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사내종 시능이는 무술생이며 계집종 만업이는 갑신생이다. 그런즉
이 숫자는 모두 여덟이다. 도합하여 열여덟 명 종들의 이름을 이기채는 낱낱이
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을 짐작해 보았다. 그들을 이미 오래 전
에 죽고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 또렷또렷 생생하게 적혀 있는 이름들이 꼭
살아 있는 눈구녁들 같아서 그는 전율을 느꼈었다.
"그래, 나는 이 한 많은 세상에 종이었다."
이름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들은 어찌 종이 되었을까. 난신적
자의 자녀 중에 아들은 목을 베고 딸은 관에 잡아들여 먼 변두리 고을 관아의
관비로 만들었으니, 이 관비가 낳은 소생들은 어쩔 수 없이 관노, 관비가 되지
만, 그 핏속에는 세월을 잘못 만난 양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또 양민의 딸이라도,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체납으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부모가 밀린 세금 대신 울면서 딸을 관비로 바치기도 하였다. 관
비는 비자와 기생으로 나뉘었다. 둘 다 관가에 매인 종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한쪽은 용모와 재능에 상관없이 허드레 궂은일,잡일에 물일을 하는 계집과 아낙
이고, 한쪽은 자색이 분통 같고, 가야금,비파를 타며, 교태 아양과 춤과 노래에
몸이 익은 관기, 기생이다. 그냥 기생이라 하여도 여덟 가지 천민 중에 하나라
그 신분이 미천한데, 그나마 종이면서 기생이니 관기는 비록 그 모습이 해당화
같이 아름다워도 한낱 창기로, 해당 주읍에 객이 올 때마다 객고를 풀라고 내주
어 간하게 하였다. 관가에 출입하는 양반 중에는 이 관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투어 끝내는 틈이 벌어지고 마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관기가 낳은 아들
은 관노가 되고 딸은 다시 어미를 이어 관기가 되는 것이 법이어서 모두 함께
관아에 매어 있을 때, 모녀,자매의 기생이 한 양반과 더불어 희롱하는 일이 잦
아, 풍교를 말하기가 무색한 일이 많았다. 관기 가운데는 침기가 있었다. 보통
때는 기생 노릇을 하고 내아에서 부르면 대답하고 응하여 바느질을 하는 것이
다. 여염의 안살림을 해 본 일 없는 기생에게 바느질이 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웬만한 것은 게발을 건너뛴다 하더라도, 가는누비 같은 것을 맡기면, 그 누에씨
보다도 작은 바늘 땀에 촘촘히 박아가는 선이 한 땀이라도 어긋나면 안되는 누
비 바느질, 그 중에도 가는누비를 무슨 재주로 해낼 것인가. 솜씨는 그만두고
속에서 열불이 나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얌전한 기생이, 솜 놓은 저고리
나 바지나 두루마기 감의 온 바닥을 개미가 지나가듯 좁은 걸음으로, 한 줄도
아니요, 두 줄도 아니요, 석 줄, 넉 줄도 아닌, 수수 백, 수수 천 줄을 누벼야
하는 누비 바느질을 하고 앉아 있겠는가. 당치않은 일이었다. 그것을 알며서도
내아에서는 일감을 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이 기생은, 행음을 해서 얻은 비녀
나 노리개, 팔찌와 반지 같은 것을 주고 바느질 집에 가서 해 왔다. 이래서 원
성이 높았다. 이들 관비 중에 양반의 눈에 들어 그에게 속신하게 되면, 양반은
그 관비를 집으로 데려가고, 대신 자기 집에서 부리던 사비를 보내 자리를 채웠
다. 그리고 양반에게 몸이 속한 관비는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그의 천첩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 관기를 데리고 나왔을 경우에는 집에 가두어 가비를 만들었는
데, 노래 부르는 계집 종 가비는 사대부의 집에서 붙어 살며, 손님을 접대할 때
가창으로 봉사하였다. 이러한 공비, 사비들은
"날마다 지아비를 바꾸어 개, 도야지와 같으니, 소생은 단지 어미 있음을 알고
아비 있음을 알지 못한즉, 아비를 묻지 말고 어미를 따르는 수모의 법을 펴야
하겠다"
고 세종 13년에 말하여진 것이다.
노비의 신분 세습에 관해서 조선 전기에는, 부모 양쪽 중에 하나만 천인이어도
그 자손은 천인이 된다고 했다가, 한때는 종부법이 시행되어 양인과 비 사이의
소생은 양인을 만들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신분을 따라 종의 자식 신분이 바뀌
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양반층의 반발로, 얼마 안가서 이 종부법은 폐지되었다.
