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무엇을 버리고
"무얼 그렇게 골똘히 생각허냐? 아까부터."
아마 강태는 집짓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봉천에 도착할 때까지는 한
번도 뜨지 않을 것처럼 날카롭고 무겁게 감은 눈을 실같이 열고 강모의 안색을
훑으며 강태가 묻는다.
"아니요, 아무것도."
어느결에 전주역을 벗어나 버린 기차가 덕진을스쳐 동산촌을 지나서 삼례 한내
다리 가까이 처꺼덕 처꺽 처꺼덕 처꺽, 철궤를 따라 달린다.
"착찹하겠지."
강태의 목소리가 웬일로 눅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잠긴 그의 음성은 묵
득 그가 형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거기도 다 사람 사는 데 아닙니까."
강모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한다.
"제법인데? 도련님. 난 또 네가 젖 떨어진 아이모냥 혹시."
"형님도 참. 내가 무슨 어린앤가요?"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점점...?"
엷은 웃음을 띄우는 강태한테 무안한 김에 발끈 말꼬리를 치킨 강모가, 목소리
를 낯추며
"심진학 선생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무질러 내뱉는다.
"그래?"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글 떠 보인 강태는 고개를 갸웃한다.
"네가 그 선생 이야기를 하는 건 좀 뜻밖인걸."
"왜. 나는 뭐 화류항 잡사나 들먹여야 격에 어울립니까?"
"언사가 곱지 않구나."
"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이죠."
"쓸데없이 자비하는 건 좋지 않아."
"자긍할 게 있어야지."
달리는 기차의 차창바깥으로 겨울 새벽 하늘이 희푸른 회색빛 기적에 놀라 칸칸
마다 휙휙, 어둠을 거두며 물러앉는 것이 보인다.
"자각을 하면, 자긍이 생긴다."
내가 과연 누구인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 깨닫는 그 순간부
터, 인간은 존귀한 존재가 된단 말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야. 이미 지나간 시대,
죽은 자들의 넋두리라고 휴지처럼 구겨서 쓸어내버리면 시간의 밸설물, 한 더미
두엄만도 못한 것이 역사고, 그것이 몇 천 년 혹은 몇 백 년 전의 이야기 일지
라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근본이요, 과정이라고 믿는다면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지. 그러나,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야. 오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오늘의 '나'다. 강태는 진진하게 말을 하다가 주먹 쥔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펴 자기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가리켰다.
"오늘은 역사가 될 현실이거든."
기차는 공중에 떠 강 바닥을 드러낸 한내의 다리 위, 철교를 지난다. 나는 이상
해. 왜 오늘이라는 현실, 현실이라는 오늘은 늘 그렇게 몽상적일까. 삶이 실감
나지 않아요. 내 몸이 구체적으로 그 어떤 사건을 겪고 있을 때에도, 그것은 꼭
감각 없는 껍데기가 저 혼자 몽유하는 것 같고, 그 몽유 혼몽의 무감각 안쪽에
오히려 눈뜬 내가 또 하나. 냉소로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으니. 그 두 사람이
서로 일치해 본 일이 나는 없어요.
유체와 신체 사이. 그 중간에 나는 떠 있습니다.
"막막해요."
"무엇이...?"
"이 몸과 저 몸 사이가."
"꿈을 꾸냐? 무슨 소리야? 갑자기 뚱단지 같이."
속으로 혼자서 한 말을 들었을 리 없는 강태가 핀잔처럼 강모를 샛 눈으로 본
다. 강모는 대꾸를 삼킨 묵묵함으로 창 밖을 본다. 삼례 한내 희고 맑은 모래밭
에 기러기 열을 지어 내려앉는 모습이 하도 아름답고 정취로워서 예로부터 이
고장에 일컬어지기를
"비비낙안."
이라고 '완산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는 그 한내. 언제 하번 이 풍경 보기를 마
음에 원하였으나, 이미 기러기 자취 끊어진 강기슭에 얼음을 이빨같이 허옇게
물고 있는 자갈밭, 을씨년스러운 엄동, 버리고 달아나며 내다보는 명승은 무정
하리만큼 삭막하였다. 전에 강모가 아직 소년이었을 적, 매안의 사랑에서 남평
할아버지 이징의가 하던 말이 새삽스럽게 되살아난다.
