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을음 불꽃
"쯧.꽃니야."
그을음이 길게 오르면서 일렁거리는 등잔불 밑에 꼬부리고 앉아 붉은 헝겊 조각
을 만지고 있던 계집아이는,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제 어미가 혀를 차며 부
르는 이름에 움찔하여 손짓을 멈춘다. 소리를 누른 어미의 음성에 나무라는 기
색이 역력한 때문이었다. 손짓만 멈추었을뿐 그대로 쥐고 있는 다홍색 헝겊말고
도 계질아이의 무명 치마 앞자락에는 남색, 노랑, 진분홍, 초록의 헝겊쪼가리가
세모, 네모, 여러 장 놓여 있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제법 길고 넓었지만 아닌
것은 그저 제 손바닥만큼씩이나 자잘하다. 그 색색 가지 헝겊 조각들은 어둠을
머금은 주황의 등잔 불빛을 받아 알록달록 요기를 띠어, 본디 제 색보다 오히려
더 요려하게 보인다.
"너 멋 허냐. 시방. 오밤중에. 잠 안자고."
헝겊 조각이 수북한 계집아이 꽃니의 무릎 옆에 놓인 색동 실패를 집어 반짇고
리에 담으며 어미 우례가 묻는다. 말이 묻는 시늉이지 미리 하는 짓을 다 알고
오금을 박는 소리다.
"기양."
"기양?"
"상보 맹글라고."
"왜. 누가 상보 없어서 밥상 못 채린다고 허디야?"
"아니."
"아닌디 왜 꼭 지금 허니라고 그리여? 그거이 무신 숨넘어갈 일이간디. 아무리
에린 거이라고 그렇게 때를 모르냐, 긍게."
어미는 혀를 한 번 더 차고는, 묶어 둔 주둥이가 벌어져 풀린 채 쑤석거려진 헝
겊 보따리를 웃목에서 꽃니 앞으로 끌어 당긴다.
"얼릉 치워라."
그 말에도 계집아이는 아직 미련이 덜 가신 듯 손을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제
치마 앞자락의 헝겊 조각들을 가지런히 챙겨 보따리 위에 올려 놓는다. 쓰다 남
은 자투리 헝겊을 채곡채곡 쌓아 모아 놓은 보따리 속에는, 넓고 좁고 길고 짧
은 쪼가리들이 물색도 선연하고 종류도 각색으로 섞여 있다. 도톰한 비단 바탕
에 윤이 반드르르하고 무늬가 정교한 요홍 모본단이며, 그보다 얇고 보드라워
손에 감기는 명주로 수화주, 왜주와 화방주에, 진보라 가지색, 쑥색, 북청, 자
줏빛 조선명주, 그리고 치자물 오련한 항라와 청, 홍 갑사, 연두 숙고사, 연분
홍, 옥색의 모시 조각들. 두껍고 엷어 사철이 두루 섞인 감이나 가위질한 자리
로 보아. 이것들은 한두 해가 아니고 여러 해를 걸려 바느질감이 있을 때마다
남은 것을 한 조각 한 조각 정성스럽게 모은 것인 성싶었다. 단정하지만 몸때가
가무름하게 밴 바람벽에 대나무 횃대가 가로 걸리고, 큰 세간이라고는 묵은 소
나무 반닫이 하나와 낮은 장이 웃목 한 쪽에 나란히 있을 뿐인 부들자리 방아네
그 물색 고운 비단 헝겊들은 얼핏 가당치 않게 보이기도 하였다. 서른의 문턱을
넘어선 어미 우례는 그만주고라도, 남들 같으면 한참 앙징맞게 예쁜 옷을 입고
자랄 나이의 꽃니도, 검정 물들인 무명 돔방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는 것이 고작
인지라, 꽃니는 아주 어려서부터도 유난히 어미의 헝겊 보따리를 좋아하였다.
우례도 그랬지만, 본디 노비는 색 있는 옷을 입지 못하니, 꽃니는 이제 나이
먹어 처녀가 되고 혼인하여 아낙이 된 뒤에도 그렇게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을 것이었고 긴 앞치마를 두를 것이었다. 그것이 종의 옷이었다.
늘 자고 새면 날마다, 궂은일, 거친일, 물 만지는 일을 해야하는 종의 흰빛이면
누가 당해 낼 수 있겠는가. 금방 거먹투성이가 되고 마는 것을 그때마다 바꿔
입을 옷도 없거니와, 일일이 뜯어서 빨래하여 풀 먹이고 꿰매야 하는 바느질을
할 겨를 또한 없으니, 겨우 저고리나 흰 것으로 입고, 치마는 일 속에서 뒹굴어
도 검는 줄 모르는 검정으로 입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실용의 뜻 말고
도, 색은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징표가 되기도 하였으니.
백제에서는 법으로 복색을 정하여, 육품 이상은 자의, 십일품 이상은 비의, 십
육품 이상은 청의를 입게 하고, 왕은 소매가 넓은 자포에 청색 비단 바지를 입
었다. 또 관인은 붉은 관복에 품위별로 각각 다른 색대를 띠게 하였는데, 칠품
은 조(검정), 구품은 적, 십품은 청, 십일,십이품은 황, 십삼,십사,십오,십육품
은 모두 백색띠를 띠었다.
또 고구려에서는 자비, 천비, 녹으로 색의 순위를 정하고 품계에 따라 입게 하
였으며, 악공들은 연주할 때 자색 비단으로 지은 모자 자라모에 자색 얇은 비단
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감아 둘렀고, 신라에서는 자의, 비의, 청의, 황의로 색
의 순위를 정하였다.