그리고는 어미의 신분을 자식이 따른다는 종모법이 시행되었는데, 말하자면 아
무리 사내 종이라 할지라도 만일 양민의 딸과 혼인하면 그들의 소생은 어미의
신분에 따라 양민이 되는 것이었고, 또 계집 종이 아무리 사대부의 자식을 낳았
다 할지라도 그는 어미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외 모두
노와 비인 경우에는 할 수 없이 그 소생들도 모두 노비가 되었지만, 그 소생들
가운데 아들인 노는 양민의 딸을 만나면 그 자식들부터 양인의 신분으로 바뀌었
다. 그러나 노비의 딸은 아무리 양민의 남정네와 혼인한다 해도 하릴 없는 일이
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아들을 낳으면 부디 양민의 새악시를 만나
그 자식 대에서부터는 부디 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물
론 그 간절한 소망대로 부지런히 일하거나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여 제 몫의 재
산을 지니고, 머리도 깨어, 양녀와 혼인한 공,사노들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못한
경우들이 더 많았다. 그러니 나이가 차서 짝을 맞는다는 것은 종이 종을 만나
다시 더 많은 종을 낳는다는 말이나 한가지였다.
이만한 숫자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벼슬도 높고 살림의 규모도 크
겠지만, 종모법에 따라 저절로 늘어난 노비의 수효가 이 사람의 재산을 늘려 주
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논 열마지기를 주어야 살 수 있는 노비를 얼마나 많
이 가지고 있는가가 곧 재산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많은 노비들은 오직 저의 주인인 상전의 손발이 되어 일했다. 아무리 노비라
하여도 사람인지라 제각기 타고난 성격이나 재주가 다를 것인데, 어떤 사노는
상전의 농사를 맡아서 경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노는 상전의 이익을 위하여
장사판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농지의 장리를 관장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노들은 농사짓는 일에 뼈를 바쳤고, 나무를 해 오거나 물을 긷거나,
집 안팎의 잡일 중에서 계집종이 할 수 없는 온갖 궂은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계집종들은 상전의 가까이에서 몸 심부름을 하는 몸종이 되거나, 혹은 침비가
되어 바느질을 하거나, 혹은 상전의 눈에 들어 천첩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정지 일과 빨래, 쓸고 닦는 소제며 끊임없이 생겨나는 일들에 손바닥이 나무 껍
질같이 터지고 갈라지기 예사였다. 그리고 혹 가다, 상전과 한 집안에서 살지
않고 따로 나가 밖에 살면서, 몸으로 일하여 바치는 신역 대신 노비공을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노비공은 사노가 매년 면포 두 필이고 사비는 면포 한 필 반
이었다. 그런데 사천의 노비공은 상전들의 월권으로 점점 부과액이 늘어나 드디
어는 노비들의 살가죽을 벗겨다 바쳐도 모자랄 만큼 엄청나게 가혹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가 영조 31년, 무거워진 노비공에 깔려 빈사 상태에 이른 사천들의 공납
품을 반절로 줄여, 사내종은 면포 한 필, 계집종은 반 필로 감하는 노비공감의
영을 내린 뒤, 엄격하게 통제하여 절대로 더 받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예 계집 종의 노비공은 면제를 해 주어 버렸다. 뿐 아니라 영조는 노
비의 호적인 노비안과 그에 관한 문서가 비치되어, 노비로 인한 송사를 맡아 보
던 장례원을 끝내 폐지하고 말았다. 그것은 한평생 동안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
었던 외가의 피에 대한 뼈저린 증오와 저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종의 아드님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지만 어머니는 전라
도 땅 임피의 천노 최씨의 딸로, 후일에는 임금을 낳은 숙빈이 되었으나, 처음
에는 숙종비 인경왕후가 혼일할 때 교전비로 사가에서 따라 들어온 몸종이었으
니, 만일 노비 종모법을 따른다면, 아무리 아버지가 임금이라 하여도 자신은 종
의 자식인즉 사노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 아닌가. 다만 천행으로 임금은 그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묻지 않는 무치여서, 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언
제나 거꾸로 흐르는 외가의 피와 맞부딪쳐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하여, 비 정성
왕후를 일생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따님을 꽃 같은 배
필로 맞이하여 마주앉은 첫날밤의 첫 마디 때문이었다.
"참으로 손이 곱기도 하오."