"그 비비낙안이 말이여, 기러기떼 나란히 푸른 물 흰 모래 백사장으로 날개를
치면서 날아와 앉는 정경을 말허는 것인가아, 안그러면 앉았다 날아가는 기러기
떼 날개들 그림자 지는 모래밭에, 댓잎같이 푸르게 남은 취죽의 새 발자국을 이
르는 말인가아. 나는 그걸 생각해 보누만."
그때 한자리에 앉아 있던 동계 할아버지 이헌의는 흰 수염을 은실뿌리처럼 드리
운 채 가느스름 눈을 감은 듯 뜨고서, 윗몸을 천천히 좌우로 흔들더니, 웃으며
"글자 그대로 읽는다면 전자가 맞겠고, 문자향을 새긴다면 후자가 맞겠고."
하였지.
창호지 덧문을 싸르락 싸락 스치는 바람 소리가 오히려 적막한 안온을 느끼게
하던 사랑의 아랫목에 옥판선지 한 장이 마치 삼례 한내 백사장처럼 하얗게 펼
쳐져 있었는데, 남평 할아버지는 거기 갈필로 메마른 노엽을 몇 잎을 쳤다.
"과시!"
동게 할아버지가 붓자취에 흡족한 탄성을 발하고, 아버지 이기채는 심중한 시선
을 모으며 종이에 찍힌 댓잎을 들여다보았다.
"젊은 잎보다 노엽이 더 칼칼하고 힘이 있어. 축축한 것 쫙 빠진 기상이 서슬이
거든. 이 댓잎 좀 봐라. 그냥 쇳소리가 나잖느냐?"
멋모르고 덩달아 곁에 앉아만 있는 강모한테, 상기된 낯빛으로 흥겨운 마음을
드러내던 동계 할아버지는, 그 대를 큰사랑 벽장문에 붙여 두라고 했었다.
"남평의 대 중에서도 이놈이 아조 일품이겄어. 동지 섣달 눈바람 아랑곳없이 외
나 설한풍 받어서 꼿꼿이 곧추선 이 기색이 참 헐 말 있게 생겼다."
이런 것이 곧 풍죽이어니.
댓잎 같은 기러기 발자국 흔적조차 느낄 수 없는 삼례 한내 겨울 강, 사위어 쓸
쓸한 모래톱이 저만큼 지워질 듯 내려다보이는데. 하이얀 눈을 머리에 인 설죽
의 늙은 잎을 솟구치게 일으키는 높새바람 부는 대신, 검은 기차화통이 가쁘게
내뿜는 연기와 증기만 빈혈의 모래사장을 장막으로 가리운다.
"백제가 망하고, 후백제가 망하고, 고려에는 사무치는 미움을 골수에 받은 땅.
마한의 옛터. 이 전라도 백성들이 왜 이처럼 반골 야인의 기질로 한세상에 저항
을 하며 풍류에 몸을 싣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심진학 선생은 말했었다.
저항과 풍류.
"어쩌면 이 두가지는 아주 상반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 가진 자는 저
항하지 않으며, 억울할 일 없는 자, 혹은 세상을 거머쥐려는 욕망으로 들끓는
사람의 검붉고 걸쭉한 혈관에는 풍류가 깃들지 못한다. 풍류는 빈 자리에 고이
고, 빈 자리에서 우러나며, 비켜 선 언덕의 서늘한 바람닫이 이만큼에서 멀리
앉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니면 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들은 한 바탕 한 뿌리에서 뻗은 두 가쟁이다."
이명처럼 맴도는 선생의 음성이 뙈애액, 기적의 비명에 먹힌다. 아,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땅 만주로 가고 있는데, 왜 지나간 날 들었던 멸망
의 옛이야기만을 이다지도 끝없이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한번도 실체로서 오늘
을 살지 못한 채, 오늘이 어제가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그 어제에 발목이 묶여,
헤어날 길 없는 어제를 오늘 사는 어리석음. 그것이 싫다.
강모가 머리를 털어내는데, 강태가 별안간 거칠게 팔꿈치를 툴 쳤다. 깜짝놀란
강모가 엉겁결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왜?"
하며 강태를 바라본다.
강태의 눈딱지가 꺾이며 모가 섰다.
"왜 그래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ㄹ한 강모를 금방이라도 내리찍을 듯한 시선우로 콱 누른
강태가 음성을 낮추어 죽인다.
"저쪽을 봐."
거두절미를 한 그 말을 듣는 순간 강모는 저도 모르게
"들켰구나."
