고 그러등만,

조선에 재 너고 물 건네는 디가 어디 한두 간디냐?"

"긍게, 어머이허고는 장에서 만났당가?"

"내가, 장에 있는 주막에서 기양 심바람도 허고, 정지꾼맹이로 불도 때고, 그륵

도 싯고, 빨래도 허고, 그러고 있는디, 늑 아부지를 만났제. 그 주막에를 늘 댕겠

잉게."

"아부지가?"

"잉."

"아부지 이름은 머이간디?"

"본쇠."

"본쇠..."

입 속으로 그 이름을 되받아 뇌어 보던 비오리는, 두 팔로 깍지를 낀채 괴고

앉은 무릎에 턱을 받친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나 울 아부지 한 번만 봤으먼."

그 말에 비오리어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슨 생각을 저만치 밀어내듯이, 번지는 소리로 말끝을 흐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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