신랑은 밀촛불 휘황히 타오르는 신방에 들어, 어루만지기에도 아까운 신부의 흰
손을 잡고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찬탄하여 말씀하였다.
"본곁의 어머니가 저를 귀엽게 여기어, 시집보낼 때까지 곱게 기르노라고 일을
한번도 안 시켜서 그런가 보옵니다."
고개를 수그리며 말한 신부의 이 한 마디에 신랑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잡지 않았다. 평생을 두고.
저것이 내 어머니가 미천한 종인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구나.
저것이 내 어머니 갈라터진 손을, 제 말 하며 비웃는구나.
저것이 나를 모욕하는구나.
저것이 내 피를 조롱하는구나.
깊은 수모를 느낀 영조는 다시는 돌이켜지지 않는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라앉
힐 수가 없어, 공방으로 그 심정을 갚았던 것이다. 결국은 장례원을 폐하여 종
의 명부를 다 치워 버렸지만, 수천년을 두고 내려오던 누습은 결코 없어지지 않
아, 임금의 성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비 제도는 깊이깊이 뿌리를 박은 채 성
하였다.
노비와 상전의 관계는 마치 서리를 튼 나무 뿌리와 견고한 지반처럼 서로 엉키
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나무의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
져 뿌리를 벋을 때 버슬버슬한 모래흙이라면 빨아들일 수분도 넉넉지 않거니와
지반이 실하지 못하여 작은 바람에도 뿌리가 뒤집히며 지나가는 빗줄기에도 사
태가 날 것이다. 또 너무나 박토여서 온통 메마른 흙투성이 큰 돌 작은 돌이 옹
이같이 박혀 있는 땅 속에서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없을 것이요, 만일 목슘
을 부지하여 살아 남으려면, 제 앞을 가로막은 이 돌멩이 저 바위덩어리를 비틀
어지게 외틀어지게 감으며, 그것에 눌리며, 한 모금의 물을 찾아 벋어 나가야
할 것이다. 또 썩은 웅덩이를 품고 있는 땅이라면 뿌리도 따라 썩기 쉽고, 우물
같은 암벽에 갇힌 뿌리는 벋어도 소용없이 저희끼리 뒤얽히고 꼬이다 말 것이
다. 그뿐인가, 독충이 살고 있는 땅이라면 뿌리가 벋어 나가기는커녕 중독으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지하의 어둠은 무궁하고, 토질은 비옥하여 풍요로
운 물을 머금은 땅에 뿌리의 발이 닿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반촌이라면 반궁, 즉 성균관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주변 동네를 말하는데,
이를 반중이라고도 하였다. 반촌은 큰 길을 경계로 동,서 반촌으로 나뉘었다.
동반촌 언덕 위에는 유생들의 선비다운 기상 배양을 위하여 숙종조에서부터 의
논되어 영조 원년에 이루어진 숭절사가 있었다. 이곳은 불의에 저항하여 높은
기상과 절개를 보여 준 중국의 모범 태학생인 서진의 동양과 당의 하번, 송의
진동, 그리고 구양철을 숭모하여 제사하던 곳이었다. 또 동반촌의 큰 길가에는
병자호란 당시 오성 십철의 위판을 받들고, 남한 산성의 행재소(거둥때에 임금
이 머무는 곳)로 들어간 성균관 수복 정신국, 박찬미 등을 표창한 정문이 영조
3년에 세워졌다. 수복이란 조선의 단, 묘, 능, 사, 원, 전, 서원 등에서 분뇨오
물을 청소하던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반촌에 살고 있는 반인들은 주로
성균관에 소속된 하예들로 흔히 '관 사람' 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대개 본시
개성에서 옮겨 온 고려 국학 소속 노비의 후손들이다.
고려 중기의 명신이요, 큰 학자였던 찬성사 안향은 일찍이 섬학전이라는 육영재
단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을 낙성하여 학교를 크게 부흥시키고자 사재와 사노
비 백명을 국학에 모두 들인 일이 있는데, 조선 성균관의 하예들이 바로 그 노
비의 후손들인 것이다. 이 반인들의 인구가 날이 갈수록 점차 불어나 성균관 일
을 하는 것만으로는 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쇠고기 전매권을
주었다. 그래서 생긴 푸줏간을 현방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또 곡예와 가무, 음
곡을 일로 삼던 재인 백정이기도 하여, 궁중의 잡희나 탈춤 광대놀이 같은 산디
놀음에 우인으로 나가기도 했는데, 이 반인들은 어음과 곡성이 송경(고려의 서
울인 개성) 사람과 같아서, 여자가 슬프게 흐느껴 곡할 때는 마치 노래를 부르
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남자들은 의복이 매우 사치스럽고 혈기가 있어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왕왕이 싸움을 벌일 때는 곧잘 가슴이나 다리를 찌르는
버릇이 있으매, 서울 본토막이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이들 중에 관비
소생은 성균관의 재직이 되고, 타비 소생은 서리가 되었으며, 재직이 장성하면
수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반촌 북쪽에 단을 모시어 두고, 해마다 안향의
기일이 오면, 가기 돈과 포목을 내어 제수를 융숭하게 차리고 정성껏 제사를 지
냈으며, 안향의 후예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이가 있으면
"보라, 이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고들 했다고 한다.