생각했다. 가슴이 퉁 내려앉으며 우끈우끈 뛰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수천 숙부
기표나 이기채가 뒤쫒아 그를 잡으러 온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몸이 긴
장으로 돌멩이처럼 뭉쳐 웅크러든다. 자, 이제 어떻게 하나. 그냥 이 길로 튀어
달아나는 방법과, 점잖은 두 분이 중인환시리에 큰 소리 내어 망신은 시키지 않
으실 터이니 우선 곱게 따라 내리는 방법, 둘중에 하나밖에 다른 묘리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누굽니까?"
강모는 강태가 시키는 대로 그의 눈끝을 좇아 제 등뒤를 돌아보는 대신, 먼저
숨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돌아보면 안다."
꽁지를 누르는 그 목소리에 실린 힘이 암만해도 의아하다. 만일 강태가 가리키
는 사람이 강모의 짐작같이 기표나 이기채라면 이처럼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턱
짓을 하고만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한테 불리한 사람이 분명한
모양인데, 대체 누구인가?
비로소 돌아본 강모는 사람들 틈에서 쉽게 아는 얼굴을 찾지 못했다. 이제 막
부유스름 깨어나면서 웅성웅성 부산해지는 기차칸 뒷문 쪽 좌석 언저리를 눈으
로 더듬는데, 마땅찮은 기색이 뒷목에까지 뻣뻣하게 차 오른 강태는 미동도 하
지 않고 꼿꼿이 앞만 바라보고 있다.
"누가 있길래."
하다가 그만 강모는 악, 벌린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아연실색을 하고 만 것이
다. 기차칸 저쪽 끝 문간에 달린 변소 옆 의자 안쪽에 허름한 차림으로 동그맣
게 앉아 있는 것은 오유끼였다. 냉큼 강모가 그네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너무나
뜻밖이었던 탓이리라. 강모는 은연중에 기표나 이기채임직한 사람을 찾고 있었
으니까. 여자한테는 아예 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오유끼라니. 일단 강모는 오유끼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앞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태가 하도 어이가 없어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약속을 한 거냐?"
애써 참는 빛이 역력한 강태의 말에 강모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가 차서 중
치가 막힌다.
"나도 지금 놀라지 않습니까아."
"그럼 아니란 말이냐?"
차가운 눈으로 강모를 노려보는 강태의 억누른 어조에, 염치가 없고 무색하여
강모는 귀밑까지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는 부끄러웠다.
"모욕하지 마십시오."
잇바디 사이로 겨우 이 한 마디 밀어내고는 더 말이 안 나와 어금니를 물어 버
린 강모에게 강태는 종주먹을 댄다.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냐, 지금. 무얼 잘했다고?"
"아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애요? 아무리 화류항 청등홍가 주색에 쩔었대도, 이런
길에 계집을 차고 갈 넋빠진 놈이 어디 있겠소?"
"말인즉슨 그러한데, 시방 눈앞에 실제로 벌어진 일은 네 말같이 안돼 있어, 그
렇지?"
"그럼 자초지종을 물어나 보고 건너짚든지."
"말 잘했다. 그래, 좀 물어보자.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나도 모릅니다."
"뭐?"
무지른 강모의 대꾸에 강태도 기가 막힌지 역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아니, 저
년이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저기 앉아 있는 것일까.
강모가 다시 목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오유끼는 옆자리 노인네 한테 고구
마를 한 개 먹어 보라고 껍질까지 벗겨 주며 권하고 있었다. 아마 기차칸에서
요기를 하려고 집에서부터 쪄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복장도 전혀 평소의
오유끼 같지가 않았다. 아까 어쩌면 그래서도 얼른 그네를 못 알아보았는지 모
른다. 그 차림은, 어디 전주 매안간같이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먼 길 가려고 작
정한 사람처럼 아예 펑펑한 몸뻬를 터억 꿰어 입고, 윗도리는 솜놓은 핫저고리
풍신하게 입은 위에다, 중늙은이가 몇 년 입었다 벗은 것 같은 고동색 마고자를
아무렇게나 걸친 것이었다. 그런데도 태생이 있는지라 자르르 어딘지 모르게 아
양스럽고, 눈웃음 치는 몸짓 탯거리가 여염의 아낙하고는 다른 것이 한눈에 멀
리서도 보였다. 고구마 얻어먹은 노인네가 합죽한 입시울을 연신 호물거리며 오
유끼한테 무어라고 자꾸 말을 붙인다. 오유끼가 웃는다.
"어디까지 가느냐."
"누구랑 가느냐."
"혼자 가느냐."
"무엇 하러 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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