비색은 약간 황색이 감도는 홍색이다. 이 삼국이 모두 자색을 가장 높고 귀한
색으로 숭상한 반면에, 황색은 낮은 것으로 여기어, 신라에서는 심지어 귀족인
진골녀와 육두품녀는 그 옷에 자황색 쓰는 것을 금하고, 오두품녀에게는 자황과
황색을 금하였다. 그것은 하위색인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오히려 고려에 와
서는 거꾸로 바뀌어, 백성이 황색 옷 입는 것을 금하고, 귀족들이 그 색을 입었
으며, 포에 황색을 쓰고 치마에도 쓰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이르러서는
다른 모든 색을 제압하고, 황색이 최상위의 중앙색이 되었다. 드디어 왕의 곤룡
포를 비롯하여, 왕가에서 황색과 황지색을 사용하게 되니, 세종 10년 이월에는
나라 안 백성들의 대소,남녀를 막론하고 황색 의복 입는 것을 금하였는데, 다시
세종 26년 시월에는 황색에 가까운 색조차도 모두 입지 못하게 금하고는, 그 이
듬해 팔월, 또다시 모든 신하 된 자의 황색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니 색은 이미 단순한 물이나 빛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법이 그어 놓은
금 아래 사는 한, 입으라 한 색을 거역할 수 없고, 입지 말라한 색을 제 마음대
로 입을 수는 없는, 이 색에서 저 색으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을 날 세우고
있는 한세상이었다. 왕은 오채 찬연한 색의를 입고, 대신들은 머리에 푸른 비단
을 곱게 입혀 만든 청라관이나 진홍색의 얇고 고운 명주로 만든 강라관을 쓰고
노란 가죽으로 지은 황혁리를 신던 고구려 시절, 범민 서인들은 거무스름한 주
황빛의 거치로 굵은 베옷 갈의를 입었다. 그래서, 너절한 옷을 입은 천한 사람
을 불러 갈부라 했다. 이렇게 색을 엄중하게 세워 규제하는 것은, 입은 옷만이
아니라 일상에 쓰는 보자기에 까지 적용되었는데. 조선의 태종 8년에, 전사재감
이진이라는 사람이 일이 있어 한양으로 입경할 때, 데리고 가던 그의 노복이 황
색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사헌부의 하금 이속 김을지가 그 보자기를
빼앗으려고 덤벼들었다. 당시에 황색은 중국 천자의 전용 색깔이라 하여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때문이었다. 관아의 일개 아전에 불과한 김을지가 조정의 조관인
이진의 종이 들고 있는 보자기를 내놓으라 고함치는 것을 보고, 같이 있던 사윤
김조가
"무엄, 방자하다."
고 크게 나무라며 그를 꾸짖었으나
"법이 더 지엄하오이다."
하며 끝내 물러서지 않고 버티었다. 행인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김을지와 실랑이
를 하던 이진, 김조는 결국 노복조차 보는 앞에서 봉변만 당하고 하릴없이 보자
기를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 일이 위에 알려져, 두 사람은
"금령을 어겼다."
하여 각각 평주와 수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을지는 하급 이속으로서 감
히 조신을 모욕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 멀리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육십
년이 지난 예종 원년에는, 서민이 붉은 물 들인 옷과 붉은 물 들인 보자기를 입
고 쓰는 것을 금하는 영을 내렸다. 그러다가 세종 28년 의정부가 복색을 어찌
정하여야 할 것인지 조정에 상계한 것을, 집현전에서 말하기를,
"대홍색 염색은 값이 비싸 민간에서는 갖추기 어려우나, 혼례지가와 대소,남녀
는 서로 다투어 대홍색 의상을 착용하고, 가난한 사람까지도 이를 따르고 있으
므로, 일품벼슬부터 유음자제의 복장이나 부녀자의 속옷, 그리고 그 외에도 홍
색 겉옷 착용을 금하고, 대소,남녀 의상에도 금하고, 의복 속에 단목으로 염색
한 소홍도 금하게 한다."
하였다.
그런데도 사대부에서부터 말단 이속의 천인에 이르기까지 홍색 옷을 좋아하여,
점차로 홍색 입은 사람은 늘어만 갔다. 홍색 중에도 그 빛이 투명하면서도 깊고
선연한 색을 내는 홍화색은, 누구라도 소원을 하는 색 중의 색이었다. 홍람이라
고도 하며 홍화라고도 하고, 그냥 잇꽃 혹은 이시라고도 하는 붉은 꽃, 여름이
면 주황색 꽃을 가지마다 줄기마다 피우는 이년초 국화인 홍화를 따서 만드는
이 홍화색은. 꽃잎을 도꼬마리 잎으로 덮어 구더기가 나도록 삭혀서 말린 다음,
항아리에 연수를 붓고 여기에다 말린 홍화를 넣어, 짧게는 너댓새, 아니면 오래
둘수록 좋은 물이 우러나오니 길게는 두어 달 가까이 담그어 두었다가, 그 꽃물
을 고운 체나 무명 겹주머니에 밭쳐, 위에 떠오르는 누런 빛깔의 황즙을 걷어
낼 때, 끓는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황미를 완전히 제거해야 붉은 빛만 걸러지는
홍화색. 그러나 그것은 아직 홍화색이 아니다. 명아주나 쪽풀 대궁 혹은 홍화줄
기를 태운 재나 콩깎지 재의 깨끗한 재즙을 꽃물에 넣어, 첫물은 빼버리고, 다
시 끓인 맹물을 부어 따로 받았다가. 두 번째 재즙을 칠 때에만 비로소 고운 홍
색이 나온다. 여기에 다시 또 끓인 맹물을 넣어 홍색을 만드는데, 아직도 한 번
더 재즙을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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