실로 무엇이, 조금도 쉬지 않는 충정으로, 조금도 줄지 않는 수량으로, 몇 백
년의 세월을 두고도 변함없이 그 상전을 그리워하게 하랴. 그리고 그 길고 오랜
강물을 혈온으로 따뜻하게 할 수가 있으랴.
연재 송병선은 구한말 사람으로, 소선 숙종조의 거유이며 노론의 머리인 우암
송시열의 팔세손이다. 그는 고종 임금을 가르친 왕사였는데, 아우 심석 송병손
과 나란히 그 인품과 학문을 널리 나라안에 떨치었다. 그러다가 광무9년, 일본
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나라의 자주권을 잃은 비
분과 원통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연히 독약을 마시어 자결하였다. 의관을 정제
하고 임금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 사배 무릎을 꿇은 채, 갈아입은 흰 옷 위로
선혈을 쏟으며 숨이 지는 연재 송병선의 발치에는, 맨 처음 이 자결을 준비할
때부터 소리없이 시중을 들던 사노 복남이가 애절하게 엎드려 있었다. 생시에야
어디 감히 차마 상전의 손을 잡아 볼 수 있었을까만, 이제 비장하고 의롭게 목
숨을 끊은 주인 마님의 발을 어루만지며 오로지 눈물로 그 발등을 적시던 복남
이는, 드디어 터지는 설움으로 상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산발한 머리를
그 몸에 묻었다. 검붉은 원형이 송병선의 가슴을 물들이고, 복남이의 앞자락을
물들게 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상전의 몸을 제 두 팔로 감싸서 가슴으로 보듬어
안은 복남이는, 어질고 따뜻한 어버이를 잃은 애통으로 사뭇 서럽게 울면서 마
지막 가는 원혼을 배웅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복남이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
송병선의 머리를 내려놓고, 피에 물든 옷자락을 여미어 드린 뒤, 그는 상전이
미처 다 못마신 약사발의 독약을 기울여 마셨다. 창자가 끊어지는 통곡으로 상
전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릇에 묻은 약을 다 혀로 핥고 핥아 그는 상전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송병선의 시신 발치에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은 복남이는, 죽어
서도, 생전에 그리하였듯, 상전의 묘서 발부리 아래 이만큼에,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고개를 숙인 시늉으로 봉분도 나지막이 묻히게 되었다. 밤이나 낮이나
멀리 가지 않고, 꼭 부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상전의 존체를 우
러르는 복남이 무덤 위로는, 그 상전의 손길같은 어질고 속 깊은 바람결이 언제
나 흐르고 고이고 하였다.
시공을 넘어 함께 있는 이 종을 위하여 송병선의 후손들은 연재의 묘서에 벌처
를 할 때면 꼭 잊지않고 복남이 무덤도 돌보았다. 그리고 연재 송병선의 기일이
돌아오면, 제사가 한날 한시인 복남이의 제상도 조촐하게 보아 개다리 소반에
나물 몇 가지를 차려서 송병선의 제상 아래 들여놓았다. 몇 십 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마치 어미의 태안에 든 태아처럼, 상전의 제상 다리 아래 감싸이듯 놓
여 복남이는 제몫의 조그만 개다리 소반을 받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주종의
혼백을 하자리에 모신 은진 송씨 송병선의 후손들은 엄숙한 감회로 제사를 올리
었으니.
그들이 제상 앞에 기라성처럼 서서 의롭게 빛나는 조상 송병선에게 엎드리어 재
배를 할 때, 살아서나 똑같이 죽어서도 그 옆에서 상전을 무덤을 지키고, 이렇
게 제사에 혼백까지 따라 와 모시는 만고 충복 복남이가, 한자리에서 같이 그
귀한 절을 받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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